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대상을 흠모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여전히 그 대상은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애정의 온도는 식지 않았다. 하지만 끓는점을 향해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지근한 온도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무엇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무엇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열정이 끓는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적확하게 알고 있다는 게 싫다. 괜한 투정이다. 억지스러운 마음이다.

 

 10월이 되었고 끼니처럼 불안이 몰려온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절망이 나를 감싼다. 하고 싶다는 마음을 핑계로 삼았다. 옅어지는 간절함을 당연하게 담았다. 어떤 움직임 없이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절감한다. 그러니 이 마음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으면 다짐은 사라지고 만다. 부서질 다짐이라도 말이다. 무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의 열정이 소모되지 않았다면 다시 끓어오를 수 있을까. 거창한 도전이라는 이름이 아닌 부단한 노력만이 그것과 맞닿을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10월은 자책의 시간으로 시작된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사랑 연서인 <정확한 사랑의 실험> 뒤적이며 (알았더라면 구매 여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집을 둘러본다. 제목이 매혹적이다. <죄책감>, <우울은 허밍>이라니. 지난 시간을 허투루 보낸 내가 읽어야 할 시가 될 것 같다. 그날을 잊지 않기로, 그날을 새겨야 하는 이유를 작가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이언 매큐언의 신간 <이노센트>, 친구에게 선물할 김동률의 <동행>까지.

 

 

 

 

 

 

 

 

 

 

 

 

 

 

 

 

 

 겨우 오늘 아침에 여름 이불 빨래를 끝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꺼내는 이불처럼, 생각의 두께도 달라지면 좋겠다. 바람의 크기와 냄새에 맞는 적당한 이불처럼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저마다 열심을 내는 치열한 삶 속에서 정말 읽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걸까.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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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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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하고 기록한 것은 역사가 된다. 나의 역사가 나라의 역사란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6.25 전쟁을 경험한 할머니의 기억이 내게는 역사다. 그러니 위대한 역사의 기록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실제 사건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기막힌 픽션인 최민석의 <풍의 역사> 도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의 삶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손자 이언이 들려주는 할아버지 이풍의 이야기다. 1930년 8월 15일에 태어난 할아버지 이풍은 미소년의 외모와 큰 키로 또래 소녀부터 유부녀까지 사랑을 받았다. 언제 어디서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풍의 눈에 들어온 여인은 수선, 이풍은 그녀를 밤이라 불렀다. 그녀와 이풍의 사랑을 질투한 앞잡이의 계략으로 강제 징집된다. 이렇게 이풍의 삶은 15년 뒤 광복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 전쟁, 격동의 80년대를 지나 현재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풍의 삶엔 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적 사건의 중심엔 항상 풍이 있다. 물론 그 옆엔 항상 그를 위험에 빠뜨리는 앞잡이가 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장소에 둘은 언제나 함께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밤에게 돌아가기 위해 풍은 최선을 다했지만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도 앞잡이는 그를 막고 있었다. 앞잡이가 풍을 위기로 몰아넣는다면 풍을 위로하고 동행하는 오 중사가 있다. 오 중사는 군대에서 알고 지냈던 후임으로 포로수용소에서도 함께 지낸이다. 고통과 기쁨을 나눈 사이다.

 

 ‘사람들이 풍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저 풍이 빚어내는 세계가 자신들이 그간 처하고 겪어 온 세계와 맞닿아서 익숙하면서도 왠지 새로웠고, 매일 보는 것이면서도 이상하게 못 본 것 같아서 좋았다.’ (119쪽)

 

 작가 최민석은 너무나도 아픈 역사를 재치와 해학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는 게 미안할 정도다. 풍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다. 계획한 대로, 소망한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권력에 농락당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풍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알 수 없다. 그저 수많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이 존재했기에 현재가 있다는 걸 짐작할 뿐이다.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가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게 만들었다면 최민석의 <풍의 역사>는 한반도를 너머 아시아의 역사를 들여다보게 한다. 거대한 역사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풍의 이야기로 말이다. 최민석은 익살스럽게 건넸지만 허풍만 남은 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삶은 이야기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계속된다.

