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 다카시는 대학시절 베르자예프의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를 읽고서는 사고의 스케일이 완전히 변했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한국에선 미 번역이다.)

 

공간적으로는 일본 사회의 일상 공간을 벗어나, 세계 전체, 우주 전체까지 시야에 들어왔으며, 시간 축에서는 근미래, 근과거만이 아니라 백년 단위, 천년 단위의 과거와 미래, 심지어는 신의 운명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영원이라는 시간마저 고려하게 된 셈입니다. ”

 

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 피도 살도 안 되는 100> p84

 

신의 운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책은 백년 단위, 천년 단위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다룬다. 유발 노아 하라리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에서 영감을 받아 호모 사피엔스의 빅 히스토리를 추적한다.

 

135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난다. 원자, 분자가 등장한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른바 인지혁명.

45,000년 전, 사피엔스, 호주에 정착한다.

12,000년 전, 농업혁명이 시작된다.

5,000년 전, 문자가 발명된다.

500년 전, 과학학명이 일어난다.

250년 전, 산엽혁명

50년 전, 정보혁명.

 

인류는 약 250만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다. 유럽과 서부아시아의 인류는 호모 네안테르탈렌시스’, 흔히 말하는 네안테르탈인으로 진화했다. 아시아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는 호모 솔로엔시스가 살았다.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섬에는 호모 폴로레시엔시스가 살았다. 2010년 시베리아 데니소바 동굴에서 호모 데니소바인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선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르가스터인이 살았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지난 1만 년간 호모 사피엔스만이 유일한 인간 종이었다. 왜 유독 다른 종들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저자는 언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여러 학자들은 약 7만 년 전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이변이에 의해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언어의 등장과 함께 전설, 신화, , 종교가 탄생했다. 다른 종과 달리 호모사피엔스는 언어로부터 허구를 말할 수 있고, 허구를 믿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45천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호주에 정착한다. 이에 호주의 대형동물이 멸종한다. 3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다. 16,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자 역시 대형 동물들이 멸종을 맞는다.

 

수렵, 채집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약 1만년 전부터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농업혁명이다.

 

그렇다면 과연 농업이 먼저 였을까? 정주가 먼저였을까? 유발 하라리는 제러드 다이아몬드를 따라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말한다. 밀 때문이다. , , 감자가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밀을 재배하면서 수렵, 채집 때보다 더 많은 식사를 제공받은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말이 맞다면 농업이 정주를 일으킨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정주가 농업을 발생시켰다고 주장했다.)

 

7만년 전 중동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는 이후 5만년 동안 농업없이 번성했다. 간혹 그들은 밀을 먹었다. 점점 많이 먹게 되자 무심코 밀이 퍼졌다. 밀을 수확하게 되자 그들은 4주간 정도 캠프를 차렸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5, 6주가 되고 이내 마을이 되었다. 정착촌이 생기자 인구가 늘어났다. 인구가 늘어나자 질병이 들끓고 동물로부터 전염병에 감염되었다. 아이들은 떼죽음 당했다.

 

(아이의 사망률보다 출생율이 더 높았다. 그렇다면 DNA입장에선 수렵, 채집보다 정주의 방식이 더 이익이 되지 않았을까. 밀 때문이라기보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DNA가 농업을 발생시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 다시 수렵, 채집 사회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인구가 늘었기 때문이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사는 건 더 어려워졌다. 수렵 채집인들은 미래를 중요시 생각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뿐더러 먹을거리나 소유물을 저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이제 미래가 중요해졌다. 이때부터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농업혁명 이래 인간 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신화와 허구는 더욱 정교해지고 수백만 명이 협력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문화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보편적 질서 후보 세 가지가 출현한다. , 제국, 종교.

종교와 유사한 것은 공산주의다. 혹은 이데올로기다.

 

지난 500년 이후로 인류는 과학 혁명의 시기로 접어든다. 인류는 무지를 인정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이 시기 과학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제국이 탄생한다. 식민지 노예 무역이 성행하고 자본주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진다.

 

신기술은 영국의 석탄광산에서 태어났다. 석탄이 발견되었고,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다. 산업혁명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다. 기차가 생기고 시간표가 나오자 시계가 나왔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온갖 상품들이 만들어졌고 자본주의 경제는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 했다. 그러나,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 줘야 했기에 자본주의는 대중심리학(just do it!)의 도움을 받아 소비지상주의를 전파했다.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었지만 가족과 공동체 문화는 붕괴되었다.

 

1945년 이후로 제국들이 식민지에서 조용히 철수했다. 이제 전쟁의 대가는 너무나 커졌고, 전쟁 비용이 치솟은 반면 이익은 작아졌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인간 스스로 점점 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모사피엔스는 이제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자연선택은 이제 지적설계로 대체되었고 지금도 대체되고 있다.

 

2005년 시작된 블루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만일 성공한다면 생명은 40억년 만에 유기물을 넘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 후손들의 의식이 작동하는 차원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만일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 따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97IBM의 컴퓨터 딥 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에게 이겼다. 지난 128일 구글의 AI 알파고가 바둑에서 중국 판후이 기사에게 55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639일 어제,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첫 판 불계승으로 졌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대개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예견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한판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2014년에 AI ‘유진이 튜링테스트를 통과했다. 우리가 과연 AI를 길들일 수 있을까? AI도 언젠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뇌에 전극을 심은 원숭이는 자신보다 스무 배 무거운 수백 킬로 떨어진 곳의 생체공학 다리를 생각으로만 들어올렸다. 호모 사피엔스의 다음 세대는 어쩌면 우리의 상상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쾌락을 원하는 이 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유발 하라리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어쩌면 악한 신이 될 것이라 우려한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히틀러가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다면 자신의 쾌락만을 원하는 악한 신이 히틀러보다 도덕적일 것이라 상상할 수 있을까.

 

과연 대안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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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3-10 0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장 신선했던 점은 저자 하라리가 펼친 인지혁명 논리였습니다. 좀 보충하자면 저자는 사피엔스의 사회적 특징이 사피엔스의 생존과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선상에서 인지혁명을 설명했던 걸로 생각됩니다. 종교,정치, 문화,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인지혁명을 통해 이루어 졌다고 본것같습니다. 또한 사피엔스 종은 수렵채집인이래 생물학적 진화가 전혀 없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소오 님 덕분에 복습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감사🤗

시이소오 2016-03-10 08:22   좋아요 2 | URL
유발 하라리 주장 중 저한테 가장 와닿은 부분은 호모 사피엔스의 허구를 믿는 능력이었습니다. 긍정적으론 예술, 민주주의 등이 발생했지만 한편으론 종교 전쟁, 나치가 태동하기도 한거죠.
토론 하기에 좋은 책인거 같아요^^

징가 2016-03-10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간단히 말해 사기치는 기술과 다구리(?)하는 능력?!

시이소오 2016-03-10 08:4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 허구를 믿는 능력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갈지가 관건이네요^^

cyrus 2016-03-1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농업혁명의 신화를 깨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과학혁명을 설명하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국의 엘리트들이 과학혁명을 주도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논리에서 유럽중심주의 역사관과 유사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시이소오 2016-03-10 21:58   좋아요 0 | URL
아마 그건 아닐거에요. 전반적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오리엔탈리즘울 비판하는 입장이니까요^^
 

4장 안다는 것.

 

프로이트 1,2 피터 게이

 

페미니즘 내에서도 프로이트를 유용한 자원으로 삼는 이론이 있고 비판 세력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신분석학 자체가 젠더 이론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전제하지 않고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둘은 근친, 최소 절친인데 대개는 페미니즘과 프로이트주의가 서로 웬수지간인 줄 안다.

 

근대성의 키워드가 개인(주체)’이라면 프로이트만큼 공정하고, 깊이 있고, 폭넓게 인간을 해부한 사상가도 없다.

 

프로이트 전기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거장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를 정영목의 번역으로 읽게 되어 기쁘다.

 

방법에의 도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과학철학의 걸작인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그가 객관성의 신화를 정면 비판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것을 신봉하는 집단 안에서만 과학이지, 반례와 새로운 세력에 의해 신앙심이 흩어지면 과학의 지위를 잃고 새로운 과학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이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후 기존 이론은 오류, 데이터, 역사로 남는데, 이 과정이 과학의 발전이다.

 

파이어아벤트는 모든 과학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객관적인 척도로 이용된다. 기존의 거대한 독단주의는 사실로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보다 극히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도그마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약자의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을 향한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 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 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역사철학 테제,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은 1940년 그가 자살하던 해 <역사철학 테제>여덟번째 장에 이렇게 썼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비상사태가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그 반대자들이 진보를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인생의 시시각각이 비상이고, 민중의 고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비상이다.

