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적정기술총서 1
스미소니언연구소 지음, 허성용 외 옮김, 홍성욱 감수 / 에딧더월드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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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기술 입문서 
 
  이 책을 읽기전 먼저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 하는게 좋을듯 싶습니다. '적정기술'의 원조에 관하여 본문을 인용하자면 '인도의 간디'를 생각하면 좋을듯 싶습니다. 간디는 전통적 방식이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누구든지 필요한 만큼을 생산할 경우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영국 직물의 우수성은 단기적으로 좋아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인도에 손해가 미친다는 간디는 간파했습니다.

  이후 '적정기술'은 영국의 슈마허이 기본을 제시하고 정부 차원에서 받아들여집니다. 현재는 정부와 민간기관으로 영역이 확대되어 디자인, 경제, 공학, 공적개발원조 등에서 활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40~50년 정도 연구되었지만 국내에는 2000년 무렵부터 관심을 받고 있으며 외국에 비해 '적정기술'관련 서적과 연구가 부족합니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적정기술'영역에서 디자인이 소수를 위한 이익창출에 기여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깨고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특별히 소외되는 지역민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재 탄생시키고 발전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소외된 자들을 위한 디자이너들의 관심

  현대 생활 영역에서 디자인이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소비를 촉진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예술적 가치와 수준을 더욱 끌어 올립니다. 디자인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저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디자인의 삶의 윤택함을 가장 많이 누리는 이들은 경제적 차상위 계층의 사람들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첨단의 기술과 디자인의 접목된 생활의 편리함은 부자들에게 집중된듯한 착각마저 일으킵니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에 실린 디자이너들은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을 지향합니다. 그들은  모 방속국의 디자이너분들의 기적의 도서관, 행복한 집짓기등에서 활약하던 디자이너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의 영역이 '적정기술'과 결합하여 경제적 빈곤과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적정기술'


  '적정기술'로서의 디자인을 지향할때 목표와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소외된 자들'이라는 제목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들도 있겠지만 책의 내용은 분명한 목적 '그들을 위한 디자인'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생각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대상이 되는 이들을 위한 이해와 소득 창출 그리고 지속성과 의존이 아닌 존엄성을 우선하며 효율성과, 문화적 수용도 그리고 환경적 지속 가능성등 다양한 영역을 고려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큐 드럼 & 항아리 속 항아리 


  거대한 물동이를 머리에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이동성을 용이하게 해주고 그들의 건강을 고려한 큐드럼은 작은 디자인 변화가 미치는 건강과 삶의 편리를 제공합니다. 또한 항아리 속 항아리는 더운 날씨 가운데 보존성이 떨어지는 과일과 야채를 전기시설이 없는 가운데서도 신선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소득증가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디자인은 '적정기술' 가운데서 '경제적 빈곤'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면서 인류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모티프를 실제적으로 실현합니다.



<인체의 불편함을 고려한 큐드럼& 전기부족을 감안한 간이저장기술 개발 항아리속항아리>

  한국 디자인의 길을 묻다. 

  디자인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책 속에 나타난 다양한 사례들은 디자이너들에게 서구식 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하는 디자인을 우회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낮았던 필자 또한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을 보기 까지 많은 시간을  디자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책을 읽고 생각을 해봅니다. 만일 우리의 디자인이 '기술'에 따뜻함을 더하고 생태친화적인 것을 지향하며 본래의 주인들에게 기술을 돌려주는 과정을 거쳐 나간다면 '소수'의 디자인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위대한' 디자인으로 거듭나지 않을까요?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에 관하여 필자는 환경을 위한 인간을 위한 그리고 미래를 위한 디자이너들의 노력의 방향에 긍정적 영향력을 미침으로서 사회의 다양한 공감대가 형성되는데 이바지하는 책으로 가슴에 담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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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타이밍 - 당신을 들어 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준비 과정
오스 힐먼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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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소명' 당신은 현대판 요셉 입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요셉은 극장판 에니메이션이었던 <이집트 왕자>의 다음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인으로서 애굽(오늘날의 이집트)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른 요셉의 삶은 사실 '역경'이 곳곳에 도사린 굴곡많은 삶이었습니다.

