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염하고 고운 색동을 떠올리는 단풍에 저절로 눈이 돌아가고, 고개를 뒤로 한 채 바다를 닮은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형형색색의 국화들과 마주하지만 나는 가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감과 고구마의 계절이지만 가을은 나를 유혹하지 못한다. 어떤 일들은 모두 가을에 잉태되었다. 그 중 몇 몇은 불꽃처럼 타오르기도 했다. 안다, 가을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느 글에서도 나와 가을이 애증의 관계라는 걸 쓴 적이 있다. 하여간 가을은 내게 참 잔인하다.

 

 이런 마음을 시원하게 토해내면 말끔하게 받아주는 지인이 있다. 내게 그녀의 이름은 정신적 지주다. 10월의 두 번째 금요일부터 그녀를 귀찮게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속상한 마음을 털어내다가 문득 그녀는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 놓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많이 미안해졌다. 너덜너덜 구멍 난 내 감정을 꿰매주는 그녀가 내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어, 그리고 너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잖아. 그렇게 돌고 돌아 살아가는 순환의 법칙이 아니겠어.

 

 나는 냉큼 순환의 법칙이란 말이 매우 좋다고, 이 말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제대로 순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막히거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 생도 그럴 것이다. 어느 한 시절, 한 기억에 막혀버리면 순환하지 못해 생은 아프기만 할 것이다. 이 가을이 내게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해마다 내게 오는 가을은 가을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다른 가을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가을과 상관없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마치 나를 위한 책인 것처럼 반가운 한강의 소설집 『노랑무늬영원, 좋다는 글만 보이는 신용목의 시집『아무 날의 도시』, 이상하게 끌리는 시인 김선우의 소설 『물의 연인들』 에 빠져들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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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24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에게는 가을이 그렇군요. 누구는 봄이 누구는 여름이 그럴 수 있겠지요. 잊어야 할 건 더 안 잊혀지는거 같아요. 순환이라는 말 좋아요. 한강과 김선우의 소설 담아갑니다. 소설에 마음 기울여 읽어야 할 일이 있기도해서지만 제마음이 가는대로 두기 위해서이기도 하구요. 멋진하루!보내세요^^

자목련 2012-10-24 15:23   좋아요 0 | URL
아마도 잊으려고 애쓰며 상기시켜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내버려두면 저절로 잊혀질지도 모르는데..
당분간 순환이라는 말이, 제게 최고의 말이 될 것 같아요!!

한강과 김선우의 소설, 이 가을을 달래기 위해서 좋을 것 같아요. 빛나는 오후 보내세요!!
 

 

 김연수의 바다가 파도의 일이라면을 읽고 있다. 아마도 오늘 중으로 다 읽게 될 것이다. 그의 문장은 언제나 감탄을 불러온다.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말이 아니다.(아니, 아름답다) 생활 연기의 달인이라는 말처럼 생활작 가의 달인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까. 그러니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심혈을 기울여 쓴 문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피부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만 동백꽃이 보고 싶어졌다. 그 마음은, 여수를 떠올렸고 한강의 소설집을 펼치게 한다. 버스커 버스커가 여수 밤바다를 노래하지 않았더라도, 박람회가 그곳에서 열리지 않았더라도, 여수는, 오동도는, 동백꽃은 매력적이고 강렬하다.

 

 김연수를 좋아한다. 소설 쓰는 김연수의 글을 좋아한다. 『바다가 파도의 일이라면』을 읽으면서 내가 특별히 더 사랑하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한데, 그 책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큰 언니의 집으로 갔는지, 지인에게 빌려줬는지, 책장 구석에 숨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정리가 필요하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은 문학과지성사에서 개정판으로 나왔다. 내가 소유한 책은 이 책이 아니다. 내가 소유한 책은 두 번째 표지의 책이다. 개정판의 표지(원고지와 한강의 조용한 눈빛의 이미지)가 좋아서 함께 소장하면 좋을 것 같다. 한강의 소설도 좋아한다. 스며드는 절망과 고통을 아는 작가라 생각한다.  한승원의 딸로 사는 일은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개인적인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녀의 책 중에는 『내 여자의 열매』를 특히 좋아한다.