 

벤야민이 그토록 비판한 역사주의는 인과관계에 기초한 역사의 연속성, 기원을 전제한 단선적 진화 발전주의, 도달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비로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는 진리는 불꽃처럼 순간적이며, 역사는 원래부터 파편적이고 또 과거의 승리자와 동일시해서 기록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려, 진보는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상상력, C 라이트 밀즈


 

찰스 라이트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소개하든 사족이다. 이 책은 전공을 막론하고 공부를 주제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고, 인식하고 갖춰야 할 정치학과 윤리학을 다루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논하는 부분은 특이하게도 부록인 장인 기질론이다. 지식인을 화이트칼라로 여기는 것은 앎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다. 자료 조사, 인터뷰, 독서, 집필..... 논문 하나를 위해 수천 쪽의 자료를 읽는 것은 기본이다. 체력과 끈기가 관건이다. 연구는 고된 노동이다.

 

밀스가 좋아한 용어 기예Craft’는 세 가지 조건을 함축한다. 외롭고 지루한 노동, 완성도에 대한 비타협성, 창의력. “기존의 집단 문화에 저항하라.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방법론자가 되자.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이론가가 되고, 이론과 방법이 지식을 생산하는 실천이 되도록 하자.”

 

무엇을 할 것인가? , V.I 레닌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권한다. 마르크스라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 웬 레닌? 이렇게 생각한다면, 레닌주의에 관한 오해가 아니라 지식 일반에 대한 오해다. 사상은 과학이든 이데올로기든 조류가 아니라 현실의 필요와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한물간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겐 절실할 수 있고 가장 올바른 길일 수 있다. 사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공간적 맥락에서 논해져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는 변혁 운동에서 나타나는 경제주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전위 조직 건설이다. 두 가지는 같은 주제의 얘기다. 사회 구조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현실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의 크레도(Credo). 근대성의 핵심은 계몽, 기획성, 인간 의지에 의한 사회와 자연 개조다. 나는 이 책이 근대적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인 최고의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구조와 개인의 관계는 이미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샹탈 무페 등 수많은 포스트구조주의자에 의해 해결됐다. 내가 이 글을 쓴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이 수동태 표현이 숨막힌다. ‘하면 된다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젠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안함으로써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 무엇이 가장 올바른가 보다 최소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가 화두가 돼야 한다.

 

선악을 넘어서, 프리드리히 니체

 

두치펑, 푸코, 니체까지, 이 세 텍스트의 공통점은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근데, 그게 위안이 된다.

 

니체의 위대함은, 철학이 플라톤 시대부터 순수 정신과 선 자체를 날조하고 이에 상반된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해 왔던 기존 인식론의 전제를 뒤흔들었다는 점이다. , 대립적 사고에 필요한 개념인 원인, 결과, 상호성, 숫자, 법칙, 자유, 목적 등은 인간이 만든 것 일뿐 실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성의 정치 성의 권리, 권김현영 외.


선을 구획하는 것은 자연도 신도 아닌, 사소하고 우연한 권력들이다. 이 권력을 가시화해야 한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포함되길 거부하라.”(한채윤)라는 말이 이 책의 패러다임을 요약한다.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제도 안에 머물게 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배제가 진행되고 굴요적인 자기 조정을 계속 요구받게 된다.

 

기존 규범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안에서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 메시지에 자발적으로수갑을 채우는 행위다. 사회가 당연시하는 사유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지성이고 운동이다. 권력의 법칙을 해체(, 인식)하지 않는 저항은 반칙, ’불평불만‘, ’낙오자의 불복심지어 역차별의 가해자라는 엉뚱한 비난을 뒤집어쓴다. 인간의 기준이 남성인 상태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하면 이중 노동을 해야 하고 다름을 주장하면 시민권을 잃고 피보호자가 된다.

 

주류가 되고 싶다면 무조건 노력하지 말고 일단, 포함과 배제의 원리를 공부하라. 이 책은 그 노고를 덜어줄 것이다. 여성주의의 실용성과 지적 수월성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빅 이슈, 일본어판214

 

세계 41개국에서 발행되며 14000명의 노숙인이 판매원으로 일하는 잡지 <빅 이슈>는 노숙인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네트워크다. 편집, 기획, 집필에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실제작비 외 수익은 모두 노숙인에게 돌아간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참여해 온 유명 여가수 가토 도키코(71)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1989년 베를린 방벽 붕괴부터 2011년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이른바 ‘3.11’까지의 인생 역정에서 깨달은 바를 이렇게 요약했다. “레벌루션에는 반란의 의미도 있지만 회전re volution)한다는 뜻도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삼라만상은 항상 운동하고 있으니 사는 것이 혁명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무수한 작은 변화가 세상을 흔들리게 하고 시대를 변화시킨다.”

 

빼앗긴 우리 역사 되찾기, 박효종 외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4.3 사건에 대한 보수 세력의 역사 날조에 분노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비를 반복하지 않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역사 인식을 달리하는 집단이 이분화되지 않고, 각자 내부에서 분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 진영이 부패 파렴치 집단만이 아닌 지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적 보수, 문화적 보수, 사상적 보수 등으로 다양화되고 그들 사이에-서도 비판과 논쟁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하긴,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토론 문화가 아니라 토론하는 사람이다.

 

건국과 산업화는 에피소딕한 사건이 아니라 시멘틱한 사건이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에피소드는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끼어든 것, 삽화, 간주, 토막 이야기, 큰 흐름에서 벗어난 해프닝이라는 뜻이지만, 에피소드=삽화라는 인식은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가정 안에서만 그렇다. 역사는 불연속적이다. 하나의 정사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반복도 법칙도 없다.


이에 반해 시맨틱(semantic)’은 단어, 단락, 기호, 상징의 표현과 함의 등에서 이야기의 관계성을 총칭하는, “문명사적 지성의 큰 흐름이다. 한마디로 에피소딕은 우연이고 시맨틱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문화의 위치 탈식민주의 문화 이론 호미 바바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유형이 있다. 대개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다. 원래 못 쓰는 데다 타인의 지혜를 무시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편집자가 고치라는 대로 고친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들은 무조건 옳다. 독자와의 관계에서는 그들이 전문가다. 또한 누구나 자기 글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점검해줄수록 좋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을 때다. 이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담당자의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고 싸운다’ (실은, 하소연하다가 사과한다.)

 

하이브리디티hybridity는 유명한 용어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핵심 용어로 혼성성, 잡종성으로 번역한다. 이종 식물을 교배하여 제3의 종을 만드는 원예학에서 유래했지만,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를 계기로 하여 근대성 논쟁에 전환점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혼성성 개념만 다루기에는 아쉬운,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론인 당대의 고전이다.

 

 혼성성은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흔적으로 본다. 순수성이나 (순수성이 여러 개인) 다양성은 같은 차원의 관념일 뿐,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 고준석, 고은서


 

은유는 해석자가 개념을 상상한다.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여러 가지로 분화한다. 전이, 전의다. 은유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비교적 간단한데, 일단 박식해야 한다. 아는 단어가 3개인 사람과 30개인 사람의 언어가 같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정치적 입장이다. 은유는 특정 세계관 안에서만 작동한다.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2 조혜정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통념적 의미로 그냥 쓴다면, 우리 사회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이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고 간주되는 사람, 서구 지식과 지금, 여기의 경합을 쓰는 사람이다. 조혜정 선생님은 세 번째에 속하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선구자다. .....만일 나더러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책 열 권을 선정하라면 아홉 권은 모두 이 책 다음이다.


이 책은 절박했던 나를 해명해주었다. 민족 해방과 탈식민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조혜정 덕분에 나는 이상한 여성주의자이자 삐딱한 민족해방론자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탈식민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다.’

 

주류(서구,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범위는 유동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한다. 그러나 주변의 경험은 불일치한다. 이것이 근대의 가장 강력한 통치 방식이다.

 

에피스테메episteme는 미셀 푸코가 부각시킨 말로서 주어진 시대의 앎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중심은 앎을 말하지만, 우리는 혼란을 호소한다. 이 혼란은 혼란 자체로 멈출 수도 있지만, 이해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다....바위처럼 보이는 기존의 권력 관계는 의외로 쉽게 조각날 수도 있다. 바위 틈새에 콩을 집어넣고 계속 물을 붓는다. 가진 자의 혼란! 거대한 바위 덩어리, 우리를 억압했던 그들의 거대 담론은 부서진다.

