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의뢰: 너만 아는 비밀 창비교육 성장소설 14
김성민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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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내일인데 학교를 가지 않아될 일이 생기기를 바란 적이 있다. 지금은 시험을 망치면 어때서, 시험이 뭐 대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는데 스트레스는 받을 만큼 받았다. 만약 이런 나에게 비밀스러운 의뢰를 할 수 있는 사이트가 나타난다면 무시할 수 있을까?

김성민의 『오늘의 의뢰: 너만 아는 비밀』는 그런 사이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늘의 의뢰’는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렵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의뢰할 수 있는 비밀 채팅방이다. 매일 비번이 바뀌고 소수만 참여할 수 있다. 개인 정보에 대한 언급은 할 수 없다. 의뢰가 올라오면 의뢰를 해결한 사람이 다음 의뢰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 줘야만 내가 원하는 일도 의뢰할 수 있다.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에 올라오는 의뢰는 학교 반, 이름까지 구체적이다. 전교 1등 하는 아이가 시험을 망치게 해 달라는 의뢰, 좋아하는 여학생의 신상 정보에 대해 알려달라는 의뢰. 지역 청소년이 드나드는 채팅방이기에 알려고 하면 의뢰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만 그런 언급을 하면 영원히 사이트 이용이 금지된다.

채팅방의 의뢰와 해결을 시작으로 호기심을 불러온 소설은 중학교 2학년 해민과 해민의 집 2층으로 이사 온 도경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해민은 반찬가게를 하는 엄마와 둘이 산다. 해민의 학교로 전학을 온 도경의 조용하고 친절한 모습과 달리 소문은 수상하다. 전 학교에서 학폭으로 강제전학을 왔다는 것이다. 조금씩 도경과 친해진 해민에게 도경은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도경을 괜찮게 본 아이는 또 있었다. 모범생 소정이다. 곤란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준 도경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도경의 곁에는 해민이 있었다.

소정은 시험 성적, 동아리 활동,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좋아서 칭찬을 받는 아이였다. 그럴수록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커졌다. 국제중 입시 실패로 스스로를 가만두지 않았다. 소정과 해민은 반은 다르지만 문예 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완벽에 가깝게 노력하는 자신과 다르게 해민은 간절함도 없고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칭찬을 받는다. 소정은 이해할 수 없는 아이 해민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낀다.


완벽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시험 성적도 동아리 활동도 인간관계도 뭐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들께는 모범적이고 예의 바른 학생이, 아이들 사이에서는 친절하고 매력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잘났지만 잘난 척은 하지 않아야 하고, 내세우지 않지만 드러나야 하는 법이다. (39쪽)

그러던 차에 소정과 해민은 문예 대회에 참여한다. 소정은 자신이 대상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해민이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의 의뢰’에 해민의 글이 표절임을 밝혀달라는 의뢰가 올라온다. 의뢰한 사람이 소정임을 아는 도경은 자신이 의뢰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도경도 비밀 채팅방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연하게 그 사실을 알게 된 해민은 도경을 통해 사이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소정이 의뢰한 일을 도경이 아니라 다른 아이가 해결한다고 했다면 해민의 글은 표절한 게 됐을 것이다. 어쩌면 그럼 해민도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할 방법으로 오늘의 외뢰에 의뢰할 수도 있다. 물론 소설 속 해민과 도경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의뢰’는 그런 마음을 이용한 사이트라 할 수 있다. 누군가 속상하고 아픈 마음에 공감하는 것 좋지만 대리 복수를 실행하는 건 정당화될 수 없다.

‘오늘의 의뢰’에 등장한 의뢰는 청소년의 일상을 통해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학교생활, 친구 문제,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터놓을 공간과 대상이 없다는 걸 말한다. 현직 교사인 작가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포착해 탄탄하게 소설로 그려냈다. 그러기에 소설을 읽으며 실제로 이런 채팅방이 존재하는 건 아닐지 걱정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하다 혼자 해결할 수 없다면 도음을 청하는 일이다. 친구나 선생님, 부모님과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조금씩 방법이 보인다. 그건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대화와 소통이 사라진 시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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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조금 더 성실하게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다. 책을 샀으면 읽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쓴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책을 샀고 커피도 샀다.