 

 해마다 동백꽃은 필 것이고 동백꽃을 볼 때마다 나는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생각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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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이번 새 소설은 평이 좋더군요. (지인들의)
저는 한 권도 제대로 사지도 읽지도 않았는데, 이 두 권 사서 볼까 싶군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자목련 2012-09-20 00:47   좋아요 0 | URL
음.. 저는 <원더보이>보다 이 소설이 더 좋았어요.
그러니까, 섬님이 선택한 두 권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감히 말씀드려요.

프레이야 2012-09-1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읽어야될 책으로 마음에 적어둡니다.
그의 소설 몇 권을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갈등하고 있었거든요.^^

한강의 소설, 특히 '여수의 사랑'을 좋아하는 서재지인이 있지요. 아름다운 분입니다.
개정판이 나왔군요. 찜해가요, 자목련님.^^

자목련 2012-09-20 00:45   좋아요 0 | URL
그녀의 첫 소설집이라 더 남다르게 다가와요. 맨 처음 그녀를 만난 건 이 소설집이 아니지만..
김연수의 이 소설은 프레이야님도 좋아하실 듯해요.
<네가 누구든~>,<밤은 노래한다>보다 이 소설로 김연수를 좋아할 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실은, 개인적으로 그 두 소설은 정말 어려웠거든요. ㅎㅎ

이진 2012-09-19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여수의 사랑' 개정판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결재하려던 참이었어요.
한강 작가, 정말 좋아합니다. 멋진 작가지요. 알면 알수록 더.

자목련 2012-09-20 00:44   좋아요 0 | URL
한강이 정말 멋진 작가라는 걸 아는 소이진님이 더 멋져요.
한강의 <검은 사슴>도 읽어보세요. 좋아요.
열심히 글 쓰고 있죠? 응원해요!!

가나다라마바사아 2012-09-20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끝, 여자친구> 제가 정말 좋아하는 단편집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애틋한 추억이 서린 과거의 어느 순간과 먼훗날의 추억이 될 만한 지금 이 순간을 꿈꾸며 살아가잖아요.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그런 순간들에 대한 기록인 것 같아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애틋한 감성이 서린 우리 삶의 지나간 한 자락들 말이죠. 가만히 있으면 어느새 떠오르는 연인처럼 사랑스러운 소설인듯. 특히 저는 <당신들 모두 서른이 됐을때>와 <모두가 복된 새해>를 격하게 아낀다는 ㅎ 한강은 <채식주의자>밖에 못봤는데 참 임프레시브했습니다. 여수 밤바다도 함 봐야겠네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도 빨리ㅎㅎ

자목련 2012-09-20 21: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가나다라마바사아님^^
<세상의 끝, 여자친구>를 좋아하신다니,기분이 좋습니다. 이상하게 <파도가 ~>이 장편을 읽으면서 이 소설집을 함께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희재라는 주인공의 이름 때문에 국화꽃 향기가 생각나기도.. 말씀하신 두 편은 연말에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한강의 소설도 좋습니다, 저는.

 

 

 읽기도 전에, 내용을 알기도 전에 함께 읽으면 좋을 이가 떠오르는 책이 있다. 아니, 어떤 책은 보자마자 누군가 떠오르기도 한다. 가을 선물로 책을 주문했다. 내게도, 선배 언니에게도, 지인의 생일 선물로 책을 주문했다. 교집합에 속하는 책들은 이렇다. 선배 언니와 함께 읽게 될 책은 박완서님의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 『열두 겹의 자정』, 지인과는 친애하는 사물들이 그렇다. 나만을 위해서는 김혜순의 『한 잔의 붉은 거울』이다. 같은 책을 주문하니 주문 할 때마다 이미 주문한 상품이라는 안내가 뜬다. 이런 일은 매우 신나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좋아하는 이에게 선물하는 일이니까. 순차적으로 주문했지만 가장 먼저 책을 받을 이는 선배 언니가 될 것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늦게 책을 받을지도 모른다.

