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샀다. 출간을 기대했고 기다렸던 책을 샀다. 계획 구매는 잘 한일이다. 사려고 했던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구매했으니까. 그렇게 산 책은 황정은의 『작은 일기』와 김이설, 이주혜, 정선임의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 두 권이다. 나머지 안희연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에이모 토울스의 『테이블 포 두』 두 권은 충동적으로.

황정은의 신간이 나오는 건 몰랐다. 알림 설정이 알려주었다. 그에 비해 다람 출판사의 ‘얽힘’은 기다렸던 신간이다. 김이설, 이주혜의 단편을 읽고 싶기도 했고 작가들이 서로에게 던진 질문과 답변을 담은 「얽힘 코멘터리」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안희연의 시집은 여름이면 장바구니에 넣었다 사라지는 책이었다. 여름이면 생각하는 시집, 여름에 구매가 늘지 않을까 싶다.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은 『모스크바의 신사』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샀다.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다. 충동은 이래서 별로다. 언제 읽을지 모를, 반드시 읽게 될지 알 수 없는 목록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무튼 도착한 책을 보는 일은 좋다.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를 하는데도 충동적인 구매를 한다. 오프라인 서점을 방문하지 않는 게 다행인 걸까. 아무튼 오늘도 시를 한 편 읽어보자.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건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건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거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나날이 쪼그라드는 고독들을 (「호두에게」, 전문)

시집을 훑어보다 나를 이끈 시는 표제작이 아니었다. 어떤 시간, 어떤 날들, 호두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를 생각한다. 처음부터 단단한 호두였을 리 없는데. 잊는다. 끝내 호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도 있을 텐데. 호두를 볼 때마다, 호두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이 시가 생각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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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5-07-0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정은의 신간은 곧바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습니당….작가님은 소설도 얼른 출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자목련 2025-07-10 10:58   좋아요 1 | URL
실은 소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blanca 2025-07-0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고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설레요.

자목련 2025-07-10 11:00   좋아요 1 | URL
김연수의『너무나 많은 여름이』처럼 깜짝 출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blanca 2025-07-10 11:01   좋아요 0 | URL
헉, 저도 딱 그 생각 했어요. 김연수 작가님 분발해 주세요!

관찰자 2025-07-0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황정은 신간 소식 너무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5-07-10 11:00   좋아요 0 | URL
우리 함께 읽어요!

다락방 2025-07-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댓글 황정은 신간소식으로 대동단결이네요. 저도 황정은 신간 소식을 이렇게 자목련 님 페이퍼로 알게 됩니다. 후훗.

자목련 2025-07-10 11:00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어쩌다 보니 황정은^^

서니데이 2025-07-09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알림이 되어있으면 빨리 알 수 있어 좋은것 같아요. 자목련님 시원하고 좋은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5-07-10 11:01   좋아요 0 | URL
알림이 많아서 걱정이지요 ㅎ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느리게 가는 마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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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인다고 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살고 있다. 속내는 멈춤 그 자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럴 수 없기에 천천히 느린 속도로 산다. 빠르게 가라고 재촉하는 이가 없는데 왜 마음은 불편한 것일까. 이런 마음은 괜찮다고 나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소설을 읽었다. 윤성희의 단편집 『느리게 가는 마음』를 읽으면서 마음속 더위를 날려주는 바람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익히 알았던 윤성희의 소설이 주는 기쁨을 만끽했다. 삶의 슬픔과 불운에 대해 수군대고 혀를 차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다며 달래는 유머.


우리의 삶 전체를 행운으로 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에도 그런 삶의 주인공은 없다. 누구나 누군가를 잃고 상실과 동행하며 죽음을 두려워한다. 다만 견디는 것이다. 켜켜이 쌓여있던 슬픔을 지켜보고 알아주는 소중한 이와 함께. 『느리게 가는 마음』 속 8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 곁을 지키는 이들처럼. 혼자가 아니기에 소설의 주요 키워드인 생일을 축하하는 이들이 있기에 살아간다.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 인물의 구성이 윤성희 소설의 장점이다. 처음부터 특별하고 끈끈한 관계가 아닌 시간이 지나 단골이 되고 우연한 만남의 연속으로 친밀해진 사이라고 할까.