 

과학과 젠더, 이블린 폭스 켈러



 

이른바 통섭의 시대에 공부의 유목민에게 비전공자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이 지식인인가? 그런 판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이 정권에서 장관을 하시는 게 맞다. 공부의 의미를 독점하고 지식인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문지기들. 여기 들어오지 마. 그렇게 지킬 것이 없어서 겨우 지식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가?

 

이 책은 초기 여성주의 인식론을 대표하는 고전으로서 인류 지식의 연원을 추적한다. 개인(남성)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성 차별 주조를 통해 과학과 철학으로 둔갑했는가를 역사, 정신분석, 과학사의 세 차원에서 분석한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프랑스와 리오타르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 해석이다. 그때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포스트는 최근 인류 300년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담론이다. 이 논쟁에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순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순으로 흘러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근대에 고안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봉건 다음에 근대, 근대 다음에 탈근대가 아니다. “근대가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라든가 시대 착오, 시기상조식의 논쟁 구도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직선적 시간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전의 시간 개념은 내부가 닫힌 순환하는 원의 구조로서 미래라는 개념이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고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부제도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이다. 총체적 거대 서사에 대한 비판과 재현(표상)의 위기, 인식의 안정성, 확실함, 합리성, 이런 가치들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외


 

사카이 나오키, 도미야마 이치로 등 주목할 만한 일본의 탈식민주의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 잘못 소개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양심적 친한파 지식인?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저항의 단위를 국가로 설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좀 더 친근한 글을 고른다면, <세계사의 해체>가 좋다. 깊이와 박학을 두루 갖춘 니시타니 오사무와 나오키의 대담집이며 부제는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다. 동아시아 시각의 탈식민주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미국’, ‘도쿄’,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이 어디냐가 아니라 자기 위치 설정이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내부의 차이는 내외부의 차이보다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심과 주변, 이 이분법의 가장 큰 문제는 실재하지 않는 덩어리를 하나의 단위로 동결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실의 운동을 가로막는 지배의 본질이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국민과 서사>(호미 바바 편저)에서 제프 베닝턴의 글을 읽고 이 암호를 해독했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모든 음절이 중요하다. 첫째, 우편배달부뿐 아니라 발신자나 방문객은 두 번 행동한다. “딩동, 딩동”, “,” “여보세요?, 안 계세요?” 한 번 시도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한 번만 길게 누른다면 싸이코혹은 최소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상당한 부정적인 행동의 전조다. 그러니까 언제나 두 번울린다.

 

둘째, 우편 제도와 인쇄술의 발달은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한 물적 토대였다. 그 이전의 사자, 사신은 집단과 집단이나 개인 간의 일대일 메신저였지만 철도의 발달과 함께 온 국민을 횡단하는 전달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사자에 비해 동시적, 다중적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남성은 모두 죽는다. 프랭크는 멕시코 출신, 그의 정부의 남편은 그리스인이다. 우편배달부는 국가를 대변하는 국민이다. 이들은 소수자 우편배달부쯤 될 것이다. 벨 울리기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같은 행위다. 떠도는 삶, 이유 모를 죽음, 우편배달부끼리 쫓고 쫓기는 삶.

 

무엇이 달라졌을까. 메시지는 대개 비문으로 되어 있다. 편지 내용을 알고 죽거나 모르고 죽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정확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남성성/, R, W 코넬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사상이라는 인식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것이며 평등이 아니라 정의를 지향한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당파적이지만 인간 해방을 위한 계몽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저자 코넬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남성성 연구의 선구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다. ‘는 남성으로서 자기 몸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를테면 그녀트랜스젠더 여성이면서 50대에는 머리가 벗겨지고 아내와 사별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수밖에 없는 남성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여자는 자기를 잘 아냐고? 인종 차별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이 책은 학술적이지만 사례가 풍부하고 성별 이론 전반에 박식한 옮긴이(현민)의 주석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다. 내가 책으로 배웠어요유형이이서 그런지, 남성은 여전히 놀라운 존재다. 흥미로운 생애사와 쉽게 풀어낸 정신분석, 정치학, 퀴어, 역사 이론은 인문학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안드레아 도킨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원제는 <삽입섹스Intercourse>. <삽입섹스>는 남성의 섹슈얼리티 권력을 다룬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인데 여기서 급진적은 발본적이라는 뜻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적 영역에 국한된 남성 기준의 평등 개념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조를 추구했다.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성, 가족의 권력 관계를 이론화했다. 개인적인 것은 본디, 정치적인 것이다. 인류 최초로 사적인 영역이 정치학의 대상이 되었다.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지가 궁금한가? 무지로 산다. 이는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좌파로 살다>, 에른스트 블로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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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적 상상력》, 《세계사의 해체》 담아갑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절판이네요.

시이소오 2016-03-09 21:37   좋아요 0 | URL
저도 사회학적 상상력 읽고 싶네요^^

oren 2016-03-10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여 옮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온통 제가 모르는 책들과 저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뭐라고` 댓글을 달기가 몹시도 주저됩니다만, 그래도 `딱 한 곳`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딴지를 걸고 넘어가고 싶네요.(전체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문장의 어느 한 구석을 찾아내서 꼬투리를 잡는다는 게 몹시도 꺼려지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요.)

도대체 니체의 텍스트가 왜 저런 말도 안되는 악평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 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니체만큼 오독하기 쉬운 책도 없다더니, 저런 고명하신(?) 분이 니체를 저토록 오독하다니, 저는 그게 너무 놀랍습니다. 저 책의 저자가 읽었다는 바로 그 책 속에 담긴 `니체의 목소리`로 반박해주고 싶군요.

* * *

뭐라고? 그 반대이다! 제기랄.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중에서

시이소오 2016-03-09 22:04   좋아요 1 | URL
저도 좀 의아스럽긴해요^^; 취향이라고 한다면 딱히 반박하기 어려울것 같고.....아마 이해가 안돼서 필사해놨던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3-0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 파울 파이어아벤트 판매 책이 단 한 권도 없단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ㅠ

시이소오 2016-03-09 23:09   좋아요 0 | URL
정희진씨 추천책엔 유난히 품절, 절판도서들도 많네요. 프리먼 다이슨의 <과학은 반역이다>에 소개된 책들은 거의 번역이 안됐더라구요. 번역된 책들먼저 읽어야겠습니다^^

yamoo 2016-03-0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9권이 있고 3권을 읽었습니다. 근데 <방법에의 도전>의 백미는 그 논증 구조에 있습니다. 주장의 근거를 살피는 것이 이 책 읽기의 미덕이죠.

개인적으로 정희진의 <패미니즘의 도전>인가...너무 실망스러워서 이 책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시이소오 2016-03-09 23:47   좋아요 0 | URL
우와, 대단하세요. ^^
 
어쩌다 한국인 - 대한민국 사춘기 심리학
허태균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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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책을 읽고 말았을까. 어쩌다 한국인이어서.

매몰비용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시종일관 이해할 수 없는 논리, 맥락에 맞지 않는 사례, 부정확한 용어의 남발, 심리학적 오류, ‘가끔만 제정신이다.

 

저자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사춘기와 유사하다고 해석한다. 그 특징으로 주체성, 가족확장성, 심정중심주의, 관계성, 복합유연성, 불확실성 회피라는 6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주체성? 주체성이라고? 사춘기에 주체성이란 게 있나? 한국인이 주체성이 강하다고? 플로베르가 말한 ‘le juste mot정확한 단어는 문학에서 만큼이나 비문학에서 중요하다. 맥락을 보아하니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중심성이다.

 

저자는 주체성의 예를 들기 위해 국민 모두가 판사인 척 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는 원칙을 지키는 사법부는 국민들로부터 미움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원칙? 원칙이라고 했나. 대한민국 사법부가 원칙을 지킨다고? <주진우의 사법 활극>을 표창처럼 던지고 싶다.

 

가족확장성?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인가? 가족이 해체되어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판에 무슨 가족확장성? ‘가족확장성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군대를 예로 든다. 가족에서 왜 군대로 뻗어나가는지 나는 당최 이유를 모르겠다. 한 술 더떠 세월호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인들에게 대통령은 어버이같은 존재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버이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군사부일체의 의미가 남아 있어서?

 

더 심각한 건 저자의 세월호 사건에 대한 인식이다.

 

대통령은 개인으로서 세월호 사고를 일어나게 했거나 설사 대처를 잘못한 것에 원인을 제공했다거나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 있어도 별로 크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계산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만약 그런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런 사람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대통령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한국인의 특성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명색이 심리학자거늘 가족에서 군대, 국가로 이어지는 일반인들이 저지르는 심리학적 오류의 맹점을 지적하진 않고 엉뚱한 주장만 펼친다.