낡고 오래된 책을 정리했다. 읽지 않았으나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이다. 정리하면 공간이 생긴다. 공간이 생기면 채우고 싶다. 때마침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를 먼저 읽은 잠자냥 님의 리뷰에 반했고 김초엽의 신간 『양면의 조개껍데기』가 나왔다. 알라딘은 다양한 커피를 출시하지만 모험심이 적은 나는 새로운 커피보다 가장 좋아하는 커피를 선택했다.




9월이 되면서 가을 냄새를 기대하는데 아직 맡지 못했다. 가을 냄새의 양이 아주 미세해서 예민한 이들만 알아차리는 것일까. 나는 아직 가을 냄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9월이니 가을이라 생각한다. 실내 온도도 2~3도가량 낮아졌고 얼음을 찾는 횟수도 줄었으니까.

어, 하는 순간에 단풍이 찾아올 것이다. 가로수의 나뭇잎에서 연두와 초록은 사라질 것이다. 노란 은행잎에 반하는 날이 올 것이다. 가을과 반갑게 악수하고 여름을 배웅하는 9월. 옷장도 정리하고 침구도 바꾸고, 계절이 바뀌면서 삶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어떤 이에게는 천천히, 어떤 이에게는 급격하게 다가올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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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덥지만 바람이 달라졌어요. 가을 냄새를 품고 오는거겠죠. 김초엽작가 신작 저는 이제 읽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기대돼서 아껴 읽고싶은 기분이에요

자목련 2025-09-06 11:39   좋아요 0 | URL
아껴 읽고 싶은 마음, 알 것 같아요!
오랜만에 만나는 단편집이라 저도 기대가 커요^^

책읽는나무 2025-09-0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두 권을 선택하실 수 있다니?!
저는 매번 놀라곤 한답니다.
자목련 님의 무심한 듯 신중한 결정을 말입니다. 그래서 저 두 권 선택의 안목.
그래서 귀하게 바라봐지네요.
김초엽 작가의 소설 기대됩니다.^^

자목련 2025-09-06 11:40   좋아요 0 | URL
읽지 못해서 책 구매를 자제하려고 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ㅎㅎ
좋은 리뷰도 많고 신간이 나오면 사고 싶고 ㅠ.ㅠ.
 
소란한 속삭임 위픽
예소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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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의 시대에 살면서 지친 마음, 그러나 한 번쯤 큰 소리로 꺼내고 싶은 무언가. 비밀이 아니어도 마음을 나누면 비밀을 공유하는 것처럼 공고해지 관계. 수많은 관계와 쏟아지는 말들 그 안에서 나와 당신은 속삭임을 주고 받는 사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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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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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로 만난 다와다 요코의 글은 여행자의 느낌이었다. 목적지를 정했지만 도착해서 바로 떠날 것을 준비하거나 계획에 없던 장소에 머물러 탐색하는 삶. 낯선 것을 동경하고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에 매혹되어 그것에 빠져드는 이야기. 14년 만에 복간된 『영혼 없는 작가』는 에세이지만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든다.


다와다 요코는 공간을 이동하면서 경험하고 감각하는 모든 것들을 들려준다. 여행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언어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장소에 대한 이야기이며 정체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익숙한 것들에서 떨어져 새로운 곳에서 언어를 배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학창 시절 영어와 제2외국어를 배웠지만 나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할 줄 모른다. 독일어에 남성 명사, 여성 명사가 있는 줄 몰랐다. 다와다 요코가 독일어의 남성 명사를 실제 남자로 느끼려고 애를 썼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문방구에서 마음에 든 게 연필이나 타자기가 아닌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라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니, 알 것 같다기보다 물건을 대하는 그만의 시선에 놀랐다. 나는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수 없는 생각. 이 책 전체가 그런 사유로 가득하다.


