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기원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8
줄리언 제인스 지음, 김득룡.박주용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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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블로그에 이 책의 조회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무슨 이유때문일는지.

 

다른 지면에서 말했지만 요즘 나의 관심은 의식이다. 의식이 도대체 뭘까. 이 책의 주장은 다소 충격적이다. 여태까지 우리가 이해했던 의식에 대한 관점들 대부분이 기각된다. 줄리언 제인스는 의식이 사유에 꼭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실험은 이렇다. 다른 양의 물이 채워진 물잔을 앞에 놓아둔다. 물잔을 들고 있는 나를 의식하면서 물잔을 들어보자. 자 두 개의 물잔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 저자에 따르면 어떤 물건이 다른 물건보다 더 무겁다는 판단 행위는 의식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사유과정은 의식되지 않는다.

 

의식은 이성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창의적 생각이 일어날 때는 어떤 단계들이 있다. 첫째 의식적으로 문제와 씨름하는 준비 단계가 있고, 그 다음에는 아무런 의식적 집중을 하지 않은 채 놔두는 부화단계, 마지막으로 조명 단계로서 추후에야 논리적으로 정당화되는 단계가 있다. 가우스, 푸앵카레, 아인슈타인의 사례처럼 어떤 아이디어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현 듯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의식은 그럼 어디에 있는가. 머릿속에? 심장 위에? 의식이 신체 밖에 있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다양한 이상 심리사례들이 있다. 유체이탈이 그러한 예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의식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의 논의를 따르자면 도대체 의식은 존재하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의식의 특징

 

1. 공간화

 

누군가 지난 100년을 생각해보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까. 우리는 대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정신-공간에서 사유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의식은 언제나 하나의 공간화다.

 

2. 발췌

 

의식에서 우리는 어느 것을 있는 그래도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 속에서 보기는 실제 행위의 한 유사로, 실제 행위에서 우리는 어느 한 순간에 사물의 오직 한 부분만을 보거나 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사물을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알게 된 그 사물의 여러 측면들 가운데 가능한 한 모든 것에서 발췌를 수행한다....실제는 우리는 결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서 만든 발췌를 의식하는 것이다.

 

3. 유사 (I)

 

유사 는 우리가 실제로는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상상속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다닌다’. 우리는 상상의 세계에서 행동하고 있는 상상의 자아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상상의 결과에 근거하여 결심을 내리게된다.

 

4. 은유로서의 ’(Me)

 

우리는 상상의 자신 내부에서 상상의 경치를 내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몇 발자국 뒷걸음치기도 하고 어떤 개울에 엎드려 물 한 모금을 마시기도 하는 자신을 볼 수도 있다.

 

5. 이야기 엮기

 

의식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는 자아가 항상 우리 삶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본다....우리 행동에 원인을 부여하거나 왜 우리가 특정한 일을 행했는지 말하는 것 등은 모두 이 이야기 엮기의 한 부분이다.... 의식은 무언가를 하고 있는 우리를 보게 되면 언제나 그것을 설명할 태세가 되어 있다. 도둑은 자기의 행위를 가난 때문에 일으킨 행위라고 서술할 것것이며, 시인은 자기 행위를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과학자는 진리 때문이라고 서술할 것이다. 의식 속에서는 목적과 원인이 행동의 공간화 속으로 혼란스럽게 뒤엉키며 짜맞추어진다.

 

6. 조정 (concillation)

 

동화assimilation란 지각된 대상의 정체가 다소 불분명할 때, 그 대상을 이전에 학습한 어떤 도식에 부합하도록 하는 자동적 과정을 일컫는다. 새로운 자극은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우리의 개념이나 그 개념에 관한 도식으로 동화되어버린다. 우리는 결코 사물을 순간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보고나 듣거나 만지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세계를 지각할 때 이전 경험으로의 이 동화과정은 언제나 지속된다. 우리는 사물을 이미 학습된 도식에 근거하여 인지 가능한 대상으로 묶는다. 이 의식화된 동화가 조정이다. 이야기 엮기가 사물을 묶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듯이, 조정은 사물을 묶어 의식적 대상으로 만들어낸다.

 

줄리언 제인스는 우선적으로 의식의 특징을 위와 같이 제시한 이후에 의식에 대한 대담한 주장을 펼쳐나간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언어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다소 황당할지언정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고고학, 문화학, 역사학의 자료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다.

 

저자는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겐 일반적으로의식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었을까

단지 목소리가 있었을 뿐이다.

 

양원적 정신

 

저자는 이 미케네인들의 정신 구조를 우리의 주관적, 의식적 정신과 구별하여 양원적 정신(bicameral mind)이라 부른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환각적 목소리에 복종한다. 양원적 정신에 유사한 현상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환각이다.

 

저자의 실험에 따르면 실험 참가자들에게 우반구 베르니케 영역을 자극하면 많은 참가자들이 목소리혹은 음악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양원적 정신에서의 신의 목소리를 의식이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의 목소리를 의식이 대신했던 것일까.

 

ka카와 ba

 

저자는 고대 이집트의 정신구조를 카와 바로 구분한다. ka카는 흔히 정신, 혼령, 원령, 생명력, 자연, 행운, 운명 등으로 번역된다. 저자는 카의 용법을 분석하여 - ‘나는 그의 카가 원하는 일을 했다’, ‘내 카는 왕의 것이다’- 카를 음성인격으로 해석한다.

 

그에 반해 ba바는 귀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까운 것으로 시각적 환각으로 나타난다.

 

의식의 원인

 

국가들 간의 교역이 증대대면서 신적 권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문자의 발명으로 신의 목소리를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신과 인간의 협력관계는 점차 느슨해졌고 예상치 못한 자연 재해는 신의 권위를 무색케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180년과 1170년 사이에 발생한 화산 분출은 키스로스, 나일 강 삼각지, 이스라엘 해안을 포함한 지중해 전역을 강타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단 하루 만에 난민으로 전락했다. 이로써 거대한 이주와 정복 전쟁이 시작된다.

 

양원 정신의 붕괴

b.c 2000년 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석판의 내용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나의 신은 나를 버리고 사라지셨다.

나의 여신은 나를 돌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

내 곁에서 걷던 선한 천사도 떠나버렸다.

 

양원적 정신은 붕괴되었다. 신들은 인간을 떠나버렸다.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인간은 점술, 제비뽑기, 복점 등을 통해 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리스에선 최초로 영혼이 발명된다. 사이키는 일리아스에서 단지 생명력만을 뜻했다. 그러나, 이제 사이키는 단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 멈추고 난 뒤에 존재하는 무엇을 일컫는 말이다. 헤로도토스는 피타고라스가 이집트에서 배워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무튼 사이키가 영혼이 되면서 죽음, 또는 시체를 뜻했던 soma는 이제 신체를 뜻하게 된다.

 

저자는 이제 카비루를 탐사한다. 기원전 8세기 <아모스서>에서는 정신, 생각하다, 느끼다, 이해하다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기원전 2세기의 작품인 <전도서>에서는 의식의 두드러진 특징들이 나타난다.

 

창세기의 엘로힘Elohim은 복수 명사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 엘로하(elohah)의 복수형이다. 저자에 따르면 엘로힘은 양원정신의 음성 환상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다. 창세기는 양원정신의 붕괴에 관한 신화로 볼 수 있다. “너희는 엘로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뱀이 약속하는 것은 오직 주관적, 의식적 인간의 역량이다. 선악과를 먹고 그들은 자기가 알몸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관찰적 시각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바하는 자 나비임. 그리스어 예언자에 해당하는 말로 잘못 번역된 히브리어 나비는 흐름과 밝아짐에 관련되어 있는 어원군에서 나왔다고 한다. 나비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흘러나오는 자또는 언설이나 환상이 용솟음치는 자. 그들은 과도기적인 사람들로서 부분적으로는 주관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양원적이었다.

 

현대에 들어 양원성의 가장 직접적인 잔재는 신탁이다. 그리스의 신탁은 양원정신이 붕괴된 이후 무려 1,0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신탁에서 여사제는 신들림 현상을 보여준다. 여사제들은 시와 노래로 신탁을 말했다. 시적 영감 역시 일종의 신들림이다.

 

보다 최근의 최면, 정신분열증에서의 환각 역시도 양원성의 잔재로 해석할 수 있다.

 

 

줄리언 제인스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의식은 모두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로 생성되고 언어로 접근된다.”

 

그의 주장에 어떤 반론이 가능할까. 언어의 매개 없이 의식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는걸까.

 

처음에 그가 제시한 예로 돌아가보자. 두 개의 물컵이 있다. 어느 쪽이 무거운가? 그에 따르면 이런 판단을 내릴 때 의식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유 표현을 고를 때 의식은 작동하는가? 의식의 특징이 정신- 공간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언어 역시 정신-공간 안에서 표상하는가?

 

제인스는 양원적 정신의 형태로서의 신의 목소리를 의식이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 대체했다고 볼 순 없을까. 우리가 행동하기 전 0.5초 전에 뇌활동이 발생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뇌 활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무의식의 작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또한 의식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그렇다면 의식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학자들 주장처럼 의식이 단지 뇌의 활동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의식의 기원>은 의식에 관한 손에 꼽히는 흥미로운 책이 될 것임에 분명하지만 여전히 의식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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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2017-03-02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조회수가 늘어난 이유는 팟캐스트 지대넓얕에서 김도인씨가 주제로 다뤄서 그렇습니다ㅎㅎ

시이소오 2017-03-02 09:41   좋아요 1 | URL
아. 그런일이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수평선님. 저도 들어보고 싶네요 ^^

samadhi(眞我) 2017-03-03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아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잘못. 가짜라는 말과 통하는 듯도 합니다.

