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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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제법 굵은 비가 내린다. 이 비 끝에 이별이 닿을까. 그러니까 온전한 여름과의 이별 말이다.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를 읽은 후라 그런지 비가 그치면 개운한 일상이 시작될 것 같다. 제목 때문에 궁금해서 읽은 소설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소설인 줄 몰랐다. 헌책방에서 발견하는 낯선 이의 흔적에 감탄하거나 찾아 헤매던 책을 찾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다. 일정 부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은 주인공 다카코가 1년 동안 사귄 직장 선배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별이야 할 수 있지. 화가 나는 건 상대가 직장 동료와 내년에 결혼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말인가. 다카코만 선배를 사랑한 것이고 상대는 아니라는 확인 사살. 결혼을 상대가 있으면 진즉 헤어졌어야지. 화가 난다. 화가 나. 스물다섯의 다카코는 그 일로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만의 세상으로 파고든다. 무엇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다카코는 외삼촌의 전화를 받고 외삼촌이 운영하는 진보초 거리의 헌책방에서 지내게 된다. 다카코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정이었다. 엄마가 있는 본가로 갈 수는 없으니까.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헌책방을 외삼촌이 물려받았다. 다카코가 지낼 서점 2층은 쾨쾨한 책 냄새가 가득한 곳이었다. 헌책방에서의 일상이 처음부터 유쾌했던 건 아니다. 다카코를 바라보는 외삼촌과 단골손님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재밌는 책이 없을까 찾다가 헌책방 서가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하다. 작가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용은 모르는 책이었는데 한순간 빠져들고 말았다.


책을 통해 이런 멋진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다. 왠지 지금까지 인생을 손해 보며 산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더 이상 게으르게 자고 또 자는 짓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잠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대신 외삼촌과 번갈아 가며 가게를 보면서 내 방에서든 카페에서든 책을 읽었다.


헌책 속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많은 역사가 쌓여 있었다. 이건 결코 책의 내용에 관해서만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 권 한 권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그 흔적들을 나는 여럿 발견했다. (64쪽)


다카노의 경험은 내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마음과 무척 비슷해 반가웠다. 침잠하던 시절 나를 꺼내준 건 가운데 하나가 책이었으니까. 다카노는 헌책방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진보초 거리를 살펴본다.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그곳 직원과도 친하게 지내며 진보초 거리 헌책방에 조금씩 스며든다. 저마다 특색을 지닌 헌책방의 거리를 상상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낡은 책 냄새와 말을 거는 책을 찾아 이리저리 서가를 맴도는 모습.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반할 책이다.


그렇다고 헌책방에서 낭만적인 로맨스나 특별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런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책에 둘러싸여 그 책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의 상처와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과 마주한다. 외삼촌과 다카코가 나누는 소소한 대화도 좋다. 실연을 당한 조카와 함께 선배에게 찾아가 사과하라고 말하는 당당한 모습은 통쾌하고 후련하다. 상대의 진정한 사과를 받았다 할 수 없지만 자신의 감정을 후련하게 말한 다카코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젊은 시절 여행을 통해 자신을 찾고자 했던 삼촌의 마음, 그 마음이 지금 헌책방에 있다는 것. 그리고 집을 나간 외숙모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래, 그건 마음의 문제야.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자신의 마음에 진솔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내가 있을 장소야. (88쪽)


다카코가 헌책방을 떠나 자신의 자리로 찾아가고 새로운 관계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는 일. 뻔하지만 뻔해서 나쁘지 않다. 나를 위로하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다카코에게 진보초 거리 헌책방이 그렇듯 저마다 그런 공간이 하나씩 있었으면 한다.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좋은 이와 함께 한다는 상상만으로 즐겁다.


서정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일이 휴식이며 나만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일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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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자리 소설Q
문진영 지음 / 창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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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소멸하기를 바라고 바랐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시절, 그 아득한 시절이 떠올라서 문진영의 소설 『미래의 자리』를 읽고 가만히 조금 울었다. 그 시절을 지나왔지만 사라진 것 아니다. 내 몸은 여전히 그 시절을 기억한다. 그때의 내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의 자리에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미래의 자리』란 제목은 중의적 의미를 지녔다. 예고 없이 떠난 소설 속 ‘미래’의 부재를 확인하는 자리이며 미래의 쌍둥이 언니 나래, 친구 지해, 자람에게 다가올 미래의 자리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은 후 삶은 온전한 복구가 불가능하다. 무엇으로도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 무엇이 미래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힘들다.


