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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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소설을 좋아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삶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통해 때때로 함께 절망하며 분노하고 때떄로 함께 웃고 기뻐한다. 그리하여 위로와 위안을 얻는다. 소설은 그런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설렌다. 작년에 이어 『제 2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은 궁금했던 소설이다. 그러니까 1년을 기다린 거다. 기다림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재개발로 철거 중인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 김애란의 <물 속 고리앗>은 마치 이 때를 기다려온 것처럼 적절했다. 모두 떠나 버리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중인 어머니와 소년 단둘이 남았다. 철거 중인 아파트는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고립되었다.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그들의 생사는 불투명하다. 세상은 물로 가득찼고 어머니 마저 죽었다. 혼자 남겨진 소년은 썩은 냄새와 더러운 오물을 헤치며 누군가를 만날 꺼란 희망을 안고 세상을 향해 나간다.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도 같은 맥락으로 읽었다.  미래 어느 날 지구는 종말의 시기에 이른다. 집들은 점점 땅 위로 솟아 오른다. 사람들과 엄마 아빠가 사라지고 세상에 존재하는 건 오직 소년와 소녀 뿐이다. 그들도 곧 자신이 사라질 꺼라는 걸 알고 있다. 소년과 소녀의 삶은 불안과 초조함의 연속이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소년과 소녀는 성장한다는 걸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다투고 싸우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물 속 골리앗>과 <허공의 아이들>이 존재하는 누군가의 부재가 주는 고통을 그렸다면 이장욱의 <이반 맨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영혼의 외로움과 방황을 담았다 볼 수 있다. 러시아란 이국 땅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상황들은 액자식 소설처럼 펼쳐진다.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타인의 몸짓과 소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감정을 소통할 수 없는 화자가 느끼는 고독은 내면에서 시작된 것이다.  

 항상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화자에게 어느 날 모든 것이 뒤틀려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을 담은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인해 원하는 대로 육체를 소유할 수 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담은 김이환의 <너의 변신>은 독특하고 흥미로우나 섬뜩하다. 도덕과 윤리,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모습을 떠올린 탓인지도 모른다. 

 5편의 소설이 지닌 상처를 감싸주는 김유진의 <여름>과 정용준의 <떠떠떠, 떠>은 아름답다. 두 소설의 내용이 무조건 아름답다는 건 아니다. <여름>은 테이블을 만드는 남자와 인터뷰 내용을 글로 옮기는 여자의 일상이다. 남자가 만들어 내는 먼지를 참아내지 못하는 여자는 한 공간을 공유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담담하게 절제된 묘사는 서늘하다. 

 <떠떠떠, 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위대한 힘은 지닌 건 사랑이라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없는 남자와 때때로 발작을 일으키는 여자는 동물의 탈로 자신을 숨기며 살아간다. 놀이공원에서 사람이 아닌 동물 인형으로 일하는 그들은 서로의 모습 그대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사자와 팬더로 분한 그들의 삶을 누군가는 불행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그들에게 삶은 행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 사랑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김애란에 대한 믿음은 커졌고 작년에 이어 수상한 이장욱과 김성중의 소설은 휠씬 재미있었다. 권태로운 불편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김사과, 섬뜩하고 기이한 상상력으로 독자를 유인하는 김이환은 놀라웠다. 어디 그 뿐인가. 점점 다양한 색을 보여주는 김유진과 어떤 색을 가졌을지 궁금한 정용준에 대한 기대가 크다. 

 올 여름은 장마와 태풍이 함께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누군가의 집은 부서졌고 누군가의 삶은 무너졌고 누군가의 삶은 끝이 났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는 것에 우선 안도한다. 이처럼 삶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행과 불행 중 어느 쪽에 속할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모두가 행으로 가는 길이라 믿고 살아갈 뿐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힘을 줄 누군가의 존재를 믿고 사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 역시 그런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주위는 조금씩 밝아졌다. 놀랍게도 비가 거의 멎은 듯했다. 이러다 다시 내릴지, 완전히 개려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마을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 뜬 노란 달을 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반달이었다. (...) 밖에 나오니 물속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추운 느낌이었다. 어쩌면 조금 있다 체조를 해야 될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기다려야 했다. 비에 젖에 축축해진 속눈썹을 깜빡이며 달무리 진 밤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조그 중얼댔다.  “누군가 올 거야.”p. 46~47 - <물 속 골리앗>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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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더 나아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회’ 같은 것이다. 휘둘렀던 무수한 손들이, 그 에너지들이, 공허함의 배후에 후광처럼 있다. 애쓴 흔적이 썰물처럼 쏴, 하고  빠져나가면서 무늬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애써 잡아보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던 모든 손아귀에는 공허함이 묻어 있다. 허탕이 되었든, 무언가 잡히긴 했으나 바라던 것은 아니었든, 원하던 걸 잡긴 잡았는데 꼭 쥔 손을 펴보았을 때에 그것이 초라해 보였든, 잡아챈 그것이 원하고 원하던 바로 그것이든, 그 모든 손 안에 공허함은 존재한다. 공허함은 휘둘러보았던 마음의 손, 그 손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매복해 있다. 그런 점 때문에 공허함은 허전함보다는 훨씬 절대적이며, 훨씬 철학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도달해 있다.   김소연의 <마음사전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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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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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날로 잔혹한 뉴스를 들려준다.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갓난 아이가 발견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생활고를 위해 몸을 파는 일은 더 이상 놀랍지 않을 정도다. 우리가 사는 사회 어딘가에서 이런 일들이 버젓이 행해지는 일들이다.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삶, 최악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을 것이다.   