시이소오 2017-03-03 20:37   좋아요 0 | URL
역시 진아님 다우신 댓글입니다 ^^

samadhi(眞我) 2017-03-03 20:39   좋아요 0 | URL
헉. 저답다는 게 뭔지 ㅋㅋㅋ 괜히 키득거려봅니다.

시이소오 2017-03-03 21:30   좋아요 0 | URL
진아,의 측면에서 아로부터 유래하는 무언가는 다 거짓이 아닐까요? ㅎㅎ

samadhi(眞我) 2017-03-03 21:35   좋아요 0 | URL
아 제 아이디 말씀하신거구나 ㅋㅋㅋ 네. 나는 없다 뭐 그런 거죠. 내가 믿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허상이라는 것

시이소오 2017-03-03 21:41   좋아요 0 | URL
나가 없는데 나의 의식이 있을순없을테니까요 ^^

우빠사마 2019-03-20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어도단, 멸진정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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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했으나 읽지 못한 한국 소설이 있다면? 여러 대하소설들이 머릿속을 스쳐가지만 장편 소설 한권을 뽑으라면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역시나 재밌군. 역시 박민규야’, 하고 읽어 갔다. 책을 덮고 나서는 만족감보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왜일까? 위가 꼬이는 듯한 느낌의 이유는 뭘까?

 

작가로서의 톨스토이는 경배하지만 인간으로서의 톨스토이는 경멸한다. 톨스토이는 인류에 대한 사랑

을 외치지만 자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박민규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박민규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못생긴 여자에 대한 사랑을 그린다. 그렇다면 작가는 못 생긴 여자를 사랑했었나? 혹은 사랑할 것인가?

 

세상의 모든 남자와 마찬가지로 저는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또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한다 해도 잔인한 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 p415. 작가 후기.

 

작가의 고백대로 박민규는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작가가 그린 소설속의 주인공은 왜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걸까.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조차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야기를 소설로 형상화하는 게 과연 작가로서 할 짓인가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에 눈곱만큼도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독자인 우리(특히나 남성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을까.


가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게 된 동기가 있나?

 

.....없다. 물론 박민규는 잘생긴 아빠에게 버림받은 못생긴 엄마라는 밑밥을 깔긴 하지만, 그렇다고 못 생긴 여자들을 봐왔지만 나는 그녀처럼 못 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할 만큼의 국가대표급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핍진성이 없다. 전혀 그럴듯하지 않다, 는 말이다. 아무리 판타지라도 작가가 창조한 세계 안에서 이야기는 납득 가능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판타지도 아니다.

 

영리하다고 해야할지, 비열하다고 해야할지.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나는 첫눈이 오는 날 그녀를 만난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을 듯 포근히 내리는 눈, 반짝이는 <산토리니>의 크리스마스 조명 불빛, 벽난로에서 장작은 타닥타닥 타오르고, 빙 크로스비의 캐롤 송, 미술에 해박한 가느다란 목소리의 그녀......

 

독자에게 청순하고 지적인 그녀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놓고, 박민규는 3장에서야 그녀는 못 생겼다고 말한다. 어떻게 못 생겼는데? 알 수 없다. 독자인 우리는 못 생긴 그녀를 상상할 수 없다.

 

못 생긴 여자를 호의로 만날 수도, 동정으로 만날 수도, 연민으로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랑으로 만날 수는 없다. 그건 작가가 말했듯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잔인한 진실이다.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 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 해. ”

 

p122.

 

여성 독자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박민규의 이 소설을 까는 건 짚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짓이라는걸 나도 안다. (여성 이웃분들의 반응이 두려워라.) 그러나,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여성 독자의 호감을 사기위해, 작가조차 진실이라 생각하지 않는 이야기를 진실인 듯 위장했다면 그건 위로기는커녕 경멸이고 능욕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온통 거짓이다. 위선이고 위악이다. 따라서 주인공 가 사랑하는 이름도 없는 못 생긴 여자의 캐릭터는 흐릿하거나 전형적이다. 이 소설을 유일하게 지탱해준 인물은 요한이다. 요한 빼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겠는가? 그런 요한이 중반부터 중언부언한다. 전반부의 재기넘치던 요한은 온데간데없고 잔소리만 늘어놓는 노땅 요한이 등장한다. 그러자 박민규는 요한을 빼는 결정을 내린다. 그 결과 요한이 증발한 중반부터 이 소설은 급격히 무너지고 만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 p 418

 

작가가 생략한 문장을 되살리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못생긴 여자를, 나는 못하지만이 아닐까.

 

아무리 아름다운 문체로 씌여졌다한들 거짓된 작품이 감동을 줄 순 없다. 다나베 세이코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감동적이다. 장애를 지닌 조제에게서 도망치는 츠네오. 이런 츠네오를 욕할 자 누구인가? 조제를 떠날 수밖에 없는 츠네오의 심리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조제와 츠네오의 이별은 그래서 더 더욱 안타까운 게 아니었을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애초에 늪 위에 박은 말뚝이었다.

중반부터 무너져 내린 소설은 결론에서 완전히 붕괴하고 만다.

 

 

이 글은 독립된 이야기로도, 서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로 볼 수 있는 두 개의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두 개, 혹은 세 개의 이야기를 저는 겨우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이, 스스로의 이야기에서 성공한 작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 p 418

 

.....장난, 지금, 하는 거냐, 나랑!

정말로 박민규는 독자를 성공한 작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따위 결론을 내민 걸까?

 

거짓말이다.

박민규는 작가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채

결론을 독자에게 떠넘겨 놓고 구차하게 핑계를 댄 것뿐이다.

 

이 소설을 수식으로 정리해볼까?

<노르웨이의 숲> + <러브 레터> + 못 생긴 여자 - 섹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사랑하라고?

너나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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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17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명세라 언젠가는 읽어보리라 했는데
시이소오님의 평에 망설여지네요.
솔직한 리뷰 고맙습니다^^

시이소오 2017-02-17 09:30   좋아요 2 | URL
칼 맞을 각오로 썼습니다. ㅎㅎ

singri 2017-02-17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소님이 이렇다하시니 더 읽고 싶은 건 뭐때문인지 ㅋㅋㅋㅋ

시이소오 2017-02-17 09:30   좋아요 1 | URL
제가 혹평하면 다들 읽고 싶어하시잖아요. ㅋㅋ

고양이라디오 2017-02-17 13:14   좋아요 1 | URL
저도 청개구리 심보라서 그런가 왠지 더 궁금해집니다. 안티마케팅인가요ㅎㅎ?

시이소오 2017-02-17 13:20   좋아요 0 | URL
to 고양이라디오님, 출판사들도 안티마케팅을 활용하면 좋을텐데요 ㅎㅎ

2017-02-17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7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7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7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2-17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낚였습니다 파닥파닥
그런데 너무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내용에도 너무 공감합니다...

시이소오 2017-02-17 12:25   좋아요 0 | URL
역쉬 제가 혹평하믄 읽고 싶어지시는군요. ^^;
레삭매냐님, 리뷰 기대할께요 ^^

고양이라디오 2017-02-17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리뷰 시원합니다. 오랜만에 청량감 느껴지는 리뷰 읽어서 좋네요^^ 박민규 작가의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세계사 브런치>의 작가 정시몬씨가 박민규씨를 좋아한다고 해서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이라니. 그런데 그 혹평이 너무나 공감이 가고 논리적으로도 타탕합니다. 만약 저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과연 못생긴 여주인공을 쓰는 감독이 있을까요? (못생긴 설정의 예쁜 배우가 아니라 진짜! 못생긴 배우요)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아마 관객들이 전혀 공감을 못할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7-02-17 13:23   좋아요 1 | URL
영화화 하려다 무산됐다고 하더군요. 여배우 캐스팅하기가 쉽지 않을듯해요. 블로그 이웃님 말씀처럼 특수분장을 하지 않는한. ㅎㅎ

stella.K 2017-02-1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갖고 있던 책이었는데
어느 길에 제가 중고샵에 팔았나 봅니다.
이렇게 쓰시니까 읽고 싶잖아요.ㅠ

하긴 박민규는 저랑은 잘 안 맞더라구요.
뭔가 생각은 기발한 것 같은데 사이다 같은 속시원한 구석이 없어서.
암튼 이렇게 쓰실 수 있는 시이소오님이 부러울 다름입니다.ㅠㅋ

시이소오 2017-02-17 14:23   좋아요 0 | URL
스텔라 케이님, 읽고 싶으시죠 ㅎ

저를 부러워하시다니? 스텔라 케이님의 혹평도 만만찮은 걸요 ㅎㅎ

stella.K 2017-02-17 14:27   좋아요 0 | URL
ㅍㅎㅎㅎㅎㅎ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
전 진짜 혹평할 것 같으면 아예 안 하는데.
찢어버리고 말지...ㅋㅋㅋㅋㅋ

시이소오 2017-02-17 14:31   좋아요 1 | URL
ㅋ ㅋ ㅋ ㅋ ㅋ ㅋ ㅋ 그게 더 혹독하네요 ㅎㅎ 악플보다 잔인한건 무플이라죠 ㅋ

