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종교의 세계사 - 교과서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인류의 사상사
데구치 하루아키 지음, 서수지 옮김 / 까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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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관장하는 순환의 시간과 인생을 지배하는 직선의 시간,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은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인생이라는 직선의 시간이 끝난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어딘가로 갈 세계는 있을까? 인생이 시작되기 전에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26쪽)

태초의 인간이 존재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종교가 시작되었고 철학자가 등장했는지 데구치 하루아키의 『철학과 종교의 세계사』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저자가 시대별로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 그러니까 철학에 대해 설명한다. AI의 시대에 과연 종교와 철학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닐는지. 그런 맥락으로 보면 표지의 이미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제목만 보면 어렵고 난해할 것 같지만 저자는 쉽게 설명한다.


인간이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주위에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고 자연계의 흐름을 궁금해하고 누가 태양을 뜨게 하고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책은 12장으로 시대순으로 종교의 첫 등장 배경부터 알려준다. 종교의 종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시대별 등장하는 철학까지. 종교와 철학의 진화사라고 할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초의 종교 조로아스터교부터 기독교, 불교, 유고의 변모와 그에 따른 철학 사상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동서양의 대표 사상가의 연표를 별도로 정리해 주었다. 동시대에 어떤 사상가와 종교인인 활동했는지 보여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공자, 묵자, 붓다로 이어진다. 아테네 시대를 지나 헬레니즘 시대에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로 대표되는 다양한 학파가 등장하고 동양에서는 제자백가가 전성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성경의 구약이 완성되었고 유대교가 시작된다. 종교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과거가 아니 현재에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 종교에 기대는 마음 말이다.


「구약성서」는 유대인에게 말했다. 지금은 힘들고 불행하지만, 우리는 본래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다. 반드시 구세주가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바야흐로 종교에 선민사상이 등장했다. (160쪽)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는 신앙 우위의 세계에서 합리성과 자연과학의 세계로 넘어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철학자 베이컨의 시대가 도래한다. 베이컨은 실천적 관찰과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서 귀납법을 체계화시켰고 로크로 이어지고 “인간이란 지각의 다발이다”라고 말한 흄이 경험론을 완성시킨다. 이어 너무도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가 등장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단언했지만 완전함을 추구하는 불완전한 존재라 여기고 신의 존재를 생각한다.


인간이 완전함을 추구하는 이유는 완전함을 아는 신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 성실한 신이 나쁜 신을 이기고 승리했다. 성실한 신은 인간에게 생득관념으로 성실하고 올바른 것, 즉 완전함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완전함을 추구할 수 있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신의 존재 증명이다. (295쪽)


마지막으로는 20세기 철학자로 소쉬르, 후설, 비트겐슈타인, 사르트르, 레비스트로스 5명으로 정리한다. 시대별로 종교와 철학을 정리한 저자의 설명은 보통의 독자가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좋아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종교와 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종교사와 철학서의 흐름을잡을 수 있으니 한 권으로 인류의 사상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철학도, 종교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찾는 데에서부터 출발했다. 살아가기 위한 지혜란 불행을 마주하는 방법에 관한 지혜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불행이라고 불러야 할까, 숙명이라고 불러야 할까. 인간은 언제나 질병, 노화, 그리고 죽음과 마주하며 살아왔다. 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어떻게 마주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이 화두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늘 인간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411쪽)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면 전혀 다른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저자의 말처럼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 지혜를 찾는 노력은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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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을 채우는 건 무엇일까. 수많은 감정들은 아닐까. 부정하고 싶겠지만 고통, 절망, 허무 같은 게 더 사랑이나 기쁨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에 휘말리는 걸 보면 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건 소설이니까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도 그러하다. 점점 더 소설과 현실의 교집합의 범위가 넓어지는 걸 느낀다.


