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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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이 가운데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는 이가 있다.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지 알면서도 무엇이 가장 힘든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 습관이 나쁘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그에게 다른 방식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불안할 때 손톱을 뜯거나 성마른 표정을 짓는 것처럼. 그에게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조해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자꾸 겹쳐졌다. 그는 하나가 아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와 닮아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그냥 그런 가 보다 여기고 삶은 다 힘드니까 생각했던 일상들이 입체적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조해진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그러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의지할 이가 없었다. 의지하려 말을 건네거나 손을 내밀어도 상대는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누군가를 돌보고 기약 없이 삶을 희생하며 버티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간병인, 가난한 예술가, 비정규직 노동자, 안전이 보장되지 현장에서 실습생이 아닌 노동자가 된 청소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의 산증인의 삶은 모두 우리의 것이었다. 그들이 힘겹게 버티는 생을 조해진은 언제나 그렇듯 담담하게 들려준다.


9편의 단편 가운데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던 소설은 단연 「하나의 숨」이었다. 처음에는 제목의 하나가 가진 의미가 소설 속 인물의 이름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숫자 하나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을 앞둔 계약직 교사인 ‘나’에게 실습을 나간 학생 ‘하나’의 전화는 달갑지 않았다. 대학입시가 아닌 취업을 목표로 둔 학교에서 취업률은 중요했고 다른 공장도 실습생에 대한 대우는 비슷했다. ‘하나’에게 학교로 돌아오라고 선뜻 말할 수 없었다. 거기다 학교에 계속 남아있을지 알 수도 없어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하나’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그제서야 하나가 있었던 곳, 하나가 매일 전화를 하며 걸었을 그 밤을 마주한다. 그리고 하나에게 일어난 사고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이 더욱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나’에게 닥친 현실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며 하나와 닮은 누군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조카, 나의 친척, 과거로 돌아가 나의 친구가 거기에 있었다. 하나의 숨이 환한 숨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다고, 어차피 이곳엔 진짜가 없으니, 왜냐하면 지금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주 긴 꿈을 꾸고 있으므로. 꿈 바깥에 두고 온, 차창에 얼비치는 도시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깨어난다 해도 그곳 역시 꿈일 거라고, 그러니까 꿈 바깥의 꿈일 뿐이라고 믿으면서. 다만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만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을 이어간다. 그래서, 오직 그 얼굴을 지키기 위해서, 행복은 가짜가 아니라고 느끼는 그들의 한순간을 위해서, 가까스로, 자꾸만 꺼지려 하는 심장을 바닥에서부터 부풀리며, 하나는 또 한 번…… 하나의 숨을 쉰다. ( 「하나의 숨」, 103쪽)


그런 바람은 「파종하는 밤」으로 이어진다. 공장에서 수은 중독으로 소년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은 ‘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또래와는 다른 어린 아들을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으까. 단단한 사회적 제도와 울타리는 소년들뿐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 하는 ‘나’에게도 필요했다.


위태롭고 불안한 숨을 이어가는 이들은 현실의 우리였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뉴스와 언론에 등장했던 그들의 현재가 궁금했다. 올바른 사회로 나가기 위해 투쟁하고 정의를 외치던 이들이 떠난 자리를 지키며 그들이 돌아오면 설자리를 잃을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계선 사이로」에서 무엇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다르다고 구분하는지 그 명확에 대해 아무라도 붙잡고 묻고 싶어졌다.


간절하게,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감각되지 않은지만 존재하는 경계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연진도 그런 종류의 경계선이라면 다른 사람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분명하게 의식하게 했던 몸 안의 특별한 선도 그중 하나였다. 비로 이제는 사라졌지만 남들에게는 없는 그 선을 갖고 있던 시절에는 학보사 책상에 쌓인 신문과 잡지들, 인스턴트커피의 달콤한 냄새와 형광펜으로 밑줄을 친 윤희의 문장, 그리고 먼지 낀 학보사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낡은 책상 주변이 갑작스럽게 환해지던 순간이 연진의 세계를 구성했다. 그 풍경부터, 연진은 말하고 싶었다. (「경계선 사이로」, 133~134쪽)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는 이들에게 세상이 너무도 잔혹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숨」은 중의적이며 뜨겁게 다가온다. 하나에게 그렇듯 우리에게도 모두 저마다의 하나의 숨이 절실하다. 각각의 하나의 숨이 모여 환한 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9편의 단편 가운데 이전의 단편 「문주」나 장편 『단순한 진심』와 연결된 제목이 아닐까 싶은 「문래」는 조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의 기원, 글의 시작에 대한 조해진의 개인적인 서사라고 하면 맞을까. 아련하다 못해 아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상처를 고스란히 꺼내는 일은 아프고 고통스럽기에 「문래」를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만났던 조해진의 소설이 한곳에 모인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나의 상처가 잠자는 나의 방을 떠올리면서.


