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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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경험에 의한 이야기가 아닐까 궁금할 때가 있다. 소설이라는 것이 허구의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현실처럼 너무 완벽할 때, 경험치가 없다면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장면을 마주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작가나 지인의 경험이 소설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소설이란 게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낯선 세계를 그리는 건 아니니까. 요즘엔 SF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래서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다.

 

한 권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저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설을 읽는 일은 세상을 읽는 일이 되었고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사유가 그곳에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독자는 소설을 통해 세상과 접속하고 소통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를 생각할 때 고 박완서 작가는 소설은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나는 작가의 소설을 전부 읽지는 못했다. 겨우 몇 권 읽었고 곁에 두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시대의 풍경과 그것을 살아내는 이들의 마음을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만나지 못한 글들을『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로 만난다. 자신이 쓴 소설과 산문, 동화, 여행기를 소개하는 글이다. 때로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글을 쓸 때의 상황과 출판 당시의 복잡한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제목만으로도 소설과 산문집은 익숙한데 동화집은 잘 몰랐다. 67편의 작가의 말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이 책을 통해서야 이렇게 많은 글을 쓰고 책으로 냈다는 걸 알았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의 글을 읽고 기다리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작가의 말은 뭔가 사적인 영역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한 권의 소설을 압축하여 들려줄 때도 있고 개인적인 일상을 소개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은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기분을 안겨준다. 정확하게 그 형체를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등단을 하고 책을 내는 일이 작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꾸준하게 글을 쓰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글이 도무지 안 써지고 절망스러운 때에 『나목』을 펴보는 버릇이 있다는 작가의 말은 첫 소설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함께 어떤 고단함이 전해졌다. 그런가 하면 이런 글은 지금 문학에 속한 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고 또 써야 하는 작가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듯하다. 어디 문학뿐일까. 누구나 살면서 절망하고 한계를 느끼는 순간에도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글로 다가온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억누르는 온갖 드러난 힘과 드러나지 않은 음모와의 싸움은 문학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싸움을 걸 상대의 힘이 터무니없이 커졌을 때라든가 종잡을 수없이 간교해졌을 때도 그런 싸움을 중단하거나 후퇴시켰던 적은 없고, 그럼으로써 문학한다는 게 본인이게만 보이는 훈장처럼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지 않나 싶다. 52쪽, 『살아 있는 날의 시작』발문에서

전쟁이라는 시대의 수난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일상을 담담하게 전하는 작가의 산문을 읽으면서 편안하고 포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흙을 만지고 손자의 밥을 챙기고 계절의 기록하는 일상들. 선명하지 기억을 소설로 복원해 꼭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소망, 그런 작고 소소한 모든 것들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어쩌면 독자가 원하는 건 문학평론가의 어려운 해설이 아닌 허심탄회하게 내뱉는 그런 말들이 아닐까 싶다. 출판사를 바꾸어 낸 소설과 개정 보정판을 내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지난 시절을 가만히 떠올렸을 그를 상상해본다.

 

한때는 글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처럼 치열하게 산 적도 있었나 본데 이제 와 생각하니 겨우 문틈으로 엿본 한정된 세상을 증언했을 뿐이라는 걸 알겠다. 138쪽, 『그 여자네 집』서문에서

한 권의 책을 시작할 때 만나는 작가의 말은 책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고 마지막에 만나는 그것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한 평생 쓴 책들의 시작과 끝을 모아 이렇게 책을 낼 수 있다는 기쁨을 독자인 우리만 누려서 안타깝다. 고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표지를 정리해 한눈에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안겨주는 책이다. 자신의 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작가의 말이라고 한다면 정성을 들이지 않은 책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래도 67편의 말 중에서 지금 소개하고 싶은 걸 하나만 꼽자면 『살아 있는 날의 소망』의 서문이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사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같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89쪽, 『살아 있는 날의 소망』책머리에서

 

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도 같다고 생각한다. 문학으로 이어진 우리가 공감하고 연대하는 순간 세상은 좀 더 선한 쪽으로 흘러가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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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2-05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 앞과 뒤에 담긴 글만 모아서 책 한권을 만들다니, 그것도 괜찮네요 저는 동화 예전에 만났어요 보기는 했지만 다 잊어버렸군요 예전에 전쟁이 배경인 소설을 보면서 한 사람 이름이 자꾸 나오는구나 하면서 본 게 생각나네요 이제는 그런 게 연작소설이라는 걸 알고, 박완서 님 경험이 담겼다는 걸 아는군요 그때는 거의 몰랐습니다 소설에 자기 경험을 많이 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다 해도 그걸 보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는군요


