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작가보다 나을 수도 있을까. 정혜윤 PD를 보면 그럴수도 있을 듯. 그녀를 보면 독서에도 소질이란게 있는게 아닌가 싶다. 나로선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난 오늘 토성의 영향 하에 있기에. 

 

수잔 손택은 <우울한 열정>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한 슬픈 학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벤야민이 언급한 토성적 기질 중 나와 동일한 것의 목록


- 우유부단, 둔감, 느림, 실수를 잘하는 것, 고집,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것, 내성적 성향을 의지박약 탓으로 돌리는 것

 

토성적 인간에 대한 수잔 손택의 처방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 감각과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시간은 많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좁다란 통로를 통해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밀어낸다. 그러나 공간은 넓고 가능성, 위치, 교차로, 통로, 우회로, 유턴, 막다른 골목, 일방 통행로 등이 가득하다. 실제로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가야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마지막 문장을 처방이라 진단해도 될까.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 , 아직 읽지 않았구나. 대학 교수가 되는 게 실패해 우선은 택시 기사가 된 폴이 주인공이다. 헌책방 주인 에게 택시 기사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폴의 문장

 

 

토사물과 정액과 똥과 오줌, 눈물까지 뒤범벅된 택시 뒷좌석을 치워야 하는 신세지만 신의 은총과 자그마한 심적 고양과 예기치 않은 기적을 경험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지요. 새벽 세 시 반에 타임스 광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다 보면 모든 통행이 다 끊어져서 문득 세상 한복판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정혜윤 PD<하이 피델리티>식의 리스트 중에서

 

5. ‘보통 크기의 매듭이 여덟 번 교차하는 매듭이 경우 256가지 방식으로 밧줄을 위아래로 배치할 수 있다. 이 중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매듭이 되거나 아예 매듭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핑 뉴스.에 나오는 애슐리 매듭서 중에서>

 

6. 일상의 문제는 스타일잉다. 일상의 문제는 깊이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다. 그러니 느리게 살자거나 빠르게 살자거나 하는 말은 내겐 의미가 없다. 느리거나 빠르거나가 아니라 뜨겁거나 차겁거나.

 

7.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장 뤽 고다르) ‘즐거움은 여행길에 있고 슬픔은 목적지에 있다의 대체 가능한 또 다른 버전이 일상이다. 일상은 역이 아니다. 일상은 기차다. 즐거움은 일상에 있고 슬픔은 목적지에 있다.

 

토카타와 푸가

 

토카타와 푸가가 가장 강렬하게 나온 영화는? 줄스 다신의 <페드라>. 정혜윤이 만난 노교수와 다치바나 다카시가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토카타와 푸가>를 듣고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한 것은 언제였던가? 줄스 다신의 영화 <페드르>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 영화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히폴리토스>를 현대 상황으로 바꾼 것이었다. 앤서니 퍼킨스가 연기하는 아들이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죽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 장면이 시작되자 문득 <토카타와 푸가>가 시작된다.

 

나와 여행

 

워즈워스가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고 말할 때 그 시간의 점! 인생의 방점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 열렬한 존경을 표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모든 쾌락에는 슬픈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상실의 느낌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으며 보는 것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길 원했다. 모든 수집가는 여행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낯선 호텔의 발코니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며 나도 뭔가 특권을 갖고 있음을 조금 부끄러워하며 인정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진정 아름다운 것, 진정 비참한 것을 보면서 감정을 표현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옆의 남자들이 한심해 보일 때 그녀는 책 속의 남자들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란 세계관을 가진 그는 봄을 쉰 번 넘게 보낸 중년의 나이에 그의 제자 아드소와 함께 살인 사건이 일어난 수도원으로 향한다. 그의 제자 아드소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질문이 많고 꽃다운, 순수한 호기심 가득한 젊은 영혼인데 이런 표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리송해질 정도로 민감하기도 하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 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노라

 
















별일 없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술

 

먼 곳에 있는 친구가 꼭 전해줄 책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찾아오면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나에겐 지금 뭐 해?”라고 문자를 보내는 후배가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다. “지금 뭐 해?” 난 대답한다. 딱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지.”

 

호수의 동심원 무늬 물결을 보면서 내가 나를 떠나서 멀리 퍼져나간다란 생각을 할 때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나오는 시구의 힘을 빌리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 ‘나긋나긋한 황갈색 여자, 나를 네게로 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나를 더 멀리 실어간다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

 

(메추리 요리를 먹은)헤르트루디스(티타의 언니)는 샤워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샤워 준비를 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렸기 때문에 불행히도 헤르투르디스는 샤워를 즐길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어찌나 강했던지 임시 샤워실의 나무판자가 뒤틀리면서 불이 붙었다. 헤르트루디스는 불길에 휩싸여서 타 죽을까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샤워장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장미향은 멀리, 아주 멀리까지, 혁명군과 정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마을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그들 중 유독 한 군인이 출중한 용기 때문에 돋보였다. 헤르투르디스는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헤르투르디시는 천사와 악마를 반반씩 섞어놓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산에서 싸우며 억눌려왔던 후안의 욕정과 맞물리면서 크나큰 장관을 이루었다. 후안은 그녀를 말에 태우고 열정적으로 껴안고 키스하느라 말고삐를 놓쳤지만 말은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처럼 계속 질주했다. 말의 움직임과 그 둘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어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평생동안 읽고 싶은 문장이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맥박은 고동치고 심장은 벌렁 벌렁, 그야말로 나는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었을 때의 느낌이란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갖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댕길 수 없다고 하셨죠.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죠.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심장에서 성냥불이 펑하는 순간을 상상하면 짜릿짜릿하다.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낟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손택이 동성애를 택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좌절시킨다. 수전 손택 같은 여자가 있다면 나는 그녀 앞에 주저없이 나를 깔겠다.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스는 이렇게 좋은 시간은 평생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표현한다. 발을 뻗으면 달까지도 닿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을 가졌다.’ 잭이 애니스를 인식하는 방법은 이랬다. ‘어두운 텐트에서 잭은 거대한 검은 산 덩어리에 밝게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으로 애니스의 존재를 알아 보았다잭의 이 문장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첫 순간을 묘사하는 수만 가지 표현 중에서도 절창이다.















 

밀란 쿤데라, <농담>

 

그렇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루치에의 그 특이한 느림때문이었다. 서둘러 돌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란 없다고, 무언가를 향해 초조하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체념한 마음을 발산하는 그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그랬다. 그 아가씨가 매표소로 가서 동전을 꺼내고 표를 사고 관람실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동안 계속 나로 하여금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 우수에 가득 찬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중략)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내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의 본질, 나는 그것을 한순간에 깨달았다고 느꼈고 보았던 것이다. 마치 누가 밝혀진 진리를 가져와 보여주듯이, 루치에가 가져와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그가 각각 다른 열일곱의 여자에게서 열일곱 명의 아들을 낳기 전에 사랑했던 것은 나이 어린 소녀였다. ‘그는 양피지에, 변소 벽에, 팔뚝에 시를 썼고 모든 시 속에 사랑하는 레메디오스가 나타났다. 나른한 오후 두 시의 공기속에 있는 그녀, 나방들이 뒤덮고 있는 물, 시계 안에 있는 그녀, 아침 빵에서 솟아오르는 김 속에 있는 그녀, 어디에나 있는 그녀, 영원히 존재하는 그녀.’