 소설 『환영』의 윤영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자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너무 큰 소망이었을까. 모두 윤영만 바라보고 있었다.  공부하는 남편, 며느리 대접을 해주지 않는 시댁,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던 아버지, 윤영에게 모든 걸 떠맡기고 남자를 택한 친정 엄마, 노름에 빠진 동생까지 말이다.   

 ‘언제나 처음만 힘들었다. 처음만 견디면 그다음은 참을 만하고, 견딜 만해지다가, 종국에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처음 받은 만 원짜리가, 처음 따른 소주 한 잔이, 그리고 처음 별채에 들어가, 처음 손님 옆에 앉기까지가 힘들 뿐이었다. 따지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랬다. 버티다 보면 버티지 못할 것은 없었다.’ p 58~59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남편 대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당장 아이를 키워야 했고, 공부하는 남편에게 부담을 줄 수 없었다. 그런 남편과 아이가 그때는 희망이었다. ‘왕백숙’으로의 출근은 그렇게 시작했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멀리 시 외곽의 한적한 곳까지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니 놀라웠다. 안채와 별채는 다른 세상이었다. 닭백숙이 아닌 욕망을 파는 곳이었다.  별채는 음식을 나르고 벌 수 없는 돈이 주어졌다. 악을 쓰며 돈을 해대라는 동생의 입을 막을 수 있고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돈이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아이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녹슨 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를 따르지 않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분했다. 어린것에게 어미로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떨어져 지내니 그런 생각은 들지 못했다. 그저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가볼 생각을 못 했다. 나도 아이가 두려웠다. 아이가 나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이었다.’ p.124~ 125p    

 윤영에게 삶은 진흙탕을 건너는 일이었다. 온 몸에 진흙을 묻혀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겨우 빠져 나왔다 싶어 마지막 발을 꺼내려 몸부림쳐도 발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단 하루도 마른 땅을 밟을 수 없는 깊은 수렁들. 언제 끝이 날까, 다른 길은 없을까, 아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는 걷지 못했고 일자리를 얻어 나간 남편은 사고를 당했다. 윤영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한데,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엄마였기 때문일까.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p. 193

 소설의 마지막 문장, 다시 왕백숙집 여자로 출근하는 윤영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비장한 이 말이 비참하게 다가온다. 누가 세상이 살만하다 말하였나. 누가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선뜻 그녀를 응원하기도 겁나는 게 사실이다. 윤영에게 삶은 환영(幻影)을 보는 일은 아니었을까.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 만지려 해도 만져지지 않은 것 말이다. 환영(幻影)이 사라지고 손에 잡히는 삶을 그녀가 살아갈 날이 올까. 온다면 언제일까. 

 작가 김이설은 『나쁜 피』,『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이어 『환영』에서 더 냉정하고 잔혹해졌다. 간결하고 강한 문장으로 사실적이고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더 깊이 파헤쳐 그 실상을 낱낱이 보여준다. 해서 읽는 이는 고통스럽고 불편하다. 누군가는 왜 이리 잔인하고 혹독하냐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등단작 <열세 살>, <엄마들>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주목하는 삶은 변두리 이하의 삶이며 그 중에서도 여성의 삶이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도록 신이 만든 존재였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피하고 싶은 삶이 누군가의 삶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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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1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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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1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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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4: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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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3 0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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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눈
구경미 외 지음 / 열림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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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여름에도 분명, 지리한 장마가 올 것이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릴지, 얼마나 더울지, 얼마나 많은 밤을 열대야와 싸워야 할 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여름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받아들이기 편할지 모르겠다. 한 번쯤 새하얀 눈이 가득한 여름을 상상한다면 더위가 사라지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눈이 내리는 듯하다. 주목받는 젊은 여성 작가 7인이 (구경미, 김유진, 김이은, 김현영, 박주영, 서유미, 조해진) 눈을 테마로 쓴 소설집 『사랑해, 눈』을 읽는 것도 뜨거운 여름을 시원하고 즐겁게 지내는 방법은 아닐까. 
 
