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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
유카와 유타카.고야마 데쓰로 지음, 윤현희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 한 권만으로 하루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저널리스트 고야마 데쓰로와 평론가 유카와 유타가가 하루기 덕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한 법. 고야마 데쓰로의 과한 해석은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질을 의심케할정도다.
“그는 이곳저곳에 먹이를 뿌려놓는다. 몇 가지 진짜 수수께끼, 즉 테마 주변부에 2차적인 수수께끼를 뿌려놓는 것이다. 게으른 독자나 장거리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독자 또한 그 먹이에 이끌려 먹이를 쪼아 먹는 사이에 골에 도달해버리고 만다. 게다가 그 2차적 수수께끼는 지적 스노비즘을 자극하는 역할도 한다. 거기에 보기 좋게 걸려든 독자는 수수께끼 풀이에 모든 열정을 쏟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만큼 수수께끼 풀이, 해독 사전을 낳은 작품도 드물지 않을까. 비평가들조차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2차적 수수께끼의 해독에 열중한다. - 노야 후미아키”
-사이토 미나코, <취미는 독서>중
고야마는 수수께끼 풀이에 모든 열정을 쏟다 균형감을 상실한 전형적인 케이스로 보인다. 하루키 인터뷰를 주로 한 고야마 데쓰로가 하루키나 하루키 소설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 대해 말할 땐 하루키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반면 고야마 데쓰로가 하루키나 하루키 소설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 해석을 내릴 땐 – 즉 조금이라도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될 때 – 하루키는 무슨, 정신병자의 망상을 듣고 있는 것만 같아 괴롭다. 하루키 소설을 읽다 미쳐버리고 말다니.
대담에 참여한 유카와 유타카는 고야마의 정신 나간 해석에 아예 대꾸를 하지 않는 편인데, 도무지 참을 수 없을 때엔 반박의 말을 하기도 한다. 고야마는 특히나 숫자에 대한 편집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고야마가 자신의 추리가 맞는지 하루키에게 물어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인터뷰할 때나 같이 택시타고 다닐 때 좀 물어보지. 왜 물어보지 않고서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일삼는 것일까.
“<1973년의 핀볼>에는 ‘208’과 ‘209’라는 숫자가 쓰인 운동복 셔츠를 입은 쌍둥이 자매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208’과‘209’라는 숫자는 1945년도인 ‘쇼와 20년 8월’과 ‘쇼와 20년 9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p122
아니다. 하루키에게 직접 물어봐라.
“ ‘....208’과 ‘209’중에서 와타야 노보루와 대결의 장으로 ‘208’이 선택된 것은 이 ‘208’이 1945년 8월의 이야기‘와 대응하는 ’쇼와 20년 8월‘이기 때문은 아닐까.” P122
아니라구. 하루키에게 직접 물어봐라. 이후로 그냥 ‘하직물’이란 약어를 사용하기로 하자.
“이중의 ‘4’, 즉 ‘4’ X ‘4’ = ‘16’이어서 ‘양 사나이’는 이 호텔의 16층에 머무는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p128
아니라구. 하직물.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는 망상이라고만 할 수 없는 근거가 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를 보면, 실종 중인 아내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한 소식을 전해온 것은 ‘태엽 감는 새 연대기#17’이라는 이름의 통신 메일이었다. 그것은 4와 4를 곱한 영혼의 수 ‘16’을 빠져나온 숫자가 ‘17’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다.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하직물
“아오마메의 이계(4의 세계)와 덴고의 이계(4의 세계)를 곱한 세계가 <1Q84>라는 이야기의 세계인데, ‘4’와 ‘4’를 곱한 세계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탈출해서 나온 증거로서, ‘16’층의 하나 위인 ‘17층’의 호텔 방에서 맺어진 것이리라. 이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4’에 대한 인식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P128
아니다. 의미심장하지 않다. 하직물
“고야마 : 결국, 후카에리와 직녀는 둘 다 실과 연인이 깊다는 말이죠. 그리고 후카에리의 뒤를 쫓는 우시카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짝을 이루는 견우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후카에리를 직녀로 해석하는 것 까진 참아줄 수 있는데 우시카와는 ‘견우’라니.
