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위를 걷는 느낌 창비청소년문학 59
김윤영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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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상 속에서는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있기에 무섭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즐거운 상상만 펼칠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들은 모르는 미래가 내 눈에만 보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그 미래를 바꾸려 노력할 것이다. 공상과학 영화를 떠올리는 김윤영의 『달 위를 걷는 느낌』은 그런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맞을지도 모른다.

 

 『달 위를 걷는 느낌』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주인공 루나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소녀다. 잠이 안 올 때 주기율표를 외우며 자신의 유전자가 자신을 조롱한다고 여기는 똑똑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아이다. 2039년 9월 9일  핵융합 과학자인 루나의 아빠 이필립은 지구를 떠나 달을 향해 가면서 딸에게 줄 영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영상 메시지를 시작으로 소설엔 루나의 일상과 아빠가 루나에게 남긴 메시지가 교차로 이어진다.

 

 달에 다녀온 아빠는 사고로 3년째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입원 중이다. 루나는 특수학교에 같이 다니는 노마, 유니와  함께 아빠가 입원한 병원과 천문대에서 별을 보는 게 전부다. 병원에서 만난 베드로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베드로 아저씨는 다른 어른들과 다르게 루나를 불쌍하게 대하지 않는다. 매일 아빠를 찾아오는 루나를 아끼고 사랑한다. 루나는 한 달 전 등기로 온 편지를 친구들과 아저씨에게만 보여준다. 암호처럼 보이는 내용을 아저씨와 함께 풀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루나는 그게 아빠가 자신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라는 걸 알게 된다.

 

 아빠가 보낸 영상 메시지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빠는 달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한다. 미래의 모습을 본 아빠는 과학자가 아닌 환경운동가의 길을 선택한다. 또한 아빠는 미래의 어느 날 자신에게 일어날 사고와 루나의 슬픔까지 알고 있었다. 아빠가 보낸 영상 메시지는 미래에 대한 경고였고 걱정하는 루나를 위한 안부였다. 끔찍한 일이 닥치겠지만 꼭 기다리는 아빠의 메시지. 루나의 장애를 특별한 아름다움이라 말하는 아빠의 따뜻한 목소리. 그건 작가가 아빠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소통과 희망이었다.

 

 소설에서 마주하는 미래는 과학의 발전으로 매우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행복한 건 아니었다. 방사능 누출 사고로 생태계는 무너졌다. 소설에서 먼 과거의 일로 나오는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과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사고가 원인이 된 것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기형의 아이들, 숲에서는 새의 노래가 사라졌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우주인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된 세상,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지구를 떠나야 하는 삶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참신한 소재로 함께 하는 삶과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해 말하는 김윤영의 소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꿈꾸는 아름답고 황홀한 미래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루나야. 우리 인간에겐 경이로움을 향한 시적인 욕망이 있단다. 과학의 원동력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과학 안에도 아름다운 시가 존재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바로 과학자의 임무란다. 인간의 존엄성은 꺾이지 않아. 우리가 우주를 탐구하는 건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라고 했지? 그러니까 우린 승리할 거야.” (프롤로그 중에서,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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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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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낯선 곳에 대한 동경이 있기 마련이다. 현재와는 다른 삶을 꿈꾼다. 직장에서 퇴직한 후 제2의 인생을 계획하는 이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복잡한 도시가 아니라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한다. 흙을 밟을 수 있는 마당이 있고 무언가를 키울 수 있는 시골 말이다. 하지만 귀농, 귀촌이 모두 성공하는 삶이 되는 건 아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듯 단순한 여행이 아닌 시골에서의 삶은 많은 어려움을 불러온다. 시골에서 살고 있는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골의 실체를 공개한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란 제목처럼 시골의 삶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생활 환경으로는 가혹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다도 산도 숲도 강도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일단 비위를 건드렸을 때에는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혹독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그림 같은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29~30쪽

 

 겐지의 말은 진정 옳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은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마주하는 깊은 숲 속이나 외딴 오지의 삶은 가혹할 정도로 불편 투성이다. 무턱대고 구체적인 계획 없이 시골로 이주했다가는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삶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 겐지는 시골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해 구체적 사례를 들며 조언한다. 지역사회가 바라보는 이방인에 대한 시선,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나누려는 시골 사람들의 마음, 안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위험에 노출된 현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고독과 소음에 대해 말한다.

