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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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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은 세 권의 한국 소설들, 김사과의 <천국에서>, 임솔아의 <최선의 삶>,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들은 여자다. <최선의 삶>의 강이는 10, <천국에서>의 케이는 20대 초반,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20대 후반이다.

 

<최선의 삶> 뒷 표지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박성원과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인 신형철의 추천사가 적혀있다. 특히나 신형철은 나는 이 소설이 서술하고 있는 이 모든 슬프고 아픈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라고 추천사에 적었다. 읽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최선의 삶>은 영화 <파수꾼>의 여학생 버전이다.

 

올해 한국 작가 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작가를 뽑자면 단연 장강명이 아닐까. 이상하게도 나는 장강명의 작품이 싫다. 초기작인 <표백>도 그렇지만 그의 캐릭터들은 참으로 재수가 없다. (아직 댓글부대는 읽지 못했다.) 한국 사회를 까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캐릭터들이 내뱉은 하소연이 내겐 불편하게 들린다. 내가 꼰대여서일까. 아니면 천민이어서?

 

이명박이 대통령 되었을 때 나도 이민을 알아봤다. 갈 방법이 없더라. 어떡하나. 참고 살아야지.

박근혜가 대통령 되었을 때 진짜 진짜 이민 갈려고 알아봤다. 여전히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오죽하면 병아리 감별사를 할 생각을 했을까. (프랑스 이민)

평생동안 닭똥 냄새를 맡으며 하루 종일 병아리만 만지며 살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한국이 싫다는 이유로 보란 듯이 호주로 유학, 시민권을 획득한다.

누군 뭐 한국이 좋아서 이러고 사는 줄 아나.’

한국이 싫어도 참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계나는 헬조선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성공한 삶이 아닐까.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에 대해선 많은 이웃 분들이 리뷰를 썼기에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 편의 소설 중 가장 재밌게 읽었다)

 

김사과 작가는 사과처럼 상큼하게 생기셨을까 짐작했건만 앞 날개의 사진보고 깜짝 놀랐다.

혹시 구미호?? (혹시 작가님이 보신다면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부러워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코가 참 크시네요.)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이 줄거리가 없다면 김사과의 <천국에서>도 줄거리가 없다.

그럼에도 두 소설 다 잘 읽힌다. 남녀간의 만남이 주된 내러티브를 이루기 때문일까.

 

케이도 계나만큼이나 재수없다. 뉴욕 맨해튼의 유학생이라니. (영어도 졸라 잘한다.)

그나마 일찌감찌 한국으로 귀국해서 봐줄만 했다.

 

케이는 홍대 모임에서 재현을 만나 곧 연인이 된다. 재현과의 다툼 이후 케이는 우연히 만난 초등학교 동창인 지원과 사귄다. 지원은 케이가 좋지만 한편으로 그녀와의 차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케이는 자신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나 다르다.

 

지원의 누나 캐릭터도 재밌지만 광주 치킨집 아저씨는 근래에 본 가장 재밌는 캐릭터다. 베를린 유학생, 문화운동가, 지인의 자살, 결국엔 치킨집 사장. 똑똑하고 진솔돼 보이기도 하면서도 나중에 찾아온 케이를 성추행할 정도로 막장이기도 하다. 하긴 아저씨가 오해할 만도 하다. 치킨 먹으러한 번 온 아가씨가 인생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니, 그것도 서울에서 광주까지.

 

케이는 생각했다. 그래서 악몽을 꾼 거고, 꿈은 꿈일 뿐이지. 하지만 그것은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 꿈은 케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찮고 시시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이 문장이 난 따끔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시시해지는 느낌이다. 원래 시시했는데 더 시시해지는지도. 인간의 삶은 몰락의 과정이라고 말한 건 피츠제럴드였던가?

결국 삶이란 시시함과의 대결인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내미는 기표란 얼마나 허망한것인가.

 

 

이렇게 살아가면 난 뭐가 되지? 아니,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거 그게 어떻게 살아가는 거야? 이해가 안돼. 모르겠어. 살아간다는 건, 좀 다른 거 아니야?......

수족관 속에 있는 물고기가 수족관을 부수면 어떻게 돼? 죽겠지. 뻔하지. 하지만 수족관 속에 있는 건 살아 있는 거야?.....