저는 그 방을, 그 방이 있던 동네와 그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까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하며 살아왔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방이 저에게 새겨 넣은 상처가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는 것을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상처에 빚을 지며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는 거겠죠, 상처의 고유함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공평한 특권일 테니까요. (「문래」, 290~291쪽)


내 고향은 문래하고, 나의 문장[]이 그곳에서 왔다[]고…… (「문래」,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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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21-11-10 13: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 옆에도 습관처럼 한숨을 쉬는 사람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나쁜 습관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더라구요 ;;;

자목련 2021-11-10 16:50   좋아요 2 | URL
어쩌면 한숨을 쉬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이젠 겨울인 것 같아요. 쌀쌀한 날들, 건강 잘 챙기고요^^

scott 2021-12-09 16: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오늘 저녁은 환한 숨 쉬며 ^ㅅ^

자목련 2021-12-10 10:35   좋아요 0 | URL
네, 우리 모두 환한 숨을 쉬어요!!
저도 축하드리고요^^

thkang1001 2021-12-09 16: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0 10:34   좋아요 0 | URL
^^*

그레이스 2021-12-09 16: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리뷰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12-10 10:3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려요^^
활기찬 하루 보내세요^^

mini74 2021-12-09 16: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1-12-10 10:34   좋아요 2 | URL
저도 축하드려요!
즐거운 하루 이어가세요^^

새파랑 2021-12-09 1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저도 축하드려요 ^^

쎄인트saint 2021-12-09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0 10:33   좋아요 1 | URL
세인트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1-12-09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리뷰에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0 10: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향기로운 하루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1-12-09 2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1-12-10 10:33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초란공 2021-12-09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0 10:32   좋아요 2 | URL
저도 축하드려요. 건강하고 환한 날들 이어가세요^^
 
마이 선샤인 어웨이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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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삶은 언제나 아쉬운 장면뿐이다. 그중에서도 몇 장면은 평생 동안 불에 덴 상처로 남아 자신을 따라다닌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는 흐릿해지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만 나타나는 환영처럼. 그것을 포옹할 수 있을 때 삶은 비로소 완성되는지도 모른다. 후회와 실수를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기를 낼 때 삶은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흘러갈 수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를 우리는 너무 늦게 깨우친다. 아니, 후회로 가득 찬 시절에는 전혀 알 수 없다. 상처와 고통을 견디며 조금씩 성장한다.


그래서 M.O. 월시의 『마이 선샤인 어웨이』의 화자가 들려주는 그의 십 대 시절의 이야기는 그저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모르기 때문에 서툴렀던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고 상대를 위한 노력이 오히려 아픔을 주고 말았다.


소설은 ‘너’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글이다. 그러니까 고백이자 용서를 구하는 글이라고 할까. 1989년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의 한여름에 일어난 사건이 시작이다. 화자는 그 사건의 용의자 중 하나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평범하게 흐르던 여름 날, 달리기를 잘 하는 학교 인기 스타인 화자가 짝사랑한 열다섯 살 린디에게 벌어진 성폭행 사건이다. 네 명의 용의자에 화자도 포함된다. 스스로가 용의자라고 밝히니 범인을 찾아내는 스릴러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불량아로 찍힌 구순열 흔적이 있는 학생, 많은 고아들을 맡았던 위탁가정의 남편 정신과 의사, 위탁아동의 한 명인 문제 학생과 화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소문과 동네에서 그들의 행동을 통해 범인으로 유추하면서 일상을 이어간다. 화자의 눈에 비친 린디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육상부도 그만두고 학교에서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오직 화자만이 그녀를 관찰하고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하지만 열네 살 소년이 생각하는 방법은 너무도 무지했다. 화자의 말실수로 인해 학교에는 린디의 소문이 자세하게 퍼진다. 무엇이 린디를 위한 일인지 화자는 잘 몰랐다. 그저 린디와 멀어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그래서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만 했다. 사춘기 소년에게 그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비밀상자에 담긴 린디에 관한 것들이 어머니를 좌절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예고 없이 더 큰 불행을 물고 온다. 누나가 죽음으로 집안의 어둠은 걷힐 줄 모르고 어머니의 우울은 깊어간다. 당시에 화자는 그것들의 실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열네 살의 소년에겐 당연한 일이다. 린디와 통화를 하면서 린디의 모습을 상상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일이 더 소중했다. 그래서 밤마다 린디의 전화를 기다린다. 동네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화자는 린디가 괜찮아진 건 아닐까 착각한다. 하지만 그럴 리가. 그동안 범인을 찾기 위한 화자의 말과 행동들이 오히려 린디에게 가장 큰 상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린디가 그 일로 인해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제 범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린디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화자는 너무 늦게 알았다. 린디가 어머니와 함께 동네를 떠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잊힐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재회한다. 남편과 함께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난 린디. 서로에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배턴루지의 기억만으로 가득하다. 과거의 나쁜 기억은 사라진 것처럼. 하지만 린디가 얼마나 힘겹게 그 시간을 통과했을지 알지 못한다. 사건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버티며 살았을 시간들.


