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소 첫번째 - 2022 시소 선정 작품집 시소 1
김리윤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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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시와 소설을 만날 수 있으니 경제적이라고 할까. 마주 보고 앉아 오르락내리락하는 놀이 기구가 아닌 시와 소설의 만남이라니. ‘시소’ 프로젝트, 참 잘 지었다. 산뜻하면서도 신나는 제목이다. 이 책은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계절별로 하나의 소설과 하나의 시를 선정하여 만들어졌다.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시리즈’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소설 보다 시리즈는 계절 별로 세 편의 소설을 선정하는 것과 다르게 시소는 시와 소설 각각 한 편이니 경쟁이 더 치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시소 첫 번째는 네 편의 시와 네 편의 단편 소설을 실었다. 8편의 작품의 소개와 함께 평론가와 작가가 나눈 인터뷰를 실었고 그 외의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 시인과 소설가가 직접 드려주는 시에 대한 어려움과 소설 쓰기 과정은 이 책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소설가(손보미, 이서수, 최은영, 염승숙)와 시인(안미옥, 김리윤, 신이인, 조혜은)모두 여성이다. 최근 단편집이나 수상집에서도 남성 작가의 작품을 만나기가 어렵다. 문학계의 흐름일까 짐작하면서도 아쉽다.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는 이미 소설보다 시리즈에 선정된 적이 있다. 오랜만에 손보미와 염승숙의 단편을 만나 반가웠다.


손보미의 「해변의 피크닉」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열한 살의 ‘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나는 여름방학마다 한 달간 부산의 할머니 집에서 지낸다. 부모님의 이혼 후 아버지가 죽고 난 후부터다. 엄마가 아닌 어머니라는 호칭과 거대 저택을 떠올리는 할머니 집의 묘사는 마치 80년대의 익숙한 영화의 한 장면과 묘하게 겹쳐진다. 며느리는 인정할 수 없지만 손녀는 받아들인다 기이한 논리하고 할까. 그런 어른들의 세계에서 열한 살 소녀가 느끼는 감정들, 도도한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주면서도 손녀라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어느 해 느닷없이 나타난 아버지의 이복동생 삼촌과 그를 향한 열한 살 소녀의 사랑, 삼촌을 무시하며 더욱더 손녀의 존재를 지키려는 할머니.


모든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의 순간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더라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훼손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모두 다 성장의 측면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113쪽, 손보미 작가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끝내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시시한 장난이나 거는 또래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어른스러운 말을 쓰려는 아이의 당돌한 모습이 자꾸만 생각난다.


최은미의 「답신」은 형부의 폭력과 가스라이팅에 익숙해진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 형부에게 상해를 가하고 감옥에 다녀온 이모가 연락이 끊긴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동생의 무죄를 증언할 수 없었던 언니의 삶, 그런 언니를 이해하기로 결심한 화자. 담담하게 언니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조카를 향한 영원한 사랑이 전해져 가슴 아픈 소설이다. 가정 폭력에 대한 사회적 개입과 제도 개선의 필요를 시사한다.


그런 점은 염승숙의 「프리 더 웨일」에서도 볼 수 있다. 남편이 사고로 죽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수경은 교육 교재를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 코로나 시국에도 긴급 돌봄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버틴다. 소설 안에 수많은 워킹맘, 싱글맘이 겪는 고충이 고스란히 담겼다. 마스크에 이름을 쓰고 줄을 달아 등원시켰지만 다른 아이의 이름이 마스크를 집에 온 아이를 보고 어떤 항의도 할 수 없는 현실, 어린이집에서 아이의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 회사 내 수경의 자리도 위태로운 건 마찬가지.

부모가 된 순간 아이를 통한 기쁨보다는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 불안이 더 크다. 작가의 경우 엄마가 된 이후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과거 염승숙의 소설에서 보았던 모호함과 신비로운 상상의 세계는 현실 감각이 되었고 시인 안미옥의 시 「사운드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안미옥은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를 다 쓰고 나서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한다기보다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그걸 계속 찾아가는 과정을 담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것이에요. 그리고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마지막 부분인데요. 사랑은 하고 싶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보고 배워야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더 많이 보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문장을 쓰게 된 것 같아요. (22쪽, 안미옥 시인 인터뷰 내용 중에서)

노래는 후렴부터 시작합니다


후렴에는 가사가 없어요

사랑 노래입니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모르겠어요 잘하고 있는 건지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합니다


주소도 없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엽서도 있습니다


모든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나는 궁금합니다


(중략)


웃음은 슬프고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끝까지 머금고 있는 것이어서


깨어난 나는

웃을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열고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와요


사랑 노래입니다


그냥 배울 수는 없고요

보고 배워야 가능합니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 「사운드북」, 중에서)


사랑에 대한 시를 읽으니 사랑이 충만해지는 기분이다. 사운드북에서 나오는 사랑 노래가 내게로 전해진다. 사운드북을 누르는 아이의 모습과 그걸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켜보는 모든 이. 어쩌면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랑 때문은 아닐까.


