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주의하고 망각하는 인간들이다. 사실 실제 현실에서 우리는 수 세기 전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끝날지 안 끝날지 알 수 없는 우주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다. 우리는 핏빛으로 물든 달과 불길과 강풍 속에서, 10월에 지는 얼어붙은 나뭇잎에서, 나비의 초조한 날갯짓에서, 밤을 무한대로 길게 늘리거나, 매일 정오 갑자기 멈추는 불규칙한 시간의 맥박 속에서 어떤 존재의 반영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낮의 집, 밤의 집』, 116쪽)

소설을 읽으면서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한 발을 내디디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다고 하면 적절할까. 어떤 이야기가 계속될지, 어떤 문장을 발견할까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이해했다거나 인물이 또렷하게 그려지는 게 아니어도 괜찮다. 그게 올가 토카르추크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거대한 꿈을 꾸는 듯,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 『낮의 집, 밤의 집』을 읽으면서도 모호한 존재들을 상상한다.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인간의 생과 존재들 말이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놓치지 않는다.


세 번째 만나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소설이라는 거다.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짧고도 긴 사유의 글들이 조각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가 되고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돌고 돈다. 『방랑자들』보다 10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방랑자’들이 이 소설의 후속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화자인 ‘나’의 꿈으로 시작해 그녀가 들려주는 ‘마르타’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축을 이룬다. 1990년대 폴란드의 작은 마을 피에토느에서 가발을 만드는 마르타와 교류한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화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는 이는 노인인 마르타다. 그러나 마르타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니다. 다만 화자가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할 뿐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 때로 환상처럼 때로 꿈속처럼 다가온다. 마르타 외의 마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폭력을 쓰는 아버지로 힘든 가족의 상처를 대물림되고, 아이가 없는 부부의 일상에서 허전함이 전해지고,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물, 아니 괴물처럼 여겨지는 인물도 있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만 타인의 이야기, 서로 다른 꿈들, 곳곳에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사유를 듣다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삶의 조각들이란 걸 알게 된다. 전설처럼, 신화처럼 성녀 쿰메르니스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평범했던 한 여자가 성녀가 되는 과정과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 수녀원, 동굴, 지하실, 다락방, 숲, 소설 속 장소와 공간은 모두 집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마르타에게 우리는 각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로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곳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21쪽)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과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생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그려낸 세상에 감탄하지만 소설 속 모든 관계와 사건들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했을까. 액자소설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불러온다. 성녀 쿰메르니스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는 경계를 허물고 확장되어 넓은 세계로 향한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분명한 사유를 전한다.

인생이 갈망이 될 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종이처럼 보이고,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져 떨어진다. 모든 동작들과 모든 생각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각각의 감정은 시작되긴 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움의 대상조차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오직 그리움만 진짜이고, 중독성이 있다. 있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소유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져야 한다. (『낮의 집, 밤의 집』,430~431쪽)


맨 처음 그녀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도무지 따가갈 수가 없았다. 외국 소설의 경우 주요인물의 이름도 기억하기 힘들다. 『태고의 시간들』에서도 많은 인물이 등장해 신화처럼 폴란드의 역사를 말한다. 그녀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척 중요한 의미인 것 같다. 그 소설에서도 보리수, 버섯 균, 과수원, 죽은 자, 신의 시간이 등장한다. 저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산다고 할까. 그라인더의 시간이라니.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태고의 시간들』, 54쪽)


작품 순서를 보면 『낮의 집, 밤의 집』이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보다 먼저 출판되었지만 번역으로 출판된 순서는 다르다. 어쩌면 순차적으로 읽었더라면 더욱 그녀가 지향하는 세계와 가까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나하나 조각으로 이어진 소설, 서로 다른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저 좋은 문장이라고 여겼던 부분에서 멈칫한다. 모든 소설의 인물은 방랑자이며 올가 토카르추크 그녀 자신이구나 알게 된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그녀가 이동하는 공간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 그리고 구축하고 만들어지는 세상.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이 세 개뿐인 눈금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놀라운 통찰력.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 『방랑자들』, 35쪽)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방랑자들』, 280쪽)


