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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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함께 살아간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누군가를 잃는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상실은 삶이 된다. 얼마나 크게 삶으로 파고드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외면하고 어떤 이는 상실과 한 몸이 되기도 할 테니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판단할 기준은 없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는 동안 잃어버린 것, 찾을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대체할 물건을 만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대신할 이는 없다. 상실 이후의 삶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상실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복구할 수 없다.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나는 예소연의 『영원에 빚을 져서』 도 그런 소설이다. 그러니까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나’는 ‘혜란’으로부터 ‘석이’의 실종 소식을 듣는다. 혜란과 석이와 나는 대학시절 캄보디아 프놈펜의 바울학교로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왔다. 4개월의 시간을 보내며 친구가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각자의 삶에 집중하며 살았다. 석이의 실종으로 10년 만에 캄보디아를 찾은 나는 그곳에서 그들이 가르쳤던 학생 ‘삐썻’을 만나 과거를 떠올린다.


소설은 석이의 실종에 관한 의문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준다. 바울학교에서 선생님이라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꼈던 회의감, 그곳에서 마주한 세월호 사건. 나와는 상관없는 죽음이라 여겼던 일들이 어떻게 일상으로 스며드는지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달랐다. 유독 힘들어했던 석이를 혜란과 나는 몰랐다.


결국 나와 혜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석이의 마음과 고통을 함부로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65쪽)


삐썻의 안내로 석이의 캄보디아 행적을 밟으며 나는 석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태원 참사를 겪은 후 집회 같은 곳에 나가는 석이의 마음을 말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꺼삑섬’ 물 축제 압사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어떤 기억을 집요하게 추적하다 보면, 그것이 정말 물성을 지닌 무엇처럼 느껴지게 된다. 생생하게 만져지는 감각, 흐르는 기류, 시시껄렁했던 나의 마음 같은 것들. 그러니까 기억을 추억하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그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희마한 마음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그 기억을 안고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 (69쪽)


아무 잘못도 없이 희생된 죽음에는 충분한 애도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어떤 죽음은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말을 건다. 멈추지 않는 슬픔으로 흐른다. 석이는 슬픔을 주워 담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살았고 사느라 바빴던 나와 혜란이는 슬픔을 흘려보내고 말을 듣지 못하며 살았다. 나는 이제 엄마의 죽음으로 놓쳤던 그 말을 붙잡고 슬픔에 기댄다.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엄마를 잃음으로써 내가 상실을 겪었듯, 누군가도 나를 잃음으로써 상실을 겪을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상실의 늪 속에서 깊은 슬픔과 처절한 슬픔, 가벼운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슬픔들에 둘러싸여 종국에는 축축한 비애에 목을 축이며 살아가게 되겠지.

“나는 슬픔을 믿을 거야.” (113쪽)


예소연의 『영원에 빚을 져서』은 특별한 소설이 아니다. 보편적인 일상을 담아낸 소설이며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겪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누군가 석이가 너무 예민하고 요란한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이에게 그게 일상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일상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든 말이다. 그 시간에서 빠져나오라고 말할 수 없다.


슬픔은 때로 몸집을 부풀려 눈덩이처럼 커졌다가 어느 순간 녹아내리기도 할 것이다. 슬프면 슬픈 대로 목놓아 울어버리는 삶이야말로 가장 최선의 삶은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상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상실의 순간을 떠올리며 애도하고 잊지 않으려 애쓰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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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권태기가 오거나 읽어야 할 책이 지루하게 느껴져 속도가 나지 않으면 추리소설을 찾는다. 재미와 동시에 온전히 책 읽기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추거나 숨겨진 복선을 찾지는 못한다. 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누구나 다 알 정도의 유명한 추리소설을 읽거나 작가를 아는 건 아니다. 셜록 홈스나 뤼팽을 소설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로 본 게 전부다. 그러니 추리소설을 쓰는 다섯 명의 작가가 필독서로 꼽은 『세계 추리소설 필독서 50』 목차에서 읽어본 소설은 손에 꽂을 정도였다. 그래도 읽은 책은 몇 권 없지만 영화로 만난 작품이 있어 반가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필독서’라는 말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한다. 현직의 작가가 추천하는 소설 정도로 여겨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일반 독자가 아닌 추리소설을 쓰고 싶거나 추리소설의 역사나 계보에 관심이 있다면 좋은 추천서가 될 것이다. 무경, 박상민, 박소해, 이지유, 조동신 작가의 선정 기준은 단순한 베스트셀러나 인기 작가의 유명 작품이 아닌 고전(발표 연도)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읽은 가치가 충분한 작품, 추리소설 역사에서 의미 있는 작품, 우리나라 독자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을 골랐다.


