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리커버 개정판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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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고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아쉬움뿐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무엇이 그리 아쉬운가. 무엇이 그리 부족한가. 아니다. 모든 게 감사하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것. 무탈하게 지내왔다는 것. 속 시끄러운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다음으로 이어왔다는 것.


지난 12월은 모두에게 특별한 달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탄핵 가결, 촛불 집회.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모두가 뜨거웠던 순간. 앞으로의 과정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 고민의 시간을, 누군가 고민을 끝내고 선택의 시간을, 누군가 이전과 다른 삶으로 나갈지도 모른다. 박노해의 사진 에세이 『다른 길』에서 이곳이 아닌 그곳의 삶, 다른 삶을 마주하며 나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 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온다.


나는 알고 있다. 간절하게 길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속에 자신만의 별의 지도가 빛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진정한 나를 찾아 좋은 삶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다른 길이 있다.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9쪽)





박노해의 첫 사진에세이 『다른 길』이 출간 10주년을 맞아 리커버 개정판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만났을 것이다. 141컷의 사진과 박노해의 짧은 글이 전하는 묵직한 울림.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검색이나 지도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닌 직접 가야만 알 수 있는 삶이다. 거룩하고 숭고한 삶의 조각들이다. 태고의 시간이 여기 존재할 것 같다.





이곳 소농들은 동그란 자연의 곡선을 깨지 않는다.

기계가 아닌 물소와 사람의 손으로만 비탈을 깎고

찰흙을 다져 층층이 백 수십 결의 계단논을 창조해냈다.

그 어느 신전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후손에게 물려주는 최고의 문화유산이 아닌가.

세계의 토박이들은 오늘의 도시 문명과 인류의 밥상을

떠받치고 있는 피라미드 밑돌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 지상의 작고 힘없는 가난한 이들이 무너져내리면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세계는 여지없이 무너지리라.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 27쪽)


사진 속 계단논을 보면서 이제는 관광지가 된 어느 지역을 떠올린다. 신성한 노동으로 삶을 이어온 사람들, 여전히 삶의 터전인 그곳을 향하는 마음과 태도는 조금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기에 치열한 뜨거움을 알 수 없다. 어느 삶이든 다르랴.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소박하지만 가장 풍요로운 삶, 넉넉함을 잃어버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각자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에 가장 즐거운 시간은 짜이가 끓는 시간.

양가죽으로 만든 전통 풀무 마시키자로 불씨를 살리고

갓 짜낸 신선한 양젖에 홍차잎을 넣고 차를 끓인다.

발갛게 달아오른 화롯가로 가족들이 모여들고

짜이 향과 함께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짜이가 끓는 시간」, 99쪽)


141장의 사진에 모두 붙잡았지만 유독 오래 머문 사진이다. 보는 순간, 고요한 평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떤 분쟁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느껴진다.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만이 존재할 것 같은 곳. 막강한 힘이 이곳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열망까지 품게 된다.





높고 깊은 산맥에 소중히 숨겨진 가쿠치 마을.

흰 만년설과 푸른 하늘과 붉은 흙집과 노란 나무가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가을날.

남자들은 산 위에서 야크를 치고 땔감을 구하고

여인들은 양털을 자아 옷감을 짜고 빵을 굽는다.

따사로운 가난마저 고르게 빛나는 마을.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작은 흙집.

마음까지 환해지는 내가 살고 싶은 집. (「내가 살고 싶은 집」, 143쪽)

언제부턴가 개인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하는 삶이 잘못은 아니지만 함께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두가 힘을 더해 벽돌을 찍어내는 사진과 스마트폰으로 필요한 것을 얻는 우리는 다르다고 말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에겐 비교의 삶이 아니라 연대와 공존의 삶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모두 모여

마을 공동으로 사용할 흙벽돌을 찍어내는 날.

자신의 노동이 빛나는 날이기에 웃음꽃이 핀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결핍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다 사르지 못하고

자기 존재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

‘잉여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고통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아무 의미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잉여 인간’은 없다」, 177쪽)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생각에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진이었으면 좋겠다. 쓸모없는 건 없다고, 존재 자체로 가장 소중하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말이다. 때로 막막하고 온통 깜깜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모르겠다. 경이로운 자연을 품은 삶의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때로는 사람이 깃발이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이 고맙고 눈물겹다.





멀리 야크떼를 바라보고 서 있는 청년의 천막집에

티베트 불교의 상징물인 롱다가 펄럭인다.

