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창문 - 2019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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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혼자서 척척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삶 말이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었다고 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적지 않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 빚진 삶이라고 할까. 언젠가 그 빚을 갚아야지 생각하면서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살면서 나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붙잡혀 살고 있다면 어떨까?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수상작인 편혜영의 「호텔 창문」속 화자는 그런 시달림에 힘들다. 그건 죄의식이었다. 여름 날 강물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사촌 형에 대한 마음이었다. 자신을 구하고 죽은 사촌 형은 의사자 지정을 받았다. 희생정신이 있거나 모범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음은 그런 결과를 만들었다. 살아남은 게 죄일까. 사촌 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과연 나에게 있는 것일까. 사고였고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수습이나 대책이 아니라 화와 분노를 쏟아낼 단 한 사람. 소설 속 화자에게 그 사건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된다. 그 사건을 아는 이들이 화자를 대하는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오롯이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소설은 묻고 있다.

 

자라면서 운오는 누구 덕에 살아났는지 자주 상기했다. 큰어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들뜨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오래전에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만 누리는 이런 무덤덤함을 큰어머니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28~29쪽)

수상작인 「호텔 창문」외에 6편은 일상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특히 기억에 남는 단편은 이주란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과 최은미의 「보내는 이」와 동성 연인과 자신과의 사이를 돌아보는 김혜진의 「자정 무렵」이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김금희의 「기괴의 탄생」, 폭력과 폭행에서 안전할 수 없는 여성의 미래를 그린 조남주의 「여자아이는 자라서」, 김사과가 만든 인물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날 수 있었던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도 흥미로웠다. 이주란의 단편집에서 만났지만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두 번 읽어도 좋았다. 하루의 일과를 담담하게 이어가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발견하는 사소한 것들이 주는 기쁨을 위대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김혜진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롭다.

아이들로 인해 친해진 엄마들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최은미의 「보내는 이」는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거의 매일같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며 모든 걸 공유한다고 여겼는데 상대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막역한 사이라 믿었는데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 결국엔 아무런 인사 없이 이사를 가버린다면 서운한 마음보다 그동안에 보냈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고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스스로를 자책할지도 모른다.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의 속성일까.

 

인생엔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이 생긴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때로 우리는 소설을 통해 그런 상황을 점검하고 대비한다. 감정을 다스리는 노력을 하고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연습하고 짐작으로 결과를 예측하지 말라는 조언 같다고나 할까. 여전히 삶은 어렵고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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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시각이 점점 늦어진다. 저녁은 천천히 찾아온다. 이렇게 계절이 흐르는구나 생각한다. 아파트 화단에 매화의 꽃봉오리가 보였다. 매화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뭔가 계속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활짝 터질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절기나 계절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봄이니까 꽃이 피고 겨울이니까 눈이 오는 게 당연했다. 뚜렷했던 계절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몇 해 뒤에는 하나의 계절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가 느끼는 계절의 냄새가 새삼 달콤하다. 고유한 빛과 냄새, 자연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봄의 연못 물은 끊임없이 뒤척이는 푸른 양모 같다. 그 무겁고 차가운 물이 연못의 검은 바닥으로 내려가고, 그 무게에 밀린 바닥의 물이 흔들리며 위로 올라와 연못 분지를 야생의 영양으로 채운다. 그건 연례행사로 한 해의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늦은 봄이 되면 초록 풀과 갈대들이 올라오고, 수련의 첫 잎들도 보인다. 바람은 잠잠해진다. (83쪽)

메리 올리버의 글은 내게 이런 것들을 찾게 만든다. 어둠이 걷히는 새벽의 순간, 풍성한 연두의 풀들이 선사하는 싱그러움, 하루하루 커지는 잎맥을 지켜보고, 어린 새들의 날갯짓을 관찰하고 응원하는 일상을 기록하는 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 안에서 우리는 시인의 거칠고도 부드러운 숨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시인이라는 창조, 창작자보다는 한적한 시골에 사는 자연친화적 생활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산문에서 시나 시론, 혹은 창작의 과정보다는 짧은 메모나 죽은 나방의 날개를 묘사한 글이나 바닷가에서 마주한 생선뼈나 연못에서 겨울을 보내는 오리들의 글에 더 매력을 느낀다. 아마도 시골에서 나고 자랐고 근처에 바다를 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커지기 마련이다. 흙을 만지고 마당에 내린 눈을 치우며 투정을 부리던 순간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으므로.