 

 김혜순의 책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을 조금씩 읽으면서 그의 시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 권씩, 한 권씩 그의 시집을 만나보려 한다. 내가 사는 곳은 태풍이 지나갔다. 많은 비가 내렸고 바람도 약하지 않았다. 다행이지만 지인들이 살고 있는 포항, 울산, 통영, 부산에는 피해가 많은 것 같아 걱정이다.

 

 운동회 소식이 들리는 걸 보니 차곡차곡 가을이 쌓여간다. 주말부터 강한 향기를 내던 꽃들은 하나 둘 시들고 있다. 조금씩 줄기를 자르고 물을 갈아준다. 장미 줄기에 가득했던 가시의 수는 줄어들고, 다물었던 백합은 노래를 부르듯 입을 벌렸다. 곧 추석이 다가온다. 징검다리 연휴라서 고향보다는 여행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추석 선물로도 균일하게 책을 선물하면 어떨까. 누군가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거부하겠지만 그런 상상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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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9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인들이 경상도에 골고루 계시군요.^^
김혜순 씨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책 저도 있어요. (반갑네요.)
저도 김혜순 님의 시집과 이 책을 함께 읽어봐야겠네요. (아마도, 꽤 한참 후에 가능할 것입니다만.^^)

자목련 2012-09-20 00:49   좋아요 0 | URL
매번 태풍으로 저를 걱정해주신 분들인데, 이번엔 반대가 되었어요.
강원도도 비가 많이 온 걸로 아는데, 섬님은 괜찮으신가요?

같은 책을 갖고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 저 책을 볼 때마다 섬님이 함께 떠오르겠네요..
 

 어제 꽃다발 두 개가 들어왔다. 물론 꽃다발의 수신인은 내가 아니다. 두 개의 꽃다발은 예뻤지만 번거로운 일이 되고 말았다. 두 개의 꽃다발엔 소국, 장미, 백합, 안개, 이름을 알지 못하는 두 가지의 꽃이 있었다. 몇 겹의 포장지를 다 벗기고 종류별로 꽃을 나눴다. 장미는 장미끼리, 국화는 국화끼리, 백합은 백합끼리 모았다. 마땅한 꽃병 역할을 대신할 게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꽃이 올 때마다 화병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지만 그때 뿐이다. 무엇이든 꽃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병이나 유리컵, 유리 그릇이 그렇다. 그래도 반드시 마음에 쏙 드는 꽃병을 갖고야 말 터.

 

 

 

 

 주방의 싱크대에는 장미가, 식탁에는 백합이, 김치 냉장고 위에는 안개와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들이 놓여 있다. 다른 향기를 지닌 꽃들이다. 단 번에 알아 맞출 수 있는 백합, 의외로 강하지 않은 장미, 가까이 다가가야 향을 맡을 수 있는 국화. 저마다의 향기가 집안을 채운다. 그러고 보니 가을은 정말 풍요로운 계절이 아닐까 싶다. 어제 오늘 먹은 포도와 배의 계절이고, 곧 햅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태풍만 조용히 지나간다면 말이다. 풍요로운 계절이라 그런지 신간도 다채롭다.

