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배려는 상대를 힘들게 한다. 내 경우에 그렇다. 내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뭔가 나를 도우려는 손길이 있다. 때로는 고맙지만 때로는 불편한다. 어떤 행동이나 지원 같은 것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글이나 사진을 통해 무례하게 질문을 하거나 무작정 자신의 생각을 전이시키려 하는 이들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짐작하고 판단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다. 나도 과거엔 그랬다. 물론 지금도 그런 실수를 하지만 과거보다는 좀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류승연의 『배려의 말들』 을 읽으면서 여전히 나는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라는걸, 배려를 실천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배려가 무엇인지 알아야 잘 할 수 있다. 상황을 이해하고 타인을 생각하고 나 자신까지 살피고 나서야 적재적소에 맞는 배려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존중, 태도, 차별, 혐오, 평등, 배제와 같은 우리 삶은 단단하게 하는 가치를 민감하게 살필 줄 알아야 배려를 주고받고 나서도 서로 낯 뜨거워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10쪽)


내 편의대로 내 맘이 편하자고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경우, 상대 역시 그것을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사람의 관계에 있어 호감을 느끼고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건너뛰고 무작정 다가갈 때 상대는 주춤하기 마련이다. 배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건 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그가 원하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았을 때 가능하다. 가령 물 한 잔을 마시는 경우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빨대가 필요하고 누군가는 무거운 컵이 아닌 가벼운 컵이 필요한 법이니까.


배려는 상대에게 관심을 갖는 마음이다. 관심을 갖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는 마음이기도 하며, 일상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마음이기도 하다. (21쪽)


저자의 경우 배려에 대해 더욱 민감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신문기자였던 그녀가 결혼 후 쌍둥이를 낳았다.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면서 차별과 혐오를 경험했다.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 그 안에 배려는 없었다. 불쌍하게 여기거나 대놓고 나쁜 말들을 하는 사람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걸 일상에서 느낀 것이다. 성소수자들, 장애인, 노약자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을 배려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한 적은 없을 것이다. 순간 부끄러우면서도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수술 후 재활을 하는 동안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떠올랐고 어쩌다 그랬냐며 아무렇지도 않게 묻던 이들이 생각나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역시 몇 차례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같은 상황의 이들에 대해 내 맘대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추측하지도 말아야 한다. 때로는 기다려야 한다. 상대가 먼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할 때까지. 아픔과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꺼내기 힘든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배려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는 말과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상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도 배려다. 사랑하는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우리는 이토록 인색해졌을까. 어쩌다 젊은이의 오만함을 나이 든 부모 앞에서 내세우게 되었을까. 지금 내 부모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일 텐데 말이다. (91쪽)


장애인의 이동권이나 화장실 사용만 봐도 그렇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데 우리 사회는 그것을 말로만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기성세대와 노인들에 대한 시선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형편이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고집스러운 이들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100세 시대를 사는 시대에 우리는 늙지 않을 거라 자신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책을 통해 마주하니 사회 곳곳에 배려가 필요한 삶이 가득했다. 엉뚱한 곳을 긁어주는 게 아니라 가려운 곳을 직접 긁어주는 시원한 배려, 그 배려를 정작 모르고 사는 삶이었다.


괴로움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고 슬픔과 나도 동의어가 아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더 배려 하게 된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으로 내 삶을 배려한다. (47쪽)


