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책

 

 꽃이 지고 있다. 비 내리는 아침, 남아 있는 꽃잎들이 흔들린다. 꽃 지는 계절, 꽃 비가 아름다운 요즘 가의 계절은 봄일 것이고, 누군가는 이미 여름에 속한 날들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아직까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감정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이 계절에 정확한 이름을 명명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다리던 봄처럼 도착한 시집을 읽는다. 가장 먼저 읽은 시는 이런 시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언저리에 머무는 그들이 희게 시리다

 

  방금 출발한 차편에

  반생(半生)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할 지금

  버리다와 두고 가다 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말을 버린 것들은 왜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명치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허공 속 꽃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반생이 손을 흔들 때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배웅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배웅할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p. 100~101)

 

 비가 오는 날이라, 끝을 달려가는 봄을 붙잡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다. 봄을 보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일은 때로 본능처럼 다가온다. 백작약이라는 말에, 나는 주책없이 가슴이 설렌다. 이별의 공간에, 영원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리며 더이상 기억 나지 않는 너의 얼굴을 그려본다. 너는 알까, 가끔 네 생각을 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령 네가 나를 기억한다 해도 너는 궁금해하지 않을 걸 알기에 소리를 죽인 채 속눈썹은 울부짓는다.

 

  <속눈썹의 효능>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고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ㅡ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질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p. 68~69)

 

 이 봄에 읽지 않았다면 어쩔뻔 했는가. 손끝으로 꽃을 매만질 용기 없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비겁한 봄날에 이런 시를 읽어 흘러내리는 감정 주워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준 시가 있어 고맙고, 또 고맙다. 투박한 말 뒤에 숨겨진 여리디 여린 마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간절함 외침을 대신 해 시인이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듯하다. 

 

  <툭>

 

  빛줄기 하나 텅 비어 바닥을 향해 있다

 

  못이 박혀 있던 자리에 남은 구멍

  여백을 견디던 벽에게 못은 무엇이었을까

  한 점으로부터 출발했을 여백

  벽에 구멍을 낸 것도 막고 있던 것도 못이었다

  어떤 중심은 돌출일 뿐

  그러므로 벽과 못은 상극일까

  중심이었을 때조차 못의 허기는 허공에 닿아 있었다

  낙화가 허공에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떠 있는 것들에게 가장 불편한 이름, 허공

 

  떨어지기 직전 가장 뽀족했을 못의 촉수

  중심을 견디던 내부의 힘으로

  툭, 못이 가까스로 잡고 있던 벽을 놓친다

  오래된 견딤일수록 결별의 시간을 짧고

  툭, 심장이 가까스로 잡고 있던 마음을 놓친다

  마지막 소리로 제 숨을 거두어 가는 것들

  흩날리는 꽃을 보는 나무의 그늘이 깊다

 

  지친 독이 못에 펴져 있다, 푸른 전갈

  바람 한 필 걸어둘 수 없다는 벽과

  다시는 너라는 중심에 박히지 않겠다는 다짐 사이

  닿을 소식은 닿는다 바람으로라도

  툭, 멀리서의 부음이 떨어진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없다 다만 소식이 있을 뿐

 

  푸른 전갈, 검은 눈 속으로 번지는 (p. 92~93)

 

 <놓치다, 봄날>

 

  저만치 나비 난다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라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색기(色氣)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르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을 날들이 잠시 잊힌다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안자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p. 62~63)

 

  <손목을 견디다>

 

  기다림의 손목을 잘라버려야 해 어떤 선언은 비인칭

 점.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할 수 있을

 까 그늘로만 향하는 발자국, 생장점을 지닌 기다림은 식물

 의 상상력과 알맞다

 

  고요 수목원 부채파초 앞에 서면 부채와 파초 사이 바람

 을 헤아리는 허공, 이 식물의 내력은 줄기에 고인 빗물로 한

 모금의 구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

 

  기다림의 손목 대신 파초 줄기를 잘랐을 손에 왜 떠도는 발

 자국은 구원에 목말라 할까 그럴수록 두 눈의 수위(水位)

 만 높아질 뿐, 길 잃은 발자국에게는 나침반이 되기도 하는

 데 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잎의 습성 때문이라는 것 방향을

 잃기 위해 떠도는 영혼이라면 소용없을 부채파초의 꽃말은

 흰 기다림

 

  늘 부채를 지니고 다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부채가

 불어오는 것은 바람이라는 냉정, 그는 고백과 헤어짐의 문

 장을 파초 잎에 적어 보냈다 기다림,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

 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하는 것 떠남과 기다림은 비인칭 시

 점의 선언과 감행만큼 가깝게 멀다 생장을 거듭하는 시간

 만, 그늘 쪽으로 한 뼘 더 (p. 84~85)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부적처럼 믿고 산 지 오래다. 오랜동안 소식이 닿지 않던 지인의 안부가 반갑기는 커녕 두렵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다. 그만큼 건조한 날들을 살고 있다는 말일 터. 아니, 사실은 기다리지 않는 척 하며 언제나 내 귀는, 내 모든 촉수는 너를 향해 있다는 마음을 들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네가 달려와 주기를, 네가 잘 지낸다는 안부를 바람에라도 전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봄날에.

