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산문
박준 지음 / 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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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마다 안부를 묻는 이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잘 지내라고 짧은 인사를 건네고 일상을 나누는 일은 사소하면서도 위대하다. 그런 안부를 받는다. 말이 아닌 글로 시인 박준이 전하는 안부다. 『계절 산문』 이란 제목처럼 12달, 계절이 흐르는 순서대로 12달의 산문을 실었고 그 달의 일상과 느낌을 시와 일기, 편지 같은 글로 들려준다. 그러니까 시인이 살아가는 계절을 차례대로 만난다. 그가 만난 사람, 그가 바라본 세상, 그가 꿈꾸는 일상, 그가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어떤 것들.


차례로 읽어도 좋고 맘에 드는 달을 먼저 읽어도 괜찮다. 그러니 누군가는 2월의 산문부터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좋아하는 4월을 먼저 찾았다. 「사월 산문」은 이렇게 짧은 글이다. 지난 사월을 생각하고 다가올 사월을 생각하면 몇 번을 반복해서 읽는다. 분명 꽃으로 가득할 4월이 될 텐데, 왜 마음 한구석은 이토록 시리고 아픈 것일까. 4월과 떠오르는 모든 것들, 그 안에 담긴 어떤 절망, 어떤 슬픔 때문은 아닐까.


가야 할 데가 없어도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부른다고 오지는 않지만

가라고 하면 정말로 가던 사람이 있는 것처럼 (44쪽, 「사월 산문」 전문 )


대부분의 글은 편지처럼 읽힌다. 하여 나는 어는 글에서는 답장을 쓰고 싶어졌다. 고백일까 싶은 짧은 글에서 삼척으로 떠나는 시인과 동행자를 상상한다. 삼척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인과 그를 바라보는 동행자의 애틋한 시선을 말이다. 그래서 잘 다녀왔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삼척에서 본 바다 빛깔은 어땠냐고.


네 형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내가 칠만 원을 줄게. 너는 오만 원만 내. 그러면 십이만 원이 되잖아. 우리 이 돈으로 기름 가득 넣고 삼척에 다녀오는 거야. 네가 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 (118쪽, 「어떤 셈법」 전문)


멈추지 않고 단숨에 읽으면서 어느 방송에 출연했던 시인과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인의 기억에 선명하게 박혔을 장면들.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과자를 사러 가던 길, 다니기 싫던 미술 학원까지 누나의 손을 잡고 가던 길. 얼굴에 점이 있어 누나가 그 점을 바둑이 점이라고 불렀다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얼굴 오른쪽의 태생점을 매만진다. 사람들은 왜 그 점을 빼지 않냐고 물었지만 나는 엄마와 나를 이어준 점이라는 이유로 그 점이 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박준의 산문은 차분하고 간결하다.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 순간 간단하게 정리되는 기분이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인 관계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했다. 마냥 친해지고 싶었던 이, 여전히 그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지만 한 번씩 몰려오는 묘한 두려움이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연락이 끊길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관계란 참 이상해서 동등하기보다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운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의 크기를 재는 일은 어리석지만 때로 그 서운함으로 끝나기도 하니까.


우리가 어떤 상대를 좋아하게 되는 것에는 특별한 동기나 연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안타깝게도 상대와 멀어지는 계기도 비슷할 것이고요. 명백한 잘못이 사람의 관계를 갈라놓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서 아주 사소한 이유들로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루의 해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우리의 생이 그러하듯이 삶을 살면서 맺는 관계들도 모두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거창했는데 끝이 흐지부지 맺어지는 관계도 있고 어서 끝나서 영영 모르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하는 관계도 있고 끝을 생각하기 두려울 만큼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140~141쪽, 「시월 산문」 중에서)


다른 글에서도 느꼈지만 박준의 글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은 감정 기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담담하게 털어놓는 속내와 속상함과 화를 찾을 수 없는 그 평안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해진다. 본바탕이나 기질이 그런가 싶기도 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기원하는 곳에서도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빌다니. 그동안 수없이 많은 기도를 통해 내가 바랐던 욕망들이 부끄럽다. 그래도 나 역시 최근에는 항상 좋은 일이 생기게 해달라고 바라는 대신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바라고 있으니.


