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를 좋아한다. 복숭아의 계절은 아직 멀리 있고, 딸기의 계절이다. 나는 딸기도 좋아한다. 한데 최근에 딸기를 먹은 적이 없다. 방울 토마토와 시든 귤만 먹었다. 식탁 위엔 딸기 사진이 걸려 있다. 친구의 선물이다. 친구는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냥 우연의 일치였다.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엔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Some Fruit as Remembered by the Dead) 이란 부분이 있다. 책엔 몇 가지 과일이 등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와 자두에 대해서도 나온다.

 

 

 복숭아

 

 우리가 먹었던 복숭아는 햇볕에 검게 변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뻘건 검은색이지만, 붉은 기운보다는 검은색이 더 짙었다. 시뻘겋게 달궜다가 꺼내 식히는 중이어서 여전히 뜨겁다는 경계심을 갖기 어려운 쇠의 검은색. 말편자 같은 복숭아.

 검은색이 전체적으로 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그들이 졌던 부분은 희끔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늘을 드리웠던 나뭇잎들이 제 색을 슬쩍슬쩍 칠한 것처럼 녹색이 살짝 감돌았다.

 우리 때에는 유럽의 부잣집 여자들이 얼굴과 몸을 복숭아처럼 희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집시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복숭아는 한 손에 꽉 차게 큰 것에서부터 당구공만큼 작은 것까지 크기가 상당히 다양했다. 작은 것의 껍질은 더 섬세하기 때문에 살이 짓무르거나 너무 익을 경우 보일 듯 말 듯 주름이 잡히는 경향이 있었다.

 그 주름을 보면 검게 그을린 팔뚝에서 접히는 중간 부분의 따뜻한 피부가 연상되곤 했다.

 속에는 씨가 있는데 질감은 짙은 나무껍질 같고, 모양새는 제멋대로인 게 꼭 운석 같다.

 이런 야생의 복숭아는 신이 도둑들을 위해 만든 과일이었다. (108, 109쪽)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이라는 제목인데 나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으로 읽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노란 참외를 좋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은 당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할머니는 그랬다. 꽃을 좋아했고, 악세사리를 좋아했고, 예쁜 걸 좋아했고, 조금은 질척한 밥을 좋아했고, 누룽지를 좋아했고... 하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좋아했던 과일을 떠올릴 수 없고, 엄마가 좋아했던 그 무언가도 떠올리지 못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차이였을까.

 

 누군가의 과일을 생각한다. 작은 언니가 좋아하는 귤, 오빠가 좋아하는 배, 큰 언니가 잘 먹는 토마토, 과일이라면 모두 좋다는 친구 H. 어쩌면 그 모든 게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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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기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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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삶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이 풍경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하여 때때로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런 일상에 익숙해지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니, 부럽다는 게 맞다. 기준영의 『연애소설』엔 그런 두 종류의 삶이 등장한다. 조금은 뻔뻔할 정도로 솔직한 사람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삶은 풍경이라는 틀 속에 있기 마련이므로.

 

 표제작인 「연애소설」은 화자인 나와 친구 수아가 만난 하루의 이야기다. 수아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였다. 수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으로 나를 만났다며 스물세 살 많은 남자와 살고 있다는 말을 꺼낸다. 그 나이 많은 남자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친구들이 수아는 미쳤다고 말한다. 수아는 친구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거부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수아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남자와 살고 있는 집까지 동행한다. 그러는 사이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풍경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풍경 같았던 아닌 풍경이었던 삶 말이다. 기준영은 나에게 다가오는 변화의 조짐을 황홀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보여준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오늘의 이 기운은 저 달 때문인가. 나는 내 방 창가로 조금씩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보름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구름은 보름달의 빛과 그 밖의 어둠과의 경계를 덮쳤다. 흐렸다, 지웠다가, 아지랑이처럼 다시 피어올랐다. 달은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운, 무서운, 무서운, 무서운 허무로부터 달음질치는, 도망가는, 숨이 차는 찰나들을 비추며.’ (「연애소설」, 26쪽)

 

