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골동품 상점 (무선)
찰스 디킨스 지음, 김미란 옮김 / B612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찰스 디킨스의 소설 중 <위대한 유산>을 먼저 읽은 건 축복이자 저주였다. (어릴 적 읽은 <올리버 트위스트><크리스마스 캐럴>은 제외하자.) <데이비드 코피필드>, <두 도시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 읽은 <오래된 골동품 상점>역시 명작이긴 하지만 <위대한 유산>에 못 미친다.

 

어쩌면 디킨스의 다른 작품을 다 합쳐도 <위대한 유산>의 위대한 경지엔 이르지 못하는 걸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물었을 때, 존 어빙은 마치 망치로 무릎을 때리면 올라오는 다리마냥, 거추장스런 수사 없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위대한 유산이요.”

 

내가 전체 작품을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필사한 책은 <위대한 유산>이 유일하다. (정말 즐거웠다.) 아직 <위대한 유산>을 읽지 않은 분들이 부럽다. 축복받은 거다. <위대한 유산>을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디킨스의 다른 소설들에 좀 더 관대할 수 있지 않을까.

 

넬이 살아 있나요?”

 

1841, 폭풍가 몰아치던 날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골동품 상점> 마지막 호를 싣고 오는 영국 배를 기다리던 숱한 인파 중에 어느 누군가가 물었다지. 얼마나 궁금했으면. 위기피디아에 따르면 이외 비견될 소동은 2007<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출간 때 뿐이라고 한다.

 

골동품 상점엔 천사와도 같은 넬과 넬의 할아버지가 살았다. 노인은 도박 중독이었다. 노인은 펭귄 맨 대니 드 비토를 연상시키는 퀼프에게 돈을 빌려 도박을 했다. 매번 허탕이었고 빚은 쌓여만 갔다. 퀼프는 노인으로부터 빚을 받아내기 위해 골동품 상점을 점거한다. 노인은 넬을 노리는 퀼프가 두려워 넬과 함께 야반도주한다. 넬은 도주하기 전 상점에서 일하던 키트에게 새장속의 새를 맡기고 이별을 고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넬의 모험이 시작된다. 넬과 할아버지는 인형극을 하는 코들린과 쇼트 일행과 동행한다. 넬의 할아버지를 신고하려는 두 사람의 음모를 눈치 챈 넬은 할아버지를 설득해 그들로부터 도망쳐 유랑한다. 유랑하면서 넬은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55년간 매일 남편의 무덤을 찾는 할머니, 병으로 죽어가는 소년, 소년을 사랑하는 교장, 밀랍 인형 쇼를 하는 잘리 부인 등등. 넬은 잘리 부인으로부터 일을 배워 전시장 안내를 맡는다. 방문하는 마을마다 넬을 보기 위해 오는 손님들이 있을 정도로 넬은 인기를 끌고 할아버지도 자기 몫의 일을 해내가면서 두 사람은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언제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 법.

 

넬과 함께 산책중이던 할아버지는 도박꾼들을 만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쏘냐. 할아버지는 가까스로 번 돈을 도박으로 다 털린다. 돈을 털린 할아버지는 넬이 자고 있을 때 넬의 방으로 들어와 돈을 훔쳐간다. 그 돈도 결국엔 사기 도박꾼들에게 다 털린다. 도박꾼들은 잘리 부인의 금고를 털라고 할아버지를 종용한다. 그 장면을 목격한 넬은 할아버지가 도둑질을 할까 무서워 할 수없이 또 다시 유랑에 나선다. 친구가 되고 싶었던 에드워드 양을 남겨둔 채.

 

소설의 주요 공간 중에 한 곳은 퀼프의 변호사인 브래스의 변호사 사무실이다. 브래스는 동생 샐리(‘눈가리개를 벗고 칼과 저울은 들지 않은 정의의 여신‘)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2층은 세를 내 놓는다. 퀼프는 브래스에게 스위블러(넬의 오빠인 프레드의 친구)를 서기로 추천한다. 어느날 2층 방으로 독신 남성이 세 들어온다. 변호사 사무실 지하에는 그들 하녀가 살고 있었다. 샐리는 하녀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않고 마치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하녀에게 정신적, 육체적인 폭행을 가한다. 스위블러는 그 장면을 몰래 훔쳐본다. 독신남성은 근처에서 인형극을 하던 코들린과 쇼트를 집으로 초청한다. 그리고 독신 남성은 그들에게 넬의 행방을 캐묻는다.

 

선량한 갈랜드 집에서 일하게 된 키트는 꽤 높은 봉급을 받게 돼 어머니 누들스 부인에게 생활비를 보태게 돼 기뻐한다. 갈랜드 댁의 까칠한 조랑말 위스커는 오로지 키트의 말에만 순종한다. 넬의 행방을 파악한 독신남성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형편이라 키트의 어머니인 누들스 부인과 동행하여 넬을 찾아 나선다.

 

또 다시 길을 나선 넬과 할아버지는 어느 선원들의 배를 타고 가 어느 마을에 다다른다. 춥고 배고프고 비는 오는데 넬과 할아버지는 돈 한 푼도 없어 막막한 처지였다. 어느 대장장이의 도움으로 넬과 할아버지는 하룻밤을 쉬어간다. 다음날 어느 마을에서 넬은 마을 사람들에게 구걸을 한다. 그러나, 석달 전에 일자리를 잃은 마을 사람들도 먹을 게 없었다. 굶주려 죽은 아이들도 있었다. 녹초가 될 정도로 걷던 넬은 어느 여행자를 만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여행자는 전에 만났던 가난한 교장이었다. 넬과 할아버지는 교장이 새로 부임받은 학교를 향해 동행한다. 퀼프는 넬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독신남성의 뒤를 미행한다. 누들스 부인과 독신남성은 넬을 찾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키트는 엄마를 감시하는 퀼프에게 경고한다. 퀼프는 키트에게 앙심을 품고 변호사인 브래스와 함께 음모를 꾸민다.

 

교장의 도움으로 넬은 교회 사택에서 살게 된다. 새 마을에서 넬은 마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 목사관에는 학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마튼 선생이 살았고 넬과 할아버지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준다. 학사는 넬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장단점을 꿰고 있을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한다. 넬은 그곳을 사랑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지만 이내 병으로 앓아눕는다.

 

스위블러는 브래스와 샐리의 하녀와 카드놀이를 하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내어준다. 또한 이름이 없던 하녀에게 마르셔네스란 이름을 지어준다. 브래스와 샐리는 음모를 꾸며 키트를 절도범으로 모함한다. 키트는 아벨씨와 아벨의 공증인 위서든 씨 앞에 결백을 주장하지만 결국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힌다.

 

키트를 절도범으로 만들 증인으로 스위블러를 이용해 먹은 퀼프와 브래스는 스위블러를 해고한다. 스위블러는 쓰러져 3주 동안을 앓아눕는다. 깨어난 스위블러는 도망친 마르셔네스가 자신을 간호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마르셰네스는 키트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음모를 꾸민 브래스와 샐리의 대화 내용을 스위블러에게 들려준다.

