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양장) 소설Y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설정은 익숙하다. 죽음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기니까. 혼수상태의 경우 영혼은 기적처럼 육체로 돌아가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봐온 이야기다. 이희영의 장편소설 『나나』도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다.


“우리 죽은 거냐?”

“그럴지도.”

“그런데 멀쩡히 숨 쉬고 말하고, 저렇게 주스도 마시잖아.”

“그럼 안 죽었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는데? 우리가 하는 말도 못 듣잖아.”

“그럼 죽었나 보지.” (프롤로그, 7쪽)


프롤로그는 분명 영혼이 나누는 대화처럼 보인다. 버스 사고가 난 것뿐인데 열여덟 수리와 열일곱 류는 죽은 게 아닌데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었다. 수리와 류 앞에는 영혼 사냥꾼 선령(獮靈)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일주일 내로 육체를 되찾지 못하면 자신을 따라 저승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멀쩡하게 자고 일어나서 할 일을 다 하는 수리의 육체는 영혼이 사라진 줄도 모른다. 영혼이 육체에게 다가가면 벽 같은 게 생겨서 차단한다. 육체가 자신의 영혼을 거부하기 때문이란다.


로사여고 2학년 ‘한수리’는 모범생이며 친구와 관계도 좋고 누구에게나 인기 많은 완벽한 학생이다. 그런데 영혼을 거부한다. 영혼은 납득할 수 없다. 육체 가까이에서 어떻게든 돌아가려고 애쓴다. 류는 다르다. 고등학교 1학년인 ‘은류’는 육체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고 모두에게 착하고 친절한 류는 영혼이 없어도 괜찮은 걸까.


소설은 수리와 류를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사고가 나기 전 어떻게 살았는지 수리와 류의 일상을 보여준다. 수리는 뭐든지 다 잘하고 싶은 아이다.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놀기도 잘 놀고 SNS 활동까지. 계획한 대로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내지 않아야 했다. 명상을 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영어 단어를 외우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영혼은 마음이 복잡하다.


삶의 의미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믿었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쌓아 올리고, 손에 잡히는 성취를 얻어 내는 것. 그 밖의 것들은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생각하니 우스웠다. 나중은 정확히 언제일까? 쌓아 올릴 수도,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시간을 참 가볍게 여겼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텐데. (27쪽)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지금이 편하다는 류는 예스맨이었다. 두 살 아래의 동생 완이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아픈 완이를 돌보느라 엄마와 아빠는 류를 챙길 수 없었다. 일찍 철이 든 류는 말 잘 듣는 아들, 착한 형이어야 했다. 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활에 적응하고 만족했다. 완이가 죽고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여전히 완이만 생각했고 류는 자신을 봐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수리의 영혼은 육체에 가까이 가지 못해 속상하고 류는 아예 육체에 관심도 없었다. 수리와 류에게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는 게 필요했다. 또래였기에 그랬을까. 수리와 류의 영혼은 서로의 마음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칭찬을 받을 때마다 불안하고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힘들었던 수리, 엄마가 혹시 자신을 버린 게 아닐까 두려웠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사는 류.


혹여 완이는 알고 있었을까. 허물어진 것들은 다시 쌓으면 된다는 사실을. 삶은 콘크리트 건물처럼 견고하지 못하다. 쉽게 흔들리고 작은 충격에도 휘청거리는 상자 탑과 같다. 그렇기에 또다시 쌓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오래전 완이가 그랬듯이 말이다. ‘형아, 상자. 상자 줘’. 쌓아 올린 것이 무너질 때 오히려 박수를 치던 녀석이었다. 완이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한 번쯤은 힘없이 무너져 내리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다시 쌓으면 된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귓가에 머물렀다. (202쪽)


기발하고 신선한 설정에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는 소설이다. 십 대와 선령이 나누는 재치 넘치는 대화에 함께 웃다가도 영혼 없는 삶을 사는 게 어디 수리와 류뿐일까 싶은 생각에 마음에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낀다. 어디선가 나의 영혼이 나를 따라다니는 건 아닐까 두리번거린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수리처럼, 이미 체념하고 마음의 문을 닫은 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영혼을 마주하고 돌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이 소설을 만나보면 좋겠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내가 나를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바라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관점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다. 학창 시절 원리도 모른 채 무조건 외우기만 했던 수학공식이나 원자번호와 유명한 과학자의 이름을 딴 법칙도 그러하다. 이해보다는 숙지가 먼저였다. 어떤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왜’라는 생각과 질문은 하지 않았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 우리가 보고 있는 밤하늘의 별빛이 헤아릴 수 없는 수 없을 정도로 머나먼 과거의 빛이라는 걸 익히는 데 급급했다. 그 하나하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관점’이란 부제의 물리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짐 알칼릴리의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는 무척 남다르게 다가온다.


