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이, 대체로 맑음 - 날씨만큼 변화무쌍한 중년의 마음을 보듬다
한귀은 지음 / 웨일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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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눈부신 봄날만 봄날이 아니다. 그저 조금만 따뜻해도 된다. 손바닥만 한 양지만 있어도 된다. 숨 쉴 만큼, 함께 이야기 나눌 만큼의 바람만 있으면 된다. 그런 날이 많지 않아도 된다. 봄날이 그런 것이라면 중년을 넘어도, 더 나이가 들어도 간혹 와준다. 그게 생(生)이다. (58~59쪽) 

 

 다시 봄을 맞았다. 감사한 일이다. 감사의 뒷면에는 불안이 안착해있다. 올해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 나이가 드니 괜한 근심 걱정만 늘어나는 것이다. 그저 작년과 다름없이 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 더 괜찮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해서다. 아픈 곳이 늘어나고 병원과 더 친해져야 하는 걸 아는데도 그 친함을 미루고 싶은 거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지금이 제일 좋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이 그러하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미래를 앞당겨 살 수도 없으니 말이다. 지금을 사는 것, 그게 생이라는 걸 안다. 다만 변덕스러운 감정을 다스리고 싶은 마음과 소멸하는 감정을 살리고 싶은 마음의 균형을 잘 잡고 싶은 것이다. 한귀은의 글처럼 균형잡기가 필요하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노력, 흔들릴 때마다 균형을 잡고 제 길에 서거나 다른 길로 이동하는 것. 어쩌면 인생은 그런 균형잡기의 반복인지도 모르겠다.

 

 한귀은의 『오늘의 나이, 대체로 맑음』은 대체로 편안했고 제목처럼 맑음이었다. 편안과 맑음의 정의를 누가 내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리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아니 그건 누군가 내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한귀은의 산문을 꾸준히 읽었다.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번에도 즐겁게 읽었다. 어려운 문구나 포장된 지식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 그 안에서 발견하는 작고 소박하지만 소중한 사유가 빛난다.

 

 나이가 들고 젊음과 청춘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중년, 혹은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때로 직설적으로 때로 다정하게 때로 호쾌하게 들려준다. 그녀 스스로 거쳐온 감정의 시행착오나 여전히 견디는 우울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크게 변화하지 않았지만 예전의 글과는 다른 느낌도 있다. 그건 시간의 힘이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아프고 병든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다라 달라진다. 다 아는 이야기 같지만 편두통으로 고생한 이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어느 나이에 접어들면 누구나 저마다의 병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니까.

 

 내가 느끼는 행복은 별 게 아니다. 그저 ‘다행이다’ 싶은 게 행복이다. 덜 추워서 다행이다, 덜 더워서 다행이다, 덜 피곤해서 다행이다, 덜 아파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놓고 그것을 피하면 행복하다고 해석하는 거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해석’에서 온다. 몸의 통증도, 마음의 통증도 다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할 대상이다. 통증을 해석하고 나니 통증에 대한 두려움도 좀 사라진다. 통증에 대해 알게 된 셈이다. 무릇 아는 것만큼 자유로워지는 법이다. (31쪽)

 

 백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다. 점점 내가 수긍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사회를 보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부분에 공감하고 살아야 하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아이와 조카에게 느끼는 세대 차이, 어느새 나의 의견은 무시당하고 목소리는 작아진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고 싶고 그 모습을 상대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친구나 지인과의 통화나 만남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좌절하고 울적해질 때가 많다. 이런 나를 한귀은의 문장이 달래주었다. 공부를 하면서 글을 쓰고 그로 인해 가치를 찾았다는 글이었다. 물론 그녀의 글쓰기와 나의 글쓰기는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글쓰기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굉장히 기뻤다.

