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트렁크에 짐을 챙겼던 작은 언니는 어제 아침에 일찍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고 연락할 수 있을 때 연락을 하라고 인사를 나눴다. 오후에 도착한 문자는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공항에서 대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다시 연락이 온 건 밤 11시 30분쯤, 홍콩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22시간 이상을 소요해 도착할 계획은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폭염의 날들, 집 안에서도 고생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늦은 오후에는 친구가 안부를 전했다. 카페와 갤러리를 운영하는 친구인데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다. 친구는 여름을 견디는 중이라고 말했다. 잘 견뎌야 하는데 그냥 견딘다고. 그러니 여름을 잘 견디자는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계속 생각했다. 잘 견딘다는 건 무엇일까. 견딘다는 것과 잘 견딘다는 건 감정의 차이일까. 받아들임의 차이일까. 견디는 것만으로도 대견한데 잘 견디라는 건 압박을 가하는 게 아닐까. 견디다, 견디다,를 중얼거리다 말았다.

 

 밤에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옅은 현기증과 함께 지속되는 낮이다. 어린 시절 모깃불을 피우며 별을 보던 날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싱그러웠던 여름밤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모든 것은 괜찮다,로 통한다. 여름의 시간은 낮과 밤의 분명한 경계를 만든다. 밤이 되면 이 문장을 다시 읽고 싶다. 밤에 만나는 문장은 낮에 만나는 문장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낮에는 세상이 너무 훤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밤의 어둠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겸허하고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밤에 나는 더 작은 존재이다. 그래서 더 큰 존재에 포함되는 존재다. 밤에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생각, 생각을 하고, 그리고 글을 쓴다. (김행숙 『사랑하기 좋은 책』의 일부)

 

 여름의 시간이 흐른다.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흘이 지나면 입추인데 여름은 고여있는 것만 같다. 조금씩 흐르는 여름. 어쩔 수 없이 작년의 여름을 떠올린다. 작년에도 더웠고, 작년에도 땀을 많이 흘렸고, 작년에도 무기력했다. 서로를 격려했던 여름이었구나, 서로를 안아주던 여름이었구나, 뜨거운 공기보다 더 뜨거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여름이었구나. 서로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여름이었지만, 말은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있었다. 겨우, 사랑한다는 말만 건넸을 뿐이다. 그 안에 모든 게 담겨있다고 믿으면서.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를 읽는다. 조금씩 읽는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누구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른 채 읽는다. 그저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생각한다. 여름의 시간은 머리부터 천천히 물속으로 스며든다. 여름의 시간은 머리부터 천천히 당신을 생각한다. 여름의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그렇게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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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는 오지 않았다.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화가 났다. 약속을 저버린 애인 같았다. 며칠째 일기예보는 비가 내릴 것처럼 비구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강력한 더위의 힘은 커졌고 나는 점점 말을 잃었다.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 되어 나오는 마음에 화가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한강 소설의 말을 잃은 여자가 어떤 기분일까, 잠시 상상하게 되었다. 할 수 없는 말, 하고 싶은데 하지 않는 말. 말과 말 사이의 거리는 잴 수 없을 만큼 멀다. 꼭 해야 할 말만 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 돌아다니며 일을 벌이고 있다. 말 없는 도시는 고요할까. 말 없는 도시의 풍경은 어떨까.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 그럼 말도 쏟아질 것 같다. 비가 쏟아지면 더러운 말도 비에 씻겨 흘러갈지도 모른다. 비가 쏟아지만 조금 평온해질 것도 같다.

 

 눅눅한 날에 우유에 곡물가루를 타서 마셨다. 꿀을 넣었다. 달콤했지만 우유가 적어서 텁텁했다. 맛없는 감자를 먹었고 상추를 먹었다. 그런데도 졸거나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가운 물에 얼음을 가득 부어 마셨고 냉커피를 마셨다. 땀을 흘렸고 샤워를 했고 오랜만에 드라마를 시청했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는 연인이, 참 예뻤다. 서로에게 기대어 둘이 아닌 하나를 꿈꾸는 연인과 혼자의 사랑을 끝내고 술을 마시는 모습에서 슬픔보다는 다짐이 보였다. 건강한 다짐이라고 할까.