  요셉이 겪은 '역경'의 예를 들자면 그는 형제들에게 배신당하여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렸습니다. 노예생활가운데 주인의 아내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일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한 사람의 꿈을 해석하여 주었지만 그는 요셉을 잊음으로 말미암아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형제들과 화해아닌 화해의 관계를 살아야만 했던 인물입니다.

  요셉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요셉이라는 인물의 성경에서의 성공을 통해 승리의 모습을 기억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승리의 삶이란 짙은 어둠 속에 있는 보석일수도 있습니다. 

 
  '역경'은 상처를 입히는 채찍


  '역경'을 겪는 각자의 삶의 정황은 다를것입니다. 그리고 무게 또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필자 또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겪어봤지만 지금 이상의 힘든 것들이 준비되어있음을 두려운 마음가운데 인정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 수록 떨어지는 충격 또한 클 것입니다. '역경'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삶의 정황 가운데 역경은 거침없이 우리를 흔듭니다. 뜨거운 고통과 극심한 고뇌 가운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왜 무엇때문에 이러한 일을 당하는지 알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역경'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며 우리를 좌절과 절망 분노와 시기 질투등의 부정적인 감정아래로 구속 시킵니다.

  '역경' 가운데 얻어지는 상처의 고통은 너무나도 커서 아무런 희망조차도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준비과정으로 주어지는 '역경'


  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역경'을 지나는 동안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신을 부정하거나 신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역경'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역경'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채찍에 의해 입은 상처로 말미암아 우리의 사고와 의지가 '역경'에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역경'의 터널을 지나치면서 '역경'이 하나님의 때를 위한 우리에게 주어진 연단임을 고백합니다. 요셉이 겪은 '역경'가운데서 시험을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는 요셉이 점차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음을 지적합니다. 탁월한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한 '요셉 소명'은 그의 소명에 비례하여 더큰 '역경'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볼 수 있습니다.

  독자인 여러분이 지금 겪는 '역경'의 주어짐은 주님께서 쓰시기 위한 연단의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역경'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소명'을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역경'의 터널을 지나고 온전한 순종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는 이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역경'에서의 선택이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타이밍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그리고 거리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거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다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생각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저자는 너무나도 아픈 '역경'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록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내려놓고 비워진 우리 안에 주님의 성령을 받아들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현재의 길고긴 '역경'의 터널 끝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 가시의 축복