발간 연도 순서로 소개하고 있으니 그 순서대로 따라 읽어도 좋고 좋아하는 캐릭터나 작가를 먼저 읽어도 크게 상관은 없을 듯하다. 작품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작품도 소개하고 있으니 마음에 드는 소설을 만났다면 목록을 목록을 눈여겨보는 것도 좋겠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이력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다.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설은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이라고 하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삶은 추리소설의 명성과는 다르게 불운 그 자체였다.







추리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범인을 찾는 탐정이나 형사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언제나 그를 돕는 조력자와 함께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로 무한 변주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셜록 홈즈와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이 그러하다.


셜록 홈즈의 이야기는 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릭터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셜록 홈즈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다양하게 변주되어 창작될 것이다.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를 비롯한 캐릭터들을 멋지게 창조해 냈다. 코난 도일의 가장 큰 업적은 셜롬 홈즈를 창조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41쪽)


개인적으로 추리소설보다는 장편소설이 더 매력적인 다가오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밀실 살인사건, 명탐정 푸아로의 활약, 소설마다 정말 대단한다.


크리스티의 작품은 현대 미스터리의 중요한 원형이 되었고, 후대에 다시 인용되거나 비틀리거나 재창조된다. 그가 작품을 통해 제시한 기법 중 아직도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쓰이는 기법이 많다. 또한 어떤 기법은 변형되거나 부정당한다. 추리 장르는 그렇게 탄탄한 형식을 확립하고 동시에 무너뜨리며 가능성을 확장해왔다. 아서 코난 도일이 추리소설의 캐릭터를 완성했다면,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의 구성을 완성했다. 현대의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들은 결국 이들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147쪽)


『세계 추리소설 필독서 50』 이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작가와 소설 속 캐릭터에 대한 탄생 설명과 함께 줄거리를 들려주면서도 트릭이나 범인에 대한 힌트나 언급은 없다. 그런 부분은 추리소설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이미 읽었던 소설이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도 처음 접하는 소설이라는 기분이 든다. 현직 작가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추리소설의 영역도 확장된다. 고전부터 명탐정, 형사 시리즈가 아니라 스릴러, 스파이물, 미스터리로 다양하다. 사회적 문제를 소설에 녹여 내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등장은 더욱 매력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로 기억하는 작가 김성종이 추리소설 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이나 될까. 국내 유일무이한 추리소설 전문 도서관을 세운 사실도 놀랍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원제가 『수도원의 범죄 사건』이었으나 독자들이 미스터리 자체에만 관심을 둘까 봐 파기했다고 한다. 이 책의 목록에서 반가웠던 건 제프리 디버의 『본 컬렉터』였다. 재미있게 본 영화였지만 원작이 있는 줄 몰랐다.


괴팍한 성격을 지닌 점이나 한 줌의 흙과 같은 미세 증거물로부터 현장을 알아내는 마법 같은 능력을 선보이는 링컨 라임은 현대판 셜록 홈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소설에서는 특히 과학적인 추론이 환상적으로 구현되어 제프리 디버표 법 과학 스릴러의 모범을 보여준다. (284쪽)


추리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고 잘 모르지만 북유럽 작가의 작품이나 최근에 만난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언급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이유로 필독서라는 개념은 중요하지 않지만 취향에 따라 추리소설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로 충분하다. 추리소설 입문서로도 나쁘지 않다. CSI 과학 수사대를 좋아하고 법정 드라마를 좋아하며 추리소설 작가로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만 알고 있는 나와 비슷한 독자라면 반갑고 즐거운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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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2-24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주 고전적인 애거사 크리스티 만 기억나네요.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라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기억에 남는 작품이예요.
<본컬렉터> 갖고 있지만 ,,,

자목련 2025-02-26 10:17   좋아요 1 | URL
제가 모르는 소설이 무척 많더라고요.
<본컬렉터>를 갖고 계시다니!

은하수 2025-02-2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저도 어딘가 독서생활에 정체기가 오면 추리소설을 읽어요~~~
전 홈즈, 루팡,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도 북유럽 추리소설 시리즈도 일본 추리소설도 ...
꽤 많이 읽었네요~~~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는 저도 꽤 좋아합니다. 점과 선도 읽었군요...^^
하지만 저도 필독서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지라...
그때 그때 끌리는 대로 읽는, 저만의 방법이 제일인거 같아요!