 

그녀는 거친 슈미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열을 식힌다는 이유로 허벅지를 드러내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했으며 손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손가락을 빨아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에겐 독특한 냄새가 있어서 그 냄새는 그녀가 지나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감지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녀의 체취는 남자들이 죽어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녀는 가느다란 오묘한 광풍이 불던 날 빨랫줄에 걸려 있던 침대 시트를 타고 오후 네 시의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메메 - 다 자란 처녀가 되었을 때 럼주를 세 병이나 마시고는 벌거벗고 친구들과 자신들의 몸 이곳저곳을 자로 재보고 서로 비교하기도 했었다 메메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체면치레로만 부부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했다. 그녀는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라는 청년을 사랑하게 된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노랑나비 떼가 나타난다. 항상 나비들이 그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어놓던 날 그녀는 이제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녀는 그에게 미쳤다. 단지 그를 위해서만 살게 될까 자존심이 상하고 두려워 카드점을 치러 간다. 점쟁이는 백 살 먹은 부엔디아 가문의 증조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사랑에 빠짐으로써 생긴 불안감은 침대 위에서만 해소할 수 있는 법이라고 노골적으로 밝힌다. 할머니는 메메에게 침대보를 빌려주고 겨자찜질 증기 요법을 통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방법과 양심의 가책까지 함께 쏟아내 버리게 하는 물약도 처방해 준다.

 

아울렐리아노 거대한 사타구니 위에 맥주병을 얹고 균형을 잡으면서 집 안을 싸돌아다닐 정도로 다시 볼 수 없는 정력의 소유자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복숭아 통조림을 열려고 애를 쓰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자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손가락을 빤다. 그날 이후 마꼰도 마을은 양피지에 쓰인 산스크리트어의 예언처럼 멸망한다.

 

정피디 인생은 진실로 위험하지만 도덕이 말하는 방식의 위험은 아니다. 인생은 진실로 버거운 대상이지만 그 본질은 전투가 아니다.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도 하거니와 다시 한번 더를 갈망하는 끊임없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여름 샌들

 

사랑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발이 가렵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신발을 벗는다. 나의 발은 타인의 몸을 지향한다. 하지만 첫날은 참는다. ‘듣고 있나요, 당신? 천국에 홀로 있는 당신을 애도할 겁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참는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의 맨발은 참느라 바닥에 문지른 나머지 무좀 환자의 발처럼 거칠게 갈라진다. 하지만 언제든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언제든지 신발을 멋을 수 있도록 나는 사계절 내내 가지각색의 여름 샌들을 신고 다닌다.

 

이건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어떤 남자가 왜 내게 발을 내밀지 않는거지라고 말하면 어떡하려고.

 

사람의 몸이 가장 적절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해본다면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과거를 달래주고 미래도 달래줄 수 있다! 사랑하는 몸은 과거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의 경험이 될 수 있다그걸 알려주는 책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다고 착각할 뻔했고 그렇게 믿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 질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난 내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것은 화장술도, 보석도 장신구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떤 여자들은 어느 순간 섹시해보인다. 뭐가 달라진걸까. 뿜어 내는 분위기 탓이었다. 섹시함은 분명 자신감으로부터 나온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의 진실은 사랑을 잃어버리면 한 세계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너에게라고 서명이 되어 있는 책을 받아볼 일이 없어지는 것이고 오늘 회식 때 맛있는 식당을 발견했어. 우리 꼭 담에 같이 가자라는 말을 들을 일이 없어지는 것이며 공원인데 햇볕이 정말 좋아.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네가 좋아하는 꼬막 철이야. 노량진 수산시장에 꼬막 먹으로 가자라는 말, ‘너랑 비슷한 여잘 봤어.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네사 훨씬 더 예뻤어’, ‘오늘 잡지에서 봤는데 말레이시아가 멋있다더라. 꼭 같이 가자.’, ‘세일하는 와인을 몇 병 샀어. 치즈 사와, 같이 먹게란 말을 들을 일 역시 없어지는 것이다. 또 이런 문장을 잃는 것이다.

 

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중에서)

 

이런 문장을 잃는 다는 것은 너와 헤어지면 다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고백하는 목소리를 잃는 것이며 애무하고픈 달뜬 욕망에 시달리며 길 잃은 장님처럼 헤매는 손가락을 잃는 것이다.

 

또한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와 알기 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되었다를 잃는 것이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아이누 말로 그립다는 게 뭘까? 그러고 보면 요전에 네가 말했었지. 아이들을 잃고 서럽게 울다 눈이 먼 어머니의 노래. -야 레호. -야 레호. ‘그리워를 영어로 말하면 아이 미스 유라지. 내 존재에서 당신이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라지. 모두 그럴 테지. I miss you, 그리워 혹은 존재에서 네가 빠져 있어. (쓰스마 유코의 <> 중에서)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 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릿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세상에, 태양이 저물고 있나 보군.”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마치 시간을 가리키는 척하지만, 실은 고장났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엔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만한 어린애는 없단다.”

 

,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시간이여, 매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위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벼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리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 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잘려진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 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작은 별 아래서.

 

움베르트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이카루스 한바탕 곤두박질을 치고 난 기분입니다.

테세우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인생은 살만한 거지요.

오디세우스 곧 돌아오겠소

탈레스 물 흐르듯 살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뭐니 뭐니 해도 건강한 게 최고지요.

소크라테스 모르겠소

플라톤 이상적으로 지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삶의 틀이 잘 잡혀 있지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내 안색이 루비쿤두스 빛으로 변한 걸 보시오.

노아 재해 보험 좋은 게 하나 있는데, 알고 계세요?

모세 수염이 석 자면 뭐 하겠소?

셰헤라자데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아벨라르 자르지 마세요

잔 다르크 , 너무 뜨거워요.

노스트라다무스 언제 말입니까?

코페르니쿠스 잘 지냅니다.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 덕이지요.

데카르트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버클리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느낍니다.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갈릴레이 잘 돌아갑니다.

홉스 굶주린 늑대처럼 배가 고파요.

프랭클린 벼락 맞은 것처럼 짜릿합니다.

카사노바 모든 쾌락이 다 나를 위한 것이지요.

사드 좆나게 잘 지냅니다.

칸트 비판적인 질문이군요

쇼펜하우어 잘 지내려는 의지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카프카 벌레가 된 기분입니다.

블로흐 잘 지내기를 희망합니다.

프로이트 당신은 요?

카뮈 부조리한 질문이군요

엘리엇 내 마음은 황무지입니다.

 

나는 카이사르와 아인슈타인의 동문서답 대화를 상상해본다.

 

카이사르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오. 루비콘 강을 건넜으니.

아인슈타인 : 신이 주사위를 던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파블로 네루다, <추억>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일 때, 파블로 네루다는 아주 깊은 칠레의 숲 속, 길을 잃고 헤메다 나이 든 세 여인이 사는 집을 발견한다. 그들은 네루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데 수많은 초가 꽂힌 두 개의 은촛대가 하얀 식탁보로 덮인 원형 식탁에 최상의 요리와 최고급 포도주를 대접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웃다가 아주 이상한 카드 뭉치를 꺼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 깊은 산속 까지 들어왔던 스물입곱 명이 이 집에 들렀다. 몇몇은 호기심으로, 몇몇은 나처럼 우연히. 놀랍게도 이 세 사람은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 기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상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그때 준비한 요리가 적혀 있었다. 그녀들은 그 친구들이 다시 올 것에 대비해서 단 한 가지라도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기 위해 매번의 식단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 어딘가에도 나를 환대해주길 기다리는 곳이 있을까. 그 집에 가고 싶다. 그런 생각만으로 나는 따뜻해진다.















