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B. A. 패리스 지음, 김은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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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다 아는 사실이다. 두 개의 선택지가 있을 때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둘 다 선택할 수 없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후회는 어쩔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게 좋다. 하지만 살다 보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는 일이 생긴다. 그럴 때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B. A. 패리스의 장편소설 『딜레마』는 그런 선택에 대한 소설이다. 단 하루의 시간을 배경으로 아내 리비아와 남편 애덤을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리비아와 애덤은 학창 시절에 아이를 임신해 결혼했다. 리비아의 부모님은 그 일로 딸과 연락을 끊었다. 리비아는 단출한 결혼식을 했고 그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마흔 살의 생일을 오래전부터 기대해왔다. 단 하루, 가장 멋진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애덤은 목공예가로 리비아는 변호사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안정된 중년의 삶을 누리고 있다. 아들 조시와 딸 마니는 아주 잘 자라주었다.


누가 봐도 화목한 가정이다. 하지만 삶에는 언제나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애덤은 조시가 어렸을 때 한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고 마니가 태어나면서부터 달라졌다. 그랬기에 애덤은 아들보다는 딸과 가깝다. 그래도 현재는 최선을 다하는 아빠다. 딸 마니와는 비밀이 없다고 믿는 그런 아빠. 정말 마니와 아빠는 비밀이 없을까.


마니의 모든 생활이 홍콩에서 이루어지는데 우리 부부는 그 생활의 일부만 안다는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21쪽)


마니는 홍콩에서 대학에 다니는 마니는 엄마의 생일에 올 수 없다.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깜짝 등장으로 엄마를 놀라게 하기로 애덤과 준비를 한 것이다. 리비아의 생일 당일 그들 가족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6월 8일 토요일 고대하던 리비아의 생일, 모든 건 완벽했다. 집에 오지 못하는 마니는 꽃배달을 보냈고 조시는 파티 준비를 열심히 했다. 마니가 탑승했을지도 모를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뉴스를 접하기 전까지.


마니의 사고 소식을 접한 애덤은 마니가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딸과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기대를 놓을 수 없었다. 단 하루, 오늘을 준비한 아내에는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만약 마니에게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더라도 마니는 엄마가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를 바랐을 테니까. 가족, 친구, 동료, 모두를 다 초대한 파티였다. 애덤에게 하루는 지옥과 같았다.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애덤이 마니의 방에서 홀로 느끼는 절망과 슬픔. 그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리비아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마니가 유산을 한 사실이다. 문득 과거 자신의 일을 떠올렸다. 마니가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는 어쩔 수 없는 안도감. 연락을 끊은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혼자 짐작하고 마니를 걱정하면서 전전긍긍한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주변 인물을 살펴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 상대를 알고 경악했다. 마니에게 실망했고 애덤에게도 알려야 했다. 더 늦기 전에 좋은 타이밍을 찾아야 했는데. 애덤은 자신의 생일을 준비하느라 피곤한 눈치다. 리비아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너무 거한 파티를 여는 게 아닌가 자책하기도 했다. 리비아와 애덤은 마주칠 때마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사랑한다 말했다. 사로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애덤은 끝내 마니의 사고를 알리지 못했다. 리비아의 생일 파티가 다 끝나고 아들 조시와 아내에게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신은 그에게 너무 가혹했다. 리비아는 절규했다. 애덤을 보고 싶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의 생사도 모르면서 생일을 자축하고 웃고 떠들고 즐겼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떤 엄마가 그럴 수 있겠는가.