 

 공부가 글을 쓰게 했다. 지금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에 대해 쓴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애쓰는 것이 내겐 글쓰기다. 사랑과도 비슷하다. 사랑도 그를 알아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알고 싶어서 사랑하는 거다. 알아가면서 사랑하는 거다. 자꾸 새로운 것을 알게 되니까 사랑을 그칠 수가 없다. 글쓰기도 그렇다. 알고 싶어서 쓰고, 알아가면서 쓰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멈출 수 없게 된다. (91쪽)​ 

 

 우리는 작가의 삶은 우리의 그것과 다를 것이라 예단한다. 하지만 사는 건 고만고만하고 한귀은의 삶도 다르지 않아 일상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더욱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층간 소음으로 정중한 편지를 써서 부탁을 했지만 결국엔 이사를 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이야기, 인터넷에서 셀프 컷 동영상을 보고 따라 했다가 아침 일찍 미용실로 향한 이야기, 인문학 강의에 온 주부들과 나눈 대화, 어린 제자의 결혼 소식에 걱정이 아닌 응원을 건네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 교수라는 자리를 생각하면 조금 더 철학적인 소재의 접근이나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자신에게 아들을 너무 사랑한다고 걱정이라는 엄마, 손녀딸과 딸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답을 못하는 아버지.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 일상은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더 그녀의 우아한 수다에 빠져들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거기에 늙어가면서 만나는 복잡한 감정을 나누고 같이 웃고 울수 있는 친구 같은 글이다. 좋은 할머니가 아닌 동시대의 삶에 고민하고 참여하고 감사해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글에는 무언의 감탄사를 마구 외친다.

 

 어쩌라고 하는 상태가 될 때도 있다. 그때도 희망이 없지 않다. 마지막에 힘을 한 번 더 끙 하고 내보는 것이다. 어쩌라고는 두려움을 떨쳐내는 소리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일말의 잘 될 거라는 믿음으로 기운을 내게 하는 기합인 것이다. 얍, 어쩌라고! (242쪽)

 

 어떤 나이를 살든 그 삶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찾아온 봄날을 놓치지 말고 안아주고, 늙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두려움이 아닌 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삶에 대해 기대를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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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6
강상중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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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겨우 두 권 읽었다. 미완의 소설 『명암』과 단편과 수필이 수록된 『긴 봄날의 소품』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 나쓰메 소세키의 매력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대신 책장에는 아직 그의 책이 많이 있으니 조만간 그를 더욱 좋아할 거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이런 확신은 강상중의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에서 얻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생과 그의 문학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성에 대해 알려준 책이라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재일작가 강상중이 자신이 좋아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 알려주고 설명해주는 책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양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군상의 이야기『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산시로』, 『그 후』, 『문』과 『마음』을 어렵지 않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나 소세키의 상황이나 심리적 상태도 언급하면서 자신의 느낌을 들려준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쫓아 생활하는 일본에 대한 풍자나 비판,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사건을 자연스럽게 소설 속으로 가져오고,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녹여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앞의 세 권 『산시로』, 『그 후』, 『문』은 차례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순차적으로 주인공의 나이가 많아지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까. 얼핏 세 편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관계와 그들이 겪는 갈등도 비슷하다. 놀라운 건 소설 속 인물이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0년 전의 소설인데 말이다. 멘토를 만나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곁을 맴돈다. 소세키의 연애관이나 세계관도 마주한다.

 

 거장이라서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안내서가 될 책이다. 소세키를 읽기로 계획한 이라면 이 책도 곁에 두고 같이 읽는다면 좋을 것이다. 먼저 이 책을 읽고 소세키를 읽어도 좋을 듯하다. 내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는 스포일러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확신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소세키가 사랑받고 많은 이들이 그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상중의 이런 글이 답이 될 거라 믿는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와도 같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세키는 우리들보다 앞서 문명사적인 사건과 끊임없이 마주 해온 ‘선배’입니다. 그런 가운데 소세키는 심플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비극이나 절망에 빠져도, 눈물을 삼키고 앞으로 나가가겠다는 ‘각오’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각오를 짊어지는 개인은 그저 고독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고 또한 전해져 내려가는, 무척이나 커다란 ‘생명’의 흐름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인 것입니다. 결코 끊어지지 않는 이 ‘생명’의 흐름을 어떤 의미에서는 ‘혼의 상속’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마음』을 읽다, 147~149쪽)

 