사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8편의 이야기는 슬프고 우울하다. 가장 가까운 이의 부재를 견디며 살아간다. 죽은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아빠에게 엄마가 남긴 마지막 김치라는 걸 모르고 매일 먹는 김치볶음밥을 그만 먹고 싶다고 말하는 아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딸의 생일에 가장 좋은 그릇을 꺼내 생일상을 차리고 콜라를 따라주는 엄마, 혼술 유튜버의 영상에서 죽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그 식당을 찾아가는 아들.


때문에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기억을 떠올리고 축하를 건넬 수 있는 생일이라는 장치는 유용하다. 잘 모르는 사이여도 반갑게 축하를 해주고 거짓으로 생일이라고 말해도 식당에서는 미역국을 내준다. 외할머니의 생일이라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있고 지난 시간을 이야기한다.






이쯤에서 표제작 「느리게 가는 마음」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암 투병 중인 엄마 대신 나를 살피고 챙기는 이모와 함께 느리게 가는 우체통을 찾아간다. 이모가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보낸 엽서를 찾기 위해서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결혼해서 엽서를 받으면 안 될 상황이다. 이모의 엽서를 찾다가 다른 이의 엽서를 읽게 되는데 자신에게 보낸 내용이 많았다. 1년이 지나 자신에게 도착할 마음.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모한테 엽서에 적힌 사연들을 몰래 읽어봤다고 고백했다.

“뭐 근사한 내용 있었어?”

“거의 비슷비슷하던데. 별거 없더라.”

“그치. 별거 아니지. 그런데 또 별거지.” (「느리게 가는 마음」, 98쪽)


별거 아닌데, 별거인 것. 남편이 죽고 음식 하기가 귀찮았는데 자신들이 맛있는 거 먹으려고 식당을 시작했다는 할머니들의 말도 비슷하게 다가온다. 시골길에서 느리게 가는 만물트럭에서 생일 케이크를 발견하는 우연. 남녀노소 나이와 상관없이 축하할 수 있는 날, 생일. 아픔과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우선은 축하로 시작할 수 있는 생일이 있다는 게 참 좋다.


친구 윤석에게 생일이 아닌데 생일 축하 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해피 버스데이」의 ‘나’도 그랬을 것이다. 구내식당의 미역국과 잡채를 먹으며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덕분에 직장 상가의 단골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는데 그곳에서 가스폭발 사고를 당한다. 크게 다치지 않는 나는 항상 동생에 비해 운이 나쁘다고 여겼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생일 축하 인사를 받을 수 없는 동생을 떠올리며 동생의 흔적을 찾는다. 그러니 엉뚱하게 생일이 아닌 날에 생일 축하를 하고 그런 축하 인사를 받고 싶다. 생일이 아니어도 생일처럼 보내는 하루, 그런 하루가 있어 다른 힘겨운 하루가 살만해질지도 모르니까.


“생일 축하해.” 나는 윤석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 생일은 아직 멀었어.” 윤석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 생일처럼 지내라고 말했다. 점심에 미역국도 사 먹고 저녁에는 케이크에 촛불도 밝히라고. (「해피 버스데이」, 192~193쪽)


생일에 아빠가 미역국을 끓여주지 않아 가출하는 소설 속 십 대 청소년이 아니라서 그런가. 나이가 들면서 생일을 챙기는 일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미역국을 챙겨 먹지도 않고 케이크를 사지도 않는다. 돌이켜보면 어려서는 가족이나 친구가 생일을 챙겨주기를 바랐다. 생일을 챙기는 일, 나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다. 문득 언젠가 나의 부재에도 나의 생일을 챙기는 이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매일을 생일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생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도 좋겠다. 생일이라는 이유로 실수나 잘못을 용서받고. 누군가 세상을 떠나는 날, 누군가는 태어나는 것처럼 죽음과 상실의 자리에 기쁨과 축하로 채워질 것이다. 다시 또 삶은 그런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오늘 생일을 맞는 누군가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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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을 주문했고 풍성한 수국이 도착했다. 여름은 수국이 제철이니까. 정말 풍성한 수국이다. 네 송이가 제법 무겁다.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수국 뒤에 숨어도 좋겠다. 습하고 습한 여름, 청량한 기운을 선사하다. 그래서 여름이면 수국이 떠오르는지도 모른다.