단 하루 동안 리비아와 애덤의 복잡한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제목 그대로 인생의 가장 큰 ‘딜레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선택해야 하는지 묻는다.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감이 흐르고 제발 마니가 마지막에 등장하기를 바랐다. 결말을 먼저 보고 싶었던 소설은 처음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다는 게 무엇일까. 그 선택으로 인한 파국은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이 든다. 내가 가장 잘 안다고 믿는 이가 내게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엉뚱한 생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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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다양한 죽음 속에는 언젠가 내가 맞닥뜨릴지도 모를 하루가,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겪을지도 모를 오늘이, 지금 내 옆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정말로 남은 것은 집도, 돈도, 명예도 아니다.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프롤로그, 13쪽)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힘든 일이다. 죽음이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걸 목도하는 일,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경험하는 일은 삶에 대한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안겨준다. 나와 연결된 죽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사는 게 지겹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죽음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진다. 홀로 죽음을 맞이한 이, 죽음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외롭고 쓸쓸한 죽음은 뭔가 사연이 많을 것만 같다. 유품정리사 김새별, 전애원의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을 읽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저마다 우리의 사연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고 그들이 남긴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은 애도의 시간이다. 그런 면에서 특수청소업체를 운영하는 유품정리사인 저자가 의뢰를 받고 죽음의 자리를 정리하고 청소를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깨끗하게 원상 복귀를 해 달라 독촉한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의 시간이 가득한 공간, 지독한 악취로 뒤덮인 곳에서 청소를 하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을 준비했을지 남겨진 것들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책에서 들려주는 죽음은 환대의 손길이 전혀 없는 고독한 죽음이 많다. 부모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자녀에게 자신의 걱정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잘 지내지 못한 이들. 쓸쓸하다 못해 처연한 삶의 흔적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쩌다가 가족이 있는데도 혼자 죽음을 맞이했을까.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게 가장 큰 이유다. 어느 할머니의 경우 혼자 살 집을 구하면서 농담처럼 주인 할아버지에게 이 집에서 죽어도 괜찮냐고 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역시 괜찮다고 하셨다고. 할머니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셨던 것일까. 부모의 마음과 다르게 남겨진 자식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홀로 사시다 돌아가신 부모의 집을 청소 의뢰하는 유족의 놀라운 행동에 그만 놀라고 만다. 앞의 할머니 가족은 아니다. 소식을 끊고 살다가 유품을 정리하는 저자가 당연히 돌려줄 귀중품(현금, 귀금속, 문서)만 챙기는 이들이라니. 그들의 고인을 가족으로 생각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1인 가족이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


괴로움은 삶에 다달이 지불하는 월세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행복이 우리를 찾아온다. 당연하게 여겨서 모를 뿐이다. 살아 있다는 건 축복이고 기적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건 우주가 생긴 이래 가장 특별한 사건이다. 태어났으므로 이미 나는 선택받은 존재다. (156쪽)


산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잘 살고 있을까. 유품정리사의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 죽음을 지켜줄 이 없는 고독한 사람, 사건 사고의 희생당한 사람, 그들 모두 잘 살고 싶었을 것이다. 죽음의 자리가 아닌 삶의 자리에 서고 싶었을 것이다. 고된 일을 하면서 번 월급으로 삶을 주변의 노숙자를 챙기며 살았던 이의 마지막을 동행하는 노숙자들의 이야기,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무참하게 죽은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이의 사연은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일면식도 없는 그 아이가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혼자 울어야 할까. 언제까지 그 슬픔과 고통을 숨죽여 삼켜야 할까. 그날만 생각하면 엄마 옷에 얼굴을 묻고 울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와도 다시 일어나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것을. (198쪽)


언젠가 마주할 죽음이지만 정작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큰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개인적인 기록을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그때뿐이다. 늘어나는 물건들을 볼 때마다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잘 안된다. 남겨진 것들이 나를 말해준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저자가 알려주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은 더욱 유용하다.


1. 삶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정리를 습관화하세요. 2. 직접 하기 힘든 말이 있다면 글로 적어보세요. 3. 중요한 물건을 찾기 쉬운 곳에 보관하세요. 4. 가족들에게 병을 숨기지 마세요. 5. 가진 것들을 충분히 사용하세요. 6. 누구 때문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사세요. 7.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기세요.


우리는 모두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떠난 자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 현재의 이 삶을 잘 살아내는 건 아닐까. 삶의 소중함을 더욱 일깨워주며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며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말해주는 책이다. 죽음이 전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함께 떠오르는 책이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공간을 정리하는 책  『수런거리는 유산들』이다. 