 헤어진 남자 친구의 남동생 유성과 만나는 여자 혜리의 이야기 「시네마」도 다르지 않다. 영화 시나리오를 위해 여자 얘기를 듣고 싶다며 유성은 혜리에게 연락한다. 혜리는 형과 헤어졌다고 말하지 못하고 어색한 시간을 이어간다. 함께 걷으며 사람들을 관찰한다. 유성은 혜리에게 아델과 트래비스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아델과 트래비스의 이야기였다. 석재와 사귄 육 년의 시간도 그러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사랑으로 빛나기도 했다. 석재와 혜리도 아델과 트래비스였지만 그들만의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유성 때문에 혜리는 하마터면 놓칠 뻔한 사랑을 붙잡을 수 있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이처럼 아주 미세한 감정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결핵에 걸려 요양 차 부산에 내려온 나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모델 나희와의 만남을 그린 「아마도 악마가」,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불안을 안고 살며 대형할인마트에서 1+1 물건을 파는 제니의 삶을 다룬 「제니」, 파티용 소품들을 팔고 있지만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회사에 다니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 「파티 피플」속 인물들은 소망이나 희망을 표현하지 못한다. 복학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현실과 미혼모의 사생아라는 존재는 행복과 멀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운은 불행이 아니라는 걸 믿어야 하는 게 삶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악마가」 의 주인공처럼 주문을 외워서라도 말이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나는 날개가 아주 커다란 새이고, 내 이마에는 노란 털이 별 모양으로 나 있어 제3의 눈처럼 보이는 게 아주 근사하다고 생각해본다. 또 다리가 긴 황새가 되어 풀밭 위를 천천히 걸어 다니면 무척 우아할 거고, 세상은 두 배로 아름다워 보일 거라는 생각. 의사가 처방해준 약 속에 뭔가 좋은 성분이 있어서 내가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생각.’ (「아마도 악마가」, 61쪽)

 

 기준영의 소설은 하나하나가 영화처럼 다가온다. 담백하고 솔직한 묘사로 주변 환경을 스케치하듯 보여주고 인물의 내면을 파고든다. 독특한 건 단 한 명의 주연이 아니라 다수의 조연이 등장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기준영은 소설을 통해 특별한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보통의 그것에 대해 말한다. 보잘 것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말이다.

 

 꿈꾸던 풍경 밖에서 풍경을 보는 일은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본다면 우리는 모두 풍경이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가 메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수많은 카메라와 수많은 연출자가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결정적인 그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찰나의 꿈처럼 마주할 그때를 기다린다.

 

 ‘A캠이 메인이다. 카메라 한 대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연출자가 손짓을 한다. 다른 장소, 다른 상황, 다른 각도, 혹은 다른 정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B캠은 움직인다.’ (「B캠」,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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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되면 꽃이 피는 당연한 일들이, 잠자던 땅이 깨어난다는 사실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건 무슨 이유일까? 자연의 위대함을 다룬 책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는 이유도 그 때문일까? 소설을 읽다가 사건의 중심 속 인물의 내면이 아니라, 계절의 풍경을 묘사한 부분에 빠져든다. 이제는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좋다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봄이 되었고, 친분이 없는 누군가의 트윗에 올라온 꽃소식을 듣는다. 겨울에는 듣지 못했던 새의 소리를 듣는다. 아, 봄이구나!!

 

 아직 아파트 주변의 나무엔 연두의 춤사위는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지 않으니 더욱 알 수 없다. 꽃을 보러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자랄 뿐이다. 오빠네 집에는 커다란 동백이 피었을지도 모른다, 수줍은 목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책들을 뒤적인다.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은 이제 봄의 대명사가 된 책이다.

 

 

 

‘3월이다. 파랑새들이 하늘에서 미끄러지듯 날아다닌다. 4월이다. 고래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희귀한 참고래가 해안에 도착한다. 만으로 들어오고, 가끔 항구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장난을 아는지 거대하고 육중한 몸을 뒤채고, 물 위로 뛰어오른다.’ 23쪽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 우주가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발전을 위해서 그 섬세한 풍경들을 보이고 괴록을 과시하고 인식을 하는 건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억양들은 우리에게 최고의 활력소가 된다.’ 48쪽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우주의 놀라운 괴력을 말이다. 그런 거대한 우주와 만나는 삶은 어디에 있을까. 소로의 사색을 담은 고독의 즐거움속 구절들이 그러하다. 복잡다단한 삶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흙과 땅은 익숙하다. 지금도 논과 밭이 보이는 곳에 살고 있다. 가끔 아침에 창문을 열면 퇴비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익숙한 냄새지만 아직은 향기롭다고 표현하지는 못하겠다.