자목련 2025-02-26 10:19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요즘 읽는 대신 스릴러, 미스터리 드라마에 빠져서...

관찰자 2025-02-2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쌍둥이를 임신했을때,
막달이 다 되어가자 정말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어서
그 시점에서는 도서관에 가서 거의 추리소설만 빌려 읽었어요.
그 때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을 거의 다 읽었는데,
남편이
˝그거 태교로 괜찮은거야?˝라고 물었던 기억이 나네요.ㅋㅋㅋ

그 아이들이 이제 15살이 되었지만요~

자목련 2025-02-26 10:21   좋아요 0 | URL
끌리는 대로 읽고 보는 게 좋지만, 남편 분의 걱정도 알 것 같습니다^^
쌍둥이, 정말 키우느라 힘드셨겠네요.
저도 첫 조카가 쌍둥이라서 쌍둥이에게 내적 친밀감이~~~

페넬로페 2025-02-2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권태기면 그리스 고전을 추천합니다.
머리에 쥐가 나면서도 인생의 진리와 보편성을 느낄 수 있어 재밌고도 감동적이예요.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힘들고도 재미 있어요^^
그러다 다시 소설 읽으면 너무 좋아 책 속으로 저절로 빠져 듭니다 ㅎㅎ

자목련 2025-02-26 10:23   좋아요 1 | URL
그리스 고전을 추천하시는 페널로페 님은 진정한 독서의 고수!
말씀처럼 과학, 역사, 예술 분야를 읽는 것도 권태기 퇴치로 좋은 것 같습니다^^
 


나를 이끌 무언가를 원한다. 아니 원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이 상태를 즐기는 것 같다. 그렇다. 그게 정답이다. 주말 내내 넷플릭스와 함께 보냈다. 우연히 본 드라마는 할렌 코벤의 소설이 원작이었다. 나는 그 작가의 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다. 혹시나 해서 블로그를 검색했지만 없었다. 가까운 이가 실종되고 그들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당연 죽음도 있었다. 두 편을 넘기기 비슷한 구성이고 가장 먼저 누구를 의심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소설로 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시간이 되면 나머지 드라마도 다 볼 것 같다.


주말에는 3월에 결혼하는 조카의 피로연이 있었고 다른 조카가 찍은 사진을 받아보았다. 조금 긴장한 것 같은 양복 차림의 오빠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올케언니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추웠던 날씨가 풀려 다행이었다. 3월 결혼식 당일에도 날씨가 좋기를 바란다.


계획한 대로(정말 그런가?) 책을 덜 사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이 읽지는 못한다. 최근에는 아예 책을 읽지 못했다. 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읽지 않았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궁금하지 않고 읽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돌려줄 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책을 샀다. 2월의 소설이다. 지난 번 주문을 하면서 배송지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커피와 책은 내가 없는 곳에 도착했다. 2월이 정말 엉망진창이다. 이번엔 내가 있는 곳으로 제대로 주문했다. 한 번 실수를 하니 꼼꼼하게 살핀다. 결제를 하기 전에 배송지를 확인하고 쿠폰 결제를 확인했다. 좋은 일이다. 한국 소설 2권, 외국 소설 1권이다.






김지연의 단편집『조금 망한 사랑』은 김연수의 추천사가 있었지만 궁금하지 않았는데 어떤 글을 읽고 단편집이 읽고 싶어졌다. 예소연의 장편 『영원에 빚을 져서』는 읽고 싶어서 샀다. 김지연과 예소연은 모두 편집자라고 한다. 편집자이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많은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나머지 한 권은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장편소설 『금지된 일기장』이다. 독서괭 님의 리뷰를 보고 구매했다. 제목의 의미도 궁금하다.


2월의 절반은 흘려보냈다. 남은 절반은 뭔가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잡고 싶다고 해서 잡힐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대단한 게 잡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뭔가 쥔 느낌이 들면 좋겠다. 가느다란 무언가, 아주 작디작은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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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02-1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할렌 코벤 원작 드라마 몇 편 봤어요 한번 보면 주르륵 연달아 보게 되더라고요ㅋㅋㅋ
자목련님 남은 2월도 화이팅😄

자목련 2025-02-24 10:08   좋아요 1 | URL
이번 주말에도 봤어요. 넷플이 계속 추천을 해요 ㅎㅎ
2월은 망했다요. 3월을 향해 달려!!