소설은 린디의 사건을 가장 중심에 둔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삶의 층위를 보여준다. 1990년대의 배턴루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는 아주 훌륭한 사회소설이자 아름답게 아픈 성장소설이다. 순수하고 솔직한 사춘기 소년의 가슴 아픈 짝사랑의 기억뿐이 아니라 부모의 이혼과 가족의 죽음을 통해 조금씩 삶을 배우고 알아간다. 그때 밝히고 싶었던 진실이 누구를 위한 진실이며 진실이라는 게 과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일상을 공유한다고 해도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시간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 수도 있다. 어떤 기억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하고 미묘한 삶을 생각한다. 사랑의 기억으로 회복 중인 삶에 대해서.


나아가 기억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기적을 일으켜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 다시금 우리 옆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한 여자를 바라보게 한다. 그녀는 십 대 청소년 시절에 보았던 사람과 참 다른 사람, 훨씬 복잡한 사람이다. 기억이 있기에 우리는 그녀의 삶을 총체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어머니의 삶뿐 아니라 내 삶까지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한 희생. 우리가 겪어낸 고통. 우리가 어머니에게 안긴 고민. 어머니가 우리를 키운 방식. 그래 그래 그래.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다. 그것이 기억의 목적이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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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리할 때마다 주저하는 몇 권의 책이 있다. 바로 동화책이다. 책등이 낡고 누렇게 변했지만 차마 버릴 수 없다. 책을 버리면 그 시절의 나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서다. 동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감정들, 그러니까 주인공과 내가 하나가 되어 울고 웃던 마음까지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게 맞겠다. 그냥 저기 저 책이 있으니 혼탁해진 내 마음도 책을 펼치는 순간 맑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이서희의 책 제목처럼 어쩌면 동화를 읽어야 할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바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공감하고 저자가 소개한 책과 구절을 따라 읽고 밑줄을 긋게 된다. 목차를 통해 만난 반가운 제목의 동화들, 아, 이 동화를 내가 읽었고 만화로 보고 매일 기대하고 기다렸던 그 책들이다. 동화가 전하는 일종의 교훈적인 메시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모르는 어떤 나만의 마음을 동화 속 주인공과 소통하고 싶었다고 할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동화책은 어린 시절이 아닌 사춘기와 청소년기에 읽었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고 최근에 만난 동화도 있다. 저자가 분류한 대로 5가지 키워드(잃어버린 가치를 찾아, 불안한 시간을 위하여, 모험과 불확실함 속에서, 특별한 세상을 마주하며,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며)를 차례대로 읽어도 좋고 반가움의 크기대로 만나도 좋다. 저자가 소개하고 알려주는 동화 속 명언 320가지는 모두 다 감동적이다. 이미 우리는 메마른 감성의 어른이니 그 어떤 동화라도 사실상 필요하다는 걸 잘 안다. 매일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모두 필요한 마음이니까.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 속 남매가 찾은 파랑새는 결국 집에서 키우던 멧비둘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항상 먼 곳에서 타인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다. 코로나로 인해 행복은커녕 작은 웃음조차 잃어버렸다고 믿는 우리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묻는 시간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걸. 어쩌면 이 시기가 지나면 또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소박한 행복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복을 전혀 알아보지 못해요. (30쪽)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동화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이 주는 희망과 긍정의 힘은 항상 우리는 웃게 만든다. 어려운 현실을 잊기 위한 상상의 나래가 다소 엉뚱하고 어른들의 눈에는 괴상해 보이지만 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무엇 하나 쉽게 얻을 수 없었던 앤의 인생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앤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아침은 언제나 흥미로워요.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상상할 거리도 아주 많으니까요. (75쪽)


이제 저는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그 모퉁이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을 거예요. 길모퉁이는 매력이 있어요,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궁금하거든요. (78쪽)