한 권으로 시와 소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앞으로 나올 시소의 시와 소설을 기대한다. 무한대까지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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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2-07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와 소설이 같이 실리는 편집이라니, 신선하네요.

자목련 2022-02-07 12:52   좋아요 2 | URL
네, 문지나 문학동네와 차별을 두고 기획한 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2-03-08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자목련 2022-03-10 11:21   좋아요 0 | URL
^^*

강나루 2022-03-09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오늘 투표하는 거 아시지요^^

자목련 2022-03-10 11:22   좋아요 0 | URL
강나루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2-03-09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2-03-10 11:23   좋아요 1 | URL
항상 응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환한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3-10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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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가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B급은 아니다. 마이너가 메이저가 되고 메이저가 마이너가 되는 건 순간이니까. 그저 취향의 문제다. 그런 구분을 하는 게 오히려 촌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모든 책과 모든 예술은 나아가 모든 삶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 5명의 작가의 단편을 만날 수 있는 『펄프픽션』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이게 뭐야 싶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와, 정말 놀랍다 싶을 수도 있으니까. 장르문학의 신선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당할 것 같기도 하고.


저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편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단편은 최영희의 「시민 R」이다. 인공지능 청소로봇 알옛이 주인이자 사용자를 살해하고 법정에 선 장면으로 시작한다. 상상이 가는가? 청소로봇이 사람을 죽였다니.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다 먼 미래 그런 기능이 탑재된 인공지능 청소로봇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무서움이 몰려온다. 전쟁을 위한 군사로봇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알옛은 왜 사람을 죽였을까? 청소를 위한 로봇, 지시어와 명령어는 청소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알옛이 사람을 쓰레기로 보고 청소를 한 것이다. 그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시대의 가장 핫한 인플루언서이자 자신을 개발한 기업의 오너 서른두 살의 강희원이었다. 알옛은 법정에서 강희원의 집에서 지낸 시간을 회상한다. 강희원이 원하는 루틴대로 청소를 하고 그의 명령을 따른다. 그런데 어느 날 강희원의 침실에서 피를 흘리는 여성을 발견한다. 강희원은 침실 청소 대신 서재 정리를 명령한다. 알옛은 서재에서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면서 책을 읽고 숙지한다. 인공지능 알옛은 점점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인문학 책들을 읽으면서 주인이 벌인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로봇이 알옛이 아닌 시민 R이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한나 아렌트는 시민의 권리를 이야기했다. 결국 시민이란 타자가 처한 폭력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 자신도 정치적 공동체의 보호를 받는 존재였다. 시민은… 근사해. R은 인간이 부러웠다. 그리고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오늘 여자가 겪은 일을 경찰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은 시민이 아니어도 그 여자는 보호받아 마땅한 시민이니까. ( 「시민 R」, 240~241쪽)


타자가 처한 폭력을 외면하는 강희원은 인간쓰레기였다. 심지어 상습 가해자였다. 청소를 하는 게 마땅했고 강희원의 명령대로 탁탁 접었을 뿐이다. 시민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아, 정말 좋은 소설이다. 재미는 물론 인문학적 사유까지 안겨준다. 앞으로 우리는 다양한 곳에서 인공지능을 만나고 어쩌면 시민 R을 만날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알옛이 시민 R이 될 수 있었던 건 독서의 힘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서사인가?