하나의 과학 이론이 등장할 때 무수한 가설이 등장한다. 하나의 가설은 증명되기까지 실험적 관찰과 검증을 거친다. 이제껏 등장하지 않았던 가설이 여러 사람의 찬반과 연구를 거쳐 실제로 증명되었을 때 세상은 환호한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놀랍고 대단한 일이지만 그저 과학자의 일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짐 알칼릴리의 이 책을 읽고 물리학으로 통해 이 세상이 조금 더 신비롭고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과학이라는 게 특히 물리학이라는 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책은 10장으로 나누어 물리학에 대해 설명한다. 물리학을 대하는 태도로 시작하여 물리학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과 공간의 구분과 정의,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우리가 암기한 에너지 법칙, 양자역학과 열역학, 암흑에너지, 급팽창과 다중우주, 양자컴퓨터와 물리학자로 잊지 말아야 할 본분까지 십 대부터 시작된 물리학의 열정을 온전히 다 소모하려는 듯 열심히 설명한다. 얼핏 봐도 머리가 아프거나 어려울 것 같은 물리학의 세계, 그러나 사실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깊이 있게 심층적으로 다루는 건 아니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건 ‘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관점’이니까. 현재 물리학이 이렇게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며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본연의 임무는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을 올바르게 설명하고, 그 설명을 뒷받침할 근거와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것이죠. (36쪽)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실재를 가장 심오하고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죠. (192쪽)





세상을 이루는 물질의 가장 기본단위가 원자로 원자핵, 중성자, 양성자까지 알고 있던 나의 지식은 ‘쿼크’로 확대되었고 우주에 대해서도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힉스장’과 ‘우주 배경복사’를 통해 우주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 접근하였으며 ‘블랙홀’의 촬영도 가능하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 우주론에서 유행하는 ‘영원한 급팽창’이라는 흥미로운 개념도 알게 되었다. 우리 우주가 다중우주라는 무한한 고차원 공간 속에 있는 작은 거품에 불과하는 것, 우주 어딘가에 외계인이 존재할 거라는 기대도 비슷한 생각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양자 컴퓨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수학, 화학, 의학, 인공지능 다양한 분야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 삶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까.


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건 사실이다. 과학 서적의 아쉬운 점은 바로 이런 점이다. 내가 읽고 느낀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한계에 부딪히는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과 법칙이 어떻게 발견되고 시작되었는지 누가 그것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우리의 삶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그 설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 이 책은 기존의 도서보다 친절하고 쉽지만 말이다. 일상에서 다뤄지는 일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는 저자의 노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자가 영국 BBC TV와 라디오에서 다수의 과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확실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개방성으로부터 나옵니다. 과학은 현재의 지식에 의문을 품고, 더 나은 것이 등장하면 언제든 더 깊은 지식으로 대체할 준비가 되어 있죠. (273~274쪽)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모든 ‘왜’와 ‘어떻게’를 알고자 한다면, 물리학이야말로 실재의 진정한 이해로 가는 길입니다. (287쪽)


짐 알칼릴리의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는 물리학에 대한 경계를 무너뜨리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전에 물리학에 대해 무관심이었던 이들에게 물리학이 무엇인가, 우리의 물리학은 어디쯤 와 있을까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불러온다. 나가아 누군가에게는 물리학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물리학이라는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준 좋은 책이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5-12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3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2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3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6-10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ㅠㅠ 어려워서 뭐라고 댓글 달지 고민했던 글 ㅠㅠ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2-06-10 17:20   좋아요 0 | URL
어려운 주제인데, 이 책은 뭐랄까 어렵지 않다고 할까요. 아무튼 좋은 책이었어요. ㅎ

새파랑 2022-06-10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은 매월 당선~!!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2-06-10 17:20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도 매월 당선, 축하와 기쁨을 함께 나눠요^^*

서니데이 2022-06-10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6-11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절대 흘러가지 않는다. 현재의 나를 만든 모든 과정이 그러하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컨페션이 말하는 건 그런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의 오렌지
후지오카 요코 지음, 박우주 옮김 / 달로와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평범한 삶을 원한다. 평범에 감춰진 비범을 알지 못하면서 평범하게 산다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사는 일, 보통의 일상을 말한다. 평범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힘든지 생각하지 않고 말한다. 하루하루 출근을 하는 일, 하루하루 나와 상대를 견디고 살아가는 일, 작고 소소한 것들에 기쁨을 누리고 함께 축하하고 웃을 일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얼마나 위대한가. 후지오카 요코의 소설 『어제의 오렌지』 속 료가도 그랬을 것이다.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점장으로 성실하게 일하고 명절에 엄마가 계신 고향에 내려가고 교사인 동생 교헤이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는 삶을 말이다.