 

히 시골은 도시와 다르게 의료 장비가 완벽하지 않아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빠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 시골의 소음 공해와는 다른 시골에서도 소음이 있어 오히려 그것이 더욱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점, 동네 경조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해야 하며, 시골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건 사고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공감이 간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시골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내 일은 내 힘으로 한다는 강한 마음가짐과 체력이 필요합니다. 이주하고 나서 도시의 편리함과 비교하며 불평을 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스스로 해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굳이 불편한 곳에서 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185쪽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겐지는 시골로 오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말리는 듯하다. 시골은 평화롭지도 않고 조용하지도 않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의 말은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다면 언제든지 시골로 오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어느 곳에서 살든 고충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시골에서의 삶을 각오해도 좋을 것이다. 단점이 있다면 분명 장점도 있으니까. 결국엔 겐지는 이 책을 통해 시골이 아닌 삶에 대한 자세에 대해 진심을 담아 조언한다.

 

 두 번째 인생을 시골에서 계획한 이들에게는 실직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다. 더불어 현재에 대해 불만을 갖고 변화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그 삶이 막연한 상상에 속한 게 아니냐고 질책하는 목소리로 들린다. 지금 어떤 지역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살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냐는 것이다. 때문에 얼마나 치열하게, 절실하게, 삶을 살아내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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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처네 (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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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것들은 사라진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알게 된다. 언제나 내 손에 닿을 것 같은 사물,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 언젠가는 모두 다 소멸되고 사라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지만 때로 부정하고 싶은 순간과 마주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이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사라지는 것들은 제외하고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사물과 사람도 종내엔 그리움이란 틀 속에 갇히고 만다.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읽으면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비가 오면 요란한 빗소리를 들려주던 양철 지붕과 흙집을 부수기 전까지 불을 지피던 아궁이, 작은 마당 입구를 지키던 두 그루의 나무를 꺼내온다. 지나온 삶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엄마의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함께 한다. 한때는 매초롬한 얼굴을 지녔을 엄마.

 

 글이란 이렇게 놀랍다. 형식에 구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라는 수필이라서 그렇까. 모든 수필이 다 감동적인 것은 아닐 터. 목성균의 시선으로 바라본 평범한 일상 속에 우리네 삶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나는 글을 통해 내 어린 시절 속 나를 불러올 수 있었다. 「고개」란 글에서 목성균이 그랬듯 누군가를 기다리던 고개가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읍내로 통하는 길,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기 위해 그 고개에 서 있던 사람들, 장에 나갔던 엄마를 기다리며 한 곳을 응시하던 아이들.

 

 목성균의 글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을 지닌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고백하자면 제목으로 쓰인 ‘누비처네’도 무슨 뜻인지 바로 알지 못했다. 한때 누구에게나 소중했을 물건이다. 표지의 그림처럼 아이를 업는 누비로 된 이불이다. 손자가 태어나자 객지에 나간 아들에게 아기의 누비처네 사 올 값을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어디 누비처네뿐인가.  전깃불에 반해 버렸던 등잔에선 심지를 가는 방법을 알려주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또한 「기둥시계」란 글은 내게 할머니를 추억하게 만든다. 태엽을 감아 생명을 이어가던 촌스러운 괘종시계로 이어진다. 추억을 선물하며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아주 아름다운 문장에 반하고 만다. 꾸미지 않은 글이 갖는 힘은 정말 위대한 것이다.