장애 아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슬픔에 잠긴 저자가 아들과 자신을 분리하면서 비로소 배운 삶의 태도는 아름답다. 부모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1년에 한 번 자신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진정한 배려는 나를 챙기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모습.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 간에도 정말 필요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쉽게 내뱉는 말 중 하나가 배려다. 살아가면서 배려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싶다. 책을 읽으면서 김원영의 책이 자꾸만 떠올랐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의 현실을 낱낱이 보여준 그의 글에서 인권에 대해 무지한 우리의 모습이 보여 때때로 숨어들고 싶었다. 책을 읽을 때에만 반성하는 나의 모습 때문에도 그랬다. 읽으면서 분개하며 어느 순간 사그라드는 나의 마음 말이다. 그래도 더 많이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대화의 장을 확장시킬 수 있으니까. 그동안 몰랐던 걸 책을 통해 조금 더 느끼고 배울 수 있으니까. 배려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나가는 사회는 정말 어려운 것일까.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나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면 된다. 때로는 그저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 때로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의향을 물어보는 일, 도움을 요청할 때 진심으로 도와주고 응원하는 일이 배려의 시작이다. 김원영의 말처럼 우리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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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0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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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1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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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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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빨리 시간이 흘러 이 순간이 지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삶에 그런 마법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잔인하게도 모든 과정을 견디고 겪어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야 할 때 주변을 둘러본다. 이미 경험한 자, 혹은 경험했을 법한 어른을 찾는다. 답을 알려줄 누군가가 필요했으니까. 여든 살의 ‘칙디야크’와 일흔다섯 살의 ‘사’도 그랬을 것이다. 늙고 병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부족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자신과 곁에 있는 늙은 친구뿐이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으로 가득한 알래스카의 설원에 남겨진 칙디야크와 사는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껏 도움만 받고 살아온 그들에게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친구보다 나이가 많은 칙디야크가 느끼는 절망은 사의 그것보다 훨씬 무겁고 컸다.


그들 주의의 모든 것이 은빛 달빛으로 싸여 있었다. 수많은 나무 아래 그리고 야영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두 여인은 잠시 동안 둑 위에 서서 그 특별한 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쉬었다. 사는 자신 같은 사람, 짐승, 나아가 나무까지 압도하는 대지의 힘에 감탄했다. 그들 모두 대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지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 부주의하고 무가치한 생명에는 즉각 죽음이 닥칠 터였다. (60쪽)


둘이라는 숫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녀들이 잊고 있던 삶을 떠올렸고 더 따뜻하고 더 안전한 야영지로의 이동을 결정했다.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눈과 바람을 뚫고 이동하고 자작나무와 가죽끈으로 눈 신발을 만들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부족에서 함께 살았을 때는 알지 못했던 대화도 나누며 감정을 공유했다. 태어날 때부터 약하고 늙은 여자는 아니었다. 부족에 도움을 주는 구성원이었고 딸에게 전부였던 엄마였다. 언제부터 수동적인 삶을 살았을까. 이제는 아니었다.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죽음과 상관없이 능동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칙디야크와 사가 둘이서 헤쳐나간 1년의 시간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늙었다는 이유로 가치 없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말이다.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는 오직 스스로에게 있을 뿐이다.


두 늙은 여자의 힘겨운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몹시 두려웠다. 그녀들이 굶어죽는 건 아닐까, 얼어죽는 건 아닐까. 거대한 포식자의 등장으로 죽는 건 아니었다. 어째서 나는 이 책이 생존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죽음만 생각했을까. 그들이 살아오는 동안 경험한 삶의 태도와 현명한 지혜가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만 떠올렸을까. 어쩌면 그녀들에게 나의 미래를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난과 빈곤의 독거노인, 고독사로 이어지는 100 세 시대의 삶을 말이다. 누군가는 알래스카 인디언의 삶과 우리의 그것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든 번의 여름과 일흔다섯 번의 여름의 힘을 무시하고 서른 번의 여름과 마흔의 여름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잊을 만하면 힘든 일이 찾아온다. 생이란 무릇 그렇다.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되기를 바라는 신의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때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은 괜찮아진다. 내일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모르며 겨울밤을 함께 보내고 새로운 아침을 맞은 두 늙은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돌아온 부족에게 충분한 음식을 주고 그들을 용서하고 협력하여 살아가는 아름답고 숭고한 결말은 깊은 울림을 전한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모든 삶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걸 깨닫는다. 어떤 삶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말이다. 곳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칙디야크와 사의 삶을 응원한다. 죽음이라는 소멸의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순간을 살아가는 삶을 축복한다. 어제와 같은 듯 다르지만 하루하루 이어지는 생과 끊임없이 세상을 논하고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늙은 여자의 그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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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를 바꿨다.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2G를 사용했다. 요금이나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미루고 있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필요한 부분만 사용하는 것, 그것도 나의 권리가 아니던가. 스마트폰은 인터넷 검색만 했고 그 옆에 작은 휴대폰을 사용했다. 그러니 당연히 번호도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아니었다. 종종 아직도 그 번호를 사용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최근에 재난문자를 받지 못하는 걸 제외하고는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건 진심이다. 전화를 하고 문자를 받는 것, 내게는 그게 가장 중요했고 필요했다. 메일을 확인하는 것, 정보를 검새하는 건 개통하지 않은 스마트폰으로 대신했다. 배달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것으로 사용했다.

