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의 사태 - 김도언 소설집
김도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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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소설가와 소설의 주인공을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가 분명한데 말이다. 소설가와 주인공의 동성이거나 같은 연령대면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소설을 통해 소설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뿐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 역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해서, 자전소설이나 산문집을 통해 일상을 공개하는 것이리라.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신경숙의 『외딴방』이 그 예가 아닐까 한다. 작가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랑의 사태』를 읽으면서 작가 김도언이 아니라 ‘그 남자 김도언’을 읽는 듯했다. 이건『불안의 황홀』의 여파인지 모른다.  

 『불안의 황홀』에서 만난 김도언은 밝음 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가볍지 않고 무거운, 투명하기 보다는 불투명에 속해있었다. 해서, 그의 소설을 읽기 전 어떤 긴장감이 몰려왔다. 한데,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나 <악취미들>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랑의 사태>는 내게 평이했고, 편안하기까지 했다. 단편은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그건 곧 드러낼 냉소이며 광기인지 모른다. 아무튼 이 말은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란 말이다.   

 <내 생애 최고의 연인>나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 연보>,<백하동 가는 길>을 제외한 나머지<권태주의자>와 <랑의 사태>,<다큐멘터리 가족극장>,<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다크블루, 시간의 풍경>은 작가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대부분의 화자는 소설가이거나, 출판사의 편집장, 시인, 시를 읽거나 시를 쓰고자 하는 문학과 관계가 깊은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권태주의자>와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 특히 인상적이다.  

 소설 속 인물이나 배경이 같은 <권태주의자>나 <랑의 사태>는 마치 연작소설으로 읽힌다. <권태주의자>는 제목 그대로 권태로운 삶을 사는 이야기다. 뚜렷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대로, 그러나 한 편으로 보면 무언가에 집착하듯 보인다. 소설엔 화자가 벤자민 나무와 대화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벤자민 나무의 답에 매료되고 말았다.  

 “나는, 위협받는 포로처럼 우울해요.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 우울해요. 한쪽 발을 잃은 마네킹처럼 우울해요.”  p. 118  

 벤자민 나무도 화자처럼 권태주의자였던 거다.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이라니.누군가는 지루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자 탁구장 주인인 화자 삼촌이나 화자는 모두 권태주의자답게 살고 있다. <랑의 사태>는 랑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도서관에서 삼촌의 시집을 읽고 있는 랑을 만난다. 랑은 모텔을 운영하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랑에게 부모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녀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면 살아낼 수 없는 여자다. 화자는 기꺼이 랑의 환상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삶, 때때로 누구나 바라는 권태로운 삶이 아닐까.

 <다큐멘터리 가족극장>,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장남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저버린 큰 형과 쌍둥이 형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등장한다.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에서는 평소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아버지의 삶을 빌어 우리 생에 가져야 할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안과 밖을 나누면서 모두들 따뜻한 내부를 갖기를 원한단다. 우리는 밖이 아닌 안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것이지. 그런데 나에게는 이 세상이 온통 까다롭고 사나운 바깥 같구나. 사는 것이 참으로 두렵고 어려워. 어떻게 저 밖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 p. 203~ 204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삶은 무엇일까. 한 가족의 가장이며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온 삶 속에 이같은 생각들이 가득했을 꺼라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하니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생이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고단할까.  이는 서른 아홉의 출판사 편집자인 화자가 열두 살 아래의 그림작가를 사랑하는 <내 생애 최고의 연인>나 은퇴를 앞둔 야구 선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인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에서도 느껴진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소통에 대해 말이다. 

 9편의 소설에서 김도언은 이런 삶을 지향하는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소설들은 하나의 특정한 에피소드를 통해 무언가를 갈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가령, 죽음이라든지 존재의 이유처럼 다소 철학적인 것들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쉽게 꺼내지 못하고 말하지 않는 일들 말이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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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특별판)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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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하다’란 말이 어울리던 시절은 이미 내게서 사라졌다. 그 무모함 속에 담겼던 열정,도전도 함께 말이다. 그러니까, 7번 국도 위에 있었던 시절은 기억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 시절 뜨겁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차갑거나 미지근한 쪽에 속하지 않았다. 20대였고 삶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을 정도의 용기가 있었다.  마흔을 앞둔 지금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고, 나름대로의 변명으로 내 삶을 자위한다. 잘 살고 있는지, 잘 살아왔는지 마음이 복잡할 때, 새로운 7번 국도의 문장이 이끄는 대로 길을 나선다.   
 