사실, 그녀의 시나 시론은 보통의 독자인 내게 어렵다. 문학소녀였던 메리 올리버에게 월트 휘트먼이 얼마나 절친한 친구였는지 그녀가 소개한 글이나 시로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시인에게 영감을 주고 감동을 준 이가 시인이었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그들이 서로에게 연결된 운명이었구나 싶다. 시의 세계로 인도한 월트 휘트먼에 대해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음 발견한, 그러니까 나 혼자 종이에서 발견하고 놀라움과 기쁨에 차서 읽었던 시들은 휘트먼의 것이었다. 나는 그에 늘 깊이 감사하며 살 것이다. 거기엔 풍성하고 엄선된 언어가, 엄청난 에너지가, 리듬이, 천 가지 방향의 완전한 몰입이 있었다. (126쪽)

 

‘내게 일이라 함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라고 서문에서 시인이 말했듯 시인은 항상 쓴다. 그게 무엇이든 쓰고 또 쓴다. 시인에게 시는 삶의 전부이고 시를 향해 나가는 과정은 삶의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30년 넘게 뒷주머니에 작은 공책을 넣고 다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항상 수첩에 기록한다는 김연수의 말이 겹쳐진다. 공책에 직접 시를 쓰는 건 아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시가 된다. 생각나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메모를 한다. 그 작은 공책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이다. 완성된 글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마구 쓰는 일. 그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 시인의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에게는 작은 공책이 있듯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공책이 있다. 누군가는 노트북, 누군가는 스마트폰, 누군가는 한글 파일이 그럴 것이다. 책에서 발견한 구절을 옮기거나 그 문장의 단어를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 연습하는 것처럼. 메리 올리버의 이런 ‘버지니아 울프가 쓴 많은 글은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에 쓴 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였기 때문에 쓴 것이었다.’부분에서 버지니아 울프 대신 나의 이름으로 옮겨 읽는 일도 그렇다. 규칙적으로 쓰고 고치고 노력하고 실천했기에 시가 우리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삶을 사랑하고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일, 그 안에서 그녀는 정말 완벽했고 행복했을 것 같다. 그녀의 바람처럼 나의 생도 그렇게 채워질 수 있을까.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나의 삶을 완성하면서 말이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내가 만들었다. 그걸 가지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내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언젠가 비통한 마음 없이 그걸 야생의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에 돌려주는 것. (53쪽)

 

이상하게도 나는 메리 올리버의 산문을 읽을 때면 새벽의 기운을 느낀다. 뭐랄까.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선명해지는 순간과 닮았다고 할까. 깊은 잠에 빠져 나는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는 감각들을 모은 것 같다. 천천히 서늘하고 투명한 공기가 사라지고 전해지는 여명의 분위기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튼 그렇다. 메리 올리버의 산문 가운데 나는 『완벽한 날들』을 가장 좋아한다. 딱히 이유는 없다. 그냥 좋을 뿐이다. 좋은 걸 설명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계절과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글을 만나는 기쁨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벚꽃이 흐드러지는 환한 봄이 오면 그녀의 문장들이 다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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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2-1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글을 읽으면 새벽의 기운을 느낀다는 글귀에 동감동감 그러네요. 표지도 미명의 그 시간 아주 천천히 깨어나는 하늘을 보여주는 거 같지요. 이른 봄밤이 아직은 추워요. 건강히 지내세요 ^^