구단씨 2025-02-17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책을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을 수 없는 마음을 돌려줄 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에게도...

괜찮아지겠지 하면서도 자꾸만 책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으니까,
쌓여 있는 책들이 괜히 야속하기만 하고,
햇살은 따뜻해졌고 여전히 바람은 차갑고, 가을과 봄 그 어디 쯤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날씨마저 마음에 안 드네요. ^^

자목련 2025-02-24 10:09   좋아요 0 | URL
읽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장바구니를 채우고 결제를 하는 걸까요.
지금보다 책과 친밀해지는 시간을 기다려요!

여름비 2025-02-2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할란 코벤의 드라마를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봤습니다. 그 다음에 제목만 보고 고른 드라마가 공교롭게도 또 할란 코벤이었습니다. 이렇게 4편 정도를 연달아보고 책이 있는지 찾아보려 했는데, 책은 없나보군요. 이 후에는 영국 드라마를 궂이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자목련 2025-02-26 10:16   좋아요 0 | URL
여름비 님도 저와 같은 통로로 드라마를 만나셨군요.
아, 책은 제가 읽은 책이 없고요. 검색하면 찾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 - 신뢰와 호감을 높이는 언어생활을 위한
MBC 아나운서국 엮음, 박연희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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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마다 맞춤법 검사기를 사용한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최근 카톡을 보내면서 맞춤법 기능이 추가되었다는 걸 알고 반가웠다. 매일 사용하는 우리말인데도 매번 맞춤법은 어렵다. 어디 맞춤법 뿐인가. 우리말을 배우고 쓰기 시작하면서 점점 어렵다고 느끼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우리말 맞추기 퀴즈인 <우리말 겨루기>를 시청하면서도 맞추는 것보다는 틀리는 게 훨씬 많다. 시청할 때마다 우리말의 세계에 놀라곤 한다.

잘 모르고 사용하는 우리말은 얼마나 많은가. MBC 아나운서국에서 엮은 『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세상에나, 내가 사용하는 말들이 이렇게 틀렸다고. 그런데도 틀린 줄도 모르고 그냥 사용했다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몇 년 전 논란이 되었던 ‘명징하게 직조한’ 이란 영화평이나 ‘심심한 위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간단하게 줄이는 말, 기존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말, 변화하는 말들 속에서 우리말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은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책을 살펴보면 이렇다. 일상에서 쉽게 사용하는 말들이지만 헷갈리는 맞춤법, 잘못된 발음에서 이어져 틀린 상태로 굳어져 사용하는 표현, 익숙해진 외래어를 바르게 쓰는 표기법,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쓰도록 순화어 안내까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었다. 목록을 따라 사용하는 말들을 보면 이게 맞는 거라고 하며 놀라는 말들이 많다. 내가 알고 사용한다고 여겼던 우리말이 잘못된 거라 여기는 이는 얼마나 될까.


어느 집에나 있는 곽 티슈는 옳은 말일까? 맞춤법 검사를 돌리는 바로 곽 티슈를 갑 티슈로 수정하라고 안내한다. 그렇다. 물건을 담는 작은 상자를 나타내는 표준어는 이다. 곽 티슈 아니고 각 티슈도 아니고 갑 티슈가 정답이다.

이 책을 저 갑에 넣어봐.

휴지 한 갑만 주세요.

비슷해서 헷갈리기도 했고 주변에 누군가 바로잡아주는 이가 없어서 그냥 사용하는 말들은 어떤가. 자주 쉽게 쓰는 들르다 와 들리다를 보자. 비슷한 말이다. 들르다, 들리다로 쓰고 보면 확연하게 다른 것 같지만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을까?

지나는 길에 잠깐 들어가 머무르다의 뜻을 담은 우리말은 들르다로 ‘친구 집에 잠깐 들렀다’, ‘퇴근길에 포장마차에 들러서 친구를 만났다’를 ‘친구 집에 잠깐 들렸다’, ‘퇴근길에 포창마차에 들려서 친구를 만났다’로 쓰면 틀린 것이다. 정말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이다. 책에서 정리한 것을 기억하면 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틀리게 사용하게 있는 말은 얼마나 많을까. 책을 따라 읽으며 하나하나 고쳐가며 내 것으로 흡수하는 과정도 뿌듯하다.