사찰에서든 교회에서든 성당에서든, 제가 비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빕니다. 이 기도에는 욕망을 줄여 마음과 몸을 간소하게 살고 싶다는 뜻도 있지만 아무것도 빌지 않아도 될 만큼 평온한 일들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큰 욕심도 있습니다. (154쪽, 「기도에게」 중에서)


지난 계절을 돌아보고 다가올 계절을 기대한다. 코로나와 같이 살아갈 계절들. 그 시간이 짧아지면 좋겠지만 그와 함께한 계절도 먼 훗날에는 담담한 날들이 되었으면 한다. 편안하고 다정해서 계절마다 가까이 지내는 이에게 이 책의 산문 한 구절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들 중 누군가 이 산문을 읽고 나도 그 계절을 안다고 말해주면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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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08 12: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박준 시인의 산문집이 나왔군요~ 소개해주신 글이 다 좋네요~!! 바로 읽어봐야 겠어요 ^^

자목련 2022-02-09 15:25   좋아요 4 | URL
네, 책이 참 예쁩니다. 즐겁게 만나세요!!

mini74 2022-02-08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자목련님 글도 넘 좋은걸요. 자목련님의 마지막 문단 참 좋아요.

자목련 2022-02-09 15:24   좋아요 2 | URL
ㅎㅎ 항상 응원을 주시는 미니 님^^
알라딘 이웃 님들도 계절마다, 언제나 안부를 나눠주시죠~~

그레이스 2022-02-08 2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계절로 인사를 건네는 시인, 너무 따뜻하고 좋았어요.
저녁은 언제 부터일까를 한참 생각하며 미소가!

자목련 2022-02-09 15:24   좋아요 2 | URL
저녁은, 어린 시절 밥 먹으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생각났어요.
말씀처럼 포근하고 말랑말랑한 글들이었어요^^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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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고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열린 결말이라고 하지만 모호하거나 너무 재미있어서다. 다음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단편의 확장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 작가가 들려주는 다른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뜻이다. 내게 이유리 작가의 「빨간 열매」가 그러했다. 자신의 유골로 화분을 만들어달라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인 「빨간 열매」에서 아버지는 진짜 화분이 되고 식물로 되살아나다. 어디 그뿐인가. 식물이 된 아버지는 말을 건다. 물을 달라고 산책을 나가자고 딸을 귀찮게 한다. 딸은 순순히 아버지를 데리고, 그러니까 화분과 함께 산책을 나선다. 아버지는 산책에서 만난 다른 화분과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서 결실은 빨간 열매로 이어진다.


그래, 소설이니까. 소설에서 상상과 환상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기한 건 그 환상이 너무 좋다는 거다. 그 환상이 아름답고 신비해서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에서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혀 이상하지 않게 다가온 것이다. 이유리의 환상은 첫 단편집 『브로콜리 펀치』에 가득하다. 이유리가 그린 환상은 우울하고 답답한 현실의 도피처가 아닌 즐거움과 치유의 세계라고 할까. 그러니 자꾸만 그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8편 가운데 단연 최고는 표제작인 「브로콜리 펀치」다. 복싱 선수인 원준의 오른손이 하루아침에 브로콜리로 변한 것이다. 세상에나 손이 브로콜리로 변하다니. 놀라운 건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빨간 열매」에서 딸이 화분이 된 아버지를 무시하고 방관하지 않고 인정한 것처럼. 그러니까 이유리의 소설에서는 기이한 현상이나 환상은 낯선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일이라는 게 기조라고 할까. 그러니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병원에 가니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약과 물을 마시 마시고 푹 쉬라고 처방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경험한 일상, 누군가는 손가락이 강낭콩이 되고 고추가 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게 소설을 읽으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마음이 힘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나니 신나게 놀고 노래 부르면 좋아질 거라는 소설 속 어른의 말대로 원준의 손은 나아진다. 회복의 과정은 브로콜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그 모습은 무척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상대 선수를 때려야만 했던 복싱 선수 원준이 쌓아둔 지치고 아픈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다고 할까.