 

 

 ‘호수는 인생보다 아름답고, 인간성보다 투명하다. 화이트 호수와 월든 호수는 이 땅의 커다란 수정이며 빛의 호수다. 만약 두 호수가 영원히 얼어붙은 상태고 손에 잡힐 만큼 작았더라면 어느 노예가 보석이라 훔쳤을 테고 그것은 마침내 황제의 관을 장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수는 액체인데다 너무도 거대하며 시장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다.’ 252쪽

 

 어린 시절 작은 늪을 우리는 포강이라고 불렀다. 우포 같은 늪지가 아닌 그런 형태를 지닌 작은 웅덩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그 시절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가 되었다. 그 옆을 지날 때마다 물뱀이 나타날까 재빠르게 뛰었던 기억만 남았다. 모든 것은 변하고, 결국엔 사라지고 만다. 사라지는 것들을 우리는 추억하며 그리워한다.

 

 

 

 목성균의 누비처네를 읽으면서 내내 그리웠던 건 어린 시절이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던 나의 마음에 미움이 있었던 시절, 비나 눈이 오면 질퍽거리던 작은 마당, 돼지를 키웠던 우리, 옆집 밭에서 몰래 딸기를 따 먹고 모르쇠로 일관했던 시절이다. 소소한 일상의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발견하는 아름다움은 정말 경이롭다.

 

 

 

신록이 우거지는 초여름, 다랑논을 본 적이 있다.모내기 준비를 끝낸 다랑논은 참 깨끗했다. 가래질을 해서 질흙으로 싸발라 놓은 논둑이 마치 흙손으로 미장을 해 놓은 부뚜막처럼 정성이 느껴졌다. 차마 신발을 신고 논둑길을 건너가기가 죄송할 지경이었다. 골짜기의 물을 허실 없이 가두려고 정성을 다해서 논둑을 싸바른 것이다.

 

물을 가득 잡아 놓아서 거울같이 맑은 다랑논에 녹음이 우거진 쇠재가 거꾸로 잠겨 있었다. 뻐꾸기, 꾀꼬리, 산비둘기의 노랫소리가 다랑논에 비친 산 그림자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송홧가루가 날아와서 논둑 가장자리를 따라 노랗게 퍼져 있었다. 조용히 모내기를 기다리는 다랑논이 마치 날 받은 색시처럼 다 받아들일 듯 안존한 자세여서 내 마음이 조용히 잠기는 것이었다.’ 30, 31쪽

 

 

 

 

 봄이다, 보.옴이라고 말해도 참 예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예쁜 말이지만 봄은 신비한 마술을 부리는 계절이다. 봄을 노래한 시, 꽃을 노래한 시를 찾는 즐거운 날들이다. 나의 계절이 봄이었던 시절, 연인은 내게 이런 시집을 선물했다. 정현종의 한 꽃송이. 아, 그 봄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봄에

 

 진달래꽃 불길에

 나도

 탄다.

 그 불길에 나는 아주

 재가

 된다.

 트는 싹에서는

 간질 기운이 밀려오고

 벚꽃 아래서는 가령

 탈진해도 좋다.

 숨막히게 피는 꽃들아

 너희 폭력 아래서는 가령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

 

- (한 꽃송이,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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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시경 2014-03-21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출하는 차안에서 읽으며,,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네요~ 벌써 수십 번의 봄을 지내왔는데 좀더 각별한 봄이 될 듯 싶어요~누비처네는 참 따뜻한 글인것 같아요^^

자목련 2014-03-22 11:28   좋아요 0 | URL
해마다 오는 봄인데, 봄을 맞을 때마다 새로운 설렘을 갖는다는 게 정말 신기해요.
누비처네, 정말 아름답고 포근했어요.며칠 동안 쌀쌀했던 기운이 사라진 듯해요. 주말, 평온하게 보내세요^^
 