근처에 오면 꼭 들러주세요. - 근처에 오면 잠깐 방문해달라는 뜻

근처에 오면 꼭 들려주세요. - 근처에 오면 무엇을 듣게 해달라는 뜻

이처럼 책은 쉽고 친절하게 우리말을 설명한다. 올바른 언어생활을 위한 순화어는 바로 일상에서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 다가오는 3·1절이나 광복절에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하라는 안내방송은 국기를 달다로 순화하여 태극기를 달다, 국기를 올리다로 사용하기를 권한다. 나부터도 이렇게 바꿔 사용해야겠다.


뭔가 공부를 하거나 배운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펼치는 대신 몰랐던 단어의 뜻을 알아가는 재미, 내가 알게 된 것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쉽게 알려주는 기쁨으로 책을 만나면 좋겠다. 우리말보다는 외래어, 줄임말에 익숙한 청소년 세대가 많이 접했으면 좋을 책이다. 다이어리 꾸미기처럼 첨부된 책 꾸미기 스티커로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완독하고 나면 우리말을 쓰면서 자신감이 상승할 것이다. 물론 한 번으로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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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2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은 다 다른 몸을 입고서 태어납니다. 모든 사람은 머리숱이 다르고, 머릿결이 다르고, 키와 몸무게와 얼굴과 맵시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은 이도 다르지요.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우리나라는 겉모습에 지나치게 치우치면서 ‘다 다른 사람’이 ‘다 똑같은 겉모습’이어야 한다고 여기기 일쑤입니다. 얼굴을 꾸미거나 고쳐야 한다든지, 살을 빼거나 붙여야 한다든지, 이빨을 줄세우듯 맞춰야 한다고 여기고 맙니다.

때로는 머리카락이나 몸이나 이를 살짝 다독일 수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얼굴뼈와 머리뼈가 다르기에 이도 다르게 마련인데, 그저 줄세우듯 이를 쇠줄로 친친 감아서 맞추려 하면, 오히려 나중에 뼈가 어긋나고 맙니다. 얼굴을 비롯해 몸에 자꾸 칼을 대어 고친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고치고 손볼 일이 늘어납니다.

저는 우리말꽃(국어사전)이라는 꾸러미를 쓰고 엮는 일을 하는 터라, 어느덧 서른 해째 곳곳에 ‘우리말 이야기(강의)’를 들려주러 다니기도 하고, 노래쓰기(시창작)를 들려주기도 하는데, 이웃님한테 으레 여쭙는 몇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맞춤말(표준어·정서법·철자법)’에 얽매이지 말라”입니다. 글쓰기를 거드는 풀그림을 쓸 적에 맞춤틀(맞춤법 검사기)을 켜는 분이 꽤 많은 줄 알지만, 맞춤틀은 아예 끄고서 글을 써야 한다고 여쭙니다. 맞춤틀을 켜고서 쓰는 글로 갇히면 ‘글다운 글’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말’을 옮깁니다. 말은 ‘마음’을 담습니다. 마음에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짓고 가꾸고 누린 ‘삶’이 담깁니다. 그래서 “글쓰기 = 말하기 = 마음짓기 = 삶쓰기”인 얼거리입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뜻이라면, “보기좋거나 반듯하거나 멋스러운 겉모습인 글”이 아닌, “내가 내 나름대로 살아내고 살아왔고 살아가려는 꿈을 그리는 이야기를 옮기는 글”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글을 쓸 적에는 “맞춤길에 틀린 곳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내 눈으로 보고, 내 몸으로 겪고, 내 손으로 짓고, 내 발로 다니고, 이리하여 내 온마음에 고스란히 담은 이 삶을 어떻게 담느냐”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맞춤틀을 켠 채 글쓰기를 할 적에는, “내 삶을 내 손끝으로 가다듬어서 옮길” 적에 자꾸자꾸 ‘띄어쓰기가 틀렸’다든지 ‘바로적기가 아니’라든지 ‘서울말(표준말)이 아닌 사투리를 쓰면 안 된’다든지 하면서 자꾸 끊기거나 바뀌곤 합니다. 이렇게 걸리고 멈추고 바뀌다 보면, 막상 “내 삶을 담는 글쓰기”를 잊거나 등지면서 “틀린 말씨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는 틀”에 갇히지요. ‘글쓰기’가 아닌 ‘글만들기’로 기울어 갑니다.

