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리뷰해주세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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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화제의 중심에 이 책이 있다.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돋보이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작. 영화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자연스레 출판계로 이어져 여러 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의 책들이 다투어 출간됐다.  원작을 뛰어넘은 영화인지, 역시 원작이다일지 둘 중에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줘야 할까.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그 평은 나중에 해야겠다.
 
 이미 다 알아버린 줄거리, 단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내내 브래드 피트의 얼굴이 겹쳐진다. 자글자글한 주름을 한 얼굴로 유모차에 앉아있던 그 모습이 책속에 꽉 찬다. 동안 열풍이 생각난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벤자민 버튼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런 욕망을 가진 자라고 말하지만, 과연 벤자민은 행복했을까? 

 영화에선 젊어지는 벤지민과 반대로 늙어가는 그의 연인 힐더가드의 애틋한 사랑을 담았지만, 원작에서 사랑은 아주 작다. 남들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익살스럽게 그렸지만 그가 격었을 삶의 상실감의 무게가 크게 느껴진다. 할아버지가 유일한 친구였던 어린시절 마찬가지로 할아버지가 된 벤자민에게도 손자만이 유일한 친구가 된다. 마치 알몸으로 태어나 알몸으로 생을 마감하는 인생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놀라운 것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발상이다. 이런 기막힌 상상이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단편과 중편의 11편의 소설들은 개성이 뚜렷하다. 가장 무도회에서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작가의 코멘트를 읽고 나니<낙타 엉덩이>를 쓰고 있었을 신사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참아내기 어렵다. 당돌한 처녀의 나신의 등장하는 <도자기와 분홍>도 흥미롭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젊은이들의 문란한 습은 화려한 파티와 술집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1920년대 화려한 파티와 당당한 여성들의 등장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실적 묘사와 환상이 넘나드는 그의 소설은 좀 어지럽기도 하다.
 
 표제작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제외하고는 단연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가 최고였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전개 방식과 반전이 즐거운 단편이었다. 주인공 멀린이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사랑한 도도하고 아름다운 숙녀 캐럴라인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진정 그녀가 마녀였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화려했던 젊은 날이 지나고 늙어버린 날, 그제서야 알아버진 진실. 사랑도 삶도 물거품처럼 허무한 것인가.
 
<그는 이제 정말 노인이었다. 너무 늙어서 젊었던 시절을 꿈꿀 수도 없을 지경이었고, 세상의 휘황찬란함이 사라지고, 자식들의 얼굴과 따뜻함과 인생이주는 편안함에 기대기는커녕 시력과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로 늙어버렸다. 봄날의 저녁 무렵, 아이들이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와서 놀아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도, 그는 이제 미소를 짓거나 오랜 몽상에 잠길 수 없으리라. 이제는 너무 늙어 추억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 p 332  

 F. 스콧 피츠제럴드는 11편의 소설 모두를 친절하게도 설명을 해줬다. 그의 코멘트를 읽으면 단편에 대한 배경이나 그의 의도를 만날 수 있다. 1920년대 전쟁은 끝났고 전쟁을 겪은 젊은이들은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즐기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모습은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법. 극과 극의 소설들은 스콧 피츠제럴드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시대를 감싸고 흐르는 재즈에 몸을 맡기는 청춘을 그대로, 감정을 그대로.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다양한 소설을 만날 수 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다른 출판사(펭귄클래식, 북스토리, 노블마인)에서 나온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를 즐겁게 만난 사람,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그는 이제 정말 노인이었다. 너무 늙어서 젊었던 시절을 꿈꿀 수도 없을 지경이었고, 세상의 휘황찬란함이 사라지고, 자식들의 얼굴과 따뜻함과 인생이주는 편안함에 기대기는커녕 시력과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로 늙어버렸다. 봄날의 저녁 무렵, 아이들이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와서 놀아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도, 그는 이제 미소를 짓거나 오랜 몽상에 잠길 수 없으리라. 이제는 너무 늙어 추억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 p 332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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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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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사한 표지다.  경쾌한 타이핑이 문장으로 피어날 것 같다. 지금 내가 자판을 두드리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리라. 영어를 비롯하여 어떤 외국어를 못한다. 다만 그들의 문학을 좋아할 뿐. 번역을 잘못하면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우스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원문의 뜻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할 경우,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다. 현재 출판계는 영미문학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문학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고 있다. 20여년 번역을 해온 저자 이희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을 출간해 출판, 번역업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 작가가 되어 한국어 자체만을 놓고 씨름했더라면 한국어의 개성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어, 일본어, 독일어 같은 외국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다 보니 한국어의 남다른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했던 한국어답다는 개념이 차츰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 그러니까 이 책은 번역을 업으로 삼으면서 20년 동안 잡다한 번역을 해온 사람이 내놓는 한국어 임상보고서인 셈이다. > 서문