책도 한 권 샀다. 심보선의 시집 『네가 봄에 써야지 속으로 생각했던』이다. 기다리는 책은 황정은의 에세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책장의 마지막 책들은 시집일지도 모르겠다. 시집은 쉽게 정리하지 못하니까.





여름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마냥 좋아하기는 어렵다. 더위에 취약하고 땀이 너무 많다. 맛있는 자두를 고르고 있다. 온라인으로 고르고 있으니 맛있는 자두를 먹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파트 앞 마트엔 과일이 없다. 있어도 싱싱하지 않고 선뜻 구매할 수가 없다. 주저하다가 사장님께 마트가 문을 닫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오며 가며 상가 공실을 많이 보는데 폐업으로 가는 과정을 직접 마주하니 씁쓸하다. 심보선의 이런 시가 모두를 달래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다정함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정함이 전해지길.


기억의 소실을 응시한다

그 안에 새와 새 아닌 것들이

다 함께 웅크려 있다

날개가 있다고 다 새는 아니고

그 중 다정한 것만

꿈 안에 깃들 수는 없다

내가 너를

신화 속 존재처럼

소중히 여긴다 한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른다

나는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놓친다

꿈이라면

꿈이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너를 오로지 체온으로만 기억한다

따사로움이여

따사로움이여

그토록 아름다운 꿈을 꿨는데

너에게 보여줄 수 없다니

(「다정하고 따사로운」, 전문)





가만히 있으면 더위를 견딜 수 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면 땀이 난다. 땀을 날려줄 바람을 기다린다. 에어컨이나 선풍기의 바람이 아닌 자연 바람. 기다림이 길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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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7-02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더운데 자두의 맛은 오묘하네요.

자목련 2025-07-03 10:11   좋아요 0 | URL
어제 도착한 자두는 꽤 달아요. 우선은 단맛에 취하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5-07-02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습한 여름이에요. 풍성한 수국을 보니 화사하니 꿉꿉함이 잠시 사라지는 듯합니다.
주중에는 낮에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데 어제, 그제 걸어보니 이건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오늘은 건너뛰었습니다^^;
땀 많은 계절인데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요.

자목련 2025-07-03 10:12   좋아요 0 | URL
당분간 점심 먹고 산책은 쉬어할 것 같아요. 너무 더워요.
화가 님의 여름이 건강하고 다정한 날들이길~~

페넬로페 2025-07-0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일을 너무 좋아해
수국과 자두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자두를 선택할 것 같아요.
아름다운 수국수국함은 자목련님의 글에서 충분히 느끼고
얼른 달콤한 자두를 먹고 싶네요.
습한 여름이 시작되었어요 ㅠㅠ

자목련 2025-07-03 10:14   좋아요 1 | URL
아침에 달콤한 자두를 몇 알 먹었어요. 잘 고른 것 같아요 ㅎ
습하지만 뽀송뽀송한 날들이면 좋겠어요^^

푸르리 2025-07-0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의 아름다운 모습 잘 감상했어요^^ 마음이 삭막해져 수국이 피었는지도 몰랐네요. 예쁜 수국과 시 감상 잘 하고 갑니다.

자목련 2025-07-03 10:15   좋아요 1 | URL
수국을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머무는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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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선 길을 잃기 마련이다. 두렵거나 무섭다기보다 처음 간 곳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길을 찾으면 그만이라고. 돌아갈 곳이 있으니 괜찮다고. 그러나 돌아갈 곳이 어딘지 잃어버리고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걸 발견하면 절망에 빠진다. 도움을 청해야 할 이가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폴 윤의 단편집 『벌집과 꿀』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러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고 길을 나선다. 정착한 듯 보이지만 뿌리를 내린 적 없다. 원망할 대상은 사라졌고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들의 여정(여행이든 이주든)은 고단함을 넘어 고독하고 쓸쓸하다. 때문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인을 돌본다.