폭설 외 김지원 소설 선집 1
김지원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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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발견하고 알려주는 건 타인이다. 친구나 지인을 통해 혹은 처음 만난 이들을 통해 습관이나 성향에 대해 듣게 된다. 어쩌면 객관적인 그들의 시선이 정확한지도 모른다. 그러니 소설 속 인물은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때문에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속마음 또는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었던 일탈과 욕망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평범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한 일탈은 모두의 꿈이다. 반대로 일탈이 일상인 삶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삶을 갈망하고 부러워한다. 김지원의 소설 <폭설>과 <잠과 꿈>에 등장하는 이들이 그렇다. 그러니까 타인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또다른 누군가의 삶을 흠모하는 것이다. 좀 더 과감한 삶과 사랑,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난 삶을 말이다. 그것은 한국이 아닌 뉴욕이라는 공간이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79년에 쓴 <폭설>이나 87년에 쓴 <잠과 꿈>은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민자, 뉴욕 주재원, 유학생 등의 일상이다. 그들은 쉽게 관계를 맺지만 쉽게 단절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관계가 아닌 소모적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왔지만 누군가는 도피처였으므로.

 

 <폭설>엔 딸만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어머니와 사는 진주가 등장한다. 유학생 시절 꿈과 사랑을 나눴던 정섭과 결혼을 했지만 점차 옅어진 그들의 사랑은 이별로 끝났다. 무기력한 진주의 삶은 직장, 어머니, 어울리는 미스 오가 전부다. 그런 진주 앞에 나타난 남자 기(起)는 그녀를 변화시킨다. 언제나 당당하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기와 사랑에 빠지고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기와 진주는 같은 곳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진주는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원했다. 계획을 세우고 아이를 낳고 뿌리를 내리고 싶었지만 기는 여러 여자와 친구 이상의 관계를 유지했고 진주에게도 그런 삶을 권한다.

 

 뉴욕이라는 공간은 자유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뉴욕에선 결혼생활에 속박되지 않고 각자의 사랑을 즐기자는 기의 태도가 이해받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소설 속 기의 바람과 불륜은 진주에게 질투와 동시에 욕망을 불러온다. 진주는 기의 무의미한 사랑과 방황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돌아본다. 진정 진주가 원했던 삶은 어디에 있는가. 진주의 흔들리는 내면을 잡아 줄 단단한 버팀목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잠과 꿈> 속 혜기도 다르지 않다. 한국엔 친정 엄마가 있고 남편 순구와 아들 완이가 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키우는 일상은 단조롭다. 공원에서 옛 친구 서윤을 만나면서 건조한 삶에 약간의 활기가 들어온다. 한국에서 결혼에 실패한 서윤은 선생님이라 부르는 남자와 살고 있다. 서윤이 직장에 나간 후 그는 제자라는 이유로 많은 여자를 유혹하고 만난다. 남편과는 다르게 자신을 알아보고 긴장시키는 그에게 혜기 역시 다른 여자들처럼 빠져든다. 거기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여자가 있다고 통보하듯 고백한다. 혜기는 순구의 불륜을 견딜 뿐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다. 끓어오르는 열망을 뻔뻔하게 터트릴 수 없었던 혜기는 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김지원의 두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그들은 사랑과 삶,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며 흘러간다. 하여 답답하고 애처롭다. 불확실한 일상에 대한 불안과 위태로움을 안고 사는 수많은 진주와 혜기가 떠오른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 덩어리인 삶, 우리네 인생은 왜 이리 가여운가.

 

 ‘창밖으로 가로수의 헐벗은 가지가 온천지에 구원의 손길을 청하는 듯 바람에 휘청휘청 아무 데나 절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나무와 같아, 뿌리가 땅에 박혀 움직이지 못해. 엄마, 전 무게로 내게 기대지 말아요, 나는 엄마가 생각하듯 행복하고 젊지가 않아, 기력도 없고 생기도 없어. 엄마, 다시 한 번 내게 엄마가 되어줘요, 어린 나를 큰 날개로 봄볕같이 안아줬듯.’ <잠과 꿈,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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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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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때로 충동적인 판단이 옳다고 믿는다. 아주 짧은 순간에 내린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전체가 아닌 한 부분을 통해 전부를 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건 나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엔 그 모든 걸 인정하고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라도 미루고 싶어 한다. 앨리스 먼로의 『런어웨이』속 그녀들도 그렇다. 이곳의 삶이 그곳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곳을 꿈꾼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곳엔 분명 아주 특별한 삶이 존재할 거라 소망한다. 어쩌면 그런 바람이 없었더라면 보잘 것 없는 일상을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설사 신기루라 할지라도 바람은 존재해야만 한다.