 

 ‘삶은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단지 이력서에 몇 줄 써질 경력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밤하늘의 별처럼 잠들지 않게 하며, 이불을 덮고서도 그 속에 빠져 새벽을 맞게 하는, 즉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전히 흘러가고 있기에, 또 하루를 온전히 살게 하는 바로 그 이야기였다.’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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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기행 -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
김봉규 글.사진 / 담앤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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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판으로 문패를 만든 적이 있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문패를 만드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아파트 현관 앞에 붙여 두었는데 볼 때마다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내 집이 아닌 아파트가 사랑스럽게 보였다. 이 책의 현판과는 다른 의미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 문패가 자꾸만 생각났다. 물론 그 기억을 살려 다시 문패를 만들 수 있겠지만 그때 그 시절의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건 그때 그 마음이다. 어쩌면 저자가 현판을 통해 전하고 싶은 건 그 마음이 아닐까 싶다. 정성을 다해 쓴 작품 속에 담긴 마음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붓글씨를 배우면 어떨까, 잠시 생각했다. 때때로 내가 쓴 손글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악필도 정성을 들여 연습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이다.

 

  책은 제목 그대로 현판 기행이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정자와 누각, 선비의 정신이 이어온 서원과 강당,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사찰,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의 현판 이야기를 들려준다. 잘 알려진 사찰이나 서원에 걸린 현판뿐 아니니 어떤 것이든 사연을 담고 있으면 남다르게 다가온다. 서예가로 잘 알려진 이의 글씨뿐 아니라 역사 속 인물이 쓴 글씨를 볼 수 있다. 책 한 권으로 전국 곳곳의 현판을 만날 수 있다. 저자가 소개한 현판은 마치 살아있는 듯 힘이 넘치는, 도를 닦는 듯한 정갈한 마음이 전해지는, 왕이 쓴 글씨와 최초의 한글 현판 등 정말 다양하다. 

 

 

필암서원 앞 경장각 정조의 초서 편액인 ‘경장각(敬藏閣)’

 

포항 출신 서예가 운봉 금인석의 ‘큰법당’, ‘방적당’ 편액 ​

 

 

 개인적으로 무척 눈에 뜨고 인상적인 현판은 화암사 극락전 편액이다. 나무에 한 글자씩 따로 만들어 걸었다. 역시나 누가 쓴 글시씨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절로 아름답다, 란 말이 나온다. 그러니 직접 마주하면 그 느낌이 얼마나 다를까. 숱한 화재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작품들이 사라졌을까. 정말 안타깝다. 우리가 후세에 전할 우리의 문화재를 관리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화암사 ‘극락전(極樂殿)’ 현판

 

‘글씨는 훌륭한 편액 체인데 그것을 새긴 편액 나무는 가장 소박하다. 그런 데다 나무판을 똑같이 세 등분한 뒤 글자의 형태에 맞춰 두 개는 세로로 새기고 하나는 가로로 새긴 점이 참으로 많을 것을 생각하게 했다. 글씨를 쓴 이도 아마 좁은 공간에 맞는 크기로 최대한 잘 썼는데, 세 글자 모두 같은 규격으로는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것을 굳이 다시 쓰게 하지 않고, 하나는 글씨를 다담기 위해 편액 나무판의 방향을 달리해 새기고 다른 두 개와 달리 엉성하게 보이더라도 그냥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로 멋과 여유가 느껴지는 일품의 편액으로 다가왔다.’(191쪽)

 

 현판이라는 게 쓰고 싶다고 쓸 수 있었던 건 아닐 터. 화재의 중심에 선 숭례문의 현판은 과연 누가 쓴 것일까? 책의 의하면 추사 김정희도 한양에 올라올 때마다 숭례문 현판 글씨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낙권도 없고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게 아쉽다. 글씨를 쓴 사람은 후세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글씨를 두고 논쟁을 했을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동안 많은 이들이 주목했던 건축 양식이나 공간에 담긴 사연이 아닌 오롯이 글씨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떠나는 여행도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이제는 무심코 지나쳤던 현판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게 돌 것이다. 저 글씨를 쓸 때 무슨 마음이었을까, 과연 저 글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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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공장 -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김중혁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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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물건이든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지갑을 들고 마트나 백화점에 가거나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면 된다. 빠른 속도로 안방까지 배달이 가능하다. 때문에 그러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장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다. 하루가 다르게 신기한 물건을 만드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고모는 형광등을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 기억이란 참 묘해서 아직도 형광등을 볼 때마다 그 상표가 생각난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 종종 보았던 정갈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러니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은 정말 신선한 발상이다. 학생도 아닌 소설가가 공장을 산책하고 취재하다니. 유쾌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았던 기대는 딱 맞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들려줄 다음 공장 이야기가 기다려졌다.