자목련 2020-02-20 15:11   좋아요 0 | URL
전체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쨍‘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아무튼 묘해요. 엊그제까지 많이 추웠는데 우수 지나니 봄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어제, 예배를 드리러 나가는 아침에는 눈이 그치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은 차가웠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시려웠다. 소파에 가지런히 놓고 온 장갑 생각이 간절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더 많이 추웠다. 그래도 눈이 더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창밖으로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눈을 잊은 이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침대에 눕기 전에 창을 열어보니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그리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밤 사이 눈은 더욱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다가오는 봄을 주춤하게 만든다고 할까. 그래도 이번 눈에는 봄눈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눈을 담았다. 모든 사물 위에 눈이 내렸다. 운동기구에도 눈이 내려앉았고 자동차 위에도 눈이 내렸다. 잠시 눈의 세상이 되었고 그 뒤에 모두 숨은 것만 같다. 이상하게도 눈이 내린 풍경이 든든하다. 든든하다니, 뭐가 든든하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곧 사라질 눈을 바라본다는 일이 나쁘지 않다. 사라졌다고 해서 눈이 내렸던 날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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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2-18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눈을 만났네요 저도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어제 새벽에 내리는 것만 봤습니다 지금도 내릴지도 모르겠군요 어제보다 더 많이... 아까 쌓인 거 보고 왔어요 예전에는 새벽에 눈 오면 밖에 나가서 그걸 찍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군요 그래도 눈 반가워요 겨울이 아주 가기 전에 와서 더 반갑습니다

오늘도 춥겠지요 자목련 님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20-02-18 17:44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눈만 오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게으름 때문인지 잘 안 찍어요. ㅎ
제대로 된 눈이 내린 날이라 저도 반가웠어요. 내일부터는 날씨가 풀린다고 해요. 희선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그게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는 시작에 있다. 무슨 밀이냐 하면 뭔가 쓰려고 하는데 쓰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시작이라도 하는 것이다. 텅 빈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른 창을 열었다가 인터넷 급상승 검색어를 클릭하고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것일까.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더위를 팔았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가족들에게 마구 더위를 넘겼다. 그런데 올해는 잡곡밥이나 땅콩, 밤 같은 부럼도 없는 그런 날로 지나갔다. 주말 밤 식탁에 놓인 땅콩을 보고 정월대보름이구나 싶었다. 하늘을 보고 커다랗게 둥근 달을 찾는 일도 잊었다. 사소한 일상을 놓쳤다고 할까. 놓쳐도 서운할 일이 아닌데 올해는 그냥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런 작은 일상의 여유조차 사라진다. 당연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메르스 사태를 떠올리면 공포에 휩싸였던 그 여름이 재생된다. 폐 질환을 앓던 큰언니가 병원 일정을 뒤로 미뤘던 기억도 소환된다. 그 여름이 지나고 5년 뒤 이 겨울은 다시 하나의 두려움으로 남을 것이다.

주일에는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의 사고였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다치셨다. 모두 입원하셨고 치료 중이다. 모두 다 건강하게 회복하시고 퇴원하시길 바란다. 어제는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 ​언론과 방송 모두 봉준호 감독의 수상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난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항상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할 수 일을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나의 자리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싶은 거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욱 속상한 마음이다. 가장 잘 알면서도 열심을 내지 않는 것.

언제나 그렇듯 마음은 다시 책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읽을 거라는 마음, 그리고 지금 읽는 중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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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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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이자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그것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시작하면 끝을 맺을 수 있을까. 누가 하찮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까 고민하고 고민한다. 누군가는 그런 상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주저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려고 하는가. 내 안에 갇힌 이야기는 진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장혜령의 『진주』도 그런 마음이 쌓여서 시작된 건 아닐까.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느꼈을 상처와 슬픔, ‘훌륭한 아버지’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설명하지 하지 않았던 선생님과 어른들. 그리고 묵묵히 삶을 견디며 딸을 키우는 어머니. 이제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진짜 삶이었던 어린 소녀가 자라 들려주는 나직한 목소리로 가만히 들려주는 소설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소설의 형식이나 구성 때문이 아니었다. 화자인 ‘나’ 와 다른 시대와 다른 공간에 거주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분명 다른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의 주변에도 분명 존재했을 수많은 어린 ‘나’와 그의 가족들의 존재를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알았더라도 소설 속 아이들처럼 ‘너는 왜 아빠가 없냐’고 묻는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여전히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세상과 불화하는 이들이 여전한 지금도 다르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부재로 존재하는 아버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나’에게 가능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의 일기, 그러니까 작가 장혜령의 일기에는 아빠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어린 소녀가 느꼈을 불안이 고스란히 담겼다. 잠들 때 엄마 손을 꼭 잡고 자자고 말하는 ‘나’의 간절함이 전해진다. 그러나 대답은 그러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너무도 할 일이 많은 엄마는 아침이면 깨끗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이미 일을 하고 있다.

