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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과 음악 ㅣ 말들의 흐름 10
이제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4년 1월
평점 :
어느 순간 삶이란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거라는 걸 배운다. 누군가 나를 붙잡고 그게 삶이라고 가르쳐 준 기억은 없다. 거대한 죽음 앞에, 개인의 존엄을 파괴하는 폭력 앞에서 저절로 배운다. 이토록 잔인한 가르침이라니. 차곡차곡 쌓아놓은 삶은 한순간 무너져버리고 처음으로 되돌려놓는다. 돌림노래처럼, 이어 부르기처럼 계속 돌고 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생과 사의 순간, 준비한다고 반가울 리 없는 그 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말이 통하지 않는, 나를 아는 다정한 얼굴이 없는 곳에서 사고를 당한 시인의 경험으로 시작하는 글은 내가 기대했던 산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몰고 왔다. 그러나 이 글을 썼다는 건 시인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고 위로했다. 시베리아에서 당한 사고로 그곳의 병실에서 지내면서 마주한 고려인 여인의 목에 새겨진 꽃(체첵)이라는 낱말. 자신의 이름이 꽃이라고 알려준 그녀. 자세히 볼 수 없어 휴대폰으로 찍은 화면으로 볼 수 있었던 모국어의 말. 어쩌면 모두 잊어버리고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순간, 시인 앞에 나타난 모국어는 슬프고 아름다운 말이었다. 그 감동은 내게도 그러했다.
결국 쓴다는 것은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단어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가진 지극히 단순한 낱말 속에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또 다른 소리와 의미를 다시 새롭게 겹쳐 새겨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일상 속의 아주 사소한 구멍. 아주 작은 틈새로. 추락하듯이 나아가면서. 비틀거리면서. 머뭇거리면서. 망설이면서. 주저하면서. 잘못 말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19쪽)
시인의 산문집은 이처럼 그녀가 직접 겪은 사고로 시작해 그것을 기록하며 고통과 상실을 글로 쓰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미용 가위, 쌍둥이 자매,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고통을 글로 쓴다는 건 가능한 것일까. 글로 쓰일 수 있다는 건 고통의 구덩이에서 조금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한의 고통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잠시라도 고통과 분리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전부다. 그건 슬픔도 마찬가지다.
고를 수 있는 낱말이 있는 게 아니다. 설명하고 싶지만 설명할 수 없다. 상실의 횟수는 늘어나고 감당해야 할 슬픔은 차고 넘친다. 시인이 쓰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슬픔과 고통에 관한 것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순수하고 명징한 슬픔, 함부로 쉽게 쓸 수 없고 내뱉을 수 없는 고독과 쓸쓸함이라고 할까. 정확하지 않다.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시인의 산문이니 그래야 마땅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써 내려갔을 문장, 혹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표현은 문장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 장면 속으로 기필코 들어간다. 나는 상상한다. 얇고 가는 빛, 정수리를 지나 심연으로 파고드는 빛. 만질 수 없고 잡을 수 없지만 무엇보다 강렬하다는 걸 느낀다.
여기 어떤 빛이 있다. 어떤 어둠이 있다. 어두운 방안. 이제 막 밝아올 새벽빛을 암시하고 있는. 혹은 언젠가의 새벽의 어둠을 품고 있는. 어둡고 밝은 빛이. 얇게 휘날리는 여름 드레스의 질감 사이로 엷게 스며드는 푸르스름한 기운처럼. 어떤 빛이 곧장 내게로 다가와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을 가슴 아프게 감각하게 한다. 이미 지나갔지만 다시 돌아오고 있는 빛. 그 빛이 내게로 온다. (84쪽)
그러니 이 산문집은 산문이 아니다. 시를 향해 가는 과정이고 쓰기의 출발선이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을 껴안은 이들에게 전하는 안부이다. 각자의 상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유한 슬픔, 문신처럼 새겨진 고통의 순간을 아는 시인의 곡진한 위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것. 그 곁에 동반자가 있고 없고와는 무관하게. 기쁨 혹은 슬픔과도 무관하게. 혼자로 오롯이 서서 살아가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영혼의 수준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테고. (90~91쪽)
글쓰기는 개인의 고독과 병증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글쓰기는 한 개인 내부의 가장 허약한 지점에서 떠오른다. 백지 위로. 불쑥. 하나의 신음처럼. 어떤 고통들, 어떤 결핍들, 어떤 충격들, 그 글쓰기가 나아가는 지점은 개인의 더 큰 고독과 병증,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아직 자신에게조차 밝혀지지 않은 심연의 저 밑바닥이다. (145쪽)
아니다. 잘 모르겠다. 시인의 말처럼 눈물처럼 쏟아지는 어떤 음악이다. 쓴다는 게 무엇인지, 쓰기의 궁극적인 목표를 찾아 헤매는 시인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할 수 없다. 내가 옮겨둔 시인의 시를 찾아본다. 시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반했던 시. 이런 시도 있구나, 시인이 이끄는 세계는 뭔가 생격했지만 특별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더듬어본다. 아득하고 아득했던 시절의 나를, 지금까지 시집을 사게 만든 그 시작의 일부에 그녀의 시집도 있다는걸.
더 자세히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다. 더 많은 말로 『새벽과 음악』로 쓰고 싶지만 군더더기만 더할 뿐이라는 걸 안다. 정제된 말로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알 수 없고 감탄할 뿐이다. 나는 쓸 수 없고 읽을 뿐이다. 나는 알고 싶고 더 읽고 싶다. 나는 알고 싶고 그래도 쓰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쓸 수 있다는 게 반갑고 기쁘다. 이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