 

관계주의, 이건 동의할 만한데, 또 뜯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관계주의라는 용어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건 사적인 일대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는 관계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광우병 사태를 예로 들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광우병 사태는 여러 비합리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실제로 미국산 소고기를 먹어서 광우병에 걸릴 객관적인 확률, 유럽과 일본 등의 나라들보다 광우병 발병 빈도가 더 낮은 미국산 소고기에 대해서만 유달리 반응이 격했던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소에게 광우병을 일으키는 동물성 사료 먹이기를 금지시켜서 광우병은 거의 통제가 가능하고 실제로 발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던 사실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산 소고기가 실제로 별 문제없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많은 국민들이 보인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부정적 태도, 정부에 대한 반감의 원인을 그 비합리성에서만 찾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정부가 합리적인 정보를 계속 제공할 때마다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합리적인 정보를 계속 제공했다구!!

, 뒷골 땡겨.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작자의 생각이 저렇다. 조선일보 좀 그만 쳐봐라.

 

심정중심주의는 무슨 뜻일까? 저자에 따르면 행동보다는 마음을 중시하고,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왜 대한민국 교육 문제를 사례로 드는지 어리둥절하다. 게다가 갑자기 재벌은 아무나 하나라고 하면서 사려 깊게도 재벌 2세들의 외로움을 챙기신다. 지식인들이 재벌 앞에서 아부하기 바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그렇지만 아래의 문장을 그냥 넘기자니 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어차피 부와 경영권의 세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불법만 아니라면 그것을 막을 방법도 명분도 사실 없다. 따라서 이제는 경영권 승계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건설적이고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후계자의 성공과 실패는 사회 전체와 많은 사람의 삶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다. ”

 

그러니까. 재벌의 상속권을 인정하자? 지금 수 백 명의 경제학자들이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불평등에 대해 성토하고 있는 마당에 상속을 정당화하자?

멍청한 걸까? 비열한 걸까? 둘 다 인가.

 

복합유연성은 또 무슨 말일까. ‘상황에 맞추거나 상대에 맞추는 등 여러 요인을 동시에 고려해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선택을 싫어하는 경향을 뜻한다. 또한 저자는 복합유연성이 생각이나 행동, 감정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들을 동시에 추구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저런 특성을 유연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서 한국 사회는 지난 60년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살 것 같다.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윗 문장은 허태균 교수가 한국 사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 책을 썼다는 걸 증명한다. 저성장, 저금리 시대 너도 나도 비정규직으로 몰려 아사직전이거늘. 금수저로 태어난 것일까.

 

대체적으로 저자는 한국 교육 문제에 대해선 동의할만한 관점을 내비치는데, 아마도 저자가 아이들 교육비의 부담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 돈이 줄어드니 아까웠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복합유연성에서도 한국의 교육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런 주장을 내뱉는다.

자사고의 잘못인가?” 혹 저자는 자신의 아이들을 자사고에 보냈던 것은 아닐까. 교육 불평등과 과도한 사교육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자사고를 유지하자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6번째 한국 사회의 특성은 불확실성 회피.

 

우리는 오히려 옛것을 싹 밀어버리고 새로운 건물과 아파트를 짓는 데만 몰두했다. 그결과 우리의 삶에는 과거의 모습이 없다. 이런 한국 문화의 특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손에 잡히는 않는 무형의 무엇인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불확실성 회피라고 할 수 있다.

 

옛것을 없애는 게 불확실성 회피인가. 확실한가?

 

이 책은 확증 편향, 이기적 편향, 기본적 귀인 오류, 가용성 편향, 인지 부조화, 권위자 편향 등등 온갖 심리적 편향의 사례집으로 활용할 만하다.

 

저자는 작금의 인문학을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게 어떨지. 오랜 유학 생활 때문인지 저자는 한국어의 뜻을 정확히 모르신다. 책을 쓰기 이전에 한국어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조선뉴스는 그만 쳐다보고 제발 공부 좀 하자. 살다 살다 이렇게 무식한 심리학자는 처음 봤다.

 

이 책에 대한 추천사로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개가 딸랑거렸으면 한 번쯤은 쓰다듬어 줘야겠지. 김정운은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은 교묘히 회피하고 광대 짓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영악한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자.

 

근데 황석영 작가는 이따위 책에 추천사는 왜 썼을까. 제대로 읽긴 읽은 걸까. 이명박 때부터 헛발질 하시더니 영원히 루비콘 강을 건너가신건가.

 

간만에 분노를 태워가며 글을 쓴다.

세네카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화를 가라앉혀야겠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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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륀 2016-03-0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보고 궁금했던 책인데 안읽어도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3-08 09:45   좋아요 0 | URL
저도 궁금해서 읽었다가 시간만 날렸네여^^;

해피클라라 2016-03-0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곤소곤) 속이 시원합니다..>_<

시이소오 2016-03-08 10:17   좋아요 1 | URL
(소곤 소곤) 많이 참았는걸요^^;

sb 2016-03-08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망작은 좋은 책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죠. ㅎㅎ 힘내세요^^

시이소오 2016-03-08 10:37   좋아요 0 | URL
양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악서를 피해가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

cyrus 2016-03-08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학자가 사회를 분석하거나 전망하는 내용이 있는 책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시이소오 2016-03-08 11:27   좋아요 0 | URL
현명한 지적이십니다. 애초에 심리학을 내세워 사회를 말한다는게 가당치도 않지요^^

아타락시아 2016-03-0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일베인가요? 피해야 할 책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3-08 11:54   좋아요 0 | URL
일베인지는 아리까리합니다만 피해야 할 책인것만은 분명합니다^^

2016-03-08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08 12:27   좋아요 0 | URL
이런 댓글을 읽으면 뿌듯하네요^^ `그래 다른분들의 귀한 시간과 돈을 절약시킨것만으로 쓰레기 책을 읽은 보람이 있구나`하고 말이죠 ^^

깊이에의강요 2016-03-0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를 주시다니요.
너무 후하십니다~^^

시이소오 2016-03-08 12:49   좋아요 0 | URL
이토록 사랑스런 댓글이라니요.
너무 감사합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3-08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동태탕처럼 시원하네요.. 시이소오 님의 칼날 서평을 읽으니 갑자기 이 책 무지 읽고 싶네요...ㅎㅎㅎㅎㅎㅎ

시이소오 2016-03-08 13:03   좋아요 0 | URL
제가 이러실까봐 고민했다니까요. `읽지마세요`하면 읽고 싶어지실텐데. 어쩌지하고.
읽으시더라도 되도록이면 빌려서 읽으시길. ㅋㅋ

2016-03-0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덟 문단까지만 읽고 (똥을 미리 밟아주셔서)감사하고 (차마 다 읽지 않아)죄송하다고 덧글 달기 위해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

2016-03-08 14:18   좋아요 0 | URL
아... 황석영...

시이소오 2016-03-08 14:20   좋아요 1 | URL
잘하셨어요. 굳이 읽을 필요없습니다. 이 책을 안 읽게 하는게 제 목적이니까요^^

samadhi(眞我) 2016-03-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자(?)가 정부 고위 관료 제의라도 받았을까요? 어차피 읽을 생각도 안 했지만, 성질이 끓어오르는 걸 참아내고 끝까지 읽어낸 시이소오님의 인내에 경의를 표합니다. ㅋㅋ

시이소오 2016-03-08 19:42   좋아요 0 | URL
인내보다 분노가 더 강했습니다. 원래는 100자평만 쓰고 말려고 했는데 읽다보면 계속 열받아서 ㅋ^^;

쿠자누스 2018-06-0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황석영~2

시이소오 2018-06-05 12:43   좋아요 0 | URL
ㅋ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네요. ㅋ 잼있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2019-06-1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야말로 최악의 서평이네요. 주진우 후빨러 + 광우뻥 신봉자 + (병적인)삼성혐오자가 싫어하는 책이니 읽어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판단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P115. 폴 리쾨르의 제안을 따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유는 권력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반감과 결부되지 않기 위해, 시작 단계에서부터 우리를 불관용에 대한 거부로 이끕니다. 그리고 불관용에 대한 거부는 분노의 샘을 마르게 하여 사유를 관용으로 나아가게 하지요. 그러므로 관용은 어떤 대상들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견딜 수 없음Intolerable’과 불관용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견딜 수 없음은 헤겔적 의미로 불관용의 이중 부정의 산물로서, 관용이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불관용에 대한 거부로서의 관용은, 얼치기 관용이 승리했을 때 생기는 무관심이라는 사유의 덫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사유가 절 행복하게 해주었을까요? 어떤 답변이든 단호하게 말한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일 테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유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루하고 혐오스러운 조건에서도 편안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는 최후의 의식을 위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지요.

