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시를 좋아했을까. 읽지도 않을 시집을 욕심내며 사들이는 나는 시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시집이 있다. 선배 언니가 선물한 정현종 시인의 시집이다. 나를 시로 이끈 사람은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과 선배 언니였다. 그리고 문학소녀 흉내를 내고 싶었던 나의 열망. 그 후로 나는 시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시를 배우던 수업 시간에 가장 중요했던 건 시험에 나올 것들, 은유와 상징, 공감각적 표현 같은 걸 외우기에 급급했다. 십 대에는 시집은 좋아하는 이를 위한 선물이 전부였다. 나를 위한 시집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시절에 나를 위한 시집을 곁에 두었더라면 어땠을까. 황인찬, 박준, 신미나, 최지은, 유희경 등 20명의 젊은 시인들이 10대 시절을 추억하며 쓴 60편의 시와 시작노트를 만날 수 있는 『도넛을 나누는 기분』을 읽으면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빨리 그 시절이 지나가기를 바랐던 마음, 소용돌이치는 마음이 잠잠해질 수 있을까, 의심하고 의문하던 시절을 가만히 떠올린다. 지난 10대 시절을 추억하며 나는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어 자꾸 일게 되는 시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대

새를 기르는 사람과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

그렇다면 너는?

우리는 하늘과 바다 그 사이의 평지를

험준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어항이 출렁거려 넘치지 않게

새장이 쏟아져 문 열리지 않게

그렇게 조심조심 걸어가는 게 삶이래

그동안 잃어버린 새와 물고기는

모두 어디에 모여 살고 있는지

그곳의 도로명 주소는 내 이름이 아닌지

하늘을 모두 읽을 수가 없어서

새장을 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바다를 모두 받아 적을 수가 없어서

어항을 쏟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 대신 살아가는 말들이 있어서

종이를 펼쳐 긴 편지를 쓴다

둥지를 떠난 하늘에게

도착한 적 없는 바다에게

넘어지지 않고 걷는 너에게 (「새장과 어항」, 서윤후)






무언가 되고 싶었던 날들, 무언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날들을 지나 무감하고 무기력해진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바다에 도착하지도 못한 나의 조각들, 그 조각들은 여전히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여전히 사는 게 뭔지 모르겠고 버거운 날들. 어쩌면 그게 삶이라는 걸 모른 척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자존감이 강했다고 자부했지만 속내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던 모자란 마음에게 미안하다 말한 적 없다는 걸 신미나의 시를 읽으며 깨닫는다. 왜 그리 숱한 비교를 했던가. 왜 그리 나를 작게만 여겼던가. 숨겨야 할 것도 창피해야 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너의 미소가, 너의 모든 게 귀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런 나를 사랑하고 지금껏 우정을 나누는 소중한 친구와 함께 읽으면 좋을 시.

못생긴 내 손

뭉툭하고 굵은 내 손

남들이 볼까 봐

부끄러워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너는 내 손을 끌어다

주머니에 넣었지

주머니 속은 새 둥지야

너의 어두운 마음도

슬픔도 품을 수 있어

어두운 데서도

네 슬픔이 환히 보인다

내가 끌어다 쥔 내 손

작고 못생긴 내 손

주머니 안에서 따뜻했지

새알을 쥔 것처럼 두근거렸지 (「주머니」, 신미나)

어른이 되면 모든 게 쉬울 거라 상상하며 어른이 되기를 바랐던 나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시절의 나를 잊었다. 잊어야 속상한 마음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현명한 선택과 올바른 판단을 하는 어른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동시에 나름 나아지고 있다고 아주 실패는 아니라고 그 정도면 괜찮다고 위로한다. 그래서 결정된 미래가 있다면 조금 수월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는 마음을 옮겨둔 박준의 시를 읽으며 그때 나도 그랬었지 하며 웃게 된다.

연안에 내리는 눈들을 좋겠다

내리자마자 바다가 되니까

마을에 내리는 눈들은 좋겠다

내리자마자 사람이 되니까

골짝에 내리는 눈들은 좋겠다

산그늘을 덮고 봄을 볼 수 있으니까 (「눈」, 박준)

스스로의 존재를,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조금 위로가 되는 시집이 아닐까 싶다. 어떤 조언과 격려보다 뜨겁게 그들의 마음에 안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시를 권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시를 읽는 기분은 이런 거라고 말하는 시집이다. 가만히 시를 필사하면 복잡한 마음을 다스릴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다 진짜 시가 좋아질지도 모르고. 마음에 품을 시를 만날 수도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시가 좋아하는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모든 게 괜찮아지는 순간과 맞닿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유희경의 시작노트에서 말하는 그 기분을 느끼고 만끽하게 될지도.