사실 어른이 되고 모퉁이는 기대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피할 수 없으니 우리는 삶이라는 모퉁이를 돌 수밖에 없다. 어떤 모퉁이가 나오더라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그러니 스물일곱 번의 수술을 한 R.J. 팔라시오의 「아름다운 아이」의 주인공 어기에게 삶은 얼마나 힘들까. 동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면서 많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아무도 나를 평범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173쪽)


친절이란, 참으로 간단한 일. 누군가 필요로 할 때 던져줄 수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 우정 어린 행동. 지나치다 한 번 웃어주기. (176쪽)


가장 최근에 만난 이현의 「푸른 사자 와니니」나 누구에게라도 추천하는 루리의 「긴긴밤」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같이의 삶을 생각한다. 여성, 외국인, 장애인, 노인 등 사회 약자를 모두 품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극심한 개인주의 집단 이기주의가 팽창하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게 바로 연대의 가치라는 걸 알려주는 아름다운 동화다.


와니니 무리는 그리 용맹하지 않았지만, 늘 함께해 왔다. 강해서 함께하는 게 아니었다. 약하고 부족하니까 서로 도우며 함께하는 거였다. 그게 친구였다. 힘들고 지칠 때 서로 돌봐 주는 것, 와니니들은 그것이 무리 지어 사는 이유라고 믿고 있었다. (157쪽)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잘 할 수 없다. 계획은 언제나 실패하고 쉽게 실망하고 쉽게 좌절한다. 어디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놓친 마음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320개의 문장으로 만나는 동화를 통해 깨우친다. 지치고 찌든 일상을 일으켜 세우고 펴줄 것들은 때로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다. 우리 곁을 지키는 이 동화책들처럼.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속 주디의 말처럼.


저는 행복의 참된 비법을 찾았어요. 바로 현재를 사는 거예요. 한없이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만 꿈꾸는 거도 아니에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이에요. (210쪽)


순수했던 마음까지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한없이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주는 시간이 될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벅찬 감동과 환한 미소를 안겨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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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03 14: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책 내보낼 때 갈등 고조시키는 장르가 그림책이더라고요. 반가우세요

[푸른 사자 와니니」 「긴긴밤」을 추천해주시니, 찾아보겠습니다^^

자목련 2021-11-04 13:58   좋아요 2 | URL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그림책은 정말 떠나보내기 어려워요. ㅎㅎ
와니니와 긴긴밤은 참 좋은 동화라고 말씀드려요. 기회가 닿으면 만나보세요^^

그레이스 2021-12-09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리하셔도 아깝진 않으실듯 이 페이퍼 고이 간직하시면...^^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12-10 10:35   좋아요 2 | URL
넵!!
좋은 동화는 계속 이어지니 그 자리를 대신하겠지요^^

mini74 2021-12-0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강 머리 앤 ㅎㅎ저도 넘 좋아요.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1-12-10 10:35   좋아요 2 | URL
앤은 볼 때마다 새롭고 좋아요^^

서니데이 2021-12-09 2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1-12-10 10:36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 님, 건강하고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시선 378
신미나 지음 / 창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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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을 때 시집을 구매했다. 작고 얇은 시집을 손에 쥐면 아릿하면서도 따뜻했다. 어떤 날에는 시를 읽는 마음이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읽지도 못할, 시집을 쌓아두는 일이 하나의 의식처럼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시집들은 돌보지 못한 마음처럼 한구석으로 몰아두었다. 그러다 미안한 마음에 꺼내는 이런 시집. 신미나의 첫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속 첫 시를 읽으며 마음이 무너진다. 어쩌자고 이런 날들에 이런 시를 읽는가.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려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이마」, 전문)


마치 다 안다는 것처럼, 나를 달래준다. 울컥 가슴에 메이는 이상하고 묘한 기분을 숨길 수 없다. 이러니 시를 자꾸만 찾을 수밖에. 7년 전에 나온 시에 이제서야 읽는 미안함이 사라지고 고마움만 커진다. 이런 시는 또 어떤가. 어디선가 나를 훔쳐보고 나를 위해 따스한 햇볕을 한 조각 뿌리는 것 같은 착각.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훔치다

쌀벌레 같은 것이 만져졌다

검지로 찍어보니 엄마였다


나는 엄마를 잃어버릴까봐

골무 속에 넣었다

엄마는 자꾸만 밖으로 기어나왔다


엄마, 왜 이렇게 작아진 거야

엄마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다


다음 생에서는

엄마로 태어나지 말아요


손가락으로 엄마를 찍어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잠에서 깨어나

눈가를 문질렀다 (「낮잠」, 전문)


