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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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만을 향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그녀를 향해 열려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마저 그녀로 채운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와 보낸 짧은 시간의 기억은 더듬고 그녀를 위한 글을 쓴다. 부질없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함께 할 수 없을지라도 그녀로 인해 인생이 완결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고독하면서 쓸쓸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고독한 생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사랑이다. 『사랑의 역사』라는 진부한 제목의 소설에서 그 사랑을 확인하다. 사랑의 근원은 무엇이며 사랑은 어떻게 기록되고 간직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의 역사이니 분명 누군가의 사랑의 기록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아름다운 로맨스를 기대하기엔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열쇠공으로 살아온 팔십 대 노인, ‘레오 거스키’의 하루는 혼잣말을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상이다. 가족도 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에게도 분명 사랑의 시간이 존재했을 터. 그렇다면 ‘레오 거스키’가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 왜 그녀는 곁에 없을까. ‘레오 거스키’에게 사랑의 시작과 끝은 단 한 사람, ‘앨마 메러민스키’뿐이었다. 수줍고 서툰 감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다가간 소년과 소녀. 그들은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 살았고 우정을 쌓았고 첫사랑의 감정을 키웠다. 레오는 오직 단 한사람 앨마만을 위한 글을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 앨마와 꿈꿨던 미래는 2차 대전으로 무너졌다. 앨마는 미국으로 떠났고, 레오는 폴란드에서 죽음의 위협을 피해 숨어 지냈다. 그리고 결국엔 레오도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왔다. 어쩌면 누군가는 레오가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단번에 주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막연하게 삶의 마지막에 헤어졌던 앨마를 만나는 게 아닐까 기대했다. 적어도 레오와 앨마는 미국에 있으니까. 


이제 소설은 다른 이야기로 시선을 돌린다. 열네 살 소녀 ‘앨마’가 등장한다. 이 소녀가 혹시 레오의 손녀일까. 나는 혼자 생각했다. 레오와는 단 하나의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소녀다. 엄마와 남동생과 살고 있다.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힘든 사춘기를 보내며 아빠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아빠를 그리워하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아빠란 말도, 아빠와의 시간도 언급하지 못한다. 앨마의 이름은 <사랑의 역사>란 책의 여주인공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 책은 아빠가 우연하게 서점에서 발견하고 엄마에게 선물한 책으로 스페인어로 쓰인 책이었다. 책의 내용도 모르면서 소녀 앨마는 자신에게 이름을 준 주인공 앨마가 궁금하다. 


소설은 노인 레오와 소녀 앨마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레오의 이야기보다 엉뚱하고 발랄한 소녀 앨마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다. 소녀 앨마는 아빠를 잊지 못하고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번역만 하는 엄마에게 뭔가 신나는 일, 그러니까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고 싶어 한다. 주변을 둘러보고 엄마와 어떻게든 이어주고 싶지만 결과는 실패다. 드디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엄마에게 한 권의 책을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의뢰하는 한 남자. 편지를 보낸 ‘제이컵 마커스’란 남자가 번역을 부탁한 책은 <사랑의 역사>였다. 이 책이 그 책일까. 앨마는 엄마인 척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에 대해 알아가려 한다. 그리고 엄마가 번역한 <사랑의 역사>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앨마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앨마 메러민스키’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한다. 앨마의 호기심과 엄마를 향한 사랑이 너무 예뻐서 ‘제이컵 마커스’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인 <사랑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소설 <사랑의 역사>는 어떤 이야기일까. 점점 더 궁금해졌다.