기분의 세계는 기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유 따윈 없는 기분. 기분은 좋고 나쁘고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기분은 오지도 가지도 않고 느닷없고 난데없어서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분은 형언할 수 없다. 시를 쓴다는 것, 또 시를 읽는다는 것 역시 기분의 문제이다. 나는 당신의 기분을 침범할 수 없다. 당신이 나의 기분에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사이를 두고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한다. 시를 나눈다는 건,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한다. (유희경의 시작노트)


알 수 없는 어떤 기분을 상상한다. 시를 품었던 나의 첫 마음과 닿았던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꺼낸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그 마음을 그려본다. 그들의 첫 시집에 담긴 그들의 첫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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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03-1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좋아라~ ^^

올려주신 시도 좋고, 자목련님의 독백같은 글도 좋아요.

자목련 2025-03-17 11:42   좋아요 0 | URL
아이쿠, 행복해라~~

blanca 2025-03-1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읽고 싶어지는 페이퍼네요.

자목련 2025-03-17 11:43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지만 솔직한 시인의 마음이 느껴져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5-03-1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의 글이 시 입니다.
다른 시를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자목련 2025-03-17 11:44   좋아요 1 | URL
복사해서 저장하고 싶은 댓글~~

감은빛 2025-03-16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좋은 글이네요. 저도 오늘은 시집들을 펼쳐봐야겠어요.

자목련 2025-03-17 11:44   좋아요 0 | URL
펼쳐둔 시집과 함께 봄을 만끽하면 좋겠어요!

새파랑 2025-03-17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읽고 싶어지네요~! 사놓고 안읽은 시집을 꺼내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25-03-17 11:45   좋아요 1 | URL
지금은 시 읽는 시간~~
 


야금야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뭔가를 먹고 있다. 야금야금 맛있게. 이름하여 독서간식! 그래도 지난 계절보다 책을 읽는 양과 속도가 나아지고 있으니 뭐 나쁘지 않다. 최근에 먹은 마른 오징어가 너무 맛있어서 쿠팡에서 오징어를 검색하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오징어를 먹으면 맥주도 먹고 싶고 맥주를 먹으면...


백수린의 단편집을 다 읽었다. 수록된 단편 가운데 두 번째 읽는 단편도 있었는데 두 번 읽으며 더 좋아졌다. 그런 좋음을 기대하며 단편집을 한 권 더 구매했다. 윤성희의 단편집 『느리게 가는 마음』과 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 『루시 게이하트』로 만난 윌라 캐더의 소설은 이제야 생각났다. 이 소설도 좋다는 평이 많으니 얼마나 좋을까.






책보다 더 반가운 건 독서간식. 알라딘의 간식은 책보다 더 큰 유혹이다. 이번에 구매한 건 ‘촉촉 고구마 스틱’이다. 달지 않아서 좋다. 맛을 봤으니 이제 ‘촉촉 단호박 스틱’을 먹어봐야겠다. 다음에 책보다 간식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조금 따뜻해지나 싶더니 황사가 따뜻한 기운을 빼앗으려 한다. 뿌연 하늘에 익숙해지는 순간 봄꽃이 흐드러질지도 모르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올봄에는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안부도 듣고 싶다. 나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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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3-1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마 스틱 조금 고민하다 안 시켰는데 이 글 보니 벌써 후회되네요. 다음엔 꼭 먹어볼래요. ^^ 달지 않다,는 말에 더 관심이 갑니다. 윌라 캐더 책들도 정말 좋았어요. 읽고 정리하지 않고 갖고 있을 만큼 좋았어요.

자목련 2025-03-16 11:21   좋아요 0 | URL
제 기준에는 달지 않아서 추천합니다!
윌라 캐더 책들 좋다고 해주시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새파랑 2025-03-1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라캐더의 <나의 안토니아>도 좋아요~!! 백수린 작가 단편집은 읽어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25-03-16 11:22   좋아요 0 | URL
윌라 캐더 추천하시는 새파랑 님께 백수린의 단편을 추천합니다^^
 
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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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모든 것』을 읽으면서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었을 때처럼 행복했다. 아련하면서 포근하고 따뜻하면서 서늘한 슬픔 같은 것들이 몰려왔다. 소설에서 에세이 느낌이 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집을 함께 읽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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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3-13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자목련 2025-03-16 11:23   좋아요 1 | URL
소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에세이 같아서 저는 좋았어요^^

새파랑 2025-03-1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 겠네요~!!

자목련 2025-03-16 11:23   좋아요 0 | URL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어요!
 