 책은 번역가라면 누구나 겪는 직역과 의역의 딜레마(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 시작으로  시를 번역하는 (20장 셰익스피어와 황진이가 만나려면)강의까지 총 20장의 강으로 구성되었다. 고교시절 영어시간을 떠오리며 대명사, 수동태, 접두사와 접미사, 등 문법에 대한 강의를 비롯하여 살빼기, 좁히기, 덧붙이기, 짝짓기, 등 맛나는 번역에 대해 썼다. 그리하여 번역을 시작하는 이를 위한 교과서임과 동시에 한국어에 대한 바른 이해서라고 하겠다. 저자는 번역은 읽을 대상에 따라 달라져야 하며 한국어가 가진 개성을 더욱 풍부하게 창조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번역은 번역가를 위함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것을 강조한다.
 
 현재 많이 사용되는 영한사전에 대해서도 많은 아쉬움을 드러낸다. 약 120여 년전 언어우드 목사가 만든 영한사전이 발전하지 못하고 일제시대를 넘어서며 일본식으로 사전을 따라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이것은 번역 문학이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면서 일본화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언어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사전이 좋은 사전입니다. p349(18장 말의 지도, 사전 편)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하고 있다)가 전형적인 일본어 문체인 것 처럼 이미 우리의 언어는 개성이 사라진 것이다. 

<17장 맞춤법도 법이다>라는 강의에서 보면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오류를 집어낸다. ‘데’와 ‘대’를 살펴보면 “그 남자 참 웃기더라”를 줄여서 “그 남자 참 웃기데”하고 써야 할 것을 “그 남자 참 웃기대”라고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어에 대한 저자의 강한 애정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가령 이런 부분들이다. ability (깜냥). anger(부아). cutting(마름질). joint(뼈마디). quarrel(실랑이). short(바투). sole(애오라지). 영한사전에 없는 토박이말 소개(p298~p305)

 분명 이 책은 번역에 종사하는 이들과 편집자들 위한 책이지만, 외국소설의 번역본과 동시에 원작을 만나고자 하는 독자가 점점 늘고 있기에 그들에게도 충분한 인기가 있을 것을 기대한다.  번역에 관심이 있다면 <나도 번역 한번 해볼까>(잉크, 2008)를 읽어도 좋다.

 ** 이 책은 번역뿐 아니라 외국어에도 문외한인 내게도 유익한 책이었다. 한국어에 대한 나의 무지를 시작으로 것, 적, 들, 등 잘못쓰고 있는 우리말를 재확인시켜주었다.  다만, 그 방대한 유익함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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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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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탯줄을 잘라낸 잠재적 기억때문인지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 잡는 것 처럼 내게 바다는 그러하다. 지척에 바다를 두었지만 바다를 만나기는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 바다를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EBS<책으로 만나는 세상>에서 작가와의 만남를 듣던 중 목소리가 커지고 호들갑스럽게 환호성을 지르는 나. 바로  <나는 여기가 좋다>였다. 한창훈은 분명 생경한 작가임에도 이 책은 묘한 끌림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창훈과의 설레는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계절마다 다른 빛으로 물드는 바다, 그 바다를 분신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비릿한 바다 냄새를 가득 담은 소설, 파도 소리를 듣는 듯 책 장을 넘긴다.  

 바다와 배밖에 모르던 늙은 어부, 그에게 세상은 바다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배를 처분해야 할 때가 오고, 아내는 뭍에서 살자한다. 마지막 만찬인 듯 늙은 어부는 아내를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간다. 배 위에서 눈부신던 바다와 함께 젊었던 지난 날을 회상하며 아내의 진심을 듣는다. 운전 하나 제대로 못하고 육지가 무서운 그는 섬을 떠날 수 있을까.  늙은 어부의 독백처럼 느껴지는 <나는 여기가 좋다>라는 말이 슬프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잘 모르겄어.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지.”
 “습관이요.”
 “그렇겄지. 배 타는거 말고는 하나도 안 해봤으니까.”
 “그랬소. 당신은. 늘 바다와 배만 보고 살았소. 그러다 이렇게 된 거요. 그러니 인자 여기서 뭘 어떻게 하겄소?”p23

 시종일관 투박하지만 경겨운 사투리로의 술집 여주인이 낯선 손님에게 쏟아내는 사랑이야기 <밤눈>. 이혼하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자와 어촌으로 전근 온 남자와의 사랑. 샌님처럼 조용한 도시 남자가 들려주는 말이 거칠고 촌스러운 여자에게는 마냥 좋았다.  남자에게 작은 어촌에서의 만남은 잠시 스쳐가는 것일지 모르나 순수한 그녀의 순애보는 눈처럼 하얗게 묘사된다.

