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이 떨어진다. 속도도 떨어진다. 읽기, 쓰기, 어떤 일을 진행하는 속도. 모든 게 그러하다. 당연하다. 늙고 있으니까. 아니 이 늙음은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속도와 집중력이 있으니까. 시간의 느림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의 속도와 상관없이 제 속도로 뚜벅뚜벅.


노란 은행잎이 가득하다. 가로수의 잎들이 누렇게 빨갛게 변한다. 곧 가을이 사라질 징조다. 입동이 지나면 바로 겨울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옆집은 김장을 하려는지 어제 보니 문 앞에 파와 큰 대야가 가득하다.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구나. 올해 배춧값은 어떤가. 김장을 직접 담그는 건 아니지만 항상 궁금하다.


계절은 계절대로 흐르고 나는 나대로 흐른다. 읽고 싶고 궁금했던 책을 샀다. 소설이다. 예소연의 단편집 『사랑과 결함』, 조해진의 장편 『빛과 멜로디』. 곧 읽겠지. 읽게 되겠지. 이주혜와 위수정의 소설이 궁금한데 위픽 시리즈는 살짝 주저한다. 중고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성급한 마음을 접어두고.







여름 옷을 정리하면서 옷 몇 벌을 버렸다. 내가 좋아했던 티셔츠를 거리낌 없이 버리는 쪽으로 밀었다. 겨울 신발 하나 쓰레기봉투에 넣어 입구를 묶었다. 책도 몇 권 버렸다. 이런 단호함이 필요하다. 책은 더 큰 단호함이 필요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책을 정리하자. 가을이 너무 빨리 가버려서 타이밍을 놓쳤다는 핑계는 대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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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11-0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드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설렘의 상실인 것 같아요. 집나간 설렘을 함께 기다려요.

자목련 2024-11-06 15:08   좋아요 0 | URL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설렘이 알아야 할 텐데요.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조경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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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조경란의 소설을 읽으니 그의 첫 소설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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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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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와 다르다. 당연하다. 달라서 너에게 끌렸다. 달라서 너를 좋아한다. 달라서 너를 모르겠다. 그래도 너를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젠 안다. 너와 나는 다르다는 건 우리 둘 사이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걸. 그냥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곁에서 서로를 지지하며.


천쓰홍의 『67번째 천산갑』 속 ‘그녀’와 ‘그’를 보면서 그런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확인한다. 둘은 어린 시절 침대 매트리스 광고 모델을 했다. 어려운 건 없었다. 침대에서 편하게 잠들면 됐다. 소년과 소녀는 처음부터 아주 잘 잤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잠 친구였다. 편안한 둘의 모습 덕분에 광고는 성공했고 소년과 소녀는 유명세를 치렀다. 모델을 시작으로 소녀는 방송에 자주 등장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트리스 광고 꼬리표가 붙었다. 그것은 소녀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다.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엄마를 향해, 대학 시절 남자친구와 연인에게, 모델 광고 속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남편에게도. 안타깝게도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그녀의 현재도 다르지 않았다. 타이완 거물 정치인의 아내가 되었고 장성한 자식도 두었지만 불면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는 타이완이 아닌 파리의 비좁고 남루한 아파트에서 지낸다. 연인 J를 떠난 보낸 슬픔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이어갈 뿐이다. 도대체 그에겐 어떤 시간이 있었던 것일까. 유년 시절 그토록 친밀했던 그와 그녀는 서로의 삶을 모른 채 중년이 되어 마주하게 된다. 과거 함께 촬영한 영화 때문이다. 어린 시절 천산갑과 함께 찍은 영화로 현재 4K로 복원되어 낭트에서 열리는 회고전에 초정 된 것이다.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그 천산갑은 아주 예민한 동물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돈을 목적으로 천산갑 양식을 시작하지만 천산갑은 소년에게만 자신을 내준다. 마치 소년이 동족인 것처럼. 어쩌면 소년은 천산갑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천산갑과 함께 잠드는 신비로운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아이라면 나를 잠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 파리에 도착한 이후 그의 곁에서 그녀는 푹 잘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앞에선 뭐든 말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을 지나 학창 시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곁에 있었던 그에게 그녀는 수다쟁이가 된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와 그녀의 삶을 들려준다. 그가 사랑한 J에 대해서, J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녀가 잃은 어린 딸 ‘팡싼’을 향한 애틋함과 소식이 닿지 않는 아들에 대해서. 삭제된 줄 알았던 기억의 장면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팡싼의 마지막 모습, 어린 누나를 보러 온 아들, 자신에게 돈만 요구하다 쓰레기 집에서 고독사한 엄마. 그를 찾았던 시간. 그녀의 모든 걸 아는 그에게 토해내고 싶었던 순간. 그도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녀가 찾는 아들의 소식이다. 파리에서 만난 그녀의 아들을 만났다는 것, 아들과 사랑을 나눴다는 것. 그녀의 남편은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병이라 치부하고 고치려 했지만 그녀는 아들과 함께 달아난다. 그 순간 그녀는 그를 떠올렸을까?


