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평전 - 음악, 사랑, 자유에 바치다
이채훈 지음 / 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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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평전을 쓴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무한 애정이 있다고 해도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아는 유명한 예술가라면 더욱 그렇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예술과 삶에 대한 평가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 처음으로 모차르트 전기를 쓴 저자 이채훈은 그만큼 모차르트에 대한 애정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건 단순히 개인 취향이 아니라는 걸 명확히 한다.


첫째, 모차르트는 피와 살의 인간이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부지런히 노력한 음악가였다. 둘째, 모차르트의 음악이 35년 짧은 생애에서 끊임없이 무르익어 갔다는 점에 주모해야 한다. 그가 어린 시절 부터 경이로운 재능을 보인 것은 물론 놀랍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그의 음악이 깊이를 더해 가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진정 놀랍다. 셋째, 모차르트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넷째, 모차르트는 자유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예술혼을 억압하는 잘츠부르크 통치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주교와 정면충돌했고, 결국 최초의 프리랜서 음악가의 새로운 길을 걸었다. 귀족과 성직자가 지배하는 신분사회에서 그는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유토피아의 꿈을 노래했다. (16~17쪽)


저자는 『모차르트 평전』은 모차르트의 일생을 순차적으로 기록하여 들려준다. 어린 나이의 음악 신동으로 알려졌고 살리에리의 질투를 받은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피리>의 작곡가로 영화 <아마데우스>의 삶을 모차르트의 진짜 삶이라고 착각한 내게 『모차르트 평전』은 모차르트의 35년 인생을 자세히 안내한다.


책을 읽을 때에는 모차르트의 곡을 찾아 듣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책만 읽게 되었는데 지금 은 조성진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떻게 이런 선율을 작곡할 수 있었을까 놀라고 감탄하는 중이다. 이처럼 음악에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에게 『모차르트 평전』은 모차르트의 곡과 연결시키는 가교가 된다. 오페라를 관람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의 음악을 가까이 조금 더 많이 듣게 될 것이다.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 레오폴트는 1763년 가족을 데리고 가족 연주 여행을 시작한다. 1756년생인 모차르트는 겨우 7살이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실력을 세상에 선보이고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차를 타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연주를 하는 모차르트를 생각하면 안쓰럽다. 하지만 부모 마음을 생각하면 일정 부분 이해되기도 한다. 잘츠부르크가 아닌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황실과 귀족 출신이 아닌 모차르트에게 그의 재능은 신의 선물인 동시에 평생의 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든든한 배후가 없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18세기 유럽에서 피아노 연주와 작곡만 할 수 있도록 그를 지원하는 이가 없는 예술가의 삶은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아버지가 연주와 작곡을 위한 나머지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기에 나중에 혼자 연주 여행을 떠났을 때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하나 아버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부적인 사항을 조율하는 부분에 있어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레오폴트에게 모차르트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였고 모차르트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한 어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모차르트는 현실적인 문제, 이를테면 연주 일정이나 작곡을 의뢰받은 비용에 대해 기준이 없고 계획보다는 충동적인 부분이 많았다. 물론 책을 읽으며 느낀 나의 생각이다. 안타까운 부분도 많았다. 아버지 대신 모차르트를 따라나선 어머니가 파리 여행에서 죽음을 맞이한 일이 그러했다. 모차르트가 나가고 나면 혼자 숙소에서 아들을 하루 종일 아들을 기다려야 했을 어머니,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모차르트의 마음과 편지로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아버지와 누나.


『모차르트 평전』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작품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어떻게 그 작품을 작곡하게 되었는지 배경도 알려준다. 당시에는 귀족들이 주최하는 음악회가 빈번했고 백작이나 황실의 대소사(결혼, 취임)을 위한 음악을 따로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시험한 이들도 있었다. 모차르트의 명성은 이미 잘 알려졌지만 좀처럼 운은 따르지 않았던 것 같다. <빈 음악협회> 정회원으로 등록하지 못했고 대주교의 궁정 악사였지만 궁정 악장의 기회도 얻기 못했다.