단편문학의 대가, 안톤 체호프의 『자고 싶다』를 통해서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절망과 욕망을 마주하는 순간 삶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진다. 아주 짧은 이야기부터 중편소설에 이르기까지 안톤 체호프의 소설은 삶의 근원적 물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통찰, 인간의 고독과 쓸쓸함을 소설 곳곳에서 만난다.


표제작 「자고 싶다」는 너무도 가혹한 소설이다. 정당이라는 포장으로 위장한 폭력의 세계라고 할까. 열세 살의 소년 바르카는 주인집 아기를 돌본다. 보채는 아기를 달래느라 바르카는 잠을 잘 수가 없다. 아니, 절대 잠들면 안 된다. 안주인의 화난 목소리가 가득하다. 가난해서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음에 이른 아빠, 일자리를 구하러 도시로 온 바르카. 아기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바르카의 일상은 혼미한 상태다.


램프 불빛이 깜박인다. 초록빛 원과 그림자가 흔들거리며 반쯤 감겨 움직이지 않는 바르카의 두 눈 속을 채운다. 반쯤 잠들어버린 머릿속에서 흐릿한 풍경이 펼쳐진다. (「자고 싶다」, 44쪽)


누가 바르카의 잠을 빼앗는가. 그 실체를 파악한 바르카는 본능적으로 행동하는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소년의 세상을 향한 분노가 내게로 스며든다. 바르카를 위로하고 안아줄 어른이 어디에도 없는 현실은 이 시대에도 똑같다는 게 아프고 안타깝다. 어디 그뿐인가. 슬픔과 절망에 대해 털어놓을 이가 없는 마부 요나의 이야기 「우수」도 다르지 않다. 아들이 죽은 슬픔을 애도는커녕 아무도 관심이 없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안톤 체호프만이 안다. 심지어 그 절절함을 너무도 아름답게 표현했다. 세상에 뿌려진 요나의 슬픔. 가만히 요나의 등을 쓸어주고 싶다. 사라지지 않는 불평등과 계급의 사회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가난하고 아프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이는 어디에 존재할까. 사랑으로 안아주고 위로할 이는 어디에 있는가.


슬픔은 너무 깊어 그 끝을 알 수 없다. 요나의 가슴이 터져 폭포수처럼 슬픔이 흘러나오면 온 세상을 다 잠기게 할 수도 있으련만 그런 슬픔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지금 슬픔은 아주 작은 공간 안에 갇혀 있어 밝은 낮에 불까지 비춰가며 찾는다 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수」, 31쪽)


그렇다면 가난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괴로움이 있을까.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의사 안드레이 에피미치가 정신병 환자 이반 드미트리치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6호 병동」와 자신에 세운 원칙을 고수하며 그 틀안에서 살아가는 희랍어 선생 벨리코프의 생애를 「상자 속 사나이」를 통해 만날 수 있다.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정의와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타협을 할 수 없는 삶은 얼마나 고독할까. 안드레이 에피미치가 6호 병동의 환자가 되는 결과에 무기력해질 뿐이다.


다르다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헛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두 사람. 그중 수학교사인 부르킨이 동료 교사 벨리코프가 생각하는 희랍어 선생 벨리코프는 분명 그 시대의 이웃들과 다르다. 심한 결벽증과 불안으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사람들은 그를 기피한다. 이야기를 들은 수의사 이반 이바니치의 말처럼 우리의 삶 역시 벨리코프의 그것과 뭐가 다른가.