 

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에 대해

 

어쩌면 문학의 테마는 단지 두 개뿐일지 모른다. 하나는 인간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외로운 한 인간이 우주와 자신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후자다. 그의 모든 작품들의 공통적인 테마는 시간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우리들의, 끝없이 반복되는 시도들이다. 영원이란 낙원은 뒤집어보면 권태롭기 짝이 없는 형벌이고 가공적인 픽션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욱 리얼할 수도 있다. 변화하지만 결국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시간의 미로 속에서 길 잃은 인간, 영원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 볼 때 얼굴이 희미해지고 자신마저 사라져 버리는 인간, 불멸을 발견하고 죽음을 극복하지만 시간과 늙음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인간이란 테마를.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역시 하나다. 그것은 인간의 작품들과 인간 자신은 바로 소멸하는 시간들이 그려낸 형상이란 사실이다. 시간은 내가 만들어진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나 또한 그 강이다. 보르헤스는 우리 모두가 동시에 활쏘는 이, 화살, 그리고 과녁이란 사실을 일깨워준 것을 기억하자.

 

보르헤스, <칠일 밤>

 

시간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 자아를 부정하는 것, 별이 가득 찬 우주를 부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절망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로가 된다. 우리들의 운명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다.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돌이킬 수 없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다. 시간을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스티븐 킹, <자각의 가을>

 

1960년의 여름. 여름이란 언제나 주머니에선 동전들이 짤랑거리고 기온은 즐거운 화씨 90도대에 있고 발에는 케즈 운동화를 신고 플로디 마켓을 향해 길을 내려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로빈 루크가 수지 달리을 부르던 해. 굉장히 여름이 오래가던 해, 어느 아이가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집으로 페달을 밟아갈 때 그의 자전거 살에서 따드륵거리는 기관총의 소음같은 소리가 나던 해, 그리고 새로 깍은 잔디의 냄새에 뒤섞인 야구 경기 해설 아나운서의 소리. ‘볼 카운트 스리 투.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흔듭니다. 던집니다. , 날아갑니다! 테드 윌리엄스가 그 볼을 힘껏 쳐냅니다. 굿바이 홈런입니다. 레드 삭스가 31로 앞서갑니다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마르고 상처 딱지투성이인 옛날의 그 소년이 이 나이 든 사람의 몸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 시절 최고의 기억은, 주머니 속에는 잔돈을 넣고 등허리에서는 땀이 흘러내리는 상태로 그 길을 달려 내려가 마켓으로 향하던 모습이다.

 

이 글은 나중에 <스탠 바이 미>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난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다. 이 글은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다!’라는 걸 알려주는 글이다. 이 글 속의 소년의 이미지는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고통스럽게 남몰래 묻는 모습이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과 폭력이 일상인 소도시의 먼지 자욱한 여름 햇살 뒤에 서 있는 희망 없는 소년의 심장에는 그 질문이 숨어 있었다.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름 햇볕에 달궈진 아스탈트 위에 서서 이 질문을 던져보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네거리의 신호등을 불안하게 살펴보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은 알 거다.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라는 걸.

 

왠지 모르겠지만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란 문장을 보면 목이 메인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했다. 츠네오는 맹수 우리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억제된 흉포한 힘을 느끼게 하는 호랑이의 광기 어린 노란 눈이 이쪽을 향하자 조제는 무서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랑이는 어슬렁 거리며 우리 안을 오가다가 갑자기 조제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노랑과 검정이 만들어낸 강렬한 얼룩무늬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조제는 호랑이의 포효에 기절할 만큼 놀라 츠네오의 옷자락을 잡는다.

 

-꿈에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보긴 왜 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빛의 속도 여행

 

어느 잠들지 못하는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보다가 만물 중 사람만이 자신의 시선을 하늘로 향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사람만이 빛의 속도로 여행할 자기만의 목적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자신을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시대에 지치지 않고 살기 위해 가끔 과거를 현재로 돌려봐야 하기 때문이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이 아름다운 글의 끝은 이렇다. ‘고독할 때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었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위안이 된다.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이 구절을 몇 번 따라 읽으면 누군가 등을 쓸어주는 기분이 된다.



 
















오르한 파묵, <검은 책>

 

나는 너를 사랑했어. 우리가 같이 본 영화를 네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네가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지,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얼마나 다른지 낙담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나는 네가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윗입술을 내밀며 글을 읽는 모습을 보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너를 바라보는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응시하고, 그러고는 방금 떠오른 것을 찾는 양 핸드백을 뒤지는 모습을 사랑했어.

 

한 짝은 옆으로 누운 좁은 돛단배, 한짝은 등이 굽은 고양이처럼 몇시간이고 너를 기다리던 하이힐 안으로 네가 서둘러 발을 넣는 모습을 사랑했고 많은 시간이 흘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진흙이 묻은 신발을 다시 비대칭적인 외루움 속에 남겨두기 전 너의 엉덩이, 다리, 발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능숙한 움직임을 사랑했어.

 

평생동안 알던 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달라 보일 때 너를 사랑했어. 내가 사랑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너였어. 다른 사람은 미로 같은 계단을 돌고 돌아 극장 밖으로 나오는데 너는 지름길을 찾아 먼저 인도로 나올 때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사랑했어. 자동차들이 거리를 지나는데도 한쪽 인도에서 맞은편으로 단걸음에 유쾌하게 건너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너를 걱정했고 너를 사랑했어.

 

라디오 성우 목소리로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을 재연하는 너를 사랑했으며, 내가 두 손으로 너의 머리를 감싸 안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며,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바라볼 때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사과를 세로로 잘라 완벽한 별 모양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너를 사랑했고 어느 오후 어떻게 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너의 머리카락 한 올을 내 책상 위에서 보았을 때 너를 사랑했으며,

 

어느 날 함께 외출했을 때 만원버스 손잡이를 나란히 잡은 우리 손이 별로 닮지 않은 것을 슬프게 바라보았을 때 내 몸을 바라보듯 너를 사랑했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기차를 볼 때 너의 얼굴에 나타나는 미묘한 표정을, 그 슬픈 눈길과 똑같이 닮은 것을, 갑자기 전기가 나가 우리 집 안의 어둠과 밖의 밝음이 천천히 자리를 바꾸었을 때 다시금 너의 미묘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속수무책의 질투심으로 터질 듯 아팠지만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뒤라스, <고독한 글쓰기>

 

내 침실은 침대도 아니고 그곳은 어떤 창이고 검은색 잉크로 쓰는 습관과 희미한 잉크의 흔적들이 있는 그런 탁자이고, 그런 의자이다. 그것은 어디에 가든 내가 항상 되찾게 되는 어떤 습관, 예를 들면 호텔방에서처럼 불면증으로 시달릴 때나 갑작스러운 절망을 느낄 때를 대비해 여행용 가방 속에 항상 위스키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나에게는 연인들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연인이 한 명도 없었던 적은 거의 없다. 나는 그 매력적인 연인들에게 차례로 여러 권의 책을 쓰리라고 약속하였다. 나의 사랑은 결코 대체되지 않는다. 나는 살아가면서 매일 그런 사실을 느낀다.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엇을 것 같았으리라. 그 꿈은 이미 도시 저쪽의 광막한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 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파묵의 신간이 나왔다. ) 

 


정혜윤 생활백서

 

지는 해를 보면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기. 차라리 가라앉는 태양이 나에게 빛을 던져주는 이유를 따져보기.

 

인간이 남 앞에서 벌거벗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일으켜서라는 말을 알고 있긴 해도 샤워하다가 뛰어나와서는 정말 아무에게도 벗은 몸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걸까 궁금해하기. 정말? 한 사람도?

