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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 정호승 <꽃을 보려면> 

 

--------  

'점자나라' 62호 표지에는 흑백의 벚꽃이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벙글어져 있다.
그리고 이 시!
칼을 버리면
인내하며 더 깊어진
꽃이 피어서 들어온다.   
보지 않으려 눈감았던 그것이 아프다아프다 피어있다.

요즘 '은교' 편집 중이며 라즈니쉬의 '숨은 조화'를 끝부분 녹음중이다. 
우리 집에도 있는 아주 오래된 누런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가 박인 책이다.
대구에 사는 회원의 신청 도서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 분은 전에 '피타고라스 강론'도 신청한 60대 남자분이라는데  
라즈니쉬에 심취한 분 같다.
전에 그 도서(1,2권)를 내가 녹음했었는데 이번에도 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해서 기뻤다.
시력을 잃기 전 오래전에 읽고 집에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다시 귀로 읽고 싶어 신청을 한단다.
'숨은 조화'는 헤라클레이토스 강론이다.
대우주의 전체성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조화로운 삶을 의미하는데
녹음 중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 아주 많다.

"모든 불행은 그대가 상궤를 벗어나 어디론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존재한다.
즉시 돌아오라, 그대의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본질과 내면적인 존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그대는 더욱더 행복해진다.
본질의 소리를 잘 듣도록 하라.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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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28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바뀌려 하지 않고, 나는 마음을 열 준비조차 하지 않고...세상을 향해 삿대질을 할때가 있어요.
불행을 통해 강해지고, 불행을 통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을...행복해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1-04-28 09:42   좋아요 0 | URL
아참참,,,감기는 좀 나으셨어요?^^
서울은 쾌청이랍니다.

프레이야 2011-04-28 14:50   좋아요 0 | URL
감기는 다 나은 거 같아요. 고마워요.^^
오늘 말을 좀 많이 했더니 목이 좀..
요사와 법정의 책도 빌려오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이었어요.
양철댁님 오늘 햇살이 참 좋아요.
변화를 줄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지요.
나 이외의 누구도 내가 변화시킬 수 없겠지요. 그것이 운명이고 그것이 진실일 거에요.

무스탕 2011-04-2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음을 해 주실분을 신청도 하는군요. 그런 부탁을 받으면 힘들어도 안 하실수가 없겠어요 ^^;
라즈니쉬니 피타고라스니, 이런건 눈으로 읽으며 머리로 생각해도 참 막막한데 듣는것 만으로 정리를 해 나가시는 분들, 참 대단하세요!

프레이야 2011-04-29 09:11   좋아요 0 | URL
좀 딱딱한 책인데 피타고라스강론을 그 앞에 제가 한 걸 듣고
그 낭독자가 이번에도 해달라고 하셨다네요.^^ 좀더 잘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세상의 존재는 이어져있네요.
눈을 감고 들으면 오히려 듣는 것에 집중되어 내용이 쏙쏙 들어올 수 있어요.^^
 

 여느 때처럼  토요일 5시 기숙사에서 일주일을 보낸 큰딸아이를 데리러 간다.
오늘은 바람이 매섭다. 꽃샘추위도 물러간 것 같은데 바람이 마지막 시샘을 부리나.
산 아래 바람이 더 싸늘한 학교 운동장에 차를 대고 라디오를 들으며 아이를 기다린다.
오늘은 좀 준비할 게 있는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문자가 온다.
하얀 얼굴에 캐리어를 끌고 커다란 가방은 어깨에 매고 또 다른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내려오는 게 미러로 보인다.
차에 타자, 3월 학력평가에서 전교2등 했다고 말한다. 아주 잘 했다. 유지를 잘 해야겠지,는 아이가 먼저 한 말.^^
얼마전 텝스도 930 받았다.(팔불출 엄마 또 나온다)
7개월 정도 남았는데 끝까지 체력관리 잘 하고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EBS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고 마음에 드는 문구들을 사자고 해서 아이가 잘 가는 시내 팬시점에 간다.
횡재다. 손택수 시인의 낮고 진지하고 온기있는 목소리가 나온다. 시집 '목련전차'만 읽었고 목소리는 처음이다. 
어느 날부터 집앞 나뭇잎을 3개월 간 하루도 빠짐없이 봤단다.
그러면 어느날 나뭇잎이 말을 걸고 그 말을 글로 쓰면 시가 된다는... 
꾸준히 관찰하면 사랑이 생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시가 된다는...  