시류에 따라야 해서, 번호를 변경했다. 아니, 다른 통신사의 2G를 가입할 수 있었으니 강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사용하는 번호와 부여받은 번호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사실 크게 달라진 것 없다. 더 좋은 기기로 더 좋은 서비스를 받는 일이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에 내가 사용했던 시스템, 알람, 일정 관리가 달라져서 많이 불편하다. 그래서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전화 통화와 문자는 스마트폰으로 사용하고 일정이나 알람은 2G로 사용한다. 나는 이 2G가 좋다. 그러니 한동안은 그대로 사용할 것 같다.






7월부터 달라진 일상이다. 통화를 하는 일이나 알림, 문자를 받는 일, 스마트폰에 익숙해지는 것. 사소한 것 같지만 사소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전화번호를 검색하면서 일부는 삭제를 했고, 일부는 스팸으로 분류를 했다. 잘 한 일이라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이들을 연락처를 정리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오가며 연결된 그들과의 이별은 쉽지 않다. 1년 동안 입지 않는 옷을 정리하는 것처럼. 멈춤 상태의 관계와 이별을 고하는 일이다. 누군가는 나와의 관계에 이별을 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시작, 7월에는 적극적으로 책도 읽어야 한다. 말 그대로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미치 앨봄의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 장석주의 <예술가와 사물들>, 전이수의 <소중한 사람에게>를 펼친다. 더위와 조금 더 친하게 지내면서, 여름 속으로 직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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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7-0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얼마 전까지 2G폰 썼는데...
지난 봄 재난 지원금 받아서 일시불로 스마트폰 샀는데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카톡이 전 좀 귀찮고 싫더군요.
카톡을 나가고 싶긴한데 오해 받을까 봐
아침에 일어나면 삭제하기 바쁩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쓰기 시작하면 옛날로 못 돌아간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선 스마트폰 고장나면 어르신들 쓰는 효도폰 쓰지 않을까 싶어요.
전 정말 전화 송수 기능과 문자만 있으면 되는데.
스마트폰에서 댓글 달고 검색하는 것도 어깨와 고개가 꽤 경직되더군요.
정말 오래하면 거북목 되겠어요.ㅠ

얄라알라 2020-07-06 14:15   좋아요 0 | URL
정말 동감합니다. 불가역인것 같아요.
저도 지금 폰 액정이 깨져서 볼쌍 사납지만 정작 저는 별로 폰을 안 써서 별 신경 안쓰는데 주위에서 빨리 바꾸라고들 하시네요. 환경 생각하면 1개 사면 6.8년 오래오래 써야하는데 말이죠....저부터도 주기가 2-3년이니 반성합니다.

