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사흘 남았다. 2011년도 사흘 남았다.  2012년에 대한 소망 리스트를 적으며 2011년에 바랐던 것들을 찾아 보았다. 내가 소망하는 것들은 작년이나 올해나 그리고 내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건 큰 소망이 없다거나, 이루지 못할 소망을 갖고 있다거나, 뭐 그렇다. 여튼 소망이 있는 건 좋은 거니까.

 

 2010년에는 내 맘대로 좋은 한국소설이란 제목으로 책을 담았다. 어쩌면 당신이 지나쳤을지도 모를 한국소설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베스트셀러나 누구나 다 유명작가의 소설을 제외한 책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나쳤거나 몰랐거나 했을 소설이 맞을 것이다.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정유정(7년의 밤), 편혜영(저녁의 구애), 구병모(아가미), 신경숙(모르는 여인들), 김이설(환영), 한강(희랍어 시간), 황석영(낯익은 세상), 한창훈(꽃의 나라)처럼 서점이나 언론에서 오르 내린 소설이 아닌 - (구병모, 신경숙, 한창훈의 소설은 읽지 못했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 김숨의 간과 쓸개, 정용준의 가나, 윤영수의 귀가도, 김도언의 꺼져라, 비둘기, 윤보인의 , 김선재의 그녀가 보인다, 그리고 현재 읽고 있는 김미월의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다.

 

 

 

 

 

 

 

 

 

 

 

 

 

 

 

 

 

 

 

 

 

 

 

 

 

 

 

 

 

 

 

 

 

 

 

 어떤 작가는 잘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첫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이유로 주목 받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소설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올해엔 많이 읽지 못했다. 읽었지만 리뷰를 쓰지 못한 책도 있다. 여튼 나는 이런 책이 좋았다. 물론 위에 거론한 책들도 좋았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작가들은 위에도 있다.

 

 어떤 책은 슬픈 목소리로, 어떤 책은 유쾌한 목소리로, 어떤 책은 산뜻한 목소리로, 어떤 책은 따뜻한 목소리로, 어떤 책은 귀를 귀울여야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접하지 못해 알지 못하는 좋은 소설도 많을 것이다. 내년엔 더 많은 이들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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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령 하는 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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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도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졌다. 막연하게 노년의 삶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거다. 편리한 도시 생활에 길들여진 그들의 마음을 변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그건 공포와 불안이다. 오염된 공기 대신 신선한 공기를 사들이고, 나라에서 공급하는 수돗물을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아파트 문을 닫는 순간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콩크리트 숲들이 불안의 도가니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나 매연으로 가득한 하늘과 병들어가는 몸과 마음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를 떠나고자 하는 게 아닐까.  강영숙은 이런 도시의 모습을 소설에 담아냈다. 그러니까 『아령 하는 밤』에 수록된 소설들의 배경은 모두 도시다.

 

 <문래에서>는 작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구제역의 공포가 등장한다. 화자인 나는 서울의 문래를 떠나 이사를 왔다. 도시를 떠나 얼핏 보기에 전원 생활로 평화로워 보이는 동네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땅은 오염되었고 동물들은 죽어 나고 그 땅에 동물들은 다시 묻혔다. 화자의 남편은 죽은 동물을 처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났지만 새로운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령 하는 밤>엔 점점 심각해지는 도시의 범죄를 이야기 한다. 공단이 있는 도시에 살고 있는 화자는 함께 살던 언니가 죽고 혼자 남는다. 때마침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화자는 밤마다 아령 하는 한 노인을 범인으로 의심한다. 바쁜 일상에 자신 외에 다른 누구도 돌아볼 여력이 없는 사람들, 화자는 고장 난 변기를 수리하러 온 사람과 그나마 대화를 나눈다. 화자의 눈에 비친 도시는 이렇다. 악취와 매연은 한 도시의 상징처럼 되버렸다. 사람은 그저 도시를 채우는 부속물이 되버린지 오래다. 말을 잃은 사람들, 감정이 사라진 도시가 안타까울 뿐이다.