 

수천 가지 연애 감정을 적어놓은 스탕달의 <연애론>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기.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자꾸만 거울로 들여다보기. ‘입술이 아래로 처져 있는 이유는 지상에서의 작은 소망이 아직도 그 입술 위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니체)라는 말 떠올리기.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오로지 그에게만 열렬히 빠져 있을 때는 거의 모든 책 속에서 그의 초상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그렇다. 그는 주연인 동시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서 장단편 관계없이 다양한 소설 속에서.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히 작은 것 속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능력, 즉 내적으로 집중 되어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압축된 충만함을 담을 수 있는 어떤 외연적인 것을 찾아내는 재능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펼쳐졌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쉬고 새로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안족에서 활짝 펼쳐 보이는 부채의 그림처럼 받아들이는 재능이라고 말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용감한 자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양날의 칼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누구를 벨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지나가 버리는 데에 보다 큰 용기가 들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아끼는 것이다. 그대들은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을 가질 뿐 경멸할 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아 벗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을 아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들은 웬만하면 스쳐 지나가야 한다.

 

, 저런! 이 대목을 여태까지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건 용기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는 자제에 대한 글이었다. 자제심이 용기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설파하는 글이다.

 

여러 가지 길과 방법으로 나는 나의 진리에 도달했다. 나의 눈길이 저 먼 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 높이에 이르기 위해 단 하나의 사다리만을 타고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길을 물어본 것은 언제나 마지못해 그랬을 뿐이다. 길을 물어본다는 것은 언제나 나의 미감에 거슬렸다. 오히려 나는 길 자체를 물어보았고 시험해보았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빡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마음껏 숭배하는 자이며 저편 물가를 향해 날아가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미감과 운명을 만들어내려는 자를. 그런 자는 자신의 덕을 위해 살려고 하고 또 죽으려고 한다.

나는 사랑한다. 너무나 많은 덕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 가지 덕보다도 뛰어난 법. 왜냐하면 덕이란 운명을 묶어주는 매듭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영혼을 낭비하는 자를, 그리고 감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를. 그런 자는 언제나 주기만 할뿐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주사위를 던져 얻은 행운을 수치로 여기고 나는 사기 도박꾼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행동에 앞서 황금이 말을 던지고 언제나 약속한 것 이상으로 행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옹호하고 인정하며 지난 세대를 구제하는 자를. 그러한 자는 오늘의 세대와 씨름하면서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이지경이다.

나는 문장들을 스쳐지나간다.

왜냐하면 나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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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08-30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좋아요`만 누르고 지나갈 수 없게 만드는 페이퍼입니다.
때로 알라딘이 맘에 안들어서 블로그를 옮겨야 하나 싶다가도,
이런 귀한 페이퍼 때문에,
죽순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건가 싶습니다.
이런 페이퍼를 볼 수 있다는 게 황송하고 영광입니다.
덕분에 하루를 즐겁게 시작합니다, 감솨~(__)

시이소오 2016-08-30 13:47   좋아요 1 | URL
아구 황송합니다. 맛있는 점심 드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30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비장하네요. 위 양철나무꾼 님 말씀에 동의 !

시이소오 2016-08-30 13:56   좋아요 1 | URL
비장한가요? ㅋ 비장하고 싶네요 ^^

물고기자리 2016-08-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의 글은 다큐멘터리의 카메라 렌즈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당한 개입과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렌즈요.

무언가를 포착하고, 생각할 거릴 던져 주시지만 시이소오 님의 생각과 병행해 제 생각을 스스로 펼쳐갈 수 있게끔 해주시거든요.

하루 종일 책만 읽으라면 싫어요!라고 말하겠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라고 하면 냉큼 그러겠다 대답할 것이 분명한 다큐 덕후로서,

시이소오 님의 그 개입과 적당한 거리감을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제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떤 형태를 직접 제시해주기보단 제가 찾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의 방향을 무심하게 가리켜 보이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들이 알아볼 만한 그런 것을요..

시이소오 2016-08-30 13:50   좋아요 1 | URL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은 개입하기가 더 힘든 책인것같아요.

적당한 거리감유지하도록 노력해야겠네요 ^^

물고기자리 2016-08-30 15:02   좋아요 1 | URL
아! 그 적당한 거리감은요, 시이소오 님이 어떻게 쓰시든 제가 느끼는 (좋은 의미의) 거리입니다^^

저와는 다른 체계의 사고를 하시기 때문인데 저 같은 성향의 사람에겐 시이소오 님의 글이 그런 톤으로 읽히거든요.

제게 많은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 계시죠^^

시이소오 2016-08-30 15:46   좋아요 1 | URL
생각이 다르면 불편할수도 있을텐데 다른생각을 포용하실만큼 물고기자리님의 폭이 그만큼 넓으신거겠죠.

매번 감사드려요^^

물고기자리 2016-08-30 16:14   좋아요 1 | URL
생각하는 체계가 다른 거지, 결과물이 다른 건 아니거든요!!ㅎ

사실 결과물이 완전히 다른 것도 시이소오 님의 글을 읽다 보면 꽤 수긍 가기도 하고요^^

저는 바라보는 방식이 다른 걸 정말 좋아해요. 제가 다큐를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의 시선을 시각화해서 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제 부족함을 채워주니까요!ㅎ

다만 그 방식에서 강요가 없는 걸 좋아하는데, 시이소오 님은 꽤 신랄하기도 하시지만 억압하진 않는 면에서 제겐 다큐와 비슷하죠^^

저는 오히려 저와 너무 비슷한 글을 잘 못 읽어요 ㅋ

시이소오 2016-08-30 16:45   좋아요 1 | URL
다른시각을 좋아하는게 쉬운 일은 아닌듯한데, 대단하세요. 비판은 하지만 강요하고싶진 않은데 그렇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30 1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이 정도의 글감을 뽑아내면 알라딘에서 월급 주고 고용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알라딘 너무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1   좋아요 1 | URL
ㅋㅋ 취직시켜주믄 좋겠네요 ㅋ

syo 2016-08-30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난아니네요. 북플이 글꼴이나 문단서식 같은걸 다 후려치는지라 따로 구분하고 쓰셨는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어디까지가 인용하신 글이고 또 어디부터가 시이소오님이 쓰신 글인지 구분을 못했어요....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2   좋아요 1 | URL
저도 구분이 안가드라구요.
^^

cyrus 2016-08-30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자가 작가보다 나은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독자의 손에 펼치는 순간, 도전의 대상이 됩니다. 독자가 텍스트에 담겨진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도전, 그리고 그 생각이 옳은지 아닌지 직접 판단하는 도전. 만일 저자가 후자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의 틀에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는 것이 많은 식자들이 빠지기 쉬운 자가당착입니다. 반면 독자가 작가에 대한 도전을 피한다면 역시 자기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독자가 후자의 도전을 즐긴다면, 저자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4   좋아요 1 | URL
정혜윤 피디야말로 저자를 뛰어넘는 독자의모범이 아닌가 싶네요. ^^

붉은돼지 2016-08-30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개요 호호호


시이소오 2016-08-30 13:55   좋아요 1 | URL
붉은 돼지님, 오랜만에 뵈니 반갑고 감사드려요^^

21세기컴맹 2017-02-04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또 이 안에서 보석을 발견하고는 하트를 날립니다. 가만 보면 여태 겉만 핥고 있었던 것같은 ... 그러나 이젠 눈의 능력이 늘 벅차네요

시이소오 2017-02-04 14:15   좋아요 1 | URL
덕분에 오랜만에 저도 읽어보려 했더니 엄청 기네요 ㅎ

저의 단상은 눈꼽만큼이고 거의 정피디님의 문장입니다. 만일 이글이 보석같다면 정피디님 때문일겁니다. 저는 보석상이라고 할카요? 21세기컴맹님, 고마워요 ^^

2017-07-09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7-07-09 21:48   좋아요 1 | URL
미리내님 덕분에 저도 다시 읽어보려했는데 엄청 기네요.