   우리는 어려운 순간에 자신을 점검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을 찾아내어 후회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풍족할때는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어려움 가운데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실패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끄는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의 꿈이 짓밟히고 무너지고 우리의 영혼이 상처입더라도 이를 은혜 가운데 치유해주시는 분이 있기에 우리는 매 순간을 믿음으로 의지하며 신뢰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하는 믿음가운데 소명을 따르는 길을 걷는 형제자매분들께서는 '역경'의 매순간이 언제나 우리의 삶 가운데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삶은 언제나 불행하고 힘든 '역경'의 삶이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면 성경의 욥과 요셉 그리고 다윗의 기사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이 부담되신다면 <하나님의 타이밍>을 읽어보는것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믿고 의지마혀 온전히 회복되는 삶의 기쁨이 책을 읽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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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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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의 단순한 묘사에서 발전하여 인생의 내면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신사실주의로 시작한 '이탈로 칼비노'의 글은 '우리의 선조들'을 통하여 우화적이며 동화적 인 가운데서 현실을 바라보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야기 한다. <<반쪼가리 자작>>은 '이탈로 칼비노'의 글의 변화의 기로에서 쓰여진 3부작 시리즈중 하나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반쪼가리 자작>>속 주인공의 시선으로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가볍게 그렇지만 결코 해답은 쉽게 내놓지 않는 글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조망한다.
<<반쪼가리 자작>>의 추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쟁'이 낳은 '반쪽'
작품속 등장인물의 핵심은 역시 '메다르도 자작'이다. 전쟁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던 그가 종교전쟁
에 참가했다는 점부터 불안하더니 적의 포병 중대 앞에서 아니다 다를까 대포로부터 직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몸이 두 동강 난다. 현실에서라면 즉사 그 자체이겠지만 '이탈로 칼비노'에게 자작의 포격 사건은 또 다른 이야기 전개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의사들은 죽어가는 자작을 살려내고 무려 반쪽이라는 형태로 살려낸뒤 모두 기뻐한다. 순진하고 어린아이 같던 자작은 피와 살육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인간의 이기 가운데서 '반쪽'이라는 형태로 살아난다.
둘째, '선'과 '악'
되살아난 자작이 돌아왔을때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한다. 그는 사악함이라는 명칭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 되어 돌아왔다. 고향 마을에서 자작은 방화, 살인, 사형을 통해 사람들에게 공포를 선사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상황이 될 무렵 '이탈로 칼비노'는 악한 '메드르도 자작'의 나머지 반쪽을 등장 시킨다. '악'과 반대되는 '선'한 '메드르도 자작'의 등장은 이분법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의 형태 가운데서 어느 한쪽도 택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살아가며 괴로워한다. '메다르도 자작'의 '선''악'의 반쪽의 대면은 우리 자신의 내면의 충돌이며 마주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속 캐릭터들과 집단들 또한 이러한 이분법적인 인간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여주며 이들 모두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동화같은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누가 정의의 편이고 누가 악당일까? 선악의 기준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한다면 이 질문들은 대답할 수 없는 내용임을 우리는 알 것이다. 반쪼가리 자작이 결투 후 온전한 모습이 되어 다시 하나가 되어 사람들을 잘 이끌어 나간다는 동화의 해피엔딩을 바라보며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이 모습이야 말로 완전함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듯 싶다. <<반쪼가리 자작>> 속 등장인물들은 환상 가운데 등장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모순적 삶은 우리 인간들의 '인간적인' 부분일 것이다. 분열되어버린 자아를 하나로 맞추려고 노력하며 한쪽만을 택하려는 우리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위트있게 풍자해낸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의 글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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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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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심리를 소재로 한 '페터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분명 흥미있는 글
이라고 생각한다. 문학과 언어를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작가의 사고 구조대로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의 심상을 언어로 바꿔서 전개되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책이 표현하는 바는 알겠으나 내용은 소동스럽다. 이러한
일련의 소동과 사건들 그리고 대화는 책의 표지만큼이나 독특한 불안과 공포에 기인하고 이를 표현한 작가의 솜씨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우리 모두 수긍할 수 밖에 없지 않을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추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패널티 킥'과 '골키퍼'
주인공 '블로흐'는 전직 축구선수이다. 포지션은 다름아닌 최후의 보루라고도 불리우는 골키퍼이다. 누구보다도 담대하며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골키퍼'는 수비수들과 함께하며 게임을 책임지며 승리를 지켜나가는 존재이다. 수비 커뮤니케이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 '골키퍼'가 경기 중 유일하게 홀로 떨어질때가 존재한다. 그 순간은 바로 '페널티킥'의 순간이다.
모두와 함께하는 혹은 다른이들과 함께하는 위치에서 '페널티킥'의 순간 '골키퍼'는 골대 가운데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싸워야 한다. '누구의 도움'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소외된 상태 이 상태의 '골키퍼'는 불안, 흥분, 공포, 절망을 느끼게 된다. 독일인들은 축구를 사랑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축구란 공동체의 힘을 느끼며 폭발 시킬수 있는 소통의 창구이다. 그러한 소통의 창구 안에서도 소외되는 순간이 나타나니 참으로 아이러니칼 하다. '골키퍼'의 불안이 정점에 이르는 휘슬을 부는 순간 골키퍼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반응을 한다. 그 반응의 선택이 올바를 수도 틀릴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골키퍼의 선택은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블로흐'의 불안 또한 '골키퍼'의 불안과도 같다. 그는 휘슬이 울리는것과 같이 자신을 쳐다보는 현장감독의 눈빛을 보고 '지례짐작하여 원래의 포지션으로부터 벗어난다. 벗어남을 시작으로 우리는 작품 내내 그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그 감정은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이다.
