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했다. 세계적인 추모 행렬이 이어졌고 영국 왕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영국의 드라마 시리즈 ≪다운튼 애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영국 상류계급의 문화』는 영국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세계나, 문화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반대로 나처럼 ≪다운튼 애비≫에 대해 모르거나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 후 왕실 일원에서 물러나고 영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정도의 관심이 있는 이라면 매력이 적을 수도 있겠다.


영국을 생각하면 신사와 귀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책에서 소개하는 상류계급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책에서 등장하는 ‘어퍼 클래스’라는 계급은 작위가 있는 귀족뿐 아니라 ‘젠트리’라 부르는 지주도 포함된다고 한다. 시작부터 우리의 조선 시대의 가계도가 함께 겹쳐지는 건 왜일까. 아니나 다를까, 영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차별적인 제도가 많았다. 귀족의 칭호도 무척 복잡하다. 이름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칭호는 그 사람이 공작, 후작, 백작의 장남인지, 차남 이하의 아들인지, 그 아래의 작위를 가진 집안의 아들인지, 귀족의 딸인지, 아내인지, 이혼한 아내인지를 드러내는 구조로 되어있다. ‘정식’작위와 ‘예의상의’ 작위의 차이점도 사실은 영어 표지로 알 수 있다. ‘정식’작위는 The Duke of Devonshire라고 ‘The’가 어두에 붙는 반면, ‘예의상의’ 작위는 Marquess of Hartington이라는 식으로 ‘The’가 붙지 않는다. (『영국 상류계급의 문화』, 19쪽)


물론 그들 세계에서는 체계적이겠지만 말이다. 귀족과 지주의 작위와 토지, 재산은 전부 장남만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진정한 ‘어퍼 클래스’는 장남이고 차남 이하의 아들들인 ‘미들 클래스’에게는 작위는커녕 토지 상속도 불가능해 직업을 가져야 했다. 그러니 딸은 아예 찬밥이 아닐까 싶은 생각.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 속 사교 모임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이 이해가 되면서도 무척 안타깝게 다가온다. 조선 시대의 조신한 양반가의 모습이라고 할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퍼 클래스’에게도 고충은 있었다.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어퍼 클래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소유하고 있던 저택과 토지를 관리하는 것,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이웃 주민들의 삶을 지키는 것, 그리고 저택과 토지를 온전히 다음 대에 물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주민들이 좀 더 가까운 길로 다닐 수 있도록 자신의 토지에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는 ‘통행권’을 발급하고, 토지와 저택을 1년에 몇 번씩 공개하는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무다. (『영국 상류계급의 문화』, 90쪽)


상속받은 것을 유지하는 일, 사교 모임을 게을리하지 않고 주말마다 하우스 파티를 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귀족과 대지주들에게 재력이 큰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미국 부호의 딸이 영국 어퍼 클래스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시대적으로 ‘올드 머니’가 주름잡던 미국 사교계의 신참인 ‘뉴 머니’는 런던으로 건너와 영국 귀족들과 사귀고 결혼한 것이다. 귀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이미지가 바로 그들이 살았던 집, 그러니까 성이나 컨트리 하우스다. 어퍼 클래스는 같은 계급의 사람이라면 직접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부재중이라도 저택과 정원을 가정부와 집사에게 안내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재 관광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종가의 고택을 지키는 종손을 떠올리면 쉽겠다.


원래 그들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대저택이기는 하나, 그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으면 가짜처럼 인식되고 만다. 물론 20세기 이후의 컨트리 하우스 관광에는 어퍼 클래스의 생활을 엿보고 싶다는 관음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소유주가 살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어퍼 클래스에 대한 기대도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영국 상류계급의 문화』, 140쪽)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어퍼 클래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변한 과정과 대학에서 생활하는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현재 어퍼 클래스는 여전히 영국의 문학과 문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묘사된다. 그들과 만난 적 없고 접한 적 없는 이들에게 궁금증으로 가득한 존재인 건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누군가에게는 영국의 문화와 어퍼 클래스에 대해 알아가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영국의 ‘어퍼 클래스’의 흐름이나 변화에 대한 제인 오스트의 소설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처럼 다양한 작가의 소설이나 회고록을 통해 설명한다 게 인상적이다.. 영국 문학을 많이 접한 이들이라면 이 접점이 흥미롭게 작용해 풍부한 독서로 이어져 만족할 것이다.