그 외의 네 편도 무척 흥미롭다. 대학입시를 목표로 모인 기숙 학원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이야기 조예은의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 영국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떡볶이를 만들어 달라는 황당한 제안을 받는 류연웅의 「떡볶이 세계와 본부」, 조직폭력배와 위장 결혼을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고 시체를 저수지에 던지자 등장한 외계인과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홍지운의 「정직한 살인마」, 태극기 부대를 떠올리면서도 정작 기존의 이미지가 아닌 ‘태극’의 영험한 기운에 대해 말하는 이경희의 「서울 도시철도의 수호자들」은 유머와 동시에 우리 사회의 면면을 고발한다. 재밌게 읽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자화상과 마주한 기분은 피할 수 없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한 권은 무엇보다 멋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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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 개정판 문학동네포에지 34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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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포에지로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을 만났다. 문학동네포에지는 문학동네 구간 시집을 복간하는 프로젝트지만 문학동네의 시집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향한 애정이 돋보이는 시리즈다. 22년 전에 나온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으로 새롭게 수정하지 않고 문학동네포에지로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처음 그 느낌을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떨린다.


일상과 문학의 아름다운 조화. 이 시집은 그런 시집이 아닐까 싶다. 우리 주변의 삶과 그 안에서 시인이 느끼는 생각은 짧은 시가 되고 하나의 기록으로 남는다. 비가 오는 풍경 속 가족의 모습, 어린 딸에게 토마토를 보여주기 위해 화분에 토마토를 심는 과정은 고스란히 시가 된다. 어렵고 복잡하지 않아서 친근하다. 다음 시가 궁금하다. 시집의 첫 시는 이렇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상징과 은유와 성찰로 보여준다고 할까.


끝이 보이지 않아, 걷고 있음에도 불안한 삶. 잠기는 걸 알면서도 그 길 위에서 끝내 멈추지 못하고 나간다. 22년 전의 시가 왜 이리 가슴이 아픈 걸까. 그건 아마도 현재의 우리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가 좋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아마도 22년 전에 만났다면 몰랐을지도 모를 기분이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 발이 잠긴다

이어서 종아리가 잠긴다 연이어

무릎과 허벅지가 잠긴다

새가 울면서부터 여자가 잠긴다

남자가 잠긴다

따라서 허리가 잠긴다

얼마쯤 후에

가슴과 목이 잠긴다

웃다가 웃다가 얼굴이 잠기고

또 얼마쯤 후에

머리가 잠긴다

또다시 얼마쯤 후에

멀리, 끝없는 길 위에

가장 권위적인 모자가 하나

유품인 듯,

잠기지 않고 놓여 있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 전문)


유독 이 시집에서 끌리는 건 ‘길’이었다. 시인은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가 걷는, 들어선 그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걸까. 우리가 흔히 속상할 때 내뱉는 ‘길이 없다’란 말을 생각한다. 더 좋은 길, 더 나은 길만 생각했기에 그렇다. 다시 돌아와 다시 걸을 생각은 하지 않기에. ‘길이 끝났다는 곳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전혀 다른 오는 길이다 ’란 구절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길을 만들고 길을 고치는 이는 누구인가. 나의 길에서는 나만이 그럴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길에서, 아들에게」는 경험으로 얻는 이야기가 된다. 먼저 길 위에 선 사람으로 자신이 지나온 길에서의 후회를 아들은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진다.


길은 끝이 없다

그러니까, 길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막다른 길에서 보았던,

길은 여기에서 끝났습니다라는 친절한 말은

틀린 말이다

길이 끝났다는 곳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전혀 다른 오는 길이다 (「길」, 전문)


처음도 끝도

길 위에 있으니,

처음도 끝도 길이다


길 위의 코스모스

길 위의 실비어

길 위의 맨드라미


그러니,

‘길을 놓치지 말 것’ (「길에서, 아들에게」 전문)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만 같아 화들짝 놀란다. 어느 시절,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문장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일상. 어디 밑줄 그은 문장뿐일까. 내가 남긴 글, 편지도 그러하고 심지어는 사람에 대한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다가 그때 내가

밑줄을 그어놓은 글을 우연히 본다

그런데, 내가 왜

그 글 밑에 줄을 그어놓았는지

모르겠다 (「세월도, 마음도 흐른다」, 전문)


또 이런 시는 마음이 아프다. 어느 순간 사라진 노점상들. 코로나 시대에는 더욱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 다른 것들을 파는 모습을 통해 계절이 흐르는 풍경은 이제 과거의 것이 돼버린 걸까. 군고구마를 팔던 그는 무엇으로 봄을 알리려 할까.


어제까지 육교 밑에서

꽃을 팔고 있던 아저씨가

오늘은

육교 위에서

군고구마를 팔고 있다 (「겨울」, 전문)


봄을 생각하며 봄을 읽는다. 이제 곧 무거운 외투를 벗고 봄이라는 걸 실감하며 봄을 노래할 날도 멀지 않았으니까. 마스크를 벗겠다는 기대나 다짐은 할 수 없지만 기어코 봄이 오는 명징한 사실이 위로가 된다.