촉촉 고구마 스틱 (1개) - 고구마스틱 촉촉 스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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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좋아해서 주문했다.맛이 궁금하기도 했고. 맛있다. 많이 달지 않아서 괜찮다. 그러나 맛을 들여서 큰일이다. 하나로는 부족한 간식. 단호박 맛도 먹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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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발견 -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사랑하는 법
캐스린 슐츠 지음, 한유주 옮김 / 반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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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에겐 엄마의 죽음이 그러했다. 처음 맞이하는 사랑하는 죽음이라 그랬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생각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게 충격이었다. 가장 절망적이었던 건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엄마의 부재를 아무렇지 않은 일로 만들었다. 오히려 나의 힘듦을 엄마가 모르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족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상실을 삶으로 데려왔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준비할 수 있다는 감사를 불러왔다. 며칠이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고 암 투병을 하는 큰언니를 보며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그들의 부재가 얼마나 큰 힘을 지녔을지 준비할 수 없었다.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던 아버지의 죽음이 만든 부재는 큰 구멍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자리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거기 없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캐스린 슐츠의 『상실과 발견』은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상실에 대해 말한다. 상실의 의미를 보여준다. 상실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할까. 가족의 죽음으로 비롯된 지극히 개인적인 상실에 대한 감정이 아닌 상실 그 자체에 대한 은유와 통찰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한 사람이 사라지는 과정, 한 사람의 생이 부재한 자리에 채워지는 상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자 애도의 글은 모두를 상실의 구덩이로 빠지게 만든다. 아니, 상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그리워한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 여과된 삶. 아버지의 내면의 빛에 비추어 바라본 삶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사라져버린 가장 중요한 걸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음을 나는 즉시 깨달았다. 아버지의 방식대로 바라봤던 삶. 철저하게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대로의 삶. 내 모든 기억들을 다 모아도 아버지처럼 존재하는 단 하나의 순간도 만들어낼 수 없고, 내가 겪은 상실 전체는 아버지가 경험한 상실 앞에서 창백해진다.(99쪽)


한 사람의 존재, 역할, 사소한 집착, 취미, 습관, 이 모든 게 한순간 부재하며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은 측량할 수 없고 측량될 수 없다. 상실이란 그런 것이니까. 가족의 죽음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일은 최대한 미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그것은 우리 앞에 도달하고 상실의 시간은 이어진다. 상실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상실이 삶을 지배하고 전부라 여긴다. 상실을 이길 다른 감정이 스며드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캐스린 슐츠가 ‘발견’에 대해 사유하고 내려간 사랑은 우리 삶에 상실과 대등한 위치에 놓인다.







그녀와 C의 만남, 그녀가 발견한 사랑, 그녀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을 발견하는 과정은 아름답고 경이롭다. 이 역시 상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경험이며 감정이지만 발견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일인이 우리는 알게 된다. 발견이 지닌 놀랍고도 신비한 힘, 그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배우고 깨우친다. 그러니까 이 책을 통해 발견을 발견했다고 할까. 아무튼 굉장하다. 그녀의 사유에 감탄한다.


애도와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유동적인 속성을 지닌다. 사랑은 어디로든 흐르며, 어떤 형태의 용기도 채울 수 있고, 흠뻑 스며들지 않는 것이 없다. (166쪽)


상실은 세계를 축소하지만, 발견은 풍성하게, 풍부하게, 재미있게 한다. (228쪽)


상실이 삶을 지속적으로 우울하게 만들었다면 발견은 삶을 기쁘고 황홀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상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상실에 대한 부분을 힘들게 읽었기에 발견의 주제로 넘어오면서 나는 이 책에 더 좋아졌다. 고백하자면 좋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그런 책이다. 엄청난 책인데 그것에 대해 잘 소개하지 못해서 속상한 마음이다. 너무 좋은 책은 너무 좋은 마음이 급해서 서툴기 마련이라고 포장한다.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건 한없이 경이롭다. 우리 감각의 척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엄청나게 작은 데 비해 이 세상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걸 깨달으며 바뀔지도 모른다. 발견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가 발견에서 절망이 아닌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점이다. 끝없이 드넓은 이 우주에서, 삶이 무한히 변이하는 가운데,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경로들, 그리고 가능성들 가운데, 나는 여기 이 집, C의 곁에 있다. (233쪽)


우리 삶에 발견이 없다면 어쩔 뻔했는가. 상실을 대신할 발견은 아니지만 상실은 상실대로 발견은 발견대로 우리를 충만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캐스린 슐츠는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자신의 경험에 비춰 눈부시게 담아냈다. 한없이 작은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고 발견됨으로 성장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상실은 일종의 외부적 의식으로, 우리에게 유한한 날들을 잘 사용하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돌보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과 이미 사라진 것을 포함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보기 위해 여기 있다. (300~301쪽)


상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에게 가만한 위로를 전하며 다가올 상실에 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니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존재가 전하는 벅찬 감동이라고. 상실과 발견이 반복되는 그것이 삶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 게 살아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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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3-1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좋았어요. 자목련님이 통과한 상실의 과정에 절절하게 공감이 갑니다....인생의 후반기가 상실로 채워지고 결국 나도 갈 거라 생각하니 요새 왜 이리 마음이 쓸쓸한지 모르겠어요....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자꾸 자신이 없어져요.

자목련 2025-03-13 15:06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책이에요. 잃어버리고 사라지는 것들은 늘어나는데 자꾸만 붙잡으려고 애쓰는 마음이 힘들지요.
죽음과 직면할 때, 말씀처럼 나는 잘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