좋게 봐주셔서 저도 고맙습니다^^
 

자연주의 : 주관적 의미

 

장 폴 사르트르: 주관적 의미에 대한 고전적 전술


 

사르트르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존재(실존)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원칙을 기초로 삼는다. 우리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 홀로 선택하고 또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즉 인간은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위하여 자기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쿠르트 바이어 : 신을 배제한 주관적 의미

 

과학은 존재를 종교보다 더 잘 설명한다. 종교는 존재에 목적을 부여하지만,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삶에 객관적 의미는 없지만, 우리는 삶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종교적 세계관은 이상화된 사후의 삶을 강조하면서 현재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깍아내림으로써 우리의 주관적 의미 부여를 방해한다.

 

폴 에드워즈 : 세속적 의미로 충분하다

 

이 지치고 늙은 세계를 아비로 삼아서 태어나 삶과 죽음이 계속된다...그리고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맹목적이다. ....삶은 바다 위에서 모든 물결과 바람에 흔들리는 배와 같다. 어떤 항구, 어떤 피난처로도 향하지 않는, 노도 나침반도 조타수도 없이 그저 한동안 떠돌다가 파도 속으로 실종되는 배......”

 

- 클래런스 대로

 

인간의 삶은 주관적 지상적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의미와 가치의 기준을 너무 높게 설정하지 않는다면, 일부 사람들의 삶은 가치 있다. 그러나 비관론을 최종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가 비존재보다 더 나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인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 부재하는 것보다 더 나은지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카이 닐슨 : 죽음 앞에서의 의미

 

닐슨에 따르면 신과 사후의 삶이 없다 하더라도 삶이 허망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삶은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삶에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추구하는 목표와 목적들은 우리의 삶과 환경에서 실행하거나 소유하거나 경험할 가치가 있는 것들,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기쁨, , 활기, 만족을 주는 것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에충분하다. 그런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런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진 못한다.

 

헤이즐 반스 : 우리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우리의 몫은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 메를르 퐁티

 

 

우리가 가치를 발명한다는 말은 단지 삶이 선험적 의미를 가지지 않음을 뜻할 뿐이다. 당신이 살기 전에,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몫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치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선택하는 의미다.”

 

- 사르트르

 

우리는 성장해야 하고 우리 나름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어떤 외부의 행위자가 이 일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획들을 통해서 우리는 제한된 불멸을 얻는다.

 

레이먼드 마틴 : 빠른 자동차와 멋진 여자

 

마틴은 삶이 가장 좋았을 때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는가? 대답은 대부분 아니다’. 마틴에 따르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때, 삶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만족을 얻는 다는 게 가능할까?

 

존 케커스 : 비도덕적 삶도 유의미할수 있다

 

주관적 의미관을 배척하고 객관적 의미관을 수용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1. 의미가 주관적이라면, 우리가 세뇌당하거나 조작당해서 어떤 기획의 실행을 원하는 것과 숙고 끝에 정말로 그 기획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

 

2. 우리가 조작당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의미는 보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품은 욕망의 가치에 대한 질문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어떤 기획이 우리의 삶을 개선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 기획을 추구하지만, 그 기획은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유의미한 삶은 목적 없거나 부질없거나 하찮거나 부조리하지 않으며, 당사자가 흥미롭고 삶을 개선해준다고 여기는 활동들을 실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활동들은 자연 세계에서 이루어지므로, 종교적 대답은 배제된다. 또 이 활동들은 비도덕적 일 수 있으므로, 도덕적 대답도 배제된다. 개인이 어떤 활동 혹은 기획을 흥미롭고 보람 있다고 여길지에 대한 보편적인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슈미츠 : 사소한 것들에 몰두하기

 

슈미츠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천천히 쌓이는 삶의 작은 조각들 때문에 유의미할 수 있다. 설령 그 조각들이 끝내 완성된 예술 작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삶의 의미는 삶에 몰두하는 것에서 나온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조금은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결코 명확하게 진술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몰두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로버트 솔로몬 : 당신의 비전에 맞게 살아라

 

삶이 게임이라면, 삶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승리를 원하거나 훌륭한 선수가 되기를 원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이야기라면, 자신을 진행 중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그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비극이라면, 불가피한 죽음을 직시하면서 용감하게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몰느다. 삶이 농담이라면, 우리는 삶을 덜 진지하게 바라보면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사명이라면, 당신은 타인들을 변화시키거나, 혁명을 일으키거나, 아이들을 양육하거나, 과학을 발전시키거나, 도덕을 향상시킬 것이다. 삶이 예술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개성, 혹은 품위가 있는 삶을 창작하기를 원할 것이다. 삶이 모험이라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에 도전하기를 즐길 것이다. 삶이 질병이라면, 모든 것은 죽음으로 마감될 것이다. 삶이 욕망이라면, 욕망의 충족이 의미를 산출할 것이다. 삶이 수행이라면, 삶의 목표는 욕망을 제거하고 평정에 이르는 것이다.

 

삶이 이타적 활동이라면, 우리는 보답이 없더라도 타인들을 위해 살 것이다. 삶이 명예라면, 우리는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우리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삶이 학습이라면, 우리는 배움에서, 우리의 역량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에서 만족을 얻을 것이다. 삶이 고통이라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명상이나 자기 부정을 통해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 터이다. 삶이 투자라면, 우리는 삶의 시간을 돈이나 명성 같은 보상을 얻기 위해 투자할 자본으로 여길 것이다. 삶이 관계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우정일 것이다.

 

데이비드 런드 : 우리의 의미 탐구는 유의미하다

 

진리와 의미의 추구는 끝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추구 자체가 존재하는 의미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줄리언 바지니 :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바지니는 삶에 의미를 제공할 만한 여섯 가지 길을 고찰한다. 타인들을 돕기, 인류에 공헌하기, 행복하기, 성공하기, 하루하루를 즐기기,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모든 길이 다 유의미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파악할 수 있다. 유의미한 삶을 살 길이 많이 있다. 어쩌면 사랑이 행동을 이끌어 내는 가장 강력한 동기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숭배하기

 

인간의 삶은 짧고 무력하다. 삶의 당사자와 인류 전체에게 느리고 확실한 죽음이 어둡고 무자비하게 떨어진다. 선악을 모르고 파괴를 주저하지 않으며 전능한 물질은 중단 없이 자신의 길을 굴러간다. 오늘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내일은 본인이 어둠의 관문을 통과할 운명인 인간에게는......자신의 보잘것없는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드높은 생각들을 간직하는 것만 남는다. 운명의 노예의 소심한 공포를 경멸하고, 스스로 제작한 관을 참배하는 것만 남는다.

 

우연의 지배에 당황하지 말고, 자신의 외적인 삶을 지배하는 부당한 독재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보존하는 것만 남는다. 거스를 수 없는, 즉 그 자신의 지식과 저주를 잠시 관용하는 힘들에 자랑스럽게 반항하면서, 지쳤지만 포기하지 않는 아틀라스처럼, 무의식적 힘의 난폭한 행진엥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이상들이 빚어낸 세계를 홀로 떠받치는 것만 남는다. ”

 

삶에 객관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체념하며 받아들이고, 단지 위로를 준다는 이유로 다른 믿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객관적 무의미성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아름다움, 진리, 완벽함을 창조하려 애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영원한 힘들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

 

리처드 테일러 : 우리의 의지를 투입하기

 

테일러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활동에 투입하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R. M 헤어 :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일반적으로 무언가에 마음을 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중요하다. 이런 중요성을 우리는 세계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중요성이란 우리가 사물과 사람에 부여하는 속성이다. 우리는 정말로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들에서 가치(혹은 의미)를 발견한다고 헤어는 주장한다.