다시 『낮의 집, 밤의 집』로 돌아와서 생각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안내하는 독특하고 다양한 세계가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동하는 만큼 볼 수 있고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만큼만 가능할 것이다. 그녀와 소설이 방랑자인 것처럼. 그런 이유로 이 굉장한 소설 속에서 이런 문장을 오래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다. 우리 생은 순간의 연속이라는 명징한 사실을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는 나 자신에게서 생기고, 공간과 시간의 한 지점을 흘러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장소와 시간의 속성의 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다른 지점에서만 바라본 세계들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많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80쪽)


마르타의 집은 그녀와 닮았다. 그녀처럼 하느님도, 그의 피조물도, 심지어 그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오직 한순간, 지금만 존재할 뿐이지만, 그것은 거대하고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사람에게는 압도적이다. (『낮의 집, 밤의 집』,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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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와파롤 2020-11-0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고의 시간들 읽으면서 너무 신비한 새로운 세계를 보았는데.... 이 책도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20-11-05 11:1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랑그와파롤 님의 말씀처럼 신비하고 새로운 세계.
이 책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 문지아이들 163
김려령 지음, 최민호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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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 지나도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김려령 작가의 『완득이』가 그랬다. 그 후에 작가의 다른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내게 김려령은 여전히 완득이로 통한다. 그건 작가에게 어떤 기분일까. 좋기도 하면서 나쁘기도 할 것이다. 대표작이 하나만 있다는 걸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뭐 나에게만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다. 김려령 작가의 신작 장편동화에 대해 궁금했던 건 제목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이라니,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걸까. 어딘가 아픈 걸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녀석들의 사연이 궁금했다.


녀석들이라니,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닌 게 맞다. 동화 속 녀석은 두 명이다. 첫 번째 만날 아이는 현성이다. 현성이는 최근에 이사를 왔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공간이라고 해다. 꽃집으로 사용했던 비닐하우스. 괜찮았다. 잠깐 동안에만 사는 곳이니까 불편해도 참을 수 있었다.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없고 집을 비우라고 말하는 아저씨들이 찾아와도 괜찮았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삼촌이 사기를 쳤다고 했다. 엄마는 다시 일을 해야 했고 아빠는 삼촌을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나갔다. 전학을 오고서 친구도 없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젠 진짜 혼자가 된 것 같다. 엄마는 늦게 오고 아빠는 연락도 안 되고.


이런 현성이 앞에 나타난 아이, 장우다. 같은 반이라는 걸 알았는데 근처에 사는지 몰랐다. 엄마의 심부름을 가던 중에 만났다. 장우는 아빠와 산다고 했다. 장우는 아무렇지 않게 아빠와 엄마의 이혼을 말하고 새엄마가 생겼다는 말도 한다. 현성이는 명쾌하게 말하는 장우가 부럽다. 현성이와 장우는 꽃집들로 사용했던 비닐하우스를 탐험하기로 한다.


현성이의 아빠가 집을 나간 사이 장우의 집에도 일이 생겼다. 새엄마가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집을 정리하면서 장우의 물건을 동의 없이 마구 버린다. 장우는 소중한 것들을 비닐하우스로 옮겨왔다. 폐가나 다름없이 흉측한 비닐하우스에서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현성이가 온 것이다. 엄마가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현성이는 학원에 간 장우를 비닐하우스에서 기다린다. 장우랑 컵라면도 끓여먹는다. 그래도 심심하다. 가족이 있는데도 고아처럼 둘은 서로를 의지한다. 