‘정서법·철자법’은 일본에서 영어를 비롯한 먼나라 글살림을 받아들여서 배우는 동안 일본에서 지은 한자말입니다. 일본말씨입니다. 우리 글살림이 아닙니다. ‘일본옮김말씨(일본식 번역체)’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맞춤길(정서법·철자법)을 따지는 글살림을 폈어도, 고을마다 고을말이 고스란하더군요. 우리나라는 경상말과 전라말과 강원말과 충청말과 경기말과 서울말이 이제 낱말은 그냥 똑같으면서 높낮이나 밀당만 조금 다를 뿐인데, 일본은 오늘날에도 도쿄·쿄토·오사카·훗카이도·류우큐우·구마모토…… 사투리가 대단해서, 서로 말을 못 알아듣기도 합니다.

사투리가 죽은 나라는 말과 글도 나란히 죽는다고 느낍니다. 사투리가 싱싱하게 살아숨쉬는 나라는 말과 글도 나란히 빛난다고 느낍니다. 사투리는 그냥 ‘고을말’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고 살림하고 사랑하는 하루를 스스로 가꾸고 빚은 말씨입니다. 남을 흉내내지 않고서, 스스로 생각하고 가꾸는 마음을, 스스로 깜냥껏 엮고 빚어서 드러내는 ‘새말짓기’가 사투리입니다. 우리나라 맞춤틀은 바로 이 사투리를 깡그리 죽이거나 억누릅니다.

그런데 이런 대목에서 그치지 않더군요. 저는 미역국을 끓일 적에 멸치나 고기를 아예 안 씁니다. 이를테면 풀밥(채식) 미역국인데, 무를 바탕으로 미역국을 끓이면 ‘무미역국’이고, 배추를 바탕으로 미역국을 끓이면 ‘배추미역국’입니다만, 맞춤틀을 켠 채 글을 쓰면 ‘무 미역국’이나 ‘배추 미역국’처럼 띄라고 붙잡지요. 맞춤틀은 우리가 새롭게 가꾸거나 짓는 모든 살림살이하고 얽힌 낱말을 고루 담지 않거나 못 합니다. 또한 맞춤틀은 다 다른 새소리와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하나도 못 담거나 안 담습니다. 우리가 쓰는 한글은 온갖 새소리와 물소리와 바람소리까지 낱낱이 갈라서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만, 정작 다 다른 새소리나 물소리나 바람소리를 글로 담는 글바치는 이제 아주 보기 어렵습니다.

참새만 하더라도 ‘짹짹’ 노래하지 않습니다. 째째째째 찌찌찌지 쮜쮜 찟 찟 찌르릉 쪼릉 찌링 짭짭 칫칫 치리치리 짜르르르릉 쪼빗쪼빗 ……처럼 끝없이 다 다르게 노래하는데, 이런 ‘참새소리’를 맞춤틀을 켠 채 쓰면 다 고치거나 지우라고 나오지요. 더욱이 ‘참새소리’나 ‘박새소리’나 ‘딱새소리’처럼 붙여쓰기를 할 수도 없는 맞춤틀입니다. ‘바람소리’도 국립국어원 낱말책에 없기 때문에 띄어쓰기를 하라고 나올 텐데, 왜 띄어야 할까요?

글을 쓸 뜻이라면, 글로 내 마음을 담으려는 길이라면, 글로 내 삶과 살림과 사랑을 이웃하고 나누려는 하루라면, 우리는 이제 맞춤틀을 끌 일입니다. 이러면서 낱말책(사전)을 읽을 일입니다. 비록 국립국어원 낱말책이 우리 살림말을 두루 안 담았어도, 가장 수수하고 흔하다고 여길 낱말부터 찾아볼 노릇입니다.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열이나 스물쯤 이를 낱말책을 늘 자리맡에 놓고서 일부러 들춰서 읽을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말이란 있을 수 없거든요. “다 아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말꽃을 쓰는 일을 하지만, 날마다 낱말찾기(사전 검색)를 끝없이 합니다. 아주 흔하고 수수한 ‘하다·있다·보다·가다’ 같은 낱말도 여태까지 10만이 훨씬 넘도록 다시 찾아보고 살펴보고 읽으면서 새기고, 낱말풀이를 제 나름대로 가다듬습니다. 우리말이건 한자말이건 영어이건 다 찾아볼 노릇입니다. 우리가 쓰는 글에 담는 모든 낱말을 낱낱이 낱말책에서 손으로 종이를 넘기면서 살펴보고 찾아볼 때에 글힘이 붙고 글살림이 피어납니다. 익숙하게 쓰던 말씨라고 여겨서 낱말책을 안 뒤적이는 사람은 글힘이 사라지고 글살림이 안 자라더군요.

