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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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산다. 내가 원하는 삶과 살아가는 삶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삶의 방향은 더 나은 쪽으로 두었다. 내 삶을 사느라 내 삶 밖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내 삶 밖을 생각하고 알아가는 통로는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타인의 삶을 상상하거나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했다. 때로 나의 그것과 비교했다. 저마다의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 을 읽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소설 속 ‘지형’의 아버지 ‘이섭’의 삶이다. 이섭은 아내 미자와 1남 3녀를 둔 가장이다. 새우 양식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미자와 나이 차가 많을 뿐 평범한 아버지다. 지형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건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 정도다. 나중에야 아버지에게 다른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섭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던 것일까.


소설은 화자 지형을 통해 아버지의 시간을 천천히 들려준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이섭은 사회주의를 선택한다. 이념을 위한 삶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시대는 그를 나쁜 쪽으로 몰았다. 우선은 살기 위해 북으로 갔다. 이섭에게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다시 남을 택했다. 가족이 있으니까.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네. 내가 돌아가려는 곳은 가족이 있는 집일뿐이야.” (205쪽)


이섭 대신 아내가 감옥에 갈 줄은 몰랐고 어린 자식의 생사를 모르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전쟁이 일어나고 이섭은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가슴에 그들을 품고 미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세상은 이섭의 이력을 외면했다. 직장을 구하려 이력서를 낼 때마다 신원 조회에서 탈락했고 조카와 친척에게도 피해가 갔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할 수 없던 아버지의 삶이었다. 자신의 지난 시간을 자세히 말할 수 없었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심연 깊숙이 자리한 슬픔에 대해서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그런 이섭의 깊은 슬픔과 무한의 고통은 아름다운 비유와 묘사로 그려낸다.





단단한 투구와 갑옷까지 거창하게 차려입은 채 온몸을 굽히고 손을 모은 자의 비굴함을 보는 것 같아 잡힌 새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곤 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면서도 언짢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약한 것들의 비루함이라니. 생각해보면 허약한 자신에 대한 이섭의 적의는 제법 뿌리가 깊었다. (45쪽)


가만히 누워 있으면 벽지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저 부실한 시민아파트는 이섭의 인생을 닮아 있었다.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건물에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숨차게 살고 있었다. (255쪽)


제대로 된 가장의 역할은 고사하고 자식을 지키지 못한 회한은 막내딸 지우의 죽음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거기다 그를 올가 맨 ‘사회안전법’까지. 이섭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 몸부림치는 그에게 1975년 8월 15일, 해방 30년이 된 60의 나이에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건 유일한 숨구멍은 아닐는지.


결국 완성하지 못한 아버지의 원고가 이 소설의 시작이다. 작가가 된 지형이 남북작가대회 작가단에 참여해 북한 호텔 객실에 있는 첫 장면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묵직한 슬픔의 근원이었다. 아버지가 끝내 꺼내지 못하고 그리워만 했던 아내와 자식, 지형에게는 두 오빠였던 그들에게 전하는 길고 긴 안부라고 할까. 유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향한 애끓는 애도였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 마침내 하늘은 짙은 남색이 되었다. 지형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초가을 강바람이 손가락 하나하나, 머리카락 한올 한 올을 쓰다듬으며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유령의 시간이 저물었다. (283쪽)


통렬한 아픔을 아름답게 그려 낸 가득한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 은 사느라 지우며 잊고 지낸 아픔과 국가와 사회가 돌봐야 할 지난 시대를 추모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부디 소설 속 1970년대가 아닌 2024년 현재에는 유령으로 존재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서.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몰랐던 삶도 들여다보고 생각할 것이다. 비록 소설을 읽고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작은 시간이겠지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분단과 역사의 폭력에 희생된 개인의 삶을 생각하고 담아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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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4 소설 보다
권희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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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계절이다. 걷다가 살짝 뛰면 경쾌한 리듬이 따라올 것 같은 날들이다. 동네 공원을 도는 가벼운 산책, 조금 긴 시간을 들인 등산도 좋을 것이다. 그런 걷기에 『소설 보다 : 가을 2024』를 곁들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때마침 권희진의 단편은 「걷기의 활용」이다. 걷기란 목적지를 두지 않고 그냥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로 좋다. 소설 속 ‘나’도 다르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시절 걷기는 그에게 가장 큰 일상이자 위로였다.