속이 아픈 일도 그냥 위경련이나 소화가 안 되는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서른셋의 나이에 위암이라는 진단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왜 나냐고 따지는 게 당연하다.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입원과 수술과 치료를 시작한다. 하나하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료가는 동생 교헤이가 보낸 택배를 받는다. 열다섯 살 무렵에 동생과 설산에서 조난을 당했을 당시 신었던 오렌지색 운동화였다.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어린 료가는 눈보라를 헤지며 길을 찾았고 구조되었다. 료가는 그때처럼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위암에 걸린 료가의 일상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어진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고등학교 동창 야다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서로를 기억하는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료가와 쌍둥이 교헤이에 대해 안부를 묻는다. 료가와 동생 교헤이는 진짜 쌍둥이는 아니지만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 료가와 교헤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부모님에게 묻지 않았다. 료가의 수술과 간호를 위해 도쿄로 온 엄마는 그런 두 아들이 안쓰럽다.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 낳은 아들 교헤이보다 료가를 신경 쓰지 못한 게 아닐까 자책감이 든다. 교헤이가 시작한 야구를 함께 하라고 한 일부터 형이라는 책임을 안겨준 일, 모든 게 마음이 아프다.


소설은 이처럼 료가와 연견될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려준다. 재혼한 엄마와 소원한 관계를 상처를 웃는 얼굴과 긍정적인 모습으로 감추는 야다, 자신이 부모님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교헤이, 그들은 료가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며 격려한다. 이상하게 료가와 대화를 하면서 비밀 아닌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료가의 항암 치료는 받으면서 고향에서 치료받기로 결정한다. 교헤이는 퇴근 후 료가를 자주 찾아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고 항상 바쁘게 일하던 엄마를 떠올린다. 자신을 친 아들로 여기도 키워준 엄마.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생각한다. 열다섯 살 설산에서 조난을 겪은 후 그 마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간다는 건, 잡초를 뽑는 일하고 똑같아. 잡초가 모든 정원庭에 자라나는 것처럼 가정家庭이라는 정원에도 자라나거든. 그래서 엄마는 매일 이렇게 잡초를 뽑는 거야. 가족 모두의 마음에 언제나 깨끗한 정원이 있게끔.” (234쪽)


야다가 료가의 방문 간호사로 나타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료가는 야다에게 교헤이와의 관계를 털어놓고 야다도 고교 시절 료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료가는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고 열다섯 살의 교헤이와 등반을 했던 산에 오른다. 열다섯의 교헤이와 료가는 산에서 내려와 부모님에게 쌍둥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고 말하기로 했다. 하지만 죽음에서 살아온 후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지금 이대로의 가족으로 충분하다는 걸 느꼈다. 현재의 료가도 마찬가지다. 힘겨운 등반길에서 료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낀다. 가족들의 사랑을 생각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사람은 계속해서 삶을 걷다가 이윽고 어딘가에서 그 걸음을 멈추는 것이다. 조금도 대수로울 것 없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346쪽)


등산로와 산을 뒤덮은 나무들과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불그스름히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곳이 현실 세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아픔과 권태감마저도 희미해져 가는 듯했다. 슬픔과 공허함조차 멀어져 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시간. 조약돌이 바다에 가라앉듯 의식이 서서히 흐려져갔다. (363쪽)


후지오카 요코의 소설 『어제의 오렌지』는 모두가 주인공인 가족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초반에는 암 투병을 하는 료가가 완치를 받지 않을까 기대했다. 료가가 치료를 받는 과정은 고통과 절망보다는 어떤 희망과 긍정이 있다. 그의 곁에는 든든한 친구와 동료 가족이 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 준 이들이 있었기에 료가는 행복했고 삶에 감사했다.