:Dora 2017-02-1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님은 외모로 보았을때 무척 튀고 싶은 기질 같아요

시이소오 2017-02-17 14:27   좋아요 1 | URL
글도 튀어나오게 잘 쓰죠. 그게 이 소설에선 득이 아니라 해가 된 경우라고 할까요? ㅎ ㅎ

:Dora 2017-02-17 14:33   좋아요 0 | URL
전 단편 하나만 읽었는데 그 작품은 좋았어요... 낮잠 이라고.. 2008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있는 거요~ 어쨋든 재능이 있는 건 맞나봄

시이소오 2017-02-17 14:35   좋아요 1 | URL
거의 10년전 작품을 기억하시다니, 대단하세요. ^^

:Dora 2017-02-17 14:43   좋아요 0 | URL
기억한다기보다 처음 접한 책입니다 ㅍㅎㅎ;;;

시이소오 2017-02-17 14:53   좋아요 0 | URL
저도 이상문학상을 해마다 빠트리지않고읽는편인데 기억이 안나네요 ^^;

치니 2017-02-17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는 이 책 앞의 열 장 읽고 더는 못 보겠다 하고 덮어버렸는데 의외로 좋다는 분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시이소오 2017-02-17 14:36   좋아요 0 | URL
치니님은 오글거리셨나봐요. 1장이 심히 그런면이 있죠. ㅠㅠ

2017-02-18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7-02-18 15:23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가 잘한일도 많군요. 어릴때 톨스토이는 하녀들과 비/정상적으로 관계하기도 했는데 죽기전엔 섹스하지 말라고 설교하기도 했다죠.
애를 열셋이나 임신시킨 고추 난봉꾼이 할말은 아닌듯 ㅎ

AgalmA 2017-02-18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난, 지금, 하는 거냐, 나랑!˝ 이 문장 영화 대사 넣어도 히트칠 거 같은데요ㅎ 시이소오님 리뷰는 이런 맛깔 구어 때문에 더 재밌음요^^
세상에 제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작가가 너무도 많아 박민규 작가 책을 여러 권 읽을 정도의 여유가 없어서 저는 가뿐히 패스^^) 패스하는데 도움 주셔서 감사요/

시이소오 2017-02-18 17:27   좋아요 1 | URL
저 대사는 개콘에 나오는 대사죠 ㅎㅎ
재밌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ww 2017-02-2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여자인데도 혹평, 공감합니다. 주인공심리 빼고, 원래 이 사회의 세태와 미인만 사랑하는 분위기를 해설하는 다른 소설 구절들은 절실히 공감했어요. 평생 여자로부터 외면받는 남자들이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도 다를 것 없이, 평생 남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여자도 있는것같아요. 세상 모든 인간들이 짝짓기를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짝짓기 잘할 수 있게 특화된 몇몇 남성과 몇몇 여성이 있을 뿐인 것 같습니당 ㅎㅎ

시이소오 2017-02-25 19:19   좋아요 0 | URL
저는 성격상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편해지려는 여자들에겐 너그럽지못해 주인공이 예쁜 백화점 여직윈을 막 대할때는 짜릿했습니다.


rati 2017-02-25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이 더 공감되네요ㅋㅋ 요한과 요한을 통해 시대를 설명 해 준 문장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뿐이였죠.
남자 주인공 보면서 하루키 소설들의 남자 주인공 많이 떠올렸습니다. 노르웨이의 숲. 저만 그렇게 생각한건 아니였네요ㅋㅋ

시이소오 2017-02-25 19:24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초반부 요한의 문장들은 재밌었어요. 중반부부터 얘가 미쳤나, 왜 이럴까 했더만 아니나다를까 정신병원으로 가더군요 ㅠㅠ

물결 2017-03-2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비슷한 감상을 가졌어요.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야기지만 사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감정을 표현하는 묘사는 우리가 이상화하는 연애의 모습과 다르지 않거든요. 오히려 저는 전형적인 연애소설로 이 책을 추천하는 편인데 작가가 부러 힘주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시이소오 2017-03-23 06:05   좋아요 0 | URL
이상적인 연애를 그리고 있으니, 아무리해도 못생긴 여자는 상상이 안되거든요. ^^;

2017-05-05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 초반부터 얼척없어 던져버린 이 소설이 얼마나 오래 베스트셀러였는지. 그땐 좀 외롭군, 했는데 댓글들을 보니 아군이 많았네요 ㅋ

시이소오 2017-05-05 06:18   좋아요 0 | URL
저도 이렇게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많을거라 전혀 예상치 못했네요. ㅎ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 무엇이 과학인가
팀 르윈스 지음, 김경숙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여성의 오르가즘은 어떤 기능을 할까? 저자의 유머를 제대로 즐기려면 책의 5장이 백미다. 엘리자베스 로이드의 사례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오르가즘은 남성의 젖꼭지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부작용이다. 로이드의 관점에 대해 여성 오르가즘을 무시한다는 비난이 일었다고 한다. 저자인 팀 르윈스는 로이드를 지지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공평한 비평이 아니다. 피아노를 치고 복잡한 수학 등식을 풀고 산문을 쓸 수 있는 능력 역시 생존이나 생식 활동과 거의 관계가 없지만, 누구도 그런 능력을 거짓 능력 혹은 하찮은 능력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여긴다면, 우리 조상의 생존과 생식 활동에 축구 기술이 아니라 빨리 달리기가 더 도움 됐다고 생각하고 우사인 볼트가 리오넬 메시보다 더 중요한 운동 선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로이드가 오르가즘을 부산물이라는 표현대신 환상적인 보너스라 말했던 걸로 보아 작가의 지지는 타당해보인다.

(‘볼트가 낳나, 메시가 낳나?’ 메시가 한 경기에 11명을 제치고 10골을 넣든, 볼트가 100미터를 8초에 뛰든 답은 둘 다 못 낳는다이다. )

 

오르가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왜 이리 웃긴지. 1980년도에 고든 갤럽과 수전 수아레스는 보통 사람의 경우 오르가슴을 경험한 뒤 5분 정도 휴식을 취해야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는데 오르가슴을 하면서 정신을 잃는 사람들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로이드는 보통 사람이 절대 여성일 수 없다면서, 오르가슴 후에 5분을 쉬어야 하는 사람은 보통 남자라고 반박했다.

 

로이드는 업석 이론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업석이론이란 일명 빨이들이기 이론으로 여성이 오르가슴을 통해 정자를 질에서 생식관으로 빨아들여 임신 가능성을 높인다는 주장을 뜻한다. 로이드는 정자가 빨려들어가는 효과는 전무하다며 업석이론에 대해 반박했다. 성물리학자 로이 레빈은 업석 이론을 좀비 가정이라고 불렀다. 업석 이론이 증거 면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사라질만하고 실제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데도 무덤에 가만히 누워있지 않고 돌아다니기 때문이라고.

 

별다른 증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학자들은 오르가슴 기능론을 포기하지 않는 걸까? 여성의 오르가슴을 긍정해서? 아니다. 로이드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의 성을 남성의 성과 똑같이 취급하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다. 오르가슴 기능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남성 오르가슴이 생식기능이 있으므로 여성 오르가슴도 생식기능이 있을 것이라 가정한다. 남성에겐 페니스(자지)가 있고, 여성에겐 보지가 있음에도 여성에겐 페니스가 없다라고 가정한 프로이트처럼.

 

이 책은 오르가슴을 연구하는 책은 아닌데, 말하다보니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저자가 오르가슴을 들어 말하고자 한 바는 과학자의 가치관이 들어간 안 좋은 과학의 예를 들기 위해서였다. 좋은 과학의 예로 다윈을 들고 있는데,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이라, 그렇다면 그 기준이 뭘까? 아니, 그 전에 과학이란게 뭘까?

 

이 책의 원제는 ‘THE Meaning of Science’. 저자는 과학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과학이 우리에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인가? 경제학은? 정상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 걸까?

 

포퍼는 정상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구분의 기준으로 반증주의를 제시했다. 포퍼의 반증주의에 따르면, 귀납적 추리에 의존치 않고 과학을 할 때, 특정 일반화가 참되다는 결론은 내릴 수 없는 반면, 거짓이라는 결론은 내릴 수 있다. 쉽게 말해 진정한 과학이라면 반증 가능해야 한다는 게 포퍼의 주장이다.

 

포퍼는 관찰을 통한 귀납적 추론을 거부했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과연 그럴까? 어느날 검은 백조가 나타나면?

 

포퍼에 따르면 과학은 연역적 추리를 통해서만 진보할 수 있다. (동어반복에 불과한 연역적 추리로 어떻게 과학이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로선 잘 모르겠다.) 반증가능성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할 수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답은 아니오.

 

저자는 해리 크로트의 정의에 따라 탐구하는 마음 자세라는 다소 느슨한관점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느슨한 관점이란 표현은 잘못된 말일지도 모르겠다. 과학자들이 가장 큰 업적을 이뤘을 때는 자신의 이론을 반박하는 숱한 이론을 물리치고, 한쪽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고집스레 내달릴 때였으므로.

 

, 이렇게 길게 쓰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쿤 얘기는 아직 꺼내지도 못했다니. 쿤의 패러다임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는 건너뛰고 마지막으로 본성에 대해서만 언급하자.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 나는가>에서, 인간 본성을 제대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데이비드 헐과 마이클 기셀린을 따라, 과연 인간 본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시한다. 어떠신지? 인간 본성이란 게 있나?