 자전거를 타고 7번 국도를 여행하는 젊은 청춘들, 그들의 고뇌와 방황이 왠지 안쓰럽다.  7번 국도를 함께 품었던 화자인 나와 재현,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세희가 품었던 갈망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이렇게 새로운 소설로 쓰여졌듯 7번 국도는 이제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건 소설 속 화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하니1997년 7번 국도를 읽고 그 길 위에 섰던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청춘이 아닐 것이다.  

 화자인 나는 어엿한 작가로 학생들과 문학기행을 떠나고 깨질 듯 불안했던 세희는 아이 엄마가 되어 살아간다. 혼자 외롭고 상처받았다 생각했던 시간들을 잘 견뎌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을 잊은 건 절대 아니다. 상처받고 상처주고 울고 웃었던, 모든 것이 사랑으로 연결되었던 순간들이 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 날 내가 사랑했던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나를 사랑했던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나도 살아 있을까.
 
 이제는 죽고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 모든 사랑이 내게는 공평하고 소중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끝까지 남아 그 사랑들에 대해서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 기억의 달인이 되어, 사소한  것들도 빼놓지 않고, 어제의 일인 것처럼 늘 신선하게,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죽은 뒤에도 그 기억들이 남을 수 있도록, 이 세계 곳곳에 그 기억들을 숨겨두는 일. p.187 

 때로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겨도 좋은 게 생이 아닐까.  소설에서나 소설 밖 우리 생에서 필요한 건 이런 문장과 같은 시간일 것이다. 자신이 숨을 쉰다는 사실에만 집중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은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들숨에 집중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날숨에 집중해서 숨을 내쉰다. 천천히, 다시 들숨에 집중하고 날숨에 집중한다 그걸 계속 반복하다. 생각들은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면 된다. 어떤 생각들은 오랫동안 떠올라 마음을 흔들어놓을 것이다. 그럴 때면 격랑이 몰아치는 강가에 앉아서 강물을 바라보듯이 그 생각들을 바라본다. 중요한 건 생각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는 일이다. p. 192

 7번 국도에서도 그랬듯 소설엔 노래 가사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투명물고기의 <저물다>를 들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던 해도 반드시 저물듯, 투쟁하는 삶도 열병처럼 사랑했던 순간도 언젠가는 저물고 만다. 해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충실하고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현재는 곧 과거로 사라지니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하며 살면 된다. 작가 스스로도 뜨겁던 청춘을 지나왔기에 들려줄 수 있는 말이 정답은 아닐런지. 삶은 우야든둥 지금 여게 있는 거지, 어데 멀리 있는 게 아닌 기라예. p. 96 

 김연수는 뼈대는 그대로 두고 처음부터 소설을 새로이 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 13년이란 시간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13년이란 시간의 흐름에 세상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삶 자체도 변하니까. 그래도 2010년 다시 만나는7번 국도 Revisited는 누군가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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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시대
장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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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사랑이 전부였던 때가 있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려도 아픈 건 똑같으니,사랑을 모르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를 버리고 사랑을 택한 삶은 영원히 행복할까. 영원한 사랑은 없을지 모르나 사랑이란 게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는 건 맞다.  여기 그런 생을 산 두 여자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한 사람을 사랑했다. 천샹과 예러우가 사랑한 남자는 시인 망허였다.  
 
 시인를 사랑한 여자 - 천샹 
 중국 문학을 전공한 문학 소녀 천샹은 망허와의 단 한번의 만남이 다였다. 그 만남으로 시인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대학 선배와 결혼한다. 시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볼 때마다 그녀는 행복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평생을 함께 하지 않아도 순간의 기억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망허의 새 시집에 실린 사진을 보고 자신이 사랑한 망허가 가짜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절망은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멍허의 아이가 아닌 아들 역시 그녀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기다려주던 남편과 이혼을 한다. 

 시인이 사랑한 여자 - 예러우 
 예러우와 망허는 첫 눈에 운명을 느꼈다. 논문을 쓰기 위래 지방을 다니며 현지답사를 하는 예러우 앞에 나타난 시인 망허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유랑의 길에 나선 길이었다. 하룻밤의 사랑만 남기고 예러우는 자신의 길로 떠났고 망허는 그녀의 찾아 떠난다. 재회의 순간, 말 그대로 길 위에서 만난 그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본 것이다.  망허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추스리려 홀로 떠났지만 결국 둘은 하나가 되기로 한다.  

 둘은 중국의 여러 마을을 함께 다닌다. 끝도 없는 길을 걷고 걸어서 도착한 마을들은 1980년대 중국이 그러했듯 가난했고 순수했다. 낯선 타인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내주고 서슴없이 자신들의 삶을 들려주었다. 예러우와 망허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통해 경이로움을 느낀다. 장윈은 그들의 힘든 여정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어쩌면 그것은 연인과 함께했기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 모든 나무와 꽃들은 얼마나 눈부셨겠는가.