 

 김중혁 작가가 소개하는 공장은 우리네 일상에서 친근하게 다가오는 물건들을 만드는 곳이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 공장, 매일 먹는 음식을 만들 때 꼭 있어야 하는 간장 공장, 여성의 몸과 항상 함께 하는 브래지어 공장, 사랑을 나눌 때 필요한 콘돔 공장, 영화가 먼저 떠오르는 초콜릿 공장, 그곳에 가면 왠지 아름다워질 것 같은 화장품 공장, 지구를 만드는 지구본 공장 등 15개 공장이다.

 

 소설가답게 그가 맨 처음 소개한 공장은 제지 공장이다. 전자책의 등장으로 종이책이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종이로 만든 신문을 읽고, 잡지를 구독하고 책을 읽는다. 아마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제지 공장이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나무에서 생산된 펄프로 종이를 만들고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은 다시 폐지가 되고 다시 재활용이 된다. 순환,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말인가. 

 

 

 

 

 

 ‘제지 공장 마당에는 엄청난 양이 재생 펄프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는데, 마치 잔잔한 파도를 보는 듯했다. 펄프는 겹겹이 쌓여 있었고,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거긴 정말 바다 같았다. 종이로 가득 찬 바다, 나무로 만든 바다, 우리가 버린 바다, 누군가 되살린 바다.’(22쪽)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게 된다는 말처럼 좋아하는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선 김중혁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콘돔과 브래지어 공장에서는 글에서도 부끄러움이 느껴졌지만 스스로 가방 중독자라 고백하며 가방 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그가 얼마나 가방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명품이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가방 말이다. 그의 말대로 결핍이 불러온 중독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방이 없었고, 내 책상이 없었다. 가방만이 유일한 내 것이었고, 내 가방엔 내 것을 넣을 수 있었다. 가방을 들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해지고, 안전한 곳에 있는 것 같고, 모든 게 준비돼 있는 것 같았다. 가방은 축소한 집 같다. 가방에 달린 주머니들은 각각 하나의 방이고, 그래서인지 나는 수납 공간이 많고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가방을 유독 좋아한다.’(82쪽)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생경하고 재미있지만 그것에 담긴 김중혁의 시선과 사연을 들을 수 있어 더욱 좋다. 지금과 다르게 모든 게 귀했던 시절 초콜릿과 피아노는 부의 상징이었다. 김중혁이 추억하듯 피아노는 특별했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아이들만 만질 수 있는 악기였고, 어른이 되면 꼭 배우고 싶은 악기였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피아노는 애틋한 존재다. 예쁜 얼굴의 화장품 판매 아주머니에게 엄마는 립스틱이 아닌 손과 얼굴에 바를 수 있는 크림을 샀다. 누군가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점점 찾기 어려운 대장간 공장, 음악의 의미를 되새기는 엘피 공장,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게 만드는 맥주 공장, 모두 다 유익하고 재미있다. 특별히 인상적인 공장은 지구본을 만드는 공장과 김중혁의 글 공장이다. 한국이 지구본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 처음 알았다. 거기다 나라의 수도가 바뀔 때마다 수정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니, 정말 몰랐다. 김중혁은 지구본을 보며 우주 속 티끌보다 작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글을 썼지만 나는‘세계는 넓다’며 포부를 크게 가지라며 지구본을 아이들에게 사주는 부모가 생각났다. 