 

진화가 인간 본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미신이라고 말해준다.”

- 마이클 기셀린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있을까? 조지프 하인리히는 심리 연구 피실험자들이 WEIRD하다고 말했다. Western, Educated, Industrialised, Rich, Democratic

 

저자는 뮐러- 라이어 착시 현상을 예로 들어 본성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1960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칼리하리 사막 샌 부족은 뮐러-라이히 착시를 전혀 착시로 보지 않는다.

 

보편적인 본성이 있다고?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한 종에 독특한 유형들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다형성) 본성이 아니라, 학습 능력, 모방 능력 등 문화화 과정이 진화의 일부가 된 것은 아닌가? 혹시 인간 본성을 상정하는 과학은 특정 인종이나 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사이비 과학자들 , 신자유주의 경제학, 진화 심리학을 비판하는 이유기도 하다.)

 

과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을 때, 과학은 거기에 답할 수 없다. 이 주장에 반색해 신을 끌어들일 순 있겠지만, 저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벤저민 리벳의 실험이후, 인간의 자유 의지는 의문에 부쳐졌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0.5초 전에 뉴런의 활동이 시작된 거라면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닐까? 2008년의 실험에 따르면 의식적인 결정보다 뉴런의 활동은 10초나 빨랐다. 저자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 이유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나의 자유 의지 때문이겠지?

?

 

밑줄 그은 문장  

 

 

40. 만약 포퍼가 제안하는 것처럼 귀납적 추리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을 한다면 과학적 일반화가 참되다는 결론은 절대 합리적으로 내릴 수 없는 반면, 특정 일반화가 거짓이라는 결론은 내릴 수 있게 된다. 포퍼의 이런 견해를 바로 반증주의falsification”라 한다.

 

41. 진정한 과학은 반증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포퍼의 생각이다. 반론을 제기했을 때 틀릴 가능성을 지닌 학문만이 진정한 과학이다.

 

43. 계속해서 파인만은 과학적 방법에 대한 반증주의적 접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짧게 요약한다.

 

짐작이 실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것이 되죠. 바로 이 몇 마디 안 되는 말이 과학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짐작이 아무리 경이로워도, 여러분이 아무리 똑똑해도, 또 그 짐작을 한 사람이 아무리 특별하고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실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겁니다. 과학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52. 과학은 확고한 기반이 있지 않다. 거대한 과학 이론 체계는 말하자면 늪에 지어 올린 건물과 같다. 말뚝 위에 올린 건물이 과학이다. 지상에 있던 말뚝을 늪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고 해서 말뚝이 자연적인 기반에 닿도록 깊이 끌어내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말뚝을 더 깊이 심지 않아도 되는 것이 튼튼한 기반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 말뚝이 적어도 한동안은 그 구조를 지탱할 만큼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109. 나는 쿤 자신의 말을 따라 패러다임을 본보기exemplar”, 즉 중요한 과학적 업적을 보여준다고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예시로 여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그것은 과학계의 대부분이 존경하고 과학계의 대부분이 존경하고 모범으로 삼는 어떤 업적을 가리킨다.

 

117. 쿤은 정상 과학이 본보기 과학 활동을 따른다고 본다. 과학계가 특정 연구 예를 들어, 뉴턴의 <프린키피아>나 다윈의 <종의 기원>, 그리고 멘델의 유전법칙 연구 같은 것-를 본보기로 지지하게 되면 그것은 양질의 연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지정되기도 한다. ...쿤이 혁명 때마다 등장하는 이론들이 서로 공약 불가능하다고 할 때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이들 이론이 공약 가능하게 하려면 이들의 강점을 평가할 수 있는 공통된 기준이 있어야 하는 데 그런 기준은 없다. 왜냐하면, 이 기준의 토대가 본보기인데 이 본보기 자체가 항상성이 없기 때문이다.

 

120. 쿤은 특히 후기 저서에서 공약 불가능성의 개념을 번역의 한계 관점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doux”완벽한영어로 번역하는 데 한계가 있다. ....“doux”와 같은 말이 영어로 완벽하게 번역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프랑스어 “doux”가 가진 포괄적인 의미를 영어가 한 단어로 살려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124. 쿤은 이런 개인적인 게슈탈트 전환 체험을 한참 후에 <구조>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는데, “혁명 후에 과학자들은 다른 세계에서 과학 활동을 한다는 말이 이때 나온 것이다.

 

130. 쿤은 일종의 칸트주의를 받아들인다. 쿤에 의하면, 우리의 경험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세계는 없고, 이미 상기된 바와 같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 자체가 우리가 지닌 과학 이론에 영향을 받는다.

 

134. 쿤에게 있어 정상과학과 혁명 과학은 아주 다른 과학이다. 정상 과학은 그가 말하는 퍼즐 맞추기와 비슷한데, 그 이유는 과학자가 해당 본보기를 창의적으로 적용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문제와 씨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혁명이 일어나면 이전 본보기가 왕좌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본보기가 왕좌에 등극한다. 쿤에 의하면 혁명이 일어나면, 아니 혁명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세상이 바뀐다.

 

149.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장에서 과학적 실재론이 맞는다는 결론을 낼 것이다. 그런데 이 결론에 이르는 길이 직로가 아닌 관계로 약간의 이정표가 필요하다. 과학적 실재론을 정당화하려면 세 가지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과학적 실재론의 가장 강력한 반론 중의 하나인 미결정성underdetermination” 이론이 제기하는 도전을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이론은 우주의 저변 구조에 대한 여러 이론 중 어떤 것이 낫다고 판단을 하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 이론을 지지하는 거의 유일한 논쟁으로 알려진 것은 소위 말하는 기적은 없다논증이다. 만약 과학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물질의 구성 요소에 대해 실제와 크게 어긋나게 설명했다면, 과학 이론에 따라 행동했을 때 항상 예상과 틀린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이 논증의 주된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관적 귀납pessimistic induction”으로 알려진 논증을 정면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논증은 오늘날 틀리다고 여겨지는 이론들이 과거에는 놀랄만큼 실용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역사적 기록에 의존한다. ....진리가 아닌 오류가 지속해서 성공을 거둔다면 기적은 없다논증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 과학적 실재론자들은 미결정성에 대한 고려가 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기적은 없다논증이 맞는 대신에 비관적 귀납논증이 틀리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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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7-02-08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가즘에 혹해서 읽다가 다양한 이론에 머리가 어지러워졌습니다.ㅎㅎ

시이소오 2017-02-08 08:15   좋아요 0 | URL
크눌프님. 제 낚시줄에 걸리셨네요 ㅎ

knulp 2017-02-08 08:17   좋아요 0 | URL
헉! 미끼를 물어버렸군..
ㅎㅎ

시이소오 2017-02-08 08:21   좋아요 1 | URL
현혹되지 마세요~~ ㅎ

cyrus 2017-02-08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성 문화를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믿고 읽을 만한 수준 높은 성과학 관련 서적을 나오기 어려워요. 과거에 나온 책들은 이미 최신 이론이 반영된 요즘에 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이래서 성을 야동으로 접하게 되고,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잘못된 성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시이소오 2017-02-08 13:21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믿고 읽을만한 성과학서가 출간되면 좋겠네요^^

AgalmA 2017-02-10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가슴 낚시로 시작하는 글 재밌는데요^^
칼 포퍼 반증주의는 자신의 이론의 반증가능성을 바로 데려오는 역설을 낳아서, 우리가 과학에 대해 가지는 개념적 특성(보편성, 정확함)에 부합하지 않은 거 같은데...늘 그런 생각을 들게 합니다. 과학보다 논리 철학에 더 다가가 있다고 봐요. 그래서 비트겐슈타인과 싸웠나ㅎ;

본성에 대해서도 뉴런의 활동이 의식적인 결정보다 빠르다는 게 자유의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예로,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죽을 줄 알면서도 누군가는 구조를 위해 뛰어들죠. 이타성이 많은 뉴런을 가진 인간이라고 봐야 하는 걸 까요? DNA도 당연히 작동하지만 각 인간은 자신의 축적된 경험과 이성을 종합해 행동하는 ‘의지‘를 발휘하는 종합체라고 봐야 하지 않을지. 이런 무수한 사례들을 통계 비율로 내고 그러므로 이렇다 결론 내는 것은 종합화이지 결론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블랙 스완처럼 반증 하나 튀어 나오면 금방 뒤바뀔 거면서ㅎ; 물론 주류를 차지한 정상과학이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버티는 긴 시간의 고통을 인간은 또 당하겠지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님^^

시이소오 2017-02-10 08:22   좋아요 0 | URL
아,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대담을 읽어봐야 겠어요.

자유의지나 의식에 대한 물음들은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하네요. 더 읽고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네요 ^^
 
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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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건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소란스럽던 90년 중반 경이었을 것이다.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 생의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고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를 해보려고 알아봤더니 한국엔 그런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리고 수 십년이 지난 작년에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을 읽었다. <읽는 인간>을 읽었던 탓일까. 작가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재미도 없는 <익사>를 손에서 떼어내지 못했던 것일까? 흡사 거머리처럼 책이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집어들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200페이지를 훌쩍 넘겼다.