 

 ‘도시가 원인 모를 악취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기름 냄새가 공단 건너편의 주택가로 점점 퍼져나갔다. 처음엔 단순하게 찌든 기름 냄새 정도였던 것이 점차 심해져서 두통을 유발시켰다. 눈이 붓고 목이 따끔거린다는 아이와 노인 들 덕분에 동네 안과와 이빈후과만 미어터지는 특수를 보았다. 방역을 위해 공무원들이 조사를 나오고  하수구란 하수구는 매일 두 번씩 소독을 했다.’ p. 43

 

 도시엔 이처럼 공포와 불안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공포와 불안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도시의 삶이란 공포와 불안을 담보로 세워진 게 아닐가 싶을 정도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불안한 도시>속 누군가는 실종되기도 하고 외롭고 <죽음의 도로> 속 우울한 누군가는 자살을 꿈꾸기도 한다. 도시인의 건조한 일상을 그려낸 <그린란드>나 떠나지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물건을 보관해주는 <프리퍄트창고>는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도시의 풍경이다.

 

 살풍경한 도시를 담은 <재해지역투어버스>같은 소설도 있다. 이 소설에서 재해를 입은 도시는 말 그대로 관광 상품이 된 것이다. 헤리케인이 휩쓸고 간 도시가 누군가에게는 놀랍고 신기한 곳이라니.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재해를 떠올리면 언젠가 이런 버스가 등장할 것만 같아 두렵고 무섭다.

 

 ‘버스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버스 안은 출발할 때와 달리 이상하게 고요해졌다. 운전기사의 멘트는 점점 더 빨라졌다. 몸으로 그때의 모든 시간을 매번 재현해야 하는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나는 운전석 앞에 달린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웬걸, 그는 아주 신이 나 보였다. 보트가 지나다니면서 지붕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과 담요를 주는 게 다였어요. 군용 헬리콥터는 시계와 물, 방수 쌘드백을 떨어뜨려주었죠. 그러나 몹시 부족했어요. 일부 물이 빠진 시내 거리에 전세계 미디어가 총집결해 있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우리를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p. 117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산다. 어떤 이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어 그럴 것이다. 어떤 이는 도시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버렸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떤 풍경이며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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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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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문장은 마음을 환하게 밝혀준다. 어떤 문장은 지독한 슬픔을 감싸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글이란 건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그가 마냥 부럽다. 그런 글을 읽을 수 있어 행복하다. 이제 나는 그를 더 많이 좋아할 것이다. 이제 나는 그의 글을 기다릴 것이다. 그는 바로 『가나』의 작가 정용준이다.

 

 소설엔 슬픔과 절망이 가득하다. 어찌할 수 없는 절망과 함께 태어났거나 희망 보다는 절망만이 남은 삶이라 할 수 있다. 원망할 대상 조차 존재하지 않아 그들은 사라지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죽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들을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만다. 9편의 소설은 하나같이 아프고 아름답다. 아파서 나도 아프고, 아름다워서 감탄한다.

 

 표제작인 <가나>는 죽은 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는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가 아니라 고국에 돌아가 벙어리 아내와 아들에게 사랑한다 말해줘야 했다. 그동안 말하지 못한 진심을 들려줘야 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줘야 했다. 죽어서라도 그들에게 닿고 싶은 애절한 마음이 가슴 아픈 소설이다. 죽음을 묘사한 그의 문장은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해류가 몸을 떠민다. 그것은 무겁고 밀도가 높은 바람과 같았다. 그 흐름에 따라 천천히 발이 움직이고, 난 바닷속을 산책하듯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을 어찌 형용할 수 있을까, 부드러운 흙 속에 심겨진 나무뿌리처럼 나는 바닷속에 잠겨 있다. 생각이 난다. 회전하는 스크루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내 심장이 멈췄을 것이다. 오른쪽 허리가 심하게 손상되었다. 헤쳐진 살점과 내장들이 붉은 해초처럼 흔들린다. 갈치 두 마리가 내 곁에 맴돈다. 갈치가 움직일 때마다 칼날이 흔들리듯 날카로운 빛이 반짝거린다. 갈치가 내 몸을 먹는다. 너덜거리는 살점을 먹고 손상된 내장을 먹는다. 떠 있던 다리가 바닥에 닿는다. 바닥의 모래는 이제껏 밟아봤던 그 어떤 땅보다 부드러웠다. 바닷속에 숨겨진 땅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p. 62