황제의 초청으로 궁정에서 연주를 할 기회를 얻었을 때에도 피아노 경연이었다. 무치오 클레멘티와 모차르트의 피아노 경연은 무승부로 끝났다. 클레멘트는 모차르트의 즉흥 연주에 열광했지만 모차르트는 그의 연주를 혹평했다.


“클레멘티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죠. 그의 오른손은 무척 훌륭하고 특히 3도, 6도, 진행은 완벽합니다. 하지만, 기교를 제외하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 한 푼의 취향도, 느낌도 없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계공일 뿐입니다.” (320쪽)


모차르트가 유명해지면서 자신의 작품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저작권을 분명히 해두자는 것. 저작권을 무시하는 당시의 관행을 생각하면 모차르트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곡에 대한 자부심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자부심은 음악의 작곡에도 나타난다. 물론 저자의 해석이지만 <피가로의 결혼>에 대한 이런 설명에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소중한 희망을 간직하는 거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이라는 사실,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은 이 점을 우리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이는 중세 신분사회의 벽, 그 어둠 속에서도 모차르트는 자유와 평등의 꿈을 잃지 않았고, 이에 따르는 대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463쪽)


모차르트의 이런 사고는 그가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활동한 것과 연결된다. 사실 이 책을 통해 세계 민주주의, 인도주의적 우애를 목적으로 한 비밀조직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음악적 활동뿐 아니라 모차르트의 유머, 사교와 연애, 결혼에 대한 부분도 많다. 아버지를 비롯한 아내와 나눈 편지를 보면 유머스러운 글귀가 많다. 아내 콘스탄체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보낸 편지에 아내를 향한 애정이 가득하지만 첫사랑이지만 처형이 된 알로이지아를 잊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이채훈의 『모차르트 평전』에서 주목할 점은 모차르트의 작품에 대한 소개도 빼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오페라의 줄거리나 배우들에 대한 설명, 시대적 상황이 어떻게 녹아흐르는지 풍부하게 설명한다. 모차르트의 곡을 좋아하고 오페라도 익숙한 이들에게는 글로 오페라를 관람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반대로 오페라를 감사한 적 없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기대와 상상을 갖게 만든다.


마지막 <레퀴엠>을 작곡하다 죽음에 이른 모차르트의 사망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빈 묘지만 남은 그의 죽음은 독살설에도 무게를 두게 만든다. 작곡에만 자신의 쏟아부은 결과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전부를 걸 정도로 좋아하고 사랑했던 음악 때문에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라니, 아깝고도 아깝다.


주석과 사진을 포함한 800쪽에 가까운 책이지만 어렵거나 난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많은 자료를 찾아 모으고 진실을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노력이 대단하다. 그 덕분에 모차르트와 그의 음악에 대해 더 알게 된 시간이었다.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면 더 즐겁고 깊이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점은 많이 아쉽다.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더 알기를 원한다면 이 책이 충분한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모차르트 음악은 사랑이 가득하다. 어린 모차르트는 자기에게 연주를 청하는 사람에게 묻곤 했다. “저를 사랑하시나요?” 아무 대가 없이 그의 음악을 즐기는 우리는 진정 그를 사랑하고 있을까? 모차르트는 아내 콘스탄체에게 썼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절반만큼이라도 나를 사랑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모차르트가 아낌없이 준 음악을 우리는 절반이라도 이해하며 감사할 줄 아는 걸까? (7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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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8-1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클래식에 입문할 적에
라벨의 <볼레로>와 모짜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뮤직>
을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읽은
... 아니 들은 기억입니다.

나중에 발터가 지휘한 모짜르트
심포니를 들으면서 정말 대단하
다 싶었습니다.

달래, 천재냐 !!!

