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래의 자리 ㅣ 소설Q
문진영 지음 / 창비 / 2024년 8월
평점 :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소멸하기를 바라고 바랐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시절, 그 아득한 시절이 떠올라서 문진영의 소설 『미래의 자리』를 읽고 가만히 조금 울었다. 그 시절을 지나왔지만 사라진 것 아니다. 내 몸은 여전히 그 시절을 기억한다. 그때의 내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의 자리에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미래의 자리』란 제목은 중의적 의미를 지녔다. 예고 없이 떠난 소설 속 ‘미래’의 부재를 확인하는 자리이며 미래의 쌍둥이 언니 나래, 친구 지해, 자람에게 다가올 미래의 자리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은 후 삶은 온전한 복구가 불가능하다. 무엇으로도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 무엇이 미래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힘들다.
초등학교 때 만난 지해와 자람은 중학교에서 미래를 만났고 친구가 된다. 글을 잘 쓴다는 미래의 말은 지해가 소설을 쓰는 동기가 되었다. 미래와 더 친한 지해를 보는 게 속상한 자람의 마음을 미래는 인정해 주었다. 미래가 고교 진학을 하지 않으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들의 중심엔 미래가 있었다. 지해와 자람, 나래가 대학에 입학할 때 미래는 세상을 보고 나가는 방법으로 영상을 택했다. 그리고 어느 날 미래는 세상을 떠났다.
소설은 지해, 자람, 나래,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지해, 자람, 나래의 이야기가 끝날 때 미래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각자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준다. 지해는 언제나 열심히 살았지만 나아지는 게 없었다. 뷔페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설을 쓰지만 나아가지 못한다. 독립을 했지만 나만의 공간에 대한 애착도 없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하루를 버틴다고 할까.
첼로를 배워 첼리스트가 되기를 꿈꿨던 자람은 아빠의 사고로 모든 게 달라졌다. 자람을 위로하며 한 방을 쓰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자람은 자해를 시작했다. 허벅지에 낸 상처가 쉽게 아무는 걸 보고 자해는 계속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 후 연주가가 아닌 복지관을 다니며 플랫폼을 통해 일대일 첼로 강의를 하며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자람에게는 중고 자동차 ‘금옥이’가 유일한 쉼의 공간이다. 미래의 기일과 가깝다는 이유로 이후로 생일을 챙기지 않는 지해를 보는 게 안타깝다.
정해진 대로 부모님의 칭찬과 격려를 받으며 과학고, 카이스트에 입학한 나래는 중학교 졸업 후 독립한 미래를 향한 부모님의 웃음을 질투했다. 미래의 죽음으로 모든 걸 놓아버린 나래는 살아주면 안 될까란 지해의 말에 일어난다. 다시 수능을 보고 의대에 진학한 나래는 자신의 아픔에 무감각해진 일상을 이어간다. 나래의 곁에 연인이 있지만 그 사랑이 결혼 예정으로 이어졌지만 잘 모르겠다.
지해, 자람, 나래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녕 그렇다. 그러나 앞으로 나가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십 대 소녀가 주인공인 지해의 소설은 매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자람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게 작은 기쁨의 전부가 되었다. 자람은 아버지의 폭력성을 사랑하는 엄마를 혼자 두고 집을 나올 수 없다. 나래는 연인에게 미래의 죽음에 대해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미래가 없는 그들은 오늘을 버티고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다 지해는 도서관에서 뷔페식당에서 같이 일하는 용이 씨를 우연히 만나 말을 건다. 그의 꿈이 목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손을 통해 뭔가 만들어가는 과정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글을 조금 더 잘하고 싶어졌다. 자람에게 그런 순간은 작은 일탈로 시작됐다. 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 와 버린 것. 횟집 수조에서 새끼 고양이 해삼과 멍게를 만나 서울로 돌아와 일주일 사용으로 공유 오피스텔을 계약한다. 집에 가서 짐을 챙겨 나와 구한 낡은 주택의 이층에서 고양이와 새 삶을 시작한다.
바람이 불자 버드나무들이 한꺼번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치 우아한 군무를 보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구나. 자람은 깨달았다.
내 흉터는 저 버드나무를 닮았구나.
직선도 곡선도 아닌 것.
단단하지만 유연한 것.
흔들리지만, 끊어지지 않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해삼과 멍게가 건강하게 살다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거라고, 자람은 생각했다. (196~197쪽)
지해가 쓰는 소설 속 소녀는 어쩌면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래를 잃어버렸기에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그릴 수 없는 마음. 그러나 미래가 자신의 꿈 이야기 속 공기방울이 된 친구에 대해 죽은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겨우 오늘을 살아냈다는 안도조차 할 수 없었던 마음도 미래가 아닐까. 자람이 자신의 흉터를 매만지며 살아가는 미래. 고통, 슬픔, 상실로 가득한 삶이지만 그 안에 아름다운 삶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는 나래의 바람처럼 그런 미래는 올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삶을 이리도 아름답게 느낀다는 것은 모순일까.
대단한 모험보다는 소소한 위험들을 함께하면서 그 떨림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갖고 싶다.
겁낼 줄도 알고 용기 낼 줄도 아는 사람을.
돌아볼 줄도 알고 내다볼 줄도 아는 사람을. (219쪽)
『미래의 자리』를 통해 문진영은 조심스럽게 오늘이 끝이기를 바라며 내일을 꿈꾸지 않는 이들에게 내일의 자리를 말한다. 고통이나 불안이 아닌 다른 형태로 다가올 내일의 자리에 함께 손을 잡고 울어줄 이가 있다고. 내일이라는 말이 두렵다면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것뿐이라고 여기면 어떻겠냐고. 다양한 흉터를 품고 살아가도 괜찮다고. 그런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자리가 여기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