 쓸쓸한 섬에서 남편을 잃고 자식들은 뭍으로 내 보낸 노인들의 삶의 회한을 그린 <바람이 전하는 말>. 섬 떠난 여행의 웃지 못한 에피소드를 그린 <삼도노인회 제주 여행기>. 두 편을 통해 젊은이는 거의 없는 섬의 현실을 만나게 되니 씁쓸하다.

 자살을 하기 위해 섬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섬은 삶의 현장이라고 화를 내는 듯한 <섬에서 자건거 타기>와 자식만은 바다를 떠나게 하고 싶은 부모의 바람과는 반대로 바다에서 살고자 뭍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아버지와 아들>은 <나는 이곳이 좋다>의 어부가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다.

 표제작 <나는 여기가 좋다>를 시작으로 바다를 품고 사는 어촌, 섬마을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향연. 책 속에 빠져들며 연신 ‘아, 어쩌면 좋을런지.. 이 책이 정말 좋다’ 중얼거리며 행복해했다. 그것은 너른 갯벌에서 바지락을 잡던 엄마에 대한 그리운 추억에서 시작해 기름 유출로 검게 물든 바다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 때문이었으리라.

 “왜 그냥 있지 않고 멀리 흘러갈까요. 바다는”
 “흐르지 않으면, 바다는, 아무것도 안 돼요. 어장도 안 살아나고.”
 “그런가봐요. 흘러야 하는 것이겠죠. 눈물처럼 말이죠.” p172 

 바다는 커다란 눈물은 아닐까. 섬 사람들에게 삶의 시작이고 끝인 바다. 하루 하루 그물을 걷어올리고 노를 젓고, 때론 고립되기도 하고 파도가 휩쓸고 간 곳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흘린 눈물들. 외롭고 고단한 일상을 위로하듯 한창훈은 재치스러운 말투로 그들을 표현한다. 섬을 그려내는 작가, 그 역시 섬사람으로 바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바다를 품고 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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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6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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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7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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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작가의 첫 소설집을 만나는 건 설레는 일이다. 소설가 한강,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의 소설은 언제나 어렵고 읽어내기 힘들다. 하여 다른 책에 비해 다소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도 그녀가 좋다. 더구나 <여수의 사랑> 이라니, 여수 그곳은 내게 그리움으로 자리잡은 곳이다. 붉은 동백의 비단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여수의 오동도를 잊지 못할 것이다. 

 <여수의 사랑>속 여수는 슬픔이었고 아픔이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정선, 그 반대로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자흔은 한 방을 쓰고 있었다. 보기에도 너무 다른 두 여자, 그들에게는 여수에 대한 고통과 그리움이 있었다. 부모에게 버려진 자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정선의 가슴속에는 가시처럼 여수가 박혀 있었다. 고향이 어딘지 모르는 자흔은 여수행 서울발 기차에 버려져 있었다. 자흔에게 여수의 바다는 엄마이기에 충분했다. 여수에서 아빠와 동생을 잃은 자흔에게 그곳은 지우고 싶은 공간이었다. 여수항의 밤 불빛을 봤어요? 돌산대교를 걸어서 건너본 적 있어요? 돌산도 죽포 바닷가의 눈부신 하늘을 봤어요? 오동도에 가봤어요? 오동도의 동백나무들은 언제나 껍질 위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아요…… p28  떠나버리 자흔, 그녀는 분명 여수로 향했을 것이다. 정선도 여수로 떠난다. 가슴에 박힌 가시를 빼내고 여수를 다시 품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한강은 <여수의 사랑>외에 6편의 단편에서도 내내 가라앉은 슬픔을 토해낸다. 어린 동생의 죽음은 가슴에 한으로 남고, 언제나 달려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질주>의 인규, 식물 인간과 다름없는 쌍둥이 형제의 몫까지 살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야간 열차>의 동걸에게 방황과 소비의 생활은 없었다. 친구들 모두 떠나는 <야간 열차>도 탈 수가 없었다. 화자 영현은 동걸의 동생의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현은 이유도 없이 삶이 고통스러웠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며 살고 있었다. 동걸은 얼마나 간절하게 <야간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고 싶었을까.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틈 무거운 삶의 무게.