그의 파리 아파트에서 아들의 안경을 발견했지만 그녀는 묻지 않는다. 그의 곁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든다. 파리를 산책하고 천산갑을 닮은 미끄럼틀에서 비를 본다. 그가 만나는 이상한 사람을 함께 만난다. 요가하는 남자, 헤어숍 원장, 숲에서 맨몸으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 그 모두가 그가 J를 통해 맺은 관계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아들도 함께 했을 거라 생각한다. 서로가 닮은 사람들. 이제는 그녀도 그들을 닮아간다. 그 모두가 67번째 천산갑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영화 같기도 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여행 같기도 하니까.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결말을 갈구할까. 사람들은 화해나 파국, 여행의 종점, 도로의 끝, 우기의 끝, 서설의 강림을 기대했다. 지금부터는 즐거움만 있거나 영원히 슬플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인생에선 원래 선명한 마침표가 없다. 종종 작별인사를 건넬 기회를 놓치고, 눈을 뜨건 감건 영원히 못 보는 경우도 있다. (133쪽)


그와 그녀는 낭트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아니 도착지가 낭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미 낭트여도 어디든 갈 수 있다. 그와의 작별에 미소를 보낼 수 있었다. 그는 그의 길을, 그녀는 그녀의 길을 갈 것이다. 어디 있든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를 지지한다는 걸 안다. 파리와 타이완을 배경으로 만든 한 편의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를 본 기분이다. 숨은 천산갑을 찾는 느낌이랄까.


너와 나는 다르다. 너를 알아가는 중이며 조금씩 닮아간다. 서서히 스며든다. 그러다 달라서 부딪히고 달라서 반했지만 끝내 이별한다. 너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그걸 배운다. 다르다는 건 이처럼 굉장하다. 다른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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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0-30 1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산갑이 동물이군요.
저는 왜 산 이름이 연상되었을까요, ㅎㅎ
자목련님!
글 너무 좋고 아름다워요.
처음과 마지막 구절, 마음에 담아 갑니다^^

자목련 2024-10-31 13:40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 알았어요.
아름답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힐 2024-10-30 15: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와 너는 다르다. 그러나 나와 너는 닮아 간다. 그래서 나와 너는 완성을 이룬다.
아, 자목련님 글 속에 조화를 보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자목련 2024-10-31 13:41   좋아요 2 | URL
마힐님, 감사합니다. 묘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그런 소설이었어요.
 