바로적기(표준어·정서법·철자법)가 좀 어긋나더라도 글이 엉망이거나 못날 수 없습니다. 띄어쓰기가 좀 틀리더라도 글이 엉터리라거나 어설플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적기와 띄어쓰기를 내려놓을 일입니다. ‘마음쓰기’와 ‘삶쓰기’를 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국립국어원 낱말책에 ‘신나다’라는 낱말이 2014년에 드디어 실렸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국립국어원에 왜 ‘신나다’를 올림말로 안 싣느냐고 따졌습니다만, 열네 해 동안 “사람들이 ‘신나다’처럼 붙여쓰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올림말로 안 싣는다”는 대꾸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신 나다’처럼 띄어서 쓸까요? 바로 맞춤틀 탓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입으로 말을 할 적에 “신 나요”처럼 띄어서 말하지 않습니다. “짜증 나!”처럼 띄어서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나!”에 “짜증나!”처럼 ‘붙여말하기’를 합니다. 다시 말씀을 여쭙니다만, 국립국어원은 2014년에 드디어 ‘신나다’를 올림말로 삼았습니다만, 2025년 오늘까지도 ‘짜증나다’는 올림말로 안 둡니다. 이밖에도 ‘쓸모없다’는 올림말로 있으나 ‘쓸모있다’는 올림말로 없습니다. 아직도 ‘아들딸’만 올림말일 뿐, ‘딸아들’은 올림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맞춤틀로 글을 쓴다면 ‘아들딸’로 적을 적에는 붙여쓰기로 두겠지만, ‘딸아들’로 적으면 맞춤틀은 ‘딸 아들’처럼 띄라고 나옵니다.

글쓰기를 하다가 이런 작디작은 낱말에서 자꾸 멈추거나 걸린다면, 우리가 드러내거나 담거나 나누려고 하는 마음과 삶을 잊거나 놓치기 일쑤입니다. 숱한 사람들이 ‘가르치다·가리키다’를 가려쓰지 못 하더라도 그리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두 낱말을 섞어서 쓰거나 잘못 쓰더라도 우리는 이 낱말을 쓰는 분이 무슨 말과 무슨 이야기와 무슨 마음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알아듣습니다.

저는 전라남도에 삽니다. 전남에서도 고흥이라는 시골에서 살기에 곧잘 전남말이나 고흥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랑께요.”라든지 “거석한디요.” 같은 말을 글로 옮기면, 이런 사투리도 맞춤틀은 다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그란디 말이죠” 같은 사투리를 “그러한데 말이지요”처럼 굳이 서울말씨로 바꾸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굳이 “우리말의 정확하고 올바른 사용”을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말을 알맞고 즐겁게 쓰”면 넉넉합니다. “올바른 우리말 사용”이란, 우리 마음을 스스로 옥죄고 억누르고 가두는 틀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일 곳이라면 “즐겁고 신나게 우리말 노래”로 나아갈 일이지 싶습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다 다르지만 다 닮은 듯한, 이러면서도 마음으로 다가가고 다가오면서 새롭게 다룰 말씨(말씨앗)”을 물려주기에 어른스럽습니다. 이렇게 해야 맞는다든지, 저렇게 하면 틀리다고 금을 긋는 틀이 아닌, ‘마음·말·만나다·마주·맑다·물’이 얽힌 수수께끼를 들려주면서 ‘밤·밝다·밭·바탕·바다·바닥·바람·파람(휘파람)·파랑·팔·활개·팔랑·펄럭·날개’가 얽힌 말밑을 하나하나 짚고 알려줄 적에 비로소 어른답다고 봅니다.

자목련 2025-02-17 11:55   좋아요 0 | URL
숲노래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익숙한 말과 다 아는 말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숲노래 님이 사시는 곳은 봄이 가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하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시의적절 8
한정원 지음 / 난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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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여름을 만났다. 겨울밤에 만나는 여름이다. 여름에 읽으려고 사두었던 책을 잠들기 전 침대에 앉아 펼쳤다. 그냥 훑어봐야지 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끝까지 다 읽었다. 이렇게 금방 읽을 책을 나는 미루고 미루었던 것일까. 이상한 건 여름에 만난 여름이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 온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습한 느낌을 기억해내려 애쓰는 시간이 괜찮았다. 지나고 보면 다 그런 것이구나 싶었다. 한정원의 글로 만나는 8월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왠지 그랬다. 시와 에세이와 사진으로 하루하루 기록한 8월은 나쁘지 않았다. 지나친 열기, 과도한 비, 알 수 없는 분노와 걱정이 스르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어느 해의 8월일까 짐작하다 말았다. 어느 해의 8월이 뭐가 중요한가. 8월이었고 8월이었겠지.