 

 어제 오전에는 선생님의 명예퇴직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선생님께 나는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언제나 선생님으로 존재하실 선생님, 그런 대상이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베트남 하노이에 계신 선생님과 더위를 나누고 중복에 치킨이라도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베트남에 가신 후 두 시간 느린 그곳을 생각한다. 아침에는 그곳의 날씨를 검색했다. 알지 못하며 가본 적 없는 곳의 풍경을 상상하는 일, 낯설지만 즐겁다. 다음 주에는 말라위를 상상할 것이다. 날씨와 음식을 검색하겠지.

 

 내게 중요한 것을 상대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내게만 속한 일이니까. ​상대의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그에게 재촉할 수 없다. 상대에게는 귀찮은 일에 속하니까. 부탁을 했으니 기다려야 하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할 수 없고, 기다림의 끝에 아무런 결과가 없더라고 상대를 탓할 수 없다.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

 

 인터파크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되었다. 비밀번호를 바꿨지만 기분이 나쁘다. 모르는 사이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행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고 나니 산뜻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남았던 적립금으로 우선 책을 구매하고 탈퇴를 할까, 고민 중이다. 비처럼 상쾌한 선물이 될 책들. 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최은미의 『쇼코의 미소』 , 청량한 기운을 안겨줄 것 같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광호의 『사랑의 미래』와 왠지 닮았을 것만 같은 김행숙 시인의 산문 『사랑하기 좋은 책, 최윤필 기자의 『가만한 당신,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누운 배.

 

 

 

 

 

 

 

 

 

 

 

 

 오늘은 비가 올까, 비가 오면 정말 반가울 텐데. 비야, 좀 내려주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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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7-27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산은 비가 엄청 왔답니다
그래도 너무너무 더워요 ㅠㅠㅠ

자목련 2016-07-28 10:39   좋아요 0 | URL
아, 엄청난 비도 더위를 식히기에는 부족했군요.
오늘은 어제보다 시원한 바람이 그곳에 닿기를 바라요^^

서니데이 2016-07-2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도 많이 더운 날이었어요. 그래도 즐겁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6-07-28 10:38   좋아요 0 | URL
어제는 진짜 더운 하루였어요. 비는 병아리 눈물만큼만 내렸어요.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바람이 많아서 시원해요. 서니데이 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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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는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대단한 글쓰기를 하는 줄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인지 써야 할 것들에 대한 부담이 늘어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반갑고 부럽다. 나의 기록을 생각한다.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을 기록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한때는 좋은 글을 쓰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다. 블로그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어떤 날은 답답한 마음이 고스란히 글에 있었고 어떤 날은 커다란 분노가 거기 있었다. 서로 다른 감정이 글에서 자라고 있다니 놀라웠다. 글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라서 말보다 강한 힘을 지니기도 한다. SNS에 올라오는 글도 그렇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 모르겠다. 짧고 간결한 문장에 자신만의 색을 담은 글은 정말 대단한다. 글은 공기와 같아서 함께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다.

 

 좋은 글을 만나는 즐거움은 쓰는 즐거움 이상으로 크다. 그러니 안대회의 『문장의 품격』에서 만난 조선시대 문장가 7인의 문장을 읽는 건 더운 여름의 소나기처럼 반갑다. 잘 알려진 허균,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과 조금은 생소한 이용휴, 이옥의 글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보여준다. 좋은 문장을 친절한 안대회의 해설로 만날 수 있다. 17~19세기 조선시대의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7인 7색의 즐거움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그들의 글이 모두 정치, 문학, 경제를 논하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를 그린 풍경이며 누군가를 향한 애도의 글이며 우정을 전하는 편지글이며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와 같다. 그들에게 글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었고 자신과 시대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신기하게도 시대를 바라보는 문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일은 날이 갈수록 그릇되어가고, 선비의 행실은 날이 갈수록 허위에 젖어들며, 친구들끼리 등을 돌리고 저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배신 행위는 길이 갈라져 분리됨보다 휠씬 심하다.’ (19쪽, 허균) 허균의 문장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를 꿰뚫는 듯하다.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정리하고 쓸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문장의 품격이다.

 

 박지원의 산문은 무척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큰누님을 잃고 쓴 제문에는 그리움이 가득했고 짧은 편지를 소개한 척독집(尺牘集)은 유쾌한 위트가 넘쳤다. 그러나 계속해서 읽고 싶은 문장은 마음을 고요히 가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글이었다. 문 밖의 소리에 대한 비유로 정말 매력적이다. 그런가 하면 책만 보는 바보로 익숙한 이덕무는 책만 읽는 자신의 모습을 쓴 글이 많았다. 반복되는 일상을 다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책과 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우직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짧은 글로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가. 생활문장의 진수라 하겠다.