앨마의 엄마가 번역한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소설보다는 아포리즘의 형식을 빌린 사랑의 고백이자 연서처럼 느껴진다. 분명 소년 시절 레오가 ‘앨마 메러민스키’를 위해 쓴 소설이 맞는 것 같은데. 작가의 이름은 다른 사람이다. 그는 누구일까. 조각을 하나씩 연결을 시켜 이야기가 완성되는 동안, 독자는 감탄한다. 한 권의 책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놀랍고 신비한 인연.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결국엔 하나의 이야기 <사랑의 역사>로 모인다. 저마다의 사랑의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고 할까. 첫사랑의 애틋한 기억으로 일생을 견뎌온 레오와 ‘앨마 메러민스키’의 사랑의 역사,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될 소녀 앨마의 엄마와 아빠가 만든 사랑의 역사, ‘앨마 메러민스키’의 흔적을 찾아가는 열네 살 소녀 앨마가 만들어갈 사랑의 역사. 


내가 무슨 일을 하건, 혹은 어떤 사람을 찾아내건, 나는-그는-우리 중 누구도-엄마가 간직한 아빠의 기억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마침내 이해했다. 엄마를 슬프게 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그 기억으로 엄마는 세상을 만들어냈고, 다른 사람은 불가능해도 엄마는 그 안에서 살아남은 방법을 알았다. (277쪽)


일생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진정한 사랑이라 해도 그 사랑이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은 부족함 없이 아름답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던가. 조금씩 사랑에 대해 알아가는 소녀 앨마를 통해 우리는 느낀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확신과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슬프면서도 유쾌하고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러운 즐거움이 가득한 소설이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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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는 떠났고 더위가 남았다. 입추와 말복이 지났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가을은 아직 멀리 있다. 온라인 장 보기를 통해 먹거리 주문을 했다. 문자로 알림이 왔고 상자가 도착했다.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주문할 수 있고 빠른 배송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나도 이용자가 되었다. 상품을 클릭해서 자세하게 볼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배송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건을 받고 현명한 소비에 대해, 착한 소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착한 소비자가 아니었고 지혜로운 소비자도 아니었다. 상자 하나에 모두 배송될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주문한 제품마다 다른 상자에 포장되어 도착했다. 그러니까 상자가 쌓였고 나는 좀 속상했다. 나라는 소비자에 대해서 말이다.

원하는 물건을 받은 기쁨은 사라지고 불편함이 남았다. 편리하다는 장점을 부각시켜도 그렇다. 처음이니까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주문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가격이 조금 비쌀지 모르지만 이렇게 많은 상자와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기분이다. 어떤 변화도 없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이 가라앉는다. 조금 지루하고 우울한 것 같다.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자와 쉬지 않고 울리는 안전 재난 문자. 미세한 게 아닌가 보다. 미세한 흔들림이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제법 흔들리고 있다는 게 맞을까. 8월 17일, 어제는 큰언니의 추도예배일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올해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휴대폰에 저장한 스케줄로 알림을 내년으로 설정한다. 그해 여름을 잠시 생각한다. 몹시 더웠던 여름, 슬픔으로 차오르던 여름. 내 곁의 귀여운 선풍기도 언니의 흔적이다. 우리가 함께 바람을 맞은 적은 없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나누지 못했다.





유쾌하고 명랑한 영화를 찾다가 라미란이 주연한 <정직한 후보>를 봤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국회의원이라니. 라미란의 생활연기는 최고였다. 원작은 브라질 영화라고 하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픽션의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하튼 많이 웃었고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이번 주는 조금 빠르게 흐를 것 같다. 흔들리고 느슨해졌던 일상을 조이고 단단하게 채울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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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란 단어를 좋아한다.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의 마음을 원한다. 나의 마음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게 좋다는 걸 아는데도 그게 참 어렵다. 내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도 세상 일들이 내 마음 같지 않아 속상하고 힘들다. 친구나 지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고요’를 만들거나 그것에 다가가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것을 원한다. 이런저런 불평과 생각의 끝엔 결국 산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이토록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삶이란 허망한 것이구나. 결론을 맺다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이 감사하다. 간사한 마음, 그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사는 게 평온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선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힘든 날들이 이어지는 요즘,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아니, 이 시기를 견디고 있는 모두에게. 

