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인 더 다크 - 어느 날 갑자기 빛을 못 보게 된 여자의 회고록
애나 린지 지음, 허진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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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짙은 빨간색 외투를 입고 챙이 넓은 모직 모자와 직접 만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짙은 빨간색 새틴 스카프를 잘라서 빛을 조금 더 차단할 수 있도록 두 겹을 겹쳐 깔끔하게 단 처리를 한 다음 귀를 걸 수 있도록 고무줄을 달았다. (54쪽)

얼핏 코로나19로 인한 마스크를 쓴 모습처럼 보인다. 극도로 예민한 사람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제목만 보고는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다. 어둠에 익숙한, 어둠 속에서만 생활하는 애나, 그녀가 간직한 사연에 대해 다양한 상상을 했지만 빛을 보면 안 되는 ‘광선과민성 지루성 피부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삶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매일 마주하는 빛을 완전히 차단해야 하는 삶이 있다니. 나이가 들면서 면역력이 약해져서 햇볕 알레르기가 생긴 작은언니가 떠올랐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삶이었다.

『걸 인 더 다크』는 내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삶을 들려준다. 저자 애나는 영국 런던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무런 예고 없이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는 게 힘들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시적이고 단순한 현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거다. 어쩌다 하루 정도 그냥 피곤한 일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애나에게는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도 정확한 진단, 치료법을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는 이가 없었다. 뜨거움의 정도, 고통의 정도에 대해 얼굴에 용접기를 대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라니.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가 그러했다. 애나의 삶은 전면 수정되었다. 모든 게 이전과 달라졌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듯했다. 절망과 고통, 좌절, 낙담의 시간이 몰려왔다. 런던을 떠나 현재의 남편인 피트와 함께 낯선 도시에서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빛을 차단하고 이전의 익숙한 공간이 아니 새로운 공간에서 살아가는 애나. 피트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은 삶은 살면서 다른 사람들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는 연대의 의무가 있었다. 그건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순전히 오기에서 나온 의무였다. (147쪽)


친구, 가족, 지인, 동료 모두와 단절된 상태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안에서도 자신과 비슷한 희귀질병을 앓는 이들과 연대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모습은 먹먹함을 불러온다.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 라디오 듣기, 소설 읽기, 음악 듣기, 뜨개질 하기,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활동 반경을 넓히며 체력관리를 하는 애나와 그를 곁에서 지키며 동행하는 남편 피트의 사랑은 세상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고결하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가는 일조차 빛이라는 위험요소 때문에 포기하면서 느꼈을 절망. 온간 자료를 검색하고 논문을 찾아 자신의 병에 대해 알아간다. 하루하루 빛과 싸워가는 과정, 어떤 게 좋을지 몰라 모든 걸 다 시도하며 스스로 실험체가 되어야만 했던 시간, 생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교육을 시작하며 내면의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애나의 기록은 참담하면서도 대단하다. 희망을 놓지 않는 힘, 그건 사랑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애나의 투병기를 읽으면서 희귀병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리고 적절한 배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우리가 모르는 삶은 얼마나 많을까. 이 책을 통해 ‘광선과민성 지루성 피부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 ‘광선과민성 지루성 피부염’에 대한 치료나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구나 싶다. 삶을 살아가는 감사와 긍정의 태도를 생각한다.

나는 배웠다. 가장 숭고한 진실은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진귀하고 다채로운 고통으로 채워져 있으므로 ‘왜 하필 나지?’라는 말은 바보나 하는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양식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아닐 이유가 어디 있어?” (중략) 기쁨은 모든 일상의 뒤에 가만히 숨어서 우리가 찾아 주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사랑은 이유가 없다. (254~255쪽)


소수와 약자로 살아가는 건 보통의 삶보다 몇 십, 몇 백배로 더 힘들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통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 채워야 할 것들이 바로 감사, 기쁨, 사랑이라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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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8-07 0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에 스릴러 소설인줄 알았어요. 지금 읽어보니 자신의 희귀병과 싸우는 사람의 이야기네요. 인간의 역사 자체가 고통으로 채워져 있고 나 역시 그 일부, 내가 아닐 이유가 어디 있나...라고 생각하다니 작가의 정신력이 참 강하네요.