 

 전쟁이 일어난 일상을 담은 소설 <여기 아닌 어딘가로>에서도 그의 문장은 차분하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도로는 막히고 광장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화자인 그는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는다.  아비규환인 세상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는 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가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자리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계속 귓구멍을 쑤신다. 주황색 하늘은 여전히 맑게 개어 있다. 사람들이 곳곳에 누워있다. 아니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방향으로 관절이 꺾여 있거나 몸의 일부가 사라진 사람들도 많다. 땅바닥에는 누군가의 신체의 일부로 보이는 것들이 여기저기 쓰레기처럼 흩어져 있다. 강 건너편 빌딩이 느리게 붕괴되고 있다. 콘크리트가 모래산처럼 떨어져 나간다.’ p. 205~206

 

 이런 소설도 있다. 행복이란 이름의 아버지와 장미와 왕자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거대한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누나와 그를 돌보는 동생의 고통스러운 이야기 <굿나잇, 오블로>.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혹 같은 게 자라기 시작한 취업 준비생인 남자의 이야기인 <어느 날 갑자기 K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임신을 했지만 아이를 지키려는 사라와 그의 가족의 갈등 속에서 태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랑해서 그랬습니다>는 독특하다.

 

 정용준이 그려낸 인물은 죽음과 고통을 온 몸으로 견디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하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인 구름이만 남기고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며 횟집을 운영하는 남자 농과 출산 당시 죽은 아이를 가슴에 품고 사는 창녀의 이야기인 <구름동 수족관>, 어린 시절 선생님의 질책으로 인해 말을 더듬기 시작하여 결국 말을 삼켜버린 남자와 간질을 앓고 있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인 <떠떠떠, 떠>처럼 절망이 흐르지만 동시에 절망을 걷어낼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어쩌면 작가의 확고한 믿음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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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구절을 읽으니 느낌이 묵직하네요. 만만치 않은 주제로 소설을 쓰는 작가군요.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되겠지요. 게다가 별도 다섯개. 읽어봐야겠다 싶으면서도, 하나같이 만만찮은 고통을 가진 주인공들이라, 읽기도 전에 심장 부근이 뻐근해집니다.^^;

자목련 2011-12-14 21:00   좋아요 0 | URL
무척 좋았던 소설입니다. 간결한 문장에 많은 것을 담았다고나 할까요. 제게는 그랬어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소설이예요.^^
 

 

 눈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기다렸던 건 비였다. 그러니까 첫눈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내린 오후에 나는 기쁘지 않았다. 설레지도 않았다. 그건 그것들의 형태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쌓일 수 있는 형질의 것이 아니라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 그래도 분명 눈이었다. 내가 사는 이곳엔 소설(小雪)에 첫눈이 내린 것이다. 어쨌든 첫눈은 내렸고 바람은 날카로웠다.   
 
 나른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청소기를 돌렸고 보기에 더러운 곳만 대충 걸레질을 했다. 점심엔 계란을 넣은 라면을 먹었고 천정명이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잠깐 보았다. 아파트 관리비와 각종 요금 고지서가 담긴 우편물과 함께 『창작과 비평 겨울호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제 더이상 가을이 아니라 겨울인 것이다. 저녁 밥을 위해 쌀을 씻고 전화를 받지 않은 나 때문에 세 번이나 전화를 한 친구와 통화를 했다. 친구가 사는 곳엔 눈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미용실에 다녀온 일과 김장과 감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문득, 나도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졌다. 목을 드러낸 아주 짧은 단발 머리를 하면 어떨까.  