초등학교 때 만난 지해와 자람은 중학교에서 미래를 만났고 친구가 된다. 글을 잘 쓴다는 미래의 말은 지해가 소설을 쓰는 동기가 되었다. 미래와 더 친한 지해를 보는 게 속상한 자람의 마음을 미래는 인정해 주었다. 미래가 고교 진학을 하지 않으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들의 중심엔 미래가 있었다. 지해와 자람, 나래가 대학에 입학할 때 미래는 세상을 보고 나가는 방법으로 영상을 택했다. 그리고 어느 날 미래는 세상을 떠났다.


소설은 지해, 자람, 나래,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지해, 자람, 나래의 이야기가 끝날 때 미래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각자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준다. 지해는 언제나 열심히 살았지만 나아지는 게 없었다. 뷔페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설을 쓰지만 나아가지 못한다. 독립을 했지만 나만의 공간에 대한 애착도 없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하루를 버틴다고 할까.


첼로를 배워 첼리스트가 되기를 꿈꿨던 자람은 아빠의 사고로 모든 게 달라졌다. 자람을 위로하며 한 방을 쓰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자람은 자해를 시작했다. 허벅지에 낸 상처가 쉽게 아무는 걸 보고 자해는 계속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 후 연주가가 아닌 복지관을 다니며 플랫폼을 통해 일대일 첼로 강의를 하며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자람에게는 중고 자동차 ‘금옥이’가 유일한 쉼의 공간이다. 미래의 기일과 가깝다는 이유로 이후로 생일을 챙기지 않는 지해를 보는 게 안타깝다.


정해진 대로 부모님의 칭찬과 격려를 받으며 과학고, 카이스트에 입학한 나래는 중학교 졸업 후 독립한 미래를 향한 부모님의 웃음을 질투했다. 미래의 죽음으로 모든 걸 놓아버린 나래는 살아주면 안 될까란 지해의 말에 일어난다. 다시 수능을 보고 의대에 진학한 나래는 자신의 아픔에 무감각해진 일상을 이어간다. 나래의 곁에 연인이 있지만 그 사랑이 결혼 예정으로 이어졌지만 잘 모르겠다.


지해, 자람, 나래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녕 그렇다. 그러나 앞으로 나가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십 대 소녀가 주인공인 지해의 소설은 매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자람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게 작은 기쁨의 전부가 되었다. 자람은 아버지의 폭력성을 사랑하는 엄마를 혼자 두고 집을 나올 수 없다. 나래는 연인에게 미래의 죽음에 대해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미래가 없는 그들은 오늘을 버티고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다 지해는 도서관에서 뷔페식당에서 같이 일하는 용이 씨를 우연히 만나 말을 건다. 그의 꿈이 목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손을 통해 뭔가 만들어가는 과정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글을 조금 더 잘하고 싶어졌다. 자람에게 그런 순간은 작은 일탈로 시작됐다. 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 와 버린 것. 횟집 수조에서 새끼 고양이 해삼과 멍게를 만나 서울로 돌아와 일주일 사용으로 공유 오피스텔을 계약한다. 집에 가서 짐을 챙겨 나와 구한 낡은 주택의 이층에서 고양이와 새 삶을 시작한다.


바람이 불자 버드나무들이 한꺼번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치 우아한 군무를 보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구나. 자람은 깨달았다.

내 흉터는 저 버드나무를 닮았구나.

직선도 곡선도 아닌 것.

단단하지만 유연한 것.

흔들리지만, 끊어지지 않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해삼과 멍게가 건강하게 살다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거라고, 자람은 생각했다. (196~197쪽)


지해가 쓰는 소설 속 소녀는 어쩌면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래를 잃어버렸기에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그릴 수 없는 마음. 그러나 미래가 자신의 꿈 이야기 속 공기방울이 된 친구에 대해 죽은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겨우 오늘을 살아냈다는 안도조차 할 수 없었던 마음도 미래가 아닐까. 자람이 자신의 흉터를 매만지며 살아가는 미래. 고통, 슬픔, 상실로 가득한 삶이지만 그 안에 아름다운 삶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는 나래의 바람처럼 그런 미래는 올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삶을 이리도 아름답게 느낀다는 것은 모순일까.

대단한 모험보다는 소소한 위험들을 함께하면서 그 떨림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갖고 싶다.

겁낼 줄도 알고 용기 낼 줄도 아는 사람을.