 

스위블러는 키트의 주인인 아벨씨와 공증인 위서든, 그리고 독신 남성에게 키트가 모함당했음을 알린다. 세 신사는 샐리와 협상을 벌인다. 퀼프의 사주를 증언하면 샐리의 죄를 탕감해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샐리는 이내 도주한다. 브래스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샐리의 전갈을 받은 퀼프는 도망치다 결국 강에 빠져 죽음을 맞는다.

 

키트는 사면된다. 갈랜드 씨는 넬의 행방을 알게 되어, 키트, 누들스 부인, 독신남성과 함께 넬을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 갈랜드씨와 오래전 헤어진 동생이 넬 마을의 학사였던 것. 또한 독신남성 역시 어릴 때 헤어진 넬 할아버지의 동생이었다.

 

여행객들이 도착했을 때 넬은 죽어있었다.

내일은 넬이 올거야라고 중얼거리던 넬의 할아버지는 어느날, 넬의 무덤 위에서 영원히 잠든다.

 

 

유년시절 구두공을 했을만큼 비천한 삶을 살았던 경험 때문인지 디킨스의 주인공들은 주로 사회 하층민인 레미제라블이다. 그들을 괴롭히는 이는 사람이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이도 사람이다. 평면화된 캐릭터, 권선징악이라는 다소 뻔한 도식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디킨스는 디킨스다.

 

시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풍부한 묘사,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다채롭고 개성 강한 캐릭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유머, 하층민에 대한 따듯하고 정감어린 시선. 인간의 선에 대한 굳건한 믿음 등은 오로지 디킨스만의 특성이다.

 

작은 새처럼 여리고 온화한 넬이 살아가기에 세상이라는 새장은 너무 견고했다. 넬은 죽었지만, 사랑스러운 넬의 미소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통과 근심이 사라진 한 조각의 꿈처럼남았다.

 

세상은 폐허와도 같은 황폐한 집이다. 도처에 악은 만연해 있다. 그러나, 선한 사람도 있다. 현실에서도 넬처럼, <위대한 유산>의 조 가저리처럼,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사람들이 있다.

 

그토록 맑은 영이라니! 담혜! 연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스친다. 돌아가신 어머니, 신영복 선생님의 얼굴도 떠오른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이 삶이 이제 그만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 덕분에 구원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세상은 살만하다.

세상을 살아가게 해 주는 건 신이 라기보다는,

사람이다.

 

만일 지금 괴롭다면,

그건 디킨스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줄친 문장 

 

p33. 그는 또 ‘어젯밤 태양이 내 눈을 너무 강렬하게 비춘 탓’에 오늘 자신의 모습이 조금 초라하다며 양해를 구했는데, 술에 무척 취했었다는 사실을 이런 수식 어구를 써가며 최대한 멋스럽게 표현했다.

"하지만 가녀린 촛불 아래에서 영혼의 불꽃이 일고 우정의 날개가 털갈이를 하지 않는 한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로즈 와인으로 영혼이 성숙하고 지금이 우리 삶에서 최고의 행복이 최소인 순간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스위블러가 탄식하듯 낮게 읊조렸다.

p339. 자로 코를 문지르다 그것을 손에 쥐고 손도끼처럼 휘둘러보았다. 아주 쉽고 자연스러웠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를 휘두르며 조금씩 샐리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스위블러는 이렇게 불안감을 누그러뜨리며 자를 휘두르는 횟수를 줄여나갔다. 심지어 쉬지 않고 글을 대여섯 줄까지 쓴 것은 진정 위대한 인간승리였다.

p447, "내 기분을 잘 알거든. 비웃어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저기를 봐라. 나의 친구란다. "
"불 말인가요?" 넬이 물었다.

"불은 내게 책과 같단다." 그가 말했다. "읽은 법을 배운 유일한 책. 불은 내게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지. 또 그것은 음악이기도 하단다. 나는 어떤 소음 속에서도 불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 타오르는 불은 자신의 함성 속에 또 다른 목소리를 지녔지. 불은 자신의 초상화도 지녔단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에 얼마나 많은 낯선 얼굴과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는지 너는 모를 거다. 불은 나의 추억이기고 하단다. 불은 내 인생 전체를 보여주거든

p465. 넬의 이야기를 듣고 교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깊은 애정과 정직함으로 가난과 고난에 맞서 싸우고, 온갖 불확실함과 위험을 혼자서 의연히 견뎌 내다니! 아직 세상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가득 차 있구나. 가장 강인한 사람은 세상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고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

교장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선의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는단다."

p481. "이곳은 나리를 환영합니다. 5월의 꽃이나 성탄절의 석탄만큼 나리를 환영하죠."

p495. "지면광고를 작성할까요" 브래스가 펜을 들며 말했다. "그의 인상착의를 떠올린다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그의 다리가.....?"
"휘었지." 지니윈 부인이 말했다.
"휘었다고요?" 브래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허리띠도 차지 않은 쭈글쭈글한 무명 바지에 다리를 쩍 벌리고 거리를 활보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아아! 눈물의 골짜기 같은 세상이여! 다리가 휘었다고 했죠?"
"그렇게 심하게는 아니고요." 퀼프의 아내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다리가 휘었음" 브래스가 글자를 소리 내어 읽으며 써내려갔다.
"큰 머리, 짧은 몸통, 휜 다리."
"완전히 휘었음이라고 하게." 지니윈 부인이 제안했다.

p534.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모든 일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대부분 상대적이다. 만약 지금 넬이 이 소박한 장소의 평화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면 그건 지친 발로 여행하며 겪었던 어둡고 힘들었던 과정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엄숙한 곳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깊은 울림과도 같은 것이리라. 낮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그곳의 빛은 낡고 울적해 보였다. 엄청난 시간의 입자로 정화되어 부패를 담고 있는 듯한, 흙과 곰팡이를 떠올리게 하는 실내 공기가 아치형 복도를 통해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고, 주렁주렁 매달린 기둥은 마치 지나간 시간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오랜 세월 경건한 발걸음에 닳고 깨진 바닥은 순례자의 발자취에 지워져 이제는 부서질 것 같은 돌만 남았다. 이곳에는 희미한 빛줄기, 돔형 지붕의 침하, 조금씩 허물어지는 벽, 낮게 내려앉은 바닥, 비문의 글이 닳아 없어진 장엄한 무덤, 대리석, 돌, 철, 나무, 먼지와 같은 폐허의 공통된 상징물들이 모두 존재했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소박하게 살았던 사람과 부자로 살았던 사람, 위풍당당한 사람과 볼품없는 사람 이 모든 사람이 이곳에서는 평등했다.

p535. 마침내 종탑 꼭대기에 올라섰다. 아! 쏟아지는 빛의 찬란함이여. 사방으로 뻗어 나가 맑디맑은 푸른 하늘과 만나는 들과 숲,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떼들, 푸른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은 나무들 사이에서 나는 연기,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무덤가에서 노는 아이들. 이것은 마치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온 것 같았고, 천국에 한층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었다.

p544. "일흔아홉이라니까." 데이비드가 애석하다는 듯 고래를 흔들며 대답했다. "난 본대로 얘기했네."
"보았다고?" 교회지기가 말했다. "아, 참 데이비. 여자들은 항상 나이를 속이잖아."
"그건 그래." 데이비드가 순간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훨씬 많을 거야."
"분명 그럴 걸세. 아니, 외모만 봐도 그렇잖아. 그녀에 비하면 자네나 난 소년이지."
"나이가 좀 들어 보였지." 데이비드가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네. 분명 나이가 들어 보였어."
"몇 살처럼 보이던가. 일흔아홉, 고작 우리 나이로 보이던가?" 교회지기가 말했다.
"적어도 다섯 살은 많아 보였지!" 데이비드가 외쳤다.
"다섯 살은 무슨!" 교회지기가 대답했다. "열 살은 많아 보였네. 여든 아홉은 충분히 됐을 거야. 그녀의 딸이 죽었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 베키 모르간이 여든 아홉이 다 됐었고, 그게 10년 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오! 이런."