나는, 나답게 살아온 것이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주위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336쪽)


어쩌다 보니 ‘가정의 달’이라는 5월에 읽게 되었다.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만든 가족, 내가 만든 가족. 가족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울림을 전하는 소설이다. 저마다의 평범한 삶을 응원하며 가족과 함께 읽으면 좋을 소설이라는 진부한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리의화가 2022-05-09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족의 달에 걸맞는 소설이네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는 문장이 떠올라요.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가진 것들을 충분히 행복함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게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자목련 2022-05-10 11:47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지금으로도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기억의화가 님도 그런 행복이 가득한 날들 보내세요^^
 
욕조가 놓인 방 소설, 향
이승우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에 빠지는 순간 세상은 두 사람만 사는 공간이 된다. 그들이 어디 있든 마찬가지다. 연인들은 최초의 하늘과 땅을 가진 에덴의 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단 두 사람만이 거주하는 양 느끼고 말하고 행동한다. 연인 이외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연인은 연인 말고는 다른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랑은 세상을 축소시키는 기술이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세계는 두 사람만 존재하는, 아주 좁은, 이제 막 태어난 세상이다. (42~43쪽)


사랑을 말하는 일은 어렵다. 그것은 삶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같을 수 없고 설령 같다 해도 그 사랑의 지속 유무에 따라 사랑은 달라진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의 방식은 같을 수 없고 그로 인해 철옹성 같았던 사랑은 금세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어쩌면 사랑의 약속이나 사랑의 언약 같은 건 처음부터 지켜질 수 없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한 담론, 사랑에 대한 정의 혹은 그저 사랑일까 싶은 사랑 이야기를 생각한다. 이승우의 소설 『욕조가 놓은 방』에 대해서 말이다. 소설은 분명 사랑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은 분명 서로 끌렸고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잠깐 짚어야 할 게 있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던가, 아니다. 그저 스스로가 확신을 가졌을 뿐이다. 이국의 출장길에서 우연한 만남이 그에게 믿음을 주었다. 신비로운 마야인이 만든 피라미드에서의 만남과 충동적인 키스.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을까?


남자에겐 아내가 있다.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이별의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H 시로의 파견, 아내는 함께 갈 수 없다고 했다. 오히려 남자는 안도했다. 그리고 떠오른 그녀. 그녀가 H 시에 살고 있다는 건 운명일까. 이 역시 남자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렇게 어이없는 확신을 안겨주니까.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에겐 그는 사랑이라 할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에게 빈 방을 내준다. 그녀가 그를 받아들인 건 사랑일까. 그럴 수 없다. 두 해 전 비행기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그녀에게 사랑은 사라졌다. 그녀가 원하는 건 사라지는 일. 따뜻한 물속으로 걸어가 멀리 옮겨지는 일. 방에 놓인 욕조의 물속에서 그녀가 편안을 느끼는 이유이다.


그의 욕망은 그녀를 원하고 향하지만 발현되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자신의 집으로 그를 이끈 건 그녀였지만 그녀를 떠난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물소리였다. 그녀가 편안함을 느끼는 물, 욕조가 놓은 방은 그를 불편하고 힘들게 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아내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후에도 C 시를 찾는 아내. 처가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아픈 K를 만나러 가는 사실을 그는 묵인했다. K의 죽음을 그에게 전하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마야 유적지 욱스말에서의 찰나의 순간을 그는 운명이라 믿고 싶었을까. 그것이 두 번째였고 H 시에게 만남까지 이어졌으니까. 그녀의 집에서 나온 후 다시 그녀의 집으로 향하기까지 그는 생각한다. 확실한 이유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납득시킬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의 집에 남겨진 그의 물건을 찾으러 가라는 그녀의 연락이 없었더라면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없었다. 덩그러니 욕조만 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처럼 욕조에 들어간다.


당신은 아늑했고 편안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몸이 허물처럼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나면 전혀 다른 삶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신이,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의식의 안쪽, 또는 욕망의 밑바닥에서, 거의 언제나 너무나 간절히 소망해 온 것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삶. 당신은 그녀만이 아니라 아내도 이해할 수 있을 듯싶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수도 있고, 착각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119쪽)


이승우의 소설 『욕조가 놓은 방』은 작가의 『사랑의 생애』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발표 순으로는 『욕조가 놓은 방』이 먼저지만 두 소설을 읽는 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내게는 『사랑의 생애』를 먼저 읽은 게 다행으로 여겨진다. 『욕조가 놓은 방』은 『사랑의 생애』에 비해 아주 짧은 분량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의 형체나 질감은 모호하여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마치 사랑이 그렇지 않냐는 듯.


달빛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바다 위에서 일렁이던 달빛. 물의 속살을 탐하고 스미고 희롱하던 그 흰 달빛. 걸어오라고,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팔을 잡아당기던 그 너무 차가운 흰 달빛. 당신은 그 달빛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달빛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우리 안으로 길이 난 거지요. (34쪽)


『사랑의 생애』가 그러했듯 사랑을 탐미하는 이승우의 문장에 사로잡힌다. 관능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묘사, 물이 주는 이미지가 그러하다. 욕조가 놓은 방으로 우리를 이끌어 물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딛게 만든다. 사랑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고 그저 사랑만 믿고 나가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