이 책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귀족 문화』를 같이 읽어도 좋겠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 그러니까 여왕으로 살아온 삶을 조금이나 알 수 있다. 제목 그대로 빅토리아 여왕과 그를 둘러싼 영국 왕실과 귀족 문화에 대해 알려준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적인 일상이 전부는 아니다. 당대의 모든 기록을 동원하여 설명하는 세계사 책이라 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쓴 일기, 당대의 기록인 신문기사, 여왕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자서전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들려준다. 영국사이자 세계사인 것이다.


책은 ‘제1장 즉위준비 1819-1837’를 시작으로 대관식, 빅토리아 왕국, 여왕의 결혼, 만국박람회와 전쟁, 남편의 죽음과 여왕의 마지막 ‘제9장 끝날 때’까지 시간별로 소개한다. 고백하자면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일기를 썼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우리의 역사를 생각하면 왕조 실록처럼 여왕을 보필하는 누군가의 기록이 아닌 여왕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다는 점이 무척 남다르다. 18세의 나이에 자신이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결의에 찬 다짐을 자세하고 담담하게 기록했다.


커닝엄 경은 유감스럽게도 나의 할아버지, 국왕께서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 오늘 새벽 2시 12분에 숨을 거두셨으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했다. 커닝엄 경은 무릎을 꿇고, 내 손에 입맞춤을 했다. (빅토리아의 일기 (1837년 6월 20일), 12쪽)


신의 뜻에 따라 이 지위에 오른 이상, 나는 전력을 다해 나라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리고, 전부라고까지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경험이 부족할 테지만, 지금의 나만큼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진정한 선의와 열의를 품은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빅토리아의 일기 (1837년 6월 20일), 41쪽)


이처럼 책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를 만나는 일은 흥미롭다. 일기뿐 아니라 여왕과 관련된 각종 삽화와 초상화로 그 시대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공간에서 지냈는지 세계사를 이해하는 재미를 더해준다.


즉위 3년 후 독일의 작은 연방국 군주의 차남 앨버트와 결혼한 여왕. 어머니의 오빠의 자식, 사촌 오빠와의 결혼은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빅토리아는 핸섬하고 지적인 앨버트에게 반했다. 여왕이면서 한 남자의 아내로 모두 아홉의 자식을 둔 빅토리아 여왕.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아이보다는 남편에 대한 애정이 컸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혈우병이 유전자가 있어 영국 왕실에 퍼트렸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빅토리아와 아이들의 관계는 복잡한데, 시기에 따라, 연령에 따라, 그녀 자신의 상태와 기분에 따라 변화해 간단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생후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이는 ‘개구리 같다’면서 귀엽게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아이보다 남편의 존재가 훨씬 컸고, 그와 단둘이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144쪽)


앨버트는 왕궁 개혁을 착수했는데 명령 계통을 정리하고 권한을 강화했다. 사용하지 않는 양초의 교환 구매나 허위 인원을 위한 와인 구입비 청구를 폐지시킨 것.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줄줄 새는 비용이 있다는 게 놀랍지도 않다. 여왕이 신경을 쓰지 못하는 부분을 앨버트가 꼼꼼하게 챙기고 있었다. 아마도 영국의 공식적 여왕은 빅토리아였겠지만 여러 곳에서 앨버트의 영향력이 존재했을 것이다. 일중독자였던 앨버트는 런던 만국 관람회 당시 쓰러질 정도였으며 산업계, 군대, 교육계를 비롯한 노동자의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다방면에 참여했다. 치통, 두통, 위통을 달고 살았고 1861년 12얼 14일 생을 마감했다. 남편의 사망 후 빅토리아가 일상을 찾는 일을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여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빅토리아는 남은 생애 40년을 원칙적으로 과부의 복장으로 지냈다고 한다.