죽음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죽음 곁에는 여전히 삶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고 할까. 물건과 공간의 주인은 사라지고 남겨진 것들을 통해 그들을 기억한다. 김새별이 유품을 정리하면서 느꼈을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인에 대한 애정만 제외하면 말이다. 죽음 이후에야 우리는 삶을 돌본다. 죽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그것이다. 죽음과 삶이 서로를 마주한다. 서로를 바라보며 응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었다. 그 흐름에는 지름길이 없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죽음은 삶에 속하며, 삶은 죽음을 껴안는다. ( 『수런거리는 유산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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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5-25 10: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 좋으네요. 저는 무엇이든 아끼지는 않는데 자주 숨겨놓는 사람이라서요. ㅠㅠㅠㅠ 죽음에 대한 책들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1-05-27 08:57   좋아요 2 | URL
네, 저도 그래요. 죽음에 관해 다루는 책들을 읽으면서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단발머리 님, 비 오는 목요일 편안하게 보내세요^^

scott 2021-06-04 20: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주말 멋지게 보내세요 ^ㅅ^

자목련 2021-06-07 08:30   좋아요 2 | URL
스콧 님, 감사합니다.
저도 축하드려요!
새로운 한 주 활기차게 시작하세요^^

그레이스 2021-06-04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06-07 08:32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 님의 당선, 저도 축하드립니다.
향기로운 날들 이어가세요^^

새파랑 2021-06-04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 드립니다~!!

자목련 2021-06-07 08:34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 감사해요.
새파랑 님의 멋진 리뷰를 보며 제 책장에 <새하얀 마음>에게 미안해져요. ㅎ
건강하고 즐거운 한 주 시작하세요^^

서니데이 2021-06-04 2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6-07 08:34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6월 보내세요^^

초딩 2021-06-04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다소 따분하고, 개인의 일기라 읽기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죽음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죽음도 삶도 연결되어 곁에 있고, 사는게 무엇일까? 죽는게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현대의 과학들이 말하고 과거의 현자들이 이야기했듯이 (아우렐리우스가 이런 부분을 이야기할 땐 정말 고대의 과학과 철학이 얼마나 발전했었을까라고 겨외감이 듭니다) 원소의 모임과 흩어짐 뿐 일 것인데, 그리고 자연의 질서 아래 그 과정이 지나간느 것일 뿐인데, 벗어나지도 못하는 우리는 걱정하고 궁금해하고 파헤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복잡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라고 하나 봅니다.

:-)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6-07 08:40   좋아요 2 | URL
원소의 모임과 흩어짐 뿐이라는 말이 유독 깊게 다가오네요. 삶의 의미를 두는 일은 무엇일까 싶기도 하고요.
초딩 님, 저도 축하드려요.
현재인, 오늘 즐겁게 살아가요^^
 
너는 나의 시절이다 - 정지우 사랑 애愛세이
정지우 지음 / 포르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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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비가 잦은 5월이다. 누군가의 눈물일까 싶은 생각을 하니 저 비를 다 받아두고 싶다. 비를 좋아하기에, 비가 내리면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하나의 우산을 받쳐 들고 연인과 빠른 걸음으로 빗속을 걷던 풍경. 서로에게 집중하던 시절이었고 그 시절이야말로 온통 ‘너’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다음의 행보가 각자의 우산을 걷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의 기억을 더듬을 때, 그 장면은 다정하게 나를 안아준다. 어쩌면 나는 정지우 사랑 애愛세이 『너는 나의 시절이다』를 통해 사랑의 애틋함을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무감한 나를 흔들어줄 그런 글들을 기대했다고 할까.


사랑에 대한 사유가 언제나 감미롭고 아름다운 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에 대해 다 안다고 믿고 사랑에 대해 소홀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정성을 다하는 일이고, 즐거운 일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고, 그것에 몰입하는 일인데. 익숙함에 길들여져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놓치고 만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결국엔 하루하루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순간의 감정을 놓치고, 대화를 미루고 만다.