 <어둠의 사육제>도 무척 인상적이다. 고향 선배가 가지고 달아난 전세금은 영진에게 꿈이었다. 4년 동안 모은 꿈이 사라지자 영진은 독하고 모질어게 변해버린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이모의 집에서도 속을 감추고 더 뻔뻔하게 더 많이 웃으며 베란다에서 떠날 날만을 기다렸다. 영진에게 나타난 명환, 자신의 집을 양도하겠다고 한다. 교통사고로 아내와 다리 한 쪽을 잃은 명환은 증오만이 가득했다. 가해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와 결국 그들을 내몰고 만 명환은 어둠속에서 건너편 베란다의 영진을 지켜본 것이다. 끝내 명환은 자살을 하고 영진은 월세방을 얻어 이사를 나간다.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 나 여기 숨쉬고 있어,…… 여기도, 여기에도, 나는 여기서 밥 먹고 잠자며 살아가고 있어, 나도, 나도……  p250 영진은 그 불빛의 소리 중 하나이고 싶었고, 명환은 그 불빛이 모두 사라지기를 원했을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명환은 어둠을 택했고, 영진은 그 불빛을 통해 다시금 살아내려는 용기를 얻었는지 모른다. 

 1995년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그녀는 왜 이토록 깊은 고통과 아픔만을 그려냈을까. 그것이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였을까. 아픔을 껴안고 사는 이들, 누구에게 마음을 터 놓지 못하고 감내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 차례로 발표한 소설에서도 언제나 외로움과 아름다운 슬픔이 고여 있다. 곧 만나게 될 새로운 소설에서 그녀는 어떤 승화된 슬픔을 보여줄까.

 자정이 가까운 시각, 호남선 입석 기차표를 손에 쥐고 기차를 오르던 내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여수, 그곳엔 동백이 피기 시작했을 터이고 붉은 꽃잎은 바다를 향해 날갯짓을 할 것이다. 여수,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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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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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와 동시에 <낭독의 발견>을 자연스레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게 분명하다.  배우 지진희, 이병헌, 이선균 처럼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가 나만을 위해 책을 읽어준다면, 생각만으로 황홀한 기분이다.  눈을 감고 귀를 열고 책을 읽는다. 아니, 책을 듣는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 The Reader>의 원작으로 알려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간염에 걸려 구토를 하고 있는 자신을 도와 더러워진 몸과 옷을 씻겨 집까지 데려다 준 여자를 미하엘은 잊지 못한다. 홀린 듯 그녀를 다시 찾아가고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소설은 36살의 여자, 15살의 소년이 사랑을 나누는 다소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시작된다. 15살 소년은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할 수 있다지만, 36살의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몽정같은 사랑, 미하엘은  전차 차장인 한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모든 신경이 한나에게 향하고 미하엘에게 전부가 된다. 그녀의 집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책을 읽어주게 된다. 어느덧 한나에게 책 읽기는 사랑을 나누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그녀가 왜 그토록 책을 읽어주는 것을 원했는지 알지 못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쟁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독일이다. 미하엘에게 덜 익은 사과맛으로 각인된 한나는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 법을 전공하는 미하엘은 그녀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한나에게 그것은 종신형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절명의 수치심이었다. 그녀가 글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하엘은 그녀를 변호할 수 있었지만 그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과 그녀를 변호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은 미하엘에게 원죄가 되어 그를 따라 다닌다. 그리하여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끝나고 법을 집행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미하엘은 책을 읽었고 녹음해서 한나가 석방되기 전까지 10년 동안 교도소로 보낸다. 한나가 테이프를 통해 글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편지는 보내지 않았다. 다시 만났을 때, 노파가 된 한나를 통해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15살의 소년과 36살의 여자를 보았던 것은 아닐까. 석방 하루 전에 한나는 왜 자살을 했을까. 세상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던 것일까.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p201 책을 읽어주던 것은 육체적 욕망으로 가는 길이었고, 한나에 대한 죄책감을 벗고자 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미하엘이 기억하는 한나는 그의 삶과 같은게 아닐까. 성에 눈을 뜨던 15살, 용기 있게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젊은 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날들.

 섬세하고 감각적인 이야기를 예상했지만,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적으로써 생동감이 있게 다가온다. p232  이 문장처럼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아련한 사랑과 내면의 갈등을 영화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온 몸으로 읽을 그 느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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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23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기대하고 있어요.^^
자목련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09-02-23 14:59   좋아요 0 | URL
무척 인상적인 책이었고, 소중한 책으로 남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