차라리 차태현을 견우라고 우겨라. 우시카와는 견우 아니다. 하직물
“우시카와 하면,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의 칠석신화에서 ‘소’는 농업의 상징이지요. 그래서 소가 밭을 갈 때 끄는 쟁기(쟁기 려(犂))의 한자 표기를 보면 ‘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소가 농업의 상징이지요. 한편 리더의 ‘사키가케’도 애초에는 변두리 지역으로 피신해 농사를 짓던, 농업을 기반으로 한 단체지요. 나중에 종교 단체로 모습을 바꾸지만, 그렇게 추리해보면, 리더와 우시카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농업’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P172 ”
농업으로 연결되었다? 설령 그렇다 치자. 그래서 그래서 우짜라고?
“그러고 보면, 덴고가 BOOK 1에서 처음 등장할 때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몸집이 크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농부 같은 눈을 하고 있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항상 볕에 그을린 듯 가무잡잡한 피부.....’라고 묘사돼 있지요. 이 부분도 농업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1Q84>라는 대하소설을 ‘농업을 둘러싼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읽어보는 것도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Q84>가 농업을 둘러싼 이야기란 말이지.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무슨 의미가 있냐고!!
“ 고야마 : 무라카미 씨의 작품에는 ‘네즈미(쥐)’나 ‘히츠지(양), ’가에루(개구리)‘, 호타루(반딧불이) 그리고 고오로기(귀뚜라미)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모든 생명체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미니즘 요소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P86”
아니다. 일종의 메타포다. 심지어 하루키는 메타포에 대해 고야마에게 친철히 설명을 해줬다.
“고야마 : 수학의 ‘미분’, ‘적분’을 거론하며 서두를 꺼낸 무라카미 씨는 미적분을 응용해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과정을 상세히 들려주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지하 이층에 내재한 어둠의 내장을 해부해 보이는 것 같은 설명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하나의 비유나 묘사의 이미지가 있으면 다른 이미지 사이에 ‘차이’와 ‘어울림’을 고려하면서 서로 모아간다. 그러면 ‘차이’와 ‘어울림’에 따라 집적된 이미지 그룹이 생긴다. 이 집적된 이미지 그룹이 재차 만들어내는 방향성에 따라, 이미지 그룹을 다시 ‘차이와 ’어울림‘을 생각하면서 모아가면 재집적된 이미지 그룹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와 분류하고 집적해가는 과정을 반복해서 확산해 가면 차츰 작품 전체의 이미지가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는 식의 설명을 열심히 해주었습니다.
<해변의 카프카>에 ‘메타포’라는 말이 빈번히 나오는데, 아마도 이런 생각의 반영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최근에 무라카미 씨가 번역한 <롱 굿바이>이 후기에서도, 챈들러를 둘러싸고 이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행위와 행위 사이에 상관성 A가 생겨난다. 다른 어떤 행위와 행위 사이에 상관성 B가 생겨난다. 그 상관성 A와 상관성 B 사이에 복합 상관성 C가 생겨난다.....그런 식으로 챈들러 소설 속의 사건이 팽창해 가는 방식을 등비급수적이라고 표현하더군요. P92“
출판사의 홍보문구처럼 하루키 소설에 대한 독창적인 작품 해설은 지면 그 어디에도 없다. 내후년이면 일흔 살에 접어드는 저널리스트의 망상뿐. 사사키 아타루 말처럼 책이란 함부로 읽을 게 아닌가 보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만다.” 미쳐버릴만큼 하루키를 읽은 고야마를 부러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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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마 : ....제가 일개 독자로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가장 감동하는 부분은, 혼에 깊숙이 닿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혼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일본인의 혼령이라든가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늘 그런 이야기를 쓰지요. 혼의 영역을 확장하고, 깊숙이 파고들고, 그 세계를 열어가는 이야기를 요. P31
유카와 : 그 문장에서 나오코가 ‘나’를 향해 말하지요. “이 초원에는 우물이 있어. 우물의 존재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해서, 걷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우물에 빠져 버릴 수가 있어. 그렇지만 너와 있는 동안 나는 빠지지 않을거야”
혼의 세계, 그 끝간데 없는 어둠의 세계로 통하는 우물은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 속의 어둠’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운 첫 장면의 가장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상념이지요,
고야마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악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구절의 의미는 ‘악’이나 ‘어둠’은 자신의 ‘바깥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쪽’에도 있다, ‘나’의 안에도 ‘악’을 포함한 ‘어둠’이 저 아래에 있다는 뜻이지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전 작품을 보면 ‘나’가 ‘악’이면서 ‘어둠’인 시공으로 돌입했다가, 다시 ‘나’의 ‘일상’인 ‘삶’의 세계로 생환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모든 개개인의 인물 속에 ‘빛’과 ‘어둠’이 세로 방향으로 켜켜이 쌓여 있어서, 인물과 함께 ‘빛’과 ‘어둠’이 동시에 움직이는 형식으로 바뀐 것이지요. P49
고야마 : 무라카미 씨는 ‘인간은 이층 건물 집’이라는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지요.