1832년 7월, 13세일 때, 어머니가 일기장을 준 일을 계기로 빅토리아는 더욱 구체적으로 하루하루의 기록을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가족의 죽음 등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 중단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반드시 재개되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또 언니, 숙부, 아이들, 가족과 친척에게는 대량의 편지를 썼다. (21쪽)


빅토리아의 치세는 길었다. 경험을 쌓은 그녀의 의견은 존중되었고, 발군의 기억력을 기초로 제시되는 과거의 지식은 대신들에게도 나름대로 존중받았다. 하지만 편지나 총리와의 회견을 통해 매일 영향력을 발휘한다 해도, 최종적인 결정에는 의회의 영향이 우선시되었으며, 정치나 외교, 군사에 관한 커다란 문제에 여왕 개인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입장으로 서서히 물러났기 때문에, 수많은 군주제 그 자체가 폐지되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66쪽)


이 책은 분명 영국사, 세계사를 다룬 게 맞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맞다. 목차를 통해 시대별뿐만 아니라 관심이 가는 특정 시간을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64년 동안 여왕으로 존재한 사람, 굳건하게 군주제와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 그녀의 생애가 곧 역사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일기를 통해 그녀의 감정과 개인적인 생각, 가족과 친척과의 관계까지. 풍부한 사료와 사진으로 영국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영국으로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 같은 독자는 이런 책도 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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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안보윤 외 지음, 이혜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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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인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나와 다른 누군가를 대면하면 그 마음은 슬그머니 쪼그라든다. 그 다름이 상대의 잘못이 아닌데도 마치 그가 대단한 잘못을 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만 배웠을 뿐 공감, 공존, 연대라는 말로 확장시키지 못했다. 누군가 나와 다른다는 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생김새가 다르니 성격과 취향은 물론이며 사고와 가치를 두는 것도 다르다.


왜 당연한 것들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일은 어려운가. 개인주의 이기심,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까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을 거라는 안이한 태도 말이다. 창비교육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엮은 『공존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암묵적으로 비난하고 방관하는지 확인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소설들, 그 단면에 나도 속하고 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며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수록된 8편의 이야기 가운데 5편은 이미 읽은 소설이지만 다시 읽고 눈이 오래 닿는 문장은 여전히 같았다. 김숨의 건조하고 단단함과 최은영의 다정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던 소설부터 말하자면 김숨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서 고독사와 가난한 노인의 삶에 대해 말한다. 당장은 늙지 않고 노인이 아니기에 우리가 외면하는 그들의 삶. 아내가 죽고 혼자 남은 노인의 곁에는 아내가 데려온 한 마리 개만 남았다. 자식도 이웃도 친구도 없이 혼자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삶은 더 이상 뉴스의 기사가 아니다.


최은영의 「고백」에서 미주는 수사가 된 종은에게 학창 시절의 일을 꺼낸다. 절친 그 이상으로 가까웠던 주나와 진희와 보낸 시간들을 어쩌다 그들의 관계가 달라졌는지 들려준다.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한 진희를 대하는 주나와 미주의 태도. 아무도 없다고 느꼈을 진희는 세상을 등진다. 가장 든든하다고 여겼기에 주나와 미주에게 고백했을 진희.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주는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까운 미주의 마음은 우리에게 말한다. 다르다는 건 잘못이 아니라고 나의 삶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시간을 되돌려 어느 한순간으로 갈 수 있다면 그때로 가고 싶다고 미주는 간절히 생각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고, 나는 너의 편이라고 말할 거라고, 너를 그렇게 외롭고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때의 미주는 더듬거리다 끝내 제대로 하지 못했다. ( 「고백」, 118~119쪽)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시기,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이 쌓여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창구가 부족함을 느낀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소수와 약자의 삶을 향한 연대가 필요하다. 그보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김미월의 「중국어 수업」에서는 점점 다양해지는 사회 구성원을 향한 멸시나 혐오의 시선과 마주한다.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가 만나는 이들의 목적은 비자를 받아 불법 취업을 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노동력만 착취할 뿐 보상과 대우는 뒷전이다. 수가 가르치는 사람들도 3개월마다 재계약을 하는 수 역시 약자다.