 

어빙 싱어 : 가치 창조

 

싱어에 따르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전통적 종교적 대답, 허무주의적 대답, 우리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라는 대답. 싱어는 종교적 대답이 많은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답을 배척한다.

 

이런 패턴의 믿음은 사건과 평범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검증불가능한 전제들에 기초를 둔다. 여러 세기에 걸친 비판에 의해 이제 흔들거리는 초월적 버팀목들을 치워버리면, 그 거대한 구조물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우리의 앎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심스러운 상상 없이 의미를 획득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싱어는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선 창조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싱어는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한다.

 

삶에서 참된 기쁨이란 당신 자신이 위대하다고 인정하는 목적에 쓰이는 것,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기 전에 완전히 소진되는 것, 세상이 당신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탓하며 안달하는 조막만한 이기적 원망과 불평의 덩어리가 아니라 자연의 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에서 유일한 진짜 비극은 개인적인 의도를 품은 사람들에 의해, 당신이 저급하다고 여기는 목적에 쓰이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최악의 경우에도 기껏해야 불운이거나 죽음이다. 유일한 비참함, 지상의 지옥은 노예가 되는 것이며, 이에 맞선 반란은 가난한 예술가에게 인간의 일을 제공하는 유일한 힘이다. 개인적인 의도를 품은 부유한 사람들은 그 예술가를 매우 기꺼이 포주, 광대, 아름다움을 파는 장사꾼, 감상 유발자 따위로 고용하려 들겠지만 말이다.”

 

싱어에 따르면 만물에 깃든 좋음을 사랑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물에 깃든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선물에 마음을 쓰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삶의 사랑을 경험한다. 그것은 독특한 유형의 행복과 많은 기쁨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랑이다. 자연이나 실재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클렘케 :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기

 

클렘케는 자신이 다루려는 문제의 핵심이 다음과 같은 카뮈의 문장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 나의 관심사의 전부다.”

 

클렘케는 신이 없이도 지식, 예술, 사랑, 일 등을 통해 주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을 통해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할 가능성을 얻는다.

 

 

주관주의를 주장하는 입장들은 대개 감동적이다. 우리는 아름다움, 완벽함, , 예술, 사랑등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이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주관주의를 받아들인다면 강간범의 삶은 과연 의미있는 삶일까? 우리는 그의 삶에 반박할 수 있을까? 주관주의가 지닌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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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의 글에 소개된 저자 이름 중에 제가 아는 이름은 사르트르, 퐁티, 러셀 뿐이에요.

시이소오 2016-08-29 13:11   좋아요 0 | URL
오늘날 학자들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번역도 안됐네요 ^^;
 


불가지론

 

폴 에드워즈 : 질문의 무의성

 

미국의 도덕 철학자. 20세기 철학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불리는 <맥밀런 철학백과사전>의 책임 편집자다.

 

어떻게질문과 질문은 때때로 유사하지만, 다른 질문일 때도 있다. 신학적 왜 질문들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 질문들에 대한 신학적 대답들이 참이라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신학적 대답들은 초궁극의 왜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다. 초궁극의 왜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만물 바깥에서 만물을 설명해주는 무언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어 : 무의미한 질문과 주관적인 가치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 중 하나.

 

삶 전체의 의미나 목적이 있을까? 에이어에 따르면 그런 건 없다. 모든 삶에 적용되는 목적이나 최종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또 설령 그런 목적이나 목표가 존재하더라도, 이를테면 신이 품은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 모든 삶의 목적이라 하더라도, 신의 목적은 우리의 목적이 아닐 터이므로, 이것은 우리의 탐구와 무관한 이야기다. 신의 계획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 계획에 참여할 수밖에 없든지 아니면 참여 여부를 선택해야 한다. 후자는 삶의 의미가 우리 자신의 선택과 가치관에 달려있음을 뜻한다. 게다가 전자와 후자 모두 신의 계획의 목적 혹은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불러온다. 또 이 질문의 대답은 또 다른 왜 질문들을 무한정 불러오기 마련이다. 요컨대 궁극의 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카이 닐슨 : 무의미한 질문과 가치 있는 삶

 

왜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가치 있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무엇이 가치 있느냐는 물음 그 이상이다. 이 질문은 가치 있는 것, 또는 중요한 것이 과연 존재할까라고 묻는다. 닐슨에 따르면 객관적 대답은 불가능하다. 변화를 일으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효과가 미미하므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미미한 일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요컨대 삶의 의미는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주관적 목표들로 환원된다.

 

존 위즈덤 : 유의미하지만 거의 대답 불가능한 질문

 

 

만물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유의미하다. 정의상 만물의 바깥에서 만물에 의미를 주는 무언가는 있을 수 없다. 만물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만물은 무슨 의미일까?”라고 유의미하게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은 대답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이 배움으로써 대답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대답이 존재한다면 그 대답은 삶의 내부에서 나올 것이다.

 

헵번 : 대답 불가능한 질문과 가치 있는 기획들

 

헵번은 우리가 스스로 가치가 있으며 만족스럽고 흥미로운 기획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한 잘 살려고 노력할 수 있다.

 

중간 점검

 

에드워즈, 에이어, 닐슨은 모두 궁극의 왜 질문이 대답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가 거기서 멈췄다면, 에이어와 닐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지를 물었다. 에이어는 오직 주관적으로만 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닐슨은 도덕적 사안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추론하는 우리의 능력을 더 낙관적으로 펴가했다. 위즈덤은 궁극의 왜 질문이 유의미하고 이해 가능하지만 대답 불가능할 것이라 주장했다. 헵번은 그 질문이 유의미하고 대답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헵번 역시 의미는 우리의 주관적 목적에서 가장 잘 발견된다고 덧붙인다.

 

로버트 노직 : 어떻게 무언가가 의미를 발산할 수 있을까?



 

신의 목적은 삶의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무의미성을 받아들이거나 의미를 발견하려 애쓰는 대신에 의미를 창조하라고 노직은 조언한다. 그러나 과연 무언가가 의미를 발산 할 수 있을까? 노직의 대답은 회의적이다.

 

윌리엄 조스케 : 유의미한 질문과 무의미한 삶

 

조스케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다의적이라고 주장한다. 의미란 1) 모든 삶의 의미 2) 인간의 삶의 의미 3) 개인의 삶의 의미일 수 있다. 조스케는 2)만을 다룬다.

 

조스케는 또한 무의미성의 네 가지 요소를 열거한. 가치없음, 요점없음, 하찮음, 부질없음이 그것이다. 1)가치가 없다는 것은 보람이 없다는 뜻이며 2) 요점이 없다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뜻이고 3) 하찮다는 것은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며 4) 부질없다는 것은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유의미하며 또한 위험하다. 생물학, 도덕적 주관주의, 우연적 비합리적 무신론적 형이상학과 결부된 견해들 때문에, 삶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떨쳐내기는 어렵다. 우리는 삶을 소중히 여기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부질없고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삶에 우리가 불만을 품는 것은 정당하다.

 

오스왈드 핸플링 : 해롭지 않은 자기기만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무의미하고 보편적인 대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해롭지 않게 속이면서 삶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역할 놀이를 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무의미한 질문, 또는 말할 수 없는 대답?



 

삶의 문제의 해답은 그 문제의 사라짐에서 보인다. (오랜 의심 끝에 삶의 의미를 명확히 깨달은 사람들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표현 불가능한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신비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불가지론은 허무주의를 암시한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답이 없다는 게 아니라 답은 있고 그 답이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닐까.

 

허무주의 : 삶은 무의미하다.