 

 ‘깊은 솔숲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흥분했을 때이고, (…)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놀랐을 때이고, (…) 거문고가 웅숭깊게 어울려 연주하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듣는 이가 슬플 때이고,(…)’ (112쪽, 박지원)

 

 ‘내가 사는 집은 저잣거리 바로 옆이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이 장을 열어 시끌벅적하다, 해가 들어가면 마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어댄다. 그러나 나만은 책을 읽으며 편안한다.’ (146쪽, 이덕무)

 

 박제가의 문장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이옥의 글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로 쓰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으며 정약용의 친근하고 편안한 글에서 귀양살이의 고단함은 찾을 수 없었다.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고, 물 위에서 잠을 자며, 파도 위의 오리처럼 둥실둥실 떠다닌다. 때때로 짧은 노래 작은 시를 지어, 기구하고도 뇌락(牢落)한 심경을 스스로 펼쳐낸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다.’ (282쪽, 정약용)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자신의 삶을 치밀하고 담백하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능을 떠나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던 7인의 문장은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내면의 목소리를 투명하게 발산할 수 있는 문장을 갖고 싶다. 우선은 쓰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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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이 - 완성된 삶을 위하여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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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게 사는 것과 괜찮게 죽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제대로 살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삶은 어렵고 나이에 맞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쉬운 예로 옷을 하나 구매할 때도 나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옷을 입어도 괜찮을까, 이런 신발을 신어도 괜찮을까. 어른답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가 맞겠다.

 

 지나온 나를 마주하는 순간은 두렵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인데도 과거의 잘못이나 어리석은 행동이 여전히 부끄럽기 때문이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는 모든 게 빨리 지나 과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많았다. 후회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복잡한 생각이 우울로 넘어갈 위기에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로마노 과르디니의 『삶과 나이』를 만났다. ‘삶과 나이’라는 제목을 자꾸만 삶과 나로 읽는다. 책은 인생의 시기별로 나타나는 특징과 가치를 말한다. 태아, 유년기, 청년기, 성년기, 노년기로 구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들려준다. 유년기에 대한 이런 글을 통해 우리는 존재 그 순간부터 독립된 자아를 꿈꾸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의존했던 부모에게서 벗어나 진정한 나와 마주하기를 바랐던 시간은 본능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입장이 바뀌어 부모가 되면 여전히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소유의 개념으로 보니 갈등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성장 과정의 목표는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자아를 정립하고, 자유와 책임을 지는 인격으로 서는 것, 그리하여 세계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세계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아가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로서 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3쪽)

 

 ‘청년은 사실이란 것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한 것. 원칙에서 도출되지 않는 것, 그래서 원칙으로 제압하고 제거할 수도 없는 것. 원칙에 어긋나는데도 버젓이 존재하는 것, 그러기에 고려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고, 오랜 노력을 기울여야만 장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실의 세계인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제 무엇이라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끈기, 참을 줄 아는 힘입니다.’ (70~71쪽)

 

 청년에게 도전과 끈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단연 도전이 압도적일 것이다. 청년의 시간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은 도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의 끝에서 도전과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게 끈기가 아닐까 확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지나온 시절이 아닌 다가온 나이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철학자의 조언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어느 시절의 나를 글로 만나니 엉망으로 살았구나 싶어 지난 나에게 미안하다.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같은 시기를 거쳐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기마다 필수적으로 경험하는 감정과 관계를 어떻게 대처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부모와의 친밀감이 중요한 유년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확립하고 나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청년기, 자신이 한계를 경험하고 권태에 빠지는 성년기와 죽음에 대한 공포로 무기력한 노년기를 통해 하나의 생과 만난다. 부모, 형제, 친척, 그리고 친구의 부재가 늘어난다. 100세 인생이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나 남은 생이 똑같을 수 없기에 이런 글로 마음이 기운다.