희선

자목련 2020-02-06 09:40   좋아요 1 | URL
희선 님은 동화를 만나셨군요. 저는 소설과 산문만 만나서 동화를 많이 쓰신 줄 몰랐어요. 말씀처럼 작가의 말로만 엮인 구성도 흥미로웠어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난한 일상입니다. 희선 님, 건강 잘 챙기세요^^
 
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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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로로 작가 장혜령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녀의 글을 읽었고 종종 장혜령 시인을 검색해보았다. 시인의 첫 시집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마주한 그녀의 글은 시가 아닌 산문이었다. 그것도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 내 안에 간직된 사랑의 이미지는 너무도 흐릿하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내가 원하는 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삶이며 글이었고 고독이었으며 열망이었다.


그저 쓰고 고친 것들, 사랑에 대해 쓰기 시작했지만 막상 마침표를 찍고 읽었을 때에는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것들은 아닐까, 내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모든 글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향한 기억과 몸짓이라 해도 맞았고, 기억해야 하는 순간을 기록함으로 간직하는 당연한 수순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안에 서린 어둡고 추운 절망의 기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쓰고자 했으나 쓸 수 없고 쓰고 있지만 만족하지 않았고 자꾸만 길을 잃은 것 같은 두려움이 전해졌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쓰는 걸 멈추지 않았고 보통의 날에 마주한 이들의 사랑을 포착했다. 그 사랑의 아픔을 목격하고 때로 미래를 예측한다. 때로는 사랑이 온 줄도 모르고 떠난 뒤에야 발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글은 사랑을 꺼내기에 충분하다. 사랑으로 인해 눈부셨던 과거의 순간, 사랑이 전해준 고통과 상실에 대해 아파했던 밤들이 펼쳐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 다른 선택과 결정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한 상상하기 하고 만다. 처음 사랑이라고 맹신했던 나의 몸짓이 선명한 사진처럼 내게 달려든다. 그러니 이런 문장을 만났을 때 반갑고 신기하면서도 씁쓸했다. 아무렇지 않는 문자 하나에 설레던 일, 문자 하나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던 시절이 떠올랐기에. 아직 폐기하지 못한 연인의 편지를 읽는 것만 같았다.

안부를 묻는 일.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 똑똑, 문을 두드리고 세계로의 진입을 간청하는 일. (62쪽)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다. 무수한 사랑과 이별 끝에도 자기 내면에 결코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67쪽)

시나 소설과는 다르게 산문에서는 작가의 숨결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나만의 언어로 전하고 싶은 욕망, 세상과 닿고 싶은 간절함이 보인다고 할까.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는 걸 안다.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글로 쓴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불투명한 희망을 보고 글을 쓴다는 건 고통이다. 아니다, 쓴다는 게 희망일 수도 있다. 그녀가 오랜 시간 쓴 글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사랑이 아니라 그녀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그녀가 쓴 글을 통해 우리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가 본 영화와 그림을 상상하고 그녀가 찍은 사진을 통해 그녀의 일부를 인식한다. 그리고 기억 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만난다.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삶을 생각한다. 같은 방에서 잠이 들고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지금 서로를 기억할까.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던 시절, 고요만이 나를 어루만지던 시절과 포옹한다. 이제는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는 말을 들려준다. 

 

낯선 사람과 한방을 쓰고, 또 다른 방으로 옮겨가며 이 삶을 어디까지 전진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았던 방들을 연결하면 그건 얼마나 긴 길이일까. (81쪽)

사각의 방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웅크려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오후 두시의 햇빛이 얼굴에 쏟아질 때까지 엎드려 잠을 잔 적이 있다. 빛 외에는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시간에 따라 기울어지고 방을 가득 채웠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25쪽)