어젯밤에 술술 읽어 내려갈 때는 아무것도 쓸 게 없을 것 같았던 8월의 풍경은 지금 이 순간 달라졌다. 나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나는 뭔가 마구 쓰고 싶다. 책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의 8월에 대해서다. 어쩌면 이 책이 바라는 건 이런 마음일지도 모르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유독 어느 해의 8월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 여름은 아팠고 두려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8월이나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래, 그런 8월이 있었지. 그리고 다른 해의 8월은 거대한 슬픔 덩어리다. 병원에서 가쁜 숨을 내쉬던 큰 언니를 만나고 큰 언니의 집에서 에어컨을 켜고 잠들었던 밤.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몰랐던 날들. 선명하게 각인된 여름이다. 여름 위에 다음 여름이 더해지고 쌓이고 덧칠해지니 아프고 두렵고 슬픈 여름은 흐려지고 연해진다. 그래, 그런 여름이 있었지.


첫눈 같은 것은 여름에 없지

첫 땀 첫 수국 첫 매미 첫 소낙비

환호도 그리운 약속도 없고

오리나 하트나 사람으로 변신할 수 없지

적설 같은 것도 여름에 없지

흐르고 흐르고

아무것도 쌓이지 않지

모래도 옥상도 네 손도 따뜻하지

환해서 비밀도 슬픔도 잘 보이지

그림자가 쉬이 짓무르고

나무의 노래가 축축해지지

씨를 자주 뱉지

언젠가 목숨이 될 것을 겁내지 않고

휘파람을 불지 입술을 오므리지

사랑하기 좋은 모양이지 (「여름의 일」, 전문)


시를 따라 읽으며 나만의 여름의 일을 생각한다. 첫 수영복, 첫 휴가가 있던 여름,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던 여름,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고 뛰던 여름. 그러자 우리의 여름이 따라붙는다. 더위 따위는 상관없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여름, 쏟아지는 별들을 머리 위에 두고 밤새 마주했던 여름, 오늘만 존재할 것 같았던 그런 여름. 지난여름이란 이름으로 묶음이 돼버린 여름.


겨울을 살면서 다가올 여름을 미리 걱정한다. 지난여름의 혹독한 더위를 기억하는 몸과 마음은 여름을 미워할 준비를 마쳤다.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란 제목처럼 여름을 향한 애정이 식어간다. 하지만 여름을 조금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정원은 여름을 조금 사랑한다며 본심을 숨긴다. 뻔히 보이는 그 진심을 숨길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그러니 여름은 절대 조금 사랑할 수 없는 계절이다. 맘껏 충분히 사랑한다는 귀여운 고백이다.

나는 여름의 하늘을 조금 사랑한다. 당당하고 등등한 푸름을, 푸름을 가벼이 저버리고 소나기를 내리는 패기를, 패기를 무효하는 천진한 무지개를.

나는 여름의 밤을 조금 사랑한다. 흙과 풀과 낮이 끈기가 뒤섞인 냄새를, 짝을 찾는 맹꽁이의 전심전력의 소리를, 한바탕 꿈꾸기에 알맞은 짧음을.

나는 여름의 물기 많은 과일을, 헐거운 옷 속으로 들어오는 낮은 바람을, 오수에 빠진 사람과 동물의 방심한 얼굴을 조금 사랑한다. (「조금 사랑하기」, 일부)


여름은 여름을 사랑한다는 말은 선뜻 꺼내놓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무자비한 여름의 비는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누군가를 혼자 남게 만들고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점점 계절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계절이 되었다. 가을을 품은 8월이건만 가을을 밀어내는 8월이다.


한정원의 아삭하고 풋풋한 문장으로 8월을 담았다. 선명한 오후에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밀치고 그늘 속으로 미끄러지는 8월. 땀을 흘리며 뛰어놀던 여름의 자리에 빠짐없이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여름이 들어온다. 여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아니다. 여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이 없는 건 싫다. 여름의 시작은 수국이며, 여름의 맛은 자두니까. 여름이라고 말하면 떠오르는 그 냄새가 잊히는 건 슬픈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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