‘일층은 모두가 모여서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는 공동 공간이다. 이층은 개인 공간으로 나뉘어 각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지하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쟁여두거나 이따금 들어가 넋 놓고 있다가 나오기도 한다. 일반 소설이라면 이런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지하 일층 아래에는 또 다른 지하가 있다. 그곳에는 특수한 문이 있어서 평소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어쩌다 들어가면,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뿐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평소 집 안에서는 하지 못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건 자신의 혼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몰라 복귀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소설가는 의식적으로 그 지하 이층의 방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비밀의 문을 열고 캄캄한 어둠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체험하고, 다시 문을 닫고 현실로 복귀한다. 그것이 직업적인 작가이고, 진짜 작가다.’ P53
유카와 : <우게쓰 모노가타리>안에서도 가장 기묘한 이야기라면 <빈복론>이 아닐까 합니다. 거기에는 황금의 정령인 도깨비가 나와서 이런 말을 하지요. ‘나 지금 임시로 몸을 받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귀신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본래 비정한 생물이니, 인간과 다른 마음이 있도다.’ 이 도깨비의 말이 <해변의 카프카>에서 커넬 샌더스의 입을 통해 그대로 인용되고 있으니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P56
유카와 : 지금 이 어둠에 관한 주제를 계속 <태엽 감는 새 연대기>로 이어가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요소,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유물과 연결되지요. 이 소설에서는 마미야 중위가 몽골 초원에서 갇혔던 우물과 ‘나’가 들어간 미야와키 씨 집 마당에 말라버린 우물, 두 우물이 시공을 넘어 지하의 어둠 속에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우물의 어둠 속에서는 현실을 초월한 드라마가 펼쳐지지요. P58
고야마 : .....와타야 노보루는 ‘나’의 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출발점이 된 단편 <태엽 감는 새와 화용일의 여자들>에서는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이름을 가진 아내의 오빠가 나옵니다. 또 그 오빠 이름을 딴 고양이도 나오지요. .......아시다시피 <태엽감는 새> 연대기의 ‘나’는 오카다 도루고, <노르웨이의 숲>의 ‘나’는 와타나베 도루입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 이름이 ‘도루’(일본어로 ‘통하다, 통과하다’는 뜻/옮긴이)지요,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은 주인공이 청년기에서 성인으로 통과하는 이야기고,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주인공이 벽을 통과해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넘나드는 것을 뜻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나’즉 오카다 도루는 어둠 속에서 ‘와타야 노보루’를 야구방망이로 때려눕히는데, 이 ‘와타야 노보루’는 ‘나’의 분신 혹은 ‘나’를 포함한 일본인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둠속 싸움은 자기 마음속 싸움이고, 자기 혼의 싸움이지요. 즉, 인간은 ‘성스러운 인간’과 ‘사악한 인간’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한 인간 속에 ‘성스러운 부분’과 ‘사악한 부분’이 같이 있다는 인식이지요. P67
유카와 :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도쿄의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야미쿠로’라는 어둠의 덩어리를 그렸지요. 그런데 <언더그라운드>에서 그 어둠의 덩어리가 실제로 땅 밑에서 도쿄 지하철로 불쑥 솟구쳐 올라온 셈입니다. P71
고야마 : <언더그라운드>에는 <지표가 없는 악몽>이라는 작가의 꽤 긴 후기가 붙어 있습니다. 그 후기에는 ‘이쪽’과 ‘저쪽’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쪽’과 ‘저쪽’의 관계를 ‘마주 보는 거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일반 시민 측의 ‘이쪽’ 거울에는 옴진리교 신자라는 ‘저쪽’이 보이고, 사건의 가해자인 ‘저쪽’ 거울에는 일반 시민의 ‘이쪽’이 보인다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이 아주 많이 닮았다는 뜻이죠. P72
고야마 : <해변의 카프카>에는 <우게쓰 모노가타리>의 화신뿐만 아니고, <겐지 모노가타리>의 생령인 로쿠죠노미야스도코로의 등장 등, 그야말로 혼령들이 총출동하지요. P77