여기는 천국이고 나는 울고 있어. 근데 써머 여기가 진짜 천국이야? 써머 넌 그렇게 생각해? 정말? 진짜? 어떻게 여기가 천국이야? 내가 진짜 원하는 단 한가지가 빠졌는데, 아아, 나 이제 진짜 알겠어. 여기가 왜 이렇게 좋은지. 그건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거, 내가 진짜 원하는 거, 그게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평화로운 거야. 이 평화는 내가 원하는 그 딱 한 가지를 버리고 얻은 거야. 그러니까, 여기는 천국이 아니야. 여기는 지옥이야.

 

윗 문장을 읽다보면 사토리세대라는 용어가 떠오른다. 통계에 따르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일본의 젊은이는 75%에 달한다. 수족관 속의 물고기나 우물 안의 개구리나 그것이 자신의 세계라 미리 한정짓는다면 천국일 수도 있다.

거짓된 천국.

 

문득 그녀는 수족관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기억의 푸른 물은 나를 익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헤엄쳐 그 강을 건널 거니까. 그렇다. 헤엄쳐, 저 너머에 닿을 거다. 거기에 한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다. 거기가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겠다. 아니, 지금 간다.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김사과의 <천국에서>는 장강명의 <표백>에 대한 반박처럼 들린다. 완벽한 세상?

 

완벽한데, 여기는 너무나도 완벽한데....어떻게 뭐가 빠져 있을 수가 있지?

 

그러니까 김사과의 <천국에서>는 장강명의 <표백>이 실패한 지점을 넘어서려 시도하는 셈이다.

애초에 수족관 따위는 없다. 완벽한 세상이란 환상이거나 거짓된 믿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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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굳이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작품해설에 신형철이 이 책에 대한 다섯 개의 주석을 붙여 놓은 마당에?

황정은의 첫 번째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고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의무감을 느꼈다. 행여나 있을 오독으로부터 이 소설을 지켜 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형철의 윗 문장이야말로 비평가의 존재이유가 아닐까? 좋은 비평가, 평론가들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작가를 발굴해 그들의 책을 슬그머니 우리 앞에 내민다.

평론가란 독자와 책, 독자와 저자 사이에 중매쟁이, 혹은 소개팅 주선자 같은 게 아닐까? 평론가란 이 글은,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점이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독자와 책 사이에서, 독자와 저자 사이에 새로운 인연을 맺어주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작품보다, 작가보다 앞서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작가의 등을 우리 앞으로 떠밀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앉는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작품과 첫 만남의 설레임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만남은 주선자가 없었다면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뜻밖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좋은 소설, 좋은 작품만큼이나 좋은 비평가가 우리 곁에 필요한 이유일 것이고, 우리에게 신형철은 그야말로 벼락같은 축복이다.

      

이 소설을 몇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도심 한복판에 사십 년 된 전자상가가 있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그 와중에 이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인지를 묻는다. 이 소설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우선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이 사랑의 선량한 사람들의 그 선량함이 낳은 사랑이고 이제는 그 선량함을 지켜 나갈 희망이 될 사랑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가 되었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사려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절로 된 장시다. 이 소설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이렇다. 고맙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소설가의 눈을 통해서 본다. 우리 주변에 그것들은 존재했었지만 그들이 들여다보기 전에는 - 상징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서 전자상가, 그리고 특히 오무사가 그런 곳이 아닐까?

 

무재와 은교가 일하는 전자상가, 그리고 오무사와 같은 곳.

이런 곳을 언론에선 슬럼이라 불렀다.

 

무재에게 그곳은 아주 어릴적 부터 가족들과의 아련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라고 말해 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1970년 대 부터 지금까지 전구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 그곳에 가면 다른 곳에선 구할 수 없는 손톱만한 전구를 구할 수 있다. 주문한 전구의 개수에 상관없이 전구를 파는 노인은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 과자 주듯봉투에 한 번에 한 개씩 전구를 떨어뜨린다.

 

은교는 전화 통화중 무재에게 오무사 이야기를 한다.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있어요.

 

그래서 은교는 어느날 할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다.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나는 윗 문장이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다.

 

작품 속의 공간에서 그림자들은 곧잘 일어서곤 한다. 그림자를 따라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그림자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다. 그림자들이 일어설 때 마다, 그림자들이 슬그머니 밥상에 앉을 때마다 섬찟하다. ‘의 그림자가 있지만 작가는 무재와 은교를 통해 의 그림자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차가 고장 나 무재와 은교만이 남은 낯선 시골에서의 밤. 그림자를 무서워하던 은교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오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신형철은 근래의 한국 소설이 도달한 가장 윤리적인 절망과 희망 앞에서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 한다라고 자신의 글을 끝맺지만,

 

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우리는 절망에 빠지는 대신 잠시나마 희망을 가져도 좋으리라.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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