가만히 있으래서 꼼짝도 못 했다. 도대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왜 찍겠다는 것인지 몰랐다. 물론 나는 원래도 혼자 가만히 잘 있다. 한 시간쯤 가만히 있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도 누가 시키니까 힘들었다. 괜히 코도 가렵고 앞머리가 자꾸 이마를 긁는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그러다 현성과 장우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다가 아무것도 안 하는 영상을 찍어 올린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동영상 조회 수가 천을 넘긴다. 앞으로 현성과 장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른들의 선택과 잘못으로 인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현성이와 장우는 우리 주변의 아이들이다.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이혼과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생기면서 느끼는 감정들. 아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어른 때문에 힘든 아이들의 성장하는 과정을 김려령이 유머와 감동으로 어떻게 그려낼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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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조금 지쳤다 - 번아웃 심리학
박종석 지음 / 포르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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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에 빠진 사람은 자신에게 번아웃이 온지 모른다. 휴식하고 재충전해야 하는데,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니 치료의 시작도 없다. ‘내가 번아웃이라고?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자신을 속인다. 휴식할 시기임을 인정하고, 마음의 재활을 위한 긴 여정을 감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데 도리어 억지를 부리며 집착한다. (246쪽)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 월요병이 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증상일 것이다. 하루만 더 쉬면 좋겠다는 생각,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근을 해버릴까, 어디서 돈다발이 떨어지면 좋겠다, 등등 이런 생각이 출근을 시작해서 일터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일은 그런 것이다. 생계를 위한 직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렵고 코로나19시대에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말에는 답할 수 없지만 오늘도 수많은 직장인들은 퇴사를 꿈꾼다. 어쩌다 보니 퇴사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박종석의 『우린, 조금 지쳤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그랬다. ‘번아웃 심리학’이란 부제에서 짐작하듯 이 책은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다. 정신의학과 의사가 알려주는 처방전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러나 개인마다 번아웃의 강도가 다르니 보편적인 처방전이 더 맞겠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번아웃은 ‘어떠한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과도한 훈련에 의하거나 경기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여 심리적ㆍ생리적으로 지친 상태’이며 번아웃 증후군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바빠서, 일이 많아서, 일이 좋아서 일에 몰두했지만 결국엔 다 타버리고 마는 상대. 나는 괜찮을 거야, 나는 아니야라고 했던 이들도 책 속 번아웃 증후군 체크리스트를 보면 달라질 것이다. 인생에 대한 회의, 자신감 하락, 출근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면 당신도 번아웃 증후군이다. 나의 상태를 파악하면 그에 따른 대책도 할 수 있다. 저자는 우선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워라밸을 이루기 위한 대원칙을 소개한다.


첫째, 균형은 항상 깨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지 말자. 필연적으로 깨질 수밖에 없는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회복력’과 ‘유연성’에 집중하자.


둘째, 모든 면에서 100점을 목표로 삼지 말자. 일이든 취미생활이든 그 무엇이든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밀어붙이는 순간 워라밸은 무너진다. 70점이든 80점이든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절충점을 찾자. 자신의 삶을 100만큼 채워나가는 것보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여백을 찾아내 또다시 자신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오늘 틀려도 내일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하자.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말자. 당신 인생은 오로지 당신 것이다. (36쪽)


나 스스로가 의도적으로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아무리 좋은 처방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효과를 볼 수 없으니까. 물론 마음이라는 게 쉽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런 책을 읽고 나를 점검하는 시간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의 번아웃에 대해 솔직하게 들려준다.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장점이 아닐까 싶다. 의사가, 그것도 정신과 의사가 번아웃 증후군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니 그의 경험에 더욱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병원 출근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어떤 목표도 목적도 없이 지낸 시간, 그때 자신의 마음이 어땠는지 말이다.


번아웃에 빠지면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게 된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와도 멀뚱히 쳐다보다가 놓치기도 한다. 가계약금 계좌이체를 하면 되는데 몇 번이나 미루고 부동산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이성적인 생각에 기인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출근하기 싫고 전화받기 싫고 그 어떤 생각을 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조차 귀찮고 우울했다. 결국 나는 집을 사지 못했다. (59쪽) 


세상에나,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저자 역시 그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친구와 형이라고 했다. 그들은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 어떤 조언이나 질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 힘들었겠다는 말, 그게 전부였다. 우리 주변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래도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느껴지면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일도 나쁘지 않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또 일상에서 필요한 마인드풀니스 호흡법과 요가를 추천한다. 마인드풀니스 호흡법은 1. 기본자세를 취한다. 2. 몸의 감각을 느낀다. 3. 호흡을 의식한다. 4. 잡념이 떠오를 때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인정한다. 다시 호흡에 집중한다. 참선이나 명상도 좋을 듯하다.


