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사라진 말들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녔기에 침묵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공포가 몰고 거대한 침묵,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이 말을 잊게 만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는 쉽게 나쁜 기억이나 심한 트라우마라고 말한다. 경험자가 아닌데도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말하곤 한다. 무려 20여 년이 훌쩍 지났기에 이제는 나아지지 않았냐고 묻는다.

 

 나는 몰랐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모른다. 당신의 입술이 굳게 닫힌 이유를, 당신이 망각의 삶을 선택한 이유를 모른다. 부끄럽고 창피한 고백이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른이 되어서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소설과 영화로 수많은 당신을 만났지만 이번에 만난 한 소년은 달랐다. 소년이란 글자가 말하듯 너무 어렸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13쪽)

 

 ‘혼은 자기 몸 곁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45쪽)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왜 자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소년은 모든 게 어려웠다. 그러나 누나와 형 곁에 있고 싶었다. 친구를 찾겠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뜨거운 가슴을 뒤로 한 채 엄마가 있는 집으로 혼자 돌아갈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강당 바닥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들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혼도 떠나지 못하는 그곳에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다, 나는 모른다. 소년의 행동을 읽는 나는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서로가 누군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서로가 얼마나 오래 함께였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어. 처음부터 함께였던 그림자와 새로 온 그림자가 나란히 내 그림자에 겹쳐질 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척을 구별할 수 있었어. 어떤 그림자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들을 오래 견딘 것 같았어. 손톱 아래마다 진한 보랏빛 상처가 있던, 옷이 젖어 있던 몸들의 혼이었을까. 그들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 끝에 닿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의 기척이 저릿하게 전해져왔어. 만약 그렇게 좀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59~60쪽)

 

 왜 그들은 죽어야 했을까. 왜 그들은 죽어서도 엄마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다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지만 제대로 된 생을 사는 이는 없다. 어느 누가 이토록 잔혹한 시간을 온몸으로 겪고 먼지를 털 듯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견디며 죽음을 바라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시간은 밖의 시간일 뿐이다. 진실인 양 들려주는 보도와 몇 장으로 남겨진 사진을 통해 그 거리와 시간에 들어설 수 없다. 과감히 그 시간에 들어갈 용기를 가진 이도 없었을 것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벌어진 잔혹하고 야만스러운 인간 그 이하의 행위는 말할 수 없는 말들이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런 말들은 쌓여 독이 되고 스스로를 병들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죄를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어떻게 그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일부러 도려내고 도려냈던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몸에 새겨진 잔인한 시각을, 끊임없이 펼쳐지는 악몽의 날들을 말이다.

 

 사실은 이 소설에 대해 아주 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제대로 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건 매우 어리석고 건방진 생각이었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들은 소설 속 인물들뿐이다. 기억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 기억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이들도 그들이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고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쪽)

 

 이처럼 한강은 인간의 고통을 향해 직진한다. 우회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고통의 본질을 캐내려 한다.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야 나눌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것은 외부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내부의 존재와 맞닿았을 때 궁극적인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그리하여 아주 미세하게 나마 고통의 일부에 공감할 수 있어야 희망이라 이름 붙일수 있는 삶의 조각을 간직할 수 있으니까. 대낮의 태양이 되기 위해 태양 안에서 그것을 견디려는 「노랑무늬 영원」 속 이런 구절처럼 말이다. 소설을 통해 내게로 온 소년, 그 소년이 내게 건넨 말들도 결국엔 그것이었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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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빈 방 - 죽음 후에 열화당 영혼도서관
존 버거, 이브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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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 바로, 나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도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영원히 빈 공간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그곳에서라도 그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잣말을 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떤 이는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지속한다. 누구도 그 시간을 방해할 수 없다. 충분한 애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당신은 사 주 전에 죽었지.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이 돌아왔다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없어진 자리에 당신의 존재감이 돌아왔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론도」 2번(작품번호 51)을 듣고 있던 중이었소. 구 분 남짓한 동안 당신은 그 ‘론도’였고, 그 ‘론도’가 당신이었지. 거기에는 당신의 밝음, 당신의 고집, 당신의 치겨 올라간 눈썹, 당신의 부드러움이 들어 있었다오.’ (10쪽)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 버거의 글은 부드러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마치 그 햇살로 아내를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사십 년이라는 시간을 산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분명 아내는 죽었다. 그러나 여전히 곁에 존재한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함께 한다. 만질 수 없는 형체로, 볼 수 없는 이미지로, 대답이 없는 메아리로.

 

 ‘당신을 유심히 보면, 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오. 모자를 쓰거나 코트를 입은 모습, 머리를 만지는 모습, 문을 여는 모습,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 당신은 길을 찾는 사람이오.’ (13쪽)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 잊는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생생했던 세포는 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진 익숙함에 꺼내지 않는 옛이불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단 하나의사랑이었던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새삼 힘들다. 무엇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예정된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존 버거는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뒤돌아보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그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당신은 시간을 벗어난 곳에,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으니 말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31쪽)

 