“우리가 좁고 답답한 도시에 살면서 쓸모없는 서류를 작성하고 카드놀이를 하는 것, 이 역시 상자 속 삶이 아닐까요? 할 일 없는 사람들, 걸핏하면 시비를 거는 사람들, 멍청하고 게으른 여자들 틈에서 온갖 시시한 소리를 하고 들으면서 평생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상자 속 삶 아닐까요?“ (「상자 속의 사나이」, 209쪽)


상자 속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꿈꾸는 것, 모두의 바람은 아닐는지. 안톤 체호프의 대표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그 간절한 바람을 느낀다. 중년의 구로프 앞에 나타난 여인 안나. 둘의 로맨스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구로프에겐 삶의 존재 여부를 생각할 만큼 절실하다. 그를 살게 하는 존재는 안나인 것이다. 여태껏 살아온 인생을 저버리고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이 인생, 아직 이렇게 따스하고 아름답지만, 머지않아 그가 그렇듯 퇴색하고 시들게 될 이 인생에 그는 연민을 느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토록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 전에 만난 여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닌, 상상 속에서 만들어내 평생 애타게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모습을 사랑했다. 그리고 실수를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사랑했다. 그와 함께 있어 행복했던 사람은 그중 단 한 명도 없었다. 만났다가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그 역시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뭐라 이름을 붙이든 사랑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머리가 세기 시작한 지금에야 그는 난생처음으로 진짜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237쪽)


우리 삶이 99%의 절망과 1%의 사랑으로 채워진다면 너무도 비통하다. 하지만 1%의 사랑 때문에 나머지를 견딜 수 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무한 인생에 활력을 더하는 일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안톤 체호프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실 책장에는 다른 번역가의 안톤 체호프의 단편집이 있다. 골라읽은 단편이 있지만 제대로 완독을 하지는 못했다. 같은 내용의 소설이 번역가의 시선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걸 발견하는 일도 즐거운 것 같다. 고전과 세계문학에 대한 갈망을 쌓아두기보다 읽고 체감해야 하는데 게으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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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06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추카~
체호프는 💕

자목련 2021-08-09 17:3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체호는 사랑이에요.
스콧 님도 축하드려요^^

mini74 2021-08-06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좋은 글 항상 감사해요. 당선도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1-08-09 17:33   좋아요 1 | URL
저도 축하드려요. 미술에 관한 리뷰와 글 더욱 기대할게요^^

그레이스 2021-08-0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자목련 2021-08-09 17:3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감사해요. 저도 축하의 마음을 보내요^^

초딩 2021-08-06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목련님~ 이달의 당선 페이퍼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8-09 17:32   좋아요 1 | URL
초딩 님도 축하드려요^^

서니데이 2021-08-06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8-09 17:31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해요. 시원한 시간 이어가세요^^
 
시티 픽션 -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테마 소설집
조남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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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말이다. 지금 나에게 도시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공간일 뿐이다. 서울은 특히 그렇다. 미로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일곱 명의 작가가 도시를 테마로 쓴 소설집 『시티 픽션』에서 도시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으로 다가온다. 도시를 채우는 것들은 무엇일까. 아파트가 생각나는 건 나뿐일까.

조남주의 「봄날아빠를 아세요?」는 현미경처럼 도시인의 욕망을 들여다본 것 같다. 거주공간이 아닌 투자공간으로 전락한 아파트. 역세권 아파트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을 통해 주민들의 솔직한 마음을 보여준다. 비슷한 아파트와의 시세 차이, 학군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도시에는 home이 아닌 house뿐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만약 소설 속 인물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는 게 현실이구나 싶다.

‘종묘’란 공간을 배경으로 한 정용준의 「스노우」는 도시 속 거대한 고요를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1995년 강도 6.5의 지신이 발생한 서울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지진과 화재는 어이없이 삶을 파괴하니까. 말 그대로 부서진 서울, 불에 탄 ‘종묘’.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는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지만 종묘는 복구작업이 느리게 진행된다. 종묘해설사 ‘이도’는 이러한 사실에 화가 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속상하다. 그런 이도와 달리 경비원 ‘서유성’은 긍정적인 믿음으로 야간 순찰을 한다. 깊은 밤 종묘에서 만난 고양이에게 ‘스노우’란 이름을 붙여준 그는 그곳이 종묘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 공간은 어디일까. 그 공간이야말로 나를 아는 장소는 아닐까. 서유성과 이도에게 종묘도 그런 공간일 것이다.