자목련 2020-07-07 14:23   좋아요 0 | URL
2G를 쓰셨다니 더 반갑습니다!
스마트폰의 기능이 넘 좋다서 문제더라고요. ㅎ
최소한 필요한 앱만 깔고 사용하는데도 수시로 알림 안내를 받아요.
지금은 조금 친해져야 해서 곁에 둔 시간이 늘어나고 있어요. ㅠ.ㅠ
 
파우스트 러시아 고전산책 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김영란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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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는 동시에 바로 멈춤이 된다. 그런 책은 도전이 필요하다.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거나 거대한 분량에 지레 지친다. 고전의 경우도 그러하다. 고전은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생각 말이다. 『파우스트』란 제목만 보고 그랬다. 내가 아는 파우스트는 괴테를 떠올렸으니까. 매번 시작만 하고 말았던 그 소설로 알았다. <첫사랑>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가 쓴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대충 제목만 보는 나의 이 불량함을 어찌할까. 그러니 이반 투르게네프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과 섬세한 묘사에 반하고 말았다고.


『파우스트』엔 이반 투르게네프의 세 가지 중단편을 엮었다. 표제작인 <파우스트>, <세 번의 만남>, <이상한 이야기>모두 매력적이다. 첫 번째 <세 번의 만남>은 제목 그대로 세 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인 ‘나’가 묘령의 신비한 여인을 세 번 만나는 이야기.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까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면서 읽었다. ‘나’가 그 여인을 처음 만난 건 이탈리아의 소렌토였고 그녀와 한 남자의 은밀한 만남의 목격자였다.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그녀를 러시아의 한적한 영지의 저택에서 다시 만났다.


정말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초록빛 자연 속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모자 아래 살짝 드러난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홍초를 띤 하얀 얼굴, 살짝 곡선을 그린 가는 목덜미, 긴 회색 옷을 따라 부드러운 햇살이 흘러내렸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행복을 과연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30쪽, <세 번의 만남>)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도 주변 사람도 그녀를 알지 못했다.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은 더욱 커졌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놀라운 건 페테르부르크의 가면 무도회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이번이야말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 만남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고백했지만 그녀는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에 항상 그녀 곁에 있던 남자였다.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나버린 아쉬운 사랑이지만 그녀를 만날 때마다 떨리며 흥분했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소설이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욱 그 사랑을 아름답고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표제작인 <파우스트>는 9편의 편지로 구성된 소설이다. 주인공 파벨에게 일어난 일을 친구에게 편지로 알려주는 이야기로 괴테의 <파우스트>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벨은 과거 첫 사랑이었던 베라와 재회한다. 대학 동창의 아내로 말이다. 가혹한 운명이었다. 과거 파벨은 베라와 결혼까지 결심했지만 그녀의 어머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라에게 어머니는 신과 같은 존재였고 무조건 복종하는 대상이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베라에 대한 파벨의 사랑은 되살아났다. 베라는 스물여덟 살에 세 아이를 둔 엄마였고 친구의 아내였다. 베라와 만난 파벨은 그녀에게 과거에 어머니의 반대로 접하지 못했던 문학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처음이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였다.


베라에게 파우스트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솟구치는 욕망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남편을 두고 사랑하는 파벨에게 갈 수 없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신했지만 방법은 없었다. 베라는 병이 들었고 죽음을 맞이한다. 베라의 욕망은 죽음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내 청춘이 눈앞에 되살아나 환영처럼 어른거리더니 온몸의 혈관을 따라 불길처럼, 독약처럼 뛰어다니는 거야. 심장은 확장된 채 수축되지 않았고 심장의 혈관이 온통 약동하지 시작했지. 그리고 욕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지……. (74쪽, <파우스트>)