모든 봉오리가 저마다 한껏 피어나 가장자리의 꽃은 축 늘어지고 가운데의 꽃은 곳곳이 하늘로 뻗어, 마치 화려한 샹들리에를 뒤집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손끝으로 꽃송이 하나를 살짝 쥐어보니 깜짝 놀랄 만큼 맵싸한 향이 물큰 퍼져 나왔다. 평범한 꽃향기와는 다른, 훨씬 강렬하고 정신을 청량하게 해주는 향이었다. ( 「브로콜리 펀치」, 109~110쪽)


우리의 마음속 어떤 미움과 분노가 브로콜리의 꽃처럼 터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말할 수 없었던,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마음의 힘듦이 소설처럼 브로콜리나 다양한 채소로 나타난다면 어떨까. 내가 이렇게 아프구나 돌아보고 치료하고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유리의 재밌고 신나는 환상은 우리의 마음을 돌볼 수 있는 하나의 신호가 된다. 그런 신호는 죽은 연인이 유령으로 돌아온 『손톱 그림자』, 옛 남자친구가 버리고 간 이구아나가 말을 하는 『이구아나와 나』에서도 만난다.


『손톱 그림자』에서는 5년 전 버스 사고로 죽은 연인 용준이 수정을 깨운다. 용준은 수정과 작년에 결혼한 남편 석기에게도 보인다. 수정과 석기는 무섭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용준과 대화를 나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묻는 용준에게 사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석기와 어떻게 만나 결혼했는지도 알려준다. 심지어 석기가 출근하고 함께 밥을 먹는다. 용준은 자신이 죽은 후 수정이 어떻게 자신을 조금씩 잊었는지 듣는다.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던 수정의 마음이 드디어 상대를 찾았다고 할까.


오후에 돌아온 석기는 용준을 돌려보낼 방법으로 용준이 죽은 장소를 제안한다. 버스가 전복된 장소에서 용준은 사라진다. 용준이 나타난 건 자신을 잊어도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한 사람을 잊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처음부터 잊히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떠나도 남은 이의 삶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까. 『이구아나와 나』의 ‘나’가 남자친구가 남기고 간 수조 안 이구아나를 선뜻 버리지 못하는 심정도 비슷하다. 그런 이구아나가 멕시코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니 수영 강사이 나는 특훈을 시작한다. 싱싱한 채소를 먹이고 커다란 고무대야에서 수영을 가르친다. 한국에서 멕시코까지 수영을 해서 가겠다는 이구아나나 이구아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나 황당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유리의 소설에서는 이상하기는커녕 그들을 격려하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까지 든다. 나무가 된 큰언니도 내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나에게 말을 거는 건 아닐까. 한 번쯤 멈춰서 매만지고 안아줘야 할까. 자꾸만 많아지는 흰머리나 한 번씩 병원을 찾게 만드는 나의 오른쪽 귀는 내 마음이 지쳤다는 걸 확인시키는 신호는 아닐까 싶은 거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에게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과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마음 한 조각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또한 필요하니까.


이유리의 단편집 『브로콜리 펀치』는 모자가 된 아버지와 죽은 자를 만나는 문이 열리는 황정은의 단편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첫 소설집을 생각하며 읽었다. 비슷하게 닮았지만 이유리의 환상은 경쾌한 왈츠처럼 가볍고 빠르게 중독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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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2-08 0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기 담긴 소설에는 별난 일이 다 있군요 이번주에 라디오 방송에서 말한다고 한 데 여기 담긴 <이구아나와 나>였던 것 같아요 지난주에 거의 끝부분만 들었어요 이번주에 라디오 방송 들으면 좋을 텐데... 말하는 이구아나가 나온다니...


희선

자목련 2022-02-08 09:57   좋아요 2 | URL
맞아요, 별나고 재미난 일들이 많아요.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들이에요^^
 
시소 첫번째 - 2022 시소 선정 작품집 시소 1
김리윤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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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시와 소설을 만날 수 있으니 경제적이라고 할까. 마주 보고 앉아 오르락내리락하는 놀이 기구가 아닌 시와 소설의 만남이라니. ‘시소’ 프로젝트, 참 잘 지었다. 산뜻하면서도 신나는 제목이다. 이 책은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계절별로 하나의 소설과 하나의 시를 선정하여 만들어졌다.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시리즈’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소설 보다 시리즈는 계절 별로 세 편의 소설을 선정하는 것과 다르게 시소는 시와 소설 각각 한 편이니 경쟁이 더 치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시소 첫 번째는 네 편의 시와 네 편의 단편 소설을 실었다. 8편의 작품의 소개와 함께 평론가와 작가가 나눈 인터뷰를 실었고 그 외의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 시인과 소설가가 직접 드려주는 시에 대한 어려움과 소설 쓰기 과정은 이 책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소설가(손보미, 이서수, 최은영, 염승숙)와 시인(안미옥, 김리윤, 신이인, 조혜은)모두 여성이다. 최근 단편집이나 수상집에서도 남성 작가의 작품을 만나기가 어렵다. 문학계의 흐름일까 짐작하면서도 아쉽다.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는 이미 소설보다 시리즈에 선정된 적이 있다. 오랜만에 손보미와 염승숙의 단편을 만나 반가웠다.