시티 뷰 -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우신영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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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높은 꼭대기를 좋아하는 건 아래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 아래에 내가 두고 온 비참한 것들과 이별하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는 일도 지우고 싶은 과거에서 달아나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닐까. 우신영의 『시티 뷰』는 그런 욕망이 쌓아 올린 곳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헛헛한 마음이 느껴진다. 욕망을 따라 높이 올라갔는에 왜 허무할까. 추락할까 두려운 마음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영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살고 싶은 도시, 그게 이 도시의 다른 이름이다. 바다를 메워 만든 이 도시에는 없는 것이 많다. (9쪽)


신도시를 소개하는 소설의 첫 문장은 송도 국제도시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나와는 상관없지만 방송에 자주 등장해 익숙한 송도의 풍경이 겹쳐졌다. 소설은 뭐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신도시 삶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준다. 어디서든 삶은 마찬가지라고 말하듯. 재력과 명예를 두루 갖춘 부모와 의사 남편, 자신의 필라테스 학원을 운영하는 수미도 그랬다. 모두가 부러워할 삶이었지만 그만큼 노력했다. 자기 관리를 넘은 다이어트와 운동은 그녀를 젊음이 아닌 늙음으로 인도했다. 그래서 남편이 아닌 어린 주니와의 만남을 끊을 수 없었다. 수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남편, 아이는 필요한 액세서리 같은 것이었다.


수미는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떤 쾌락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 어차피 자기 팔 자기가 흔들며 사는 거지. 이런 내가 그에게 피해를 주나. 아니, 이익을 주지. 사소한 부도덕은 상냥한 부인이 되게 해주니까. 그렇지 않은가. 모두에겐 풀 곳이 필요하다. 풀고 와서 우아하게 처신할 곳도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두 개의 장소와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하다. (42쪽)


그에 비해 가난한 의대생이었던 남편 석진은 덕적도에서 칼국숫집을 하는 아버지와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다. 수미와 결혼해 곧 개원의가 된다. 석진의 욕망은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었다. 성공한 삶, 석진 역시 높은 곳을 갈망했다. 등산을 하고 가짜 암벽을 타고 클라이밍 취미의 내면엔 꼭대기에 오르겠다는 욕망이 있었다. 방식만 달랐을 뿐 수미와 석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미가 젊은 육체의 헬스 트레이너와 관계를 맺듯 석진도 면도날을 먹는 조선족 노동자 유화에게 끌렸다. 유화에게 석진은 저 밑 맨바닥에 자리 잡은 어머니를 보았다. 몸이 전부였던, 몸으로 모든 걸 받아내고 감당해야 하는 삶. 그런 몸에 내시경을 넣어 돈을 버는 석진.


칼을 먹는 유화가 섭식장애일까, 남의 시선을 먹는 수미가 섭식장애일까. (229쪽)


수미와 석진이 신도시의 중심이라면 주니와 유화는 변두리에 속한다. 수미와 석진에게 몸은 치장하고 관리하는 것이지만 주니와 유화에게는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 소모하는 것이었다. 높은 빌딩을 닦다 추락한 유화의 남자친구. 그들의 몸은 아름다움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노동을 위한 몸이었다. 석진에게 화장한 얼굴만 보였던 수미가 주니에게 맨 얼굴을 보이고 수미의 취향에 맞추던 석진이 유화 앞에서는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다. 작가는 서로 대치되는 육체와 욕망을 적절하게 치밀하게 다뤄 잘 짜인 소설로 완성시켰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하찮게 버려지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하나의 꼭대기 아래 차곡차곡 깔린 수많은 아래. 하나를 위해 나머지 전부는 사라지는 세상. 거대한 도시의 실체를 모른 채 그곳을 향한 욕망은 타오르는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 같은 게 아닐는지. 그런 의미에서 유화의 질문은 이 소설의 상징처럼 들린다.


“이 도시는 불길해요. 바다를 메꿔서 육지로 만들었다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죽었을까요?” (204쪽)


인간은 욕망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 욕망은 만족이 있을까. 높은 꼭대기에서 위태롭게 흔들릴 욕망의 끝은 모른 채 인간은 욕망의 끝을 향해 오른다. 추락할 것을 안다면 적절한 높이에서 멈춰야 마땅하다. 어리석은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도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오른다.