이 유익한 주제에 대해 도덕적 소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던 데이비드는 죽은 여인이 거의 백살에 가깝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여러 증거를 제시했다. 상호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리고 교회지기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넬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 상대방이 자신보다 오래 살지 못할 거라 단정하며 헤어진 두 사람은 베키 모르간에 대해 함께 내린 그 사소한 결론에 큰 위안을 얻었다.

p553.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러는데," 아이가 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넬이 천사가 될 거래. 새들이 다시 노래하기 전에. 하지만 넬은 천사가 되지 않을 거지? 그럴 거지? 하늘나라가 좋긴 하지만 날 두고 가지는 마, 넬. 제발 떠나지 마!"

p560. "다시는 미로처럼 얽히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여인의 배신을 상징하는 이 모자를 쓰겠어. 다시는 여인과 장밋빛 미래를 맹세하지 않으리. 내 존재의 잔상으로 그녀는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는 향유를 죽여 버리겠군." - 맥베스 문장들을 결합.

p569. 난 걸친 옷 따윈 보지 않아. 마음을 보지. 옷을 본다는 건 새장을 보는 것과 같단다. 하지만 마음은 그 새장 속의 새지. 아! 얼마나 많은 새가 새장 속에 갇혀 수없이 털갈이를 하고 새장 사이로 부리를 내밀어 인간을 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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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4-1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 앱이서 친구 서재 안에서 검색 이런거 있음 좋겠네요ㅜㅜ
위대한 유산 찾다가 댓글 드려요. 아 필사~ 저도 한 번 해보고 싶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시이소오 2016-04-15 10:01   좋아요 0 | URL
초딩님도 굿모닝 입니다^^

초딩 2016-04-1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 어디 출판사 필사 하셨어요? :-)

시이소오 2016-04-15 09:56   좋아요 1 | URL
아, 저는 북스캔 출판사네요^^

2016-04-15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위대한 유산을 필사하시다니!! 존경할 꺼리를 하나 더 늘리셨습니다. 와우! 디킨스에 대한 모든 생각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위대한 유산은 진정 걸작이에요 ^^

시이소오 2016-04-15 15:26   좋아요 0 | URL
컴퓨터 자판으로 했어요 ㅋ
그쵸? ^^

북깨비 2016-04-1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책은 커녕 영화도 안 본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올리버 트위스트와 크리스마스 캐럴은 초등학교때 축약본으로 읽었고 두도시 이야기는 고등학교때 영화로만 봤어요. 저 지금 완전 축복받은 상태인데 시이소오님 리뷰 읽고 위대한 유산이 막 무지무지 읽고 싶어졌어요. 아 몰라요 저 어떡해요 ㅋㅋㅋ

시이소오 2016-04-15 22:15   좋아요 0 | URL
ㅋㅋ 축복받은 북깨비님,
꾸~~~욱 참으세요 ^^
 

얼마 전 어떤 블로거의 글을 보고 너무너무 화가 났다. 그 블로거는 복지가 늘어난다고 해서 출산율이 늘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데이터들을 늘어놨다. 특히나 전 세계적으로 아시아 여자들은 복지 수준에 상관없이 출산율이 줄어들었으므로 복지와 출산율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치 부력의 비밀을 밝혀낸 아르키메데스처럼 엄청난 진리를 알아냈다는 듯 호들갑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복지가 늘어나서 출산율이 줄어든 건가? 그렇다고 복지가 줄어들면 출산율이 올라가나? 프랑스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복지정책으로 출산율이 떨어졌나? 그 블로거는 파워블로거에 최근에 환율에 관한 책을 쓸 만큼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똑똑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사악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작정하고 덤빈다면 난 저 블로거의 글에 반박할 만한 데이터를 수천 개는 수집할 자신이 있다.


세상에는 3가지 거짓말이 있다. 하나는 선의의 거짓말이고 또 하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통계다. 


- 마크 트웨인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데이터들을 수집하는 건 이제는 일도 아니다. 최근에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실험의 결과와 반대되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또한 같은 데이터로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1990년대 미국의 모든 전문가들은 범죄율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범죄율은 1990년대 접어들어 갑자기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끊임없이 감소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말콤 글래드웰은 뉴욕시 낙서와의 전쟁을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다. 반면 <괴짜 경제학>의 스티븐 레빗은 낙태의 합법화때문이라 주장했다. 두 사람에겐 같은 데이터가 주어졌지만 결론은 달랐다.

 

이 사례에 대한 가설은 실은 무수히 많다. 언론에 자주 노출된 가설들만 7개 정도 된다. 혁신적 치안 정책, 징역형 증가, 마약시장 변화, 인구 고령화, 강력한 총기 규제 정책, 건실한 경제, 경찰 인원 증가 등등.

 

위 블로거의 주장은 명백한 기본적 귀인오류다. 기본적 귀인 오류란 타인의 행동 또는 문제 상황에 대한 이유를 환경적 요인이나 특수한 외부 요인에서 찾지 않고, 성향이나 성격 등 내적 요인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말한다. , 아시아계 여성들이 애를 낳기 싫어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계 여성들이 애를 낳기 힘든 환경에 노출되었을 확률이 더 높다.

 

그렇다면 경제학자, 이코노미스트들은 왜 저렇게 사악하고 멍청한 짓거리를 일삼는가?

 

카너먼에 따르면 이론에 따른 맹목이라는 고질병이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에게 생겨났다.

 

이 같은 이론에 따른 맹목의 병폐는 오늘날 경제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모든 학자들에게 스며들어 있다. 그들이 받았던 경제학적 훈련은 이콘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엄청난 통찰력을 선사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상식적인 직관을 모두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이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그들이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리처드 탈러,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이론에 대한 맹목은 이제 비단 경제학자들의 문제라 할 수 없다. 거의 모든 학문에 스며들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인간과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을 다루고 있음을 망각한다. 피와 살과 생명을 지닌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시키려는 것. 심지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는 것. 이것은 악이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유사 이래로 폭력이 감소했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인간의 죽음을 데이터로 환원시켰다. 물론 그는 자신이 인간의 생명을 다루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망각했다. 하여 국가에 의한 살인으로 고작 1억 명이 죽었을 뿐이라고 아무런 생각없이 내뱉는다.

 

...... 이런 자에게는 통계가 실제 인간의 삶보다 더 중요하며, 설령 그가 인류를 위해 발언한다 해도 그에게는 한 국가의 크기와 정치, 경제적 권력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개인적인 것은 없으며 그저 사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유동적 근대의 새로운 사탄이다.