 

‘나’의 기억으로 시작했을 이야기.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가. 그 많은 일기들과 그림, 사진을 간직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며 돈을 건넨 사복 경찰과의 만남, 가게를 나오는 소녀의 등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네 아줌마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가족들과 지냈던 안산에서의 기억, 아버지가 부재한 이들이 함께 명절을 지내며 서로를 위로하던 날들, 언제부터 소녀는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던 것일까.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아버지. 집이 아닌 거리에 있었고 경찰을 피해 다니고 결국엔 감옥에서 지냈던 아버지.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왔고 아버지가 감옥에서 삶을 견디는 동안 아버지의 동료들 가운데 우리가 알만한 누군가는 교수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사업가로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마치 과거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 기준은 누가 세우는가. 돌아온 아버지도 생의 현장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대학 졸업장 대신 전과자가 된 아버지는 남들처럼 회사에 다닐 수 없다. 친구나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에서도 여전히 주변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본다. 부당한 대우, 체불된 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그것들을 묵과할 수가 없다. 다시 그렇게 아버지는 방 안으로 돌아와 식물처럼 조용히 지낸다. 그러나 딸에게는 자전거를 가르치며 돌아보지 말라고 공집합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어둡고 무서운 곳인데 자전거 타는 작은 일부터 두려워한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12쪽)’ , ‘돌아보지 말아라.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고(100쪽)’ 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딸은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가 앞으로 나가는 대신 돌아본 세상엔 보통의 우리가 있었다. 기간제, 계약직, 임시직의 우리들 말이다.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하게 지속되는 고단한 삶. 소설 속 아버지는 여전히 거리에서 투쟁하고 단식하고 언론에 등장한다. 과거의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장 자기가 사는 시대가 바뀌지 않더라도 지금의 어린이들이 어른이 된 미래에는, 자신들이 꿈꾸던 세계가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78쪽)’ 모두에게 괜찮은 세상, 악의보다는 선의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소설은 ‘나’처럼 아버지의 부재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된 어린아이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역사 속 저편에 기록으로 남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고 살아내는 이들에게 『진주』는 소설이 아닌 그들의 기록이자 일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부끄럽고 불편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가 더듬어가는 기억 속 반려견과 보내는 잔잔한 일상과 진주의 풍경에서 어떤 평안과 평화를 느낀다.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다. 아버지가 옥살이를 하던 도시 ‘진주’를 가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멀미를 했던 열 살의 ‘나’는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서른둘의 나이에 다시 그 진주를 찾는다. 엄마와 함께 짧은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먹었던 국수, 진주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소개하는 이들의 말투와 표정, 일요일에는 면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 아득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때로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힘으로 응집된다. 장혜령의 『진주』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당사자인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편을 믿고 기다리고 지원하는 아내와 그의 딸이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라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누구도 대신 채울 수 없던 아버지의 자리, 부재로 자신을 증명하던 아버지를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 장혜령이 혼자만 간직했던 이야기의 타래가 술술 풀려서 나에게 닿는 순간의 감정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 소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흘러가는지 지켜볼 것이다. 구르고 굴러 커진 소설의 힘이 닿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말이다. 이제 『진주』를 만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가 하나의 운동장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면서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을 응원할 것이다. 그가 뒤돌아보면 손을 흔들고, 넘어지면 달려가 일으켜주고. 마침내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즐거움과 소소한 풍경이 주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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