 새해 첫 출근길, 폭설로 인해 사회로부터 고립될까 두려운 한 남자의 심리를 잘 표현한 담은 서유미의 <스노우맨>과 병색이 짙은 아버지가 눈이 보고 싶다며 자식들을 대동해 눈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구경미의 <첩첩>은 평범한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이다. 눈 때문에 여행을 떠나 가족과 함께 추억을 만든 이들에게 눈은 소중한 의미로 남을 것이다. 반면 눈 덮인 세상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눈은 거대한 세상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뚫고 나가야 할 삶 말이다.   

 ‘팔을 움직이면서 흘린 땀 때문에 셔츠가, 허리까지 쌓인 눈 때문에 구두와 바지, 속옷이 다 젖었다. 남자의 삽은 점점 느려졌고 눈이 쌓인 길은 끝이 없어 보였다. 삽을 쥐었던 손바닥엔 어느새 물집이 잡혔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파고 온 길이 삐뚤빼뚤 꼬리처럼 이어져 있었다. 앞아 아니라 옆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지저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삽으로 퍼낸 눈 뭉치들이 원래의 자리로 굴러떨어졌다.’  p.25 - 스노우 맨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나 30년 만에 유골 상자로 만나는 엄마와 눈처럼 녹아 없어질 걸 알면서 시작된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조해진의 <하카타轉多 역에는 눈이 내리고>은 쌓였다 하더라도 금세 녹아 사라지는 눈을 떠올렸다. 소복하게 쌓인 아름다움이 금세 걱정으로 변하는 눈처럼 아픈 딸을 혼자 키우는 직장 선배를 향해 시작된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은 눈이 녹기 전까지 짧았다. 엄마의 인생과 딸의 사랑은 나약하고 슬픈 눈 같았다. 

 제목에 담긴 것들을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김이은의 <첫눈과 소원과 백일몽 사이에 숨겨진 잔인한 변증법>과 박주영의 <소설 小說 小雪>은 신선한 재미가 가득했다. 첫눈에 담긴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김현영의 <눈의 물>은 몽환적이며, 무료하듯 반복되는 일상을 섬세하고 잔잔하게 묘사한 김유진의 <눈 위의 발자국>은 한 폭의 부드러운 풍경화을 보는 듯하다. 

 눈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높은 곳에서 찬 공기를 만나 식어서 엉기어 땅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인 비와 다르게 대기 중의 수중기가 찬 기운을 만난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다.  얼어야만 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사람들에게 사계절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비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많은 이가 첫 눈을 기다리지만 첫 비를 기다리는 이는 없으니 말이다.  눈이라는 테마는 같았지만 각 단편들은 작가의 개성을 보여주듯 다양했다. 일곱가지 눈 이야기는 모두 흥미로웠다.  

 어떤 소설은 마치 동화 『눈의 여왕』에 초대된 느낌이었고, 어떤 소설은 이게 눈인가 싶을 정도로 진눈깨비 같았고, 어떤 소설은 눈이 내려 쌓여가는 과정을 담은 듯 느껴졌다. 눈이 가진 아름다움, 눈이 가진 폭력성, 눈이 가진 여러 성질과 느낌들을 잘 살려낸 소설들이다. 

 ‘올해의 첫눈이 오늘, 내렸으니까. 몇 년째 애인인지 이제는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어쨌든 오늘 너의 그녀는 오늘 너의 사랑. 그러니 첫눈은 당연히 그녀의 것이지. 그녀와 너의 것이지. 7년 전의 그 봄날. 봄이었는데, 화사한 봄날이어야 마땅한데, 때아닌 폭설이 쏟아졌어. 지금까지도 거기 갇혀 잇는 내게 첫눈이란, 그래, 네 말대로야. 물에 물 타기, 눈 위에 눈. 그래봤자  눈. 겨우, 고작, 눈.’ p.182 - 눈의 물 

 누군가는 벌써부터 첫눈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봉숭아 물을 곱게 들인 손톱을 깍지 못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눈이 오기를 간절하게 소망할 것이다. 결국은 ‘물에 물 타기, 눈 위에 눈. 그래봤자  눈. 겨우, 고작, 눈’ 인데 말이다.  나 역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처럼 한 여름에 내리는 사랑스런 눈을 상상하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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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대화들 - 젊은 작가 12인과 문학을 논하다, 2011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불가능한 대화들 1
염승숙 외 지음 / 산지니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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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소설이나 시는 내용보다 작가의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해서, 한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 혹은 끝마무리를 지을 때 작가의 말이 없으면 정말 서운하다.  예전에는 작가의 말이나 해설은 잘 읽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절대 길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작가의 말을 통해 듣는 이야기는 건빵 속의 숨겨진 별 사탕 같고, 도너츠의 블루베리잼 같다고 할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책이 바로『불가능한 대화들』이다. 
 