 

살수록 어려운 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상담을 받고, 강연을 듣는다. 뭔가 발견하기 위해서,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쓴다. 미국계 한국인인 저자도 그러했다. 보통의 삶을 사는 20대 청년이었고 고민과 방황의 끝에서 한국의 송담 스님을 찾았다. 10년간 묵언 수행을 하고 참선의 대가로 알려진 스승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처음부터 출가의 길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참선에 대해 배우고 존재의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참선의 세계를 배우고 경험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테오도르 준 박이란 사람의 인생 이야기이자 누구나 한 번쯤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존재와 동시에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계 한국인으로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한국의 사찰에서 스님의 길을 걸으며 스승인 송담 스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일, 그것은 힘들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 안에서 참선의 기쁨을 찾는 일이야말로 수행은 아니었을까. 그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느낀 것을 솔직하게 들려줄 수 있었던 건 그 과정에서 자신이 변화했기 때문에 ‘참선은 삶에 대한 일이다’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나는 참선을 시도했지만 그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창피하지만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고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의 우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30년 가까운 시간을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 강연과 강의를 통해 얻은 명성을 유지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오히려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와 여행을 하고 요가를 배우고 그 안에서 참선의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본연의 나로 돌아와 초심의 마음을 돌아보고 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을까. 일상에서 참선을 하면서도 꾸준하게 요가 수련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는 그의 모습은 아무런 노력 없이 변화를 바라고 고요를 원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을 걸고 세상에 말할 수 있다. 방탕과 방황으로 채워졌던 20대를 알기에 지금의 청춘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참선의 어려움을 알기에 참선을 배우는 이들의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상처 입은 치유자였다.

 

치유를 해주는 모든 사람에겐 아픔이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 공감과 연민을 배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사라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도 자신의 불행을 통해서다. (2권, 103쪽)

 

참선에 대해 몰랐다. 막연하게 심신수련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겼다. 마음을 모으는 기도, 명상, 호흡, 요가, 이런 단어들이 함께 떠올랐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테오도르 준 박의『참선』을 읽었지만 여전히 나는 참선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가 안내하는 방법대로 참선을 해보았지만 집중도 쉽지 않았고 “이뭣고”를 반복하는 일도 어려웠다. 그러니 삶의 화두를 생각하는 일이나 감정을 다스리는 건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수많은 반복과 노력의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참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참선으로 시작해 참선으로 끝나는 하루가 얼마나 충만할지 짐작할 수 있다. 삶을 긍정하는 즐거움 가르침이자 수행법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되었다.

 

참선은 우리 내면에 있는 해와 달의 빛을 모으고 주위의 구름에 초점을 맞춰 다 태워 없애버린다. 참선을 하면 더욱더 많은 빛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뚫고 나와 우리의 마음을 환히 비추고 몸을 가득 채운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두 눈과 얼굴에서 빛이 난다. 마침내 그 빛은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빛이 비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2권, 280쪽)

 