 ‘낭창낭창 늘어진 물버들이 여기저기서 수풀을 이루어 멀리서 보면 보랏빛, 초록빛, 담황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그건 분명 남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버들가지마다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나 있었다. 당버들은 북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교목이었지만, 이곳의 당버들은 유난히 깨끗하고 힘 있게 뻗어 있었다. 연녹색 잎사귀에 통통하게 물이 오르고, 줄기는 자작나무의 그것처럼 희고 깨끗했다.’ p. 158  
 
 그러나, 자궁 외 임신으로 예러우는 망허의 곁을 영영 떠나버린다. 예러우를 잃고 망허는 그만의 길을 떠난다. 길 위에 남겨진 사랑은 그들을 기억할까. 시간이 흘러 21세기에 산촌의 소학교의 교장인 천샹은 학교를 후원하는 건축 회사의 사장인 망허와 마주한다. 천샹의 대접으로 마을의 토굴에서 하루를 보내며 시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제가 예전에 시인이었답니다.” 
  “그러시군요. 저도 예전에 시를 좋아했었죠.” 
  “그런데 전 시인이었지만, 한 번도 시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사실 시는 참 잔인한 거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제게 물으시는 건가요?” 
  “네.” 
  “원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잔인하죠”. p. 271~ 272 

 그들의 시라 부르며 말한 그것은 사랑이었고 삶이었다. 잔인하고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들. 책을 다 읽고 나니 박용재의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란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정말 그랬다. 예러우와 천샹은 망허를 사랑한 만큼 살았던 것이다. 천샹에게 시인 망허는 삶 그 이상이었다. 예러우는 어떠한가. 망허와의 만남에서 그와의 운명적 사랑을 예감한 그녀는 그 결말이 불행이라는 걸 알았지만 사랑을 놓지 못했다. 잔인한 시를 닮은 그들의 사랑이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 박용재의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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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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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누구나 욕망의 존재다. 그 욕망을 얼마나 잘 다스리며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욕망을 쫓다 보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를 알지만 눈앞에 보이는 욕망을 외면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름답고 화려한 신도시의 편리한 생활과 쓰레기 가득한 변두리의 구도시 중 하나를 택하라면 구도시를 택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화려함으로 위장한 실체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감춰진 모습을 확인하더라도 과감하게 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떻게 할까, 쉽지 않은 결정이다.  박범신은 비즈니스를 통해 그런 질문을 던진다. 욕망이 가득한 세상,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묻는 것이다.  
 
 소설은 서해안에 위치한 ㅁ시가 거대한 자본의 유입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따라 달라지는 도시의 삶을 이야기한다. 해안도로를 경계로 도시는 나워진다. 권력과 자본으로 비즈니스를 성공시킨 신도시와 구도시는 빛과 그림자였다. 사람들은 빛만 보려 한다. 그에 따른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짐짓 모른 척한다. 사람들은 모두 신도시를 향한다. 어떻게 해서든 신도시에 입성해야 성공한 삶이었다. 

  ‘쓰레기차들이 해안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지날 때 구시가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오로지 신시가지 사람들의 쾌적한 문화생활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비로소 소스라친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20분간의 그 이동은 공간 이동이라기보다 시간 이동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 p. 14~15  

 주인공 ‘나’와 준하는 그림자에 속한 삶이다. 높은 빌딩숲이 아닌 쓰레기가 가득한 오염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다. 아들의 학원비를 위해 몸을 파는 나는 구도시의 동백횟집을 지키고자 도둑이 되버린 준하를 고객으로 만난다. 욕망을 채우기 위한 단순한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아픔을 알아 본 운명이었을까. 새로이 시작된 나와 그의 관계는 점점 긴밀해진다.  

 형사였던 준하는 동료들의 함정에 빠져 모든 것을 내려놓고 ㅁ 시로 내려온다. 선거 활동으로 시장을 도왔고 동백횟집을 차렸지만 신도시로 인한 매립지구로 인해 빚더미에 오른다. 나는 고시공부 하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이었지만 결과는 남편의 고향인 ㅁ시였다. 

 더 이상 젊지 않았기에 그들은 소박하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도시의 등장으로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아들에게만은 이 생활을 절대로 물려줄 수 없었기에 나는 몸을 팔았고, 엄마의 죽음으로 자폐 증상이 심해진 아들 여름을 위해 준하는 신도시 부자들의 집을 턴다. 나와 준하에겐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같았고, ‘이팝나무’로 통하는 추억이 같았다. 나를 이팝나무라 부르던 남편, 이팝나무를 좋아했던 준하의 아내.  

