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은 무엇일까. 눈을 감아봐야 알까. 아니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일까. 어쩌면 마음의 평정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제목만 보고 잠언 비슷한 글이 아닐까 짐작했다. 제목 때문에 에밀 시오랑이 생각나기도 했다. 생에 마지막 2년의 기록을 담은 에세이로 모두 9편의 짧은 글을 만날 수 있다. 아내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1940년~1941년에 쓴 글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신기하게도 그가 살아온 시대는 80년 전인데 마치 지금의 우리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사는 건 결국 다 같은 것일까.


그는 말한다. 절망과 비탄이 가득한 삶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실패와 좌절 대신 웃음과 사랑을 바라보며 그래야 한다고. 그래서 이 짧은 9편의 이야기는 아프면서도 위로받는 기분이고 냉철하면서도 뜨겁다. 맨 처음 만나는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은 물질만능주의를 살면서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누가 봐도 초라한 행색의 청년 ‘안톤’은 가진 게 없다. 그러나 정작 안톤은 걱정이 없다. 자신이 가진 기술을 타인에게 나누고 돈이 아닌 필요한 것들로 받는다. 아름다운 순환이라고 할까.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면 그만이다. 그런 마음은 최악의 인플레 사태에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나에게 돈이란」으로 연결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돌아보고 깨닫게 한다.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돈의 실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는 비록 돈에 실패했지만, 삶의 용기와 기쁨을 잃지는 않았다. (「나에게 돈이란」, 42쪽)


3년은 편히 살 수 있는 거액의 돈뭉치를 내고 빈 오페라 티켓을 샀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는 슈테판 츠바이크. 석탄 부족으로 난방이 되지 않아 코트를 입고 따닥따닥 붙어 앉은 관람객. 음악가의 훌륭한 연주와 가수들의 아름다운 노래가 전하는 감동. 돈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알려준다. 돈을 좇는 삶이 아니라 돈에서 자유롭고 돈이 아닌 삶의 가치를 생각하라고.


나는 돈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나에게 돈이란」, 44쪽)


존경하는 로댕의 작업실에 방문하고 그의 집에서 본 로댕의 놀라운 작업 열정에 반한 「영원한 교훈」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프랑스 혁명사를 읽다가 발견한 사소한 일화에 대한 것이다. 루이 16세가 콩코르드광장에서 처형되는 극적인 날, 광장과 지척인 센강에서 수많은 낚시꾼이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낚시를 하고 있는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의 통찰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만드는 역사. 삶이란 무엇이며 역사란 무엇인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역사를 진정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모든 역사책이 센강의 낚시꾼에 관한 그날의 사소한 일화를 빼놓지 않고 다루기를 바란다. 우리는 현재 매일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센강의 낚시꾼」, 53쪽)


이 시대의 대다수는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오직 자신의 삶을 산다. (「센강의 낚시꾼」, 54쪽)


슈테판 츠바이크의 완벽한 문장으로 빛어낸 훌륭한 이야기는 짧고 강렬한 글에 담긴 심오한 울림은 오래 곁에 머문다. 그래서 한번에서 끝나지 않는다. 분량이 짧기도 했지만 좋아서 두번 읽게 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읽으면서 히라오 마시히로의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가 생각났다. 닮은 듯한 제목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건 다 같지만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니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범과 도덕이 필요하다.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를 혼란에 빠진다. 정의가 사라진 사회, 무질서한 사회를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학습했다고 할까. 그럼에도 우리 삶에서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나’의 필요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윤리학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도덕과 윤리는 공기와도 같습니다. 눈에도 안 보이고, 있는 것이 당연하며, 딱히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공기가 없으면 우린 바로 죽을 것입니다. 도덕이 없으면 바로 죽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 내가 인간으로서 온전히 살아가고 있다면 이미 우리 주변에는 도덕, 윤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 32~32쪽)


윤리는 무엇이며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막연하게 다가오는 질문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개인의 윤리는 자유, 사회의 윤리는 정의, 친밀한 관계의 윤리는 사랑이라는 기준으로 분류하여 강의한다. 윤리의 기본 원리를 12개이며 3개의 영역에서 세분화하여 4개로 설명한다. 정의와 윤리철학에 대해 이론적 내용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실험, 소설, 게임, 정치에서 어떻게 윤리가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이고 강렬한 사고실험은 이렇다. ‘버튼을 누르면 1억 엔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선가 모르는 사람이 죽는다면 버튼을 누르겠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에는 단순하게 1억 엔인데 누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모른척할 수 있을까. 마음이 복잡해진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하면 다른 누군가가 버튼을 누르고 그 누군가의 죽음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나는 모두 개인이고 내 위치에서만 생각하면 끝나는 게임처럼 보이지만 그건 결국 나에게도 남에게도 좋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윤리이고 정의가 아닐까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도 할 수 있고 상대가 해도 되는 일은 나도 해도 된다는 것, 바로 상호성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혼자가 아닌 사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관계는 무척 중요하다. 나 개인으로 존재하면 그만이라 여길 수 있지만 개인고 개인이 연결된 사회에서 개인은 나이면서 동시에 상대이고 결국은 우리라는 사실이다.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중요한 시작이라는 것이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명제다.