 

소설의 전반부, 오에가 천황폐하를 찬양하는 가사의 독일어 군가를 힘차게 따라 부르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오에가? 일본 정부에서 수상하는 상을 나는 민주주의 그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수상을 거부한 오에가? 일본 평화 헌법 9조를 지지하는 ’9조회의 멤버인 오에가 천황 폐하를 찬양하는 군가를 목청껏 따라부르다니! 어린 시절 몸에 새겨진 기억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구나. ’박사모와 같은 버러지들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와, 어린 시절에 새겨진 군국주의의 기억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도 남아있는 거구나. 세뇌된 좀비들.

 

사소설임에도 다루는 이야기의 층이 다채롭다. 토론을 한다면 무수한 광맥을 캘 수 있는 소설이다. <익사> 를 페미니즘 소설로 독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오에보다 13살이나 어린 이문열이 <선택>이라는 시대착오적 소설을 쓴 것에 비하면, 1935년생인 오에는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실제로 바보인 아들 아카리에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넌 바보다라고 말해버리는 오에. 아들과의 관계 회복은 어떻게 할려구?? 아카리의 말하는 방식은 정상인과는 다른데, 그게 묘하게 유머스럽거나 감동을 준다. 아래의 문장을 읽다 심장이 뚫렸다.

 

가정의 권력자로서 자신에게 화를 내는 아버지의 신체의 중심적 부분, 즉 얼굴이나 머리를 향해 화해의 손을 뻗을 용기는 없다. 화가 난 아버지의 얼굴은 무섭다. 그러나 통풍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뻘겋게 부어오른 발은 신체의 주변적 부분이다. 그런 발에게라면 내 쪽에서 다가가 착한 발이라고 말해 줄 수 있다. “발아, 괜찮아? 착한 발, 착한 발! 발아, 괜찮아? 통풍, 괜찮아? 착한 발, 착한 발아!”

 

p222.

 

, 아버지. 나는 정말 여태껏 아버질 증오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난 아버지가 너무 싫다. 지하철에서 옆 칸의 승객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핸드폰 통화하는 아버지. 어딜 가건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아버지. 자식들의 꿈은 무시하고 자신의 꿈을 이뤄줄 소모품으로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 어찌나 시달렸던지 내 고교시절은 중세와도 같은 암흑기였다. 어쩌면 우리 아버진 돈이 있었더라면 최순실 뺨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아프다. 그렇게 증오했는데. 핏줄이 뭐라고 . 그런 아버지 얼굴을 앞에 두고 화해의 말을 하긴 낯간지럽다. 그러나, 발에게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착한 발이라고 할 수 없을지언정.

 

아카리의 나의 대사는 전부 발췌해 적어두고 싶다.

 

아빠, 잠이 잘 안 옵니까? 제가 없어도 잠들 수 있습니까? 기운을 내서 잠들어야 합니다.”

 

오에의 소설을 연극으로 올리려는 우나이코라는 여성 캐릭터에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실존인물일까? 마치 아마존 여전사를 연상시키는 캐릭터. 우나이코는 <죽은 개를 던지다>라는 연극을 기획해 무대에 올린다. 무대 위에서 토론이 벌어지고 관객들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배우에게 죽은 개를 던진다. 물론 실제 개는 아니고 인형이다. 만일 한국에서 무대에 최순실이나 바크네 역을 맡은 배우가 있다면 인형에 맞아 죽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우나이코는 여고시절, 큰 어머니를 따라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다. 우나이코는 야스쿠니 신사의 커다란 일장기가 흔들리는 걸 보고 토하고 만다. 그리고 깨닫는다. 문부성 관료인 큰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큰 어머니로부터 낙태를 강요당한다. 이후로 우나이코에겐 낙태와 강간이 가장 큰 주제가 된다. 마을의 어머니들은 군인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우나이코는 국가에 의해 자행된 강간과 역시나 국가에 의해 자행된 자신의 강간을 엮어 메이스케 어머니란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로 한다. 물론 관객들은 죽은 개를 준비할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문부성 관료인 큰 아버지는 우리로 치면 국정원스런 똘마니들을 급히 보내 우나이코를 납치한다. 소설의 결말 역시 충격적이다.

 

오에의 어떤 고백들도 심장을 찌른다.

 

후카세 번역은 이러하네. ‘이런 글 조각 하나로 나는 나의 붕괴를 지탱해왔다.’ <황무지>에서 이 구절 앞에 나오는 단테와 네르발을 인용한 문구를 하나로 묶어 이런 글 조각 하나라고 한 걸세. 그 글 조각들에 의지해 나의 붕괴를 지탱해왔다. 원시는 이렇게 되어 있네.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

 

이 구절에 대한 지금까지의 내 해석은, 이 나는, 붕괴에 다다를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이렇게 생각했다는 거였네. 난파될지도 모를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하려고......그리고 이런 글 조각 하나가 육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내 해석은 shored의 뜻, 육지로 올라왔다. 상륙시켰다라는 말의 어감에 영향을 받고 있네. 이제 난 육지에 있다. 이런 글 조각 하나에 불과한 것에 의지해, 붕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겨우겨우, 그런 안도감을 공유하면서 이 한 구절을 이해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새로이 이해하게 되었네. 나는 지금도 실제로 붕괴 위기에 처해 있고, 어떻게든 그 위기를 버티려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여전히 이런 글 조각 하나가 의지가 되고 있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애매한 부분이 있었던 후카세 번역과 엘리엇의 원시가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떨어지더군..... “

 

p348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이 말을 들은 우나이코는 눈물을 흘린다. 우나이코의 눈물의 의미는 나와 다르지만 나 또한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나야말로 내가 쓰는 이런 글 조각 하나로 붕괴의 위기를 버티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서글퍼라.

 

아마 그럴 것이다.

이따위 글 조각 하나로 나는 나의 붕괴를 막아왔다. 

     

p220. 반핵 시민운동이 왕성했던 때 유럽으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건너갔던 오빠의 체류가 생각보다 길어졌었지요. 그때 아카리는 아빠가 죽었다고 믿어버렸고요. "그렇습니까? 다음 주 일요일에 돌아옵니까? 그때가 되면 돌아온다지만, 지금 아빠는 죽었습니다. 아빠는 죽고 말았습니다요!"

p. 364.
"‘맥베스 문제’라는 건 뭘 말하는 거죠?"
"기노시타 준지가 ‘이런 일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서로가 미쳐버리고 말아요’라고 번역했던, 맥베스 부인의 대사 같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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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7-02-0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조각조각은 모여 댐이 되다

시이소오 2017-02-07 22:12   좋아요 1 | URL
아, 테오도라님 감동적인 댓글이네요. 육지가 아니라 댐이 되다니.

조각조각이 모여 아름다운 조각보가 되듯이요 ^^

2017-02-08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 이런 글조각 따위가,가 아니라 이런 글조각 따위로, 요. 서글퍼라 2222. 얼마전 겐자부로 전집을 내다 버렸어요. 아주 옛날 고려원에서 그런걸 펴냈었죠. 아마 죽은 자의 사치였을 거에요, 그 시체닦기.

시이소오 2017-02-08 13:25   좋아요 0 | URL
죽은자의 사치, 였군요. 버리시다니 아까워라 ㅎ

stella.K 2017-02-08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근사하군요.
전에 아름다운 에너벨리 리 뭐 어쩌구하는 소설 있었잖아요.
거기에 김지하도 나오고 그러던데 이것도 그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 봅니다. 그냥 현재 살아있는 사람을 소설로 옮긴 뭐 그런...
그책 뭔 말인지 이해불가라 언젠가 중고샵에 팔아버린 것 같은데
전 노벨문학상 알러지 반응이 있는 것 같아서.ㅠ
어느새 빠져드셨군요. 그런 소설이 좋은데...

시이소오 2017-02-08 17:37   좋아요 0 | URL
저도 어쩌면 읽는인간을 안 읽었으면 읽다 말았을지도 ㅎ

AgalmA 2017-02-10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 소설을 읽고 나면 시련을 같이 겪고 아주 작은 문으로 힘겹게 빠져나온 기분이 들어요. 뒤돌아보면 겐자부로는 손을 흔들며 문을 닫죠. 나만 나오고 그는 여전히 거기 있어요! 같이 빠져 나온 게 아니라서 그의 다른 책으로 찾아가 이번엔 같이 나올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아, 비유가 너무 거창; 노벨문학상도 받았는데 내가 이런 연민을 가져야 하나ㅎㅎ! 시이소오님 결론과 비슷한 상태로 종결^^;;

시이소오 2017-02-10 08:16   좋아요 0 | URL
아갈마님 댓글을 보고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이유를 알았네요. 더 이상 시련을 겪고싶지 않은거네요. ^^;

우연히 2017-03-19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제 붕괴를 막아줄 무언가를 찾고싶습니다. 글이 됐던 무엇이 됐던요...이런게 아니라는걸 알고있는데도 헤어나올수가 없네요.

시이소오 2017-03-19 11:25   좋아요 0 | URL
무언가를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무엇이 됐건. 감사합니다 ^^
 
카뮈로부터 온 편지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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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가를 완전히 오해했다. 그가 번역한 카뮈의 <이방인>에 나는 별 네 개 반을 줬었거늘. 작가(출판사 사장이라는데 어느 출판사 사장인지 내 관심 밖이고, 아무리 쓰레기같은 책이라도 어찌되었건 책을 썼으니 작가라고 부르자)의 번역에 전적으로 공감하긴 어려웠지만, 번역에 대한 작가의 철두철미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착각이었다. 이 책은 카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번역 문제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쩌다보니 카뮈 <이방인>이 됐을 뿐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만 봐.