“모두 잠들고 심지어 종묘의 신들도 잠들어 있는 것 같은 깊고 깊은 새벽에 관리실 책장에 홀로 앉아 있으면 이상한 감정이 들어요. 아······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꼭 장소인 것 같다니까요. 그 기분과 그 느낌이 종묘라는 생각이 들어요. 갈 수도 있고 머무를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고 그래서 묘사할 수도 있는 곳.” (정용준의 「스노우」, 89쪽)


이주란의 「별일은 없고요」는 제목처럼 별일 없는 하루하루의 일상이라고 할까. 서울에 살던 화자 ‘수연’은 엄마가 계신 지방 소도시로 온다. 아랫집의 화재로 인한 결정이었지만 수연에게는 변화와 휴식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작은 소도시에서 새롭게 알아가는 사람들과 풍경을 잔잔하게 담아낸다. 어제와 같은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계획대로 흐르는 시간들. 서울과는 다르게 조용하지만 움직이는 삶의 모습이 다정하게 전해진다. 최근 이주란 소설의 분위기라고 할까. 조곤조곤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인물의 행동과 내면을 묘사한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조남주의 단편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히는 조수경의 「오후 5시, 한강은 불꽃놀이 중」은 내 집 마련의 꿈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잘 보여준다. 월급을 다 저축해도 서울에서 집을 소유할 수 없는 지독한 현실을 통해 지금 이 시대의 청춘들이 느끼는 허탈과 절박함이 씁쓸하다.

언제나 틈은 존재하는 법이었다. 정부가 집값을 잡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면 이 박사는 틈새를 찾아 회원들에게 알려주었다. 이 박사가 언급한 지역으로 회원들이 몰렸고, 사람이 몰리면 어김없이 집값이 올랐다. 카페에서는 이 박사 덕분에 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떠돌았다. 이 박사가 꿈과 불안을 동시에 팔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세상에 불안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었다. (「오후 5시, 한강은 불꽃놀이 중」, 167~168쪽)

화자 ‘의진’은 유튜버의 조언에 따라 갭투자를 시작하면서 직장까지 바꾼다. 직업소개소에서 사무실의 모든 걸 처리하는 업무를 맡는다. 사장을 위해 상품권 거래를 하던 중 상대가 사기를 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흔적을 찾으면서 의진은 서울의 30평대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과 애인 연석의 아파트를 생각한다. 부동산의 소유는 연애와 결혼의 필수조건이었다. 물질만능주의가 아니라 부동산 만능 사회가 된 것일까.

한강변에 있는 연석 명의의 아파트. 언젠가 그곳이 재건축된다면 거기 살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어디로 가게 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런 생각들은 초고층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멋진 야경을 보며 다 잊게 되겠지. 잊고 살겠지. (조수경의 「오후 5시, 한강은 불꽃놀이 중」, 184쪽)

내게 도시는 어떤 공간일까. 좋은 사람들과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은 장소이면서도 더 이상 찾아가지 않는 곳. 그래도 그곳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들을 때면 마음속에서 몽글거리는 무언가를 외면하는 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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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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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졌다. 마치 도달해야 할 목표처럼 여겼던 잘 사는 일 말이다. 잘 사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기도 하고 사는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 거라고 친구는 놀릴지도 모른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냥 순리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날들이다. 그럼 순리는 무엇일까. 조남주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을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우리가 살아온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읽었다.


수록된 8편의 소설이 그랬으니까. 소설 속 여성 화자는 모두 우리였으니까. 과거의 우리, 지금의 우리, 미래의 우리 말이다. 어쩌면 모두 여성 화자라서 우리의 이야기로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상실과 슬픔을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내 것 같아서 함께 분노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읽은 「매화나무 아래」는 눈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소설이다. 눈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있을까.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지내는 날들에야 가능할까. 아니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치매에 걸린 큰언니를 만나러 요양원에 가는 화자 동주가 들려주는 큰언니 금주, 작은언니 은주의 이야기. 세 자매로 지냈던 시절, 그리고 남은 큰언니와 동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삶의 고단함, 이별을 준비하는 가느다란 시간을 생각한다. 연약하고 위태롭게 삶과 이어진 시간들. 사는 건 무엇일까. 가만히 이런 문장을 읽는다. 소설 속 세 자매도 눈이 되었다가 꽃이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일 것이다.