 

악이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던 시대는 운이 좋았다. 오늘날 우리는 악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보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할 때 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타자를 일부러 잊는 것, 우리 곁에서 살아 있고 실재하며 무언가 옳은 것을 하거나 말하는 사람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와 다른 종류의 인간을 인지하고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장벽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도덕적 불감증>

 

신은 죽었다. 하지만 악마는 아니다. ‘힘 있는 자들에 들러붙어 인간의 얼굴을 외면하고 오히려 인간을 착취하기 앞장서는 너희 학자들.


너희들이 악마다. 너희들이 사탄이다.

 

학자여, 이 무정한 자여!

너희 뱀 같은 혓바닥과 손가락으로 말미암아

고통의 나락에 빠진 인간들의 신음 소리와 피눈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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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6-04-1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 데이터를 내세우며 뼈와 살과 삶이 있는 인간들을 잊어버린 이들을 만날 때의 두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5 13:20   좋아요 0 | URL
신자유주의가 낳은 새로운 악마들이죠 ^^;

cyrus 2016-04-15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블로거의 글을 보고 너무너무 화가 났다’라는 문장만 봤을 뿐인데, 마음이 뜨끔거렸습니다. 어제 저를 말한 줄 알았어요.. ㅎㅎㅎ 이제 알라딘의 악마가 되지 말고, 천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5 13:18   좋아요 0 | URL
어제 무슨일이 있었나요? ㅎㅎ

cyrus 2016-04-15 13:20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좀 실수를 했습니다. ^^;;

시이소오 2016-04-15 13:24   좋아요 0 | URL
사이러스님 서재에 가봐야겠군요 ㅋ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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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단편집을 읽으면 단편들 마다 수준 차가 있기 마련 아닌가. <축복받은 집>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9편의 단편 중 단 한편도 버릴 게 없다. 완벽하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데뷔작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앨리스 먼로나 플래너리 오코너는 이류 작가로 보일 정도다.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평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프리체트 V. S. Pritchett는 단편 소설을 눈꼬리로 힐끗 본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힐끗 본다라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힐끗 본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통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그 순간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탄생한다. 나아가 운이 좋으면 보다 깊이 있는 결과와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단편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이 힐끗 보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혜와 문학적 기술이 무르익고(재능),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진다.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 캐롤 스클레니카.

 

긴장감, 사물에 관한 풍성한 세부 묘사, 정확하고 정밀한 단어, 예상을 뛰어넘는 대사<섹시>, 엄청난 반전<일시적인 문제>, 포복절도할 유머<진짜 경비원>,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감동<세번째 이자 마지막 대륙>도 있다. <축복받은 집>엔 독자가 단편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완벽히 갖춰져 있다. 줌파 라히리의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른다. <축복받은 집>은 문학이 선사할 수 있는 종합선물셋트.

 

순수문학을 표방함에도 <축복받은 집>의 어떤 단편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신춘문예용한국단편문학과의 결정적 차이다. 화려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장 밑으로 부글부글 용암이 끓어 넘친다. 한 페이지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축복받은 집>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준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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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4-1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단편집에서 <섹시>를 정말 좋아해요. 사실 이 단편집 보다는 [그저 좋은 사람]을 훨씬 더 좋아하고요. 시이소오님 혹시 [그저 좋은 사람]도 읽어 보셨나요? 그 안의 단편 <지옥-천국>은 저의 패이버릿이에요! >.<

시이소오 2016-04-14 14:20   좋아요 0 | URL
그저 좋은 사람 아직 못봤어요. 덕분에 기대감에 간질거리네요^^

2016-04-1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권유군요. 꼭 읽겠어요.

시이소오 2016-04-14 15:27   좋아요 0 | URL
축복받으세요 ㅋ ^*^

조르그 2016-04-14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겠습니다
읽을 수밖에 없군요

시이소오 2016-04-14 17:17   좋아요 0 | URL
ㅋ 즐독되시길 ^*^

samadhi(眞我) 2016-04-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집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읽어볼래요.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가 그렇게 천재성을 지녔다고 하니 질투나서 괴로울까봐 읽기를 미루고 있는데요.

시이소오 2016-04-14 17:54   좋아요 0 | URL
ㅋㅋ 질투하실것 까지야. 장편보다 단편에 소질이 있는 작가 같습니다. 저지대는 그저 그랬거든요. ^^

samadhi(眞我) 2016-04-14 18:13   좋아요 0 | URL
김영하같은 스타일인가봐요. 김영하도 장편은 별로거든요.

시이소오 2016-04-14 18:17   좋아요 0 | URL
작가들마다 자신에게 맞는 호흡이 있나봐요. 때려죽여도 장편은 못쓰겠다는 작가들도 있는걸보면요 ^^

samadhi(眞我) 2016-04-14 18:19   좋아요 0 | URL
정말로요. 춤도 노래도 문장도 죄다 호흡의 문제네요.

시이소오 2016-04-14 18:23   좋아요 0 | URL
호흡을 다른말로 하면 리듬일까요? 자신만의 리듬을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

CREBBP 2016-04-1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같네요. 저도 줌파 라히리 광팬입니다.

시이소오 2016-04-14 19:50   좋아요 0 | URL
읽고나면 다들 푹 빠지나봐요. ^*^

2016-06-2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았어요. 추천 고마워요 ^^

시이소오 2016-06-22 22:52   좋아요 0 | URL
힌님이좋으셨다니 저도 좋네요^^
 

p11. 그는 누구보다 안토니오 그람시로부터 이론을 배웠고 가장 큰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주로 게오르그 짐멜로부터, 특히 그의 갈등 이론보다는 정신적 삶Geistesleben’에 대한 개념과 그의 생철학Lebensphliolsophie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인의 이 생철학 니체보다는 루트비히 클라게스와 에두아르트 슈프랑거의 생철학 특히 그의 삶의 형식Lebesformen’ 개념은 바우만에게 많은 이론적 주제와 이론화의 형식들을 제공했다.

 

p12. 바우만이 그려내는 사고의 지도 위에서 우리는 그람시와 짐멜의 철학 또는 사회학적 견해들뿐만 아니라 그가 경애하는 철학자인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윤리적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바우만에 따르면 20세기 최고의 윤리학자인 레비나스의 통찰들은 타자의 인격과 존엄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의 생명을 구하기까지 하는 기적에 관련되어 있다.

 

나아가 그는 사회학이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간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며,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고 말했다.

 

p13. 비타우타스 카볼리스는 사회학과 사회과학 전반이 멜로디를 잃은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바우만은 이와는 반대 사례이다. 그의 사회학은 음향을 방출하고, 당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응시이다. 당신은 눈을 돌리며 응답을 회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 탐색하는 시선이나 주위의 물체들을 흡수하는 소비하는 시선과 달리 바우만의 시선은 윤리적 거울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p14. 바우만은 보는 자를 보고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며 말하는 자에게 말한다.