조금 더 풀어 쓰자면, “김화영은 틀렸고 내가 맞았다.”.

 

애초에 작가의 구상은 순수했을 것이라 믿는다. 블로그에 주 단위로 번역을 올렸던 게 작가의 패착이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에 주마다 글을 올리게 되면서 비난의 댓글로 궁지에 몰리자, 잘못된 번역을 바로 잡으려 했던 애초의 순수한 의도는 변질되고 만 게 아닐까. 작가는 여러 부분에서 오역을 바로 잡았다. 그러나 블로그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한, 두 개 오역을 바로잡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 어디에도 출구는 없었다.” 이제 김화영 번역은 하나부터 열까지, 반드시, 기필코 잘못 되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작가는 어감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는 번역도 편집증 환자마냥 시시콜콜 딴지를 건다.

 

딴지 번역이 강물처럼 흘러 넘쳐 일일이 언급하자니 손만 아프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이정서는 tout de suite으로 번역한 김화영이 엉터리 번역을 했다며 호되게 비판하면서

즉시가 맞다고 우긴다.

즉시비슷해보여도 완전히 다른가?”

뭣이 다른디? 뭣이 다르냐고!!

 

작가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서는이라는 김화영 번역에 대해 때려 죽일 듯 비난하면서 개를 산책시키는번역이 맞다고 아득바득 우긴다. 이게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냐고!?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내미는 증거들이 저 모양이다.

개소리!!

 

네년이 날 골려 먹으려 했겠다. 나를 골려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지 (김화영)

니가 날 우습게 봤어. 니가 날 우습게 봤어. 내 생각이 간절하도록 만들어 주지 (*)

네가 나를 속여? 나를 배신해? 앞으로 날 속이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지 (*)

네가 날 골탕 먹였어. 네가 날 골탕 먹였다고. 골탕 먹이는 게 뭔지 내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위의 번역은 다 틀렸다.

그가 내세우는 옳은번역은 이렇다.

 

너는 나를 농락했어. 나를 농락했다구. 나를 농락했다는 걸 깨닫게 해주지

 

(너야말로 나를 농락했어! 나를 농락했다구!!)

 

어떤가? 다른 번역가들의 번역은 틀리고 이정서 역만 맞나?

내가 해석하면 이렇다.

 

니가 나를 갖고 놀아날 갖고 놀았단 말이지.

날 갖고 놀다가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지

 

내가 이정서를 비난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두 사람의 번역이 있을 경우, 누군가의 번역이 옳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이방인>의 경우, 여러 불어 전문 번역가들이 판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화영 번역은 죄다 틀렸고 자신의 번역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정서의 근거는 무엇인가?

 

영어 번역이다. 이정서에게 신은 누구인가?

<Stranger>. <Stranger>만이 옳고 <L’etranger>는 참고서요, <이방인>은 죄다 틀렸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정서, 대식씨는 번역하지 않았다.

영어 번역본을 베낀 것일 뿐.

 

그럼에도 자신이 번역한 <이방인>만이 옳다? 왜 이러는 걸까? 작가가 불어에 완전히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불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더라면 무식할래야 저렇게 무식할 수는 없다. 불어를 공부한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해석이 흘러넘친다. 심지어 그는 <이방인> 번역을 위해 불어 번역가를 고용해 놓고도 자신과 다른 번역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전문 번역가를 해고한다. 이건 뭐, ‘출판계의 최순실’? 출판사 사장의 정신 나간 지시에 예스만 외친 언어감각이 특출한팀장은 출판계의 안종범?’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대식씨는 번역을 할 게 아니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한다.

 

 

이정서는 김화영을 번역계를 농단한 사악하면서도 악랄한 독재자로, 자신은 부당한 권력과 권위에 맞서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혁명가처럼 프레임화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편집증 환자에, 영어를 신으로 모시는 사이비 사도에 불과할 뿐이다.

 

이정서는 카뮈가 실제로 자신에게 편지나 메일을 보낸다는 소설적 기법을 차용한다. 이보다 더 천박하고 유아틱한 상상력을 상상해내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

 

뫼르소의 살인이 정당방위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언급하자니 한숨만 나온다. 최근에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뫼르소가 아닌, 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어느 이름도 없는 아랍인의 관점으로 씌여졌다. 나는 왜 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아랍인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우리의 선입견을 망치로 내려치는 신선한 관점이 아닌가? 거기에 비하자면 뫼르소의 살인은 정당방위라는 작가의 주장은 코흘리개들의 징징거림, 똥파리의 웽웽거림처럼 시끄럽기만 하다. 

 

카뮈 <이방인>의 주제가 뫼르소의 살인은 정당방위인가?

카뮈가 작가에게 뭐라고 편지를 보내셨길래?

어떻게 알았을까잉~~

 

엄마가 돌아가셨다가 맞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내가 돌아가시겠다.

 

작가는 자신만이 옳다고 개거품을 물고 주장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책상에 앉아 아베세데부터 공부하는 게 어떨까.

 

내 생각으론 이정서의 <이방인>은 완벽한 노이즈 마케팅이었다.

출판사 사장의 비열하고도 야비한 상술에 죄다 놀아난 셈이다.

(너야말로 나를 농락했어! 나를 농락했다구!!)

 

작가는 돈 좀 벌었으면 이제 생각이라는 걸 하기 바란다.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말이다.

위 불어 문장은 당신 번역, 즉 오랜만에 다시가 아니라 나의 해석, 처음으로 오랫동안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어둠속에서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을 편집증 사장님께. )

 

<검색해보니 작가는 새움출판사 사장인 이대식 씨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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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7-02-04 09:17   좋아요 1 | URL
대식씨는 어쩌면 카뮈가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을지도 몰라요. ㅋ

쉐기쉐기몽쉐기 2017-02-0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긴 했어요. 얼마나 번역을 잘 했길래 김화영 아재를 저렇게 까는 걸까하구요. 보진 않았지만. 노이즈 마케팅으로 책은 좀 팔렸나봐요. ?별 한개 책이라니 요거도 좀 궁금해지긴 하네요 ㅋ

시이소오 2017-02-04 09:57   좋아요 1 | URL
책 꽤나 팔았죠.
별 한개도 아까웠답니다. 제가 혹평의 글을 쓰면 이웃님들은 왜 읽고 싶어하시는걸까요? ^^;

쉐기쉐기몽쉐기님, 부디 다른 책을 읽으시길 ㅋ

AgalmA 2017-02-04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직접 밝힌다고 해도 ‘의도‘라는 게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을 수 없죠. 그래서 자서전도 포장의 혐의가 늘 있는 거 잖습니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넌 틀렸고 내가 맞다 식 프레임 짜기 저는 좋게 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로 옳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처럼 딜레마는 늘 남는다고 생각해요

시이소오 2017-02-04 10:18   좋아요 2 | URL
개인마다 각자의 언어감각이 다르잖아요. 다름을 인정치않고 자신의 언어감각만이 옳다는 작가의 오만은 바크네를 떠올리게 하네요 ㅋ

cyrus 2017-02-04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정서 번역의 <이방인>이 나왔을 당시에 알라딘 서재가 한동안 시끌벅적했어요. 저도 뜨거운 분위기에 끼고 싶었는데, 불어를 잘 모르는데다가 <이방인> 작품이라는 자체가 무척 어렵게 느껴져서 그냥 읽기만 하고 넘어갔습니다. 리뷰를 쓰기 정말 어려운 책이 있기 마련인데, 카뮈의 <이방인>이 그 중 하나입니다. ^^;;

시이소오 2017-02-04 11:1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방인>이 리뷰 쓰기 어려운 소설이라는데 동감합니다. ^^
제 독후감은 너무 늦었네요. 뒷북 리뷰라 할지. ㅋ


cyrus 2017-02-04 11:19   좋아요 1 | URL
재촉 안할테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책은 읽고 싶은 마음이 올 때 바로바로 읽는 게 좋습니다. ^^

시이소오 2017-02-04 12:09   좋아요 1 | URL
앗, 집을 떠날때 사이러스님이 선물해주신 책을 놓고 오는 바람에 못 읽었네요. 담주에는 읽고 독후감 쓸수 있겠습니다.^^

크사나 2017-02-04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치한 정신병자같아 괴로웠는데 이렇게 신랄하게 까주시니 잊고 있던 괴로움이 씻기네요 ㅋㅋㅋ

시이소오 2017-02-04 13:31   좋아요 1 | URL
체증이 가라앉으셨다니 다행입니다. ㅎㅎ

꼬마요정 2017-02-04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불어를 못하는 데다가 이방인 어려워서.. 어째서 내용은 아는데 어려운지 참 어렵습니다만. 시이소오님 글을 보니 뭔가 후련합니다^^

시이소오 2017-02-04 19:07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렵네요. 꼬마요정님, 후련하셨다니 혹평을 쓴 보람이 있네요 ^^

stella.K 2017-02-04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저 번역 논쟁이 일어났을 때 너무 독선적인 건 아닌가
그래서 거부감이 많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독자들은 잘 모르거든요. 그런 논쟁은 불어를 알면 모를까
그렇다고 이제와 새삼 이방인을 이해하기 위해 여태 공부하지 않은 불어를 공부할 순
없지 않습니까?
읽어서 이해되면 되는 거지 조사 하나, 무슨 문장 하나에 저리도 목숨을 거나
그런 생각이 많았죠. 그렇다고 그 논쟁에 낄만한 깜냥도 못 되고.