위에 옮긴 '방심'을 손택수 시인이 음악과 함께 직접 낭송한다. 아, 참 좋구나.
마음도 놓아버리면 숨구멍이 트이는 것을. 

'방어진 해녀'도 낭송하는데 꾸밈없는 시어들이 팔딱인다.

뒤이어 황인숙 시인이 나온다. 놀랍다. 내가 생각했던 목소리가 아니다. 너무 예쁘다.
그런데 편안한 음색이 아니라 어딘지 불편하다. 한참 생각하다 말을 꼭꼭 씹어서 조금씩 내뱉는 듯.
목소리만으로 다 알 수 없는데 편견이겠지싶다.
고양이를 3마리나 키우고 길고양이를 먹이기 위해 먹을거리를 가방에 늘 넣어다닌다는 특이한 시인이다.
배고파 보이는 비쩍 마른 고양이를 만났는데 줄 게 없으면 가슴이 아프다고... 
조근조근 그녀의 시낭송을 듣는 건 좋은데, 사회자가 너무 촐싹대는 바람에 딸애가 다른 데로 돌리자고 은근히 조른다.
배캠으로 돌리고 집을 향했다.


아파트에 들어서니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벚나무 꽃망울들이 터지기 시작한다.
양지의 벚나무는 이미 만개했구나.

 
  --------------        

                       

                                    방심(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펌: 문태준 시인의 글) 


'마음을 놓다'라는 말, 참 오랜만이다. 마음을 풀어 놓아 버린 일 얼마나 오래되었나. 마음 졸이며 염려하고 살아왔을 뿐. 시인은 대청마루에 큰 대(大)자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마음과 몸을 느슨하게 하고서. 바다처럼 편편하고 넓게 퍼져서. 그런데, 스윽, 칼날이 지나가듯 제비가 공중을 한 층 횡으로 서늘하게 자르면서 지나간 모양이다. 손가락을 퉁기는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기습처럼.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민첩한 한 줄기 바람으로.

집과 나의 중심부를 뚫고 지나갔으니 급소(명자리)를 맞은 듯 어이없고 어리둥절해서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얼마나 시원한 것인가. 체증(滯症)이 가신 듯했을 것이다. 마음을 꼭 붙들어 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마음을 사방으로 허술하게 경계 없이 풀어놓는 것으로서 우리는 마음의 열림을 얻기도 한다. 그것이 무방비의 미덕이다. 좀 게으르게 혹은 별 준비 없이 멍청하게 있다가 한번쯤 당해보기도 해보라. 그런 당함에는 오히려 소득이 있다. 마음의 앞뒤 문을 다 열어놓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을 볼 수 있었겠는가. 마음을 조급하게 각박하게 쓰느니 차라리 이처럼 마음에 장애를 아예 만들지 않음이 오히려 '심심(深心)'이요, '정(定)'에 가깝다.