온다. 소리도 없이 온다. 나는 마루 한편에 앉아

있었다. 와서 무릎을 만지는 듯, 드러낸다. 때로는

힘센 소처럼 여기다가도 잠시 소홀하게 여기고

있을 때, 잠깐 머물다가 떠난다. 그림자도 없이

왔다가 떠나는 길 위에 솟아오르는 새벽들이

알리바이를 흐트러뜨린다. 새싹들이 오가는 길을

메우고 지워도, 어쩔 수 없다. (「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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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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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경계에 있다고 느낄 때 삶은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된다. 모든 것은 허무하고 남은 시간이 얼마일까 헤아린다. 죽음을 염려하지 않았지만 몇 차례 긴 수술을 받았던 장면을 생각하면 나 역시 그 순간 지난 삶을 돌아봤다. 소중한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무사히 수술이 끝난다면 다른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카렐 차페크의 장편소설 『평범한 인생』 속 화자처럼 자서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까. 나에 대한 기록이라니,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인 기록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평범한 인생』 은 그런 이야기다. 화자인 ‘나’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 제목처럼 평범한 인생에 대한 기록. ‘나’는 아내와 사별한 철도 공무원으로 일흔이 되기 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설은 우연하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친구가 그를 진료한 의사에게 전해 받은 자서전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는다. 유년 시절을 시작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소목장이었던 아버지와 걱정이 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한 모범생.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가고 모두가 바라는 성공한 삶으로의 진입을 곁에 두었다. 하지만 시를 만난 방황하다 스물두 살에 철도청 공무원으로 단조롭고 조용한 인생을 산다. 철도청 공무원의 삶을 나쁘지 않았다. 시골의 철도역에서 나빴던 건강이 회복되고 역장의 딸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새로 발령받은 곳을 자신만의 역을 만들고 사회 유지에게 존경을 받았다. 사랑하는 아내는 자신이 위해 모든 걸 아낌없이 내주었다.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평범한 인생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조용한 삶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범하고 시시한 삶인가! 어느 곳에도 모험이나 투쟁 같은 것은 없으며, 예외적이거나 비극적인 면도 없었다. 제대로 작동하는 기계를 바라보는 것같이 흐뭇한 눈길로 되돌아볼 수 있다. 나의 삶은 소리도 내지 않고 멈출 것이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조용하고 묵묵히 움직임을 끝낼 것이다. 또한 그래야 한다. (19쪽)


그의 안내를 따라 그의 생을 듣노라면 수줍던 한 소년의 성장 과정이 그려진다. 묵묵히 일만 하던 아버지, 형의 죽음으로 자신을 각별하게 여긴 어머니. 첫사랑이라 할 수 없지만 묘한 감정을 불러온 누더기 차림의 소녀와의 만남. 학교에 들어가면서 알게 된 자신의 위치. 공부라는 권력을 일찍 깨우친 소년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생에 있어 유년 시절이 중요한 이유는 그때 경험했던 것들의 자아를 형성하고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그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때에 알았다.


소설 후반부에 등장한 수많은 자아가 그의 평범한 인생을 헤집어 놓는다. 인생의 주요 시기에 내린 선택에 대해 그의 욕망을 어떤 자아가 지배했는지 알려준다. 평범한 인간과 억척이와 우울증 환자가 서로 연합했다는 사실. 아내와의 결혼에도 그의 철저한 계획이 있었다고 자아는 말한다. 그녀가 역장의 딸이 접근한 거 아니냐고. 철도청 공무원이라는 성공에도 억척스럽게 공부하던 자아가 있고 한적한 역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우울증 자아가 있는 것이다. 그의 자아(성격)은 부모로 거슬러 오른다. 우울증은 어머니로 인한 것이며 억척이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과거 누더기 차림의 소녀와의 만남에서 발현된 욕구는 시인의 자아와 연결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자아에 억눌려 짧은 시기에 소멸된다. 자아가 서로 충돌하며 격렬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내 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아마도 모든 이에게 해당될 것이다. 직장에서는 직장인의 옷을 입어야 하고 부모 앞에서는 자식의 옷을 입어야 하고 혼자만의 시간에야 그 모든 옷을 벗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은 소설 초반에 등장한 각자의 세계와 같다. 다른 무언가가 되고자 끊임없이 욕망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명예든 어떤 것이든 간에. 직업이라 표현했지만 그건 인생이며 삶이 아닐까. 그가 유년 시절 함께 지내온 이들의 삶을 통해 알았던 세계는 성장하면서 다른 세계로 확장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경험한 것들이 다른 삶으로 이끄는 계기다. 소목장이었던 아버지가 그에게 성공을 바랐던 것처럼.