돌아볼 줄도 알고 내다볼 줄도 아는 사람을. (219쪽)


『미래의 자리』를 통해 문진영은 조심스럽게 오늘이 끝이기를 바라며 내일을 꿈꾸지 않는 이들에게 내일의 자리를 말한다. 고통이나 불안이 아닌 다른 형태로 다가올 내일의 자리에 함께 손을 잡고 울어줄 이가 있다고. 내일이라는 말이 두렵다면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것뿐이라고 여기면 어떻겠냐고. 다양한 흉터를 품고 살아가도 괜찮다고. 그런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자리가 여기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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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4-09-10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흉터가 더 이상 상처로 다가오지 않고 그냥 덤덤하게 흔적. 경험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삶이면 좋겠습니다

자목련 2024-09-11 14:58   좋아요 2 | URL
네, 시간이 지난 흉터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길 바라요.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니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안고 커피를 마시면서도 방송에서 냉면이나 팥빙수가 나오면 절로 침이 고인다. 하나의 계절이 지나고 다른 계절이 오고 있다는 걸 가장 가까이서 느끼는 게 식탁이다. 요즘 생각나는 건 고구마 줄기 볶음이다. 이맘때 먹을 수 있는 맛, 때에 따라 생각나는 맛이 있는 것처럼 어떤 음식이나 상황에 떠오르는 책들이 있다. 가을이 시작되면 흐릿한 기억 속 한수산의 장편소설 『가을 나그네』가 생각난다. 이처럼 책이란 시나브로 일상으로 스며드는 힘을 지녔다. 여기 그 순간을 포착해 아름다운 문장과 철학적 사유와 맛으로 소개하는 책이 있다. 셰프 정상원의 독서일기 『글자들의 수프』가 그것이다.

셰프 전성시대라 해도 좋을 만큼 셰프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대다. 방송 프로그램에 셰프의 등장은 익숙하고 요리가 아닌 예능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저자를 알지 못했기에 그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가 반갑고 특별했다. 그가 소개하는 책은 독특한 요리의 맛이 있고 작가의 일생과 근황, 작품에 대한 배경까지 풍부하다. 한 권의 책을 다채로운 맛으로 느낄 수 있다. 말 그대로 저자는 독서 고수다.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흡수하기가 버거운 면도 있다. 어떤 책은 내용이 아닌 음식의 재료만 기억에 남기고 하고 어떤 책은 문장 한 구절만 남고 어떤 책은 몰랐던 작가의 일생 한 부분이 남는다. 어쩌면 이것이 이 책의 매력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셰프의 독서일기이니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때문에 표제인 <글자들의 수프>가 등장한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은 무척 인상적이다. 그 소설을 읽지 않은 나에게는 더욱 그럴 수밖에. 로맹 가리의 소설 속 장면을 모티브로 만든 요리라니. 단호박과 오렌지를 넣어 오랜 시간 끓인 수프가 그것이다. 단호박과 오렌지가 합쳐지면 어떤 맛이 될까. 나만의 소설 속 한 장면을 요리로 승화시킬 수 있다니. 이러한 사연을 몰라도 메뉴판에서 <글자들의 수프>를 발견한다면 나 같은 독자는 그것을 주문할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일상의 평범한 순간에 곁들인 음식 재료나 요리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책으로 연결시킨다. 축구를 볼 때 쥐포를 먹는 일상은 쥐포가 삼천포항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쥐포를 좋아하는 나는 반색한다. 다음에 쥐포를 구매할 때 제품 설명에 삼천포가 있다면 그 제품을 구매하리라. 놀랍게도 그가 쥐포와 함께 소개하는 건 박재삼 시인의 시였다. 시와 삼천포와 쥐포의 완벽한 조합인 셈이다.

항구의 겨울바람은 당연히 일어나는 일들을 멈춰서게 하고 밋밋했던 것들 사이에 시간의 주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이에 상상하지도 못한 놀라운 비밀을 눌러 담는다. 세상에 없던 맛과 향이 쥐치의 살결 사이로 천천히 스며든다. 쥐포는 바람이 멈춘 시간의 맛이다. (91쪽)





내가 읽은 소설 목록이 겹쳐지는 부분은 언제나 반갑고 기쁘다. 이맘때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메밀밭의 주인공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 ‘긍게 사람이지’로 남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막연하게 언젠가 읽겠지 하며 1,2권만 읽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는 내내 추억의 맛이 그리웠던 황석영이 들려주는 음식 이야기 『황석영의 밥도둑』, 잔망스러운 소녀를 꿈꿨던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는 황순원의 『소나기』가 그랬다.