자목련 2021-08-09 10:14   좋아요 1 | URL
있는 그대로의 고통을 읽으면서도 말씀처럼 작가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주변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결국 고통을 감당하는 건 본인의 몫이니까요. 그래도 그 모든 걸 포용하고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이 없었다면 작가도 좌절하고 포기했을 것 같기도 해요. 여전히 더운 월요일 시원하게 보내세요^^
 
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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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은 낮고 조용해서 놓칠 수 있는 목소리를 주목한다. 끈질기에 이어지는 생을 지켜보며 그들과 연대한다. 그리하여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려준다.담담하고 차분해서 더욱 환하고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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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모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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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세상의 모든 사랑을 생각한다. 그 본질은 같을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 사랑이 성숙되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고 지속되는 동안 상대를 향한 마음은 그 어떤 사랑보다도 크고 선명할 테니까. 그럼에도 어른의 시선에서 청소년기의 그런 감정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나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이치조 미사키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읽기 전 그랬다. 서툰 사랑의 이야기, 뻔한 치기를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연애는 뭐랄까. 진실되지 않은 감정 놀이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미야 도루가 왕따를 당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히노 마오리에게 고백을 했을 때 바로 히노 마오리가 수락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학교 끝날 때까지 말 걸지 말고 연락은 짧게 하고, 정말로 좋아하지 말라는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우며 히노 마오리의 제안처럼 ‘가짜 연애’를 하다가 끝날 줄 알았으니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집안 살림을 도맡던 누나가 집을 떠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가미야 도루에게는 특별한 사건이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자신을 ‘남자친구님’이라 부르며 모든 걸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 히노 마오리가 이상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도루와 마오리는 방과 후에 만나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씩 친해졌다. 그 둘 사이에는 도루를 경계하는 마오리의 친구 이즈미가 있었다. 둘이서 만날 때도 있고 셋이서 만나 시간을 보냈을 때도 있었다. 보통 고등학생의 순수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좋아하지 말라고 했지만 마오리를 좋아하는 도루의 다정하고 예쁜 마음도 느껴졌다. 그렇게 예쁘게 사귀면 좋겠다 싶었다. 마오리의 사정을 알기 전까지는. 마오리는 도루에게 자신이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전날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어 매일 스마트폰과 수첩에 중요한 일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고 아침마다 자신의 그 모든 걸 복습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준다. 이즈미는 모두 알고 있으며 자신을 도와주는 친구라고. 충격을 받았지만 마오리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사람은 원래 잊어버리게 마련이야. 하지만 괜찮아. 어떤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난 그렇게 믿어.”


“괜찮아. 난 앞으로도 네 바로 옆에 있을 테니까.” (267~268쪽)


내일의 마오리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도루는 진심을 다해 하루하루 마오리와 좋은 시간을 보낸다. 학교에서 몰래 바람이 빠진 자전거를 고쳐서 타는 일,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가고, 수족관에 가고 환한 벚꽃을 보면서 소중한 일상을 보낸다.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처럼 도루와 마오리의 첫사랑이 채워지고 있었다. 자신이 기록하고 메모한 것들을 통해 모든 걸 의지하는 마오리에게 도루는 작가가 되어 나타난 누나를 소개한다. 마오리를 만나면서 밝아지고 편안해진 도루는 누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마오리의 상태도 전한다. 함께 한 시간이 쌓이면서 도루와 마오리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 두 아이의 고운 사랑을 신이 질투했던 것일까. 엄마와 같은 병으로 도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 사실을 마오리는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어제의 기억 속에서 도루의 흔적을 지웠기 때문이다. 그건 도루의 유언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기적처럼 어제의 일을 기억하기 시작한 마오리. 모든 게 괜찮아지고 있었지만 마오리의 가슴속에는 뭔가 떠오르고 있었다. 비밀 장소에서 발견한 자신이 그린 그림 속 남자아이. 스마트폰과 수첩을 찾아보다도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다. 친근하고 환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다. 그렇게 마오리는 마음으로 그를 그리고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까지고 빛바래지 않는다. (374쪽)


기억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또 무엇일까. 아픈 상처로 기억될 수 없는 도루와 마오리의 사랑이다. 사랑은 서로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마오리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도루를 조금씩 잊어가겠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어제의 우리로 존재할지라도 그 어제로 인해 성장하고 살아가게 될 테니까.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본질을 담백하고 섬세하게 그린 이 소설을 나도 오래 기억할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그 애는 이제…… 없어. 하지만 기억은 내 안에 존재해. 몸속에, 마음속에 잠들어 있어. 기억해 내면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어. 그건 잘 말할 수 없지만 희망 같은 거란 생각이 들어. 세상은 서서히 그 애를, 도루를, 잊어갈 거야. 그래도…….”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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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30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전 재미있을거 같아요~!!