대화에 대한 정지우의 글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열심히 기억하고 열심히 알려고 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한 것이다. 하나라도 놓칠까 두려워 뭐든 다 알아내려고 했던 날들. 우리는 모두 반성해야 한다. 대화의 기본, 대화의 목적은 결국 서로에 대해 스며드는 거라는걸.


각자 서로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에서부터 일일이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치 기계적으로 장부를 작성하듯이 서로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외우고, 주입식으로 암기해야 한다. 사실, 그것이 대화이고 이해인 것이다. (41쪽)


사랑에 대한 글은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대상은 무한하고 사랑에 대한 감정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정지우가 들려주는 사랑 역시 그러하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랑,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는 그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들, 지금까지 나를 견뎌준 사람들, 그리고 내일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그들에 대한 애정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생각하는 일, 그 모든 게 사랑일 것이다.


어제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 오늘 당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내일도 사랑하리라 믿는 것. 결국은 그 무한한 순환고리, 논리가 파괴되는 동어반복과 자가당착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든 버티며 빠져나오지 않는 것, 그게 사랑의 전부일 것이다. (132쪽)


정지우의 담담한 사유를 읽으면서 사람을 향하는 선한 마음을 지키는 일에 생각한다. 이익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관계로 상처받고 마음을 굳게 닫았던 날들,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피곤했던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게 나를 향한 선의의 마음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놀라운 기쁨을 안겨준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일이라서 그렇다. 예전에 알지 못했던 세계라고 할까. 타인이었던 당신과 내가 우리로 속하는 일이라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설령 다시 타인으로 돌아갔더라도 그 아름다운 관계의 첫 떨림을 생각하면 나쁨보다는 좋음으로 기억될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이라고 해도 괜찮다. 살아가는 일도 그런 것 같다. 아이가 주는 감동을 통해 부모가 주신 사랑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모르는 세계는 여전히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사랑과 비밀을 발견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상대의 비밀스러움과 무한함은 곧 내가 속한 공간 전체로 확대되어 나간다. 내가 속해있는 이 공간이, 이 세계가 둘도 없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세계가 무언가로 가득 차있다. 이전에 알던 그런 세계감이 아닌 다른 세계감, 세계의 낯선 이면, 그 세계성이 불러오는 감각이 우리를 휘감는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의 공간에, 사랑의 시간에 속하게 된다. (186쪽)


정지우의 글은 흐림의 기분을 맑음으로 이동시키는 힘이 있다. 혼탁한 마음이 정갈해진다고 할까. 복잡한 감정들이 차분하게 정화된다. 또한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 같다. 뜨거운 차가 아닌 알맞게 식혀 따뜻한 기운을 안겨주는 글이다. 아내와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신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의 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와 아이에게 종종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 수영을 할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리고, 운전을 할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리는 사람, 여동생과 한 방에서 잠들며 수다를 떠는 사람의 글에는 온기가 있다. ‘우리는 화목하니까’, ‘화해할 수 있으니까 괜찮다’는 말이 내게로 왔다. 그래, 조금 다투더라도 화해하면 된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불화가 아닌 화목하니까 된다는 마음이 전염된다. 기분 좋은 전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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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24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따뜻한 책일거 같네요. 표지부터 마음에 듭니다~!! 이런 내용의 책은 많은데 자목련님 리뷰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

자목련 2021-05-25 09:45   좋아요 1 | URL
사랑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일상에서 느끼는 사랑에 대한 잔잔한 글이라고 할까요.
어떤 부분은 어렵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새파랑 님, 활기찬 화요일 보내세요^^
 
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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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상대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혼자 남는다는 두려움, 이별 그 후에 대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 사이도 얼굴을 보지 않고 그저 가끔씩 안부만 묻는 사이로 지내기도 하는데. 도대체 사랑이라는 건 뭘까. 어쩌면 그런 감정들은 사랑이라는 말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으로 채워진 소설집. 너의 행동과 말투, 너의 일상이 나는 때로 안쓰럽고 때로 답답하고 때로 화가 난다. 그러나 정작 나를 너를 놓지 못한다. 나는 너를 끊어내지 못하고 네가 안타깝고 네가 아프다.