롱다는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초원을 달리는

티베트 말과 같다 하여 ‘바람의 말馬’이라 불린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등뼈를 곧게 세우고

깃발도 없이 길을 찾아가다 보면

때로는 사람이 깃발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깃발」, 343쪽)


책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삶이라는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버티는 이들에게 박노해가 건네는 위로는 마음의 다른 길로 안내한다. 마음의 길이라는 소망을 품고 찾아 나선 이에게는 지표가 될 것이다. 떠나지 않는 이에게도 만족하며 감사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길이 생긴 것이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음’의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있음’의 가능성에 다해 분투하면서,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며 감사와 우애로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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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1-12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간절하게 길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길이 다가와 마주한다는 것,,영상 이미지로 떠올리면서 글을 읽으니, 자목련님께서 글에 담으신 에너지들이 한층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위로가 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만 가득한 2025년이 되시길 바랄게요^^

자목련 2025-01-14 08:48   좋아요 1 | URL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책이 아닌가 싶어요.
전야제 님이 원하는 길, 즐겁고 행복하게 걸어가시길 바라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그레이스 2025-01-12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존과 연대의 중요성...200퍼센트 공감!

자목련 2025-01-14 08:44   좋아요 1 | URL
박노해의 글을 읽을 때면 매번 내가 잊고 있었던 것들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님,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고 평온한 날들 이어가세요^^
 



2025년이 생경하다. 그저 숫자에 불과한데 먼 미래에 도착한 기분이다. 푸른 뱀의 해라고 했던가. 고모와 선생님이 뱀띠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다정한 동생도. 같은 해에 태어난 건 아니지만 나에게 소중한 이들이다. 이렇게 띠로 연결해 보니 재밌고 한결 친근한 것 같다.


2025년의 첫 책을 샀다. 커피만 구매하려고 했는데 적립금이 아까워서 책을 골랐다. 무료 배송 가격을 맞춰야 해서 책을 더했다. 책을 덜 살려고 하는 마음은 언제나 유효하다. 궁금한 책은 많지만 이상하게 구매하는 책은 시집이다. 유수연의 시집은 처음인 것 같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란 제목의 시집. 아무런 정보 없이 그냥 샀다. 사실은 이 소설도 그렇다. 세라 온 주잇의 『뾰족한 전나무의 땅』이다. 이 소설은 정보가 조금 있다. 윌라 캐더가 극찬하고 직접 편집했다고 한다. 『루시 게이하트』의 작가 윌라 캐더 말이다.







두 권의 책과 커피로 2025년을 시작한다. 8일이나 지났지만 새로운 마음을 지닌다. 나에게는 새로운 마음이 조금 필요하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산뜻함, 새로운 기분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새로운 소식을 듣고 싶다. 아마도 그 새로운 소식은 모두가 바라는 그것일 것이다.


2025년의 계획 같은 건 없다. 그냥 산다. 그래도 이런 건 지키고 싶다. 올해는 덜 사고 많이 읽는 일.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작년보다 덜 사고 작년보다 많이 읽고 싶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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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1-0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자목련님 처럼 2025년이란 미래에 도착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생각 보다 과거와 달라진게 없어서 약간은 실망하고 있어요. ㅎㅎ 그래도 올 해에 또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 하면서 밝은 희망도 가져 봅니다. 자목련님 올해도 늘 건강하시고 좋은 책 알려 주세요. 감사 합니다.

자목련 2025-01-09 11:26   좋아요 1 | URL
어느 순간 해가 바뀌고 새로운 숫자를 마주하는 게 느낌이 없기도 합니다. ㅎㅎ
나이가 든 탓일까 싶어요.
마힐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환하고 맑은 날들 이어가시길 바라요!

희선 2025-01-0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많이 만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그래야겠네요 지난해에는 별로 못 봐서... 새해가 됐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군요 앞으로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좋겠네요 나라도...


희선

자목련 2025-01-09 11:27   좋아요 0 | URL
읽는 속도도 느려지고 쓰는 속도는 더욱 느려집니다.
올해는 조금 속도를 내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희선 님도 좋은 책들 많이 만나시길 바라요.
많이 춥습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고양이를 처방한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도대체 어떤 병원에서 고양이를 처방해 준다는 건지. 소설을 읽기 전부터 판타지 소설이구나 싶으면서도 나도 고양이를 처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두 번째 이야기로 돌아온 이시다 쇼의 『고양이를 처방해 드립니다 2』에서는 네 가지 사연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네 명의 환자에게 고양이가 처방된 것이다. 모든 판타지가 그렇듯 고양이를 처방해 주는 ‘고코로 병원’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어떤 이는 우연한 방문으로 어떤 이는 지인의 소개로 그곳을 찾는다.