 

 

 

 

 

 

 

 

 

 

 

 

 

 

 

 

 백가흠의 장편소설 『나프탈렌』이 나왔다는 소식이 제일 반가웠다. 단편만 만났기에 장편이 궁금한 건 당연하다. 게다가 장편이지 않은가. 이병헌 주연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도 책으로 나왔다. 영화만큼 책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을 것 같다. 산문집도 많이 나온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저 불빛들을 기억해』과 문정희 시인의 문학의 도끼로 내삶을 깨워라』 도 내용이 궁금하다. 예쁜 표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눈에 들어온다. 향기에 취한 하루가 저물어 간다. 강한 바람과 비를 가진 태풍이 온다니, 다시 창문에는 테이프를 붙여야 할까.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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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9-1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선물은 언제나 좋아요. 향기가 전해오는 느낌! 근데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ᆢ 저렇게 어여쁜 표지로 나오다니 또 사고싶어져 야단났네요. ㅎㅎ

자목련 2012-09-17 10:05   좋아요 0 | URL
가을이라서 그런지 국화에 더 눈이 가요. 이 가을엔 다양한 색의 국화를 한아름 담아두고 싶어요.
정말 표지가 예뻐서 걱정입니다. ㅎㅎ

여긴 비가 많이 와요. 바람은 강하지 않구요. 그곳은 괜찮나요? 태풍의 피해가 없으면 좋겠어요.

책읽는나무 2012-09-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이리 어여쁜 꽃을 누구에게 보낸 걸까요?
투명한 유리잔?,컵?에 쟁여 두어도 이쁘네요.
안그래도 꽃 파는 아가씨 서재엔 항상 예쁜 꽃사진이 있어 보기만 하여도 황홀하던데,
소국을 책과 함께 놓으니 가을 느낌 물씬하네요.
수줍게 웃는 아가씨 모습 같아요.ㅋ

자목련 2012-09-17 19:21   좋아요 0 | URL
가족이 상을 받고 축하의 꽃을 받아왔어요.
꽃을 담은 건 그릇이라 말해야 할 것 같아요. ㅋㅋ
맞아요, 하이드님의 서재를 들를 때마다 그 꽃들이 내 방에 있다면 정말 좋겠다 생각해요.

님이 계신 곳도 가을이 짙어가겠지요?

2012-09-17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7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시인선 23
이현승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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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없이 여름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슬그머니 가을이 왔다. 계절이 바뀌니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긴다. 길었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고 아침 저녁으로 뜨거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찬 물에 말아 먹던 밥과 냉면을 생각하면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절은 다른 이름으로 돌아오고 잊고 있던 그리움의 존재는 되살아난다. 이런 날들에 시를 읽는다는 건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는 다분히 감정의 소모를 불러올 것이고 나 역시 친구처럼 누군가에 짙은 우울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문자를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내게 속한 시간도, 주어진 시간이 늘었다거나 줄었다거나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가을은 받고 싶지 않은 우울이라는 선물을 덥석 떠맡기는 것이다.

 

 가을이라서 엊그제는 <가을 단상>이란 제목의 시를 따라 읽었지만 이 시집에서 첫 번 째 읽은 시의 제목은 <에이프릴>이다. 그렇다. 여전히 나는 봄을 그리워하고 봄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다가올 봄이 아닌 내 몸에 문신처럼 남은 지난 봄의 날들을 말이다. 더이상 봄눈에 놀라지 않는 오늘을 살지만.

 

  <에이프릴>

 

 우는 아이를 안고 걸어오는 길이었습니다.

 비둘기 두 마리 고추장비빔밥맛 삼각김밥을 쪼아먹고 있

었습니다.

 너덜너덜 더이상 삼각형이 아닌 삼각김밥처럼

 피만 것인지 지다 만 것인지 목련나무가

 눈비 지나간 사월의 끝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울 다 잠이 든 아이는 자다 깨어 다시 울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나뭇가지에 얹혔던 꽃도 눈도 갑작스런 찬바람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마와 불과 목과 겨드랑이도.

 

 꽃은 나뭇가지에서 피어나지만

 나무도 가 본 적 없는 세상으로 먼저 갑니다.

 공중에 잠깐 머물다 곤두박질치는 꽃잎들을

 나무는 돌멩이가 가라앉는 물속 보듯 바라봅니다.

 

 펄펄 끓는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오며 보았습니다.