연필이나 타자기와 달리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는 글자를 하나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스테이플러 심을 제거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물건을 특별히 좋아하는데, 서로 붙어 있는 종이들을 분리해내는 것이 거의 마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8쪽)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나는 내 감정에 가장 맞는 말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한 적이 없다. 일상적인 언어로, 상황과 상대에 따라 떠오르는 대로 대화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대가 나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에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자는 달랐다. 물론 나의 경우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다와다 요코가 추구한 건 획일적이고 틀에 갇힌 것이 아닌 다양성과 확장적인 언어였다.


가끔 나는 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착착 준비해 척척 내뱉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83쪽)


모든 글에서 전해지는 그의 사유는 대단하다.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들을 어머니로 비유해 들려주는데 영혼과 외로움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영혼 없는 작가』란 제목과 부합하는 글이 아닐까 싶다.






영혼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어머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많은 단어들을 낳지만 혼자 죽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어도 단어들은 슬퍼하지조차 않는다. 영혼은 언어 없이 완전히 홀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외로움은 영혼의 어머니다. 어떤 사람이 외롭다고 느끼면 바로 혼자서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때 그는 언제나 자기 말을 들어주는 어떤 인물을 상상한다. 이 인물을 영혼이라 부르는 것 같다. 어머니는 외로움의 영혼이다. (166~167쪽)


그리고 중요한 건 경계나 선을 긋는 게 아니라 독자적인 정의였는지도 모른다. 음악이란 처음부터 비인간적인 무엇이었다는 그에게 애당초 음악은 특별한 무엇이 될 수 없었다. 일본에 살 때도 바흐의 음악이 외국 음악이라는 생각도 없었기에 함부르크에서 바흐 음악회가 끝난 뒤 독일 여성이 “우”리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충격이었다는 말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수긍할 수 있었다. 독일 여성은 다와다 요코와 다르다는 전제하에 질문을 한 것이다. 정작 다와다 요코는 “우리”에 속할 생각도 없었고 속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언어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확고하게 전해지는 문장처럼 말이다.


배우지 않은 언어는 투명한 벽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멀리까지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도 방해를 하지 않으니까. 모든 단어는 무한히 열려 있고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216쪽)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시작한 에세이는 독일, 일본, 미국,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서 끝을 맺는다. 책 한 권을 따라 여행하는 기분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본어, 독일어, 영어, 중국어가 모였다 흩어지는 것 같다. 인상적이고 독특한 글도 많았다. 전철에서 책 읽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관찰한 이야기, 사전이 낳은 마을이라는 기발한 상상의 이야기, 열세 살 소녀였을 때 갖고 있던 프랑스 여자 영화배우의 책에 대한 이야기.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매혹적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들었다고 할까. 잘 들으려고 집중하게 된다.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다와다 요코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말이다. 그는 분명히 낯선 삶을 여행하는 여행자이며 언어의 여행자다. 우리로 묶인 삶이 아닌 떠돌더라도 자유로운 삶. 너머의 너머를 향하는 그의 여정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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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시인선 224
유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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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큰일이 아니라고 여기며 산다. 어쩌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가벼운 건지도 모른다. 무겁고 진지함을 피하고 싶은 도망가기 위한 준비 태세라고 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는 건 내 맘대로 안 되는 일 투성이니까. 지금 가장 가까이 직면한 일만 봐도 그렇다. 도어록이 자꾸 말썽이다. 문을 열 때마다 애를 먹인다. 건전지가 문젠가 싶어 교체했는데 아니었다. 가장 간단한 건 도어록을 교체하는 일일 것이다. 알지만 귀찮아서 나중으로 미루고 싶다. 이런 사소한 것에도 온 신경을 다 쓰면서 죽고 사는 일 아니면 괜찮다고 내뱉고 있으니. 나란 인간은 참...