 

 ‘우리 기둥시계 바늘이 시간을 돌리는 일은 꼭 소가 연자매를 돌리는 일과 같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꾸준히 연자매의 멍에를 지고 확을 도는 소의 끝없는 노역과, 고삐를 잡고 그 노역 뒤를 따라 도는 방아 찧는 사람의 시간에 초연함 같아서 경외스러웠다. 내 선대 어른들, 아버지 · 할머니 · 증조부 등등 저 청산의 일각의 무덤 아래 드신 생전의 삶들처럼.’ <기둥시계, 149쪽>

 

 우리는 삶이 끝날 때까지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빈손으로 태어나 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게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좀 더 좋은 것을 바라고, 좀 더 높은 자리를 원한다. 맑고 순수했던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나이가 들수록 넓은 아량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데 참 어렵다.

 

 ‘나는 하찮은 내 자리에서 꽃을 피우려 하지 않고 꽃을 피운 남의 자리만 선망한다. 사회 구성 밀도만 차지한 응집력 없는 사람에게 꽃이 필 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화사하게 핀 꽃이 시사하는 바가 가혹하다.’ <꽃이 핀 자리, 550쪽>

 

 먹고 사는 일이 참 쉽지 않은 세상이다.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게 아닌데 그렇다. 내 몸 하나 누울 자리가 없어 비탄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은 아닐까. 오랜만에 만난 따뜻하고 편안한 글이다. 수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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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직전의 우리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4
김나정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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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남겨진 이들의 삶이다.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고되지 않은 죽음의 경우 남겨진 삶이 예전의 그것으로 회복될 수 있는 확률은 낮다. 죽음을 인정할 수 없기에 슬픔과 분노로 채워진 삶을 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생과 동시에 생성되어 자란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떤 말로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 어렵게 얻은 딸이 열두 살에 같은 반 아이가 찌른 칼에 숨졌다면 부모의 삶은 그 순간 사라진 것이다.

 

 김나정의 장편소설 『멸종 직전의 우리』는 이십 년 전에 딸 나림을 잃은 부모가 나림을 죽은 선주의 아이를 유괴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얼핏 복수에 관한 소설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복수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하나의 죽음으로 연결된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딸을 잃은 권희자는 울부짖는다. 열두 살 김선주는 왜 나림을 죽였는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세상은 잠시 나림의 죽음에 주목할 뿐 점점 잊힌다. 권희자의 눈에 비친 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고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결국 이혼의 수순을 밟았다. 정말 남편은 자신의 궤도로 돌아간 것일까? 

 

 소설은 나림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차례로 들려준다. 나림을 죽인 김선주, 나림의 엄마와 아빠, 김선주의 부모, 그리고 나림의 목소리로 이십 년 전 상황을 재현하고 현재의 삶을 보여준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어떻게 그 속을 알겠냐고 선주 엄마는 항변한다. 그러다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해외를 선택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사만다가 된 선주는 여전히 두려웠고 외로웠다.

 

 ‘휘파람을 불면 개는 달려와 꼬리를 살랑거렸다. 사만다는 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들여다보았다. 밤에 악몽을 꾸면 사만다는 한 손을 뻗어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개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덩어리, 살아 있는 것의 감촉.’ 139쪽

 

 부모도 형제도 선주의 아픔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수차례 이름과 신분을 바꿔 김선주가 아닌 윤수인(囚人)이 삶에는 아들 안도(安堵)가 전부였다. 수인과 안도라는 이름이 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런 수인에게 권희자는 이십 년 전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전하며 왜 나림을 죽였는지 묻는다. 선주는 나림의 피아노 소리가 좋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나림은 친구들을 선동해 자신을 왕따시켰다. 선주의 눈에 나림은 정말 행복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엄마의 강요에 피아노를 쳐야 하는 나림은 인형 같은 생활이 싫었다. 나림은 다른 삶을 원했고 죽음이 그 길을 인도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어둠 속에 밝음이, 밝음 속에 어둠이 띄엄띄엄 섞여 들어갔다. 운동장이 저편 멀리로 사라졌다. 천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다시 눈을 뜨면 나는 분명 다른 세상에 있을 것이다. 빰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음표가 끝나고 긴 쉼표가 이어졌다. 꽃잎 한 장이 사뿐, 건반에 내려앉았다. 꽃잎은 소리 없이 건반 위로 굴러갔다. 악보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평화로운 침묵이 이어졌다.’ (195쪽)