800쪽, 분량이 어마무시합니다.

자목련 2023-08-20 17:59   좋아요 0 | URL
아주 세세하게 모차르트의 작곡에 대해 말해주고 있어요.
음악을 하는 일, 예술가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고맙게 듣어야지 싶었어요 ㅎ
 

태풍이 지나고 나면 더위가 한풀 꺾길 거라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낮의 뜨거운 열기는 밤에도 쉬이 식지 않는다. 그래도 밤에 잠들 때 침대를 내려오는 일은 없다. 대신 잠드는 시간이 늦어진다. 이미 다 본 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다. 3~4년에 방영된 드라마, 여름에 걸맞은 스릴러 쪽인데 분명 봤는데 줄거리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아 처음 본처럼 집중해서 보느라 새벽까지 시청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넷플릭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중이다. 다른 채널을 구독하지 않은 걸 나름 다행이라 생각한다.


알림은 받지 않기, 이게 중요하다. 배달 앱도 자꾸 쿠폰을 준다는 알림에 그 쿠폰이 아까워서 자꾸 뭔가 배달시킨 음식을 찾게 된다. 이러려고 앱을 설치한 게 아닌데. 지금도 어느 앱에서 알림이 왔다. 이 기회에 알람 설정 정리를 해야겠다. 알림을 받아야 할 것과 받지 말아야 할 것을 정리하기. 언제나 좋아하는 것들에서 주저한다. 온라인 서점의 알림이다. 알림을 받지 않으니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도 놓치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모두 구매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책이 나왔는지 알아야 그 책에 대해서 살펴보고 내가 읽고 싶은지, 아닌지 판단한다.


알림과 상관없이 그냥 산 책들은 이렇다. 정은 작가의 에세이 『커피와 담배』는 중고로 샀다. 중고 알림을 설정한 덕분에 구매한 것이므로 알림 받기를 유지해야 하는 쪽으로 기운다. 아, 이런. 알림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아, 이런 생각은 멈춰야 한다. M 과의 통화에 생각난 박시하의 시집은 무려 제목이 『8월의 빛』이다. 표제와 같은 제목의 시는 아버지의 기일에 관한 것으로 공교롭게 오늘은 큰언니의 기일이다.





마지막 그냥 산 책은 김화진의 연작소설 『공룡의 이동경로』다. 신춘문예 등단작이었던 「나주에 대하여」가 좋았다. 편집자로 소설을 쓰는 작가, 등단 이후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 책을 구매한 결정적인 계기는 이 문장 때문이다. “사람은 주머니 같다. 나는 그 안이 궁금해.” 아직 소설을 읽기 전이라 어떤 문장인지 알 수 없다. 편집자, 마케팅 담당자, 누군가 이 문장을 선택했고 그 문장에 나 같은 독자는 소설을 선택했다.


그냥 책을 사고 그냥 살고 있다. 그냥 사는 게 이상한가. 그냥 사는 게 좋다. 요즘은 그런 날들이다. 그냥 사는 날들, 이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도 여름이 지나면 더 이상 더위를 핑계 삼을 수 없으 조금 더 이어졌으면 하는 이상한 마음이다. 그냥 산 책을 그냥 읽어야 하고 그냥 사는 날도 이렇게 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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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8-17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지요.저는 넷플릭스 끊고 왓챠를 구독하는데 넷플릭스에 비해 볼 게 별로 없어 시간이 좀 절약되더라고요.
날씨가 너무 더워요.
그래도 자목련님의 책읽기는 끝이 없으시네요~~

자목련 2023-08-18 13:32   좋아요 1 | URL
<더 글로리>때문에 가입했는데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오늘도 고현정 드라마 오픈한다고 알림이 ㅋㅋ
막바지 더위의 날들, 시원하고 건강하게 보내세요!

blanca 2023-08-17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언니의 기일이었군요. 얼마나 그리우실지...그냥 사는 게 좋다,는 말씀이 그냥 좋네요. 저도 요새 스마트폰, 유튜브 중독이라 걱정이에요.