그런가 하면 소시지 하나로 독일 철학과 문학을 말하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은 소시지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읽고 싶은 철학 책이 된다. 은행나무가 스무 살이 되어서야 서로를 알아볼 꽃을 피운다는 사실과 함께 온 소설은 쥘 베른의 『녹색 광선』이다. 소장하고 싶은 책을 만드는 동명의 출판사의 소설 목록도 따라온다.

서쪽으로 대서양을 품은 유럽 바닷가 마을들에는 녹색 광선에 대한 일관된 전설이 있다. 일몰을 바라보다 녹색 광선을 만나면 그 순간 에피파니처럼 관계에 대한 많은 고민의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답이 있다 한들 그를 찾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그녀를 만난다면 정답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145쪽)

『글자들의 수프』를 읽고 나면 맛있는 수프를 맛있게 음미한 기분일 것이다. 어디 수프뿐일까. 저자가 직접 발로 찾은 소설 속 지역이나 해외까지 곳곳을 여행을 끝내고 정리하는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좋은 재료로 잘 차려진 식사를 마치고 배부른 느낌이다. 이 가을엔 셰프가 차려준 독서 식탁에 앉아보는 건 어떨까? 색다른 맛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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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샀다. 신간을 돌처럼 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세상엔 예쁜 돌이 얼마나 많은가. 더 사고 싶은 걸 참았다. 은근슬쩍 추석이니, 나를 위한 추석 선물이라고 적당한 이유를 달았다. 9월의 즐거움을 위해. 그 대신 읽을 것 같지 않은, 읽다 만 책을 정리했다. 나가고 들어오는 권수가 비슷하니 내 방 책장은 여전히 지저분할 예정이다.


산 책은 이렇다. 에세이 두 권, 소설 두 권. 일부러 맞춘 건 아닌데 짝꿍 같은 4권이다. 소설은 장편 하나, 단편 하나. 한국 소설 하나 외국 소설 하나. 에세이는 한국 에세이와 외국 에세이. 문진영의 소설이 새로 나온 걸 알았다. 이번 소설까지만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샀다. 조해진, 김애란의 장편도 나왔는데 나는 모두 살 수 없었고 그 가운데 가장 읽고 싶은 게 무엇인가 고민했다. 문진영을 선택했으나 나머지 두 소설에 대한 미련은 가득하다. 조만간 곁에 둘지도 모르겠다. 정말 오랜만인 김애란의 소설이 우선순위가 될 것 같다.






문진영의 장편 『미래의 자리』, 클레어 키건의 단편집 『푸른 들판을 걷다』, 처음 읽게 될 이승우의 산문 『고요한 읽기』는 제목이 너무 좋다. 소설가 한유주가 번역한 『상실과 발견』에 대한 기대도 크다. 소설가가 번역한 책이 늘고 있다. 그들은 소설도 쓰고 번역도 하고 대단한다. 한유주, 김유진, 백수린 가운데 백수린의 번역한 책은 읽었고 안온북스에서 나온 사강의 소설은 김유진의 번역이다.


9월이 되고 밤에는 창문이 활짝 열리지 않는다. 에어컨의 코드도 빼놓았다. 낮의 열기는 아쉬움이라 여긴다. 여름도 인사도 없이 이별을 하고 싶지 않을 테니. 그나저나 올 추석은 왜 이리 빠른가. 친구에게 맛있는 배추김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가 배추 값이 얼마냐 올랐는지 아냐는 소리를 들었다. 김치를 담그기는커녕 얻어먹는 주제라 다음 말이 쏙 들어갔다. 사과 값은 안정되고 있다는 게 그 자리를 배추가 차지하나 보다. 그래도 맛있는 배추김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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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05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엇! 제가 아직 저에게 추석 선물을 안해줬네요? 이 글 보고 저도 추선석물 사러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9-06 09:38   좋아요 1 | URL
조카 1, 2, 3 선물이 아닌 다락방 님을 위한 선물!!
어떤 책을 사셨을까 궁금합니다^^

레삭매냐 2024-09-05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모든 돌들을 사제끼고 싶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돌들을 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쳐 봅니다.

아 그리고 보니 추석이군요. 나에게 추석
선물 하나 장만해야겠네요.
미미 여사 신간으루다가.