 

쇼펜하우어 :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사는 동안 당신을 이끌 신뢰할 만한 나침반을 원한다면, 삶을 바라보는 옳은 방법에 관한 모든 의심을 없애고 싶다면, 이 세계를 감옥으로, 일종의 유배지로 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세계가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는 고난의 장소라는 생각은 이웃에 대한 관용, 인내, 존중, 사랑을일깨운다. “모든 사람이 관용, 인내, 존중, 사랑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동료 인간들에게 베풀 의무가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삶은 무의미하다. 삶은 고해다. 아무것도 없는 편이 더 나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함께 고통 받는 동료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존재의 허무에 대하여>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할 때와, 순수하게 지적인 활동에 빠져 있을 때만 빼면 존재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감각적 쾌락도 끊임없는 추구가 그 정체다.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감각적 쾌락은 끝난다. 언급한 두 상황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언제나 존재의 무가치성과 허무성에 압도된다. 이 감각을 일컬어 지루함이라고 한다. ”

 

존재의 유한성, 현재의 덧없음, 삶의 우연성, 과거의 비존재, 욕구의 지속성, 지루함의 경험,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죽음의 불가피성 이 모든 것들에서 삶미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알베르 카뮈 : 허무주의에 맞선 반항

 


운명은 우리의 삶에 목적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반응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운명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주인이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황량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게 느껴진다. 그 바위의 원자 각각, 어둠이 충만한 그 산의 광물 각각이 그 자체로 세계를 이룬다. 높이를 향한 몸부림 그 자체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

 

 

삶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부조리하지만, 우리는 그런 삶에 반항할 수 있고 우리 나름의 행복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사실상 카뮈가 던지는 질문은,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과 (희망을 주는 형이상학적 명제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인하는 것 사이에 세 번째 대안이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유의미 하다는 희망 없이, 그러나 자살을 부르는 절망도 없이 살 수 있을까? 대안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반항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신앙없이, 희망 없이, 의지할 곳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면서 행복할 수 있다.

 

토머스 네이글 : 허무주의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아이러니

 

네이글에 따르면, 우리의 삶을 반성해보면, 삶이 정말로 중요한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하찮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정말로 중요한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만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네이글은 카뮈처럼 부조리에 반항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부조리를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가장 고등하고 흥미로운 특징의 발현이다. 부조리의 인식은 오직 사유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삶은 객관적 의미가 없고,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살면서 반항이나 절망이 아니라 아이러니한 미소로 대응해야 한다. 삶은 사람들이 한때 짐작했던 만큼 중요하고 유의미하지 않지만, 이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 낄낄거리면서.

 

웨스트팔과 체리 : 네이글에 대한 비판

 

눈앞의 일에 몰두할 때, 우리는 영원한 관점이 우리와 무관하여 그 관점을 무시할 수 있다.

 

월터 스테이스 : 허무주의에 만족으로 대응하기

 

진정으로 문명화한다는 것은 이제껏 우리를 지탱해온 이런저런 유치한 꿈들에 의지하지 않아도 똑바로 걷고 명예롭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어쩔 수 없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작은 행운에 감사하며 사는 그 삶은 꽤 만족스러울 수 있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만족하면서 고귀하게 살 수 있다.

 

조엘 파인버그 : 허무주의를 거의 끌어안기

 

 

 

테일러에 따르면, 삶은 무의미하다(부조리).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성취한 뒤에 지루함을 느끼든지 둘 중 하나다. 모든 삶은 부조리하다.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대응은 반란, 반항,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기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 원하는 바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미한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자기 충족을 자신의 부조리를 끊임없이 절실하게 의식하기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네이글이 보기에 부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진지한 관점과 우리를 사소하게 보는 보편적 관점 사이의 불일치에서 유래한다. 생쥐의 삶도 생쥐 자신에게는 부조라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면에서 보면 중요한 듯하지만 외부에서 보면 부조리할 수 있다.

 

자기충족의 모형은 최소 네 개가 있다.

 

1.자신의 희망이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2.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3. 일을 마무리하기

4. 본성에 따라 행동하기, 또는 잠재력을 실현하기.

 

시시포스는 바위굴리기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시시포스는

 

바위 굴리기에 취미가 있었을 수 있다.

특별한 재능이 있었을 수 있다.

바위를 굴리려는 본능이 있었을 수 있따.

바위를 굴리려는 욕구가 있었을 수 있다.

바위를 굴리려는 강박적 충동이 있었을 수 있다.

 

파인버그에 따르면 시시포스의 본성을 어떻게 설정하든 간에, 시시포스는 자신의 삶을 충족시킬수 없다. 왜냐하면 신들은 시시포스의 삶을 확정하고 그에게 재량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주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자기충족적인 동시에 부조리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허무주의적 사태를 아이러니한 미소를 띠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파인버그는 네이글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허무주의를 거의 끌어안는다.

 

 

사이먼 크리츨리 : 허무주의를 긍정하기

 

우리는 무의미성을 겅취로, 과업이나 추구할 목표로....어떤 구원 이야기의 장밋빛 안경도 끼지 않은 평범함이나 일상의 성취로 단언해야 한다. 베케트의 작품은 이 구원 이야기들의 근본적 파괴창조, 평범함의 성취로서의 무의미성을 향한 접근, 구원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한다. 평범함은 가장 비범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허무주의



 

크니츨리가 옹호하는 것은 삶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다. 쿤데라가 보기에 단 한 번 사는 삶은 일종의 가벼움, 하찮음, 또는 중요하지 않음을 속성으로 가진다. 반대로 만일 모든 것이 무한정 반복된다면, 우리의 삶과 선택에 엄청난 무게가 부여될 것이다.

 

가장 무거운 짐은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는 아래로 가라앉고, 짐은 우리를 바닥에 고정한다. 그러나...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땅에 더 접근한다. 더 실재적이고 진실하게 된다. 거꾸로 짐의 절대적 부재는 사람을 공기보다 더 가볍게 만든다. 사람이 높은 곳으로 치솟고, 땅과 자신의 현세적 존재를 떠나고, 반만 실재하게 되는 결과, 사람의 행동이 자유로운 만큼 하찮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

 

무거운 삶은 가식적이며 우리를 짓누른다. 가벼운 삶은 참을 수 없다. 허무주의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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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이것만 읽고 이젠 돈을 벌어야 겠네요. ㅋ 


반 정도 읽었습니단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아무래도 올해 최고의 외국 소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네요.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마르케스가 울고 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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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dgling 2016-08-27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속독과 소화하시는 능력이 부럽습니다. ^^ 양질의 리뷰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8-27 10:43   좋아요 1 | URL
제가 아직 질적으로 떨어져서 양으로 밀어 붙이고 있어요. 제가 감사하죠. 감사합니다 ^^

stella.K 2016-08-27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빌려 읽으시면 매월 이달의 당선금은 어디에 쓰시는지...?ㅋ

시이소오 2016-08-27 11:17   좋아요 3 | URL
ㅋ 아들 책 사요 ㅋ ㅋ

stella.K 2016-08-27 13:09   좋아요 0 | URL
아...!ㅎㅎ

yureka01 2016-08-27 11: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병인가요..책 쌓여 있는 것만 봐도 이상하게 배가 불러 오는 증상 ㄷㄷㄷㄷㄷ

시이소오 2016-08-27 12:19   좋아요 0 | URL
ㅋ ㅋ 동감입니다. 책만 봐도 배불러요 ^^

고양이라디오 2016-08-27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은 지치지도 않으시는군요ㅎ 대단하십니다^^

시이소오 2016-08-27 12:21   좋아요 0 | URL
저는 고양이라디오님리뷰 보면서 깜짝 깜짝 놀랍니다. ` 아니 이분은 뭐하시는분인데 폭풍리뷰를 쓰실까` 하고요. 졌다 싶어요 ^^

yamoo 2016-08-27 18: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깊이에의강요 2016-08-2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님 빌린책 코너(?)ㅋ
만 보면 도서관으로 막~~달려 가고픈 욕구가 스멀스멀^^