자목련 2023-08-18 13:31   좋아요 0 | URL
작은언니가 있지만, 큰언니라 부를 일이 없다는 게 가끔 슬퍼요. 작은언니에게는 언니가 없다는 것도.
여름은 그래서 좀 복잡한 감정이 밀려오기도 해요. 저는 유튜브 중독은 아니라 다행이네요 ㅎ

독서괭 2023-08-1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산 책이 그냥 좋기를!^^ 자목련님, 언니분 기일이군요.. 8월의 빛 시가 위로가 되셨기를요!

자목련 2023-08-18 13:29   좋아요 1 | URL
그냥 좋은 책, 그냥 좋은 날!
독서괭 님께도 그러하기를 바라요~

그레이스 2023-08-18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사는 것만으로 족한 때가 있죠.
이유 없이 힘든 시간들도 있구요. 근데 다 이유가 있더라구요. 시원한 계절이 와서 밖으로 걸어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자목련 2023-08-18 13:29   좋아요 0 | URL
맞아요,돌아보고 살펴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지요.
곧 시원한 계절이 우리를 감싸고 이 여름이 그립기도 하겠지요^^
 
바쁜이를 위한 커피백 알라딘 아네모네 블렌드 #1 - 14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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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마시는 일상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쁜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드립백 기다리는 시간 없이 간편하게 마시고 싶기도 하니까. 커피 티백도 좋다. 향도 좋고! 독서괭 님의 칭찬에 공감하며 칭찬을 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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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8-1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그정도 바빠서가 아니라 편하게 먹으려고 ㅋㅋㅋ 매달 살 것 같아요.

잠자냥 2023-08-17 15:00   좋아요 0 | URL
칭찬을 거든다를 순간 칭찬을 거른다로 읽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08-17 15:08   좋아요 0 | URL
잠자냥 님 업무로 피곤하시군요, 커피 한 잔!

독서괭 2023-08-17 15:24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바빠도 커피 거르지 마시고.. ㅋㅋ
 
너는, 어느 계절에 죽고 싶어
홍선기 지음 / 모모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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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말하는 이들의 진심은 그 반대라고 알고 있다. 그만큼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놓치고 만다. 그 내면에 얼마나 깊은 상실과 슬픔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곁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너는, 어느 계절에 죽고 싶어』 란 제목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전해진다. 그러다 가만 생각한다. 특정한 날이 아니라 계절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어느 계절에 죽고 싶을까. 눈부신 봄, 내가 좋아하는 4월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멈춘다.


소설 속 ‘케이시’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케이시에겐 죽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하고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영유하는 그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케이시가 주최한 파티에 우연히 참석하면서 그와 친구가 된 ‘가즈키’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이른 나이에 은퇴한 케이시와 다르게 하루하루 직장에 다니는 평범한 가즈키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소개팅을 주선하지만 케이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가즈키는 데이트 앱으로 만난 ‘하즈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케이시가 안타깝다.


소설은 케이시를 중심으로 가즈키, 하즈네의 일상을 들려준다. 케이시는 가즈키의 조언대로 데이트 앱을 가입하자 수많은 여성들의 관심을 받는다. 케이시는 그들과 만나지만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허무하게 만들었을까. 같은 보육원에서 지낸 카나에와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되었다. 케이시가 대학생이 되던 해 카나에는 죽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죽기 전 카나에는 케이시에게 어느 계절에 죽고 싶냐고 물었다. 그 질문은 평생 케이시를 따라다닌 것이다.