자유라는 것은 나에게는 권리가, 남에게는 의무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모두 해당하니 남에게는 권리가 나에게는 의무가 있다는 뜻도 됩니다. 나의 권리는 타인의 의무와 세트입니다. 의무를 지키면 나의 자유는 제한되지만, 그것은 나의 권리를 즉, 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124쪽)


80년 전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에서 전하는 긍정과 사랑이 정의와 윤리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디에 가치를 두어야 할까 하는 문제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모인 사회의 윤리는 그럴 수 없다. 사회 윤리는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어야 하니까. 저자는 그것을 균형을 맞추는 일이라 말한다. 개인, 사회, 친밀한 관계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 어렵지만 우리가 찾아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이다.


정의 자체가 윤리의 일부이며 사랑과 자유도 윤리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원했던 윤리는 이 모든 것들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들 중에 하나가 튀어나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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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12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대의 사람들은 역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삶을 산다‘ 구절에 공감이 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 궁금해 졌습니다. 자목련님의 좋은 글 감사 합니다. _()_

자목련 2024-11-13 16:07   좋아요 1 | URL
좋은 책이었어요. 현재의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게 신기했고요.

달자 2024-11-13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센느강 낚시꾼의 일화는 특히 많은 울림을 남기네요. 좋은 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4-11-13 16:09   좋아요 0 | URL
다른 이야기도 좋았지만 말씀처럼 그 일화는 여운이 오래 남았어요.
 


집중력이 떨어진다. 속도도 떨어진다. 읽기, 쓰기, 어떤 일을 진행하는 속도. 모든 게 그러하다. 당연하다. 늙고 있으니까. 아니 이 늙음은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속도와 집중력이 있으니까. 시간의 느림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의 속도와 상관없이 제 속도로 뚜벅뚜벅.


노란 은행잎이 가득하다. 가로수의 잎들이 누렇게 빨갛게 변한다. 곧 가을이 사라질 징조다. 입동이 지나면 바로 겨울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옆집은 김장을 하려는지 어제 보니 문 앞에 파와 큰 대야가 가득하다.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구나. 올해 배춧값은 어떤가. 김장을 직접 담그는 건 아니지만 항상 궁금하다.


계절은 계절대로 흐르고 나는 나대로 흐른다. 읽고 싶고 궁금했던 책을 샀다. 소설이다. 예소연의 단편집 『사랑과 결함』, 조해진의 장편 『빛과 멜로디』. 곧 읽겠지. 읽게 되겠지. 이주혜와 위수정의 소설이 궁금한데 위픽 시리즈는 살짝 주저한다. 중고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성급한 마음을 접어두고.







여름 옷을 정리하면서 옷 몇 벌을 버렸다. 내가 좋아했던 티셔츠를 거리낌 없이 버리는 쪽으로 밀었다. 겨울 신발 하나 쓰레기봉투에 넣어 입구를 묶었다. 책도 몇 권 버렸다. 이런 단호함이 필요하다. 책은 더 큰 단호함이 필요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책을 정리하자. 가을이 너무 빨리 가버려서 타이밍을 놓쳤다는 핑계는 대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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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11-0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드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설렘의 상실인 것 같아요. 집나간 설렘을 함께 기다려요.

자목련 2024-11-06 15:08   좋아요 0 | URL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설렘이 알아야 할 텐데요.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조경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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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조경란의 소설을 읽으니 그의 첫 소설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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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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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와 다르다. 당연하다. 달라서 너에게 끌렸다. 달라서 너를 좋아한다. 달라서 너를 모르겠다. 그래도 너를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젠 안다. 너와 나는 다르다는 건 우리 둘 사이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걸. 그냥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곁에서 서로를 지지하며.


