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황종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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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엔 수만 개의 방이 있고 길이 있다. 어떤 이는 그 방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돌보며 살고 어떤 이는 가장 큰 방만 신경 쓰며 산다. 혹자는 마음 다스리기를 하라고 조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잡히고 다스려진다면 뭐가 어려울까. 복잡하고 혼란스러움 그 자체가 마음이니 문제인 거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타오르고 주체할 수 없기에 대책 없이 무너지고 만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런 인간의 심리를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아니, 꿰뚫어 본다고 하는 게 맞겠다.


『감정의 혼란』 속 네 편의 소설에서 만난 인물은 흔히 볼 수 있는 이들은 아니다. 어쩌면 심연 깊은 곳에서 꺼내지 못한 우리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오직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는 얼마 없으니까 말이다. 표제작 「감정의 혼란」의 인물만 봐도 그렇다. 소설은 회갑을 맞은 화자가 들려주는 스승과 자신에 대한 과거 이야기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를 꺼내는 건 과거에는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거나 그때는 감정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젊은 시절 학문과 등을 지고 방탕하게 지내다가 아버지의 방문으로 시골대학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그곳에서 한 교수의 열정적인 강의에 매료된다. 교수의 집을 오가며 학문에 열중한다. 그러나 제자인 자신을 대하는 스승의 태도에 혼란스럽다.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했다가 한순간 차갑게 변하는 일이나 수업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돌아오는 기이한 행동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교수의 젊은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지만 화자에게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 알 수 없는 마음과 반발심의 충돌 때문인지 화자는 교수의 젊은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은밀하고 짜릿함보다는 괴로움이 가득한 그에게 스승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화자는 그 사랑을 이제야 꺼내고 자신도 교수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어둠 속의 이 목소리, 어둠 속의 이 목소리, 이 목소리가 내 가슴속 깊숙이 꿰뚫고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뼈저리게 느껴졌던가! 그 목소리에는 내가 그전에, 아니 그 전뿐 아니라 그후에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울림이 깃들어 있었으니—평범한 운명을 사는 사람은 결코 헤아일 수 없는 심연에서 터져나오는 울림이었다. ( 「감정의 혼란」, 386~387쪽)


슈테판 츠바이크는 휘몰아치는 교수의 감정과 어찌할 줄 모르는 화자의 마음을 소설에서 섬세하게 묘사한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억누르다 결국 폭발하고 마는 순간에 도달한 교수의 처절한 목소리가 내게도 들릴 것만 같다.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키고 싶거나 들키고 싶지 않았을 그 복잡함. 그 시절을 깊고 깊은 곳에 가둬둘 수밖에 없었던 화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누군가의 비밀을 듣는 일을 조심스럽다. 그것이 소설 속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독자를 소설이라는 비밀에 발을 들이게 만드는 놀라운 이야기꾼이다. 표제작에서 화자와 스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게 만든 것처럼 「아모크 광인」과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모크 광인」 속 여행 중인 화자는 인도를 떠나 유럽을 향하는 배에서 지루한 일상을 보내다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선박에 숨어 지내던 남자로 그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다. 그런데 화자가 보기에 몹시 불안한 상태라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 보여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만 남자는 냉소적이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일까. 화자는 그 남자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고 마침내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자는 의사로 7년 전에 인도에 왔다. 사연 많은 남자는 인도에 도착해 처음엔 의욕적으로 살았다. 현지어를 익히고 원주민과 잘 지내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흥미를 잃고 무기력하게 지냈고 계약기간이 끝나 유럽으로 돌아가기만 기다리던 차에 한 여자가 찾아온 것이다. 원주민이 아닌 백인 여자였다. 그러나 여자는 의사에게 시원하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지 않는다. 의사를 찾아왔다는 건 어디가 아프거나 진료를 받을 목적인데 말이다. 남자는 호기심이 생겨 여자에 대해 알아보고 관찰하다 도도한 여자에게 빠져버린다. 그러니까 화자가 남자에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 심리의 수수께끼는 불안할 만큼 나를 사로잡아, 그 관련을 밝혀내고 싶은 충동이 핏속 깊이 들끓게 한다. ( 「아모크 광인」, 119쪽)


「아모크 광인」속 화자가 느낀 이런 감정은 어떤 것일까. 점점 타인과 무감한 사이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불필요한 감정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상하게 끌리는 상대에게 마법에 걸린 것처럼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되는 일 말이다. 나와 아무런 연결점이 없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처럼. 단 하루 동안 여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설은 호텔 옆 여관에 모인 일곱 명의 숙박객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호텔 주인의 아내가 손님이었던 청년과 야반도주를 한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수다를 떤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룻 사이에 사랑이 싹틀 수 있을까. 설령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 해도 남편과 두 아이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대다수가 아내를 비난하지만 화자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자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한 그녀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화자의 말을 듣던 한 노부인은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속 여인이 바로 이 노부인이다.