 

 옮기지 못한 시들이 많다. 좋은 시냐고 묻는다면, 그저 나를 울리는 시라고, 그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다정한 목소리라고, 꽃잎이 떨어질 때 속눈썹이 흔들리는 당신이라면, 반가울 시라고 답할 뿐이다.  

 

 

 

 

 

 

 

이은규 첫 시집, <다정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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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4-2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2-04-26 15:42   좋아요 0 | URL
함께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2012-04-27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8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의 날’이 있다는 걸 6년 전에는 몰랐었다. 그러니까 내가 책에 다시 애정을 갖고서야 세계 책의 날이, 4월 23일이라는 걸 안 것이다.  책의 생일인 오늘,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사과를 한 입 덥석 물고 싶게 만드는 표지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다.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책의 날 도착한 신간 알림 문자는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나왔다는 것이다. 올해의 수상 작가중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 더 좋다. 게다가 대상을 거머쥔 작가, 손보미는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니, 정말 반가운 문자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빠른 시일 내 내 손길이 닿을 것 같은 책은 마흔 일곱에 등단한 작가 전민식의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세계 문학상 수상작이다.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책은 이은규의 첫 시집 『다정한 호칭』으로 제목처럼 다정하고 포근할 것만 같다.

 

 

 

 

 

 

 

 

 

 

 

 

 

 

 

 

 

 

 

 

 

 

 책의 날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고, 책을 기다리는 일상은 즐겁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을 듣는 일도 그렇다. 그래도 책의 생일인 오늘, 책을 이야기하는 일은 한층 더 즐거운 일이다. 당신 곁엔 어떤 책이 있나요? 당신이 기다리는 책은 어떤 책인지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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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다리는 책
    from 존재증명, 부재증명 2012-04-24 09:31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이 한 가득인데, 또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필요'라는 의미는 얼마나 간사한지. 에, 시리즈를 몽땅 장바구니로. 꽃 사진 찍어서, 이 꽃이 무어냐 물어볼때마다 친절하게 답해주시는 선생님에게 죄송하여, 이제사;; 꽃도감을. 내친김에 이런 책들을 우루루 주문했다. 요즘 들어 꽃키우기, 식물키우기에 재미를 붙인데다가, 다른 의미로의 '필요'도 있어서. 예전, 엄마가 화초나 난을 키우시면서,
 
 
 

 

 4월이 되었고 선거도 끝났다. 어딘서가 꽃이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등처럼 환한 목련의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고 누군가 내게 전했다. 나는 아직 꽃을 보지 못했다. 아파트 단지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작년과 비교하면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기에 길 가에 핀 꽃을 마주할 날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베란다에 작은 화분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만 주면 잘 자라는 난을 비롯해 올 초 우리집에 들어온 작은 녀석들이 제법 잘 자라고 있어 기쁘다.

 

 아, 선물받은 난에 꽃이 있긴 하다. 노란(아니 선명한 노랑이 아닌 맑은 노랑) 꽃잎이 떨어지고 있지만 아직 꽃이 있다. 고운 자주빛의 히아신스의 꽃도 사라진지 오래다. 내년까지 잘 살아줘서 그 빛을 다시 보여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아직 이 봄을 노래하는 어떤 꽃도 보지 못했다.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개나리, 수줍은 분홍 진달래, 고고한 목련을 보고 싶다.

 

 꽃 대신 책을 만나야 할 봄일까. 맨부커상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퓰리처 상 수상작인 <깡패단의 방문>, 극명한 고독을 만날 수 있을 듯한 <소수의 고독>, 성장소설로 알고 있는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인 <와일드 펀치>, 김제동의 결혼 비용으로 쓸 꺼라는 <김제동이 어깨동무를 합니다>를 곁에 두었다.

 

 

 

 

 

 

 

 

 

 

 

 

 

 

 

 

 

 

 

 

 

 

 

 

 

 

 

 

 

 

 

 

 아직 곁에 두지는 못했지만, 읽고 싶은 시집도 많다. 장석주의 <오랫동안>,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임현정의 <꼭 같이 사는 것처럼> 그리고 곧 나올 2008년 등단한 시인 이은규의 첫 시집 <다정한 호칭>이다.