어쨌거나 한 반년 동안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처음에는 집 주면만 걷다가 나중에는 먼 곳까지 나가보기도 했다. 걷다 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로 시작한 고민은 80세 노인이 된 미래까지 갔다가 결국 다시 오늘 저녁에 뭐 먹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걷기의 활용」, 25쪽)


걷기는 그런 것이다. 같은 곳을 걷다 보면 항상 같은 것들을 본다. 그리고 조금씩 변하는 걸 감지할 수 있다. 어쩌면 관계도 그런 게 아닐까. 권희진의 단편은 ‘나’와 태수 형과의 관계를 걷기에 비유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낸 둘은 일상을 공유한다. 태수 형의 연애와 사소한 농담 같은 대화. 그러다 둘은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매일 걷던 익숙한 길이 걷기가 멈추면 낯선 곳이 되는 것처럼 관계도 다르지 않다. 누구의 잘못인지, 오해인지 알 수 없다. 뒤늦게 듣게 된 소식은 태수 형의 죽음이었다. ‘나’에게 걷기가 평범한 일상이자 중요한 일과였던 것처럼 태수 형이 그런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된다. 소설은 지난 관계를 떠올리며 누군가를 추억하게 만든다. 쓸쓸하지만 혼자 걷는 산책의 풍경과 겹쳐진다.


이미상의 「옮겨붙은 소망」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이상하다고 하면 이상하고 아니 그게 뭐 이상한가 싶은 거다. 화자인 ‘나’는 같은 빌라에 사는 n&n’s의 쇼핑 도우미다. 처음에 나는 이 부분을 n&n’s가 쇼핑몰을 운영하는 것으로 착각해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게 아니라 n&n’s가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나’를 고용한 것이었다. 쇼핑을 도와주면서 n&n’s 부부의 사정을 알게 된다. 아파트를 팔아 빌라로 이사를 오면서 일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얻은 우울증, 남편의 사고사. n&n’s 는 우울과 슬픔이 가득한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지만 소설은 의외로 유머러스하다고 할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어렵고 난해했다.


정기현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속 ‘기은’도 걷는다. 걸으면서 낙서를 발견한다. 흥미로운 건 낙서가 이어지고 업데이트된다는 것이다. 김병철이란 사람을 지목해 욕을 하고 그를 향해 분노한다. 낙서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 인물이 궁금해질 정도다. ‘기은’의 걷기는 교회로 향한다. 평일 교회의 모습은 평화롭고 그곳에서 만난 ‘준영’과 탁구를 치다 점점 가까워진다. 함께 산책을 하고 낙서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기은은 혼자 걷다가 낙서를 발견하면 자신도 모르게 준영을 생각한다. 나중에야 준영이 목사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교회는 모두에게 안식처의 공간이지만 준영에게는 집이다. 준영에게는 어떤 슬픈 마음이 있는 걸까. 가장 재밌고 편하게 읽은 소설이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았다. 어쩌면 그것은 슬픈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기은은 자신이 비로소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된 것에 아늑함을 느끼면서도 슬픈 마음을 가지게 된 덕분에 슬픔 속에 한참을 머물다 자리를 떴다. (140쪽)


때로 읽기는 이해를 동반하지 않고 그냥 읽는 자로 충분할 때가 있다. 핑계 같지만 『소설 보다 : 가을 2024』 가 그랬다. 잘 몰라서 처음 들어선 길을 걷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겠다. 처음 만난 권희진, 장기현은 소설이 그랬고 처음이 아닌 이미상의 소설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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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10-21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에 만보씩, 주 4~5회를 몇달간 걸었는데요. 병원에서 제 몸을 보더니 허리부터 골반, 둔부, 허벅지 연결되는 뼈와 근육이 주저앉고 눌러붙었다면서 걷지 말라네요. 정석 자세의 걷기가 아니면 많이 걷는 거 절대 안좋답니다. 근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걷는 자세가 다 틀렸답니다. 자목련 님도 부디 몸조심 하세요ㅜㅜ

stella.K 2024-10-21 18:08   좋아요 1 | URL
와, 뼈와 근육이 눌러 붙어요? 그러니깐요, 이 표준이라는게 오히려 사람을 잡는다더군요. 전 일주일에 만보라면 걷겠어요. 하지만 하루 만보면 전 아예 뼈와 근육이 주저 앉을 걸요? 😢 물론 많이 걸어도 무리가 없는 사람 부럽긴 하죠. ㅠ

자목련 2024-10-22 11:17   좋아요 1 | URL
뭐든 적당한, 적절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날씨가 쌀쌀합니다. 특별히 감기 조심하세요!
 
앨리스와의 티타임 - 정소연 소설집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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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세계를 생각한다. 이 세계가 전부라고 여겼지만 어느 순간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의문이 생겼다. 그 세계에 대해 더 알고자 애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유일무이하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SF 소설 영향을 받았냐 묻는다면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존재를 상상한다.