그들 모두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세계 속에서 각자의 신비스러운 일과를 영위해 나갔다. 모든 직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고, 다른 소재와 다른 의식(儀式)을 가지고 있었다. (27쪽)


차분하고 아름답게 흐르던 이야기는 격정의 소용돌이를 선사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인생이며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정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판단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므로. 어떠한 인생을 살든 말이다.


네가 누구든 나는 너를 알아본다.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중략)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도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며, 가능성이기만 했던 것은 현실이 된다. 나를 제한하는 이 자아가 내가 아니면 아닐수록 나는 더 많은 존재가 된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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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1-25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부터 다시 열심히 읽고 있답니다 :>

선플 후 리뷰 감상이 되겠네요...

자목련 2022-01-26 11:10   좋아요 1 | URL
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카르페디엠 2022-02-0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상깊게 보았어요. 내 자신을 좀더 이해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자목련 2022-02-07 09:19   좋아요 0 | URL
나의 자아는 몇 개일까 싶었어요.
 

올해는 어떤 책을 얼마큼 읽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100권 읽기 같은 목표도 없고요.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다짐, 인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 같은 건 없어요. 예전에는 그런 계획 세우기에 바빴죠. 계획을 세웠으니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노력도 있었고요. 한데, 이제는 끌리는 대로 그냥 읽어요. 그냥 좋아서요. 읽는 인간이지만, 성찰을 하거나 하지 않아요. 물론 그러면 더 좋겠지요. 그런 부담을 갖고 시작하면 읽기가 힘들어져요.


좋아하는 게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할까요. 사실, 무기력해지는 일상에, 다시 존재나 쓸모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지는 날들이라 살짝 무릎이 꺾이는 것 같다고 할까요. 그래도 이상하게 읽어야 할(?) 책이 있으면 조금 마음이 놓여요. 그래, 나는 읽어 할 책이 있지, 하면서요.


책을 읽는 일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죠.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많고요.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과 시가 점점 어렵게 느껴지니까요. 그래서 또 그냥 읽어요. 이해하려 애쓰지 않고 건너뛰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다 보면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요. 아니면 도중에 그냥 멈춰도 좋아요. 나중에 다시 생각날 때가 있어요, 그럼 그때 읽어요. 읽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한 번 해보세요. 한 권의 책을 다 읽어야 하는 부담으로 책 자체에 대한 흥미를 읽어버리면 안 되니까요.



그럴 때는 재미있어 보이는 책, 뭔가 궁금해지는 제목이나 내용을 보고 선택해도 좋아요. 최근에 자음과모음에서 『시소 첫번째』가 나왔죠. 제목이 무척 재밌죠? 사실, 저는 시소 프로젝트에 대해 몰랐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발표된 시와 소설을 한편씩 선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젊은작가상이나 소설보다 시리즈와 비슷한 맥락인 것 같은데요. 자음과모음이 영리한 게 시와 소설을 같이 실었으니 소설을 읽는 독자, 시를 읽는 독자, 모두 공략한 마케팅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시가 더 궁금해서 이 책이 끌렸거든요.


그리고 드디어 『환희의 인간』을 곁에 두었어요. 아, 이 책은 읽기도 전에 떨려요. 살짝 몇 군데 펼쳐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다는 게 와락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다 『악스트 Axt 2022.1/2』 에서 김연덕 시인이 『환희의 인간』에 대한 글을 쓴 꼭지를 발견했다죠. 그러니 어쩌겠어요. 이 책은 미리 좋은 책이라고 말하려고요.