무한 경쟁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직장에서 동료와 선후배와 어쩔 수 없이 경쟁을 해야 한다. 인간관계는 어디서든 필수인데 나와 같은 생각과 공감력을 지닌 사람을 만나면 괜찮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의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다. 저자는 이에 사례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어떻게 응대하면 좋을지 알려준다. 이 부분은 다른 심리학 도서와의 차별성이라 할 수 있다. 편집성 인격장애, 분열성 인격장애, 반사회적 인격장애, 연극성 인격장애, 강박성 인격장애, 의존성 인격장애, 등 다양한 성향과 장애를 통해 어느 시절 내가 만났던 동료나 상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주위의 누군가와 대입할 수도 있겠다. 알고 나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고 어떻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으니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나를 다스리고 나를 챙기는 일이다. 기존의 책이나 방송에서도 언급되고 익숙하게 들어왔겠지만 가장 먼저 나를 응원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 필요하다. 치료를 시작하는 일도 그 하나다. 지친 삶, 잠시 쉬어도 좋다는 말을 당신에게 들려주었으면 한다.


우리 내면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용감한 내가 숨어 있다. 꼰대 상사와 고객의 갑질, 직장 내 억울한 뒷담화, 과도한 업무와 야근, 쥐꼬리만한 월급 등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은 내가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또한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경력을 쌓아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대출금이나 빚을 갚기 위해 직장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계속 달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박수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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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1-02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저 위쪽 1,2,3에 다 해당하는데 왜 출근이 매일 매일 싫을까요? 저의 진정한 리즈시절은 은퇴후라고 매일 다지면서 출근 중입니다. ㅎㅎ

자목련 2020-11-03 15:41   좋아요 0 | URL
추운 겨울에는 더욱 힘들지요.
바람돌이 님의 진정한 리즈시절을 응원합니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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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래도 된다고 여겼던 사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나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다. 괜찮게 지속되는 일상이 누군가의 수고로 채워지고 있다는 걸 잊는다. 그게 그 사람의 본연의 임무도 아닌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무언가를 원하고 다른 곳을 꿈꾸는지 묻지 않는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이름은 엄마이거나 언니이거나, 혹은 집안의 누군가일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잊은 채 이모로 언니로, 장녀로 살아온 김이설의 소설『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속 화자 ‘나’도 다르지 않다.


“언니는 글을 쓰고 싶은 거지?”

나는 처음으로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걸 밝혔다. 티끌보다 더 작은 것이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안간힘으로 중력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연하디연한 작은 싹과 같은 나의 희망에 대해서.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했다. (63쪽)