 

 ‘하루가 끝났다, 일주일이 끝났다, 한 계절이 끝났다, 한 해가 끝났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의식도 더욱 뚜렷해집니다. 지금 하는 일을 어제도 했었다, 오늘 겪는 일은 일주일 전에도 겪었던 일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사이에 흐르는 시간을 움푹 쪼그라들게 만듭니다. 삶은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갑니다.’ (96~97쪽)

 

 ‘죽음은 의사가 위독하다는 진단을 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됩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삶의 반경이 좁아지고, 타인의 의존 정도가 커지는 것과 같은 쇠락의 과정이 삶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령의 시기에 어떤 가치형상이 있다면, 그것의 핵심은 죽음을 향해 올바르게 나아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5쪽)

 

 같은 세대, 혹은 다른 세대와 점점 이해보다는 오해가 쌓인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절된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후회한다.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와 더불어 타인의 그것을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어느 시기에 속했든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한 이라면 『삶과 나이』란 멘토와 만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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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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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사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누군가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저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정해놓은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명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픔과 상처가 나의 몫이라는 게 때로 가혹하고 부당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면 조금씩 괜찮아지기도 할 것이다. 결코 밝지 않은 한강의 소설엔 그럼 힘이 있다. 이상하게도 맨살로 맞이하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점차 사그라드는 기분이랄까. 한강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평범하다 못해 조용한 사람들이다. 환하게 웃음을 짓거나 크게 소리 내어 웃지 않는다. 행복해서는 안 된다고 학습을 받은 사람들처럼. 

 

 『여수의 사랑』이 그러했고 『내 여자의 열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이 바라는 건 커다란 행복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존재 증명이며, 타인과의 소통일 뿐이다. 아프다고 말했을 때 아프구나, 힘들지? 하고 물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함께 고통을 나누자는 게 아니라 아픔을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남편에게, 연인에게. 화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말이다. 인정받지 못한 삶은 상처로 자신과 상대에게 상처로 이어진다. 상처받은 삶은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고립을 원하기도 한다.

 

 사랑했기에 소유해도 된다고 믿고 자신과 거리를 두는 여자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는「어느 날 그는」의 남자와 완벽한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아기 부처」의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내는 모두 그들만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흔적을 뒤늦게 발견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혹독한 겨울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폭설과 비바람을 견디며 자라는 숲의 솔잎이 항상 초록빛을 띄고 있다는 걸 마주하는 아내가 봄이 온다는 사실에 작게 안도하는 것처럼 우리네 삶도 같을 것이다. 생명력 질긴 식물처럼 살고 싶은 욕망 말이다.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아기 부처」, 125쪽)

 

 누군가는 이미 그 겨울을 지나왔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지금 그 겨울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에게는 그 겨울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는 사실이 있어 다행이다.

 

 이 소설집을 말할 때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내 여자의 열매」와 『흰』을 떠올리게 만드는「아홉 개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온몸에 푸른 멍이 번지기 시작하여 점점 초록의 식물로 변해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은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무엇이 아내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아내가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 화를 내고 질책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남편과 가족처럼 영혜를 탓하고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계절이 바뀌면서 열매를 맺고 사라져가는 아내가 다시 봄이 되면 꽃을 피우기를 소망한다.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아내의 꽃이 붉게 피어날까. 나는 그것을 잘 알 수 없었다.’ (「내 여자의 열매」, 242쪽)

 

 하나인 듯 하나가 아닌 듯한 「아홉 개의 이야기」는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순진하고 순수한 첫사랑의 떨림, 나직이 나를 부르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라고 하면 좋을까. 그것은 한강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기 봄이 오고 있다고, 봄에 함께 기뻐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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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7-21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자목련님은 희망적으로 읽으셨네요 . 저는 남편의 이기로 읽었는데 ..나는 꼼짝 앉고 있을거니까.. 당신이
다 알아서 해 ..하는 무심함 ... 새싹이 날까..알수없었다.
하는부분...나길 바라는 맘이 아니어서 ...이 남자 끝까지
이기적이야..그랬어요 .^^;

아무튼 여지가 많아 좋아요 . 이런 저런 생각거리가 많아서~^^

자목련 2016-07-25 10:29   좋아요 1 | URL
식물이 되기를 원한 아내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바랐어요.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다시 읽으니 새롭게 보여요, 이래서 재독을 하고 삼독을 해야 하는 건가 봐요, ㅎ

[그장소] 2016-07-25 12:08   좋아요 0 | URL
다시 읽어도 재미있는건 재미있어서 좋은것 같아요 . ^^

자목련 2016-07-26 17:49   좋아요 0 | URL
기억하는 문장이 맞는지 확인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라면 작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은 착각도 할 수 있구요, ㅎ

[그장소] 2016-07-26 17:50   좋아요 0 | URL
그 착각도 즐겁게 즐기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