그런 시절을 통과했고 여러 사랑을 지나왔다. 사랑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다른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어쩌면 이런 글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저마다의 사랑이 품었던 빛과 향기를 우리는 잊고 살아왔다고.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고 말하지만 사랑은 여전히 어렵다. 안다고 믿었지만 점점 더 멀어지는 심연처럼,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당신의 표정처럼. 온통 사랑을 쓰고 말하고 외치고 쏟아내는 세상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은 더욱 고단한 일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인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이 있으며, 당신이 있으며, 운명이 있다. 그러므로 비밀로 남겨둬야 하는 것이 있다. 다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어쩌면 씁쓸하겠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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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에드워드 캐리 지음, 공경희 옮김 / 아케이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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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저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돌이켜보면 누군가 곁에 있었기에 살아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 미움의 상대였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마리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마리는 알자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리는 보통의 아이와 달랐다. 아주 작은 아이였다. 책 제목인 little과 표지처럼 말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곧 죽었고 어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는 집에서 마리 옆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여섯 살 소녀는 그렇게 고아가 되었다. 그러니 집 주인인 ‘닥터 쿠르티우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쿠르티우스는 의사였지만 사람을 진료하는 대신 모든 인체 기관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해부 모형 제작자였고 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몸을 일부를 밀랍으로 만들었다. 마리는 이제 그를 도와 밀랍을 만드는 제자가 되었다. 쿠르티우스는 마리를 밀랍으로 만들었다. 마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시작한 것이다. 마리의 두상을 보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두상을 만들기를 원했다.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쿠르티우스의 소문은 파리까지 퍼져 당시의 유명 인사가 그를 찾아오고 파리에서 활동하기를 권유한다. 쿠르티우스와 마리는 파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들이 살게 된 집에는 재봉사 남편을 잃은 과부와 아들 에드몽의 살고 있었다. 과부는 대놓고 마리를 무시했고 쿠르티우스는 그런 과부에게 빠져들었다. 과부는 쿠르티우스가 만든 밀랍을 보고 사업을 구상한다. ‘닥터 쿠르티우스의 캐비닛’이란 이름은 금세 유명해졌다. 유명 인사의 밀랍을 만들고 관람료를 받는 것이다. 쿠르티우스를 도와 모든 일을 하는 마리를 그들은 하녀로 삼았다. 마리는 주인까지 자신을 저버려 속상했지만 그 모든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을 안전한 내면 깊숙한 곳에 넣었지만, 겉으로는 자동인형처럼 되었다. 그들의 지시가 내 태엽을 감으면, 나는 기계적이지만 완벽하게 지시에 따랐다. 살 기회를 얻으려고 입을 다물고 하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그들이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나 자신을 불러내서 다시 마리답게 되었다. 여전히 마리였다. (160쪽)

돈과 명예가 있는 이들은 자신의 밀랍을 만들었고 과부의 사업은 번창했고 쿠르티우스는 살아있는 이들이 아닌 죽은 자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만든 데스마스크에 파리의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그러는 사이 마리는 에드몽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과부는 부와 권력을 얻는 방법으로 아들의 결혼을 이용했다. 마리와 에드몽 모두에게 슬픔이었다. 이쯤에서 프랑스 파리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바야흐로 루이 16세의 시대였다. 파리의 모든 이들이 쿠르티우스를 알았으니 당연 궁정에서도 그를 찾아왔으니 바로 루이 16세의 누이 열네 살 엘리자베트 공주였다. 키가 148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그녀는 열일곱 살 마리와 똑같았고 밀랍에 관심을 보였다. 마리는 공주의 조각 교사로 궁에 들어가게 되었고 스승과 과부는 마리에게 왕과 왕비의 밀랍을 원했다.

 

​서로를 알아본 공주와 마리는 한 몸처럼 지냈지만 그녀의 숙소는 찬장 선반이었다. 공주를 제외한 사람들은 여전히 마리를 하녀로 대했다. 그래도 궁전을 구경할 수 있었고 자물쇠공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이자 루이 16세였다. 운 좋게 마리는 왕의 실물을 본뜬 모형을 만들었고 왕실 가족 모두를 스케치할 수 있었다. 그랬다. 그것으로 인해 궁정에서 쫓겨나고 과부와 스승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건 마리뿐이 아니었다. 불행한 결혼의 결과로 에드몽은 다락방에서 홀로 지냈다.

그 시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고 파리에는 피바람이 분다. 불안과 공포가 도시를 감싸는 와중에도 마리와 에드몽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왕족의 두상이 발견되고 마리와 스승과 과부는 감옥으로 끌려간다. 아이를 가진 마리는 죽음을 면했지만 과부는 처형 당했다. 에드몽의 죽음과 사산된 아이, 마리에게는 가혹한 운명이었다. 스승과 재기를 꿈꿨지만 그 역시 빚을 유산하고 떠났다. 혼자 남은 마리는 버틸 수가 없어 결혼을 선택했지만 허황된 꿈만 꾸고 돈만 요구하는 남편과의 시간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오직 두 아들만이 희망이었다. 하지만 삶이란 반전이 있기에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옥에서 만난 로즈라는 여인으로 인해 알게 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의 밀랍상을 확보한 후 남편과 이혼했고 마리는 런던으로 향했다. 아들 하나를 프랑스에 두고 떠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런던에서 마리는 자신의 재능을 펼쳤고 성공했다. 모두에게 ‘리틀’이라 불리는 마리는 프랑스 역사의 한 장면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기록한 사람이었다.