정소연의 『앨리스와의 티타임』 은 그런 세계로의 초대다. 그러니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공간, 이웃에 외계인이 살 수도 있는 세상,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경계, 다른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과 인정. 그 모든 것을 흥미로움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정소연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 찾아보니 『앨리스와의 티타임』에는 2015년에 발간된 『옆집의 영희 씨』의 복간이자 그 이후 작품을 수록한 책이다. 14편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표제작 「앨리스와의 티타임」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와 평행선 상에 존재하는 다른 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화자 앨리스는 그런 세계를 방문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 이런 첫 문장은 이상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나는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앨리스 셸던 부인을 만났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11쪽)


어느 세계든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는 생각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앤디 워홀이 없는 세계를 보았다. 피카소가 무명으로 일생을 마치는 세계를 보았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18~19쪽)


화자가 만난 앨리스는 화자의 세계에서 잘 알려진 소설가였다. 놀랍게도 그녀 역시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사람이었다. 아, 소름 돋는 장면이지 않는가.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앨리스가 존재한단 말인가. 소설의 설정이라 해도 나는 이 장면에서 이 단편에서 조금 울컥하고 먹먹해졌다.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만난 앨리스도 다른 세계 여행자였다. 그녀는 다른 세계로 가서 알츠하이머 치료법을 찾아 돌아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일이었다. 화자가 아는 앨리스는 자살을 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사람,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라도 이 단편을 읽는다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나를 마주하는 장면도 말이다.


놀랍고 흥미로운 상상은 「옆집의 영희 씨」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계인과 함께 사는 시대가 배경이다. 언젠가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까. 화자 ‘수정’은 화가자이자 미술 전담 교사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심의 오피스텔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옆집에 외계인이 산다는 이유로 싼값에 이사했다. 소설에서 외계인은 정부의 감시를 받는 존재이자 기이하고 징그러운 모습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외계인을 피하지만 수정은 상관없었다. 자신을 이영희로 소개한 외계인은 수정의 집에 와서 수정의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말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지만 그저 평범한 이웃이라고 할까. 그리고 흔적도 없이 떠났다. 옆집의 영희 씨는 나름 지구에 적응하려고 노렸고 했을지도 모른다. 신문에서는 외계인을 ‘지구의 일상을 경험하러 온 그들’이라 칭한다.


애틋하면서 따뜻하고 현실적인 SF 소설이라고 할까. 그러나 잘못 들어온 세계에서 삭제당할 수도 있다는 설정의 「비거스렁이」는 SF를 빌려 청소년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느낌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없는 존재가 된 지영은 이름을 물으면 36번 홍지영이라고 답한다. 익숙한 일상인데 갑자기 담임 정연이 귀찮을 정도로 자신을 찾는다. 원하지 않는 호출, 상담이 불편하고 정연의 속셈이 궁금하고 화가 난다.


비슷한 삶이 존재하지 않듯이 비슷한 세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겉으론 어떻게 보든 실제로 지영에게 딱 맞는 세계는 하나뿐이었다. 지영에게 상황을 설명해서 해결될 문제라면 훨씬 편하겠지만, 다른 세계나 시공간 불일치나 하는 말을 믿어주기를 바라기도 어려울뿐더러, 자기 세계를 스스로 찾아가기란 불가능했다. 틈을 직접 들여다보고 그 세계에 어울리는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것은 균형자만이 갖는 재능이자 업이었다. (「비거스렁이」, 58~59쪽)


그랬다. 담임 정연은 균형자였다. 잘못된 세계로 들어온 지영이 맞는 세계를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 현실에서 정연 같은 역할을 할 이는 누구일까. 지영이 들어온 잘못된 세계에서 꺼내 그동안 힘들었을 지영을 위로하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이는 존재하는가.