 

p120. 당신의 텍스트는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한다기보다 독자와 대화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미하엘 하네케가 언급했던,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와 유사해 보입니다. 그는 관객에게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영화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관객에게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영화 속에서 어떤 것들은 설명하지 않고 남겨둔다고 합니다.

 

p121. ‘질문의 저주에 대해 모리스 블랑쇼는 아주 유명한 답변을 남겼습니다. 의문 품기가 금지되고 의문 자체를 간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유는 끝이 난다는 거죠. 우리는 지속적으로 의문을 품는 한 자유롭고,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으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p123. 독자나 관객의 능력을 박탈하지 않고 그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모든 사람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 거주자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시작해야만 합니다.

 

p125. 사회학 덕분에 행복하셨습니까?

 

괴테가 제 나이쯤 되었을 때, 어떤 이가 그에게 행복한 삶을 살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럼요. 행복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바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온전히 행복했던 한 주일은 기억할 수 없군요.”

 

p134. 참된 민주주의의 열정적인 옹호자인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질문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이며, 질문을 그만두면 우리는 참된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요. 전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p142. 요컨대 홉스적 질문이란, 해야 한다고 이미 정해진 것을 인간이 행하면서도 마치 의지에 따라 행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제프리 알렉산더가 <사회학에 대한 현대적 입문>에서 제시한 실마리를 취하자면, 사회학의 미래는 인간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문화정치학으로서 사회학을 다시 정립하고 부활시키려는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경로에 도달하는 방법, 따라야 하는 전략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통념이나 행위자의 지식과의 끝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일 겁니다. 물론 이때, 세넷이 제안한 비공식성, 개방성, 협력이라는 교훈을 따라야 하죠. 제가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최근 세넷이 휴머니즘과 그 현대적 의미'에 관해 쓴 에세이에서 제안한 이 세 가지 교훈은 철저하게 흡수하고 확실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공식성이란, 대화의 규칙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대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개방성은 어느 누구도 자신만이 옳다고 확신하는 진리를 갖고 있거나, 오로지 타인을 납득시키겠다는 태도를 지닌 채 대화에 참여해서는 안 됨을 뜻합니다. ‘협력은 대화의 모든 참가자들이 교사이자 동시에 학생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대화의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지요.


 

p145. 은유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말한 3의 학습상황에서만 정당성을 지닙니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개념의 네트워크가 새로운 현상을 포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거나 설익었을 때, 그러한 개념의 네트워크를 새로운 인식론적 틀에서 재조립하여 눈에 띄지 않던 특성들을 두드러지게 할 필요성이 있을 때 말입니다.

 

리이트 밀즈나 어빙 고프먼이나 로버트 니스벳 등 당신들이 사례로 들었던 학자들은 이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지요.

 

은유는 사유의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생각과 순간을 서로 연결해주는 수단입니다.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한 현상을 명명할 수 있는, 가능하고도 유일한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대표하지요.

 

p149 은유적인 병치는 다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그래서 인식을 위해 별 쓸모도 없고 해로울 수도 있는 효과들이죠. 은유의 대상이 가진 많은 특징들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유를 통해 대상의 유사성은 암시되지만 동일성은 드러나지 않는 거죠. 유사성이 암시되는 경우에도 그 차이들은 부정되지 않고 단지 우회될 뿐입니다. 하위 리그로 강등되는 거죠. 은유는 부분이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자 전체가 부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적용 범위의 형태를 변형시켜, 존재하는 유사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3대상을 불러냅니다.

 

p152. 짐멜은 그의 저서 <렘브란트: 예술철학에 대한 에세이>에서, 렘브란트 회화의 분명하지 않은 윤곽과 흐릿한 경계선, 그에 따른 반향의 풍부함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회화의 표준에 대한 렘브란트의 명백한 반란을 칭송했지요. 짐멜은 이러한 반란을, 화가가 그리고 있는 대상(인간!)의 참된 개별성을 포착하려는 화가의 열망이 드러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대상의 참된 개별성은 단순히 인간의 개별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을 마냥 재생산해서 쌓아올린다고 해서 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대한 묘사는 명확성이라는 과학적 표준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p153. 짐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의 본성이 완전하고 철저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의 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역사적으로 주어진 예술의 모든 형식은 이 목적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요. 역사적으로 유한한 그 어떤 예술 형식도 세계의 총체성을 포괄할 수는 없다는 거죠. 은유는 사유의 좋은 요소입니다. 은유는 의도와 수행 사이의 변증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결국 그것이 드러낸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p155. 스파드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개념 성장의 은유적 뿌리>

(안나 스파드가 바우만 딸이었다니!)

 

소리가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이듯 언어는 개념 형성을 위한 구성요소이다. 언어는 단순히 이미 만들어져 있는 이념들을 포착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새로운 개념들이 창조되는 수단에 가깝다. 언어는 우리가 각자의 경험을 조직할 때 사용하는 개념적 구조의 전달자이다. 라코프와 존슨이 이미지 도식이라고 부른 것 이외에 우리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우리는 언어를 하나의 맥락에서 또 다른 맥락으로 옮겨 놓을 때, 언어-의존적이고 구조에 의해 강요되는 이미지 도식을 수행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은유에 대한 최신의 연구가 도달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에 따르면 언어, 지각, 지식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p160.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그의 책 <역사: 최후 이전의 최후의 것들>에서, “편협한 안전전 세계적인 혼란으로 향한 길을 제공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크라카우어는 분명하게 고정된 모든 것을 공포스러워했던 에라스무스를 칭송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진리가 도그마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크라카우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서로 경합하는 여러 원인들 가운데 어떤 것도 논쟁을 끝내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가능하다면 궁극 원인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궁극 원인 개념 자체를 폐기할 수 있는 사유와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요.

 

p165.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성은 전설 속 프로테우스처럼 그 모습을 바꿉니다. 얼마 전까지 포스트모더니티라고 호칭되었던 것, 그래서 제가 그 핵심을 집어 유동적인 현대성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변화야말로 유일한 영원성이며 불확실성이야말로 유일한 확실성이라는 확신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단단함유동성을 이분법적인 어려운 수수께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이 두 가지 조건은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변증법적 동맹의 쌍이라고 간주합니다.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해지지 않고서는 현대적일 수 없다고 했을 때는 아마도 이런 종류의 동맹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단단한 사물이나 상태를 추구하면 역으로 움직임이 유발되고 유동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일이 흔하지요. 유동성은 단단함의 적이 아니라 단단함을 추구했기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단단함 추구가 없었더라면 유동성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p168. 파우스트는 아름다운 순간을 정지시켜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무르고자 했다가 지옥에 대한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지요. 사르트르는 이러한 공포를 추적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끈적끈적한 물체를 만졌을 때의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적대감까지 추적했지요. 사르트르가 이러한 공포는 증상적으로 보자면 인간이 유동적인 현대의 문턱에 들어섰기에 느끼는 공포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p174. 하지만 어떤 단어들은....아주 즙이 풍부한 단어들이 있는데요. 이러한 단어들은 듣는 사람의 상상력에 호소하면서 어떤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자극합니다.

 

p175. 현대적 정신의 탄생의 고통에 대한 날카로운 아포리즘을 남겼던 리히텐베르크는 오래전에 이러한 곤경을 예견한 바 있습니다. 이미지가 인간의 세계에서 홍수를 이루기 시작해 인간간의 언어 능력이 익사 상태가 되었다고요. “단어 속에서 감각이 표현되는 것은 단어 속에서 표현된 음악과도 같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은 표현되어야 하는 사물과 충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는 시인은 독자를 곧장 그림으로, 그림으로 표현되는 사물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려진 풍경은 즉각적인 기쁨을 제공하지만, 시로 표현되는 풍경은 우선 독자들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져야만 한다.”

 

p177. 사회학자가 대화를 나누면서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역할이 있습니다. 사회학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도록 해야 하죠. 사회학자가 이 두 가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각자 알아서 수행하도록 기대 또는 강요되는 직면한 과제에서,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인이 무엇이고 종속시키고 있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화는 매우 어려운 기술입니다. 이 대화는 논쟁에서 이기거나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키기보다는 문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상대방도 동참하도록 이끄는 것을 포함합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다양화하는 것, 모든 대안을 경시하지 않고 가능성 있는 결과를 확장시키는 것, 대안적 관점을 꺽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다함께 이해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대화를 지속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고무되어야 합니다.

 

p183. 프리드리히 빌헬름 셸링은 시작이 마무리될 때 회고적 충격이 될 것 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시작은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지요. 시작 이전에 있었던 것들은 언제나 시작의 결과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셸링의 이러한 주장에, ‘분명하지 않은 것드러냄은 단 한 번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원칙상 영원한 과정이라는 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의 뜻과는 모순되게 과거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재편됩니다.