둘째, '불안'이라는 '감정'
주인공 '블로흐'의 대표적인 감정은 '불안'이다. 주인공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그리고 주변의 상황은 '불안'을 더욱 고조시키며 그릇된 관계를 만들어 낸다. '지례짐작'을 통해 일을 그만둔 주인공의 모습에서 '불안'에 놓여졌던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불안은 직장을 그만둔 시점이 아닌 그 이전에 이미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듯 싶다. 그 고점에서 그가 '일'을 그만둔것이리라. '일'과 '질서'그리고 '소통'과 '단절'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것이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속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는 '불안'한 감정처럼 돌발적이며 침착하지 못하다. 이는 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생명력에 주인공의 감정을 넣은 작가의 솜씨이자 작품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질서'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일'을 하면서도 '불안'이라는 감정 속에서 돌발적 상황을 맞이하는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골을 먹고 허탈해 하는 것처럼 작품 속 주인공을 보며 허탈해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불안'에 눌리워진 또 다른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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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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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연방 체제가운데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추방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체제의 이면 속에 가려진 어두운면을 실제의 경험에서 담담하게 기술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경험 가운데서 쓰여졌다는 말처럼 사실감이 넘치며 '삶'과 '죽음', '약자'와 '강자', '이념'과 '사상'의 비교와 대립등이 생동감있게 나타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작가자신이기도 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 수감일 중 하루를 이야기 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기에 그 하루가 가지는 특별함은 특별한 날보다 더 생동감있게 다가오며 수용소의 하루 가운데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인간의 권리' 그리고 '악행에 대한 고발'의 소재이기도 하다.
화려하고 웅장하며 강한 권력일 수록 그 뒷면에는 소외받고 학대받는 고통과 고난 속 인간들이 존재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고발하는 수용소의 하루 또한 한때 세계를 양분한 이념과 사상의 주체인 이들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다. 비록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자신은 이 작품으로 인하여 정치적 논란에 휩싸여 국외망명을 하게 되었지만 작품 속 '고발'과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작품성만으로도 노벨 문학상에 올라갈 수 있는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애' 가운데서 등장하는 '삶'
'이반 데니소비치'가 겪는 수용소의 하루를 읽으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정치적인 색을 떠나 '인간애적' 부분이다. 강제노동수용소라는 곳은 정치적인 이유로 배제된 이들이 모여든 곳이다. 그곳에는 다양한 이유로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하지만 이 책이 문학작품으로서 고발의 의미만을 강조할 경우 작품은 체제비판과 이념대립의 도구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 작품속 중요한 또 다른 부분은 '고발'외에도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들의 삶이다. 이들 약자들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슈호프'의 등장은 분명 정치적 고발 요소보다는 '약자'에 대한 '동정'과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둘째, '화려함' 속에 숨겨진 이면에 대한 '고발'
유토피아, 모두가 잘 사는 세상, 평등사회 실천, 행복 추구권 등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며 자주 듣는 구호들이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과거 수십 수백 년전에도 이미 등장한 이야기이다. 종교가 시작되기 이전 부터 이러한 달콤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계급이 실현된 시점부터 이미 이러한 달콤한 용어들은 다수를 지배하는 이들의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효과적이며 달콤한 유혹으로부터 헤어나오질 못하며 자신과 가족 이웃의 행복에 도취되어 왜곡된 현실을 받아들이며 부당한 것에 눈을 감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 이면에는 우리가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다수의 행복과 권력에 위배된다는 즉 체제에 반한다는 미명아래 가해지는 제재를 통하여 이뤄진다. 수용소의 하루에 등장하는 이들 또한 이러한 '인간 사회'의 또다른 이면이며 또 다른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우리가 알면서도 외면한 그곳을 고발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외면하고 눈감고 있는 이들에 대한 그리고 알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경종이다. 비록 작품이 지칭하는 체제속 국가는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지만 우리의 주변에는 또 다른 수용소들이 형태와 모양만 달리하여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을 것이다. 작품 속 키워드로 '고발'을 지칭하는 것은 '고발'을 통하여 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과 역할에 감명 받았기에 글을 써본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수용소의 하루는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하루이다. 그 핍박과 고난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대립과 갈등은 고단한 노동처럼 힘들고 지친 하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나타난 글귀처럼 거의 행복한 하루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였다. 수용소의 하루하루는 항상 반복되며 큰 사건 사고 없이 반복되는 삶이다.
이 삶 속에서 작은 것에 만족하며 희망을 가진 '슈호프'가 풀려난 것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분명 '삶'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며 '보다 좋은 삶'이란 희망을 가지고 감사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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