첫 번째 단편「보선」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교도소에 갔다가 출소한 ‘보’의 이야기다. 교도소에서 만난 이의 소개로 낯선 동네의 카지노에서 일한다. 집과 카지노를 오가는 게 전부인 어느 날 동료의 잃어버린 아이를 찾다가 주인집 딸과 마주한다. 그녀에게도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족이 있지만 가족과 살지 못하고 집을 원하지만 집을 갖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마음 한편에 자리한 감정을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자신이 살아온 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코마로프」 속 탈북한 뒤 이곳저곳을 떠돌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나이 든 여자 ‘주연’의 사연, 런던 외곽 한인타운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크로머」 속 탈북 한인 2세 부부의 이야기.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는 주연은 사람들이 아들이라 말하는 남자에게 진짜 엄마의 주소를 전하고 한인 2세 부부는 길을 잃은 아이가 신경 쓰이고 걱정된다.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삶.


소설 속 인물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한 한국계 디아스포라들이다. 「보선」, 「코마로프」, 「크로머」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지만 조선인 고아와 에도시대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역참에서」, 할아버지를 이어 사할린섬의 교도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고려인 십 대 소년 ‘막심’의 이야기 「고려인」, 러시아 극동 지방의 고려인 정착지에 임관한 러시아인 장교가 목격한 고려인의 삶을 보여주는 「벌집과 꿀」, 한국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의 이야기 「달의 골짜기」는 한국의 아픈 역사를 불러온다.







표제작 「벌집과 꿀」과 「달의 골짜기」는 짙은 여운을 남겼다. 내가 잘 모르는 역사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벌집과 꿀」의 고려인에게 러시아인 장교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외부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하나가 되어 뭉쳐야 했다. 고국을 떠나온 그들에게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은 그들뿐이라고 믿었을 테니까. 설령 무지한 믿음일지라도.


“우리는 아무도 원치 않고 관심도 없는 땅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벌집과 꿀」, 198쪽)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게 있지 않게습니까?”(「벌집과 꿀」, 199쪽)


전쟁의 상흔만 남은 고향 집을 고치고 혼자 살아가는 「달의 골짜기」속 ‘동수’에게도 다르지 않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지만 동수에겐 그곳이 집이었으니까. 땅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고 한 번씩 만나는 땜장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샀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전쟁고아인 남매를 거두며 살아간다. 결국엔 서로에게 상처로 남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매일 밤 여기서 달이 뜨고, 기울고, 부서졌단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냈지. (「달의 골짜기」, 250쪽)


그들은 살아내야 하기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을 개간하고 넓혀간다.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아간다. 어느 누구도 정확한 방향과 길을 알려주지 않지만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실패를 반복하며 방향을 찾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낸다. 그곳이 어디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진리에 기대어. 변하지 않는 그 사실은 여전히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나가가는 이들에게 애틋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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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능력인 문해력(文解力)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금일 오후에 만나자고 했는데 금요일 오후라고 여긴다거나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말에 제대로 사과를 하라고 한다든지. 상대가 전하는 말의 뜻을 다르게 해석하고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유명 연예인이 문해력 검사에서 중학교 수준이 나왔다며 문해력 공부를 하고 있다는 방송을 보고 나도 문해력 검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연예인이 문해력 수업을 하는 방송도 보게 되었는데 수업 중 나온 특질이란 단어를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지만 말하기 어려웠다. 아니, 나는 그 단어의 뜻을 몰랐던 게 맞다. 그런데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 같은 이에게 『우리말 나들이 문해력 편』은 안성맞춤의 책이 아닐까 싶다.

‘단어 한 끗 차이로 글의 수준이 달라지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책을 통해 새삼 알게 되었다.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도 말이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에서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뜻이 달라 헷갈리는 표현」, 2장에서는 「습관처럼 굳어 틀린 줄도 모르고 쓰는 표현」, 3장에서는 「문해력과 문장력을 동시에 높여주는 표현」을 알려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실생활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뜻이 달라 헷갈리는 표현」에서는 ‘갑절’과 ‘곱절’처럼 둘이 같은 뜻이 아닐까 싶은 ‘너비’와 ‘넓이’, ‘돋구다’와 ‘돋우다’ 말들과 뭐가 다른지 바로 떠오르지 않는 ‘밤새다’와 ‘밤새우다’, ‘신소리’와 ‘흰소리’ 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소개한다. ‘신소리’와 ‘흰소리’를 보면 이렇다. 신소리는 상대편의 말을 슬쩍 받아 엉뚱한 말로 재치 있게 넘기는 말이며 흰소리는 터무니없이 자랑으로 떠벌리거나 거드럭거리며 허풍을 떠는 말이다. 흰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되겠다. 그리고 신소리를 쉰소리로 잘못 쓰거나 잔소리와 같은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겠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잘못 알고 사용한 단어와 만났다. 세상에나 정말 창피한 순간이었다. 날씨가 개지 않고 흐린 상태는 ‘끄물끄물하다가 맞는데 나는 ‘꾸물꾸물하다’로 알았던 것이다. 한 번의 의심 없이 말이다.