자목련 2024-09-06 09:39   좋아요 1 | URL
예쁘고 특이한 돌들이 무지 많아요 ㅎㅎ
나에게 추석 선물은 무조건 찬성입니다!!

stella.K 2024-09-05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은 신간을 사고 싶긴하지만 사 봤자 당장 못 읽고 묵혔다 읽을텐데 그럴바엔 차라리 중고로 나오면 사자합니다. 근데 요즘 책들이 넘 미끈하고 예쁘게 잘 나오고 있어요. 내게 주는 선물인데 미끈하고 예쁘게 해 줘야죠. 잘 하셨습니다. 저는 이번엔 연휴랑 겹쳐서 추석이 내 생일이려니 합니다. ㅋ

자목련 2024-09-06 09:40   좋아요 1 | URL
정말 책들이 너무 예뻐요. 책상 상승의 요인이겠지만 그래도 눈이 갑니다 ㅋㅋ

구단씨 2024-09-06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그렇듯, 읽지는 않아도 사고 싶은 게 책이네요. ^^
자목련님 말씀 덕분에, 저도 이번에 저에게 명절 선물을 해야겠어요.
며칠 동안 다른 어른들께 선물 뭐해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머리 아팠는데,
정작 저에게도 선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 했는지 모르겠어요. 흥!
이번 기회에 애매하게 살까 말까 망설이며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책을 몽땅 사야겠어요!!!

자목련 2024-09-06 09:41   좋아요 1 | URL
명절 선물 고르는 일, 두통을 불러옵니다.
보관함의 책들 몽땅 사세요. 즐겁게 사세요!!
 
음악소설집 音樂小說集
김애란 외 지음 / 프란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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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늦은 퇴근을 하고 시외버스를 탔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연인보다는 늦게까지 일을 끝내고 헤어진 친구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업무의 과중함과 스트레스로 자주 맥주를 마셨다. 그날은 연인과의 약속 때문에 맥주를 마시지 못했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 버스 창밖의 어두운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노래를 불렀다. 당시 힘들 때마다 나를 위로했던 노래는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으로 시작하는’ <축복송>이었다. 시간이 흘러 <축복송> 대신 다른 노래가 차지했다. 최근에는 클래식 연주를 듣는다. 가만히 음악을 들으며 고른 호흡을 하려고 애쓴다. 그런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익숙한 경험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음악을 주제로 한 다섯 작가의 단편 『음악소설집』을 읽으면서 몇 개의 장면, 그 위로 흐르던 음악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음악에 기대어 울 수 있었던, 음악 소리에 숨어 훌쩍이던 순간이 고맙게 느껴겼다. 살다 보면 나의 노래, 나만의 연주 같은 게 생기기 마련인데 『음악소설집』은 나만의 음악소설로 여기고 싶은 욕심을 안겨준다. 그렇다고 5개의 단편이 아주 특별하나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하겠다. 스치고 지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짧은 순간의 인연처럼 쉽게 지울 수 없는 아련하고 애틋함 같다고 할까. 나는 그게 좋았다. 우연이겠지만 5개의 단편은 죽음과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추운 겨울에 손이 시려서 두 손을 비비는 내게 장갑을 끼워주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따뜻했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집에 대해 쓰려는 게 아니라 그냥 내 감정에 대해 쓰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그게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말이다.


김연수, 김애란, 편혜영, 윤성희,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함께 늙고 있다는 게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읽은 건 김연수의 단편 「수면 위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남겨진 자의 삶을 무기력과 절망으로 이끈다. 애인 ‘기진’의 죽음은 ‘은희’에게 삶은 그런 시간이었다. 호흡이 힘들어진 ‘은희’는 우연한 동영상을 보다가 ‘기진’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영천의 오므라이스’는 은희도 아는 이야기였다. 어느 여름밤 기진이 들려준 엄마의 우울과 죽음, 그리고 피아노 연주. 어린 기준에게 엄마의 우울은 어떻게 보였을까. 우울과 죽음으로 까맣고 어두운 화면과 노란 오므라이스와 드뷔시의 달빛이 교차로 반복되는 느낌. 그렇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주문 같은 이런 부분이 좋았다. 너무 당연해서 애써 외우거나 간직하려 하지 않았던 인생의 법칙 같은 주문.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행복하고 슬프지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이 모두를 말해야지 인생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게 아닐까? (90쪽, 김연수의 「수면 위로」)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의 화자 ‘은미’도 엄마와 작별했고 오랜 사귄 애인과 이별했다. 엄마의 간병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내려왔다. 엄마의 죽음 후 은미는 경력 단절의 자신감을 상실한 사십 대의 중년 여성이었다. 뭐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외국어를 배우기로 한다. 화상 영어 사이트에서 원어민 교사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한국어로 ‘안녕’이란 말은 무엇인지 질문을 받는다. ‘안녕’이란 단어에 결혼을 약속했지만 이별한 남자친구와의 팝송을 들었던 아침을 떠올린다. 상실의 조각으로 남은 기억을 통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고통을 말할 수 있고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는 알 게 된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여겼던 은미의 삶에 ‘안녕’을 전하고 싶었을 남자친구의 마음. 김애란은 누군가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전하는 안녕, 누군가의 안녕을 바라는 소중한 말을 그렇게 전한다.