그녀는 마흔에 남편과 사별하고 슬픔에 빠져 방황하다 우연하게 룰렛 도박에 열중하는 한 청년을 만난다. 「아모크 광인」속 화자가 그러했듯 그녀도 청년을 향한 호기심을 거부할 수 없었다. 청년이 도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를 뒤쫓는다.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달래로 위로하다 하룻밤을 보낸다. 결과적으로 청년은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도박을 끊어내지 못해다. 그러나 그 스물네 시간은 예순일곱 해를 살아온 지금까지 평생을 지배한다고 고백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날 밤은 싸움과 대화, 열정, 분노와 중오 눈물어린 애원과 도취가 끝없이 이어져 저에게는 수천 년이 흐르는 듯 느껴졌고, 우리 두 인간은, 한 인간은 죽을 듯 날뛰며, 다른 한 인간은 얼결에 휩쓸려, 뒤엉킨 채 비틀비틀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죽기 살기로 소동을 뚫고 새로이 태어났어요. 완전히 변모하여, 감각과 감정이 바뀌어, 새로이.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 236~237쪽)


어디 그뿐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고백하자면 복잡한 심리의 묘사와 탁월함에 절로 감탄하지만 나는 이런 문장에 더 반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얼마나 수많은 사람을 관찰을 했을지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 공을 들였을지 알 수 있다.


손은 아무리 은밀한 비밀도 여지없이 드러내요. 간신히 달래져 잠자는 듯 보이던 손가락이 기품 있는 무심함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필할 수 없이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손들은 저마다 특별한 인생을 드러내니까요. (「어느 여인의 인생의 스물네 시간」, 214쪽


슈테판 츠바이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마다 특별한 인생 안에 숨겨진 욕망과 비밀이 있다는 걸 말이다. 우리가 아는 건 겨우 몇 개에 불과하다는걸. 그러니 재밌고 그다음이 궁금해서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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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10-27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타는 비밀 말고는 다른 출판사에서 읽어봤지만..츠바이크여서 저도 구매했습니다 ㅋ 츠바이크의 문장은 역시라는 감탄만 나옵니다~!!!

자목련 2025-10-29 12:31   좋아요 1 | URL
역시 새팡님은 읽으셨군요. 읽을 때마다 좋음이 커질 것 같습니다!

yamoo 2025-10-27 2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책은 믿고 볼 수 있죠. 일단 저도 츠바이크 책들은 쟁여놓고 있는데, 이 책은 아직이네요. 이참에 얼른 갖춰놔야 겠습니다..ㅎㅎ

자목련 2025-10-29 12:35   좋아요 0 | URL
쟁여놓은 책만큼 츠바이크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시군요!

coolcat329 2025-10-2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정의 혼란은 두 번, 아모크 광인도 읽어봤지만 이 책으로도 읽고 싶네요. 츠바이크의 책은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입니다.

자목련 2025-10-29 12:36   좋아요 0 | URL
츠바이크의 문장은 정말 놀랍고 대단해요^^
 


단순함을 지향하지만 마음이 복잡하다. 밀물처럼 밀려온 근심과 걱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는다. 밀물처럼 책도 도착했다. 설물처럼 빠져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들. 아니,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연휴 시작 적에 주문한 책이다. 소설, 시, 에세이. 언제나 그렇듯 골고루 읽으려고 주문했다. 읽으려고!


모두 반가운 책이다. 좋아하는 김혜진 작가의 장편소설이 제일 반갑고 허연의 시집과 시인 유계영의 에세이는 제목을 보자 구매했다. 허연 시집은 나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땡스투는 appletreeje 님에게. 그리고 표지에 반한 소설보다 시리즈. 올해의 소설 보다 시리즈의 표지는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기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올해의 소설보다는 계속 내 곁에 머무를 게 될 것이다. 제일 먼저 허연의 시집을 펼쳤다. 목차에서 가장 먼저 찾게 된 시는 표제작이지만 이번 시집에는 여러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이런 시.