자목련 2021-08-01 08:39   좋아요 1 | URL
재미와 감동까지. 드라마나 영화로 보고 싶은 소설이었어요^^
 
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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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졌다.소설 속 누구라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가만히 잡아줄것 같았다.읽는 것만으로도 곁에 있고 같이 살아가는 게 느껴져 천천히 회복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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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감아 싱클레어 2021-07-29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싶다니..최고의 찬사네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자목련 2021-07-30 12:05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추천해요. 아픈 따뜻함이라고 할까요, 설명하지 어렵지만 좋았어요.
 
진상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이혁재 옮김 / 더이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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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간직한 삶은 불안하다. 혼자만의 비밀은 감당하기 어려워서 힘들고 타인과 공유한 비밀은 그것이 탄로 날까 두렵다. 그 비밀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범죄에 관한 것이라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고역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다시 사회에 나왔지만 누군가 자신의 죄를 언급한다면 어떨까.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화가 날 것이다. 잘못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다했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의 입장이라면 조금 다를 것이다. 범죄의 이력을 둔 이가 주변에 살고 있다면 자꾸 신경이 쓸일 테니까.


비밀을 간직한 삶은 불안하다. 혼자만의 비밀은 감당하기 어려워서 힘들고 타인과 공유한 비밀은 그것이 탄로 날까 두렵다. 그 비밀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범죄에 관한 것이라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고역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다시 사회에 나왔지만 누군가 자신의 죄를 언급한다면 어떨까.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화가 날 것이다. 잘못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다했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의 입장이라면 조금 다를 것이다. 범죄의 이력을 둔 이가 주변에 살고 있다면 자꾸 신경이 쓸일 테니까.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상』에서 그런 이들을 만났다. 지난 삶을 숨기고 사는 이들의 불안, 과거가 탄로 날까 전전긍긍하는 마음, 이제라도 죄책감을 털어내고 편하게 살고 싶은 이들 말이다. 책에 수록된 5편의 단편은 모두 흥미롭다. 가장 강렬했던 건 표제작인 「진상」이다.


「진상」은 10년 만에 중학생 아들을 죽인 범인이 잡히면서 시작한다. 회계사무소 소장인 시노다는 서점에 간 아들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돌아온 후 삶은 엉망이 되었다. 범인이 잡혔으니 모든 게 편안해질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빠의 친구와 결혼한 딸은 범인이 잡혔다는데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집에 오지 않는다. 범인은 자백 대신 아들이 서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걸 봤고 그에 대한 협박을 했다고 진술이 신문에 보도가 된다. 그리고 사건 당시 아들과 함께 서점에 간 친구가 있었다는 걸 알려준다. 자신이 몰랐던 아들의 성향과 사건의 이면에 대해 알아가면서 시노다는 삶을 돌아본다.


이처럼 이 단편집에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선에 대해 말한다. 우연하게 사고에 휘말려 전과자가 된 「타인의 집」 주인공도 그렇다. 강도 미수 사건으로 복역을 한 가이바라는 아내와 함께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휴일에는 동네 청소하기를 빼놓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집주인이 그 사실을 언급하면서 집을 나가라고 한다. 사정을 해도 소용없고 말 그대로 거리로 내 쫓길 상황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이바라에게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양자로 들어와 자신의 집에서 살라는 제안을 한다. 부부는 고민 끝에 수락을 하고 그 집에 들어가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비밀과 마주한다. 할아버지가 끝내 숨기고 싶었던 비밀.


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것. 촌장 선거에 출마한 「18번 홀」 주인공의 수상함도 역시 그 비밀 때문이다. 도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가시무라가 고향으로 돌아와 선거에 출마한다. 외지인이나 다름없는 그의 선거 출마에 상대 후보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가시무라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친구와 지인, 모두 이긴 선거라고 걱정 없다고 말하지만 가시무라에겐 촌장에 낙선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겉으로는 생계의 위협이라고 말했지만 과거 자신의 죄에 대한 것이다. 촌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하면 지금처럼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수 있기에.


추리와 스릴러 장르를 다룬 소설이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상』 속 이야기는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더 끌린다. 「진상」에서는 가족이라고 해도 아는 게 없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고 「18번 홀」에서는 지역개발에 따른 갈등과 인간의 욕망이 따라온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를 당하고 수면제 개발 임상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년 가장이 느끼는 삶의 허무를 다룬 「수면」이나 대학교 카라테 합숙훈련을 받아 벌어진 사고를 들려주는 「꽃다발 바다」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현재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모든 게 용서되고 진실이 밝혀지지도 않는다 걸 알면서도 씁쓸하다. 하나의 거짓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어쩌면 양심에 대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그와는 별개로 폭염에 지쳐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 읽기 좋은 소설집이다. 읽는 동안 더위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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