 

 평생을 분노와 증오로 살아온 권희자와 알 수 없는 형체에 쫓기듯 살아온 김선주는 고통과 불행을 등에 진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림의 죽음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과 자식을 잃을지도 몰라 절박한 어미의 마음이 전해진다. 지난 사건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할 수 시간은 끝내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한때 우리 곁에서 머물러주었던 모든 것들. 빗방울이 흔들어 놓은 꽃잎들, 젖은 흙냄새와 나무 그들에서 젖은 날개를 말리는 나비들, 구름의 틈새로 보이는 햇발. 소란한 침묵. 멀리서 가까이로, 가까이서 멀리까지. 멀리서 들리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256쪽)

 

 언제 어디서든 죽음은 발생한다. 어떤 죽음은 외롭고 쓸쓸하다. 어떤 죽음은 호상(好喪)이라 불리기도 한다. 복수, 용서, 화해가 아닌 죽음을 축복할 수 있는 몫을 지닌 자의 남겨진 삶은 평온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복수, 혹은 애도는 그저 놓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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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숭아를 좋아한다. 복숭아의 계절은 아직 멀리 있고, 딸기의 계절이다. 나는 딸기도 좋아한다. 한데 최근에 딸기를 먹은 적이 없다. 방울 토마토와 시든 귤만 먹었다. 식탁 위엔 딸기 사진이 걸려 있다. 친구의 선물이다. 친구는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냥 우연의 일치였다.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엔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Some Fruit as Remembered by the Dead) 이란 부분이 있다. 책엔 몇 가지 과일이 등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와 자두에 대해서도 나온다.

 

 

 복숭아

 

 우리가 먹었던 복숭아는 햇볕에 검게 변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뻘건 검은색이지만, 붉은 기운보다는 검은색이 더 짙었다. 시뻘겋게 달궜다가 꺼내 식히는 중이어서 여전히 뜨겁다는 경계심을 갖기 어려운 쇠의 검은색. 말편자 같은 복숭아.

 검은색이 전체적으로 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그들이 졌던 부분은 희끔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늘을 드리웠던 나뭇잎들이 제 색을 슬쩍슬쩍 칠한 것처럼 녹색이 살짝 감돌았다.

 우리 때에는 유럽의 부잣집 여자들이 얼굴과 몸을 복숭아처럼 희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집시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복숭아는 한 손에 꽉 차게 큰 것에서부터 당구공만큼 작은 것까지 크기가 상당히 다양했다. 작은 것의 껍질은 더 섬세하기 때문에 살이 짓무르거나 너무 익을 경우 보일 듯 말 듯 주름이 잡히는 경향이 있었다.

 그 주름을 보면 검게 그을린 팔뚝에서 접히는 중간 부분의 따뜻한 피부가 연상되곤 했다.

 속에는 씨가 있는데 질감은 짙은 나무껍질 같고, 모양새는 제멋대로인 게 꼭 운석 같다.

 이런 야생의 복숭아는 신이 도둑들을 위해 만든 과일이었다. (108, 109쪽)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이라는 제목인데 나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으로 읽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노란 참외를 좋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은 당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할머니는 그랬다. 꽃을 좋아했고, 악세사리를 좋아했고, 예쁜 걸 좋아했고, 조금은 질척한 밥을 좋아했고, 누룽지를 좋아했고... 하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좋아했던 과일을 떠올릴 수 없고, 엄마가 좋아했던 그 무언가도 떠올리지 못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차이였을까.

 

 누군가의 과일을 생각한다. 작은 언니가 좋아하는 귤, 오빠가 좋아하는 배, 큰 언니가 잘 먹는 토마토, 과일이라면 모두 좋다는 친구 H. 어쩌면 그 모든 게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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