대학생 ‘모에’는 엉겁결에 병원을 방문했다. 울적한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는데 높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가 위험해 보여 그곳에 가게 된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려고 한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해버린다. 의사 ‘니케’는 아무런 설명 없이 고양이를 처방하겠다며 고양이 한 마리와 설명서를 지급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사람에게 고양이라니. 일주일 동안 잘 지낼 수 있을까.


어쨌든 고양이를 데리고 온 모에는 고양이를 살핀다. 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애인도 고양이를 보자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만 나눌 뿐 할 말은 나중으로 미룬다. 애인이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 짐작한 모에는 마음이 한 결 놓인다. 우선은 고양이가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니까.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 레오나에게 사정을 말하고 고양이에 대해 몰랐던 것을 듣는다. 일주일 후 모에는 병원에서 다른 고양이를 지급받는다. 이번 고양이는 지난번 고양이와는 다르게 장난꾸러기였다. 그리고 한 마리가 더 처방되었다. 고양이를 돌보면서 모에는 애인에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애인이 할 말은 헤어지자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전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떨어져서 자주 못 보는 게 걱정이라고. 모에는 세 마리의 고양이를 통해 고양이마다 원하는 게 다르게 관계를 맺는 방법도 다르다는 걸 배운다. 애인과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아내가 떠나고 일상의 의욕을 잃은 노인 ‘다쓰야’는 며느리의 소개로 병원을 찾는다. 방에서만 지내는 손자에 자신까지 걱정을 더하면 안 되기에. 다쓰야에게 처방된 고양이는 특대형 고양이였다. 모에처럼 일주일을 지내는 게 아니라 툭하고 다쓰야에게 묵직하게 안겼다. 고양이를 안은 채 니케 의사와 대화를 나누다 생각한다. 손자에게 고양이처럼 작은 빛으로도 걸을 수 있는 강인함이 있는지에 대해서. 손자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다쓰야는 밤 산책을 하다 손자가 야간 학교에 다니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좋아한다는 것도.






오빠가 우선인 엄마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레오나’는 삼수를 하는 친구를 따라 병원에 가게 된다. 그러다 엄마가 싫다는 말을 해버린다. 그런 레오나에게 아기 고양이가 처방된다. 집에 14년을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 ‘하지메’가 있는데 말이다. 아기 고양이를 돌보는 하지메를 보면서 레오나는 엄마에 대한 갈등과 유기묘 보호 센터에서 일하는 오빠와의 관계를 생각한다. 속으로 쌓아두었던 감정을 풀어낸다.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은 손님은 레오나의 오빠 ‘도모야’다. 지친 것 같다며 동료가 소개해 준 것이다. 직장에서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그에게 역시나 고양이가 처방된다. 그러나 정작 병원에는 고양이가 없고 의사는 집에 있는 고양이를 챙기라고 한다.


“고양이를 처방하겠습니다. 힘들 때는 참지 말고 고양이에게 의지하는 게 좋습니다. 참아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죠. 기대든 쓰다듬든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래 봐야 고양이 마음이 인간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요.” (260쪽)


도모야의 고양이는 1년 동안 눈을 감고 잠만 잔다. 그래서 걱정이다. 떠나보낼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아 두렵다. 직장에서 유기묘 보호 센터에서 고양이를 돌보며 입양 관련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의 고양이는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런 도모야의 마음을 아는지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는 말이죠, 당신의 생각 이상으로 강인합니다. 고양이가 눈을 감고 자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설사 그때가 혼자라고 해도 고양이는 즐거운 꿈을 꾸면서 떠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고 있습니다. 여하튼 고양이는 모든 고민을 낫게 해주니까요.” (308쪽)


모든 고민을 낫게 해주는 고양이는 없겠지만 처방받은 고양이를 상상한다. 내 곁에 새롭게 등장한 작은 고양이, 혹은 거기 있던 고양이. 소설에 등장한 고양이는 사람처럼 말을 하거나 신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양이를 돌보면서 고양이를 살피고 행동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가족이나 연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유쾌하고 다정한 소설이다.


