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전하는 일은 얼마의 마음 조각이 필요한 일일까. 곧 닫힐 11월을 보내는 날들이라 그런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립다. 어느 계절을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작아져서가 아니라, 일이 많아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불안하고 서운하다.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 건 아닌가 쓴 약을 마시는 짐작을 한다.
또 한 해를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제대로 살지 못한 날들을 홀로 원망한다. 매년 올해의 리스트를 작성했지만 2014년에는 쓰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일상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며 그들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다짐도 냉동실 속 아이스크림처럼 얼어버렸다. 이제는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하고 누군가의 소식을 듣는다는 건 소소한 기쁨이 아니라 아주 큰 즐거움이다.
작은 소동이든 큰 사건이든 일어나고 해결된다. 죽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매일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가까운 이, 누구나 다 아는 공인,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듣는다. 때문에 죽음에 익숙해진다. 때문에 죽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마주한 소중한 이의 죽음은 버릴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지울 수 없는 그림이 된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이별, 미련과 기대와 슬픔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리는 깨끗한 결단. 종지부. 두부를 삼키면 두부가 눈앞에서 사라지듯이 죽음은 그들을 삼켜 없애버린다.’ (내 침대 아래 죽음이 잠들어 있다 중에서, 187쪽)
어쩌면 나는 박연준의 『소란』에서 그 상처와 그림을 매만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의 문장이 건네는 안부가 오직 나를 위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문장에서 그 봄을 떠올리고 잠시 봄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꽃 진 다음 이파리가 주인공이라고 외치듯, 막 태어난 색깔인 듯 화사하게, 처녀의 종아리처럼 빛난다. 아직은 떨어질 일이 없다고, 아마 영영 없을 거라고 자신하는 저 몸짓! 앳된 얼굴들. 자전거를 막 배운 아이처럼 생동하는 움직임! 눈물이나 떨어짐, 기우는 일 따위는 모르는 듯 떨다 웃다 선명해지는 저 잎사귀들. 저건 어느 나라 사파이어지? 그늘마저 화사한 4월의 나무들! 좋다. 참 좋다!’ (이파리들 전문, 145쪽)
4월을 편애하는 내게 이런 문장은 달콤한 커피처럼 스며든다. 겨울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봄으로의 도피를 도와주는 문장이다. 그 봄, 어디든 연두가 춤을 췄다. 그리고 그 봄 부실한 이를 가진 마른 과일 껍질 같던 아버지가 밥상에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고 있었다. 제 기능을 상실하는 귀로 인해 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나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뱀이 된 아버지」 의 일부
귀여운 귀여운 아버지
사그라지는 몸
사그라지는 목소리
사그라지는 실체
마침내 잦아드는,
흘러넘치는
아버지라는 액체 -「물빛, 정오」 의 일부
아버지도 무언가가 되었을까. 시 때문인지 박연준과 아버지는 같은 단어로 여겨진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킨 큰언니에게 아버지는 어떤 단어로 기억될까. 아직 그 질문을 큰언니에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묻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는 걸 안다.
곧 12월이 된다. 잠시나마 세상의 죄악을 덮을 수 있다고 믿는 천사의 눈이 내릴 것이다. 12월의 첫날, 다시 이 문장을 읽을 것이다. 끝이라는 말보다 시작이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 12월이 될지도 모른다. 12월이 되면 불안을 누르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나만의 12월을 갖고 싶다.
‘이상하다. 12월이 되면 모든 것의 윤곽이 흐려진다. 달력의 숫자들조차 꿈틀거리며 도망가려는 듯 보인다. 명징한 얼굴을 보여주길 거부하듯, 12월이 품은 날들은 웬일인지 모두 흐리다. 인디언들은 12월을 ‘다른 세상의 달’ 혹은 ‘침묵하는 달’,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 ‘늙은이 손가락 달’, ‘태양이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달’ 등으로 부족에 따라 달리 부른다. 재미있다. 우리말로 12월은 ‘매듭 달’이다.’ (12월, 머뭇거리며 돌아가는 달 중에서, 197쪽)
여전히 당신의 목소리는 내게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목소리도 당신에게 닿을 수 없다. 안부 대신 건네는 문장을 당신의 목소리로 읽히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곧 현실이 되리라는 믿음과 함께. 가느다란 믿음이 이스트를 품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오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