미루고 싶은 일처럼, 미루고 싶은 감정이 있다. 미루고 싶은 슬픔, 미루고 싶은 마음, 나중에 알면 괜찮아질 것 같은 일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란 서정적인 제목의 시집에서 만난 시도 그러했다. 슬퍼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을 다스리고 다독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 마음이 훤히 보여서 안쓰럽다. 원래 그런 마음은 감출 수 없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울고 싶은 면 울고 싶은 대로 그렇게 놔둬도 좋다고.



슬픔이 바나보다 빨리 익는다

두면 먹겠다 싶었는데 한 개는 끝내 검게 변했다

생긴 건 저래도 맛은 있단 걸 잘 알지만

보기 좋은 슬픔이 울기도 좋은 걸 누가 모르나

손도 대기 싫어지고

한 겹 까기 전에 으깨진다

이거 갈아 먹으면 맛있어

믹서에 집어넣고 꿀을 한 바퀴 돌린다

같은 거라도 다르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다르게 만드는 재주로 슬픔도 요리할 수 있겠니

컵에는 삼키니 힘들 게

걸쭉해진 것이 담기고

먹는 건 나의 일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만

잘 먹고 그다음 잘 살고가 여태 어렵다

갈고 으깨고 때론 무언가 한 바퀴 돌려 뿌리면

못 살고 못 먹을 슬픔도 없지 않을까

상하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고

사람은 그런 거라고 말하는 너의 얼굴에

톡, 톡 검버섯 많아지는 걸 보니

당신이 두고 잊은 세월을 내가 반만 나눠 익고 싶었다

(「슬픔이 익을 동안 나워 잊을까요」, 전문)


슬픔이 익으면 슬픔이 아닌 게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슬픔을 둘러싼 뽀족한 가시들이 조금 뭉툭해질 것이다. 슬픔의 원형은 그대로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시선, 그걸 매만지는 손길이 달라진다. 시인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런 시를 쓰는 것이리라. 소중한 사람의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소중한 사람의 슬픔이 잦아들기를 바라서.



웃음처럼 울음처럼 졸음처럼

숨길 수 없는 현상이야 그러니 아파하지 않아도 될지 몰라

그러니 재채기처럼 애쓰지 않아도 될지 몰라

화를 내보는 것도 좋겠어

술래가 된 듯이

바통을 넘겨받은 것뿐이야

이제 이건 너의 것이란다

나를 대신해 살아주렴 살아서 사는 걸 대신하렴

생일은 축하받는데

기일은 왜 그러지 못할까

축하받는 탄생만 있는 건 아니지

그래 축하받는 죽음도 있긴 하잖아

그 사람은 끝까지 그 사람은 끝내

그랬지 그랬다

병은 앓으면 그만이고

슬픔은 울면 그만인데

죽음은 왜 지속되기만 하는 걸까

돌아갈 집이라도 있는 듯

과자를 울음처럼 뚝, 뚝 떨구는 중이었다

부츠 컷 바지가 다시 유행이래

그저 웃다가, 아득해지다가

아픔은 다른 아픔으로 잊히는 거래도

피할 때까지 피해보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한 명은 피했으니까

(「행복의 유행」, 전문)

그러니 이 시집은 상실을 대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일,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상이며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는 거라고.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며 시인 스스로의 고백이자 같이 살아가지는 다짐 같은 것처럼 읽혔다. 어떤 일은 나에게만 닥치는 불행과 불운처럼 여겨져 화를 내고 분노하고 울분을 토해내지만 실상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사는 건 버티는 일이고 사는 건 쌓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일이라는걸.