천쓰홍의 『67번째 천산갑』 속 ‘그녀’와 ‘그’를 보면서 그런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확인한다. 둘은 어린 시절 침대 매트리스 광고 모델을 했다. 어려운 건 없었다. 침대에서 편하게 잠들면 됐다. 소년과 소녀는 처음부터 아주 잘 잤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잠 친구였다. 편안한 둘의 모습 덕분에 광고는 성공했고 소년과 소녀는 유명세를 치렀다. 모델을 시작으로 소녀는 방송에 자주 등장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트리스 광고 꼬리표가 붙었다. 그것은 소녀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다.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엄마를 향해, 대학 시절 남자친구와 연인에게, 모델 광고 속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남편에게도. 안타깝게도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그녀의 현재도 다르지 않았다. 타이완 거물 정치인의 아내가 되었고 장성한 자식도 두었지만 불면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는 타이완이 아닌 파리의 비좁고 남루한 아파트에서 지낸다. 연인 J를 떠난 보낸 슬픔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이어갈 뿐이다. 도대체 그에겐 어떤 시간이 있었던 것일까. 유년 시절 그토록 친밀했던 그와 그녀는 서로의 삶을 모른 채 중년이 되어 마주하게 된다. 과거 함께 촬영한 영화 때문이다. 어린 시절 천산갑과 함께 찍은 영화로 현재 4K로 복원되어 낭트에서 열리는 회고전에 초정 된 것이다.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그 천산갑은 아주 예민한 동물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돈을 목적으로 천산갑 양식을 시작하지만 천산갑은 소년에게만 자신을 내준다. 마치 소년이 동족인 것처럼. 어쩌면 소년은 천산갑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천산갑과 함께 잠드는 신비로운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아이라면 나를 잠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 파리에 도착한 이후 그의 곁에서 그녀는 푹 잘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앞에선 뭐든 말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을 지나 학창 시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곁에 있었던 그에게 그녀는 수다쟁이가 된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와 그녀의 삶을 들려준다. 그가 사랑한 J에 대해서, J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녀가 잃은 어린 딸 ‘팡싼’을 향한 애틋함과 소식이 닿지 않는 아들에 대해서. 삭제된 줄 알았던 기억의 장면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팡싼의 마지막 모습, 어린 누나를 보러 온 아들, 자신에게 돈만 요구하다 쓰레기 집에서 고독사한 엄마. 그를 찾았던 시간. 그녀의 모든 걸 아는 그에게 토해내고 싶었던 순간. 그도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녀가 찾는 아들의 소식이다. 파리에서 만난 그녀의 아들을 만났다는 것, 아들과 사랑을 나눴다는 것. 그녀의 남편은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병이라 치부하고 고치려 했지만 그녀는 아들과 함께 달아난다. 그 순간 그녀는 그를 떠올렸을까?


그의 파리 아파트에서 아들의 안경을 발견했지만 그녀는 묻지 않는다. 그의 곁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든다. 파리를 산책하고 천산갑을 닮은 미끄럼틀에서 비를 본다. 그가 만나는 이상한 사람을 함께 만난다. 요가하는 남자, 헤어숍 원장, 숲에서 맨몸으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 그 모두가 그가 J를 통해 맺은 관계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아들도 함께 했을 거라 생각한다. 서로가 닮은 사람들. 이제는 그녀도 그들을 닮아간다. 그 모두가 67번째 천산갑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영화 같기도 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여행 같기도 하니까.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결말을 갈구할까. 사람들은 화해나 파국, 여행의 종점, 도로의 끝, 우기의 끝, 서설의 강림을 기대했다. 지금부터는 즐거움만 있거나 영원히 슬플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인생에선 원래 선명한 마침표가 없다. 종종 작별인사를 건넬 기회를 놓치고, 눈을 뜨건 감건 영원히 못 보는 경우도 있다. (133쪽)


그와 그녀는 낭트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아니 도착지가 낭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미 낭트여도 어디든 갈 수 있다. 그와의 작별에 미소를 보낼 수 있었다. 그는 그의 길을, 그녀는 그녀의 길을 갈 것이다. 어디 있든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를 지지한다는 걸 안다. 파리와 타이완을 배경으로 만든 한 편의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를 본 기분이다. 숨은 천산갑을 찾는 느낌이랄까.


너와 나는 다르다. 너를 알아가는 중이며 조금씩 닮아간다. 서서히 스며든다. 그러다 달라서 부딪히고 달라서 반했지만 끝내 이별한다. 너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그걸 배운다. 다르다는 건 이처럼 굉장하다. 다른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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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0-30 1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산갑이 동물이군요.
저는 왜 산 이름이 연상되었을까요, ㅎㅎ
자목련님!
글 너무 좋고 아름다워요.
처음과 마지막 구절, 마음에 담아 갑니다^^

자목련 2024-10-31 13:40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 알았어요.
아름답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힐 2024-10-30 15: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와 너는 다르다. 그러나 나와 너는 닮아 간다. 그래서 나와 너는 완성을 이룬다.
아, 자목련님 글 속에 조화를 보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자목련 2024-10-31 13:41   좋아요 2 | URL
마힐님, 감사합니다. 묘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그런 소설이었어요.
 