나도 나방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

궁금했으니까

고통 속에서만 하는 짓만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점차 나빠지는 이야기

난 몇 가지 종류의 계절을 경험한다

나쁜 계절과 나빠질 계절

상처 수집가들이 급할 건 없다

지구의 축은 이미 기울어져 있으니까

올 것은 반드시 오고

죽을 것은 반드시 죽는다

나는 통증에 시달리며 이 구역의 계절을 만든다

슬픔에도 기술이 있다

다 죽고 나면 계절은 성당이 된다

새로 내리는 비는

슬픈 챔피언들을 불러 모은다

이 계절에는

속된 세상을 등지는 나무들이 있었다

(「계절감」, 전문)




허연의 시가 좋아서, 하나 더. 어느 시절의 내 마음 같아서. 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반갑고 좋은 책처럼 그런 일상을 살기로 한다.


자전거는 지나가고 빗물은 떨어진다

알면 쓸쓸해지고 알면 상처받는 일들을

나는 애써 들여다보려 했었다

누가 졌는지 누가 이겼는지

굳이 알 필요도 없으면서

그걸 꼭 찾아봤다

맨홀로 달려가는 빗물의 고집을

뻔히 알면서도 그 끝을 보고 싶어 했고

레몬이 땅에 떨어져 다은 몸을 받는 게

당연한 줄 알면서도

괜히 상념에 잠겼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살고 싶다는 생각은

죽고 싶다는 결말로 변해 있곤 했다

오늘 지나쳤던

담장 밑에 장미가 떨어져 있는 것도

애당초 내 탓 같았다

누군가 입관하는 밤에

개들만 깨어나 짖는 밤에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결심한다

이제

나를 위해

장미를 위해 모른 척하기로 한다

해오던 일을 여전히 하는 생명들을

그냥 모른 척하기로 한다

(「생(生)을 모른 척하기로 한다」, 전문)





반갑고 좋은 책처럼 그런 일상을 살기로 한다. 반갑고 좋은 것을 찾는 일. 친구의 바뀐 프로필을 확대하며 미소 짓는 일, 갑자기 생긴 원두를 갈아 내려마시는 조금 긴 시간, 점심에 무얼 먹을까 고민하고, 처음 알게 된 꽃을 선물하고 주문하는 일, 드라마의 다음 회를 기다리는 일. 소소하지만 대단한 일상으로 마음을 간단하고 단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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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5-10-14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감사합니다! 좋은 책들을 함께 읽는 기쁨까지요~

자목련 2025-10-27 13:09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
허연 시집, 좋아요^^

책읽는나무 2025-10-14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김혜진 작가의 신간 나온 소식을 보고 장바구니에서 보관함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보관함으로 넣었더랬는데…역시 자목련 님은 구입하셨군요.^^
소설 보다 가을 편의 표지를 보고 예상치 못한 과실이라 좀 놀랐었는데 그래서 더 예쁜 것 같아요. 겨울 편은 또 어떤 표지일지? 저도 무척 기다리는 중입니다.
인용해 주신 시를 읽고 있자니 종일 내리는 가을비 덕분인지 시를 읽기에 적당한 계절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자목련 님도 모쪼록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5-10-27 13:10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저는 책은 냉큼 구매하는데, 읽기는(먼 산~~)
소설 보다 겨울은 귤이 아닐까 싶어요 ㅎㅎ
자꾸 좋아하는 작가의 책과 궁금한 책이 나와서 구매만 자꾸 하고 있어요, 큰 일이에요!

구단씨 2025-10-1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 보다 시리즈를 수집(?)하는 중입니다.
올해 출간 작품 표지가 너무 예뻐요.

자목련 2025-10-27 13:11   좋아요 0 | URL
올해는 특히 표지가 예뻐서 표지가 구매로 이어지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 같아요 ㅎㅎ

2025-10-22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27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해 연습 위픽
김지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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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했을 때 다음에 잘 하면 된다, 괜찮다 말해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든든하다. 그것이 실수가 아닌 실패였더라도 도전할 용기가 생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이가 있는 건 아니다. 다수가 아닌 단 하나뿐인 선택의 상황에 놓인 이라면 어쩔 수가 없이 그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고 살펴볼 여력 따위는 없으니까. 김지연의 소설 『새해 연습』 속 ‘홍미’도 그러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제대로 된 돌봄 없이 자란 홍미는 스스로 모든 걸 해내야 했다. 이젠 부모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 홍미에게 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할머니가 18년 동안 써온 일기장이 남겨졌다. 유산인 셈이다.