 

p184. 아주 오랫동안 저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따라, ‘문명이란 일종의 대립되는 요소들 사이의 타협 과정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해왔습니다.

 

p186. 역사의 진행이 보여주는 진자운동과 유사한궤적 때문에, ‘앞으로 가는 것뒤로 가는 것혹은 유토피아노스탤지아사이에는 사실상 혼동을 불가피하게 배태하고 있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p202. 한나 아렌트는 사유는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가장 고독한 것이라는 말을 꺼낸 적 있는데요, 개인적 경험에서도 저도 그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p206. 어떤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이든 부정적인 대답이든 양자 모두는 서로 반대되는 상대방 주장의 설득력을 꺽을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철학의 방법이지요. 이러한 능력에 관한 바츨라프 하벨만큼 좋은 사례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하벨은 생각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뛰어난 기술의 소유자였습니다. 미래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지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어느 누구도 국민들이 그 다음해에 어던 종류의 노래를 기꺼이 부르려 할지 미리 말할 수 없다고 정확하게 덧붙이기도 하였죠.

 

p207. 리얼리티와 그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 사이의 긴밀한 연관은 단지 가정이 아니라 인간 실존 조건의 불가피한 속성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이데거의 용어를 선호한다면, ‘세계 존재라는 인간의 특별한 양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체험된 세계인 생활 세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 세계는 인식론뿐만 아니라 존재론, 리얼리티와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쟁점은 세계에 대한 지각의 변화, 그리고 이를 통해 리얼리티 속에서 원하는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실현 가능성으로 압축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화시킴으로써 리얼리티를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다시 하이데거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단편들이 수중에zuhanden 있는 상태에서 눈앞에vorhanden 있는 상태로 바뀜으로써 목적 지향적인 행위의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가 높아지는 것이지요. 저는 인간 세계를 통념의 비가시성으로부터 끄집어내어 관심의 초점이 되게 하고, 주목되는 영역이자 의식적 행동의 현장으로 바꾸어놓는 소명을 지닌다고 믿습니다.(통념이란 심사숙고되지 않는 공통의 감각이자 지식이며, 우리는 흔히 사유할 때는 통념을 사용하면서도 통념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사유하지 않지요.)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문제되지 않았던 것을 문제로 삼음으로써 말입니다.

 

p211. 우리 시대의 위험을 선구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탐색해온 중요한 이론가 울리히 벡이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성이 시작될 때부터 지식은 개연성의 의미론적 지평 내에서, ‘알지 못함과 혼합되어 있습니다. 벡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의 역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첫 시도인 확률 계산법의 탄생에서 시작했지요. 그 이후 위험이라는 범주를 통해 통제 가능성이라는 오만한 가정의 영향력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p213. ‘위험이라는 범주는, 자연적인 환경이 무조건적 규칙성에 속박될 수 없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선험적인 투명성과 완전한 예측 가능성이라는 이상과는 달리, 확실성이라는 조건에 보다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축적된 지식의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능력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있다는 겁니다.

 

p214. 즉 사건들의 개연성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정밀하게 조사, 탐구, 평가 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가정 말이죠. 물론 이러한 가정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지만,‘위험 계산이라는 전략은 여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전략은 완전하고 오류없는 확실성이 가능하다는 약속, 또는 그러한 미래를 예측하거나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주는 정신적 위안으로 전락했습니다.

 

 

조르주 와겐버그는 학자적인 지혜로 오늘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의 책 <메두사의 영혼: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이념>) “방정식의 해결책은 여러 가지로 갈라질 수 있지만 단지 하나의 해결책만이 정확하고, 그것만이 체계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아는냐는 것이다. 우연이 그것을 결정한다.....

 

존 그레이는 이미 수 십년 전에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주권국가의 정부는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미리 알지 못한다...국민국가의 정부들은 1990년대에 멋도 모르고 행동했다.”

 

p220 사회 조직의 형태론에 있어서의 급진적 변동 또한 사영화로 인한 또 다른 결과입니다. 가장 근원적이고 극적인 변화는 생산자 사회로부터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입니다. 비판이론은 생산자 사회의 시기에 가장 왕성하고 열정적이며 생산적인 사간을 보냈지요.

 

p221. 오늘날 프레카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대체하고 있습니다만, 프레카리아트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박탈되고 강등되고 고통 받고 굴욕당하고 있는 모든 인간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p224. 경고음이 필요할 때 경고음을 울리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심지어 그 경고음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위대한 폴란드 사상가이자 시인인 체스와프 미워시가 수십 년 전에 언급했던 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세계는 부조리의 화신이자 돌아버릴 것 같은 정신의 산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후려친다.”

 

하지만 2010년에 정치가로 변신한 베테랑 전사인 스테판 에셀이 93세의 나이에 쓴, 호소문 같은 제목의 <분노하라!>27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습니다. 이 책은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서도록 했지요.

 

p226. 에셀은 자신의 책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제가 직접 번역해보겠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변화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위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이처럼 많은 황폐함을 본 적이 없다. 파괴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고 있다. 대체 언제 끝이 날 것인가? 우리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부 바로 곁에 무시무시한 궁핍이 동거하고 있는 상황에 동의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테러리즘이 더 번창하도록 허락한다면, 궁지에 몰려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경계경보이자 여론에 대한 호소, 양심에 대한 간청이자, 세계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요청이다.

 

p230. 비판이 자기 의제의 최상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존중, 그리고 존중받을 권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사회의 핵심적 관심사에 도달할 기회를 유지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존중이 부활되지 않는다면 연대가 생겨날 가능성도 없습니다.

 

p231. 타인의 말을 듣고 우리의 말을 타인이 경청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귀 기울여 듣기의 기술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의 소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기확신과 공손한 태도 사이의 균형이 요구됩니다. 또한 용기도 필요하죠. 인간의 경험을 해석하는 사회학자의 작업은 변덕스러운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성격의 삶이 아닙니다.

 

p252. 대중은 항상 옳지는 않다. 대중이 원하는 것 또한 항상 옳지는 않다. 현재 대중이 생각하는 방식 또한 어떤 경우에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중사회학이 취하는, 대중의 수준으로의 하향운동은 적절하지 못하다. 공공의 사회학은 대중의 상향운동을 돕고, 자신도 상승하여 그곳에서 공중으로 변화한 대중과 대화하려는 시도이다. 라이트 밀즈가 핵심을 잘 표현했듯이, 사회학의 쓸모는 대중의 공중으로의 전화를 이뤄낼 때 최종 완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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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사회학 자체가 자신이 탐색하는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야 함을 필사적으로 부인한 결과, 사회학은 자성 능력을 잃어버린다. 사회학이 발견한 사실들은 사소해지고, 전문용어 속으로 이데올로기가 몰래 스며들어 결국은 권력자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사회학이 초래한 이 결과는 헛발질 irrelevance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도 지속되고 사회학도 지속되지만, 사회학과 세계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p16. 사회학에 의한 사회학의 구원은 1950년 대 후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는 사회학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구별하면서, 이 둘이 반드시 연결돼 있지는 않음을 보여주었다.

 

p17. 사회학적 상상력은 개인의 삶과 각자의 일대기가 역사적 사건,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이 펼쳐지는 동시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책무인 것이다. 또한 사회학적 상상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포부를 품고 있다.

 

p19. 당신을 생각으로 이끌거나 혹은 자극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어떤 것과 마주쳤다면, 그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데 계속 실패하다가도 돌연 인식의 도약을 경험했다면, 당신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를 경험한 것이다. 당신이 그들이나 혹은 우리에 과한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나와 연관되어 있는 무엇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달성하는 한 사회학은 쓸모가 있다.

 

p20. 반면 정보만을 제공하는 사회학은 쓸모없으며, 사회학이 권력에 팔려간다면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회학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연결하고, 자신의 시대가 자기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평가하는 도구로 채택될 경우 성공적이다.

 

P25. Q: 사회학은 인간 경험과의 대화라고 늘 정의해오셨습니다. 이 정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먼저, 여기서 인간 경험이란 당신에겐 어떤 의미입니까?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 모두를 의미합니다. 경험은 우리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에게 생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체험은 우리가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살면서 내가 겪는 일을 의미합니다. 즉 체험은 일어난 일에 대한 지각과, 일어난 일을 흡수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합동으로 빚어낸 산물입니다. 경험은 객관성의 상태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체험은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주관적입니다. 경험과 체험이라는 개념을 다소 단순화하면, 경험은 경험의 객관적인 측면으로, 체험은 경험의 주관적인 측면이라고 옮길 수도 있을 겁니다.