 

 여덟 편의 소설은 모두 여자들의 시선에서 삶을 말한다. 그녀들은 주변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주부, 직장 여성, 누군가의 딸, 어머니, 아내다. 그러나 때로 누군가에겐 특별한 사람처럼 보인다. 사랑에 빠졌거나, 남들과는 다른 공부를 하거나, 독특한 취미를 가졌을 때, 세상은 그들이 달라졌음을 알아챈다. 어느 순간 그들의 눈빛, 목소리, 몸짓이 변화한다.

 

 표제작 <런어웨이>의 칼라에게서 실비아가 본 것도 그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매사에 화가 난 듯한 남편 클라크를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원하는 칼라는 본 것이다. 하지만 칼라는 지금의 상황에 아주 작은 변화가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실비아가 빌려준 옷을 입고 토론토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지만 결국 그녀는 클라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녀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어떤 이는 떠나야 했을 거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은 오직 칼라만이 알고 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제와 오늘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칼라가 어느 순간 카펫의 무늬를 발견한 것처럼.

 

 ‘카펫에는 갈색의 작은 사각형 무늬가 있었는데 각각의 사각형 안에는 또다시 짙은 갈색과 적갈색 그리고 황갈색의 곡선과 도형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칼라는 각 사각형 안에는 곡선과 도형의 배열 방식이 똑같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시간이 남아돌 때 무늬를 자세히 살펴보니, 네 가지 패턴이 합쳐져 커다란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열을 쉽게 알아볼 때도 있었고 뚫어져라 쳐다봐야만 알아볼 때도 있었다.’ <런어웨이, 17~18쪽>

 

 칼라와 달리 연작소설 <우연>, <머지않아>, <침묵>의 줄리엣은 변화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줄리엣은 주목받지 않는 학생이었다. 박사 준비 중 여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쳤고 기차 여행에서 에릭을 만난다. 아내가 있던 에릭에게 연락이 왔고 그를 만나러 떠난다. 에릭의 아내가 죽었고 딸 퍼넬러피를 낳았지만 온전한 부부라고 할 수 없다. 줄리엣의 선택은 놀라운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 삶이 항상 행복한 건 아니다. 갑자기 에릭은 죽고 퍼넬러피는 줄리엣을 떠나 소식을 끊는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듯 줄리엣은 혼자서 살아간다.

 

 줄리엣의 삶이 그렇듯, 가족이라 해도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 <반전>의 주인공 로빈을 언니의 조앤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차를 타고 연극을 보러 가는 로빈이 이상할 뿐이다. 그러나 로빈에겐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 몇 시간으로 그녀는 자신이 돌아가려는 보잘 것 없고 불만족스러운 삶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그런 삶을 견디는 것도 전보다 덜 힘들 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 그런 인생, 모든 것 뒤에는 기차 창밖을 통해 보이는 햇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가 있었다. 여름 들판을 비추는 햇빛과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연극의 여운 같았다.’ <반전, 358쪽>

 

 대단한 무언가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운명 같은 남자 다닐로를 만났지만 그게 끝이었다. 오해로 마무리된 운명은 먼 훗날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도 오해가 풀리고 진실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므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므로 지난 삶을 낸시, 올리, 테서가 각자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단편 <힘>에서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확인하려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낸시가 올리에게 하는 말처럼 인생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니까.

 

 “그래도 인생은 흘러간다는 걸 너도 알았겠지.” <힘, 489쪽>

 

 앨리스 먼로는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너무 애쓰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돌아보면 모든 삶이 애처롭고 뼈아픈 것이라고. 거대한 상처로 남은 일도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 경우가 많고, 내가 본 것이 전부라고 믿는 일도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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