 의미심장한 제목의 이 책은 대담집이다. 염승숙, 김이설, 김재영, 정한아, 김숨, 김사과, 김언, 안현미, 최금진, 김이듬, 박진성, 이영광 젊은 작가 12명은 평론가의 날카롭고 불편한 질문에 아주 성실하게 답하고 있다. 자신들의 소설에 대해 말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해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에 이 책은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소설 속에 녹아 든 문학적 상징이나, 의미를 나 같은 독자는 잘 모른다. 그저 내 나름대로 느끼고 생각할 뿐이다. 문학에 대해 소설이나 시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질문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이미 읽은 소설의 단편과 문 장을 떠올린다. 아, 이 부분에서 작가는 이런 마음을 가졌었고 숨겨진 의도는 이랬구나 한다.  다시 그 소설을 펼쳐보게 한다. 특히 정한아가 그랬다. 그의 소설에서는 몽글몽글 뜨거운 따뜻함이 피어났는데, 그런 소설을 쓰는 그는 정작 슬픔을 안고 있었고  슬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정한아의 산문 <날아라 뛰어라, 그게 네 이름>에 이런 부분이다. 

 ‘저는 한 때 방 안에 갇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기를 뭐하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절망의 의지도 남지 않은 무기력의 상태에서, 하루하루, 시간이, 생이, 저를 스쳐 지나갔지요. 저는 지금도 그때의 제가 내뱉었던 얕은 호흡과 방 안의 고요를 기억합니다. 매일 밤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죽음에 대한 망상과, 새벽빛이 떠오를 때마다 간지럽게, 부끄럽게, 그래도 살고 싶다는 마음. 그 시절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설만 남아 있었습니다.’ p.89

 김사과는 진실을 믿지 않으며 김이듬의 글은 놀라웠다. 김이듬의 글을 처음 만났다. 그는 솔직했으나 내게는 파격적이었다. 그가 쓴 시와 소설을 읽으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궁금해진다. 김사과와 김이듬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닮은 듯 보여진다. 김숨의 산문은 그의 이름처럼 깊은 숨을 들이키고 내 쉬게 한다. 마치 아주 짧은 단편 소설처럼 다가온다. <하루 - 상상은 어디에서 오는가>의 시작부터 그렇다. 

 ‘오후 두 시. 그것은 내 출근시간이다. 프란츠 카프카. 그는 오후 두 시에 퇴근을 했다지. 그는 오후 두 시에 퇴근해 한숨 낮잠을 자고 일어나 독서를 하고 새벽까지 글을 썼다지. 나는 자유로를 달려 오후 두 시에 닿는다. 오후 두 시는 무가당 크래커를 닮았다. 오후 두 시를 입 속에 넣고 낙타처럼 우물거리다 보면 목에 멘다. 침과 뒤섞여 혀와 입천장에 달라붙는 그것을 뱉을 수 도, 그렇다고 꿀꺽 삼킬 수도 없다.’ p. 32 

 오후 두 시가 되면 때때로 김숨이 생각날 것이다. 아니, 내게 오후 두 시는 무엇과 닮은 시간일까. 작가들이 쓰고자 하는 소설과 시에 대해, 그리고 이 시대에 작가들이 지녀야 할 위무는 무엇인가. 작가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듣는 시간은 의미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눈 대담이라면 이처럼 상세하게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 하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작가가 있다면 그들과 조금은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이 책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작가들의 산문 때문이다. 그 시간은 아주 즐거웠다. 산문에서 작가의 솔직한 면을 볼 수 있었고 신기하게도 작가를 닮아 있었다. 무엇을 추구하는 삶인지 조금 알게 되었고, 앞으로 그들이 써낼 소설과 시를 읽을 수 있다는 데 감사했다. 어떤 글로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의 삶을 보여줄지 기대가 크다. 작가의 속내를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그들의 대화를 읽다 보니 소설 보다는 시가 더 궁금해졌다. 언어 안에서 자유 자재로 노는 그들, 언어가 가진 그늘과 무늬, 그 모든 것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그들이 정말 대단하다. 특히 안현미와 최금진의 시집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세상에나, 내 책장에는 최금진의 그 시집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시집을 꺼내어 천천히 읽어야 겠다.
 

*읽은 지 많은 날들이 지났는데, 늦게 나마 겨우 이렇게 느낌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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