 

바우만 이론의 핵심 개념인 유동적 근대 liquid modernity’에 대해 그는 <액체 근대> 2012년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한때 탈근대라고 (그릇되게) 일컬어진 그리고 내가 더 명료하게 유동적 근대라고 부르기로 선택한 것은 변화만이 불변한다는, 불확실만이 확실하다는 점에 대한 점증하는 확신이다. 백 년 전에 근대적이다라는 말은 완벽의 최종 상태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최종 상태가 보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향상의 무한성을 의미한다.

 

p15. 이들의 일대기는 근대 경제 구조의 굳이 이름 붙이자면 자본주의의 개척자들, 기업가들, 초기 근대 미술의 천재들 등의 일대기가 아니라 화형에 처해진 이단자이자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 16세기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메노키오 같은 사람들의 일대기이다. 역사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런 말 없는 단역배우들은 우리 자신이 경험하는 불안, 애매함, 불확실, 불안정 등에 실체와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p18. 기술은 당신이 방관자로 있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나는 해야만 한다.”로 변질된다. 나는 할 수 있다. 고로 나는 해야만 한다. 딜레마는 허용되지 않는다.

 

p19. 한편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과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비밀을, 즉 이야기하거나 공표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없앰으로써 사생활을 식민지화하려는 욕망은 새로운 악의 두 가지 표현 형태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일대기, 내밀한 이야기, 삶과 경험 등이 전 세계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무감각과 무의미의 한 증상이다.

 

p21. 악의 상징적 지리학은 정치체제의 경계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심리 상태, 문화, 민족성, 사고방식, 의식의 경향 등에 스며들어 있다.

 

악은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악은 전쟁이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 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P24. 이것은 자신이 의무를 이행하는 도덕적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면서 어느 낯선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악, 유동적 근대에 존재하는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의 사악함이다.

 

...... 이런 자에게는 통계가 실제 인간의 삶보다 더 중요하며, 설령 그가 인류를 위해 발언한다 해도 그에게는 한 국가의 크기와 정치, 경제적 권력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개인적인 것은 없으며 그저 사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유동적 근대의 새로운 사탄이다.

 

...이 유동적 근대가 평범함으로 변모시킨 것은 무력한 선이 아니라 악 자체이다. 오늘날 가장 불쾌하고 충격적인 진실은 악이 연약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철학자, 문학가의 저작을 통해 알던 악마나 악령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악은 강력하지 않으며 널리 흩어져 있다. 불행하게도, 슬픈 진실은 이것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모든 인간에게 잠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악의 잠재력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문화, 인간관계 등으로도 이런 상황과 사정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악은 허약함의 가면을 쓰고 있으며 동시에 허약함이기도 하다.

 

악이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던 시대는 운이 좋았다. 오늘날 우리는 악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보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할 때 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타자를 일부러 잊는 것, 우리 곁에서 살아 있고 실재하며 무언가 옳은 것을 하거나 말하는 사람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와 다른 종류의 인간을 인지하고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장벽이다.

 

P26. 검열의 새로운 형태들은 인터넷에서 발견되는 가학적이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언어와 아주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는데, 이런 언어는 특히 익명 댓글에서 언어적으로 난무하는 얼굴 없는 증오심, 가상 변소에서 태연하게 싸지르는 배설물, 비할 데 없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인간적 무감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의 예민한 지각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세계의 위인들뿐 아니라 다수의 단역배우, 통계적 개인, 통계적 단위, 군중, 유권자, 보통 사람, 여러분 등에게도, 즉 기술관료들이 구성한 그 모든 자기 기만적 관념에게도 인간이 존엄하고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다는 인식을 돌려주어야 한다.

 

인간에게서 얼굴과 개성을 빼앗는 것은 이민자들이나 상이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의 존엄성을 짓밟고 주로 그들 안에서 위협을 찾아내려 하는 것만큼이나 사악한 짓이다. 이 악은 정치적 올바름(실제 상황의 희화로 전락하곤 하는) 관료화되고 강제적인 관용을 통해 극복될 수 없다.

 

P27. 이 책은 파편화, 원자화, 그리고 그에 따른 감수성의 상실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서 귀속감의 재발견 가능성에 관한 대화이다. 또한 이것은 현재 인류와 인류의 도덕적 상상력의 탈도덕화가 놓은 덫과 많은 위협에서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새로운 윤리적 전망에 관한 대화이기도 하다.

 

세계화는 우리가 피신하여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땅이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좌절된 희망이다. 또는 무의미, 기준의 상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불감증과 감수성의 상실에 맞설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신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좌절된 희망이다.

 

개인화라는 무감각, 도덕적 고통을 마취하는 소비의 굴레

 

그러나 고통의 이런 경계, 경고, 예방 기능은 유기적이고 신체적인 현상에서 인간관계의 영역으로 옮겨온 불감증이라는 관념에 도덕적이라는 한정사가 붙으면 거의 잊히는 경향이 있다. 만약 인간의 공동생활과 공동체의 생존력에 무슨 문제가 생기려 한다거나 이미 생겼다는, 그래서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태가 더 악화될 것이라는 조기 신호를 제때에 탐지하지 못한다면, 위험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너무 오랫동안 경시될 것이며 마침내는 공동체의 자기방어를 위한 토대로 작용할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피상적이고 형식적이며 허약하고 분열적으로 변하여 못쓰게 되는 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공동체와 달리 네트워크는 개인적으로 조합되고 개편되거나 해체되며, 네트워크의 유일한, 그러나 매우 변덕스러운 기초는 이것을 지속하려는 개인의 의지이다. 그러나 관계는 두 개인이 만나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불감증해진 개인은 즉 어느 타자의 안녕에 대한 책임을 내팽개칠 권한이 있고 또 그러길 원하는 개인은 좋든 싫든 동시에 자신의 도덕적 불감증의 대상이 지닌 도덕적 불감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순수한 관계는 해방의 상호성보다는 도덕적 불감증의 상호성을 예고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둘의 모임은 더 이상 도덕의 온상이 아니다.

 

유동적 근대사회에서 탈도덕화는 소비자와 상품의 관계를 모범으로 삼아 전개되며, 이것의 효과는 이 관계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얼마나 잘 이식할 수 있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우리의 모습을 닮은 평범한 악에 관하여

 

그러나 만약 동유럽에서 근대성의 어두운 면이 합리성과 문명의 허약안 덮개를 파괴하는 절대적으로 비합리적인 힘으로서 관철된다면, 20세기 서유럽 문학에서는 전혀 다른 유형의 근대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즉 그것은 합리적이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며 익명적이고 비인격화되었으며 인간의 책임과 합리성을 별개의 영역으로 확실하게 분할하고 사회를 원자들로 파편화하며 자신의 초합리성을 통해 자신을 보통 사람들에게 불가해하게 만드는 근대성이다.

 

요컨대 동유럽에서 근대성의 종말론적 예언자가 미하일 불가코프라면, 중유럽에서 이에 상응하는 인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카프카와 로베르트 무질일 것이다.