매미가 울다가

어느 순간 뚝 그쳤다

뜨거운 길 위에서

내 영혼을 만났다


이게 네 운명이냐


내 영혼은

작은 주머니를 주고 떠났다

주머니 끈을 풀자마자

뭔가가 휙 날아갔다


그때 알았다

소중한 걸 놓쳐버렸다고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라고


꿈속에서 나는 울었다


무언가 날아가버렸고

빈 주머니만 남았다 (「환생」, 전문)


요란한 마음 때문인지 마음 끌리는 대로 시를 읽고 내 맘대로 시를 생각한다. 시를 읽는 동안 시에 풍덩 빠져들고,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니겠는가. 잘 모르지만 신미나의 시들은 흐트러진 조각을 잘 모아서 정리해 반듯한 감정을 그려내는 듯하다. 조심조심 그 조각을 살피고 만지는 시간은 얼마나 길고 어려웠을까. 어떤 감정을 간직하고 그것에서 태어난 시. 사적인 마음을 품게 만드는 이런 시가 참 슬프면서도 싫다. 그러니 또 이럴 때는 시는 시일뿐이라고 차갑고 단호하게 마음을 돌린다. 그래도 시를 읽는 일이 나쁘지 않다. 거칠었던 마음이 시를 읽는 동안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비가 올 거라고 했고

우산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


당신은 우산을 착착 접은 뒤

사거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널 것이다


비가 올 것 같다는 말은

어쩐지 희미해


눈을 감으면

4층에서 1층까지

차례로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티스푼으로 뜬 것처럼

빗물이 파낸

작은 홈들이 길게 이어진다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약지에

흰 띠가 남아 있다 (「연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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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을 달래는 일은 모든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다. 단지 화가 난 거라면 오히려 괜찮다. 그 마음을 화로 치환해 보면 그 화를 명확하게 알 수 없을 때 더욱 힘들다. 어떤 결과에는 원인이 있을 텐데,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일련의 글들에서 나는 우울하고 힘들고 어쩔 줄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걸 느꼈을 테니까. 그래서 불친절한 글이 될 수도 있다. 어쩌겠는가. 아직 나는 이렇게 밖에 쓸 수 없고, 이 공간은 최우선적으로 나를 위한 공간이니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랄 수도 없다. 그냥 사는 일이 참 어렵고 버겁다는 것.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니까. 그런 마음을 아주 쪼그만 보태주면 좋겠다.


우선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냥 소소한 것들, 일상의 작은 파편들이 주는 기분에 대해 말을 건넨다. 그러다 확장이 되면 좋아하는 것,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그리고 필요한 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들어본다. 우리는 때로 아주 단순해서 뭔가를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어둡던 마음이 환해지니까. 그래서 소비는 좋다. 물론 이런 과정이라면 화는 때로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


상처받은 감정을 달래는 일은 더 오랜 시간과 많은 정성을 요구한다. 그 마음을 공감해 주는 일부터 필요하다. 사실, 전혀 공감하지 않는 일에 대해 공감하려는 노력은 너무 힘들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1%의 공감이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상대의 마음은 헤아리려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지치지 않는 일이다. 상처받은 마음은 어느 순간은 회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이며 나머지 시간은 깊고 어둡게 침잠하니까. 스스로가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껴서 애쓰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달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상대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에서 일어난 달램이 그대로 전해지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달램의 신호를 멈출 수 없다.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신호가 약해졌는지 점검하고 점검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를 달래는 마음이다.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달래야 다른 마음도 볼 수 있으니까. 나를 달랠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이 때로 버겁다. 그러다 부러질까 걱정이다. 부드러운 단단함이 나를 힘껏 안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거나 이런 책을 검색하고 기대하는 일로 나를 달랜다. 이유리의 첫 소설집과 김초엽의 단편집 이문재 시인의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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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10-28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는 일은...항상 너무 어려워요. 쉬워졌다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뭔가가 들이닥쳐요. 자목련님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브로콜리 펀치>! 그 제가 기억하고 있던 이유리 작가의 단편집이네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1-10-29 10:28   좋아요 0 | URL
네,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온다는 걸 아는데도 참 어렵습니다.
이유리 작가는 저도 블랑카 님 덕분에 기억하는 걸요. 기대하고 있어요^^

막시무스 2021-10-28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랭의 신호 점검하기! 오늘의 교훈으로 간직하겠습니다!즐건 하루되십시요!ㅎ

자목련 2021-10-29 10:26   좋아요 1 | URL
^^*
달콤한 주말을 기다리는 금욜, 막시무스 님 향기롭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