밀어도 열렸다

하지 말란 건 꼭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 말란 말이 끝나기 전에 해버린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을 여는 건

밀고 당기는 힘만으로 역부족이다

사람은 막는 것이었다

여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잠가두었다

그때 부탁이 있다 했다

잊지 말라고 했다

강력한 태풍이 북상중

창문마다 신문지를 붙이다

네가 아닌 너의 이름을 본다

더 버티기로 한다

(「당기시오」, 전문)

한가득 슬픔을 껴안고 슬픔과 함께 살아간다. 누구의 슬픔이 더 크고 위대한지 중요하지 않아. 그건 알 수도 없는 일이니까. 슬픈 채로 살아가는 일상, 온갖 감정을 쌓아두고 살아가는 일상, 언젠가 폭발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일상이기도 하다. 그 모든 감정이 출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비밀인데요

친구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이를 닦다 울었습니다

이를 닦을 힘이 남은 게 부끄러워서요

아직 누굴 사랑할 용기가 남았단 거니까요

내 숨이 조금은 더럽지 않았으면

하는 다짐처럼

웃기는 일이에요

웃진 않고 있지만요

죽음 같은 걸 생각하다

내 몸을 치울 걱정을 합니다

이런 걱정을 하지 않게 할

어떤 걱정을 힘껏 떨치면서

거품을 뱉습니다

그제야 알아요

거울을 보지 않았군요

헹구지 않은 슬픔이 쌓이고

안 치운 플라스틱도 가득해요

오늘은 수요일

내일은 종이를 내놓는 날이에요

치우기 어려운 건 미루기로 해요

언제가 좋을까요

언제 다 내놓을까요

(「수거」, 전문)



때가 되면 차분해진다. 때가 되면 모든 걸 말할 수 있고 때가 되면 모든 게 제 자리를 찾는다. 다만 그때를 기다리는 게 고통이다. 영영 오지 않을까 두려워서, 조바심이 나서, 몸부림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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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8-2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괜찮다는 말 그 속에 담긴 뜻이 결코 가볍지 않고, 또 그렇게 생각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잖아요. 자목련 님의 안쓰러움을 담은 진심이 글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더욱 와닿네요.

자목련 2025-08-31 09:52   좋아요 1 | URL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모든 게 분명해지더라고요.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도 그렇고요. 그런데 단순함이 참 어렵습니다. 곰돌이 님, 시원하고 맑은 9월 맞으시길 바라요!

거리의화가 2025-08-2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쌓아둔 일거리, 쌓아둔 감정... 이 글귀에 오늘은 콕 박힙니다.
저는 평소 감정을 꾹꾹 눌러놨다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러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감정의 문을 닫아버리거든요. 이런 걸 몇 번 반복해서 고쳐야지 하면서도 참 쉽지는 않습니다.
사는 건 별 게 맞는 것 같아요.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갈 뿐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기를 바라지요. 도어락은 문제는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자목련 2025-08-31 09:56   좋아요 0 | URL
감정을 돌보고 다스리는 일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도어락은 달래며 요령을 터특하는 중입니다.
쌓아둔 일거리(세탁기)가 저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ㅎㅎ
산책하기 좋은 9월, 산뜻하게 시작하세요!

구단씨 2025-08-3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가 되면...
아는데, 그 때가 되면 까지의 시간이 너무 힘들어서 기다리는 일이 버거울 때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때가 되었는데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일을 겪을 때마다 또 한 번 더 힘들어지고요.
리뷰 끝의 문장처럼, 조바심이 나서 몸부림치는 시간을 우리는 또 견뎌야 하네요. 그렇게 살아가고요.

더운 여름이 언제 끝나나 싶은 마음으로 또 ‘견디는‘ 날들이었어요.
8월이 이렇게 끝나고 있네요.

자목련 2025-09-06 11:38   좋아요 0 | URL
그쵸, 그 때가 되면 또 다른 때를 기다려야 하고. 그게 반복되는 것 같아요. ㅎ
9월인데 매미는 여전하고요. 그래도 시원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