​소설은 1761년에 태어난 마리가 1850년 죽음을 맞기까지의 인생을 들려준다. 고아이자 하녀였던 그녀가 겪은 프랑스 혁명처럼 그녀의 인생 자체도 혁명과 같았다.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주인을 따랐고 그에게 배운 재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타인의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 인형들만 나를 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상태, 그것을 밀랍상이라고 부른다. (623쪽)

​한 사람의 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 수 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이 곳 역사라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리틀』은 역사소설이자 밀랍 박물관의 창시자인 마담 투소를 그린 전기소설(傳記小說)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를 쓰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소설을 통해 모두의 삶이 귀하고 특별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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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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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서로의 일상을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상대를 우리는 친구라고 한다. 그런 친구와 갑자기 서먹해진다면 상처를 받았다고 여긴다. 친구의 사정도 모르면서 친구라는 관계에 그 모든 걸 넣어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건 나만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친구니까 그래도 된다고 정당화한다. 나에게 좋은 친구는 어떤 친구일까. 무조건 지지를 건네는 그런 사람일까. 그럼 나는 어떤 친구일까. 상대에게 좋은 친구인 건 맞는 걸까. 윤이형의 『붕대 감기』는 내게 자꾸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친구입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말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일 것 같지만 실상 나에 대해 아는 건 친구일 때가 있다. 내가 무얼 좋아했는지 어떤 삶을 꿈꾸는지 나의 말을 들어주고 지켜봐 줬으므로.

 

모든 관계에는 처음이 있다. 처음부터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누군가 먼저 다가가고 누군가 먼저 기다리는 일이 필요하다. 관계의 깊이가 누적된 시간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둘 사이를 오가는 시간과 말들,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견디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다. 소설에서 진경과 세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진경과 세연은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닿았다. 다시 만난 설렘과 기대로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고 공유하고 의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둘의 표현 방식은 다르다. 7살 딸을 둔 워킹맘 진경과 프리랜서인 세연의 삶이 다르듯 말이다.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온라인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었지만 자신의 글에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는 세연에게 진경은 서운함을 느낀다.

 

어쩌면 둘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진경의 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갔고 그런 삶의 고단함을 세연과 나누면서 공감하고 싶었다. 여성의 우정에 대해 취재를 하고 글을 쓰는 세연에게 진경이 속한 결혼과 육아의 세상은 경험할 수 없기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곳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는 생각의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나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154쪽)

 

마음의 형태가 다르다고 해서 그 본질까지 다르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진경과 세연 둘 만을 놓고 보면 진경은 개인과 일상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연은 그들이 속한 사회와 세상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인생에 있어 다른 선택을 했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니까. 그렇다고 둘 사이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접하는 세상, 그들이 맺은 복잡하고 유기적인 관계에서 따로 떼어낼 수 있을까. 세연이 글을 쓰기 위해 만난 10대와 20대의 여성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같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같은 시대를 살고 세상에 속해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당당하면서도 거침없는 10대, 20대가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조금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40대, 50대는 공감할 수 있고,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의 우정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저마다의 고민으로 힘들어가고 지향하는 삶의 가치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에게 긴밀하게 연결되기를 원한다.

 

고교시절 교련 시간에 붕대 감기를 잘 몰라서 진경의 머리에 한 번 더 감아버린 세연처럼 우리는 실수한다. 피부 문제로 인해 화장을 고집했던 세연을 문제아로 여기고 따돌린 무리 속에 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실수를 번복하지 말아야 한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니 나와 다른 모두를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때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마음 때문에 아프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힘들다.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에 우리는 그 마음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 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는 작가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더 알고 싶은 마음, 더 닿고 싶은 마음의 주인들과 오래오래 사랑하며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바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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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넘어진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덤벙거려서 그렇기도 하고 건강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넘어졌다고 해서 모든 게 나쁜 건 아니다. 넘어졌던 기억이 있기에 조심해서 걷고 넘어졌을 때 기분을 알기에 누군가 넘어졌을 때 더욱 신중하게 살필 수 있다. 경험으로 비추어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의 상황에 대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지혜는 자연히 따라오는 거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깊은 사유와 성찰 그리고 감사가 필요한 일이었다.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읽고 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정갈하면서도 담백한 글로 일상을 기록하는 힘, 그건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니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고 해서 쉽고 편안하게 쓴 글은 없을 것이다.