「습관처럼 굳어 틀린 줄도 모르고 쓰는 표현」에서는 요즘처럼 더운 여름에 자주 쓰는 말‘ 겨땀’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 많은 이들이 겨땀이 표준어가 아니라는 걸 모르고 사용할 것이다. 겨땀이 아닌 ‘곁땀’이 표준어라는 걸 잊지 않을 것 같다. ‘밥 한 번 거하게 살게’라는 말도 틀린 말이다. 거하다는 산 따위가 크고 웅장하다는 말이고 넉넉하다는 뜻은 건하다. ‘밥 한 번 건하게 살게’, ‘아침을 건하게 먹었다’로 쓸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잘못 사용하고 있는 말이 ‘흡연을 삼가해주세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게 왜 잘못된 말이지 하고 생각하는 이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바른 표현은 ‘흡연을 삼가주세요’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문해력과 문장력을 동시에 높여주는 표현」에서는 정확한 뜻을 모르면서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들을 만날 수 있다. ‘미더운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분이 좋다면 ‘미덥다’의 뜻을 아는 사람일 것이고 뭐지 싶은 생각이 든다면 미덥다란 말을 모르는 것이다. 믿음이 가는 데가 있다란 말이니 주변 동료나 친구에게 사용해 보면 어떨까. 굳건하고 확실하여 아주 미덥다는 뜻의 ‘구덥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참되고 미더운 데가 있다는 뜻의 ’실답다’를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사투리도 외래어도 아닌 알고 보면 표준어」란 부록도 유익하다. 사투리로 착각하거나 비속어나 잘못된 말이라고 여겼던 말이 표준어라니. ‘까지다’, ‘빠대다’, ‘삐대다’, ‘싸대다’, ‘오지다’가 모두 표준어였다. 그럼 ‘아따’는 표준어일까? 맞다. 표준어다. 아따는 사투리가 아닌 무엇이 몹시 심하거나 하여 못마땅해서 빈정거릴 때 가볍게 내는 소리다.

매일 쓰는 우리말이 가장 어렵다. 새삼 확인한다. 『우리말 나들이 문해력 편』은 우리가 쉽게 사용하고 무심코 쓰는 말의 소중함과 문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이 아닌 사회적 소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말한다. 어떤 말을 쓰고 어떤 표현을 하느냐로 자신을 나타낼 수 있고 상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올바른 언어 사용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 책 한 권으로 자신과 가족, 친구의 문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봐도 재밌을 것 같다.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생소한 말이 많겠지만 스마트폰의 세상이 아닌 재미난 우리말의 세계에서 충분히 좋은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 꼼꼼하게 읽고 반복해서 읽는다면 풍부한 우리말을 쓰며 문해력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 과 함께 든든한 우리말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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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6-2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물끄물하다˝ 완전 충격인데요?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다 잘못 쓰고 있었네요.

자목련 2025-06-27 11:42   좋아요 0 | URL
잘못된 표현이라는 사실 조차 모르고 그냥 쓰고 있는 말들이 무척 많았어요.

잉크냄새 2025-06-2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흡연을 삼가주세요˝ 라는 표현에 적응하기는 금연보다 힘들 듯 합니다.
아마 대부분 ‘가‘와‘주‘ 사이에 ‘해‘를 끼워넣고 자신의 해박함에 흐뭇해할것 같네요.

자목련 2025-06-27 11: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삼가주세요라고 쓰면 말씀처럼 고치는 이들이 있을 것 같아요 ㅎ

젤소민아 2025-07-0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리버리‘도 틀린 말이고 ‘어리바리‘가 맞더라고요~~. 이런 책 정말 유용하고 유익합니다!

자목련 2025-07-10 11:23   좋아요 0 | URL
의심없이 맞다고 여기고 쓰는 말이 많더라고요. 청소년에게 권하고 싶은데, 아이들은 싫어하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