 아프지 말아라 목련나무야 벚나무야 비둘기야

 해열진통제 같은 사월의 눈이

 펄펄 끓는 벚나무 이마를 가만히 짚습니다. - 62쪽

 

 <비의 무게>

 

 분리수거된 쓰레기들 위로

 비가 내린다

 끼리끼리 또 함께

 비를 맞고 있다

 

 같은 시각

 옥수동엔 비가 오고

 압구정동엔 바람만 불듯이

 똑같이 비를 맞아도

 폐지들만 무거워진다

 

 같을 일을 다행도

 어쩐지 더 착잡한 축이 있다는 듯이

 처마 끝의 물줄기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리는 빗속에서

 더이상 젖지 않는 것들은

 이미 적은 것들이고

 젖은 것들만이

 비의 무게를 알 것이다 - 22쪽

 

 지난 봄, 나는 펄펄 끓는 열보다 더 뜨거운 아픔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내 감정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아파했다. 두 번의 계절이 바뀌었지만 크기를 잴 수 없는 슬픔은 여기 저기 흩어졌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 해마다 봄을 맞이하면 우리는 또 각 자의 자리에서 소리없이 절규하고 통곡할 것이다. 비에 젖은 것들만이 비의 무게를 안다는 당연한 말이 왜 이리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눈물의 원료>

 

 우리는 언제나 두 번 놀란다

 한 번은 갑작스런 부고 때문에

 또 한 번은 너무나 완강한 영정 때문에

 

 다 탄 향의 재처럼 가뭇가뭇한 눈을 씻고

 우리는 산적과 편육과 장국으로 차려진 상을 받으며

 사나운 곡소리와 눈물을 만드는 재료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의 얼굴이란 웃는 표정과 우는 표정이 비슷하고

 가리는 울음과 드러내는 웃음이 반반 섞이고 나면

 알 수 없다 알 수 없이 망연하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호흡은 들숨일까 날숨일까

 마지막 날숨을 탄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들숨을 결심할 때의 그것으로 볼 수 있을까

 

 남의 밥그릇에 밥을 퍼줄 때만 우리는 잠시 초연해질 수

있다

 밥통을 열어젖힐 때의 훈김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

지는 것들을 본다 - 28쪽

 

 <친애하는 사물들>

 

 아파서 약 먹고 약 먹어서 아팠던 아버지는

 주삿바늘을 꽂고 소변주머니를 단 채 차가워졌는데

 따뜻한 피와 살의 영혼으로 지어진 몸은

 불타 재가 되어 날고 허공으로 스몄는데

 

 아버지의 구두를 신으면 아버지가 된 것 같고

 집 어귀며 책상이며 손 닿던 곳은 아버지의 손 같고

 구두며 옷가지며 몸에 지니던 것들은 아버지 같고

 내 눈물마저도 아버지의 것인 것 같다

 

 우리는 생긴 것도 기질도 입맛도 닮았는데

 정반대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본다

 포옹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마주 오는 차량의 운전자처럼

 무표정하게 서로를 비껴가버린 것이다 - 82쪽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소식들이 점점 늘어간다. 누군가의 발병,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이별, 누군가의 실패나 좌절이 아무렇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매 시각 뉴스는 잔혹한 뉴스를 전달하고 우리는 점점 소모되고 사라진다. 균일화된 눈물을 흘리거나 동일한 크기로 분노를 발산한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삶의 공식인 것처럼 받아들이려 한다.

 

 <다정도 병인 양>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 두 살의 주인공에게도

 울분이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 - 54쪽

 

 어떤 이들에게 가을은 아주 위험한 계절이다. 여름 내 단단하게 부여잡은 감정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가을, 처진 등을 보여도 될 누군가가 필요하다. 시를 읽으라는 권유는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라도 읽어야 뭉쳐진 가슴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왼손을 잡아줄 오른손이 없는 이들에게, 오른손을 잡아줄 왼손이 없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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