 

 

 

 

 

 

 

 

 

 

 

 

 

 

 

 

 

 

 

 

 

 

 

 

  어디선가 꽃은 지고 봄날은 이렇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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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3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3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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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사소한 우연의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이 되기도 한다. 확대해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생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말이다. 해서 우리는 종종 만약에 라는 말을 사용하다. 만약에 그 순간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그 공간에 가지 않았더라면 삶은 분명 달라졌을 꺼라 말한다.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시각, 그 순간에 마주한 사람이라면 그건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만약에라는 삶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고, 나와 닿은 이들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고 말이다. 이상하게도 김연수의 소설을 읽고 나면 언제나 작은 위로를 받은 듯 충만해진다. 그러니까 이 말은 김연수의 소설은 누군가도 나처럼 슬프고 누군가도 나처럼 아팠고 그 시간을 지나왔으니 너도 괜찮아질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따뜻함이 있다는 거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고아가 된 열네 살 정훈이 들려주는 이야기 <원더보이>는 특히 더 그랬다. 트럭으로 과일 장사를 하는 아빠와 단 둘이 살던 정훈은 1984년 겨울 교통사고를 당한다.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빠는 죽고 정훈만 살아남은 것이다. 공교롭게 그 사건은 남파 간첩이 연류 되어 있어 죽은 아빠는 마지막 순간에 애국자가 되고 정훈은 세상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고아가 된 정훈은 나라의 보호를 받게 되고 그 뒤로 정훈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이의 마음을 읽게 된다. 정훈의 능력을 알게 된 국가는 이를 이용하려 한다.

 

 1980년대, 사회는 불안했고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젊은 청춘이 많았던 시절이다.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정훈은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야 했다. 아니, 국가가 원하는 대로 읽어야 했다는 게 맞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신비로운 일이었지만 누군가의 두려운 마음을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는 일은 사춘기 소년 정훈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다. 아빠를 잃은 슬픔을 견디기도 힘든 아이에게 국가라는 보호자는 참으로 가혹했다. 그러던 중 정훈은 돌아가신 엄마가 살아 있다는 기쁘고 놀라운 사실을 알았고 아빠의 유품인 망원경과 수첩을 통해 어딘가 존재할 엄마를 찾아 나선다.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세상의 모든 게 다르게 보였을 정훈은 자신의 병실을 지키다 제대한 선재를 찾아가고 그를 통해 강토를 만난다. 슬픔은 슬픔을 알아본다고 했을까. 아니, 사실은 강토를 고문을 당하던 누군가의 마음에서 보았던 것이다. 약혼자를 잃은 강토는 정훈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정훈은 죽은 아빠가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저 우주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그러니 언젠가는 분명 아빠와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연수는 정훈이라는 아이의 슬픔을 통해 1980년대의 슬픔을 보여준다. 더불어 개인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 누구도 위로하지 않는 정훈의 아픔을 안아주는 어른은 어디에도 없는 현실은, 그 시절을 지나온 이라면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 시대의 어른은 어떠했나. 강압적이었고 비겁했다. 오직 당사자만이 그 모든 것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무책임하게 내뱉는 세상이, 끔찍하다. 물론 우리는 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 가령 그것은 서울대공원에 놀러 간다거나, 밥을 짓는다거나,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일이거나, 나무의 연두빛 잎들이 누렇게 변해 떨어지는 일이거나,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일이거나, 누군가와 이별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삶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셀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통해 우리 생이 간직한 무궁한 비밀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막연한 일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그 일상들을 아름답고 경건하게 지켜보고 말한다.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사이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단편, 뉴욕 백화점 중에서>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편,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그러니까 정훈은 열네 살이었던 1984년을 지나가게 될 것이고 어른이 될 것이다. 아빠가 죽던 그 순간 보았던 빛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희선 역시 약혼자의 죽음으로 인해 희선이 아닌 강토의 삶을 살았던 시절을 간직할 것이다. 나는 소설 속 정훈처럼 열네 살의 소년도 아니고 누군가의 마음을 읽기는 커녕 내 마음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정훈과 강토가 서로에게 바람이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우주에서 부는 바람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바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봉우리를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람 말이다.