 

 김중혁의 글 공장은 말 그대로 김중혁의 소설이 물건이 되는 것이다. 글감이라는 재료를 분류하고 숙성하여 소설, 수필, 그림 세 개의 생산 라인으로 이동한다고 설명한다. 좋은 글(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노트와 연필을 그림으로 보여주는데 문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정말 탐이 날 정도였다. 이 산책기가 특이한 점은 각각의 공장에 대한 특징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제품의 특징과 공장의 분위기를 포착한 그림은 사진 이상의 생생함을 전달한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공장 산책기다. 만약 내게도 공장 산책의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거울 공장, 커피 공장, 양말 공장에 가고 싶다. 장소에 따라 얼굴이나 체형이 다르게 보이는 거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하고, 커피향으로 둘러싼 공장에서 황홀한 기분으로 일하는 경험도 하고 싶다. 알록달록 예쁜 양말 공장에 가면 사시사철 차가운 발을 감싸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과거와 달리 공장이라는 이미지는 사람 대신 기계가 일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하지만 김중혁의 산책기에서 알 수 있듯 공장에는 사람이 있었다. 기계를 작동하고 관리하는 건 사람이다. 똑같은 과정을 하루 종일 반복하고, 불량 제품을 찾아내고, 자신의 자리에서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까 공장은 사람들을 위한 물건을 만드는 곳이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신성하고 귀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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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도를 사랑한다 - 경주 걸어본다 2
강석경 지음, 김성호 그림 / 난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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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높아지는 가을 하늘은 투명한 도자기를 떠올린다. 가마 속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나온 맑은 도기 찻잔에 차를 마시면 가을을 마시는 느낌이 날 것 같다. 강석경의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는 그런 차 맛이 난다. 커피향이 아닌 은은한 차향(茶香)을 닮았다.

 

 신라 천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지켜온 경주를 걷는다.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포석정, 안압지 밖에 모르는 내가 남산, 감포, 월성, 황룡사지, 교동을 알지도 못하는 지명을 따라 읊으며 걷는다. 경주는 그저 관광지에 불과했다. 그러니 강석경의 산책로는 신이한 경로였다.

 

 강석경이 들려주는 손금처럼 이어진 경주의 골목, 아름다운 곡선미를 뽐내는 고분들,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장엄한 신라의 일부로 남은 궁궐터가 전부다. 골목 담 위에 떨어진 감을 먹거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능의 풀과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오늘도 대릉원 담을 끼고 걸어오다 담 위로 솟은 능선을 보며 미소 지었다. 능에는 풀이 돋기 시작했고 초록 풀을 비집고 노란 들꽃이 깔려 있었다. 바람이 부니 까까머리에 돋아난 풀들이 파르르 물결쳤다. 어던 사심도 구속감도 없으며 순수 자체인 생명들이 우주의 자유를 합창하는 듯했다.’(42쪽)

 

 눈 닿는 곳마다 고분이 보이는 경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있을 것 같은 곳이다. 발길 닿은 곳마다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시. 그러므로 경주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이를 아는 강석경은 경주가 품은 태곳적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한다. 걷기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생의 근원을 갈망한다. 그러다 경주를 만든 사람들, 경주를 지킨 사람들, 경주를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창작과 예술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 책은 작가 강석경의 내밀한 일기이자 떨리는 고백이기도 하다.

 

 ‘내가 그릇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어 있기 때문이다. 차라도 담겨야 제구실을 하겠지만 나는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무엇이든 담을 용의를 지니고 겸손하게 비어 있는 모양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99쪽)

 

 ‘도를 닦는다는 생각 없이 똑같이 반복하다보면 자기 반영이 먼저 된다. 창작 이전에 자기 실상을 볼 수가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 바느질중에 번뇌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번뇌를 놓고 쉬고 몰입하다가 군더더기가 떨어져나간다. 일 분, 십 분, 백 분 장시간 인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단순하기 때문에 닦여진다. 그러니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근본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163쪽)

 

 그는 마치 경주를 손금처럼 품은 듯 걷고 또 걷는다. 향토사학자인 고 윤경열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경주에 홀려 경주에 정착한 이방인이 아닌 생활자의 산책이라 더욱 생생한 경주를 만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이방인인 독자는 조금 낯설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 생활자가 아닌 방문객은 모두가 여행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경주 지도 한 장을 꺼내들고 하루 종일 천천히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길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강석경의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경주를 꿈꾸고 경주로 달려갈 채비를 끝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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