 

쓰기는 파편투성이 뒷방을 하나하나 구석구석 치워가는 일이다. 눌려서 올라오지 않는 건반에 남아 있는 손가락 끝의 정한을 더듬는 일이다. 쓰기는 내 안의 내 밖의 잡초 무성한 꽃무덤을 도굴하는 일이다. (78쪽)

배혜경의 『화花영影시時경景』에서는 그런 글의 민낯을 볼 수 있다. 하나의 풍경, 하나의 기억을 꺼내 단정하게 정리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할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면면이 특별하고 신비롭게 다가온다. 거기다 글과 어울리는 사진까지 마주할 수 있어서 어느 순간에는 그 사진에 가만히 집중하는 나를 발견한다. 저자와 그의 일상 언저리의 풍경은 마음은 평온하게 한다. 어떤 사진은 속상하고 복잡한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라고 말하는 듯하다. 꽃과 나무 바람, 그리고 작은 고양이들이 그랬다.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생각을 담은 사진일까. 내가 그 순간에 그 풍경(사물)을 보았더라면 나는 무슨 생각을 곁들이고 싶었을까.

 

단순함이 가장 좋은 거라고 여기면서도 단순하게 만들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어떤 과정을 통과해야만 단순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하려는 듯. 그리하여 모든 일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진정한 단순함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한 사람에 대해 알면 알수록 견뎌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오히려 그에 대해 더욱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이런 문장을 유독 더 집중하게 된다.

 

나만 그럴까. 모두 고양인인걸. 누구나 고양이와 사는 것처럼 외롭지만 자주 가슴 벅차고 누군가 고양이인 것처럼 겁나지 않은 척 용감하게 살아내고 있는걸. (99쪽)

우리 안에는 모두 자신만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구나 싶었다. 때로 감정을 숨기고 거짓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슬그머니 옆을 지키는 고양이. 친한다는 이유로 쉽게 무례를 범하면서도 상대가 그렇게 다가오면 불쾌감을 감출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두렵다. 나를 표현하는 것들에 대해 신중하고 조심성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표정과 행동이든 말이다.

가깝다는 이유로 삼가지 않고 자신 있는 일이라 하여 가볍게 덤벼들진 않았는지 돌아본다. 사람을 대할 때뿐만 아니라 생을 대하는 순간마다 몸을 낮추어 조심스레 대하는 자세를 잊지 않아야겠다. (164쪽)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저자에게는 특별한 이력이 있다. 그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도서 제작을 위한 낭독봉사이다. 나눔과 봉사는 진정한 실천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책에는 낭독 녹음에 관련된 글도 만날 수 있다. 다른 이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책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전달과 함께 그 안에 담긴 감정들도 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책을 고르고 낭독을 위해 연습했을 수많은 시간의 수고를 상상하면 그저 놀랍고 감탄할 뿐이다. 13편의 책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익숙한 제목의 소설과 함께 나를 붙든 건 이홍섭 시인의 『터미널』에 대한 부분이었다. 시집 한 권을 녹음하는 일은 3시간 정도 한 호흡으로 작업해야 한다고 한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든 연속성을 지닐 때, 지난다고 생각될 때 애초 우주의 영원한 미아로 낙하한 인간은 마음이 놓인다. 친밀감의 비밀은 연결성 있다. 떨어져 있지만 항상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외로움을 천형으로 안고 사는 인간에게 무한한 위로가 된다. (218쪽)

어딘가 잠시 머물렀다 떠날 수 있는 공간, 터미널을 생각하니 시장이 떠올랐다. 생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떠나고 돌아오기 위해 분주한 터미널처럼 사람들의 생기가 가득한 그곳. 울적할 때마다 시장 골목을 서성이던 시절도 겹쳐진다. 한 장의 사진과 한 줄의 문장이 나를 먼 곳으로 데리고 간다. 책이 이끄는 방향의 끝에는 언제나 삶이 있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괜찮다. 어느 곳에서는 나와 닮은 삶이 있고 어느 곳에서는 내가 알 수 없는 삶이 있다. 하루하루 지나온 풍경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풍경을 기대하는 우리의 삶.

‘꽃그림자 드리운 시간풍경’이란 뜻의 제목처럼 어디든 생이 존재하는 곳에는 저마다의 꽃이 필 것이다. 우리의 삶이 꽃을 피워내기까지의 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터. 누군가는 그 시간을 견디고 누군가는 막연히 기다리고 누군가는 지켜볼 것이다. 우리 삶의 꽃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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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4 1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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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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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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