손택수(38) 시인은 긍정심이 아주 많은 시인이다. 다른 존재들의 '빛나는 통증'을 그의 시는 받아 안는다. 그의 시는 그가 어렸을 때 그곳서 자랐다는 전남 담양 강쟁리 마을을 배경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곳 마을 사람들의 천문(天文)적인 상상력은 그의 시에 들어와 크게 빛을 발하면서 그만의 새로운 서정을 만들어낸다.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 눈이 올랑갑다"('가새각시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와 매달 스무 여드렛날은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달과 토성의 파종법')이자 "땅심이 제일 좋은 날"이라며 밭에 씨를 뿌리러 가던 할머니의 상통천문(上通天文)이 자주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콧구멍에는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혼쥐로 살고 있다는 믿음, 임신한 몸으로 시큼하고 골코롬한 홍어를 먹으면 태어날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진다는 믿음 등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 마을에서 자연 발효된 이런 금기사항은 우리 시에서 어느덧 희귀해진 것이어서 각별하고 값지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안마시술소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 안마시술소 맹인들에게 시를 읽어주면서 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시영 시인은 그를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고향의 기억'을 잊지 않는 오랜만의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역린(逆鱗)'을 생각한다.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있다고"('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하는데,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인 역린을 생각한다. 그의 시에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생(生)을 펄떡이게 하는, '뽈끈 들어올려주는' 힘이 있다. 시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원군(援軍)은 역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문태준, 시인) 

 (펌)

---------- 

 


방어진 해녀

                                손 택 수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래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마터면 정신나간 여잔가 했더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하다 잠잠해진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하아, 하아-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나오는 해녀,
내 놀란 눈엔 글쎄 물 속에서 방금 나온 그 해녀
실팍한 엉덩이며 볼록한 가슴이 갓 따 올린
멍게로 보이더니
아니 멍기로만 보이더니
한 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
멍기 있나, 멍기- 수평선 너머를 향해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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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0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오늘 제게 필요한 페이퍼. ㅠㅠ
지금 온라인 수업 들으며 몸을 뒤틀다 읽습니다.

언니, 가끔 세상이든 알라딘 서재든 경쟁으로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때는 그냥 다 놓고, 홀랑 도망가버리고 싶어요. 또는 그냥 다 놓고, 큰대자로 뻗어버리고 싶습니다.
다른 분 서재의 낮술 타령으로 인해, 저도 맥주 한 잔 하렵니다. 그런 일요일 오후네요~

프레이야 2011-04-03 13:58   좋아요 0 | URL
일욜 공부하고 있군요. 울마녀님 힘내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구요.
경쟁으로 느낀 적 전 별로 없지만 때론 내 마음과 달리 돌아간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면
허탈해요. 근데 사실 마음은 제각각 다 다른 게 정상 아닌가.. 그냥 인정하면 마음 편하겠죠.
전 낮술 대신 커피 한잔 진하게 해요 지금. 왠지 가슴이 답답한 게 숨구멍이 막혀요.
방심, 참 좋지요.^^

순오기 2011-04-03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처럼 멋진 글을 쓸 순 없지만, 손택수 시인은 내가 아주 좋아하지요, 그의 시는 더욱 좋고요!!
손택수 시인 70년생이니까 현재는 38살보다 더 많아요~ ^^

프레이야 2011-04-03 19:14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목련전차 고마워요.^^
네, 맞아요. 38살, 저 글은 문태준시인의 글이에요. 옮겨왔지요.
손시인은 실천문학사 신임대표가 되었더군요. 목소리가 부담없고 편안했어요.

순오기 2011-04-04 21:18   좋아요 0 | URL
실천문학사에서 2010년 6월에 <나무의 수사학>이 나왔는데, 주간으로 인쇄돼 있네요.
그 이후 대표가 되었군요~ 축하할 일이네요.
대표가 되면 아내에게 단풍나무 빤스를 입히지 않아도 되겠죠.ㅋㅋ

아~ 여기에 큰딸 이야기가 나왔는데, 축하 멘트가 빠졌네요.
대견한 딸, 고슴도치 엄마해도 괜찮아요~ 그럼요, 이런 건 자랑해도 되지요.^^

2011-04-04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4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1-04-05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 기특하네요. 전교 2등에 텝스 930점이라니... 축하드려요, 그리고 참으로 부럽습니다^*^

'방심' 제목의 절묘함이라니...순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미소가 지어질거 같아요.
숨구멍이란 숨구멍 모두 확 열어졎히고...아 시원해라!!