소설을 한 마디로 요약하지만 정말 재밌는 소설이다. 술술 읽힌다. 잡은 순간 끝까지 달리게 만든다. 그러나 재미와 만족은 별개다.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본 것 같은 기분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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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먹는다. 커피를 곁에 둔다. 커피도 좋겠지만 Tea를 겯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차를 잘 모르지만 이런 책은 괜히 끌린다. 사실,내가 좋아하는 찻 잔이 등장할 거란 예감 때문이다. 『영국의 여왕과 공주』란 제목을 보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아한 드레스와 왕관이 따라올지도 모른다. 그렇다. 표지부터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정작 우아하지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태생부터 운명이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이 책 저자가 독특하다. Cha Tea 홍차 교실이라니 영국 냄새가 물씬 풍긴다. 2002년 개교한 일본의 Cha Tea 홍차 교실에서 집필했다. 짐작할 수 있듯 일본에 영국의 차 문화를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차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여왕과 공주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영국의 여왕과 공주』에서 만날 수 있는 여왕과 공주는 모두 22명이다. 시간순으로 차례로 왕비, 여왕, 공주를 소개한다. 우선 제일 먼저 만나는 왕비는 브라간사의 캐서린(1638~1705)이다. 캐서린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영국 왕실에 차 문화를 정착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의 둘째 딸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 포르투갈과 영국의 동맹을 위해 1662년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정략결혼인 셈이다. 결혼 전부터 차를 즐겨 마신 그녀가 가져온 차가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녀는 침실이나 침실 옆의 사적인 공간에서 차 모임을 열였다. 자극이 강한 차를 마시고 위가 상하지 않도록 차를 마시기 전에 버터를 바른 빵이나 차에 설탕 또는 사프란을 넣어 마시는 방식이 유행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에서 주문한 오렌지 마멀레이드가 등장하기도 했다고. 놀라운 건 모임에 남편의 정부도 참석했다고 한다. 왕비와 왕의 정부가 나란히 차를 마시는 분위기는 어땠을까. 속마음은 감추고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한 나라의 왕비로 사는 일은 일반 국민을 알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왕위를 이을 자식이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 왕위를 놓고 서로 쟁탈을 벌이는 형제와 친척들, 그러니 맨 처음 영국의 여왕이 된 앤(1665~1714)은 어땠을까. 앤 여왕은 ‘로열 터치’로 기억될 것 같다. 왕의 손길이 병자에게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로열 터치’를 윌리엄 3세가 폐지했으나 앤이 부활시켰으니 국민의 사랑은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앤 여왕 시대에 은으로 만든 찻주전자가 보급되었다고 한다. 앤 여왕은 서양 배를 모티브로 한 로코코 양식의 찻주전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가 있었다. 앤이 가장 좋아하는 게 ‘서양 배 시나몬 콩포트’였다고 한다. 모두의 추앙을 받는 여왕이었으니 단 음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앤 여왕이었다.


그렇다면 ‘애프터눈 티’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어머니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된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1837년 즉위 후 가신에게 처음 내린 명령이 ‘차와 타임스지’를 가져다 달라고 했으니 그녀의 차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가 알 수 있다. 하지만 ‘애프터눈 티는 빅토리아 여왕이 아닌 여왕의 침실 여관이었던 공작부인 마리아 러셀을 만나러 오는 손님이 많아서 시작되었다고.


공작 부인은 자신을 만나러 오는 모두를 만찬에 초대하기 어려워 만찬 전 티타임에 초대한 게 관습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5시~ 5시 반사이에 공작부인이 참석하는 차 모임이 있다는 기록, 이것이 ‘애프터눈 티’의 기원이라고. 이러한 배경도 영국과 청나라의 아편전쟁(1840)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영국에 할양된 홍콩에서도 ‘애프터눈 티’가 유행했다고 한다.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엘리자베스 2세 (1926~2022)와 불운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1961~1997)의 생애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 초상화, 삽화 같은 풍부한 자료는 책을 읽는 재미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국의 왕비와 공주 22명의 생애를 만날 수 있는 점도 흥미롭지만 시대별로 명예혁명(1688), 스페인 계승 전쟁(1701~1714)과 같은 영국을 둘러싼 유럽 역사의 흐름도 짚어볼 수 있는 점도 유익하다. 개인적으로 예쁜 찻잔과 도자기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좋아하는 잔을 꺼내 차를 마실 때 한 번쯤은 영국의 캐서린 왕비나 공작부인 마리아 러셀이 생각날 것 같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224쪽)