김혜진의 단편집 『너라는 생활』의 8개의 단편은 모두 ‘너’와 ‘나’의 이야기다. 8편의 단편에 각기 다른 인물,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마치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의 과거나 현재인 것처럼 여겨진다. 수많은 타인 속에서 특정한 한 사람, ‘너’를 향한 마음이라고 할까. ‘너’는 연인이 될 수도 있고,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 일 수도 있고, 친구 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이웃이나 주변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의 경우는 모두 여성 커플이다.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에선 이상한 사람들, 불편한 존재로 보인다.


표제작 「너라는 생활」에서 ‘너’는 취업을 위해 복지관에 면접을 보러 간다. 그 자리에 동행한 ‘나’는 네가 당하는 일, 그러니까 담당자가 너를 무시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나는 화가 나지만 너는 어떡해서든 그 자리에 일하고 싶고 끝까지 담당자에서 그동안의 경력을 말한다. 구차하게 매달리는 모습이 너무 싫어서 너를 끌고 나가고 싶다. 너는 언제나 너무 착하고, 사람에게 친절하고, 공과 사의 경계가 없다. 처음에는 그런 너를 돕고 너와 같이 행동하고 싶었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점점 화가 난다. 힘든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너를 위로하지만 마음속은 언제나 복잡하다. 관계를 끝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지 못하는 나에게 너는 전부가 된 것이다.


그만하자, 헤어지자, 내내 벼르듯 쥐고 있었던 그런 말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내일은, 모래는, 더 좋아질 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오 년이 지났구나, 이대로 십 년이 가고 또 십 년이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오싹해지면서도 네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라는 생활」, 86쪽)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정 무렵」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배려하지 않고 너의 생각, 너의 모임, 너의 관계망 속에 아무렇지 않게 나를 흡수시키려는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는 오직 너와의 시간이 중요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그걸 몰라주는 너를 이해해야만 할까. 너는 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이 더 중요한 것일까.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게 너라는 확신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벗어나고자 하는 건 이 낯선 동네가 아니고 바로 너라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실은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가 바라온 일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자정 무렵」, 115쪽)


김혜진은 소설 속 너와 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는다. 나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너와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것 정도. 그러니까 어떻게 만남이 시작되고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졌는지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등장하지 않는다. 처음의 호의, 처음의 설렘, 처음의 기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말이다. 네가 만나는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많고, 비주류의 삶은 산다. 공감과 연대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그 연대를 지지하고 오래 이끌 수 있는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사회적 지지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여자 두 명이 함께 한 집에서 살아가는 이상한 일은 아닌데 사람들은 보통이 아닌 특별한 삶이라 여긴다. 김혜진의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에서는 가장 가까운 엄마조차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 전반의 시선은 얼마나 따가운지 짐작할 수 있다.


이상한 사람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직장이 없는 사람들. 가족이 아닌 사람들. 밤에도 낮에도 할 일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서로의 신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 너와 나뿐인 사람들. (「동네 사람」, 128쪽)


사소한 말투에 감정이 상하고 누군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건 그 삶의 일부가 되거나 그 삶에 깊숙이 파고드는 일이다. 자신의 모든 일에 끊임없이 지지할 거라 믿는 순간이 어느새 사소한 말투에 감정이 상하고 만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다른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너와 나는 영원한 우리가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너와의 관계는 왜 이렇게 계속 이어져온 것일까. 완전히 연락이 끊어지고 그래서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서로에 대해 편안한 기억만 나눠 가질 수 있었는데. 나는 왜 겁도 없이 네 연락을 받고, 안부를 듣고, 네 삶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 포기하지 못한 것일까. (「우리는」, 172쪽)