우리는 제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것은 나를 지키면서 타인과 함께 공존하는 일이다. 나의 내면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주위를 살피는 일은 쉬우면서도 힘들다. 그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참선의 삶을 사는 일도 그렇다. 이제 겨우 참선에 대해 알아가는 내가 거들 말은 아니지만 참선이 주는 위대한 감동을 당신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순간, 잠시라도 참선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거기 내가 원하는 ‘고요’가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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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8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0-08-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우연히 동영상 추천받아 보았던 분이시네요. 말씀하시는 태도,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자목련 2020-08-19 09:51   좋아요 0 | URL
글이 아닌 영상으로 보면 색다른 기분일 것 같아요.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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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닫고 시를 읽는 날이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이제는 그만 너를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산뜻하게 비와 이별할 수 있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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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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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소설은 모두 흔해빠진 라디오 사연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였는데 너라는 화자로 바뀌거나 먼 과거에 일어난 기억 속 장면인데 지금 마주하고 있거나 하는 것처럼. 결국엔 인생도 시시콜콜한 것들의 조합이라는 위안일까. 분명 좋은 소설을 읽었는데 이렇게 헛헛한 느낌이 남은 것일까. 아니다, 그들의 사연이 나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소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야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떤 시간을 살고 있을까.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면 그게 끝이었는데 자꾸만 <어느 밤>의 할머니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파묘>의 이순일은 여전히 사위의 눈치를 보며 큰딸의 살림을 도와주고 있는지, 한세진은 그런 엄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한 번씩 상상하게 된다.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도 모른다. 2019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7편은 모두 여성작가의 소설이다. 윤성희와 황정은의 단편에만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권여선의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같은 성당에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노년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함께 봉사를 하면서도 어떤 삶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몰랐던(아니, 알고 싶지 않았던) 한 여인의 죽음을 각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다. 종교와 봉사라는 하나의 울타리에 속했지만 그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느라 틈을 내주지 않았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결코 같은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최은미의 <운내>는 독특하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산주님이 있는 운내의 수련원에서 성장기의 두 소녀가 겪는 평범하지 않은 일상. 그것은 때로 폭력적이며 보호받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모와 떨어져 수련원에서 보낸 그 시간이 과연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의 인생을 사느라 때로 곁을 내주지 못한다. 가족일지라도 그렇다. 부모와 자식은 무엇인가, 산다는 건 뭘까, 자꾸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윤성희와 황정은의 단편이다. 남편의 믿고 의지하며 평생을 살았고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어느 밤>의 화자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미움이 커져만 가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로 밥상을 차린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으로 외롭고 힘들다.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쳐 밤마다 킥보드를 탄다. 어느 밤엔 결국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화자를 발견한 청년과 나누는 짧은 대화가 이 소설을 관통한다. 독서실에 다니며 고시공부를 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청년.


나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 (「어느 밤」, 27쪽)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란 그런 거라고. (「어느 밤」, 27쪽)


구급차가 오고 할머니는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청년은 할머니의 부탁으로 킥보드를 제자리에 갖다 놓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와 같은 일상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쯤 안부가 궁금한 이들이다. 그들이 조금은 괜찮아졌는지, 회복되고 있는지.


황정은의 「파묘」는 제목 그대로 무덤을 파내 화장을 하는 과정에 다룬다. 엄마 이순일의 조부의 묘를 파묘하는 일이다. 큰딸도 아니고 장남도 아닌 둘째 한세진이 엄마 이순일 모시고 묘가 있는 철원으로 향한다. 이순일이 만든 음을 간단하게 제를 지내고 파묘는 진행된다. 묘가 있는 그곳은 이순일에게 친정과 같은 곳, 그러나 이순일의 남편과 자식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걸 알기에 이순일은 파묘를 결정했다. 누군가 그곳을 돌보고 지켜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묘가 이순일 남편의 가족이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파트 경비를 하는 남편의 식사를 챙기고 큰 딸의 아이들을 돌보는 이순일이 둘째 한세진에게 살림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이어지거나 끝나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전과는 달라진 관습과 문화,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단절과 연대까지.


언제까지 혼자 그러고 살 거냐고. 이제 그만 집에 들어와 살림을 물려받을 준비 해야지.

(…)

나는 내 살림 해야지.

너 하는 게 살림이냐.

살림 아니면.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게 그게 무슨 살림이냐.

내 집에서 나 사는 게 살림이지. 내 살림도 바쁜데 내가 어떻게 엄마 살림을 해요. (「파묘」, 157쪽)


큰딸은 결혼했고 아들은 뉴질랜드로 갔으니 이순일의 일상의 고단함과 속상함을 토로할 대상은 한세진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세진은 이순일의 말을 들어줄 뿐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한세진의 말대로 그녀는 그녀의 살림을 해야 하므로. 모든 게 변하는 세상, 살아간다는 것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순일과 한세진은 그들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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