삶을 소모하는데 의미를 두는 케이시는 사업을 할 때 모델이었던 '유메'를 만난다. 유메 역시 부족한 게 없어 보이지만 그녀에게도 상처가 있었다.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이처럼 이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빛나는 젊음이 아닌 어딘가 모르게 결핍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일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이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가즈키와 하즈네는 결혼을 약속하고 케이시에게도 사랑이 나타난다. 카나에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찾은 뉴욕에서 만난 료코였다. 료코의 모든 게 거짓이었지만 케이시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돈을 줄 정도로. 과연 그 사랑은 진짜였을까? 반려견 하루가 죽고 반려묘 미루가 사라지자 케이시는 모든 걸 끝내기도 마음먹는다.


언제까지 이런 상실을 되풀이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두 다리가 허공 위에 떠 있는 그 아찔한 느낌을 받으며, 온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절망감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만 반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부질없고 지겹다. 또다시 같은 슬픔을 겪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 상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일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상실되는 것뿐이다. (384쪽)


그러나 잔인한 운명은 케이시가 아닌 가즈키를 선택했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날 날을 기다리면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아가는 가즈키는 교통사고로 떠난다. 남겨진 하즈네는 슬픔이 아닌 비장하고 의연하게 삶을 나갈 준비를 한다. 케이시는 그녀를 통해 삶의 소중함을 발견한다.


아직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핍과 상처는 무엇 하나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은 채 삶의 그림자로서 지겹도록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힐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가 있고 지금보다 더 완성된 나를 향한 희망이 있다. 희망과 기대, 그것이 삶을 살아내는 진짜 계절이었다. 이제야 그것을 보기 시작한 나는 영혼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삶의 투지를 느꼈다. (398쪽)


삶의 가치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랑조차 믿지 못하는 청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러면서 삶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그 과정이 헛되지 않고 아름답다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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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아르헤리치 - 삶과 사랑, 그리고 피아노
올리비에 벨라미 지음, 이세진 옮김 / 현암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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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잘 모른다. 그러니 연주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럼에도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평전을 읽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의 생을 알아간다는 건, 그것이 주는 매력 때문이다. 강렬한 표지와 삶과 사랑 그리고 피아노라는 부제까지 끌림은 당연했다. 어쩌면 이 책은 나 같은 독자가 아닌 다른 독자에게 더 적합한 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주 즐겁게 책을 읽었고 그녀를 더욱 알고 싶어졌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순간순간을 즐기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녀가 놀라웠다. 예술가의 삶이란 정녕 이런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천재적 재능을 타고났을지도 모를 마르타 아르헤리치. 그녀가 피아노를 시작한 계기부터 남다르다. 어린 마르타에게 “넌 피아노 못 치지!” 하면서 무시한 남자아이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피아노를 쳤고 놀랍게도 모든 음이 정확했고 리듬도 잘 탔다. 단 한 번도 피아노를 배우지 않은 아이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장면이다. 마르타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벗어날 운명이라는 걸 말이다. 당시 대통령이던 후안 페론을 만나 빈에서 프리드리히 굴다와 공부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엄마인 후아니타는 미국으로 가길 바랐지만 마르타는 스스로 자신의 스승을 결정한 것이다. 예술가는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는 것일까. 제자를 받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굴다와 마르타 사이를 보면 그런 것 같다. 좋아하는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하고 솔직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 그런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했고 굴다를 향한 소녀 마르타의 마음은 존경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수줍으면서도 당찬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얼마나 씩씩하고 예뻤을까.