김지연의 「공원에서」는 폭력에 노출된 여성 수진이 등장한다. 평소 머리와 옷차림 때문에 남성으로 오해받지만 정작 수진은 그게 편했다. 아이러니하게 남자라 여겼던 수진이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서 폭력의 대상이 된다. 누구에게나 허용된 공원에서 말이다. 수진에게 공원은 상처와 폭력의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곳에서 울고 있는 자신을 위로하는 한 아이를 만난다. 우는 사람을 혼자 두고는 못 간다는 아이, 그 아이가 없었다면 수진은 어땠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마음, 과연 나에게는 있을까?


문득 나는 내가 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처음에는 너무 뜬금없고 이상한 감정처럼 느껴졌는데 점점 선명해졌다. 뜻대로 된 적은 별로 없지만 나는 사는 게 좋았다. 내가 겪은 모든 모욕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 내고 싶을 만큼 좋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는 건 좋다. 살아서 개 같은 것들을 쓰다듬는 것은 특히다 더 좋다. (「공원에서」, 90쪽)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와 조남주의 「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는 가장 보편적인 일상을 소재로 한 소설로 가장 밀접하게 다가왔고 아리게 만들었다. 「밤은 내가 가질게」속 ‘나’는 어린이집에서 일한다. 부모가 학대하고 방임하는 아이를 신고하지만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그런 나의 집으로 사고만 치는 언니가 들어온다. 가출을 하고 사기를 당하는 언니가 유기견 봉사를 다니면서 급기야 개를 데리고 온다. 폭력에 노출되었던 언니는 상처받은 개를 돌보며 상처를 치유받는다. 이상한 건 언니를 향한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진다는 것이다.


아무 의심 없이 대할 수 있는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거. 그래서 내가, 아직 상냥한 채로 된다는 거, 그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해. (「밤은 내가 가질게」, 46쪽)


아무 의심 없이 대할 수 있는 존재가 내 앞에 있어 상냥한 채로 된다는 언니의 말이 마음에 박힌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우선은 의심부터 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게 슬프다. 그래서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장애 아동을 위한 병원이나 학교, 노인 요양 시설이 주변에 들어오면 기를 쓰고 반대하는 조남주의 「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가 더 와닿았다. 우리의 민낯이라서 말이다. 학원을 운영하는 경화가 학원 옆 건물에 치매 시설이 들어온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정작 살림을 봐주는 엄마가 초기 치매 증상을 보이자 기자 앞에서 노인 요양원을 환영한다는 인터뷰를 한다.


피는 더럽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고 사고나 불운이 옮겨 가는 것도 아니다. 저는 그냥 조금 다쳤을 뿐입니다. 아픈 사람이라고요.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요! 경화는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리고 그 마음이 염치없어 부끄러웠다.(「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 218쪽)


누가 경화를 비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알고 있다.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 그 누구도 사고나 불운을 옮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공존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걸. 나와 다른 누군가와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다른 누군가는 나란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돌보며 같이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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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비즈니스 레볼루션 - 챗gpt 활용 경영 전략
이진형 지음 / 포르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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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의 능력은 단순히 소통이나 검색 서비스를 대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의 패러다임을 바꿀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질문이나 명령을 하면 대답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이나 기업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대화형 AI를 뛰어넘는 면모를 선보이고 있다. 챗GPT가 향후 각종 산업과 서비스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스마트폰의 등장 이상으로 판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 기대되는 상황이다. (「프롤로그」중에서, 5쪽)


류태호의 『챗GPT 활용 AI 교육 대전환』를 통해 챗GPT의 장점을 읽었다. 더불어 앞으로 교육 현장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개별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했다. 나 같은 독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고 챗GPT가 어떤 것인지 이해를 돕는데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진형의 『AI 비즈니스 레볼루션』에 대한 책도 비슷할 거라 여겼다. 서울대학교 의료대학 의료정보학이라는 저자의 이력도 독특했다. 의사와 챗GPT, 외료업계와 챗GPT는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었다. 챗GPT에 관심이 있었서 챗GPT와 대화를 나누고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최신 정보의 답을 얻는 단순 형태의 챗GPT에 대한 책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독자에게는 전문적인 용어가 낯설고 어렵게 다가오는 그런 책이었다. 물론 챗GPT를 이용한 비즈니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지 챗GPT의 무궁한 능력과 활용법은 놀랍고 대단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나 챗GPT를 경영에 적용하는 방법이나 해석은 어려웠다.