프레이야 2011-04-05 10:30   좋아요 0 | URL
시 참 좋지요?
뻥~ 시원해요. 세실님 힘 주셔서 고마워요^^

blanca 2011-04-05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레이야님 글 중 차를 '대고' 이 문구에 또 집중하고 읽었어요^^;; 저 어제 처음으로 아이를 태우고 병원에 갔다 주차장에 또 원하는 곳에 못대고 엉뚱한 곳에 넣어버리고 도망나왔거든요--;; 전화오면 어쩌나 계속 노심초사하면서요 ㅋㅋ 따님! 우아! 완전 부러워요. 제 딸의 미래가 되기를 고대해 보며 아름다운 시들도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1-04-05 10:32   좋아요 0 | URL
저도 주차 아무 데나 하다가 끌려간 적도 여러번 있고 위반딱지도 여러번 날아오고 그랬어요.
노심초사하다 전화도 받은 적 여럿이구요.ㅋ
이런이런 제가 좀 그래요. 범칙금 비싼 데 정말 조심해야돼요.ㅎㅎ
귀여운 고집이 있는 분홍공주의 미래, 환하고 멋질 거에요.

느티나무 2011-04-14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현력?? 이것 저것 따지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마음은 끌리는데로 움지여지는것 같아요
말 안해두 아는 오랜 벗처럼... 그사람 눈빛 언행 마음만 보면 다 알수 있는것처럼...
프레이야님 서재는 그냥 편해요 머리 속에 쏙 쏙 들어오고 꼭 내 얘기같고 표현할수 없던말들도 정감있게 들려요
올만에 들어와서 좋은시 읽고 가네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홧팅^^
 

 기쁨이여 

 

슬픔이여,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적 없었던
슬픔이여
찬물에 밥 말아먹고 온 아직 밥풀을 입가에 단
기쁨이여
이렇게 앉아서

내 앉은 곳은 달 건너 있는 여울가

내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는 믿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물은 적이 없던

찬 여울물 같은 슬픔이여,
나 속지 않으리,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을 맞이하는데
나 주저하지 않으리

불러본다, 기쁨이여,
너 그곳에서 그렇게 오래
날 기다리고 있었는가,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나는 바라본다, 마치,
잘 차린 식사가 끝나고
웃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이여  

 

-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중

 

눈을 본 지 아주 오래다
내일모레 설날에도 눈을 보기 어려울 거다
아주 오래 해 전 3월에 폭설이 내렸다
세상은 순식간에 낯선 곳이 되고
어안이 벙벙한 나는 발 둘 곳 몰라 허둥거리다
아이의 작은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 옴팡한 시간 속에 고스란히 나를 담는 일만 있는 듯했다
눈을 본 지 아주 오래다
그러고 보면 아주 오래된 것들이 적지 않다 
어제 그저께도
아주 오래 전의 일만 같다
때론 시간은 역순이 아닌가 싶어 나는 작은 씨앗이 되어 눈발마냥 흩날린다
거슬러갈 수만 있다면
3월에 눈이 오고,
봄은 멀고 겨울은 끝나지 않았는데
차라리 겨울의 겨울로 거슬러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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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2-02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이 슬픔을 안겨줍니다.
님이 눈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전 가끔 바다가 그리워집니다.
올 겨울 눈 많이 왔는데 부산은 아니었군요.

님 편안한 설 명절 되세요.

프레이야 2011-02-05 20:28   좋아요 0 | URL
세실님, 여긴 눈 대신 바다를 매일이라도 볼 수 있으니 좋아요.^^
못 가진 것보다 가진 걸 먼저 생각해야되는데 말에요..