어느 순간 집안의 살림을 살고 있는 ‘나’. 재수를 했지만 대학에 가지 못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합격하지 못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그런 나에게 글을 쓰고 싶은 거 아니냐고 물어준 동생, 다시 공부를 해보라고 말해준 동생이 고마웠다. 그러니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동생과 조카를 구해야 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동생의 인생은 다시 시작해야 옳았다. 엄마, 아빠, 동생, 모두 일을 해야 했기에 조카를 돌보는 일이 자신의 몫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두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거저 이뤄지지 않는다. 온전한 정성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3년을 넘겼고 나는 마흔이 되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늦은 나이에 시 창작을 배웠고 등단을 위해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시를 쓰기 위해 시를 읽고, 필사를 하던 밤이 있었다. 연인도 있었다. 시를 배우고 공부하던 시절,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준 남자. 계절마다 안부를 묻고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 동생의 연애를 보면서 그가 생각난다. 두 아이의 엄마지만 젊고 예쁜 동생의 사랑을 지지하면서도 뭔가 화가 난다. 모든 것에 자신감을 잃는다. 무엇보다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가 없다. 아니, 시를 읽고 필사를 할 여력이 없다. 두 아이와 일하는 동생에게 방을 내주고 거실이 나의 공간이 되었다.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시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나에게 시를 쓰는 밤은 도착하지 않았고 필사 노트만 두꺼워졌다. 엄마와 여동생과의 갈등이 조금씩 커졌고 나는 지쳤다.“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란 아버지의 말은 화자인 ‘나’에게 또 다른 ‘나’에게 격려이자 빛이었다. 그러나 고단하게 이어지는 하루하루, 그 어딘가에 내가 꽃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자꾸만 커지는 열패감을 걷어낼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다시 만난 연인.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는 집을 엄마와 동생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말한다. 지난했던 시간의 낡은 빌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일 년이든, 한 달 이든, 단 하루든,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딸에게 아이들은 어쩌냐는 엄마의 질문이 너무나 서글프다. 그래도 ‘나’가 뜻을 굽히지 않고 집을 나와서 방을 얻고 살아가서 기쁘다. 뭔가 대단한 걸 이루지 않더라도 설령 그녀가 시를 쓰지 못하더라도 잘 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짙은 초록색으로 변한 이팝나무 이파리에 관해. 거짓말처럼 맑았던 그날 새벽하늘을 지나갔던 검은 새 한 마리에 대해서. 아무도 울지 않았던 그 밤에 대해서. 엄마의 꽃무늬 블라우스에서 맡아지던 나른한 살냄새와 동생의 품에서 꼬무락거리는 스무 개의 손가락과 스무 개의 발가락에 대해서. 그 손과 발이 잡아당긴 생의 끈질긴 얼룩과 여름 소나기에 대해서, 그 소나기 끝에 피어오르는 흰 구름에 대해서. 그 해의 열대야에 대해서, 깊고 오래된 골목길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운 사람의 그림자와 나의 눈물과 우리의 정류장과 모두의 무덤에 대해서. 서로의 체취로 속삭이던 노래와 지리멸렬한 계절에 속박되었던 오해와 피우지 못한 꽃과 기꺼운 약속과 작은 책상에 낡은 베갯잇과 차마 다하지 못한 희망과 나는 지금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하여. (171~173쪽)


온전히 나를 찾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루를 고스란히 그녀를 위해 쓸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시를 통해서 그녀가 회복될 수 있으니까. 스스로 부족하다고 잘못된 삶을 살았다고 자책하지 않는 시간이 올 거라 믿으니까. 그녀가 자신만의 언어를 찾고 채워가는 시간이 꽃으로 필 거라는걸. 그게 어떤 꽃이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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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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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학위, 명예, 성공, 지적 성취감, 이런 거창한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끝에는 밥벌이가 있을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상의 공부를 하고 그다음은? 취업이 있다.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결과를 내고 그에 합당한 급여를 받는 일. 언어를 가르치고 언어를 배우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한 나라의 언어에 반하여 그 아름다움을 익히고 싶어서 어학당을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최소한 소통을 위해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타국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서수진의 『코리안 티처』속 어학당 학생도 그랬다. 취업을 위해 한국어학당을 찾았다. 불법으로 취업을 했고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하는 이들도 적었다. 그들을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 사이에는 못한 갈등이 발생한다. 당연한 일이다. 언어를 배우고 있지만 완벽하게 소통할 수 없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고학력자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자부심으로 좋은 선생이 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3월마다 계약서를 갱신하는 계약직, 시간 강사일 뿐이다. 『코리안 티처』는 H대 한국어학당을 배경으로 비정규직 강사 선이, 미주, 가은, 한희 네 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학기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학당 강사인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을 붙잡고 가르치는 건 둘째치고 어학당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 강평(강의평가)도 높고 학생들에게 인기도 좋아야 한다.