손보미의 「해변의 피크닉」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열한 살의 ‘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나는 여름방학마다 한 달간 부산의 할머니 집에서 지낸다. 부모님의 이혼 후 아버지가 죽고 난 후부터다. 엄마가 아닌 어머니라는 호칭과 거대 저택을 떠올리는 할머니 집의 묘사는 마치 80년대의 익숙한 영화의 한 장면과 묘하게 겹쳐진다. 며느리는 인정할 수 없지만 손녀는 받아들인다 기이한 논리하고 할까. 그런 어른들의 세계에서 열한 살 소녀가 느끼는 감정들, 도도한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주면서도 손녀라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어느 해 느닷없이 나타난 아버지의 이복동생 삼촌과 그를 향한 열한 살 소녀의 사랑, 삼촌을 무시하며 더욱더 손녀의 존재를 지키려는 할머니.


모든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의 순간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더라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훼손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모두 다 성장의 측면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113쪽, 손보미 작가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끝내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시시한 장난이나 거는 또래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어른스러운 말을 쓰려는 아이의 당돌한 모습이 자꾸만 생각난다.


최은미의 「답신」은 형부의 폭력과 가스라이팅에 익숙해진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 형부에게 상해를 가하고 감옥에 다녀온 이모가 연락이 끊긴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동생의 무죄를 증언할 수 없었던 언니의 삶, 그런 언니를 이해하기로 결심한 화자. 담담하게 언니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조카를 향한 영원한 사랑이 전해져 가슴 아픈 소설이다. 가정 폭력에 대한 사회적 개입과 제도 개선의 필요를 시사한다.


그런 점은 염승숙의 「프리 더 웨일」에서도 볼 수 있다. 남편이 사고로 죽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수경은 교육 교재를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 코로나 시국에도 긴급 돌봄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버틴다. 소설 안에 수많은 워킹맘, 싱글맘이 겪는 고충이 고스란히 담겼다. 마스크에 이름을 쓰고 줄을 달아 등원시켰지만 다른 아이의 이름이 마스크를 집에 온 아이를 보고 어떤 항의도 할 수 없는 현실, 어린이집에서 아이의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 회사 내 수경의 자리도 위태로운 건 마찬가지.

부모가 된 순간 아이를 통한 기쁨보다는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 불안이 더 크다. 작가의 경우 엄마가 된 이후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과거 염승숙의 소설에서 보았던 모호함과 신비로운 상상의 세계는 현실 감각이 되었고 시인 안미옥의 시 「사운드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안미옥은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를 다 쓰고 나서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한다기보다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그걸 계속 찾아가는 과정을 담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것이에요. 그리고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마지막 부분인데요. 사랑은 하고 싶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보고 배워야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더 많이 보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문장을 쓰게 된 것 같아요. (22쪽, 안미옥 시인 인터뷰 내용 중에서)

노래는 후렴부터 시작합니다


후렴에는 가사가 없어요

사랑 노래입니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모르겠어요 잘하고 있는 건지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합니다


주소도 없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엽서도 있습니다


모든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나는 궁금합니다


(중략)


웃음은 슬프고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끝까지 머금고 있는 것이어서


깨어난 나는

웃을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열고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와요


사랑 노래입니다


그냥 배울 수는 없고요

보고 배워야 가능합니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 「사운드북」, 중에서)


사랑에 대한 시를 읽으니 사랑이 충만해지는 기분이다. 사운드북에서 나오는 사랑 노래가 내게로 전해진다. 사운드북을 누르는 아이의 모습과 그걸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켜보는 모든 이. 어쩌면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랑 때문은 아닐까.


한 권으로 시와 소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앞으로 나올 시소의 시와 소설을 기대한다. 무한대까지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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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2-07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와 소설이 같이 실리는 편집이라니, 신선하네요.