반딧불이 2011-02-0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께는 눈이 귀하군요. 올해 서울엔 눈이 제법많이 왔고, 최근 일본에는 4m가 넘는 눈이 내렸다는데 말이에요. 눈이 많이온다고 왜 이렇게 춥냐고 투덜거렸는데 프레이님의 그리움앞에서 갑자기 부끄러워집니다. 명절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셔요.

프레이야 2011-02-05 20:29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그리움만으로도 나쁘지 않아요.^^
입춘 지나고 어제 오늘 제법 포근하네요.
 

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자명한 산책] 중

 

김형경이 '사람풍경'에서 의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인용한 황인숙의 시 '강'의 전문이다. 

사랑이나 우정의 가면을 쓰고 행하는 상호의존 혹은 공의존 관계,
그런 방식은 서로 병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여서 두 사람 모두에게 위험한 관계였다고,
그런 관계에 고착되면 내면의 좋은 성향을 발현시킬 수 없고, 성장을 향해 노력할 수 없고,
내 삶을 추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끝에서 피면담자가 느끼는 감정에 '고립무원의 느낌'이 있다고 한다.
"아무한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의존성이 극복되는 지점, 우리가 진정으로 독립할 때 맞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 [사람풍경]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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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0-11-0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잘 읽었습니다. 라깡선생님도 황인숙 시를 좋아하나 보군요

프레이야 2010-11-09 23:09   좋아요 0 | URL
자명한산책님 오랜만이에요.
라캉 선생도 강에서 만나면 우리 모른 척 하자, 이러며
네힘으로 굳건히 서라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거에요.ㅎㅎ

blanca 2010-11-10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풍경>을 펼치면 줄이 좌악좍 그어져 있어요^^;; 고립무원, 맞아요. 이 대목에도 줄을 그었던 것 같아요. 의존은 사실 친밀함이 아니라 결국 관계가 어그러지는 지점이 되는 것 같아요...황인숙님의 시가 참...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 주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0-11-10 01:08   좋아요 0 | URL
밑줄 좍좍 정말 그래요. 맞아그래 이러며요.
홀로 독립성을 지킬 수 있을 때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합당하고 일그러지지 않을 것 같아요.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나 가서 말하라죠.
사람은 믿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죠.

꿈꾸는섬 2010-11-1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풍경>을 꼭 읽어야겠네요.^^

프레이야 2010-11-11 17:26   좋아요 0 | URL
김형경은 정신분석을 받았대요.
스스로도 어떤 땐 일그러져 있다고 느껴지는 내면의 정체와 뿌리를
알게 해주는 책이에요. 조근조근 나직하게 이야기하더군요.
 

치명적인 너무나 치명적인  

  

 

여자의 자궁이 연상되는,  

 

- 루프스는 자가면역질환으로 전신성 홍반성 낭창이 
라고도 한다 루프스와 같은 자가면역질환은 바이러스,
세균 등의 항원에 대하여 항체를 만드는 면역체계가 무
너진 것을 말한다 외부의 침입자인 항원과 자기자신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항체를 만
드는 것이다 자기항체라 불리는 이것은 자기자신의 항원 
과 작용하여 면역복합체를 형성하는데 이 면역복합체는
조직에 축적되어 염증, 조직손상, 통증을 유발한다 피부,
관절, 혈액과 신장 등 각 기관과 조직에 만성적인 염증을
일으키며 때론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이 병의 원인은 확
실하게 밝혀진 바 없다 대다수가 여자이며 그 이유와 증
상의 주기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설명이 불
가능하다 

설명이 안 되는 이 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7년이
걸렸다 언제 당겨질지 모르는, 관자놀이를 향해 장전된
총구 치명적인 너무나 치명적인, 그 한 발  

 

* 루프스를 앓고 있는 모든 여성과 함께하며, 부디 용기를 내고 건강하기를 

 

-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 중 

 