봄이 오면 눈들은 꽃이 되겠지. 새하얀 꽃들이 늙은 나무를 뒤덮으면 마르고 갈라진 나무껍질은 보드라운 꽃잎에 가려 보이지도 않겠지. 벅차게 흐드러진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며 코끝에 매화 향이 날라오는 듯했다. 바람이 불면 새하얀 꽃잎들이 나비처럼 팔랑일 것이다. 그러다 못 이기고 한꺼번에 떨어져 함박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매화나무 아래」 중에서)


모든 걸 다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게 노년이라면 치열하게 혼란스러운 지금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와 똑같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지지하는 마음,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해낼 수 있다. 화자인 소설가가 악플러를 고소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오기」는 그런 마음을 말한다. 이해와 공감, 단단한 연대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 이 단편을 읽으면서 여성 서사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당혹스럽고 불편하고 아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부장제와 차별의 단어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상처들. 그래서 ‘오기’란 제목이 ‘다짐’, ‘결속’처럼 다가온다.


그런 마음은 사랑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나’가 아닌 상대에게 모든 걸 맞추는 「현남 오빠에게」나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는 수많은 폭력과 폭행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는 「여자아이는 자라서」 속 딸을 둔 화자와 연결된다. 인식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그건 단순하게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유쾌하게 풀어낸 「미스 김은 알고 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 단편을 너무 재밌게 읽었지만 가장 씁쓸하고 속상했다. 직장에서 뭐든 다 해내는 미스 김의 존재가 우리의 20~30대 청춘 같아서.


알면서 버티고 모르면서 버티는 게 삶인가. 자신이 자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육아로 힘들지만 복직한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딸의 속상함을 알지만 워킹맘인 엄마도 손주를 봐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오로라의 꿈」 속 모녀는 가장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오로라의 꿈」 중에서)


우리가 쓰는 삶, 우리가 살아내는 삶을 생각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삶. 그들의 고군분투는 나의 일상이다. 웃고, 울고, 화내고, 속상한 마음을 다시 다잡고 나아가는 우리와 닮았다. 소설 속 그들처럼 우리의 시간이 먼 훗날 어떻게 채워질까 기대하며 오늘을 더 사랑하며 살아간다. 잘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서로를 응원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같이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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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7-0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말씀 처럼 ‘우리가 쓰는 삶, 우리가 살아내는 삶‘
오늘 하루 열심히, 잘 살지 않아도, 서로 부등 부등 응원하며!
자목련님 7월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

자목련 2021-07-02 17:23   좋아요 2 | URL
응원하는 삶, 좋아요!
더위가 몰려오는 7월 시원하게 보내세요^^

초딩 2021-08-06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앙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8-09 17:34   좋아요 0 | URL
^^*
행복한 한 주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1-08-0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자목련 2021-08-09 17:34   좋아요 0 | URL
건강하고 즐거운 일이 가득한 시간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8-06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8-09 17:34   좋아요 1 | URL
가을의 소리가 들리는 한 주 보내세요^^

새파랑 2021-08-06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 드려요 역시 👍

자목련 2021-08-09 17:35   좋아요 1 | URL
감사드리며, 저도 한다발의 축하를 드립니다^^

강나루 2021-08-0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08-09 17:36   좋아요 1 | URL
강나루 님도 축하드려요, 시원하고 즐거운 날들 이어가세요^^
 