홍미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할머니. 할머니의 이름은 ‘양지’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양지란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양지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18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써온 일기. 일기를 쓰는 할머니라니. 그 일기가 홍미에게 도움이 될까. 할머니의 죽음 소식을 전한 공무원의 말처럼 홍미의 소유가 된 일기장. 홍미 마음대로 해도 되는 물건이다. 어쩌면 처음으로 하나의 선택이 아닌 다양한 경우의 수로 이어질 수 있는 물건.


소설은 홍미의 일상과 양지가 쓴 일기를 들려준다. 작은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는 홍미의 일상은 단조롭다. 그래도 언제나 그랬듯 홍미는 늘 새해를 기대한다. 다른 곳으로 이직할 수 있고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 그런 새해가 홍미에게 오지 않았지만 새해니까. 새해를 위해 연습하는 해라니. 이런 문장을 쓰는 김지연이 좋다. 어느 정도 그 마음을 알고 그 상황을 헤아릴 수 있다는 거니까. 누군가를 어루만질 수 있는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올해는 늘 새해를 위해 연습하는 해였다. (26쪽)


다시 소설로 돌아오면 홍미가 읽는 양지의 일기는 담백하고 아름답다. 양지의 일상도 단조롭기는 마찬가지다. 일기 어디에도 가족과 친구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양지를 찾아오는 공씨가 있을 뿐. 양지의 하루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없다.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모든 걸 다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이다. 양지의 일기를 읽으며 조금 일찍 홍미와 양지가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죽음도 미리 연습해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달력을 보니 오늘 보름이다. 절에 간 지도 오래되었다. 집에서는 달을 볼 수가 없다. 다음 보름까지는 한 달이 남았다. 달을 보고 있으면, 자기 것이 아니었던 빛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은은히 빛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없이 흥그러운 마음이 된다. (양지의 일기 중에서, 57쪽)


홍미는 유일한 친구 민석과 함께 양지의 집을 찾는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집은 돌보는 이가 없어 폐가나 다름없다. 옆집 이웃을 만나 공 씨의 존재를 묻지만 양지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양지에게 손주 자랑을 하던 공 씨는 누구일까. 그러던 차에 홍미에게 공씨가 연락을 해온다. 공씨는 양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자원봉사자였다. 공씨가 원했던 건 아니고 다니던 마트의 재계약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홍미가 만난 공씨는 손주가 있을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양지의 일기는 거짓이었다. 양지는 일기를 통해 원하던 삶을 연습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홍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기 전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아내는 데 통달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홍미는 자신이 최선의 것을 고를 안목이 있다고 착각했다. (60~61쪽)


홍미에겐 다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사장인 경식이 홍미가 자신이 뜻대로 되지 않자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퇴사를 요구한다. 살고 있는 반지하의 빌라도 경매에 넘어가 전세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홍미의 삶은 최선의 것을 고를 안목이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홍미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결혼하자던 민석에게 결혼하자고 농담을 한다.


이처럼 김지연의 소설 속 인물은 유머가 있고 농담을 할 줄 안다. 여유가 넘쳐서 그런 게 아니다. 때로 어쩔 수 없어서, 마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우는 캔디 스타일은 아니다. 빨강 머리 앤에 더 가깝다고 할까. 내 생각엔 그렇다. 김지연의 소설을 기대하는 이유 중 하다. 그러니 홍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충분히 연습했으니까. 다음이 없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홍미에겐 새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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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5-09-30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올해도 이제 석 달 밖에 남지
않았네요.

어쩔 수 없이 사는 삶...
왠지 모르게 공감하게 되네요.

자목련 2025-10-01 09:3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시간이 정말 빠르죠.
추석 연휴 지나면 부쩍 추워질 것 같기도 하고요.

구단씨 2025-12-10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우연히 이 책 읽고 진짜. 좋았어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기도 했고.
이야기도 심플하고 문장도 어려울 게 없었는데, 뭔가 쿵 하는 느낌?
특히 저기 60~61페이지 인용된 부분이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싶었거든요. 최선의 것을 고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또 어떻게 살아갈까 싶어서요.

자목련 2025-12-18 10:56   좋아요 0 | URL
진짜 좋았다는 느낌, 알 것 같아요.
김지연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 책 읽고 더 좋아졌거든요!
 
감정의 혼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황종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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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음엔 그 사람이 어떻게 됐어? 빨리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감정의 혼란 속 단편이 그러했다. 화자에게 멈추지 말라고 조르는 독자가 된다.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는 작가, 정말 대단하다. 읽는 내내 놀라고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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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바깥여름 - 12g, 7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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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이별하는 마음으로는 아니고, 마시고 싶은 커피는 따로 있는데 할인이라서 구매. 따듯한 커피를 마시는 이 시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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