마르타는 한술 더 떠, 쇼팽이라는 사람은 알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다. “쇼팽은 너무 감정 기복이 심하고 너무 파란만장해서 내가 못 살 것 같아요.” 마르타가 만나보고 싶은 음악가는 슈만이다. “슈만은 내 눈에 눈물이 차오르게 하는 음악가지요.” (빈, 72쪽)


굴다는 마르타에게 대단한 영향력이 있었으므로 마르타는 반항하지 못했다. 굴다는 마르타를 잘 알았고 마르타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확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는요, 굴다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어요.” (빈, 73쪽)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부소니, 제네바, 쇼팽 콩쿠르에서 어떤 곡을 연주해 우승을 하고 그녀의 공연 행진과 음반 녹음에 대한 나열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평전과 다르게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생을 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들려주는 게 아니라 공간의 이동을 통해 그녀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당연한 듯하다. 피아노를 사랑했지만 마르타는 무대에 올라 음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닌 삶을 누리고 싶었다. 예술적으로도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위해 노력하고 연주회 바로 직전에도 취소를 선언할 수 있는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언제나 두려울 것 것 없는 그녀에게도 힘든 시간은 있었다. 갑자기 엄마가 되고 아이를 볼 수 없고 키울 수 없는 상황, 다시 찾은 사랑과 이별, 그리고 세 딸. 마르타를 위해 헌신한 어머니 후아니타와 딸들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르타는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아이들을 간절히 바랐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자기 삶에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마르타는 자식들을 자신의 연장 선상에 두고 바라보지 않고 독자적인 인격체로 사랑하고 싶어 했다. (제네바, 222쪽)


나는 예술가나 연주자의 삶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상상할 수 없다. 그녀의 “나는 선물 같은 아티스트가 아니에요. 연주 요청은 많지만 나는 답도 잘 안 주고, 계약서에 사인도 안 하고, 취소도 자주 하니까요.” “나는 연주를 듣는 게 더 좋아요”(파리, 310쪽) 말은 유머처럼 들리지만 그녀가 삼키는 고독의 크기를 생각하게 만든다. 책 곳곳에서 만나는 그녀의 말투는 재치가 넘치고 따뜻하다. 그래서 마르타 곁에는 언제나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가득했다. 동료를 위해 집을 내주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교류한 그녀. 표지처럼 흑발의 마르타가 아닌 백발 할머니 마르타를 응원한다. 


음악에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음악은 순간의 덧없음을 날카롭게 의식하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희석시키는 또 다른 차원은 제공한다. 피아니스트는 영원한 아이로 남았기에 언제나 자유로이 발견하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아이였기에 지나치게 감상적인 노스탤지어나 치기 어린 어영, 발목을 잡는 소유욕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위상을 다지고 후세에 남길 이름을 준비하는 여느 예술가들과 달리 마르테 아르헤리치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유일한 신조에 충실할 것이다. “살아가고, 살게 하라” (파리, 320쪽)


보통의 평전과 다르게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읽고 싶은 책이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수많은 예술가와 작품이 등장하지만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부제가 말해주듯 마르타의 ‘삶과 사랑 그리고 피아노’가 중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를 알지 못해도 그녀를 아는 것처럼 그녀의 생으로 빨려 들어간 건 클래식 음악 전문 기자인 저자 올리비에 벨라미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클래식을 몰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이제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주 조금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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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8-11 2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을 수록 더 읽고 싶은 책.
평전은 그게 쉽지 않을 터인데...
좋은 책이었나 보군요.
담아갑니다^^

잠자냥 2023-08-11 23:09   좋아요 2 | URL
이거 재미나요!

책읽는나무 2023-08-11 23:50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아르헤리치?
잠자냥 님 떠올렸었는데 읽으셨군요?^^

자목련 2023-08-14 18:19   좋아요 1 | URL
잠자냥 님 말씀처럼 재미읽게 읽은 책이었어요!

은오 2023-08-1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클래식 잘 몰라서 자목련님 아니었다면 눈길도 안줄 책인데.. 리뷰에 홀려서 일단 담습니다 주섬주섬..

자목련 2023-08-14 18:20   좋아요 0 | URL
이상한 게 나이가 드니 예전보다는 클래식을 듣는 시간이 길어지고 좋아지고 있어요.

레삭매냐 2023-08-1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정작 음악으로 만나본 적은
없네요 ^^

자목련 2023-08-14 18:20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이 아니었으면 몰랐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