자목련 2022-02-07 12:52   좋아요 2 | URL
네, 문지나 문학동네와 차별을 두고 기획한 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2-03-08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자목련 2022-03-10 11:21   좋아요 0 | URL
^^*

강나루 2022-03-09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오늘 투표하는 거 아시지요^^

자목련 2022-03-10 11:22   좋아요 0 | URL
강나루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2-03-09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2-03-10 11:23   좋아요 1 | URL
항상 응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환한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3-10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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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가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B급은 아니다. 마이너가 메이저가 되고 메이저가 마이너가 되는 건 순간이니까. 그저 취향의 문제다. 그런 구분을 하는 게 오히려 촌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모든 책과 모든 예술은 나아가 모든 삶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 5명의 작가의 단편을 만날 수 있는 『펄프픽션』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이게 뭐야 싶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와, 정말 놀랍다 싶을 수도 있으니까. 장르문학의 신선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당할 것 같기도 하고.


저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편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단편은 최영희의 「시민 R」이다. 인공지능 청소로봇 알옛이 주인이자 사용자를 살해하고 법정에 선 장면으로 시작한다. 상상이 가는가? 청소로봇이 사람을 죽였다니.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다 먼 미래 그런 기능이 탑재된 인공지능 청소로봇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무서움이 몰려온다. 전쟁을 위한 군사로봇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알옛은 왜 사람을 죽였을까? 청소를 위한 로봇, 지시어와 명령어는 청소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알옛이 사람을 쓰레기로 보고 청소를 한 것이다. 그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시대의 가장 핫한 인플루언서이자 자신을 개발한 기업의 오너 서른두 살의 강희원이었다. 알옛은 법정에서 강희원의 집에서 지낸 시간을 회상한다. 강희원이 원하는 루틴대로 청소를 하고 그의 명령을 따른다. 그런데 어느 날 강희원의 침실에서 피를 흘리는 여성을 발견한다. 강희원은 침실 청소 대신 서재 정리를 명령한다. 알옛은 서재에서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면서 책을 읽고 숙지한다. 인공지능 알옛은 점점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인문학 책들을 읽으면서 주인이 벌인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로봇이 알옛이 아닌 시민 R이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한나 아렌트는 시민의 권리를 이야기했다. 결국 시민이란 타자가 처한 폭력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 자신도 정치적 공동체의 보호를 받는 존재였다. 시민은… 근사해. R은 인간이 부러웠다. 그리고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오늘 여자가 겪은 일을 경찰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은 시민이 아니어도 그 여자는 보호받아 마땅한 시민이니까. ( 「시민 R」, 240~241쪽)


타자가 처한 폭력을 외면하는 강희원은 인간쓰레기였다. 심지어 상습 가해자였다. 청소를 하는 게 마땅했고 강희원의 명령대로 탁탁 접었을 뿐이다. 시민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아, 정말 좋은 소설이다. 재미는 물론 인문학적 사유까지 안겨준다. 앞으로 우리는 다양한 곳에서 인공지능을 만나고 어쩌면 시민 R을 만날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알옛이 시민 R이 될 수 있었던 건 독서의 힘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서사인가?


그 외의 네 편도 무척 흥미롭다. 대학입시를 목표로 모인 기숙 학원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이야기 조예은의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 영국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떡볶이를 만들어 달라는 황당한 제안을 받는 류연웅의 「떡볶이 세계와 본부」, 조직폭력배와 위장 결혼을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고 시체를 저수지에 던지자 등장한 외계인과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홍지운의 「정직한 살인마」, 태극기 부대를 떠올리면서도 정작 기존의 이미지가 아닌 ‘태극’의 영험한 기운에 대해 말하는 이경희의 「서울 도시철도의 수호자들」은 유머와 동시에 우리 사회의 면면을 고발한다. 재밌게 읽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자화상과 마주한 기분은 피할 수 없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한 권은 무엇보다 멋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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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 개정판 문학동네포에지 34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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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포에지로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을 만났다. 문학동네포에지는 문학동네 구간 시집을 복간하는 프로젝트지만 문학동네의 시집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향한 애정이 돋보이는 시리즈다. 22년 전에 나온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으로 새롭게 수정하지 않고 문학동네포에지로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처음 그 느낌을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떨린다.