함께 한 시간이 너무 많이 쌓여서 분리될 수 없는 우리가 된다는 건 그 모든 걸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너와 나는 처음부터 달랐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그 처음이 서로를 향한 강한 끌림이었을지라도. 소설 속 ‘너’와 ‘나’는 현실 속 ‘너’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우리로 살아간다는 건 간단하지 않고 여전히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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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5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혈연은 모르겠지만, 타인이나 물건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는 것은 그 들인 시간이라고 어린왕자에선가 본 것 같아요 ^^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6-07 08:40   좋아요 0 | URL
^^*
 

5월의 비는 무슨 빛일까. 초록빛일까. 그건 봄의 색일까, 여름의 색일까. 봄이어도 좋고 여름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5월의 첫날부터 비가 내리더니 비를 만나는 날이 많아졌다. 비는 고요함을 요구한다. 빗소리를 들고자 한다면 더욱 그렇다. 창에 닿은 비의 흔적은 창을 열고 보면 찾을 수 없다. 비가 오고 있는 순간이어도 비는 없는 듯 보인다.





느닷없이 더위가 몰려오는 것 같더니 서늘해졌다가 다시 이 비가 그치면 봄날이 올 거란다. 봄날이 온다는 건 활동하기 좋은 날이 온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에 활동하기 좋다는 게 딱히 즐거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봄날은 봄날이어야 하고 감자꽃은 피어야 하고 장미도 피어야 한다. 꽃들은 피어나고 모를 심을 준비를 하는 논에는 충분할 정도로 비가 왔으니 5월의 비는 좀 쉬어도 좋겠다. 어쩌면 작년처럼 비가 많은 날들이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좀 슬프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다 지났다. 특정한 누군가의 날이 있다는 건 그만큼 그들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이 부족하다는 증거인 지도 모른다. 주변에 가까이 지내는 어린이가 없다. 어린이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그런 어린이가 자라서 성년이 되고 누군가는 어버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도 있겠다.


주말 스승의 날에는 나의 유일한 스승님께 꽃을 선물로 보내드렸다. 카네이션을 고를까 하다가 수국을 골랐다. 내가 좋아하는 수국을 선물하는 이기적인 제자다. 수국이 선생님께 도착하는 시간까지 걱정이 많았다. 수국의 상태를 알 수 없어서다. 그건 판매자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꽃을 주문할 때마다 그런 것 같다. 살아 있는 식물의 이동에 대한 불안함.





5월의 비는 계속 이어질까. 5월의 비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은 나희덕의 『예술의 주름들』, 구병모의 『바늘과 가죽의 시』, 미야모토 테루의 『생의 실루엣』이다. 시인이 들려주는 예술 이야기, 신비로운 동화를 연상시키는 소설, 그리고 소설에서 죽음을 그렸던 소설가의 에세이.


5월의 절반이 훌쩍 지나고 2021년의 절반을 향하고 있다.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 걸까. 어디로 가는 걸까. 수요일의 쉼표를 생각하면 빨리 가는게 좋은 걸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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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05-17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국수국 복스럽네요. 색도 어쩜 저리 이쁠까요.
꽃을 받고 싶을 때가 있죠. 어떤 꽃이든 좋구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 것이니.
살아 있는 식물의 이동, 걱정되는 맘 공감해요. 저도 그런 마음 든 적이 있거든요.
이번 어버이날에 작은아이가 멀리서 이곳 꽃집을 통해 꽃바구니를 보냈는데 넘 안타까운게
그날 주문량이 많아서였는지 몰라도 바구니가 넘 엉성하고 꽃 몇 개는 거의 시들하고 ㅠㅠ
아이가 보낸 마음을 아니 더 안타까워서 씁쓸했어요. 그래도 아직 몇 송이는 따로 작은 화병에
꽂아 살렸네요.^^ 자목련 님 건안하시길요. 어느새 오월도 중반을 지나다니요^^

자목련 2021-05-19 15:0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 안부 너무 반갑고 감사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국수국의 날들인 것 같아요. 꽃은 언제나 좋아요.!
따님이 보낸 꽃바구니 그 마음을 생각하면 저도 속상하네요.

프레이야 님, 향기롭고 맑은 5월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