 종종 문학(소설)을 왜 읽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선뜻 대답을 찾지 못할 때가 많다. 단순하게 재미를 찾아서 읽기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라 읽기도 하는데 강상중의 글을 빌려야겠다. 한 권의 같은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룰 때 똑같은 의견은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문학의 힘은 다채롭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문학이란 그 자체에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쓰는지,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생각함으로써 다양하고 풍요로운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다양성을 가진 소세키는 시로 그러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단순히 유머러스한 작가도 아니며 경박한 사회비평가도 아닙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부조리함을 통렬히 느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사회에서 소세키의 의미는 더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명사회는 위태롭다」, 60쪽) 

 

 내 책장에는 아직 『마음』이 없다. 곧 채워질 것이다. 강상중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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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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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상을 향한 애정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오롯이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용기. 한탸의 삶을 만나면서 스토너가 떠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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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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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테니까. (11쪽)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16쪽) 

 

 한 사람의 생을 하나의 단어로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삶을 산 것일까. 아니면 후회 없는 생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일까.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이런 생각을 불러왔다.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에서 일하는 남자 한탸, 그는 습기로 축축한 지하 공간 때로 쥐가 출몰하는 더러운 공간에서 책과 폐지를 압축하며 살고 있다. 책 더미에서 귀한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며 말이다. 그의 삶은 오직 책과 폐지, 그리고 맥주가 전부다. 외부와 단절한 채 자신의 내부로 파고드는 삶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충분한 삶이었다. 은퇴 후 압축기를 장만해 외삼촌의 정원에 둘 계획까지 세웠으니까.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안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19쪽)

 

 책으로 둘러싸인 삶이었지만 그가 마주하는 책은 쇠락의 유품이었다. 더 이상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삶을 말해주는 것들이었다. 그 안에서 한탸는 작업을 하면서도 책을 읽는다. 소중하게 건져올린 장서들을 집으로 가져와 읽고 또 읽는다.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반복되는 일상이 전부처럼 보였던 소설에는 한탸의 외로움과 고독이 가득했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의 삶도 그러했다. 폐지를 가득 담아오는 집시 여인들과 폐지 더미에서 자신의 책을 찾기를 바라는 철학교수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한탸와 소통했다. 소장은 그런 한탸를 질책하며 새로운 압축기 소식을 전한다. 지금껏 한탸가 해왔던 작업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을 압축하고 정리하는 기계였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한탸는 절망한다.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누르며 반복했던 일들이 컨베이어가 대신하고 젊은 노동자들은 우유와 코카골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심지어 그들은 휴가 계획까지 세운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걸 통감한다.

 

 저 거대한 압축기가 다른 모든 압축기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직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매 꾸러미에서 책을 한 권씩 골라 보너스로 준다 해도 나는 거기서 끝장이었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91쪽)

 

 변화를 받아들이고 과거를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탸는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상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한탸가 사랑했던 만차는 달랐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닥친 두 번의 시련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한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 홀로 고독사로 발견된 외삼촌, 한때 사랑했던 집시 여인, 그리고 책과 폐지도 곧 사라질 것이다.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한 남자의 인생일 거란 예상을 벗어나 인간의 고독에 대해 집중하게 만든다. 30여 년 전에 한탸가 느꼈을 공허와 쓸쓸한 인생은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우리네 그것과 같아 보였다. 모든 것은 소멸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하고 기억하려는 아름다운 노력은 영원하다. 한탸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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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감동하는 건 쉽다. 그 뒤에 감춰진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이기에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고 안다고 해서도 안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경우 특히 그러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전쟁을 알고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일상과 광기의 역사를 글로 읽어내는 일은 힘겹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거기 있기에 말이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주인공 도리고가 최초의 기억 속 빛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전쟁과 함께 살아가는 지독히 아픈 삶을 들려준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생생한 전쟁의 현장을 중계하는가 하면 전쟁의 모든 기억은 잊은 듯 살아가는 전후 생존자의 현재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치 전쟁은 꿈이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도리고를 비롯한 모두는 자신의 몸과 영혼이 기억하는 전쟁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도리고 앞에 나타난 동백꽃의 여인 에이미와의 만남만이 꿈이 아닌 현실은 아니었을까. 도리고에게는 약혼자 엘라가 있었고 에이미에게는 남편 키스가 있었다. 비밀스럽게 만남을 유지하는 도리고와 에이미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배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으로 채워진 전쟁터였다.