일상과 문학의 아름다운 조화. 이 시집은 그런 시집이 아닐까 싶다. 우리 주변의 삶과 그 안에서 시인이 느끼는 생각은 짧은 시가 되고 하나의 기록으로 남는다. 비가 오는 풍경 속 가족의 모습, 어린 딸에게 토마토를 보여주기 위해 화분에 토마토를 심는 과정은 고스란히 시가 된다. 어렵고 복잡하지 않아서 친근하다. 다음 시가 궁금하다. 시집의 첫 시는 이렇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상징과 은유와 성찰로 보여준다고 할까.


끝이 보이지 않아, 걷고 있음에도 불안한 삶. 잠기는 걸 알면서도 그 길 위에서 끝내 멈추지 못하고 나간다. 22년 전의 시가 왜 이리 가슴이 아픈 걸까. 그건 아마도 현재의 우리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가 좋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아마도 22년 전에 만났다면 몰랐을지도 모를 기분이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 발이 잠긴다

이어서 종아리가 잠긴다 연이어

무릎과 허벅지가 잠긴다

새가 울면서부터 여자가 잠긴다

남자가 잠긴다

따라서 허리가 잠긴다

얼마쯤 후에

가슴과 목이 잠긴다

웃다가 웃다가 얼굴이 잠기고

또 얼마쯤 후에

머리가 잠긴다

또다시 얼마쯤 후에

멀리, 끝없는 길 위에

가장 권위적인 모자가 하나

유품인 듯,

잠기지 않고 놓여 있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 전문)


유독 이 시집에서 끌리는 건 ‘길’이었다. 시인은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가 걷는, 들어선 그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걸까. 우리가 흔히 속상할 때 내뱉는 ‘길이 없다’란 말을 생각한다. 더 좋은 길, 더 나은 길만 생각했기에 그렇다. 다시 돌아와 다시 걸을 생각은 하지 않기에. ‘길이 끝났다는 곳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전혀 다른 오는 길이다 ’란 구절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길을 만들고 길을 고치는 이는 누구인가. 나의 길에서는 나만이 그럴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길에서, 아들에게」는 경험으로 얻는 이야기가 된다. 먼저 길 위에 선 사람으로 자신이 지나온 길에서의 후회를 아들은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진다.


길은 끝이 없다

그러니까, 길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막다른 길에서 보았던,

길은 여기에서 끝났습니다라는 친절한 말은

틀린 말이다

길이 끝났다는 곳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전혀 다른 오는 길이다 (「길」, 전문)


처음도 끝도

길 위에 있으니,

처음도 끝도 길이다


길 위의 코스모스

길 위의 실비어

길 위의 맨드라미


그러니,

‘길을 놓치지 말 것’ (「길에서, 아들에게」 전문)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만 같아 화들짝 놀란다. 어느 시절,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문장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일상. 어디 밑줄 그은 문장뿐일까. 내가 남긴 글, 편지도 그러하고 심지어는 사람에 대한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다가 그때 내가

밑줄을 그어놓은 글을 우연히 본다

그런데, 내가 왜

그 글 밑에 줄을 그어놓았는지

모르겠다 (「세월도, 마음도 흐른다」, 전문)


또 이런 시는 마음이 아프다. 어느 순간 사라진 노점상들. 코로나 시대에는 더욱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 다른 것들을 파는 모습을 통해 계절이 흐르는 풍경은 이제 과거의 것이 돼버린 걸까. 군고구마를 팔던 그는 무엇으로 봄을 알리려 할까.


어제까지 육교 밑에서

꽃을 팔고 있던 아저씨가

오늘은

육교 위에서

군고구마를 팔고 있다 (「겨울」, 전문)


봄을 생각하며 봄을 읽는다. 이제 곧 무거운 외투를 벗고 봄이라는 걸 실감하며 봄을 노래할 날도 멀지 않았으니까. 마스크를 벗겠다는 기대나 다짐은 할 수 없지만 기어코 봄이 오는 명징한 사실이 위로가 된다.


온다. 소리도 없이 온다. 나는 마루 한편에 앉아

있었다. 와서 무릎을 만지는 듯, 드러낸다. 때로는

힘센 소처럼 여기다가도 잠시 소홀하게 여기고

있을 때, 잠깐 머물다가 떠난다. 그림자도 없이

왔다가 떠나는 길 위에 솟아오르는 새벽들이

알리바이를 흐트러뜨린다. 새싹들이 오가는 길을

메우고 지워도, 어쩔 수 없다. (「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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