시이소오 2016-08-27 12:24   좋아요 0 | URL
책탑 쌓여있는거 보면 왠지 막 읽고싶어지죠?
^^

나비종 2016-08-2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보니까 갑자기 행복해지네요. 천천히 스며드는 아메리카노를 적셔 향긋한 빵 한 조각 베어문 것처럼. .^^*

시이소오 2016-08-27 14:56   좋아요 0 | URL
나비종님이 행복하시다니 저도 행복하네요^^

yamoo 2016-08-2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시끄러운 고독! 조만간 데려오도록 하겠슴돠~~^^

시이소오 2016-08-27 19:24   좋아요 0 | URL
정말 이 책 사던가, 아예 필사늘 하던가 해야겠어요 ^^

블랙겟타 2016-09-0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의 이 글 읽고 당장 구매해서 지금 집에 있어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02 09:10   좋아요 0 | URL
오! 블랙겟타님, 발빠른 구매 ^^
 

왜 없지 않고 있는 걸까? ‘는 왜 태어난 걸까? 내가 있다는 것, 내겐 언제나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다. 나 하나가 있다는 것도 미스터리건만 나 외에 수십억의 타인이 또 있다. 나는 내 의식만을 갖는다. 타인들 역시 각자의 의식을 가질 것이다. 그런 사실들을 떠올릴 때마다 무력감이 밀려온다. 도대체 왜? 삶에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저자에 따르면, 네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허무주의, 회의주의, 초자연주의, 자연주의. 저자는 100여 명의 20세기 사상가들의 삶의 의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담았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이 책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초자연주의 : 종교적 대답들

 

레프 톨스토이 : 의미의 위기와 신앙의 도약


 

톨스토이에 따르면 합리적 과학은 삶의 의미에 대해 답할 수 없다. 종교만이 답을 줄 수 있다. 소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신앙.

 

앤서니 플루 : 톨스토이와 삶의 의미

 

1963년에 발표한 에세이 <톨스토이와 삶의 의미>에서 플루는 톨스토이의 논증을 아래처럼 재구성한다.

 

만일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삶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난다.

따라서 삶은 무의미하다.

만일 삶이 무의미하다면, 충족시켜야 합당한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충족시켜야 합당한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루에 따르면 죽음이라는 사실에서 반드시 삶의 무의미성이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어떤 것이 중요성을 가지려면 영원히 불멸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성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 스웬슨 : 신은 바탕에 깔린 통일성

 

키르케고르 제자.

 

스웬슨에 따르면, 삶에서 의미와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삶을 대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스웨슨은 의미와 행복이 좋은 것들을 획득하는 것에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모든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삶의 근본적 의미, 삶의 존엄과 가치의 원천. 그것이 신이다.

 

루이즈 포즈먼 : 종교가 삶에 의미를 준다.

 

포즈먼은 고전적인 유신론이 참이라는 전제하에 이렇게 주장한다.

 

우주의 기원과 존속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유신론은 우주가 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선이 악을 이길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고 돌본다.”

유신론자는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

정의가 우주를 지배한다.”

모든 개인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은총과 용서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

사후의 삶이 존재한다.”

 

포즈먼 역시 유신론이 참인지 여부를 우리가 모른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유신론은 무신론보다 우월하다. 종교는 삶에 목적을 주고 도덕에 토대를 주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버 : 자아와 궁극적 의미의 추구


 

니버 역시 신앙을 합리화 할 길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적 자아의 궁극적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을 가지는 쪽으로 우리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

 

필립 퀸 : 기독교에 따른 삶의 의미

 

퀸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퀸에 따르면 인생은 다음 조건들을 충족할 때, 완전한 의미를 지닌다.

 

인생은 긍정적이고 본래적인 가치가 있으며 삶의 당사자에게 전반적으로 소중하다.

인생은 하찮지 않고 주관적이고 소중하며 당사자가 이루려 애쓰는 목적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

 

기독교도의 관점에서 세계는 완전한 의미를 지녔다.

 

존 코팅엄 : 초자연적인 의미

 

신이 없다면 객관적 도덕 원리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이 원리들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하다. 더 나아가 신이 없으면 우리는 도덕적 목표를 성취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성취가 없다면 삶은 무의미하다. 마지막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도덕성은 충분히 고취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 신과 불멸이 없다면, 삶은 부조리하다

 

신이 없다면, 삶은 객관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삶이 주관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말함으로써 삶의 유의미성을 가장한다. 신이 없으면, 도덕이 없고 모든 것이 허용 가능하다. 신이 없다면, 정의가 지배하고 악인이 벌을 받고 의인이 상을 받게 도리 불멸의 세계는 없다. 신이 없다면 삶은 목적이 없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삶의 목적을 꾸며낸다.

 

토머스 모리스 : 파스칼과 삶의 의미

 

의미는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는 외적이며 목적을 품은 신과 같은 행위자에 의해 부여되어야 한다.

 

윌리엄 제임스 : 우리가 신앙을 지녔다면 삶은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살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라. 그러면 당신의 믿음이 그 사실을 창조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는 당신이 옳다는 과학적 증명이 불분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신념에 찬 투사들, 혹은 그들을 그때 거기에서 대변할 존재들은 여기에서 계속하기를 거절하는 심약한 이들에게,, 이를테면 헨리4세가 큰 승리를 거둔 후 뒤늦게 나타난 크리용에게 건넨 인사말을 할지도 모른다. ”목매달아 죽게, 용감한 크리용! 우리는 아르크에서 싸웠고, 자네는 거기에 없었네.”

 

삶이 유의미하기 위하여 우리는 낙관적일 필요가 있으며 비가시적인 영적 세계에 대한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

 

휴스턴 스미스 : 일반적인 종교적 관점에서 본 의미.

 

인간의 삶은 신의 무한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유의미하다.

 

존 히크 : 종교와 우주적 낙관론

 

20세기 가장 중요한 종교철학자.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 인생의 의미는 우리가 우주의 본성이 무엇이라고 믿느냐에 달려 있다. 대규모 세계 종교들은 우주의 운행이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좋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우주의 궁극적 원리 혹은 지배자가 우호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전제는 왜 삶의 의미와 무관한가?

 

종교적 주장들은 거짓일 수도 있다. 이것이 문제다. 종교적 믿음은 단지 희망뿐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종교는 해로울 수도 있다. 유엔 발표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국가들이 가장 살기 좋은 국가다. 여러 저자들에 따르면 종교의 진리성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과 아무 상관이 없다. , 어떤 종교가 참이라하더라도, 의미 탐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종교적 주장들은 대개 아래와 같은 논증을 취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삶은 전적으로 유의미하다.

신이 존재한다

따라서 삶은 전적으로 유의미하다.

 

타당한 연역적 논증이지만, 두 전제가 모두 불확실하다. 저자는 보다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닌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종교적 주장들을 배제하고 최소의 전제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삶의 의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불가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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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7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8-27 12:22   좋아요 0 | URL
역시나 핵심을 찌르시네요. 이 책이 도달하는 결론들 중에 하나죠^^

yamoo 2016-08-27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에 <인생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를 서점에서 봤는데, 제임스의 책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보다는 훨씬 별루더라구요~ 제임스의 책은 <심리학 원리>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 짱이거 같습니다. 물론 제임스의 책을 다 읽어본 적도 없고, 읽을 요량도 없지만 말입니다^^

시이소오 2016-08-27 19:23   좋아요 0 | URL
제임스 책은 또 언제 읽을 런지. 산 넘어 산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