신입 강사 선이는 베트남에서 온 특별반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진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학생들의 고충을 알아주며 한국어를 잘 가르치는 선생님 말이다. 동료나 선배 강사, 그리고 책임강사와도 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타 대학의 어학당에도 강의를 나가는 강사들 옆에서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학생들이 선이의 사진을 인스타에 올린 걸 확인하고 어학당에 알리고 개선과 해결을 요구한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만 같았다.


그런 선이와 가장 다른 사람은 미주였다. 이미 8년차 강사였고 어학당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대체로 무시했다. 교재나 수업방식, 서류 업무에 대해 기본만 지키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선이와 같은 입장이지만 당당했다. 학생들과의 관계가 가장 힘들 뿐이다. 대책 없이 200명의 베트남 학생들을 데려오고 어학당을 돈벌이로만 여기는 원장과 학교를 상대로 싸우고 싶었지만 미주 역시 참아야 했다. 이곳은 미주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직장이니까.


우리는 정이야. 학생이 갑이고, 당신이 을이고, 바로 옆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책임 강사들은 병이고, 나와 같은 평강사들은 정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강평으로 우리를 자르겠다고 위협하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거고, 여기 있는 강사들은 위협당하는 대로 당신 비위에 맞춰 멍청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야. 나 역시 마찬가지고. (121쪽)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어쩌면 인기 강사인 가은을 향한 시선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옷차림이나 외모에서도 자신감이 보였다. 가은은 항상 강평도 1위였고 강사들과 관계도 좋았다. 다른 강사를 의식하지 않았다. 스스로 운이 좋은 편이라 여겼다. 재계약에 대한 걱정은 없었고 학생과 동료에게 잘 베풀었다. 나중에 신입 강사 선이가 학생들이 올린 사진 문제로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고 놀란다. 가은은 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다. 가은에게 이보다 좋은 직장은 없었다. 그만 둘 이유가 없었다.


선이, 미주, 가은과 다르게 한희는 책임강사였다. 말 그대로 다른 강사와는 다른 위치였다. 겨울학기를 마치면 무기계약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강평은 낮았고 임신 초기에 무리를 해서 쓰러졌다. 어쩔 수 없이 휴직을 선택한다. 그래도 아침마다 단체방을 통해 어학당 상태를 확인한다. 한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학당에서 베트남 학생들 대신 중국인 학생들을 데려오고 이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자 자원했다. 한희에겐 일이 필요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남자친구가 일을 그만두고 월급도 받지 못했다. 한희가 나서야 했다.


한희에게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은 과거였다. 미래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라고 현재를 끌어와서까지 미래를 확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한희의 의지와 예상은 늘 배반당했다. (221쪽)


네 명의 강사를 통해 한국에서 여성으로 일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새삼 확인한다. 고학력의 여성 인력이 현장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무참함이 전해졌다. 소설 속 그녀들뿐일까. 생계를 위해 일선에 나선 수많은 여성들, 기혼이며 아이가 있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부당한 일이 많을까. 현재를 지탱하느라 급급해서 계획을 세우거나 수정할 수도 없었던 삶이 여기 있었다. 넘어졌다고 주저앉는 게 아니라 일어서는 여성의 삶 말이다. 저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한희를 통해 보여준 한국어의 미래 시제에 대한 것이다. ‘한국어’라는 단적인 표현이지만 삶의 미래를 제시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희에게는 미래 시제가 필요했다. 온전한 미래가 필요했다. 의지에도, 추측에도 기대지 않는 하나의 완전한 사실로 존재하는 미래가 필요해졌다. (중략) 한희는 의지 양태도 추측 양태도 아닌 시간으로 미래를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이다. (223쪽)


무리하게 어학원에 출근을 해서 조산을 한 한희가 스스로에게 필요한 미래를 떠올리며 다짐하는 부분에 나는 울컥하면서도 한희를 응원하고 있었다. 소설 속 네 명의 강사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명확한 미래가 다가오기를 희망한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일하는 여성 모두에게 그러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들이 살아온 아파트가 서 있었다. 아침 해가 잘 들고, 한희가 아끼는 고무나무 화분이 있는 곳. 이제는 그곳에서 아기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한희는 지금 아주 분명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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