 

p29. 라 보에티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런 태도를 자발적 복종이라 불렀지요. 하지만 존 쿳시의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의 등장인물인 C는 라 보에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자발적 복종과 이 복종에 대한 반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있는 제 3의 길도 있다. 그것은 무저항, 일부러 세상과 멀어지기, 내면으로의 이민이라는 길이다.”

 

P30 사회학적대화는 무저항을 지지하는 이러한 세계관을 문제 삼습니다.

 

P34. 사회학이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것처럼, 사회학은 또한 윤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윤리적 실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요, 윤리란 곧 실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윤리성은 타자를 향한 책임성에 관한 문제이지요.

 

P35. 책임이란, 회피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떠맡는 것임을 확실하게 합시다..사회학자는 좋든 싫든, 의도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직업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 윤리 의식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고요. 그래야만 윤리적 태도가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또한 타자를 책임질 기회도 늘어나겠지요. 우리는 가능한 범위까지 이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사회학자는 이 길을 탐색하고, 지도를 그려내야 합니다. 사회학자의 임무는 그것입니다.



 

P37.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 쿳시의 또 다른 성찰을 상기해보겠습니다. 르네 지라르의 싸우는 쌍둥이에 관한 우화에서 영감을 받은 쿳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 두 집단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적을수록, 그들은 더욱 심하게 서로를 증오한다.”

 

P39. <커튼>이라는 책에서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전설로 짜인 한 마법의 커튼이 세계 앞에 걸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여행을 떠나게 하여 그 커튼을 찢도록 하였다.” 쿤데라는 예단Pre- judgement’이라는 커튼을 찢는 행위가 현대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파괴적 제스처를 끝없이 반복해왔지요. 이 반복을 힘들다 하더라도 무한히 행해져야 하는데, 마법의 커튼은 찢기는 즉시 뒷면에 조각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p40. 그는 사전해석preinterpretation의 커튼에 덧대어져 있는 진리를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커튼을 찢어버리는 세르반테스와 같은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지요.

 

예단의 커튼에 구멍 내기는 끝없는 재해석이라는 노고를 요구합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를 면밀히 조사하여 있는 그대로의 희극적 산문 속에서그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어둠으로부터 퍼 올리는 것, 그리하여 사실상 인간의 자유 영역을 확장하고 이 모든 노력을 자유로운 인간성을 구성하는 행위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끝없는 노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해냈느냐 혹은 실패했느냐에 따라 사회학이 판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p42. 당신은 특히 오노레 드 발자크, 에밀 졸라, 막스 프리쉬, 사뮈엘 베케트 등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또 언젠가 당신은, 만약 사막의 섬에 고립되게 된다면 소설책을 갖고 가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로베르트 무질, 조르주 페렉,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예로 들었습니다. .....사회학자가 되는 동안 이 작가들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료시켰나요? 또한 그들은 당신의 사유 방식과 사회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실제의 세상살이에 대한 진리를 추구한다면, 카프카, 무질, 보르헤스, 페렉, 쿤데라, 미셀 우엘벡 등으로부터 힌트를 얻는 것 외에 좋은 방법을 선택할 수 없을 겁니다.

 

p45. 어떤 명칭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선험적으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임을 상기해보십시오...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경험(‘나에게 일어난 일’, 즉 사건의 객관화될 수 있는 측면과 체험(사건이나 상태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반향이자 주관적측면)같은 독일어 개념들 말입니다. 사회학담론에서 흔히 경험과 체험의 구별 부재는 인간 리얼리티에서 생긴 일, 체험된리얼리티를 단순 경험의 조사로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습니다. 그리하여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가 저하되고, 리얼리티의 구체적인 제시도 일그러집니다.


 

p46. 이탈로 칼비노는 <문학의 쓸모>라는 책에서, 픽션 속의 다양한 리얼리티의 차원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진리의 다른 의미나 리얼리티와의 조우를 픽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정말 픽션에도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유일신교와 다신교, 혹은 하나의 진리와 복수의 진리라는 의미론적 영역이 보다 적절하고 적합해 보입니다. 아니면 고정되어 있는 진리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진리의 문제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꽉 끼는 보호장비와 느슨한 보호장비, 하지만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인 보호 장비의 대조는 어떤가요? 쿤데라의 설명을 빌려온다면, 커튼을 짜서 리얼리티 앞에 드리우는 것과 커튼을 찢고 통과하는 것과의 차이도 괜찮겠습니다.

 

p50.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은 흔히 데카르트의 오류라고 알려진 부수효과입니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연구자는 주체의 위치를, 연구 대상은 객체의 위치를 지닌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합니다. 하지만 즈미예프스키와 메이오의 실험에서 연구 대상들이 실험적인 게임의 공동 참여자임을 알아채는 순간, 그 전제의 가면은 벗겨지고 일축됩니다. 그들은 게임에 매우 중요한 공적인 의미가 부여 되어 있다는 암시에 부합하기 위해, 돌연 자신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책임감 있게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자신들에게 어떤 역할이 부여되어 있든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p53. 사회학은 사회의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을 자크 데리다 식으로 지속적으로 해체하는 일을 수행하는 한 비판적 활동입니다. 혹은 리처드 로티가 정의했듯이 지속적인 캠페인의 정치를 수행한다고도 할 수 있지요.

 

p54. 사회학은 사회의 현재 모습이 충분히 긍정적이지 않다고 자각하고 있기에 지속적인 개선을 동경하게 됩니다.

 

유동적인 현재적 삶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은 끊임없이 해석에 굶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판사회이론일 필요하지 않을까요? 삶이란 현존하는 리얼리티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도, 그 리얼리티를 끊임없이 그리고 동시에 대량으로 잉태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겠습니까? 비판 없이는 삶에 대한 어떠한 성찰도 시작될 수 없겠지요.

 

p56. 왜 변신론이죠? 왜 라이프니츠의 방법으로 되돌아가려는 건가요? ..변신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바로 이 세계가, ‘가능한 세계중에서는 그나마 최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몰이해 때문에 창궐하는 악과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명백히 모순처럼 보이지만, 전능하고 박애적인 신이 통치한다고 인정된 세계에서도 악의 존재는 세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변신론입니다.

 

팡글로스는 마거릿 대처의 신념인 TINA(There Is No Aternative)의 선구자이자 창시자이며 또한 그 이상의 영감을 준 인물이지요.

 

범사가 달리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지라,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코가 안경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그리하여 우리에겐 안경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두 다리는 분명 바지를 입도록 고안되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지가 있습니다. 돌은 큰 조각으로 잘려 성들을 짓는 데 사용되기 위하여 형성되었고, 따라서 각하께서는 아름다운 성 하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지방에서 가장 위대하신 남작께서는 가장 훌륭한 거처에 사셔야 합니다. ”

 

사회학은 변신론에게 농담과 재담만을 던질 뿐 그것과 단호하게 대립합니다.

 

P58. 사회학은 좋든 싫든, 대중이 필연성이나 자연적 질서라고 믿고 있는 기반을 무너뜨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중적 신념이 구성되고 지속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비합리성을 폭로해야 하는 거죠. 사회학은 규칙과 규범의 뒤에 숨어 있는 돌발 사태와 단지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 선택된 한 가지 가능성만 있다는 주장 주변에 넘쳐나는 다른 대안들을 들춰내야 합니다. 쿤데라의 알레고리를 빌려온다면, 사회학의 소명은, 재현으로 위장하고 리얼리티를 감추기 위해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찢는 것입니다.

 

아도르노가 지속적으로 강조했듯이, 사회학이 간결하고 정밀한 설명을 추구할 때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P61. 사회학을 수립한 창립자세 명은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분과학문에 대해 서로 다른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자가 탐구하는 리얼리티도 기성아카데미의 분과학문이 탐구하는 리얼리티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단언했습니다.

반면 막스 베버는 사회학이 탐구하는 리얼리티의 특수성을 인정했습니다.


 

게오르그 짐멜은 두르켐과 베버의 입장에 대한 모호한 지지를 피하려 했습니다. 짐멜은 이른바 ‘2차 해석학이나 ‘2단계 해석학이라 할 수 있는 상식과의 대화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석되어왔던 것을 재해석하고 인간의 생활세계Lebenswelt, 즉 체험된 세계를 채우고 있는 요소들을 구성하는 보편적이고 유일한 방식을 해석하는 것이지요. 1차 해석과 2차 해석은 끊임없는 탄생의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해석의 결과는 일시적인 안정일 뿐입니다. 이러한 영속적인 위기상태야말로 사회학에게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서식 환경입니다.