차를 음미하는 즐거움은 음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런 책을 찾는다. 일종의 요리책이자 중세 유럽의 문화와 일상도 함께 만날 수 있는 『중세 유럽의 레시피』는 그런 의미로 흥미로운 내용을 담은 책이다. 우아한 귀족의 식사, 새하얀 보석의 달콤한 유혹, 대대로 누리는 과실의 축복, 신과 함께 살고, 신과 함께 먹다(중세 전기의 수도원 요리), 기사가 들여온 식문화(중세 아랍 요리), 왕족의 대관식 메뉴까지 흥미롭다. 관심이 있는 분야의 레시피를 선택해서 즐길 수 있다. 거기다 각종 향신료와 허브의 쓰임새와 재료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다.


도전해 보고 싶은 요리는 이런 것이다. ‘렌즈콩과 닭고기 스튜’로 렌즈콩이 구약 성서에도 등장했다니, 정말 오래된 식자재로 사용된 것 같다. 보관이 용이하고 영양도 좋아서 수도원의 식사 메뉴에도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점점 추워지는 요즘에 아주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다. 닭다리 살을 굽고 닭 육수를 부어 30~40분 약불에 끓이고 다른 냄비에는 렌즈콩과 육수를 끓이고 순무가 들어가는 게 포인트다. 마트나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는 재료라서 누구나 한 번쯤 해 볼 수 있는 요리가 아닐까 싶다.




렌즈콩과 닭고기 스튜




중세 시대의 식재료가 신분에 따라 어떻게 나눠지는지 알려주는데 빵의 경우는 질 좋은 밀가루로 만드는 최상급 흰 빵은 귀족과 왕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잡곡 등이 들어 있는 빵은 등급이 낮은 것으로 시민 계급이 많이 먹었고 마지막으로 농민들은 그보다 더 질이 낮은 밀가루로 구운 빵을 먹었다니 좀 씁쓸하다.


맛있는 빵, 부드러운 빵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원파운드 케이크’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파운드케이크는 버터, 밀가루, 달걀, 설탕을 각각 1파운드씩 사용해 만든 케이크에서 유래되었다. 미니 오븐을 구비한 1인 세대에서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케이크가 아닐까.




원파운드케이크




책으로 중세 유럽의 달콤한 맛과 삶을 만날 수 있다. 영화 속 판타지나 우아한 중세를 요리로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요리를 좋아하고 새로운 요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원한다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이전과 다르게 ‘애프터눈 티’가 다가올 것 같다. 알고 나면 마음이 달라진다. 책의 역할이라고 할까. 아무튼 커피를 제일 좋아하지만 깊은 잠을 위해 차를 마시기도 하는데 『영국의 여왕과 공주』를 통해 만난 Tea와 찻잔이 생각알 것 같다. 거기다 그들의 안타까운 삶도.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이 아니라 불화한 왕실, 국익을 위해 맺어진 혼사, 서로가 서로를 증오한 왕과 왕비의 모습은 시대를 지나 현재의 영국 왕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역사가 기록하고 그 기록을 읽는 우리가 느끼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다. 어쩌면 왕실을 둘러싼 스캔들, 끊임없는 가십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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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10-2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차와 마들렌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자목련 2024-10-29 09:11   좋아요 0 | URL
요즘 같은 날씨엔 따뜻한 차와 달달한 간식이~~

망고 2024-10-27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렌즈콩과 닭고기 스튜 메모! ㅋㅋㅋㅋ

자목련 2024-10-29 09:11   좋아요 0 | URL
망고 님의 요리 기대할까요? ㅎㅎ

페넬로페 2024-10-2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사람들은 차에 엄청난 열정이 있더라고요. 가끔씩 차 마시면 좋은데 커피에 기계적으로 손이 가요^^

자목련 2024-10-29 09:1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일어나면서 커피 마실 준비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