집사는 아니지만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고양이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책은 관심이 많다. 19년의 묘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고양이 ‘후타’가 사람들이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는 이야기 『퐁 카페의 마음 배달 고양이』, ‘미쿠지’란 이름의 고양이가 우연하게 신사를 찾은 이들에게 고양이가 건네는 말씀을 들려주는 『고양이 말씀은 나무 아래에서』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신비한 존재다. 그들은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고 어려움에 빠진 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물론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고양이는 그 존재로 기쁨이며 사랑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고양이를 만나게 된 이용한의 『명랑하라 고양이』 속 고양이는 남다르다 시인이 만난 다양한 사연을 지닌 길 고양이. 고양이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책을 볼 때마다 오빠네 집 고양이를 떠올린다. 집에 갈 때마다 달라지는 고양이들. 사라진 고양이도 있고 귀여운 아이 고양이도 있다. 가만히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고양이가 좋아서, 고양이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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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2-27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양이가 눈을 감고 자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설사 그때가 혼자라고 해도 고양이는 즐거운 꿈을 꾸면서 떠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고 있습니다.˝
11년된 노령묘를 키우는 입장에서 너무 위안이 되는 구절이네요. 고양이가 아닌 자꾸 제 감정을 이입해 서글퍼지곤 했는데...

자목련 2024-12-31 13:58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 님의 그 마음을 고양이가 알 거라 생각합니다. 11년 된 고양이와 행복한 새해 맞으시길 바라요!

잠자냥 2024-12-27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막냉이를 좀 처방해드리고 싶군요. 😺

자목련 2024-12-31 14:00   좋아요 2 | URL
막냉이 처방이 긴급합니다!
여섯 마리 냥이랑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구단씨 2024-12-27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사도 아니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처방 받은 고양이가 몸과 마음을 낫게 해준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긴 합니다. ^^
언젠가부터 주변에 강아지나 고양이 키우는 분들이 많은데,
귀하고 아끼면서 돌보는 모습에 뭔가 안정적인 기분도 들어요.
그것만 떠올려봐도 고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뭔가 치유가 되는 건 맞는가 봅니다.

자목련 2024-12-31 14:01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지만 반려견, 반려묘를 돌보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돌봄을 받는 것 같더라고요.
냥이는 만날 때마다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인 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꼬마요정 2025-01-0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마다 성격이 다 다르고 관계 맺기가 쉽지 않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랑입니다. ㅎㅎㅎ
너무 따뜻한 이야기네요. 사람도 고양이도 모두 강인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한 세상 살아낼 수 있을 거예요.
카프랑 모짜랑 레이 딱 처방해드리면 하루 종일 정신이 없을지도... ㅎㅎㅎ

자목련 2025-01-02 16:46   좋아요 0 | URL
정신 없는 하루 보내고 싶습니다. 근데 카프, 모짜, 레이가 저에게 관심이 없을 것 같아요 ㅎㅎㅎ

서니데이 2025-01-0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새해 첫 날 잘 보내셨나요.
서재의 진한 파란색 수국이미지가 참 예뻐요.
고양이를 처방해드립니다,를 지난달에 구매했는데, 2권이 새로 나왔나요.
아는 책이 보이면 반가운 느낌입니다.
2025년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시고, 좋은 시간 되시면 좋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5-01-09 11:23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1권을 만나고 천천히 2권을 만나셔도 좋겠지 싶어요.
말씀처럼 아는 책이 보이면 정말 반가고요!
눈이 많이 오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어제 내린 눈이 다 녹지 않았다. 내리는 햇살에 남은 눈도 곧 녹을 것이다. 추위는 조금 누그러졌다. 하루 사이에 다른 풍경이다. 세찬 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누구가 이 눈이 크리스마스에 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올해는 열흘도 남지 않았다. 아쉽기도 하고 왠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도 크다. 동지였던 어제는 두 명의 친구가 왔다. 눈을 뚫고 온 친구들, 포장 해온 뼈다귀 해장국을 먹으면서 비상계엄과 탄핵에 대해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정치 이야기를 하다니, 나이가 먹은 거라고. 밤이 가장 짧은 동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두 친구는 동지가 지나면 봄이 오는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벌써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탄핵의 결과 그 이후를 말이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친구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가 문 앞의 택배 상자를 안으로 넣어주었다. 올해의 마지막 책이다. 크리스마스니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문한 책이라고 할까. 한강의 『디 에센셜: 한강』, 겨울이니까 『소설 보다: 겨울 2024』, 리뷰가 좋아서 궁금한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8월은 악마의 달』과 안톤 체호프의 『상자 속의 사나이』까지 네 권이다.