정소연의 소설은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SF다. 처음부터 존재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열리는 계단을 발견하고 그 통로를 통해 나아가겠다는 희망과 의지를 보여주는 「계단」, 인터넷 검열 사회(지금 우리 모습은 아닌가)에서 식물처럼 물과 햇볕으로 자라는 공유기를 발명하고 유포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언니의 의지를 보여주는 「개화」는 선의로 이어지는 행동과 연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정소연의 소설은 김초엽의 소설로 연결된다. 정소연의 소설 『옆집의 영희 씨』의 을 향한 독자들의 뜨거운 복간 요청과 애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처럼 김초엽을 먼저 만난 독자는 이제야 정소연을 만난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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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과 음악 말들의 흐름 10
이제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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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삶이란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거라는 걸 배운다. 누군가 나를 붙잡고 그게 삶이라고 가르쳐 준 기억은 없다. 거대한 죽음 앞에, 개인의 존엄을 파괴하는 폭력 앞에서 저절로 배운다. 이토록 잔인한 가르침이라니. 차곡차곡 쌓아놓은 삶은 한순간 무너져버리고 처음으로 되돌려놓는다. 돌림노래처럼, 이어 부르기처럼 계속 돌고 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생과 사의 순간, 준비한다고 반가울 리 없는 그 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말이 통하지 않는, 나를 아는 다정한 얼굴이 없는 곳에서 사고를 당한 시인의 경험으로 시작하는 글은 내가 기대했던 산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몰고 왔다. 그러나 이 글을 썼다는 건 시인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고 위로했다. 시베리아에서 당한 사고로 그곳의 병실에서 지내면서 마주한 고려인 여인의 목에 새겨진 꽃(체첵)이라는 낱말. 자신의 이름이 꽃이라고 알려준 그녀. 자세히 볼 수 없어 휴대폰으로 찍은 화면으로 볼 수 있었던 모국어의 말. 어쩌면 모두 잊어버리고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순간, 시인 앞에 나타난 모국어는 슬프고 아름다운 말이었다. 그 감동은 내게도 그러했다.


결국 쓴다는 것은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단어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가진 지극히 단순한 낱말 속에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또 다른 소리와 의미를 다시 새롭게 겹쳐 새겨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일상 속의 아주 사소한 구멍. 아주 작은 틈새로. 추락하듯이 나아가면서. 비틀거리면서. 머뭇거리면서. 망설이면서. 주저하면서. 잘못 말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19쪽)


시인의 산문집은 이처럼 그녀가 직접 겪은 사고로 시작해 그것을 기록하며 고통과 상실을 글로 쓰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미용 가위, 쌍둥이 자매,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고통을 글로 쓴다는 건 가능한 것일까. 글로 쓰일 수 있다는 건 고통의 구덩이에서 조금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한의 고통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잠시라도 고통과 분리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전부다. 그건 슬픔도 마찬가지다.


고를 수 있는 낱말이 있는 게 아니다. 설명하고 싶지만 설명할 수 없다. 상실의 횟수는 늘어나고 감당해야 할 슬픔은 차고 넘친다. 시인이 쓰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슬픔과 고통에 관한 것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순수하고 명징한 슬픔, 함부로 쉽게 쓸 수 없고 내뱉을 수 없는 고독과 쓸쓸함이라고 할까. 정확하지 않다.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시인의 산문이니 그래야 마땅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써 내려갔을 문장, 혹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표현은 문장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 장면 속으로 기필코 들어간다. 나는 상상한다. 얇고 가는 빛, 정수리를 지나 심연으로 파고드는 빛. 만질 수 없고 잡을 수 없지만 무엇보다 강렬하다는 걸 느낀다.


여기 어떤 빛이 있다. 어떤 어둠이 있다. 어두운 방안. 이제 막 밝아올 새벽빛을 암시하고 있는. 혹은 언젠가의 새벽의 어둠을 품고 있는. 어둡고 밝은 빛이. 얇게 휘날리는 여름 드레스의 질감 사이로 엷게 스며드는 푸르스름한 기운처럼. 어떤 빛이 곧장 내게로 다가와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을 가슴 아프게 감각하게 한다. 이미 지나갔지만 다시 돌아오고 있는 빛. 그 빛이 내게로 온다. (84쪽)


그러니 이 산문집은 산문이 아니다. 시를 향해 가는 과정이고 쓰기의 출발선이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을 껴안은 이들에게 전하는 안부이다. 각자의 상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유한 슬픔, 문신처럼 새겨진 고통의 순간을 아는 시인의 곡진한 위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것. 그 곁에 동반자가 있고 없고와는 무관하게. 기쁨 혹은 슬픔과도 무관하게. 혼자로 오롯이 서서 살아가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영혼의 수준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테고. (90~91쪽)


글쓰기는 개인의 고독과 병증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글쓰기는 한 개인 내부의 가장 허약한 지점에서 떠오른다. 백지 위로. 불쑥. 하나의 신음처럼. 어떤 고통들, 어떤 결핍들, 어떤 충격들, 그 글쓰기가 나아가는 지점은 개인의 더 큰 고독과 병증,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아직 자신에게조차 밝혀지지 않은 심연의 저 밑바닥이다. (145쪽)


아니다. 잘 모르겠다. 시인의 말처럼 눈물처럼 쏟아지는 어떤 음악이다. 쓴다는 게 무엇인지, 쓰기의 궁극적인 목표를 찾아 헤매는 시인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할 수 없다. 내가 옮겨둔 시인의 시를 찾아본다. 시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반했던 시. 이런 시도 있구나, 시인이 이끄는 세계는 뭔가 생격했지만 특별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더듬어본다. 아득하고 아득했던 시절의 나를, 지금까지 시집을 사게 만든 그 시작의 일부에 그녀의 시집도 있다는걸.