그런데 또 한편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우리나라는 어느 한 사람이 독식하는 경향이 많잖아요.
요즘에나 한 작품에 여러 번역가가 있을 수 있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작가의 작품에 한 번역가 체제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김화영 교수만 해도 까뮈 전문 번역가로 아성을 쌓았잖아요.
그리고 <타는 혀>나 <당신의 감동은 위험하다> 같은 책만 봐도 우리나라의 학맥이란 건
상상을 초월하죠. 결국 그 때문에 학문적 사고의 자유란 게 거의 보장이 안 되고.
그렇게 생각하면 이정서가 주장하는 것도 그 주장하는 바가 과격해서 그렇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그 사람이 주장하는 바가 옳던 그르던 지간에.
사람의 인식은 웬만해서 바뀌기가 어렵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오죽하면 이런 책까지 냈을까 끝까지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자세는
저에겐 별로 없는 자세라 그런 점도 저에겐 작용했을 겁니다.

근데 독자는 작가에게 쉬 마음을 주면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이소오님의 생각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더러 누가 노선을 분명히 하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ㅋㅋ

시이소오 2017-02-04 20:02   좋아요 1 | URL
스텔라 케이님, 황희정승 뺨치시겠습니다요. ㅎㅎ

양쪽 의견 전부를 감싸안는 스텔라 케이님의 포용력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

stella.K 2017-02-04 20:0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저한테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시이소오님 나빠요.ㅋㅋㅋㅋ

제목이 재밌어요.
예전에 개그맨 중에 자기가 스리랑카 이주 노동자라면서
개그했었는데 거기서 딴 거 맞죠?ㅋㅋ

시이소오 2017-02-04 20:09   좋아요 0 | URL
ㅋ ㅋ ㅋ ㅋ ㅋ ㅋ 저는 나쁘지않아요. ㄱㅓ기서 따왔어요 ^^

다락방 2017-02-04 1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원한 리뷰입니다 시이소오님!!

시이소오 2017-02-04 20:07   좋아요 2 | URL
블라디보스톡의 매서운 바람만큼요? ㅎ ㅎ
무사귀환을 환영합니다 ^^

캐모마일 2017-02-0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단견일 수 있지만요... 좋은 책은 저자의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그걸 어떻게 푸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주장이 다소 엉뚱하고 반사회적이라도 그 근거를 나름 충실히 들면서 설명과 설득에 공을 들인 책은 흥미롭고 읽을 만 하더라구요...그런데 주장만 있지 근거도 없고 썰도 약한 책들은 내용이 부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감히 읽어보지 않은 책을 폄하할 수준은 아니지만 소개를 읽으면서 좀 당황스럽네요. 한때 문단권력이 문제가 되었듯, 저자가 번역계의 현실과 문제점을 비판하는 시도는 충분히 공감가지만, 그 근거나 방식이 너무 아집스럽게 느껴집니다. 적어도 선을 지켰다면 그나마 낫지 않았을까 아쉽기도 하구요...서평을 읽고 여러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7-02-05 00:26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캐모마일 말씀처럼 이 사장님께서 균형감각을 유지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크네요. ^^;

정서 2017-12-04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 대해 무슨 오해가 그리 큰 건지, 아니면 정말 의도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의 책을 평하려면 읽어보고 평하길 바라요. 내가 출판사 대표라는 건 이제 세상이 다알고, 그건 드러내놓고 글을 쓰고 있으니... 그걸 무슨 대단한 발견인양 조롱하듯 쓰시지 마시고... 오랜만에 들어왔다, 이거 보고 가장 최근글 하나 남깁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 정말 이성적인 분이라면 좀더 깊이 사고하고 세상을 대하시길...

서로의 문화가 다르니 정확한 번역이 불가하다고요?
어제 우연히 ‘알쓸신잡’에서 진시황이야기를 하다가 ‘번역(?)’을 두고 킥킥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유희열이 자신의 노래 제목이 ‘뜨거운 안녕’이었는데, 영어 사이트에 ‘Hot bye’로 올릴 수밖에 없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폭소를 터뜨리는데,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서로의 문화가 다르니 정확한 번역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 요지였던 듯한데, 그냥 농담 삼아 나누는 자리였으니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지만, 저는 그러질 못했으니 제가 병은 병인 모양입니다. 같이 자리한 ‘텍스트의 신’ 유시민 정도는 ‘번역에 대해서는 그렇게 함부로 말해선 안 될 것 같아요’라고 한 마디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시절이 오긴 오려나요?
어제도 제 번역에 우려를 표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지적 하나하나에 의견이 분분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정말 얼마 안 되는 분이 이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또한 반면에 남의 번역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지만, 저는 남의 글을 옮긴 번역이니까, 이제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고 끝까지 하겠다는 약속도 드린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전은, 안볼 거면 모르되, 우리 아이들이 두고두고 읽을 인성 교육의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노인과 바다>연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Now, he thought, I must think about the drag. It has its perils and its merits. I may lose so much line that I will lose him, if he makes his effort and the drag made by the oars is in place and the boat loses all her lightness. Her lightness prolongs both our suffering but it is my safety since he has great speed that he has never yet employed. No matter what passes I must gut the dolphin so he does not spoil and eat some of him to be strong.
이것을 가장 잘된 번역으로 알려진 번역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제는 항력(抗力)에 대해 생각해야 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거기엔 위험도 따르지만 좋은 점도 있지. 만약 저놈이 안간힘을 쓰고 노를 묶어 만든 항력이 제대로 작동해 배가 가벼움을 잃는다면, 나는 줄을 너무 풀어줘야 해서 저놈을 놓치게 될지도 몰라. 또 배가 가벼워지면 저놈이나 나나 고통을 연장하는 꼴이 되고 말거야. 하지만 저놈이 전에 없이 굉장한 속력을 내고 있는 이상, 나로서는 오히려 안전한 셈이지. 어떤 일이 생기든지 간에 만새기가 상하지 않도록 내장을 빼내고 조금 먹고 기운을 돋워야겠는걸. (M사 세계문학전집, 김**번역)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냥 읽기만 하면 아마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다소 복잡한 문장이기에 영문을 비교해 봐도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역자는 ‘저놈이 전에 없이 굉장한 속력을 내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 낚시에 걸린 물고기는 한결같이 천천히(slowly and steadily) 움직이고 있다고 바로 앞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but it is my safety since he has great speed that he has never yet employed.
이 문장에서의 since는 ‘~때문에’라는 의미의 접속사로 쓰인 것입니다.
하여, 이 문장이 들어간 저 문맥을 바르게 번역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동장치(the drag)에 대해 생각해야만 해,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위험과 장점을 가지고 있어. 만약 그가 전력을 다하고 노에 의해 만들어진 제동장치가 제대로 가동하여 배가 기민함을 몽땅 잃는다면, 나는 너무 많은 줄을 잃어서 그를 잃게 될지도 몰라. 배의 기민함은 우리 둘 다의 고통을 연장시키겠지만 그가 아직까지 결코 시도해본 적 없는 엄청난 속력을 지니고 있을 수 있기에 그것은 내 안전장치이기도 한 게야. 어찌 되어가든 나는 만새기의 내장을 발라내서 상하지 않도록 하고 힘을 내기 위해 그것을 얼마간 먹어야만 하는 게야. (이정서 번역)
since 하나의 잘못된 해석으로, 위 번역은 지금 이야기 자체를 엉터리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단어 하나만 잘못 이해해도 반드시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문화’ 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역’ ‘의역’의 문제는 정말이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인 것입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잘 안 읽히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면 ‘문화적 차이 때문’ 일 거라고 너무나 쉽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남의 글을 옮기는 것이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글이니까 무엇을 잘못하고 잘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추신
제게, 혹은 제 번역에 할말있으면 언제든 제 페이스북에 들어와서 말씀하세요. 이렇듯 뒤에서 하시지 마시고. 페이스북 ‘이정서‘라고 치면 될 겁니다. 그럴 용기가 있으실지모르겠지만...


시이소오 2017-12-04 09:24   좋아요 0 | URL
우선 죄송합니다. 이런 허접한글을 번역자가 읽을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해 뒷다마가 되고 말았네요.

세가지만 말씀드릴께요.
첫째, 이정서님은 이글을 읽지않고 쓰신것 같습니다. 저는 이정서님 책을 읽고 쓴글입니다.

둘째. 제가 비판한 대목에 대한 반론이 없네요. 불어 못하시잖아요. 영어중역본 번역하시고 불어본은 참고하신거죠. 엄격히말하자면 이정서님이 하신번역은 영어중역본이잖아요. 아닌가요?

셋째.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단 저 페이스북 안합니다. 굳이 페북에 들어가서 반박의 글을 올릴만큼 한가하지도 않구요.

아무튼 번역자분께서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서 2017-12-0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의 ‘달인’ 시이소오 님께.

오랜만에 들어갔다. 제 책 밑에 님이 달아둔 장문의 글을 보고 이전에도 본 글도 있어 같은 거겠거니 여겨 무시하려 했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역시 그냥 무시할까 했는데, 실상을 모르는 순진한 독자들의 추천을 60개나 받고 있어 마냥 무시하기도 뭣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님이 김화영 번역을 옹호하며 지적한 것들 모두가 이미 여러 번 설명한 것들이라 여기서 전부를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몇 개는 링크로 대체하고, 새로운 의문 제기에 대해서만 답 드리겠습니다.