시티 뷰 -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우신영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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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높은 꼭대기를 좋아하는 건 아래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 아래에 내가 두고 온 비참한 것들과 이별하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는 일도 지우고 싶은 과거에서 달아나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닐까. 우신영의 『시티 뷰』는 그런 욕망이 쌓아 올린 곳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헛헛한 마음이 느껴진다. 욕망을 따라 높이 올라갔는에 왜 허무할까. 추락할까 두려운 마음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영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살고 싶은 도시, 그게 이 도시의 다른 이름이다. 바다를 메워 만든 이 도시에는 없는 것이 많다. (9쪽)


신도시를 소개하는 소설의 첫 문장은 송도 국제도시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나와는 상관없지만 방송에 자주 등장해 익숙한 송도의 풍경이 겹쳐졌다. 소설은 뭐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신도시 삶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준다. 어디서든 삶은 마찬가지라고 말하듯. 재력과 명예를 두루 갖춘 부모와 의사 남편, 자신의 필라테스 학원을 운영하는 수미도 그랬다. 모두가 부러워할 삶이었지만 그만큼 노력했다. 자기 관리를 넘은 다이어트와 운동은 그녀를 젊음이 아닌 늙음으로 인도했다. 그래서 남편이 아닌 어린 주니와의 만남을 끊을 수 없었다. 수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남편, 아이는 필요한 액세서리 같은 것이었다.


수미는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떤 쾌락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 어차피 자기 팔 자기가 흔들며 사는 거지. 이런 내가 그에게 피해를 주나. 아니, 이익을 주지. 사소한 부도덕은 상냥한 부인이 되게 해주니까. 그렇지 않은가. 모두에겐 풀 곳이 필요하다. 풀고 와서 우아하게 처신할 곳도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두 개의 장소와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하다. (42쪽)


그에 비해 가난한 의대생이었던 남편 석진은 덕적도에서 칼국숫집을 하는 아버지와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다. 수미와 결혼해 곧 개원의가 된다. 석진의 욕망은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었다. 성공한 삶, 석진 역시 높은 곳을 갈망했다. 등산을 하고 가짜 암벽을 타고 클라이밍 취미의 내면엔 꼭대기에 오르겠다는 욕망이 있었다. 방식만 달랐을 뿐 수미와 석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미가 젊은 육체의 헬스 트레이너와 관계를 맺듯 석진도 면도날을 먹는 조선족 노동자 유화에게 끌렸다. 유화에게 석진은 저 밑 맨바닥에 자리 잡은 어머니를 보았다. 몸이 전부였던, 몸으로 모든 걸 받아내고 감당해야 하는 삶. 그런 몸에 내시경을 넣어 돈을 버는 석진.


칼을 먹는 유화가 섭식장애일까, 남의 시선을 먹는 수미가 섭식장애일까. (229쪽)


수미와 석진이 신도시의 중심이라면 주니와 유화는 변두리에 속한다. 수미와 석진에게 몸은 치장하고 관리하는 것이지만 주니와 유화에게는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 소모하는 것이었다. 높은 빌딩을 닦다 추락한 유화의 남자친구. 그들의 몸은 아름다움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노동을 위한 몸이었다. 석진에게 화장한 얼굴만 보였던 수미가 주니에게 맨 얼굴을 보이고 수미의 취향에 맞추던 석진이 유화 앞에서는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다. 작가는 서로 대치되는 육체와 욕망을 적절하게 치밀하게 다뤄 잘 짜인 소설로 완성시켰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하찮게 버려지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하나의 꼭대기 아래 차곡차곡 깔린 수많은 아래. 하나를 위해 나머지 전부는 사라지는 세상. 거대한 도시의 실체를 모른 채 그곳을 향한 욕망은 타오르는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 같은 게 아닐는지. 그런 의미에서 유화의 질문은 이 소설의 상징처럼 들린다.


“이 도시는 불길해요. 바다를 메꿔서 육지로 만들었다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죽었을까요?” (204쪽)


인간은 욕망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 욕망은 만족이 있을까. 높은 꼭대기에서 위태롭게 흔들릴 욕망의 끝은 모른 채 인간은 욕망의 끝을 향해 오른다. 추락할 것을 안다면 적절한 높이에서 멈춰야 마땅하다. 어리석은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도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오른다.


소설을 한 마디로 요약하지만 정말 재밌는 소설이다. 술술 읽힌다. 잡은 순간 끝까지 달리게 만든다. 그러나 재미와 만족은 별개다.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본 것 같은 기분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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