앞의 두 편이 사랑과 욕망에 관한 것이었다면 마지막 <이상한 이야기>는 종교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는 H가 드려주는 과거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H는 우연하게 순수하고 맑은 소녀 소피를 만났다. 좋은 기억이었기에 소피가 가출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업무차 방문한 곳에서 소피를 발견한다. 소피는 ‘바슬리’란 순례자를 돌보며 희생하고 있었다. 가출의 이유도 그래서였다. 소피는 과거와 달라졌다. H는 소피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지만 그녀는 완고했다. 자신이 믿는 것을 따르고 실천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파국으로 끝났지라도 말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름답고도 섬세한 묘사로 만난 사랑, 욕망, 종교를 향한 몸부림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 중 하나다. 고전을 통해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마음처럼 닿을 수 없고 쉽지 않은 게 인생이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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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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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에 도달하는 분노나 누군가를 죽이게 되는 감정은 기억보다 이전에 속하는 곳, 아주 어린 유년기 세상에서 학대와 혹사를 당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에 걸쳐 생겨나고 결국에는 폭발한다. 가끔은 엉뚱한 상대를 향해 폭발하기도 한다. (62쪽)

의사를 전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말이다. 상대의 눈을 보고 직접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은 감정에 따라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를테면 큰소리를 내 거나 욕설이 나오거나 조리가 맞지 않는다. 그럴 때 말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다. 잠깐 호흡을 고르며 말을 멈춘 후 상대의 입장을 듣고만 있거나 편지나 문자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선택은 대화의 단절이다. 스스로 입을 닫거나 극도로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을 때 말을 잃어버린다. 후자의 경우는 자발적인 게 아니므로 치료가 필요하다. 남편을 잔혹하게 죽인 아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대체로 전자의 경우라 생각할 것이다.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게 아내뿐이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사일런트 페이션트』속 아내 앨리샤의 이야기다.


화가인 앨리샤는 남편을 죽인 후 자해를 시도했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6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살해 동기를 밝히거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상태지만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심리상담사 테오와 만났다. 여타의 의사나 치료사에게 그랬듯 앨리샤는 테오를 폭행하고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다. 소설은 앨리샤와 테오의 목소리를 교차로 들려주면서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과거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행으로 상처를 입은 테오는 상담을 통해 치유를 받으면서 상담사의 길을 선택했다. 앨리샤에게도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직감한 그는 주변 인물과 연락을 시도한다. 단순 치료를 위한 만남일까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앨리샤에 대해 탐문한다. 앨리샤와 테오가 상담을 하는 장면은 짐작할 수 있듯 테오 혼자서 말을 하는 게 전부다. 마치 삶을 포기한 듯한 앨리샤는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심리상담사 테오의 상담 과정이나 그의 생각을 읽노라면 마치 내가 상담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앨리샤의 고모와 사촌, 동료, 친척, 이웃을 통해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 죽으려 했다는 걸 확인한다. 어쩌면 테오의 치료가 보통의 환자(내담자)를 상대하는 그 이상으로 앨리샤에게 매달리는 게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은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상태, 그것을 테오는 소설에서 ‘사랑받지 못했던 고통’이라 설명하는데 무척 강하게 다가왔다. 자아, 가치관의 씨앗이 자라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슬픔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으므로.

갑자기 아이 모습의 내가 떠올랐다. 불안감에, 온갖 공포와 온갖 고통을 끌어안은 채 터지지 직전인 아이. 끝도 없이 서성거리고 가만히 있지 못하면서 두려워하는 모습. 혼자서 미치광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견뎌내는 아이. 얘길 할 사람은 없었다.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앨리샤는 나와 비슷하게 절망적인 기분이었을 것이다. (253쪽)

앨리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일기장의 기록은 예술가의 고뇌와 그녀의 심리적 상태를 잘 보주는 것으로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단서이자 증거로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탁월한 감각에 감탄하는 장면이 있는데 앨리샤가 일기장을 숨겨놓은 곳 역시 그러하다. 작가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첫 소설이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하다. 의사였던 누나의 도움으로 정신병원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의 일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해도 말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끝까지 손을 뗄 수 없는 긴장감과 몰입도가 최고인 소설이다. 상상할 수 없는 반전은 두말할 것도 없는 만족도를 선사한다. 진정한 심리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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