고야마 : 그런데 <해변의 카프카를 말한다>에서 무라카미 씨가 탄지블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 작품 설명 중에 나온 단어로, ‘만져지다, 실체가 있다’는 뜻이지요. 지하 이층의 어둠, 영혼의 어둠이란 그 자체가 모호해서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으니 그것을 형태가 있는 것,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해변의 카프카>의 커넬 샌더스도 그중 하나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이야기 속에서 탄지블한 모습으로 전환하는 힘, 그건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탁월한 재능이 아닐까요? P82
유카와 : <언더그라운드>의 후기 ‘지표가 없는 악몽’에 무라카미 씨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영위하는 일상은 정말로 당신의 일상입니까? 당신이 꾸는 꿈은 정말로 당신의 꿈입니까? 그것은 언젠가 엄청난 악몽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꿈은 아닐까요? P85
유카와 : 오자와 씨는 지휘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말러의 음악에는 확실히 기법이 복잡한 면이 있다. 그러나, 말러 음악의 본질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오해를 살까 두렵지만, 감정만 잘 살리면 뜻밖에 단순하다. 예를 들어, 말러의 악보를 보면 전혀 상관없는 모티프가, 때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닌 모티프가 동시 진행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연주자들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온 힘을 다해 오로지 자기 파트만 감정을 살려서 잘 연주하라. 그것을 동시 진행으로 한데 모으는 건 지휘자의 역할이다.’
이 말에 대응해서, 무라카미 씨가 조심스럽게 말러에 대해 피력한다.
‘말러의 음악을 대하면 언더그라운드적이라고 할까, 지하 어둠의 세계에 내재된 의식의 흐름 같은 걸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거기에는 모순되는 것, 대항하는 것, 서로 섞이거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그런 다양한 모티프가 마치 꿈속에서처럼 얽혀 있지요. 이른바, 무의식의 수맥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듯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누구와도 닮지 않은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P99
‘그녀를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참으로 마음씨가 다정한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다정함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의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또 나를 용서해 줄 것인가.P140
(허걱 이건 카뮈의 <이방인> 마지막 문장이자놔.)
고야마 :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가 변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즉, 관계성을 갖지 않는 디태치먼트(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일종의 체념과 관망의 태도)세계에서, 관계성을 추구하는 코미트먼트로 변모했다는 말이지요, 무라카미 씨는 자신이 정말로 쓰고 싶은 것을, 혹은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넓혀가는 작가’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악과의 대결을 쓰기 위해서는 삼인칭의 문체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P154
유카와 : 아무튼 저는 리더의 매력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단히 머리가 좋고, 고야마 씨 말처럼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커츠 대령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책상 위에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가 놓여 있는 화면이 비치지요. 커츠 대령은 ‘나는 죽임을 당할 왕이다’라고 확실하게 자기 입으로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쓸모가 없게 된 왕은 죽임을 당하고, 다음의 젊은 왕과 교체된다는 프레이저의 연구에 따른 학설이지요. P162
고야마 : <1Q84>는 넓은 의미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바탕에 깔린 작품입니다. 후카에리가 소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리더 계층과 싸워나가는 구도가 형성되지요. P168
고야마 : 등장인물의 이름에 색깔을 넣은 데서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의 <유령들>을 연상한 독자도 있을 덴테, 저는 그것도 일종의 유머로서 제시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