사람들은 기술에 굉장히 빠르게 적용한다. 간단한 정보 제공이나 채팅 기능은 ‘반짝’ 흥미를 끌고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는 단순히 챗GPT의 신기능을 선보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챗GPT를 기업 서비스에 적용하여 서비스를 고도화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즉 챗GPT를 활용한 각 기억의 서비스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 잡고 지속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구축했을 때 성공적으로 챗GPT를 비즈니스에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 (35쪽)


챗GPT를 활용한 검색 엔진의 변화, 하나의 채널이 아닌 다양한 채널이 등장하여 선택할 수 있고 그 기능을 비교 설명하는 점을 흥미로웠다. 구글의 ‘바드’나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X’도 사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챗GPT와 바드이 가장 근본적인 차별점은 챗GPT가 2021년 9월 이후의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고 바드는 실시간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많다는 건 정보 이용에 있어 나쁘지 않다. 챗GPT와 바드에 대해 창의성, 코딩 능력, 수학적 계산 능력, 판단력에 대해서도 비교 설명하는데 창의성은 챗GPT가 우세하고 계산 능력은 바드가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인상적인 것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비즈니스 입장에서 보면 챗GPT를 활용해 최대한 더 좋은 답변을 유도해 이용자를 유입하는 방법, 즉 어떻게 프롬프트를 설계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렇다. 이 책은 그런 프롬프트를 설계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설명한다. 또한 챗GPT API를 연동한 비즈니스 사례(사용자 맞춤형 작문, 대화 요약, 사용자 지정 기술 자료, 다국어 및 자동 번역, 플랫폼 연동)도 만날 수 있다.


비즈니스나 경영, 경제를 모르는 나 같은 독자도 챗GPT가 가져올 혁명에 대해 알 것도 같다. 그러나 언제나 경제적 이익만을 보고 나가서는 안 된다. 분명한 것은 챗GP의 부작용도 있다는 점이다. 개인 정보 및 기밀 유출, 사이버 범죄, 허위 사실 유포, 저작권 침해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


AI가 세상을 바꾸는 지금, 기업은 이 기술을 이용해 한 단계 도약을 꿈꾼다. 저자는 챗GPT를 어떻게 비즈니즈에 활용할 것인가 안내한다. 그런가 하면 챗GPT가 가져올 새로운 시대에서 인가의 능력은 어떻게 되는가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챗GPT와 현명하게 협력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어쩌면 챗GPT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0와 1의 계산으로 데이터를 잘 읽어 다음 패턴을 유추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창의성은 패턴을 잘게 부수고 새로운 연결을 통해 이전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진정한 창조와 창의는 인간만의 능력인 만큼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인간은 이제 본연의 능력을 더욱 개발해 나가야 한다.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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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뜨겁지 않고 따뜻한 커피다. 한낮에도 얼음을 넣지 않은 커피를 마신다. 기가 꺾인 더위는 상냥해지고 부드러워졌다. 활짝 열렸던 창문은 닫힌다. 완전히 닫히지는 않고 조금 열린다. 가을이다. 이제 가을이라 말할 수 있다. 선풍기는 아직 내 곁에 있지만 그 바람을 쐬지는 않는다. 저녁에는 된장찌개를 끓였다. 뭔가를 끓이는 것, 그 뜨거운 국물을 한 술 떠 식혀가면 밥을 먹는 일, 가을인 것이다.


가을이라고 말해도 될까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그런 마음은 이제 없다. 가을이 되었다. 아직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있지만 여름의 옷차림이 아닌 가을의 옷차림이다. 작은언니의 가방에는 말아 쥐어 밀어 얇은 카디건이 있다. 가을인 것이다.


그런 가을이라서 그런 가을이 시작되어서 조금은 계획적이면서도 충동적인 책을 샀다. 모두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게 제일 좋으니까. 가을엔 소설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 네 권 가운데 두 권은 계획적이고 나머지 두 권은 충동적이었다.






계절의 소설로 소개할 수 있는 『소설 보다 가을 2023』은 이주혜의 단편이 궁금해서 샀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잘못 걸려온 전화』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을 읽기 전 짧은 단편을 먼저 만나려고. 사실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책장에 몇 년째 깊은 잠에 빠져있다. 근데 받고 보니 진짜 진짜 짧은 단편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마음산책 짧은 소설 같은 거라고 할까.