 관심 있는 작가의 첫 소설집이 나왔다. 정용준의 『가나』다. 책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은 이미 만났다. 첫눈 내리는 날과 잘 어울리는 표지가 아닌가.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깊은 밤에 마주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여섯 살』낸시 휴스턴의 작품으로 2006년 페미나수상작이다. 여섯 살의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읽고 있는 셰프의 딸』은 요리에 담긴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어린 시절 겨울밤엔 광(요즘으로 말하면 다용도실)에 보관해 둔 홍시를 꺼내 먹었다. 가끔 피곤에 찌든 엄마를 졸라 매운 떡볶이를 먹기도 했다. 찐 고구마를 물김치와 함께 먹었고 부엌을 드나들 때마다 차가운 마루 바닥이 싫어 까치발을 들고 큰 걸음으로 다녔다. 밤 하늘엔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별들이 가득했다. 그 시절엔 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도 많았다. 집 뒤 대숲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싶다. 이제 그 시절, 그 대숲을 다시 만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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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미래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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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사랑이라는 감정의 잔여물이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때 사랑으로 모든 게 용서가 되고 모든 게 아름답게 보였던 적이 있다. 어쩌면 그 시절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랑의 미래를 보았다고 믿었던 건 아닐까. 잡히지 않는 그 시간을 흘려 보내고서야 사랑한다는 일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소모되는지 안다. 어쩌면 사랑 앞에 저어하는 이라면 그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봄날의 벚꽃처럼 우리를 달뜨게 한다.  

 그러니 어찌 사랑을 저버릴 수 있으며 사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책은 사랑에 관한 시의 한 구절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사랑이 그 다음의 시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로 쓰여진 건 아니다. 하나의 시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상상하여 산문 형태로 담았다. 

 사랑에 관한 글이니 당연 ‘그’와 ‘그녀’가 등장한다. 사랑으로 불리는 거대한 우주 속에 나열된 모든 것들이 그와 그녀의 시간에서 조명되는 것이다. 사랑이 시작된 후 그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가 증명하고 싶어한다. 왜 그(그녀)인지,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 믿는다.  먼 훗날 그 만남이 우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도 말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면서 뼈아픈 일이다.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영원히 가슴 아픈 착란의 상태에 머문다. 그가 누구와도 같지 않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거나, 혹은 똑같은 이유로 그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 p. 33  

 사랑 안에 거할 때 모든 사물과 모든 감정은 언제나 깨어있기 마련이다. 해서 사랑이 흔들릴 때 사랑이 멀어질 때 그것들은 더이상 생물체가 아니게 된다. 의미를 부여했던 일들은 무의미한 존재로 남을 뿐이다.  서로에게 속했던 소소한 흔적들을 지우려 할지도 모른다. 그토록 사랑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견디지 못한 채. 이런 문장들처럼 말이다.  

 사랑을 잃는 것은 ‘나’를 부르는 하나의 특별한 억양을 잃는 것. 그 억양이 존재했었다는 기억만, 어떤 습기가 있던 자리의 얼룩이 되는 것. p. 132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출생에 대해 그 사람보다  ‘내’가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p. 174 

 가만히 문장을 따라 읽는다. 몇 번이고 따라 읽는다. 어느새 그녀가 되어 내게 속했던 사랑을 꺼내본다. 잊고 있었다 믿었던, 결코 잊혀지지 않은 감정이 나를 흔든다. 사랑은 언제나 힘이 세 어떤 방패로도 막을 수 없는 건가 보다.  이런 게 이 책의 매력이다. 그와 그녀의 사랑으로 존재하던 게 나와 당신의 사랑이 되버린 것이다. 

 한 편의 잔잔한 영상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의 이야기에서 마주했던 일들이 그녀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조명되는 과정은 흥미롭다. 특정 장소나 특정 사물을 기억하거나 잊으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그와 그녀는 다르다. 그건 세상의 모든 그와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겨 놓은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겹쳐질 때 사랑은 분명 한 층 더 커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41편의 시에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누구나의 사랑처럼 설렘으로 가득했지만 때때로 무뎌짐의 반복으로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사랑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통속적이고 식상한 사랑이 우리 생에 존재할 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꿈꾸고 논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미래’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난 사랑을 매만지는 손길이며, 사랑이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며, 언제나 사랑 곁에 머물고 싶은 사랑이, 사랑의 미래라고. 그러므로 사랑의 중심이 아닌 바깥에 있다 해도 사랑에 발 담그고 있는 수많은 그와 그녀가 사랑의 미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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