최윤희님의 죽음에 같은 병으로 2003년 고인이 된 최영숙 시인의 시집을 다시 들춰보게 된다.  
시인은 질병을 생의 은유로 여겼는데, 수잔 손택은 질병은 단지 질병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질병을 덮어씌운 은유를 걷어내고 질병 자체를 직시하라고 충고한다.
사람은 질병을 이겨내고 싶은 마음과 의지를 갖고 있고 그걸 발휘하려는 건 자연스러운 내면의 힘이다.
그러나 고통을 이겨내는 내면의 '생명력'을 압도하는 지극한 슬픔과 공포가 어떤 것일지 감히 짐작해본다.
시의 마지막 3연, 그녀들의 고통과 두려움이 감히 짐작되는 느낌이다.
나는 아직 건강한 육체를 지니고 하루하루 감사할 일이 많은 사람으로 살고 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더라는 경험을 한 건 어느덧 오래 전 일이다.
더 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게 된 자의 고통은 희미하나마 출구가 보이는 자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테다.
전부터 생각해온 장기기증을 구체적으로 당장 실천에 옮기기 위해 루트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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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0-10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가면역질환, 저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경우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후천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군요. 그것도 특히 여성에게.
저는 가끔 느닷없이 제가 지금 어디가 크게 아프지 않은 상태라는 것에 휴~ 안심하며 얼마나 다행인가 싶을 때가 있어요. 마음도 이렇게 물러터져서 몸도 성치 않으면 어떻게 버틸까, 그런 상상을 하면서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의 고통, 저도 감히 짐작 간다 말을 못하겠습니다.

프레이야 2010-10-12 03:07   좋아요 0 | URL
네, 나인님. 살아가면서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게 적어지는 거 같아요.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꼭 그런 것만도 아니고 독선이나 아집, 나아가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구요.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
특히 타인의 행동에 이해가 되지 않아도 비판보다 연민부터 느껴보는 게 나쁘다고 생각되진 않아요.
나약한 사람이니까요, 우리 모두.
고통이라면... 저처럼 참을성 없는 사람은 정말 자신없어요.

라로 2010-10-1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말을 잃었어요...
좀 더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봐요.
장기기증에 대한 생각,,,멋져요!!

프레이야 2010-10-12 03:08   좋아요 0 | URL
나비님, 울컥~~
저도 지금의 저한테 고마워할게요.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도요.^^

2010-10-11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10-12 03:14   좋아요 0 | URL
저도 그거 보고 그랬어요. ㅠ
참 안타깝더군요.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나라면 어땠을까, 다른 생각들도 참 많구나...
주말은 아이들과 좋다가 짜증나다가 또 달래주다가 지냈고,
오늘 어이없이 정신적 손상 당한 일도 있었지만 제가 이해하고 참아주기로 맘 먹었어요.
그래도 저 결정적으로 진짜 화나면 완전 겁나는데...ㅠ
제 마음도 좀 헤아려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자만감보다 더 위험한 건 열등감인 거 같아요. 모두가 불쌍한 존재들이죠, 저를 포함해서.

blanca 2010-10-1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맞아요. 심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더하다고들 과장하지만 정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아픈 사람들...제발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2010-10-12 03:18   좋아요 0 | URL
네, 블랑카님 동의해요. 정신이 우위에 있다는 그건 관념일 거에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전 견뎌낼 자신이 없어요. 제발 아프지 않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불행한 일이 닥치면 또 견뎌내려고 최대한 애쓸 거에요. 하지만 장담은 못해요.
남에게 그러라고 말할 자신도 없어요. 물론 용기는 불어줘야겠지만 강요할 순 없어요.
존엄사, 그게 모든 이의 소망이겠죠.
중세, 페스트균보다 더 무서웠던 건 페스트균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였다고 하죠.
오늘을 두려움 없이 살고싶어요.

순오기 2010-10-12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 하루 감사하며...

자하(紫霞) 2010-10-12 08: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프레이야 2010-10-12 22:45   좋아요 0 | URL
네, 언니^^
베리님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