더 자세히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다. 더 많은 말로 『새벽과 음악』로 쓰고 싶지만 군더더기만 더할 뿐이라는 걸 안다. 정제된 말로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알 수 없고 감탄할 뿐이다. 나는 쓸 수 없고 읽을 뿐이다. 나는 알고 싶고 더 읽고 싶다. 나는 알고 싶고 그래도 쓰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쓸 수 있다는 게 반갑고 기쁘다. 이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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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0-1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아요!‘ 를 한번 만 누를 수 있다는게 너무 아쉽네요. 좋아요x100! 자목련님의 ‘알고 싶고 읽고 싶고 쓰고 싶은데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기쁘며 그게 전부‘ 라는 표현이 너무 와 닿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_()_

자목련 2024-10-16 10:58   좋아요 1 | URL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마힐 님 덕분에 환한 기분의 수요일이 열립니다!!
 


어제저녁 8시가 되기 전 노벨문학상을 검색했다. 수상자가 궁금해서였다. 노벨문학상을 기대하고 관심이 많았던 때를 지나왔지만 그래도 누가 받았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속보로 기사가 떴다.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순간 나는 대박!이라고 외쳤다. 혼자였다. 얼마 후 H가 카톡을 보냈다. 한강 작가 소식 들었냐고, 너무 좋다고. 좀 전에 다른 친구가 한강의 수상 소식에 깜짝 놀랐다는 카톡을 전했다.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 문학을 읽고 좋아하는 이가 없다는 게 쓸쓸했다.


한림원의 선정 이유가 기사로 뜨기를 기다렸다. TV 채널을 돌렸다. 늦은 밤에야 뉴스로 접할 수 있었다. “매우 놀랍고 영광스럽다”는 한강은 “아들과 차를 마시며 조용히 축하하고 싶다”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다룬 기사를 읽었다. 온라인 서점의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이참에 『디 에센셜: 한강』을 들여놓을 생각이다.


사색하기 좋은 가을일까, 그런데 사색이 아닌 잡념만 늘어난다.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런 책이 나를 도와주기를 바란다. H를 만났을 때 『일인칭 가난』에 대해 말했었다. 둘 다 읽기 전이었고 얼마 전 H는 이 책을 읽었다고 했다. 나는 이제 읽으려 한다. 작가의 나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작가가 태어났을 때 나는, 뒷말은 생략하겠다.








소설도 읽어야지. 단풍을 연상시키는 표지의 『소설 보다 : 가을 2024』, 조경란의 단편을 읽기 시작한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리고 책장에 있는 한강의 단편집을 다시 읽고 싶다.
























한강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 『흰』, 『채식주의자』를 추천했다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이 좋다. 아무려나 어떤 책이든 무슨 상관일까. 이 기회에 좋아하는 마음을 더하며 한국문학이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면 좋겠다. 책은 쌓이고 감격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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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10-11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민음사 라이브 보고 있다가 진짜 그 소식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어요. 저는 <소년이 온다>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자목련님이 좋아하신다는 소설들도 읽은 것 같은데 아, 기억이 안 나요. 기록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희랍어 시간> 읽어보고 싶어요. 기분좋은 금욜이네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4-10-13 08:08   좋아요 0 | URL
정말 놀라고 기쁜 날들이에요!
<희랍어 시간>, <흰>은 정말 고통을 아름답게 그려낸 시 같아요. 당분간은 한강 덕분에 우쭐할 것 같아요. ㅎㅎ

망고 2024-10-11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너무 기뻐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ㅎㅎㅎ이 기쁨을 저는 가족과 나눴습니다.부모님이 함께 좋아해 주셨어요 이렇게 쓰니 제가 탄 상인줄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10-13 08:10   좋아요 0 | URL
부모님과 함께이 기쁨을~~
방송에서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관련된 소식이 나놀 때마다 집중하고요 ㅎㅎ

coolcat329 2024-10-1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문학 애독자이신 자목련님에겐 어제 한강 작가의 수상이 더욱 큰 기쁨으로 다가왔을 거 같아요.
오늘도 즐겁습니다.

자목련 2024-10-13 08:11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기뻤어요. 이 기회에 천천히 재독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