소설마다 명랑한 슬픔을 안겨준 윤성희는 「자장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트럭에 치여 죽은 고등학생이다. 죽었지만 죽지 않아서 엄마를 따라 집으로 간다. 엄마가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서 잠도 못 잘까 걱정이 되어서다. 그런데 엄마는 너무 잘 자서 슬펐다. 그러다 엄마가 꿈에서 ‘나를 만나고 싶어 잠을 잔다는 걸 알게 되고 꿈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엄마를 위해 자장가를 불러준다. 소중한 사람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단편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 부모를 두고 떠나지 못하는 자식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지만 그 다정한 손길은 알 것 같다.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을 소재로 한 은희경의 「웨더링」은 묘한 여운을 남긴 소설이다. 기차의 4인석에서 만난 네 명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이야기라고 하면 맞을까. 클래식을 대하는 저마다의 태도와 생각에 대한 차이를 불러오는 동시에 네 명 중 두 명이 직장 동료의 부친상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가는 것과 나머지 둘 중 하나인 노인이 펼쳐보는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의 악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그들이 고통적으로 마주할 게 죽음이라는 사실.


죽은 엄마가 뜨다 만 초록 색 스웨터의 사연이 궁금한 편혜영의 「초록색 스웨터」는 초록색 스웨터를 입은 기분이 드는 소설이다. ‘경주’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나 엄마 친구 영주 이모와 함께 강화도로 향한다. 엄마에게 빌린 돈 오백만 원을 받기 위해 엄마 친구 나주 이모를 찾아가는 길이다. 소설은 엄마가 뜨다 만 스웨터가 누구의 것인지, 여러 사람의 손을 빌려 조금씩 완성돼가는 스웨터와 엄마의 이야기를 따뜻하고 포근하게 들려준다. 경주는 초록색 스웨터가 완성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그 모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엄마가 슬픔만 남겨두고 간 게 아니라는걸.


소설을 읽으면서 일부러 소설 속 음악이나 노래를 찾아듣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음악이 곁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나만 느꼈던 건 아닐 것이다. 교교한 달빛, 낮고 작은 자장가, 전쟁 같은 요란한 연주, 귀를 귀울여야 들을 수 있는 낡은 음색, 나도 모르는 사이 따라 부르는 팝송, 이 모든 음악이 흐르고 자신만의 음악을 연주하는 게 인생이라는 걸 말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비발디의 사계를 들었다. 벚꽃 흩날리는 봄밤, 비 내리는 여름밤, 달이 가득한 가을밤, 눈 내리는 겨울밤에 다시 만나고 싶은 단편이다. 상실의 시간을 쌓여가고 허무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짙게 스며질 것이다. 그래도 그때도 좋을 것이다. 지금 좋았던 것과 다른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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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09-0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에 대만의 만화가 임정덕이 연재한 [영건]이란 만화를 보면 각 장의 소제목이 모두 팝송 제목이었어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만화가가 해당 노래를 듣고 떠오르는 내용으로 각 장의 이야기를 그려나갔다고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젊은 시절에 저도 좋아하는 팝송 제목을 소제목으로 소설을 써보기도 했는데, 그런 방식으로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더라구요.

장편소설은 어렵겠지만, 단편이라면 가능할 것 같네요. 다섯 명의 작가 모두 익숙한 이름들이라 어쩐지 글의 수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일단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목련 2024-09-04 11:40   좋아요 0 | URL
감은빛 님도 좋아하실 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을에 천천히, 한 편을 읽고 나중에 다른 한 편을 읽어도 괜찮을 그런 단편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