 

유동적 시대에 평범한 악은 어떤 모습인가

 

어떤 면에서 이것은 밀란 쿤데라가 그의 소설 <만남>에서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신들은 목마르다>의 주인공에 관해 이야기 함녀서 강조한 것과 비슷하다. 즉 젊은 화가 가믈랭은 프랑스 대혁명의 열광적 지지자가 되지만, 그는 혁명이나 혁명의 발기자인 자코뱅 당원들과 무관한 상황이나 관계 속에는 전혀 괴물이 아니다. 쿤데라는 가믈랭의 이런 정신세계를 진지함의 사막또는 유머가 없는 사막으로 멋지게 비유하면서 가믈랭이 단두대로 보낸 그의 이웃이자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인 브로토를 그와 대비시킴으로써 자신의 요점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예의 바른 사람 안에 괴물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눈과 눈, 얼굴과 얼굴이 마주하는 실존적 상황 대신에 인간의 삶과 인격이 경험적 데이터와 증거 또는 통계로서 소비되는 포괄적 분류 체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부터 조지 오웰의 소설까지 악은 늘 존재했다, 다른 모습으로

 

오웰의 비전은 서구보다 동구의 역사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 비전은 무엇보다 동구 유형의 전제정치가 서구로 쇄도하여 서구를 지배, 정복, 노예화한 이후에 서구가 띠게 될 모습의 예상이었다. 그것의 핵심 이미지는 한 인간의 얼굴을 땅바닥에 짓이기는 한 군인의 가죽 장화와 같았다. 반면에 헉슬리의 비전은 명백히 서구적 창조물인 임박한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선제 반응이었다. 그것의 중심 주제는 힘을 빼앗긴 인간들의 농노 신분에 관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 경우에 그것은 몽테뉴의 주장이 맞다면 에티엔 드 라 보에티가 300년 전에 만들어낸 용어인 - ‘자발적 복종이었다. 즉 채찍보다 당근을 더 상요하고 폭력, 노골적 명령, 가혹한 강제 대신에 유혹과 매혹을 일처리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유토피아 전에 예브게니 자먀찐의 소설 <우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베르 카뮈는 더 큰 선 등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범죄가 인간의 범죄 가운데 가장 극악하다고 말한 바 있다.

 

1912년에 처음 발표된 아나톨 프랑스의 <신들은 목마르다>를 읽는 21세기의 독자들은 아마도 당혹감과 황홀감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십중팔구 그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작가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밀란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세계 앞에 걸린 커튼을”, 이전 해석들의 커튼을 찢어발겨” - 쿤데라의 견해에 따르면 소설가의 사명이자 모든 소설 쓰기의 소망인 - “위대한 인간적 갈등들을 선과 악 사이의 투쟁으로 순진하게 해석하는 데서 벗어나 그것들을 비극의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독자들을 위해 아직 엮이지도 않은, ....“세계 앞에걸리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는 커튼을 자르고 찢는 데 사용할 도구를 고안하고 시험하는 데도 성공했다.

 

아나톨 프랑스가 펜을 내려놓고 완성된 소설을 마지막으로 훑어보던 순간에 볼셰비즘’, “파시즘심지어 전체주의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어든 다른 언어든 사전에 실리지도 않았으며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이름들은 어떤 역사책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에밀 시오랑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로베스피에르와 마라의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젊은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불운이 그들의 운명이다. 불관용의 교리를 선언하는 것은 그들이며 그 교리를 실행에 옮기는 것도 그들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젊은이가 그럴까? 그리고 오직 젊은이들만이 그럴까? 그리고 오직 로베스피에르나 스탈린의 시대를 살았던 자들만이 그럴까? 이 세 가정은 모두 명백히 틀린 듯하다.

 

사생활에서 마주친 악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착하고 평범하며 호감이 가는 미국의 처녀 총각들은 괴물도 아니었고 변태도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의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했거나 추측, 억측, 상상, 공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고향에 사는 이웃들은 그들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그 매력적인 처녀 총각들이 아부 그라이브 고문실의 스냅사진에 찍힌 괴물들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오늘날까지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인이다.

 

한나 아렌트의 관찰에 따르면 나치 유혹자들 가운데 진짜 천재는 히믈러였다. 왜냐하면 그는 괴벨스처럼 보헤미아 출신도 아니었고 슈트라이허처럼 성도착자도 아니었으며 괴링 같은 모험가, 히틀러 같은 광신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같은 미치광이도 아니었지만, 대중의 절대다수가 흡혈귀나 가학성 변태성욕자가 아니라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대중을 조직해 총체적인 지배 체제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돈스키스 . 이것은 집들의 내부 사정을 폭로할 힘을 지닌 악마가 등장하는 17세기 소설인 루이스 벨레스 데 게바라의 <절름발이 악마>나 동일한 주제의 변형인 알랭 르네 르사주의 소설 <절름발이 악마>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근대 초기의 작가들에게 사람들의 사생활과 비밀을 빼앗으려는 악마 같은 힘으로 여겨졌던 것은 이제 우리의 자기폭로 시대에 고의로 흔쾌히 자신을 노출하는 리얼리티 쇼나 그 밖의 유사 행위와 뗄 수 없게 되었다.

 

종교와 정치와 문학적 상상이 어우려 있는, 악마에 대한 이런 관념은 근대 유럽 예술의 배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토비트서>에 나오는 여자 악마 아스모데아를 묘사한 고야의 그림 <아스모데아>가 그렇다.

 

우리는 새로운 악마를 어떻게 환영하고 있나?

 

내가 보기에 자네는 한마디로 말해 사생활이 죽었다고 선언한 듯하다. 우리는 미셸 푸코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파놉티콘 기획부터 사생활의 식민지화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우리 시대에 자율적 개인이라는 관념이 당한 패배로 간주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정치적 자유는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협에 대해 항의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리얼리티 쇼와 마찬가지로 마치 이것이 새롭게 획득된 우리의 안정이자 기회인 것처럼 이것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은 악마를 찬양하는 우리의 새로운 형태인가? 이것은 악마에 대한 유동적 찬양인가?

 

바우만. 이것은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 우리가 손수 만든악마이다. 이것은 널리 흩어져 있고 처음부터 규제와 인격에서 자유로우며 우리 같은 개인들로 민영화되고 자회사로 분할될운명의 무수한 국지적 행위자들을 낳는 인간 무리 전체에 가루처럼 흩뿌려져 있다.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

 

그리고 이런 것들의 전체적인 귀결은 고백실 내부에 마이크가 설치되고 광장에 확성기가 내걸린 고백 사회. 고백 사회의 성원 자격은 모두에게 솔깃하게 열려 있다. 그러나 밖에 머무르려면 중벌이 따른다. 가입을 망설이는 자들에게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의 최신판인 나는 관찰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교훈이, 나아가 나를 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는 더 많이 존재한다는 식의 교훈이 뒤따른다.

 

돈스키스. 우리는 동유럽 작가들로부터 치명적인 망각이 동유럽과 중유럽의 저주라는 사실을 배운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이고 천재의 작품이자 경고의 작품이며 한 여성이 정신병원에 갇혀 괴로워하는 일생의 연인인 한 소설가를 구하기 위해 악마와 거래한다는 파우스트식 이야기이기도 한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미하일 불가코프는 악마의 힘에 어쩌면 결정적인 한 측면을 추가로 부여한다.