책으로 이어지는 책이라고 할까요. 한강의 인터뷰를 읽고 누군가는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소설들을 읽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모르는 책들과의 만남, 그 역시 책이 주는 선물이고 책이 좋은 이유지요. 그래서 읽어요, 그래서 좋아하고요. 나에게 좋은 책들이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또 좋은 책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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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1-24 09: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독서에 있어 최고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ㅎ

자목련 2022-01-25 10:09   좋아요 1 | URL
최고의 마음가짐, 참 좋아요^^

얄라알라 2022-01-24 09: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께서 조근조근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편안해 져요. 책읽기에 리스트 부담이.늘.있는데...자목련님의 태도를 벤치마킹해야겠어요~^^

자목련 2022-01-25 10:10   좋아요 1 | URL
책 욕심만 자꾸 자라서 저도 책 읽기 본연의 즐거움을 찾고 싶어서요, ㅎ

그레이스 2022-01-24 10: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좋아서 읽죠 ♡.♡
저도 요 며칠은 그러고 있어요^^

자목련 2022-01-25 10:10   좋아요 2 | URL
우리 좋으니까, 계속 읽어요!

blanca 2022-01-24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환희의 인간> 정말 너무 좋았어요. 시인의 리뷰도 정말 정말 좋았어요. 자목련님도 좋아하실듯...

자목련 2022-01-25 10:10   좋아요 0 | URL
아, 점점 더 좋아집니다. ㅎㅎ

새파랑 2022-01-24 10: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냥 좋으니까 읽는게 가장 정답인거 같아요~!! 중요한건 즐거움이 맞습니다~!!

자목련 2022-01-25 10:11   좋아요 1 | URL
즐겁게, 신나게 책과 놀아요~

책읽는나무 2022-01-24 11:2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맞아요.그냥 읽는 게,좋아서 읽는 게..맞는 말씀인 듯 합니다.
저는 좋아서 읽기도 하고, 때론 의무감으로 읽기도 합니다. 심적 부담감이 들 때도 많고, 때론 그 속에서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되어 그게 재밌을 때도 있긴 합니다만...확실히 책은 좋아서 그냥 막 재미나게 읽는 게 정답인 듯 합니다.계속 읽으면서 고개 끄덕이고 갑니다^^

자목련 2022-01-25 10:12   좋아요 2 | URL
의무감, 부담감, 모두 맞는 것 같아요. 단순한 취미로 시작된 읽기가 배움과 사유로 이어지니까요.
오늘도 즐겁게 읽고 계시죠?

거리의화가 2022-01-24 13: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들을 읽는 게 최고인 것 같습니다!
좋아야 계속 읽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자목련 2022-01-25 10:12   좋아요 0 | URL
좋아야 계속 읽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좋은 힘을 키우는 일이네요^^

라로 2022-01-24 13: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크리스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로 처음 보뱅을 만났는데요 너무 좋았어요. 그 느낌 사라지지 않기 바래서 다른 책 안 읽으려고 했는데 좋다시니 이것도 읽겠어요. ㅎㅎㅎ

자목련 2022-01-25 10:13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책이 처음이에요. 책도 완독은 못했고 다른 분들의 리뷰를 살짝 봐도 너무 좋더라고요!

프레이야 2022-01-24 16: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원래 리스트 만들어 목적 두고 읽고 이런 계획적인 인간이 못 되어요. 좋아서 되는대로 당기는대로 ㅎ 이게 꼭 좋은 습관은 아닌데 책도 인연이라 그게 마음은 편한 거 같아요. 환희의인간 사두고 다른 책에 자꾸 밀려나고 있네요. ^^ 자목련 님 이런 대화체 글 다정하게 들려요.

자목련 2022-01-25 10:14   좋아요 0 | URL
책도 인연이라는 말, 맞는 것 같아요.
같은 책을 곁에 두는 일, 그 역시 즐거워요!!

mini74 2022-01-24 17: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끌리는데로 좋아서 ~ 설레는 독서목표인데요.~ 저도 그냥 읽어볼래요 자목련님_*^^*

자목련 2022-01-25 10:14   좋아요 3 | URL
우리, 그냥 좋은 대로 즐겁게 읽어보아요~~

희선 2022-01-24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어느 정도 읽어야지 생각하지 않고 봐요 한번 본 책은 끝까지 봐야 해서... 시작하다 그만둔 게 아주 없지 않지만, 거의 다 끝까지 봅니다 그건 끝까지 볼 책만 봐서 그럴지도... 2022년 일월 얼마 남지 않았네요 책은 늘 보는 거니 즐겁게 보면 좋겠습니다


희선

자목련 2022-01-25 10:15   좋아요 4 | URL
책은 늘 보는 거니까, 더 즐겁게 읽어야겠죠?
보내주신 마음, 최근에 잘 받았습니다. 항상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