 

 모든 건 너의 선택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원하는 쪽으로 부는 바람을 잡아타면 되는 거야. 절대로 네 혼자 힘으로 저 봉오리를 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다는 걸 기억해. 너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바람이란다. 너는 어떤 바람을 잡아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야.’ <원더보이 p. 300>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좋은 시절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도 잘 안다. 슬픔, 아픔, 고통, 절망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게 삶이라는 걸 말이다. 그 위험한 돌, 하나 하나 건너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훈의 삶이 그러했듯 우리는 분명 어떤 바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찰나의 순간에 우주의 빛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 순간 저절로 어떤 비밀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당신과 마주한 지금 일 수도 있고, 아직 닿지 않은 누군가를 만날 때일 수도 있다. 그렇게 눈부신 날들이 바로 생이다. 그러니 나의 우주와 당신의 우주가 품은 비밀이 만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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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책이라서 앞의 두 문단만 읽었어요. 좋아요. 뭔가 우연과 운명에 대헤 새로 생각하게 되네요. 글구 "세계의 끝 여자친구" 인용구도 좋아요... 모든 날들이 가버리지만 아주 가버리지는 않는다,라니요.. 김연수답네요. 위로도 되구요...^^*

자목련 2012-04-05 09:40   좋아요 0 | URL
김연수답다, 정말 이 책과 잘 어울리는 말이네요. 즐겁게 읽으세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내가 아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상대가 가족이라 해도 그렇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해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한다. 때문에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일에는 특별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문학 작품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역시 심각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 사람의 생을 이해하려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도스또예프스끼 이해하기 위한 노력한 책이 있다. 아니, 도스또예프스끼를 사랑한 저자의 연애 편지 같은 것이라 해도 좋겠다.

 

 책은 도스또예프스끼의 흔적을 따라 그의 삶과 수많은 작품들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누구나 한 번쯤 책 장을 펼쳐봤을, 그러나 끝까지 읽지 못했을 대표작 죄와 벌, 백치, 노름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외에도 도스또예프스끼가 만든 잡지와 그의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의 만날 수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년 시절과 길고 힘겨웠 감옥에서의 시간, 그가 사랑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모든 것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머물렀던 집이며 공간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하여 독자로 하여금 좀 더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작가로서가 아닌 인간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해 알 수 있어,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소설을 함께 읽는다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물론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영향을 미친 고골 뿌쉬낀 작품을 펼쳐도 좋겠다. 그가 살아온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사회를 향한 작가들의 외침, 세상을 바꾸고 싶고 구원하고 싶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삶이란 어디를 가나 있는 거니까. 삶은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것이지 우리들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p. 101

 

 어쩌면 당장 죽음을 맞이하게 될 지 모르는 순간에 그가 형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가슴에 깊게 박힌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삶을 우리는 언제나 미련하게 바깥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힘겨운 이 시대를 사는 모두에게 거대한 울림을 주는 말이 아닐까.

 

 간질로 인해 몸과 영혼이 고통스러웠던힘 시간, 그가 좀 더 건강했다면 어땠을까. 도박에 빠져 진 빚을 갚기 위해 수정은 커녕 마감에 시달려 써내려 간 소설이 아니라, 오직 소설에만 매달려 있었다면 과연 어떤 소설을 썼을까. 러시아를 떠나 타국에서의 가난한 생활과 한 몸처럼 의지했던 형 미하일과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시련이 있었기에 그토록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도스또예프스끼의 파란만장한 삶이야말로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작가로서 시대를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굳은 의지를 이런 글에서 마주한다.

 

 ‘예술은 항상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이며,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 본 적이 없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p. 148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했고, 더 많이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어떤 연민을 느끼고 그의 고독을 이해하고 싶을 것이다.

 

 문득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고 싶었던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읽지 못한 그의 소설 한 구절이 내내 나를 붙잡는다.

 

 “이것이 당신들에게 부과된 지상의 시련이오. 그러니 위안을 구하려 하지 마시오. 그저 눈물을 흘릴 때마다 당신 아들이 하느님의 천사가 되어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고, 당신의 모습과 눈물을 보고 기쁘게 생각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알리고 있다고 항상 생각 하시오. 당신은 어머니로서 앞으로도 이 큰 비애를 겪어야 하겠지만 나중에 그것이 고요한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당신의 괴로운 눈물은 사람을 죄악에서 구하는 연민과 정화의 눈물이 될 것이오. 자, 그럼 당신 아들의 안식을 위해 기도를 드리겠소.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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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마지막 구절은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가 한 말 같군요. 맞을까요?ㅎㅎ /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삶을 우리는 언제나 미련하게 바깥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 - 이 말 와닿습니다. 저에게도 필요한 말-.^^

자목련 2012-03-31 08: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는 그 소설을 읽지 못했어요..
내 안에 있는 삶,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