 

 도리고의 부대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타이-미얀마 간의 철도 건설의 노역에 투입되었다. 의사였던 그는 직접 노역 현장에 동원되지 않았고 환자를 돌봤다. 콜레라와 괴질과 각기병으로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병사를 살리기 위해 그들을 현장으로 내모는 일본 장교 나카무라와 대치한다. 무조건 철도(라인)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본군에게 폭력은 의지와 실천이었다. 다치고 병든 포로를 철로로 이끌어내야만 했다. 포로들에게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며 동료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삶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도 동료의 죽음이었다. 함께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한 이들의 환영이 그들 곁을 맴돌았다.  

 

 인간은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이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삶의 가장 고귀한 형태는 자유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름이 구름답게, 대나무가 대나무답게 사는 것. (375쪽)


 라인은 망가졌다. 모든 선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모든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 의미와 희망을 갈망했지만, 과거 기록은 오로지 혼란만이 가득한 흐릿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375쪽)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의 삶을 어떻게 지속되었을까. 도리고를 비롯한 포로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물과 진흙탕에서 어떻게 견뎌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동료의 죽음에 나팔을 부는 것으로 애도하며 지낸 시절은 절대 기억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었다. 일본인 나카무라는 전범 재판에 회부될까 두려워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착한 아내를 만나 딸을 낳고 좋은 아빠가 되기로 한다. 고타 대령을 만나 도움을 받았지만 가족에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일본 장교로 포로를 학대하던 그 시절은 그게 선(善)이었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것만이 나카무라를 살 수 있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한 것이 바로 시詩인데, 천황 폐하는 그 자체로서 시였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는 우주를 모두 포함했으며, 모든 도덕과 고통을 초월했다. 위대한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천황 폐하라는 시 또한 선과 악 너머에 있었다. (478쪽)


 나카무라가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살았듯 도리고 역시 그러했다. 완벽한 아내와 가정, 성공한 외과의사이자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며 살았다. 에이미를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아닌 척 연기했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났지만 사랑이 아닌 단순한 유희였다고 자신했다. 현재의 고독과 허무의 허기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지난 삶을 회상하는 것뿐이었다.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생각한다. 전쟁에 휩싸인 삶, 전쟁이라는 감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으면서 앤서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과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모두 문학상 수상작이다. 풀리처 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전쟁, 언제 폐허가 될지 모르는 순간을 견디는 인물을 그렸다. 리처드 플래너건과 헤르타 뮐러의 소설에는 포로의 시간이 겹친다. 앤서니 도어와 헤르타 뮐러의 소설에는 소년과 소녀가 등장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속 도리고에 비하면 아이들이 감당할 공포는 우주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속 주인공은 눈먼 소녀 마리로르와 고아 소년 베르너다.


 전쟁이라는 가장 참혹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들을 위로할 누군가(무엇)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고에게는 병사들이, 마리로르에게는 라디오(소리)였고 레오에게는 손수건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일. 도리고가 가슴에 품은 여인 에이미, 눈이 보이지 않는 딸을 위해 집과 거리를 모형으로 만든 아버지, 레오를 기다리는 가족. 세 권의 소설 모두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다. 너무도 섬세하고 생생하게 담아냈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아픈 소설들이다. 소설이면서도 소설이 아니라서 독자는 읽으면서 고통을 느낀다. 누군가의 가족이 전쟁의 현장에 있었다는 걸 알기에.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선을 그리며 흘러나온다. 침대 겸용 소파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 따뜻하게 있으면서 배불리 먹는 것,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는 문장들을 만끽하는 기분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권, 207쪽)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숨그네』, 17쪽)

 

 전쟁은 끝났다고 이제는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일상을 지배한다. 피할 수 있었으면 피하고 싶었을 삶이었을 것이다. 숨 막힐 듯 호흡을 흔드는 문장 속으로 빠져들다가도 문득 그들을 생각한다. 내가 누리는 이 안온함, 내가 보는 세상의 빛, 깊게 잠드는 밤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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