 

이 악마는 비인격체 또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위축될 운명에 처한 인간에게서 그의 기억을 빼앗을 수 있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과 주위 세계에 대해 어떤 비판적인 물음도 던질 수 없게된다. 그들은 개성과 교제의 힘을 잃음으로써 기본적인 도덕적 감수성과 정치적 감수성을 잃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른 인간에 대한 감수성을 잃게 된다. 근대의 가장 파괴적인 형태들 안에 안전하게 숨어 있는 이 악마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장소, , 기억, 소속에 대한 감각을 빼앗는다.

 

이 위대한 소설에 등장하는 시인 이반 베즈돔니는 악마와 신의 존재,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어둠과 빛의 존재를 모두 부정하는 바람에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역사와 보편적 인간성까지 부정하게 되어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데, ‘집 없는 자를 뜻하는 러시아이기도 한, 베즈돔니가 존재론적 의미에서 집 없는 자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성이 집없는 자를 뜻한다는 사실은 불가코프가 장소의 상실, 집 없음, 망각을 급진적이거나 전체주의적 형태의 근대가 지닌 악마 같은 측면으로 간주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베즈돔니는 완전한 분열, 기억의 상실, 삶과 역사의 통일적 원리들을 해독할 수 없는 상태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인격의 토대 자체를 상실하고 만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의 정신병은 기억 및 감수성의 상실과 마찬가지로 악마가 내린 처벌의 일부이다.

 

기억 역사의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유대계 리투아니아 작가인 그리고리 카노비치는 기억과 감수성의 상실을 악마가 사회적 대변동, 재난, 전쟁과 참사 동안에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의 불가피한 한 측면으로 기술한다. 소설 <악마의 주문>에서 그는 서사시적인 화법을 사용해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 대학살 동안에 자행된 범죄들을 고의로 잊는 것을 악마가 행한 작업의 한 측면으로 묘사한다.

 

텅 빈 양심, 망각, 잊으려는 의지는 자산들에게 자행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는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결정타이며 인간의 기억과 감수성을 박탈하는 악마 같은 행위이다.

 

근대는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몰살시키지 않으면서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최대한 통제할 방법을 찾는 데 몰두해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의 기억과 집합 정서도 마찬가지다. 오웰의 <1984>에서 보듯이 역사는 오로지 기록과 문서를 통제하는 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개인들이 당이 허락한 방식대로만 존재해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기억은 역사를 창조하거나 복구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만약 기억이 일상적으로 통제되거나 가공되고 갱신된다면, 역사는 권력과 통제를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려는 기도로 전락할 것이다.

 

역사는 민주주의 정치가든 권위주의 정치가든 정치가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어떤 정치적 신조나 그것에 봉사하는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는 우리 존재의 상징적 설계이자 우리가 매일 행하는 도덕적 선택이다. 인간의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물을 수 있는 우리의 권리는 자유의 한 초석이다.

 

바우만. 다시 말하지만 내 생각에 악마는 온갖 종류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왕이 하는 일들은 보통 모호하고 양면적인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교환 행위, 거래, 대가, 보복이며, 우리가 무언가를 얻으면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잃게 되는 식이다. 마왕의 힘은 그의 뛰어난 위조술에 기초한다. 악마의 모습은 협잡꾼, 사기꾼, 돌팔이이며, 한마디로 말해 평균 22미터 × 16.1 미터의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아이맥스 스크린 같은 곳에 투영된 사기꾼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제기한 주장에 따르면 유혹이 발휘하는 정말로 저항하기 힘든 견인력은 그 유혹에 굴복할 때 생긴다고 약속되거나 우리가 그렇게 믿고 기대하는 상태의 매력에서 비롯하기 보다 유혹받음의 상태 자체에서 비롯한다. 유혹이 제공하는 것에는 희열에 대한 욕망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유혹받은 상태에서 미지의 것에 대한, 경계선을 잘못 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직 연필을 손에 쥐고 있다는, 즉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기쁨에 의해 압도된다. 레비나스는 이런 상태를 가르켜 유혹의 유혹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 순간의 미결정됨’, ‘결말이 확실치 않음’, ‘불완전함에 매료된 상태이다.

 

손에 쥐기 어렵고 고통스러울 만큼 짧은 이 자유의 순간은 우리가 이미 선택의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 선택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우리의 자유를 온전히 아무 탈 없이 간직하고 있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것이 일종의 신성한 상태라고, 죽을 운명의 우리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신의 한 속성인 무한한 권능을 힐끗 엿보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유혹을 악마와 그의 작업과 관련짓는 경향이 있다. 우리 자신을 전능한 자로 상상하는 것이 신성 모독이라고 한다면, 유혹의 상태는 불경한 것이다. 자신이 유혹받로고 놔두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법에 명시된 형벌이다.

 

결정의 자유를 가졌다는 것은 악마가 사는 복마전의 현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악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되는 것이다.

 

자네 말대로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 이것은 사악한 위조의 의도와 야망을 지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주도해서 이루어지지만, 그들에게 고용된 열렬하거나 미적지근하거나 망설이는, 그러나 언제나 순종하는 수많은 일꾼과 때때로 부주의하지만 자발적인 공범들의 도움과 노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1984>에서 진리부가 윈스턴 스미스를 고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억은 말살될 수 없다. 사건 X가 제거된 기억은 텅 빈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여전히 역사적 기억이며, 다만 다른 역사의 사건 X를 포함하지 않은 어떤 역사의 기억이 될 뿐이다.

 

덧붙이자면 동유럽 출신이지만 나중엔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가 된 레오니드 셰스토프는 신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만큼이나 과거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예를 들면 아테네인이 소크라테스에게 독살의 범행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이미 만들어진 것을 다시 만들면서 뒤로 행하기’, ‘이미 한 것을 되돌리기’, 그래서 과거를 바꾸기를 신의 결정적이고 독점적인 능력으로 간주했다.

 

만약 그렇다면 악마가 과거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자신을 신의 대안으로 내세우고 신의 게임에서, 마땅히 신에게 속하는 게임에서 신을 이기려는 악마의 무한히 오만하고 필사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베즈돔니가 신을 부정하지 않고는 악마를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악과 선이 연쇄적으로 분열 생성한다.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나와 대화를 나눈 폴란드 저널리스트 아르투르 도모스와프스키가 지적하길 올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스라엘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와 팔레스타인이 겪은 박해를 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사명이 잠재적으로 유사한 성격과 규모를 지닌 또 다른 대참사로부터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구원하는데 힘을 보태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우리의 공존 양식의 토대 자체에 비록 감춰져 있지만 매우 생동적이고 강고하게 내장된 섬뜩하고 잔인한 경향들을 증언할 필요가 있다.

 

홀로코스트 역사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인 라울 힐베르크도 이 사명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이 점은 나치의 집단 학살 기계가 독일 사회의 정상적인 조직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정상적이고일상적인 역할 중의 하나를 수행하던 바로 그 사회였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한 데서 엿볼 수 있다.