문지혁의 소설은 충동적인 구매였다. 적립금이 없었다면, 기대평과 편집장의 퀴즈 같은 이벤트 적립금이 없었다면 나중에 구매했을지도 모를 소설이다. 근데, 문지혁의 소설이 자꾸 궁금한 거다. 그래서 먼저 읽은 리뷰도 꼼꼼하게 읽을 수가 없다. 계획적인 충동구매가 맞겠다.


비가 온다. 가을비다. 기상 캐스터는 가을장마라고 했다. 비가 오는데도 습한 정도가 약하다. 친구의 말처럼 여름비와 가을비는 다른 것 같다. 더위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매몰찬 기운이 아니라 상냥하고 부드러워졌다. 한 번에 등을 돌리며 떠나는 여름이 아니라 천천히 등을 돌리며 여름이 떠나고 있다. 가을이 그 여름을 배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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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9-13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름을 좋아해서 선선해 지니까 막 섭섭하고 그래요...근데 천천히 등을 돌리는 여름에 배웅하는 가을...자목련님 표현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감동ㅜㅜ

자목련 2023-09-14 17:29   좋아요 1 | URL
망고 님은 여름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추운 걸 조금 더 견딜 수 있어요.
망고 님의 댓글이야말로 감동입니다. 남은 여름 안에서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물감 2023-09-1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이 쌀쌀해졌어요. 이번 장마 지나가면 본격 가을 날씨올 듯! 건강 조심하셔요🙂

자목련 2023-09-14 17:29   좋아요 1 | URL
주말 지나면 여름의 흔적은 찾기 어려울 것 같아요.물감 님도 감기 조심하시고요^^

독서괭 2023-09-1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가 꺾인 더위는 상냥해지고” 라니 넘 멋진 제목입니다!! 비와 함께 정녕 가을이 왔네요^^

자목련 2023-09-14 17:32   좋아요 0 | URL
가을이 왔어요. 와락 달려든 가을이에요. 얼마나 빠르게 지날지 모르겠어요.

거리의화가 2023-09-14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은 정말 가을이란 느낌이 확연하네요! 주말쯤 비가 다시 온다고 하더군요. 그 후엔 정말 가을일 듯합니다^^* 자목련님의 문장 표현은 언제 봐도 아름다워요^^

자목련 2023-09-14 17:33   좋아요 0 | URL
내일부터 비가 내리고 주말이 지나면 완연한 가을과 만나겠지 싶어요. 긴 소매 옷도 챙겨야 하고. 이불 정리도 해야 하고, 계절 맞이 쉽지 않아요 ㅎ
 
완벽이 온다 창비교육 성장소설 10
이지애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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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의 때가 온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건 슬픈 일이다. 아이들의 경우는 몰라야 한다. 눈치가 빠른 아이는 좋은 게 아니니까.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이 어른의 눈치를 보는 건 그들만의 생존방식이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아이들은 다 안다.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말이다. 기관의 선생님이 애정을 갖고 지켜본다고 해도 아이들에게는 부족한 게 사랑이다. 아이들은 그 사랑을 어디서 채워야 하는지 그 사랑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스스로 학습하게 된다. 제2회 창비교육 성장소설상 대상 수상작 이지애의 『완벽이 온다』 속 민서도 다르지 않았다. 여섯 살에 그룹홈에 들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덩그러니 세상으로 나온 민서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같았다.


『완벽이 온다』는 그룹홈에서 나와 자립하며 일찍 사회에 흡수된 아이들, 어른이 아닌 데 어른인 척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그룹홈의 존재와 역할을 알 수 있었지만 소설 속 민서처럼 어린 나이의 아이가 생활하는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잠시 부모와 떨어져 지내며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아이도 있었지만 민서에겐 그런 기대가 없었다. 해서 언니와 솔과 설 쌍둥이 언니들과는 달랐다. 해서 언니처럼 엄마도 없었고 쌍둥이 언니를 찾아오는 아빠도 없었다. 민서는 기다림에 익숙했지만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림이란 두려운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에게 부모란 언제든 없어질 수 있는 존재였다. 나는 아빠도 언젠가 나를 버리지 않을까 늘 두려웠다. 그게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헤어짐이 오늘은 아니기를 바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79쪽)