우선 tout de suite가 왜 ‘즉시’가 되어야 하는지도 여러 번 설명 드렸는데, 님은 “뭣이 다른디? 뭣이 다르냐고!!” 다져 물으셨지만, 그 부분은 다시 그 긴 글을 링크할 필요도 없이, 김화영 교수가 개정판을 내면서 그것을 ‘즉시’로 바꾸어놓은 것 한 가지만으로도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실상 님 같은 분들은 무슨 차이인지 못 알아듣더라도, 프로들은 단번에 알기 때문에 바로 잡으신 것이겠지요).

두 번째, ‘개를 산책시키다’가 왜 ‘개뼉다구 같은 소리’가 아닌지는 얼마 전에도 기자에게 한 말이 있으니 그걸로 대신합니다. 꼭 읽어보시길...
https://www.facebook.com/camus2014y/posts/2026616740958693?pnref=story

그 다음은,

“‘뫼르소의 살인’이 정당방위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언급하자니 한숨만 나온다.” 하신 부분에 대해서인데, 이 역시 여러 곳에서 답을 드렸지만, 이는 워낙 중요한 부분이기도 해서 한 가지만 더 추가해 언급하려 합니다.

*
우리는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사람을 죽인 이유를 단지 태양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 마음을 못 잡고 있다가, 우연히 마리를 만나고 다시 우연히 ‘악한’인 레몽을 사귀게 되고, 다시 우연히 그를 따라 해수욕을 갔다가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또 우연히 그 ‘아랍인 사내’와 단둘이 남게 되자, 머리 위의 ‘태양 때문에’ 총을 쏘게 된다는 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뫼르소의 살인 동기였던 것입니다.
님 그렇지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말씀 드린대로 시간관계상 앞만 쓰겠습니다. 나머지는 님께서 찾아보시길...)

우선 해변가에서 뫼르소가 처음으로 싸움에 연루되는 상황의 원본을 보십시오.

“만약 싸움이 벌어지면 마송, 네가 다른 하나를 맡아. 내 쪽은 내가 처리할게. 뫼르소, 만약 또 다른 자가 오면 그자는 네 몫이야.” 나는 “그래”라고 말했고, 마송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가 지금의 내게는 붉게 보였다. 우리는 일정한 걸음걸이로 아랍인들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사이의 간격이 차츰 좁혀졌다. 우리가 그들까지 몇 걸음 남겨 두지 않았을 때 그 아랍인들이 멈춰 섰다. 마송과 나는 걸음을 늦추었다. 레몽은 곧장 그의 상대에게 걸어갔다. 그가 그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다른 한 녀석이 그를 머리로 들이받으려 했다. 그러자 레몽이 먼저 주먹을 한 방 날리고는 즉시 마송을 불렀다. 마송이 이미 맡기로 되어 있던 자에게로 가서 힘껏 두 방을 먹였다. 아랍인이 물속으로 얼굴을 처박으며 엎어졌고, 그러더니 몇 초간 그 상태로 있었는데, 그의 머리 주변으로 수면에서 물거품이 터져 나왔다. 그러는 중에 레몽 역시 상대를 쳤고, 그자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레몽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자가 뭘 하는지 봐줘.”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조심해, 그자가 칼을 갖고 있어!” 그러나 레몽의 팔은 이미 베였고 입은 찢어졌다.
마송이 후다닥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다른 아랍인이 일어나서는 칼을 쥐고 있는 자의 뒤에 섰다. 우리는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칼로 위협하며, 천천히 뒷걸음질 쳐 갔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되었을 즈음 매우 빠르게 달아났다. 그사이 우리는 햇볕 아래 못 박힌 듯 서 있었고, 레몽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_(이정서 번역)

힘드시면 첫 문장만 보십시요.
« S’il y a de la bagarre, toi, Masson, tu prendras le deuxième. Moi, je me charge de mon type. Toi, Meursault, s’il en arrive un autre, il est pour toi. »

이것을 김화영은 이렇게 번역해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송, 싸움이 붙으면 넌 둘째 녀석을 맡아. 내 상대는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뫼르소, 만약 또 다른 놈이 오면 그건 네가 맡아.”

사실 이 문맥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실상 맨 앞의 부사 ‘만약(S’il)’입니다. 물론 김화영 교수 번역에도 의미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렇게 되고 나니 강조점이 ‘싸움(la bagarre)’에 찍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레몽이 마치 ‘싸움을 준비하는 양아치 우두머리’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구요.
그러나 제 번역을 보면 아시겠지만, 실제 레몽은 싸움을 부추기는 게 아닙니다. 혹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어찌어찌하자고 친구들에게 의견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레몽이 하는 저 말, ‘뫼르소, 만약 또 다른 자가 온다면 그자는 네 몫이야’라는 말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저기서 함의하고 있는 것이 뭘까요.
지금 상대가 둘뿐이니, 자칫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자기 둘이 상대할 테니 뫼르소는 끼어들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뫼르소를 배려하고, 상대인 ‘아랍인 사내’를 의식하는 말로, 레몽의 ‘정당성’을 말하고자 작가가 저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서 김화영 교수나 님이 이해하고 있는 레몽이라는 사내라면 저렇게 얘기할까요? 아무리 순화시켜도 ‘야, 우린 셋이니까, 저 두 새끼 혼내주자!’쯤이 되었겠지요.)

아무튼 대화로 풀기 위해 다가간 레몽에게 먼저 ‘머리를 받아’온 것도 그 ‘아랍인 사내’였지요. 그리고 마침내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힘으로는 안 되자 ‘아랍인 사내’는 칼을 꺼내든 것입니다.
단지 꺼내서 위협만 한 것이 아니고 레몽을 가해한 것입니다. 입을 찔렀으니 이것은 살인미수에 해당합니다.

자, 이제 중요한 사실을 밝히기에 앞서 우선 이 아랍인 사내의 정체가 뭘까요?
이 아랍인 사내는 애초부터 주먹으로는 레몽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양아치처럼 따라붙는 것은 바로 그 여자 때문입니다. 험악한 외모에 한 주먹하지만, 여자에게 만큼은 정말 바보스러울 만큼 순진하고 이용당하는 남자, 그것이 이 소설 속 레몽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인 것입니다. 저 ‘아랍인 사내’를 여자는 ‘친오빠’라고 소개했지만 사실은 ‘포주(기둥서방)’였던 것입니다. 여자를 이용해 레몽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악한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자에게 왜 레몽은 끝까지 저자세를 취할까요? 보다시피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사내인데 말입니다. 바로, 레몽은 이 아랍인 사내가 정말 여자의 ‘친오빠’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레몽은 모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남녀가 왜 친남매가 아닌가 하는 증거는 남자는 ‘아랍인’이고 여자는 ‘무어인’이라고 작가가 똑똑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화영을 비롯한 모든 역자들, 그리고 불문학도들은, 이러한 저의 지적에, ‘아랍인과 무어인’은 같은 종족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죠. 다만 작가가 동어반복을 위해 그렇게 쓴 거라고... 아무 관련 없는 논문들을 끌어다 대면서 말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다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레몽의 뒷주머니에 그 문제의 ‘권총’이 들어 있을까요? 안 들어 있을까요?
아마 님뿐만 아니라, 김화영 교수를 비롯한 어떤 역자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야말로 작가와 레몽만이 알뿐 그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정황상 지금 레몽은 뒷주머니에 권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아랍인 사내는 지금 레몽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까지 가지고 레몽을 추적해온 것이고, 그것을 알고 있는 레몽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집에서부터 권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레몽은 지금 상대가 칼로 자신을 찌르고 위협하는데도 그 권총을 쓰지 않은 것이구요.
만약 이때, 정말 그 사내를 죽일 마음만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레몽이었다면 그조차 정당방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다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보다시피 여기서도 뫼르소는 끝까지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싸움 장면은 단순한 듯해도 많은 복선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장면만으로도 뫼르소는 충동적으로 총을 쏠만큼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소설적으로는 갑작스러운 살인에 대한 개연성을 확보해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품의 행간을 읽자면(아니 당연히 그렇게 읽혀야 하는 것인데 번역이 따라가 주지 못한 것이지만), 이후 뫼르소가 총을 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에 법정에서 누구도 증언해줄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는 레몽과 그의 친구조차 알기에 누구라도 증언했다면 뫼르소에게는 정상참작이 되고도 남았을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레몽은 왜 그럼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다른 마음이 있거나 악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진심으로 뫼르소를 친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증언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님 같은) 사람들의 그에 대한 잘못된 편견으로 인해, 재판장은 아예 다른 걸 물어볼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부탁드리건대, 이런 모든 정황들은 사실 김화영 <이방인>을 읽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먼저 읽은 독자라면, 다시 제 번역을 비교해 읽어본다 한들, 이미 남아 있는 이미지로 인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역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아니할 수 없기에 저는 오늘도 이렇게 님 같은 분들에게 이 귀한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고, 눈앞의 문장만 봐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서재의 달인이 될 만큼 독서가에 평론가시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 페북에 올려두겠습니다.

Sarah Kim 2017-12-06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정서/이대식에게 과분한 칭찬을 하셨어요.
그 분은 불어를 모르고 <이방인>을 ‘번역˝했다고 하는 것처럼, 영어를 모르고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 분 영어 실력으로 <이방인> 영역을 어떻게 읽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