 

(리처드 루빈스타인)의 결론에 따르면 유대인 대학살은 타락의 증거가 아니라 문명 진보의 증거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서 도출해낸 유일한 교훈이 아니었다. 또 다른 교훈은 먼저 공격하는 자가 정상에 선다는, 그리고 그런 자가 계속 정상에 있으면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이 유대인 운명의 합법적 계승자를 자처하는 국가인 이스라엘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은 가능한 다른 경우들보다 더 심대한 충격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소중히 품고 있는 또 다른 신화를, 즉 고통이 고상하게 만든다는, 그래소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이 시련에서 벗어나 찬란하게 정화되고 도덕적으로 고양된다는 신화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슬픈 진실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행위가 가해자를 타락시키고 추락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의 피해자들이 도덕적으로 아무 상처도 없이 그들의 시련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잔혹함과 박해의 진정한 귀결은 작용과 반작용이 잇따라 일어나 단계마다 양쪽의 집요함과 호전성이 심화되고 양쪽을 갈라놓는 심연이 확장되는 과정을 가리키기 위해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만든 용어를 사용하자면 또 다른 연쇄적 분열 생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쇄 작용의 무한한 확장에서 빠져나오려면 상당한 의지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무 많은 기억은 우리의 유머 감각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망각은 그저 부재와 결여가 아니라 니체가 보여준 것처럼 정신적 삶의 한 가지 기본 조건이다. 오직 망각 덕분에 마음은 완전한 갱신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돈스키스. 악은 비정상 사례, 병리, 탈선 같은 것에 숨어 있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정상으로, 심지어 평범한 삶의 사소함과 진부함으로 간주하는 것에 숨어 있다.

그리서어 아이다포론 adiaphoron 또는 그것의 복수형 아디아포라 adiaphora중요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용했으며 후에는 마틴 루터의 동료 종교개혁가인 필리프 멜란히톤이 사용했는데,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존재하는 예배의 차이를 가리켜 아리아포라라고, 즉 굳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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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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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할 땐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다.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 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탈도덕화의 구원으로 등장하는 것은 소비주의 문화다. 이제 인간은 타인을 상품처럼 대한다.

 

우리는 점차 둔감해져간다. 요제프 로트는 우리의 습관적인 둔감함의 메커니즘을 이렇게 설명했다.

 

큰 재해가 발생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충격 속에서도 발 벗고 나선다. 급성 재해들은 확실히 이런 효과를 낳는다. 사람들은 재해가 곧 지나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성 재해들은 이웃들에게도 너무 께름칙한 나머지 그들은 재해나 재해의 피해자들에게 점차 무관심해지며 심지어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기까지 한다. ...위급 사태가 질질 끌게되면 도움의 손길은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동정의 불길은 차갑게 식는다.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p.80

 

<세월호 학살>은 국가가 국민들의 습관적인 둔감함을 인식시키기 위해 기획된 것일까? 우리는 점점 더 시들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이런 태도는 결국 또 다른 재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다음 재난의 피해자는 누가 될까? ‘는 아닐 거라고? 과연 그럴까? 혹은 만 아니면 재난은 일어나도 되는 건가?

 

재해가 오래 지속되면 초기의 충격과 격분이 망각 속에 빠지고 피해자들을 향한 인간적 연대가 메마르고 쇠약해짐에 따라 재해 자체가 지속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리고 미래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여러 힘이 결합할 가능성은 서서히 약화된다.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p 81

 

 

바우만에 따르면 오늘날 99%프레카리아트’(신자유주의 시대 불안정한 무산계급, 좀비 용어가 된 프롤레타리아를 대체하는 용어).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더라도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 프레카리아트는 해고되었거나 앞으로 해고될 것이다.

 

오늘날 99%는 공포 속에 살아갈 뿐이다. 공포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있다.

 

첫째 무지이다. 이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떤 종류의 불행이 어디에서 닥칠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지 등에 대한 무지이다.

 

둘째는 무기력이다. 이것은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의구심이다.

 

셋째는 앞의 두 이유에서 파생하는 굴욕감이다.

 

99%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국가에 헌납한다. 공항에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알몸을 국가에 바친다. 이제 국가는 국민을 길들이기 위해 더 나은 공포를 창조한다.

 

아동 강간범은 네 이웃이다.”,

 

외국인은 연쇄살인범이다.”

 

국가가 모든 걸 감시하지 않으면 테러가 일어날 것이다.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자.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자는 빨갱이다.”

 

공포를 이겨내고 싶으면, 남들과 다르고 싶으면,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지 않는 자는 죄인이다. 소비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자는 빨갱이다. 규제 철폐, 구조 조정, 민영화만이 살 길이다.”

 

경쟁만이 살 길이다. 네 이웃이, 외국인이 네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다.”

 

언론, 신문, 방송, 지식인들은 서로가 앞 다투어 힘 있는 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오늘도 매일 매일 구호를 떠들어 대고 있다. 양심을 팔아먹은 것들에 힘입어 오늘날 프레카리아트는 연대가 불가능할 뿐더러 오히려 서로에게 적대적이다.

 

기득권들은 이승만이 국부라고 떠들어댄다. 국부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전쟁이 터져서 우리의 국부께서 도망가실 수도 있다. 선조도 그러지 않았나? 그런데 우리의 국부는 가만히 있으라고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왜 한강 다리는 끊고 도망가서 국민들 피난도 못 가게 하셨을까? 한강 다리 아래로 얼마나 씨벌건 강물이 흘러야 우리 1%들은 만족하실려나. 1%눈에 들기 위해 지식인들께선 또 얼마나 많은 역사와 기억을 조작해야 만족하실려나. 언젠가는 이승만이 나뭇잎을 타고 한강을 건너셨다 주장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악이 도처에 만연해 있는 오늘날 어떻게 하면 우리는 도덕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체코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진정한 정치 지도자들과 달리 하벨은 가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장비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잘 조직되고 견고한 정치 기구에 기초한 대규모 정치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풍성하게 쓸 수 있는 공금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의 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군대도 미사일 발사기도 비밀경찰이나 정복경찰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를 유명 인사로 만들고 그의 메시지를 수백만에게 전달해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따르도록 만들어줄 대중매체도 없었다.

 

사실상 하벨에게는 역사를 바꾸려는 그의 노력에 사용할 수 있는 세 가지 무기만이 있었다. 그것은 희망과 용기와 불굴의 의지였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많은 적든 가지고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카스, <도덕적 불감증>

 

머릿속에 박힐 정도로 나는 반복하고 반복할 것이다.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

 

(전공자가 아닌 자가 번역하면 이꼴 난다. 불굴의 의지로 읽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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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4-13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잡했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4-13 07:34   좋아요 1 | URL
`영혼을 위한 삼계탕`을 드신 느낌이시겠네요. ^^

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4-13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

꼬마요정 2016-04-1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려다가 번역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데요.. 읽을 수 있을까요? ㅠㅠ

시이소오 2016-04-13 08:11   좋아요 0 | URL
짜증스럽긴 합니다만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신다면 읽을 수 있습니다 ㅋ^^

초란공 2016-04-13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내용의 책인데 읽기는 짜증이 나긴합니다. 하지만 전공의 여부와는 무관한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3 09:3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오자, 탈자, 비문, 오문들도 많지만 용어번역도 의아스럽드라구요. 바우만의 다른책에서 사회학자 노명우 씨 번역은 자연스러웠거든요 ^^

samadhi(眞我) 2016-04-13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를 읽을 능력도 없으면서 번역에 무지 민감한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 한탄스럽네요.

시이소오 2016-04-13 21:2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도 그런걸요. 이 기회에 저도 영어 공부나 할까봐요. 가끔 참 답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