그런 아빠는 죽고 나서야 연락이 닿았다. 민서가 나름 혼자 살기에 적응하고 있을 때 그룹홈 선생님이 소식을 전했다.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아빠의 죽음은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의 죽음 그 이상과 이하도 아니었다. 민서는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 누군가 관계를 맺고 지내다 버려질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혼자여도 충분했다. 해서 언니는 민서와 달랐다. 항상 먼저 연락하고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라고 했다. 이번에도 연락을 해서 임신 소식을 전했다. 남자 친구와 완벽한 가정을 이룰 거라며 태명도 완벽이라 했다. 그룹홈에서 같은 방을 쓰며 지냈던 해서 언니는 민서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엄마와 살 거라 그룹홈을 떠났지만 곧 다시 돌아왔다. 쌍둥이 언니와 민서보다 먼저 그룹홈을 떠난 해서 언니가 엄마가 된다니, 이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카톡을 보내고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미용실에 찾아가니 그만두었다고 했다. 어디 사는지 집도 몰랐다. 민서는 그제야 한 번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룹홈을 나오고 처음으로 솔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솔과 설 쌍둥이 언니는 고등학교 때 아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가 술도 안 마시고 폭행도 사라졌다고, 그룹홈 선생님은 만류했지만 쌍둥이들은 가족을 택했다. 그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솔 언니는 설 언니의 죽음에 대해 말했다. 선생님의 걱정대로 아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아빠는 감옥에 갔다고. 민서에게 밥을 사주면서 솔이 들려준 이야기다. 그리고 해서의 집을 안다고 한 번씩 그랬다며 기다려보자고 했다.


민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솔 언니와 자주 만나고 솔 언니의 챙김을 받았다. 그룹홈에서처럼 말이다. 해서 언니가 연락을 해오면서 셋은 자주 어울렸다. 해서 언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남자친구가 떠난 것이다. 완벽이면 남겨 놓고. 완벽하기를 바랐던 해서의 꿈은 부서졌다. 해서가 자란 것처럼 완벽이도 어떻게든 자랄 거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민서, 해서, 솔은 삼각형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지냈다. 그건 나쁘지 않았다. 솔 언니가 돈을 빌려달라고 해도 선뜻 빌려줄 수 있었고 솔 언니의 자살 소식을 해서 언니가 아닌 자신에게 연락이 닿은 것도 다행이었다. 솔 언니는 그동안 모든 걸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민서를 챙겼다니, 민서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솔 언니와 해서 언니를 끊어 내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두렵다는 이유로 솔 언니와 해서 언니를 끊어 내는 게 아빠 같은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부질없더라도, 다시 상처받더라도, 결국 실패하더라도 나는 믿어 보기로 했다. 솔 언니는 아빠와 다르다. 아빠는 죽었고 솔 언니는 살았다. 배신의 순간에서 솔 언니는 마음을 바꾸고 돌아왔다. (197쪽)


캐리어 하나만 남은 솔, 완벽하지 않은 완벽이를 품은 해서,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소중함을 알게 된 민서. 셋은 같이 지내기로 한다.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충분하고 뻔한 결말이 이상하게 기쁘고 좋았다. 좁고 불편한 공간은 그룹홈과 닮았지만 그곳에 없던 게 있었다. 회복되는 설 언니를 지켜보는 마음, 완벽이와 같이 살아간 시간의 기쁨,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민서의 모습 말이다. 민서, 해서, 솔, 완벽이가 만들어 갈 소중하고 포근한 가족이 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조금 일찍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자립하는 모습은 서툴고 아프다. 소설은 그런 청춘의 실상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안전한 울타리가 없어 스스로 울타리가 되어야 하는 삶. 상처투성이라 타인을 볼 여력이 없다. 민서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같은 처지의 삶을 끌어안고 손을 내민다. 해서와 설이 그랬던 것처럼. 삼각형이었던 구도가 사각형이 되고 안정감은 커졌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아니 완벽의 새 기준을 만들면 된다. 저기 완벽이 오고 있다는 걸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다. 진정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다. 손을 잡고 연대하며 성장할 그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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