한강의 『디 에센셜: 한강』의 목록을 살핀다. 내가 좋아하는 단편이 보여서 더 반갑고 좋다. 처음 만나게 될 시와 산문 때문에 설렌다.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멍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제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회복하는 인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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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윤성희 외 지음, 강미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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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누군가에게 쉽고 누군가에게는 어렵다. 남들이 보기에 뭐든 쉽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정작 본인은 어려울 수 있다. 막상 시작하고 보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시작해야 알 수 있다. 시작하는 마음의 시작은 어디에서 올까. 시작하는 마음에 필요한 건 뭘까. 시작하기를 주저하는 마음을 독려하는 힘은 뭘까. 시작을 테마로 한 『시작하는 소설』을 읽고 한 동한 ‘시작’에 붙잡혀 있었다. 시작해야 할 것을 미루고 있는 내가 보여서, 미리 실수나 실패를 예상해서 시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시작하는 소설』 은 새해가 되면 작성하는 어떤 목표들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새 학년, 취직, 연애, 운동 같은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작심 3일로 그친 운동, 100권 읽기 같은 보통의 목록. 그런 맥락에서 김화진의 「근육의 모양」은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시작을 들려준다. 소설은 필라테스와 담배를 동시에 시작한 재인과 재인의 필라테스 강사 은영의 이야기다. 재인은 ‘해 본 것’ 리스트를 작성하는데 두 가지를 추가할 수 있었다. 얼핏 ‘해 본 것’이라고 하면 그냥 해보았을 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보았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해보았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잘하거나, 성공 같은 것과는 별개로 더욱 대단하게 다가왔다.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하고 싶다는 사춘기적 마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해야 할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엉뚱한 짓을 해서 우스꽝스러워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 같은 것. 때문에 뭔가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부담스러워지만, 그럼에도 재인은 ‘한다’와 ‘하지 않는다’ 사이에서는 ‘한다’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무조건 남는 게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근육의 모양」, 80쪽)


재인이 필라테스를 배우는 은영은 대기업을 그만두고 강사가 된 지 4년째다. 은영은 회사를 다닐 때 일을 잘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상사의 눈치를 보고 능력 이외의 것들의 평가를 받는 일에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은영은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몸에 집중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시작하기 위해서는 때로 그만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은영이 회사를 그만둔 것처럼. 재인의 경우 결혼을 앞둔 연인과 헤어지는 일이 그러했다. 결혼은 나가는 것,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나 파혼도 시작이 될 수 있다. 모두에게 시작이 같은 의미일 수 없으니까. 누군가는 실패라고 규정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해 본 것’에 속할 수 있다. 그것은 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되고 또 다른 시작의 자양분이 된다.


시작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경우 혼자가 아니면 좀 괜찮다. 이를테면 윤성희 「마법사들」 속 가출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십 대 소년의 가출기라고도 볼 수 있다. 민호와 성규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가출을 한 민호와 성규는 영화를 보고 영화관에서 밤을 새우기로 한다. 둘만 남은 영화권에서 민호와 성규는 같이 본 영화 속 할머니가 한 "애쓴다"라는 말을 꺼내면서 서로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처를 꺼내어 말하는 일을 시작하므로 서로의 애씀을 위로한다고 할까. 앞으로 민호와 성규가 시작할 모든 것들에도 애씀이 따르겠지만 그 시작과 우정을 응원하고 싶다.


어른이 되면 시작 따위는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지만 더 어렵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이 외국어룰 배우고 대입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떠한가.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속 칠십 대의 할머니는 손주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할머니에게 프랑스의 모든 것은 시작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에서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할머니에게 다가온 피아노 소리와 브뤼니에 씨와의 우정.


문득, 시작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구나 생각한다. 장류진의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처럼 불합격 통보를 받고도 새로운 이력서를 쓰는 시작의 반복은 얼마나 위대한가. 정소현의 「어제의 일들」 속 상현은 주차장에서 일한다. 장애가 있는 그녀에겐 지울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로 온전한 기억은 어제의 일들뿐인 상현이지만 살아 있어 다행이다. 상현에게는 살아 있음이 시작 그 자체이므로.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 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어제의 일들」, 156쪽)


시작할 수 없다고 믿는 누군가에게 이 소설들은 시작할 수 있다는 응원을 건넨다. 시작하면 달라진다고, 아니 달라지지 않더라도 ‘해 본 것’이 생기는 건 꽤 괜찮은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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