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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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게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251쪽)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이다. 월급으로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니까 학자금 대출, 전세금 대출의 이자를 내고 월세를 내고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이들 말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시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N잡러가 되는 사람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월급날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건 직무유기였다. 그게 뭐든 관심을 갖고 촉을 세우며 달려들어야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티끌은 티끌일 뿐 한 방이 필요했다. 장류진의 첫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 속 마론제과의 입사 동기 다해, 은상, 지송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겨우 취업을 했을 뿐 나아지는 건 없었다. 동료나 상사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니 인사평가는 매년 같았고 연봉도 제자리였다. 하루하루 버거운 일상, 화자인 다해에겐 은상과 지송과 만난 점심을 먹는 짧은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나와 같다는 동질감이 그들과 더욱 긴밀한 사이로 이끌었다. 누군가 인사평가를 높게 받았거나 나보다 잘 나갔다면 셋의 관계는 화해되었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 직장 생활에서는 반드시 필요했다. 다행스럽게 셋은 서로를 진심으로 대했다. 그래서 연장자인 은상이 ‘이더리움’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을 때 믿고 따를 수 있었다. 가상화폐가 뭔지도 모르면서 은상이 던지는 확신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소설 속 세 명의 여성은 지금 우리 시대의 대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본이라고 할까. 취업이 전부가 아닌 시대, 노력 이상의 운이 따라야 내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시대의 고민과 절망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하루하루 ‘이더리움’의 등락에 울고 웃는 모습은 부동산과 주식을 향한 누군가의 열망과 포개어진다. 절실한 그들의 마음은 현시대의 흙수저를 대변한다고 할까.


가장 뜨거운 사회적 이슈인 ‘가상화폐’란 소재를 떠나서 가장 현실적으로 시대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고 소설 속 인물에 몰입하게 된다. 가볍고도 발랄한 위트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모래사막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다. ‘달까지 가자’란 소설의 제목은 허무맹랑한 기대인지도 모르다. 하지만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갈 수 있는 세상을 열망할 수는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명백한 벼랑의 끄트머리였다. 크고 사나운 물결이 너울질 때마다, 험한 파도가 벼랑을 힘껏 때릴 때마다 그 가장자리가 조금씩 침식되었다. 내가 서 있는 땅의 경계가 자꾸만 깎이고 부서졌다. 돌가루가 디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게 내 눈으로 고스란히 보였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부서져 추락한 것들이 어디까지 떨어지는지는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끝도 없이 떨어졌다. 땅에 닿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그게 가장 두려웠다. (331쪽)


열심히 하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를 마주하는 건 서글픈 일이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건 그만큼 고통을 체득하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다. 나가야 한다는 걸 알기에 자꾸만 시선을 돌릴 수밖에. 무엇에 동참해야 할까. 무엇을 놓치지 않아야 될까. 그리하여 시대를 읽는 일, 어떤 시류를 몸을 맡겨야 할지 수없이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두에게 잠시나마 신나는 상상을 선사한다. 독자의 욕구를 잘 파악한 장류진 작가의 영리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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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6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읽어서 리뷰보니 더욱 생생해요! 장류진작가님 정말 영리하게 잘쓰시는 듯 ^.^

자목련 2021-06-28 15:35   좋아요 1 | URL
공쟝쟝 님의 멋진 리뷰가 소설을 아주 잘 보여준 것 같아요. 가상화폐(에 관심 있는 있는 이들에게 아주 즐거운 소설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서니데이 2021-06-26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엔 가상화폐가 뉴스에 많이 나오는데, 시기에 잘 맞는 소재 같습니다.
자목련님,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1-06-28 15:32   좋아요 2 | URL
네, 작가가 의도와 시대의 흐름이 잘 맞았다고 할까요.
이제 진짜 더위의 날들이에요. 서니데이 님도 시원한 오후 이어가세요^^

초딩 2021-07-0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관왕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1-07-09 16: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딩 님도 축하드려요^^
시원한 오후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7-0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7-09 16:0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