 준하가 살아온 삶을 통해 나는 지난 날을 돌아보며 지금의 자신과 마주한다. 남편을 믿고 사랑하며 돈이 전부가 아니라 실패가 두렵지 않았던 시절은 어디로 가고 아들만은 신도시 입성을 해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서글픈 현실이 자신의 전부라니.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와 그가 그림자였다면, 나의 친구 신도시에 사는 주리와 그 도시를 만든 시장은 빛이라 해야 할까. 나에게 일을 소개해 준 것도 일찍이 삶은 비지니스라는 걸 알았던 주리였다. 부와 명예만이 이 시대를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시장은 어떠한가, 성공을 위해선 구도시의 삶은 어디에도 없었고, 모든 것이 그에겐 도구일 뿐이다. 과연, 어느 쪽이 행복한 삶일까. 아니, 제대로 살고 있는 삶일까.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속해 살고 있을까.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메아리로 돌아오는 질문들, 삶이라는 게 이토록 씁쓸하고 허망한 것이라니. 

 욕망에 길들인 사람들은 새하얀 이팝나무 하나만으로 행복을 떠올릴 수 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이팝나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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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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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런 소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어떤 소설이냐하면 바로, 곰스크로 가는 기차같은 소설 말이다. 아, 정말 기분 좋은 소설이다. 무엇이 그리 기분 좋으냐고 묻는다면 꼬집어서 답을 할 수 없다. 그냥, 당신도 읽어보면 알게 될꺼 라고 답할 뿐이다.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이게 무슨 행복한 소설이냐고.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 모호한 이야기, 작가가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뿐이지 않냐고. 바로, 그거다. 해서, 여운이 남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오래오래 기억되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표제작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단막극으로 방영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배우의 연기보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젊은 두 남녀의 작은 논쟁과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시대와 공간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곰스트는 과연 어디일까. 인상 깊게 남았는데 원작이 있었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곰스크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을까.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아버지가 항상 말했던 곰스크는 남편에게 꼭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낯선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불안했고 두려웠다. 잠시 기차가 잠시 정차하고 부부는 작은 마을에 내려 둘러본다.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기차를 놓칠까 초초하나 아내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에 반해버린다. 결국 기차를 놓치고 만다. 기차표는 몹시 비쌌고 돈을 구하려면 마을에 머물려 일을 하고 다시 기차를 기다려야 했다. 

 상심한 남편과 반대로 아내는 그 마을에 적응한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방을 꾸미고 살림살이를 들인다. 그리고, 곰스크로 가는 기차가 도착했을 때 아내는 안락의자를 가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표는 두 장밖에 없었고 안락의자에 대한 비용을 치뤄야 했다. 그제서야 알았다. 아내가 아이를 가졌던 것을 말이다. 누구나 예상하듯 그들은 곰스트로 가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았다. 그렇다고 남편이 곰스크를 잊었을까. 아니다, 남편의 마음은 언제나 곰스트로 가고 있었다.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것은 나를 사로잡는다.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가 저 멀리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찢어지는 듯 슬픈 기적소리가 초원을 뚫고 울리다가 멀리 사라질 때면, 갑자기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솟구쳐 나는 쓸쓸한 심연의 가장자리에 놓인 것처럼 잠시 서 있곤 한다. p. 62

 곰스크는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지명일 뿐이지만, 곰스크는 누구나 가슴속에 간직한 그 어떤 것이다. 그 때 그 시절 선택하지 못했던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 열정, 꿈, 사랑이다. 아쉽고 그립고 때로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누군가는 아내 때문에 곰스트로 가지 못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아내에게 곰스크는 현실이었고 남편에게 곰스크는 이상이었던 것일까. 곰스트는 값비싼 댓가와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리라.
 
 그 외 7편의 단편도 내 큰 설렘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간다고 믿고 배에 올랐지만 배가 확히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불안과 혼란이 가득한 <배는 북서쪽으로>는 마치 우리네 삶을 보는 듯하다. 분명 내가 정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지만, 누구도 잘 가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오로지 목표만을 보고 달려오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삶을 돌아보게 하는 짧은 단편 <두 시절의 만남>도 그러하다. 

 눈부시게 빛나던 청춘과 사랑을 담은 <붉은 부표 저편에>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만나는 <양귀비>를 읽다 보면 추억에 빠져든다. 순수했던 마음과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하니 과거로 사라질 현재를 잘 살아내야 한다는 다짐으로 돌아온다.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소설이다. 뜨거운 열정을 차분한 문장으로 담았다. 자꾸 떠오르는 소설이 될 것이다. 잊고 있던 나의 곰스크를 생각할 때마다 가만히 열어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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