 

p67. 저는 밀즈가 구체화했던 개인의 일대기역사를 함께 엮으려는 사회학자의 임무를, ‘사회학적 해석학을 수행하면서 완수하려 노력합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인간의 행동을 상황 속에서의 도전(객관적 요소)과 삶의 전략(주관적 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이자 상호교환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입니다.

 

적지 않은 사회학자들이, 마법사의 돌을 찾는 연금술사처럼 열정적으로 알고리즘을 찾다가 결국 허무에 빠졌어요. 저는 그보다는 발견적 충고, 권유나 가이드라인이 지닌 본래적 특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p73. 정말 나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왜 사회학이 내게 그토록 소중한지를 확실히 설명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만약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산다면 호기심을 상실하게 될 것 같습니다.

 

p76.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신랄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과학은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창조적인 작업에 합류하도록 허락하는 신기한 장치입니다.

 

p78. 우리 세대는 역사의 대리인 historical agent’이 천천히, 그렇지만 무자비하게 해체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한 행위의 규칙에 따르면, ’역사의 대리인유기적인표준 집단을 꿈꿔온 지식인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존재로서,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땅을 향한 길고 긴 행진 끝에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적 목표에까지 도달하도록 인류를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p82. 베른슈타인은 화해를 지향하는 개량주의의 창시자로서, 페이비언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지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의도를 자본주의 사회 내의 정치, 경제적 틀 속에서 추구했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단 한 번에 바꾸는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한 것이죠. 레닌의 낙담과 베른슈타인의 낙관적 기대 모두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지속되면서, 죄르지 루차키는 역사의 이와 같은 분명한 저항(마르크스의 애초 예언을 따르지 않는)허위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하지만 결국 동굴 벽에 드리운 플라톤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으로 설명했습니다. 자본주의의 기만적인 총체성이 그러한 허위의식을 은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고무시킨다는 것입니다.

 

p

85. 톰슨은 현실의 실천과 결합되지 못한 이론적 실천을, 지식인들이 만들어내는 처녀수태(단성생식)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p88. 저는 이 질문과 직면했던 길고도 철저한 시도로서 아도르노의 저작들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대리인에 대한 영국 지식인들의 열정이 무미건조해지기 훨씬 이전에, 아도르노는 그의 오랜 친구인 발터 베냐민에게서 그가 브레히트적 모티프라고 이름 붙인 경향을 발견하고는 이를 비판했습니다.

 

브레히트적 모티프란 노동자들이 아우라 상실 위기에 처한 예술을 구원하리라는, 또는 혁명 예술과 결합한 직접적인 미적 효과가 노동자들을 구원하리라는 기대를 일컫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마지막 일침을 가합니다. “우리가 늘 그래왔듯이, 우리가 혁명을 필요로 했기에 그 필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덕목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경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도르노는 오히려 반대의 사례를 지적했습니다. 사회적 악이 유해하게 지속되고 있음은 우리가 더욱 열심히 시도해야 할 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근거가 된다고요.

 

아도르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자기 학대적인 격리는 배신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포기했다는 신호도 아니며 겸손의 제스처도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의사소통을 멈추겠다는 의도도 아닙니다. 인간 해방의 전망에 대한 진실을 훼손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결의일 뿐입니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역설적으로 앙가주망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p93.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병 속에 든 메시지라는 의사소통 전략을 제안합니다. ‘병 속에 든 메시지는 두 가지 전제를 함축하는 은유입니다. 첫 번째로 이 은유는, 기록될 필요가 있는 메시지가 있고 병에 담아 멀리 보낼 가치가 있는 고민거리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두 번째로는 언젠가 병 속에 든 메시지가 발견되었을 때, 그때에도 그 메시지가 여전히 가치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알 수 없는 독자에게 메시지를 위탁하는 이 같은 전략은, 동시대인들이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설사 메시지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간직하거나 유지하려 하지 않기에 선택된 것입니다. 이렇듯 메시지를 어딘지 모르는 장소와 시간으로 보내는 것은, 그 메시지가 현재의 무시를 견디고 살아남아 메시지의 잠재성을 잃지 않으리라는 희망에 의존합니다.

 

병 속에 든 메시지,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희망은 지속적이라는 증명입니다. 또한 가능성은 파괴될 수 없으며 가능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역경은 단단하지 않다는 증명입니다. 아도르노의 표현 속에서 비판이론은 바로 이에 대한 증명이며, ‘병 속에 든 메시지라는 은유를 정당화해줍니다.

 


p95. 부르디외는 마지막 저작인 <세계의 비참>의 후기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정치판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유권자들의 기대와 요구를 아주 빠르게 파악하고 구체화하지만, 그럼에도 정치영역은 비밀스럽게만 보이고 폐쇄적이 되려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정치 영역은 다시 개방되어야 합니다.

 

p96.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심지어 살기 힘들도록 만드는 매커니즘을 인식한다고 해서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모순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해서 모순이 해결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과 문제를 박멸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길고 복잡한 길이 뻗어 있습니다.

 

첫 발걸음을 내디뎌야만 궤도 수정으로 가는 길을 알아내고 개척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실로 부르디외의 명령을 기억하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실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사회세계의 연구에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사람은 그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에 중립적이거나 무관심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p98. 저는 제가 수행하는 종류의 사회학을 사회학적 해석학이라 부릅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우리가 처한 곳에서 사회적으로 형성된 상황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삶의 전략을 구성하는 인간의 선택을 해석합니다.

 

p99. 사회학적 해석학은 사회학적 수단으로 인간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p100. 사회학적 해석학은 통계적 코드화에 집요하게 저항해가는 과정입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저장하기 좋도록 연구 대상을 알고리즘 법칙을 구성하는 유한수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환원은 통상 망설임이나 죄책감도 없이 이루어지곤 하지요. 책임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까요.

 

P104. 사회학의 소명은 명백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에 방향 설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은 이러한 소명을, 변화를 철저하게 추적하고 그 결과뿐만 아니라 변화가 요구하는 적합한 삶의 전략들을 꼼꼼히 분석할 때 완수할 수 있습니다.

 


P107. 이에 대해 시배스천 폭스는 <폭스가 픽션에 대해 말하다>에서, 이를테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작가의 삶과 작품의 관계는 논평이 금지되기는커녕 토론의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분수령과도 같은 변화가 추측과 가십으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덧붙였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작가의 개인적인 성격을 표현한다는 가정에 따라, 전기적 비평은 창작의 행위를 쇼로 환원시켜 놓았다는 거죠. 저커버그는 지난 20년 동안 이러한 신의 계시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P111. 유명인이 되었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유명인들이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유명인에 대한 대니얼 부어스틴의 정의를 따르고 싶은데요. 그는 유명인이란,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이라 정의했죠. 유명인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20~30여 년 전에 저는 사회학적 전문용어의 사용을 아예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은 사회학으로의 진입을 가능한 한 폐쇄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회학적 전문용어는 의사소통을 붕괴시키고 경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학이 중요한 것이 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P113. 유명인처럼 보이는 것과 사람들이 귀 담아 듣는 유명인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유명인은 잘 알려지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레지스 드브레의 미디어크라시라는 개념은 유명인의 두 가지 경우 중 후자는 감추고 오직 전자만을 장려하는 경향을 지칭하는 데 아주 유용한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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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07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꼼꼼한 발췌.. ^^

시이소오 2016-03-07 18:59   좋아요 0 | URL
ㅋ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3-0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적 상상력... 저도 아주 근간 읽은 책이라 몹시 반갑습니다. ^^

시이소오 2016-03-07 22:17   좋아요 0 | URL
앗, 그러셨어요 ? 저도 반갑네요. 북다이제스터님 서재탐방하러 가야겠어요^^

syo 2016-03-0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저는 어제 사회학적 상상력 다 읽고 지금 사회학의 쓸모 읽는 중인데, 책 안 읽고 이 포스트만 읽어도 될 뻔 했습니다.*_*

시이소오 2016-03-08 01:20   좋아요 0 | URL
ㅋ 직접 읽으셔야죠 ^*^

비로그인 2016-03-0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과 세계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는 이 구절~ 우울해지려고 하네요. ;^^

시이소오 2016-03-08 08:5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만날 수 있는 희망이 있어요. 우울해하지 마시길 ^^;;

그루터기 2016-08-12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에 사회학입문서로 <나를위한 사회학>이란 책이 나왔던데요. 일본의 사회학 교수가 일상의 사회학에 대해서 쓴 책이였습니다. 이 책도 추천드리고 싶네요~^^

시이소오 2016-08-12 09:48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읽어봐야 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