 존 버거와 베벌리 버거가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며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의 물건에 담긴 아내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자 노력했을 존 버거. 점점 사라지는 아내를 향한 눈빛은 얼마나 애틋했을까. 화수분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잊혀질 수 없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통해 아들 이브 버거에게 전해졌을 사랑은 감히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지속된다. 어쩌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나 밖에 없다는 말은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어디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엄마의 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요. 잠시 후면 저희가 고른 돌멩이가 엄마 무덤 위에 놓이겠죠. 흙과 풀 사이에 놓은 텐데, 그러면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바라요.’ (35쪽)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듯이. 아내의 빈 방이 존 버거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이 얇은 책으로 사랑을 전부 담을 수 없다. 그저 부재 속에 존재하는 당신이라는 사랑을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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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파크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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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욤 뮈소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7년 후』와 『내일』을 읽었지만 강렬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묘하게 궁금하고 끌리는 작가였다. 그런데『센트럴 파크』는 달랐다. 강력한 펀치를 한 방 날린 듯한 느낌이랄까. 놀라운 흡입력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신선한 여운을 남겼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오늘을 맞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러니까 꿈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면? 소설은 이처럼 기이한 일로 시작한다. 주인공 알리스는 분명 파리에서 친구들과 헤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뉴욕의 공원 벤치였다. 거기다 옷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고 낯선 남자와 함께 수갑을 찬 상태였다. 파리 경찰청 강력계 형사인 알리스는 즉각 총을 찾고 남자를 깨운다.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남자 가브리엘은 아일랜드에서 공연을 마쳤다며 영문을 모른다고 대답한다. 누가 자신을 파리에서 뉴욕의 센트럴파크까지 데리고 왔을까. 가장 필요한 건 휴대폰. 십 대의 휴대폰과 주차된 차를 도난하여 도주한다. 알리스는 파리의 동료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경찰과 추격전을 벌인다.

 

 그런데 가브리엘이라는 이 남자, 믿어도 괜찮을까?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벌인 일일까. 생각의 끝에는 과거 자신이 수사했던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있었다. 알리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2년 전 알리스는 범인이 휘두른 칼에 아이를 유산했고 병원으로 오던 남편도 교통사고로 잃었다. 아이와 남편을 잃은 게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는 그 후로 알리스에게 삶은 사라졌다.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알리스는 파리의 동료에게 비밀리에 범인의 흔적을 찾으라 부탁한다.

 

‘인생의 수레바퀴는 점점 빨리 돌아간다. 2013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나는 완벽하게 이전의 모습을 되찾는다. 나는 넘치는 자신감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강력계를 이끌고, 그러는 사이 팀원들의 파트너십도 한껏 고취된다. 그 무렵 나는 다시 한 번 아직 삶이 나에게 바라는 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252쪽)

 

 소설은 2년 파리의 잔혹한 사건과 현재를 오가며 알리스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알리스는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복직 후 겨우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가브리엘과 함께 사건을 풀어날 갈 수밖에 없다. 알리스의 손바닥의 숫자와 가브리엘의 팔뚝에 상처로 새겨진 숫자만이 유일한 실마리다. 잠적한 살인사건의 범인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도주한 것일까. 숫자가 가리키는 호텔과 우연하게 발견하는 알리스 몸에 박힌 금속의 이물질.

 

 동료의 도움을 받아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듯 범인을 추적하는 도중 알리스는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가브리엘의 정체가 밝혀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비밀에 놀라고 만다. 손을 뗄 수 없게 만든 기욤 뮈소의 트릭에 빠져든 것이다. 센트럴파크에서 시작된 치열한 하루를 함께 달린 독자도 마찬가지다. 뻔한 범주에서 살짝 빗겨나간 결말이 완벽하게 즐겁다. 절망의 순간에 누군가 손을 내민다는 설정이 진부하지 않고 완벽하게 다가온다. 기욤 뮈소는 소설을 통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바로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단 한 사람이 있어 삶은 빛날 수 있고 적으로만 여겨졌던 세상이 동지로 다가오는 걸 느끼게 된다는 걸 말한다. 그만큼 기욤 뮈소의 애정이 담긴 소설이 아닐까 싶다. 길고 긴 겨울밤을 함께 보낼 이야기를 찾는다면 『센트럴 파크』가 제격일 것이다. 

 

‘우리의 생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지닌 모순, 두려움, 회한, 분노, 머릿속에 들어있는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어 안아주는 당신의 반쪽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켜주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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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어떻게 고이는 것일까. 어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며 어떤 시간은 일 분이 한 무한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과거의 시간에 매여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며 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속한 시간은 살아 있는 시간일까, 죽어 있는 시간일까. 박솔뫼의 『도시의 시간』을 읽고 나는 어떤 시간에 갇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말이 되지 못하고 맴돌다 사라진 시간의 숲에서 헤매는 듯하다. 소설 속 우나처럼 준을 기다리고 찾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일본에서 대구로 온 우나와 우미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우나와 우연하게 친해진 배정은 화자인 나와 같은 학원에 다닌다. ​우나는 집에서 준의 노래를 들으며 준을 생각하고 우미는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에 다니는 나는 걷는 걸 좋아하고 대학 시험에 세 번 떨어진 배정은 대구에서 나서 자랐다. 그러니까 네 명의 공통점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시간이 많다는 점도 같았다. 우나와 다르게 우미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미용실에 다니는 우미의 엄마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구속되지 않은 시간은 자유롭지만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우나는 죽은 아버지가 유산처럼 남긴 1954년에 태어나 1976년에 ‘돌핀’이라는 음반을 낸 가수 제니 준 스미스를 듣는다. 내가 학원에서 수업을 받는 시간에 우나는 도서관에서 준에 대한 기록을 찾는다. 그리고 나와 우나는 함께 걷도 준에 대해 말하고 준을 상상한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거리를 걷고 걸으며. 우미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귄다. 배정은 그들 중 하나였다. 학원에서 나를 불쌍하게 봐주고 챙겨주던 배정은 우미와 사귀면서 조금 달라진다. 배정의 시간 속엔 우미가 있었지만 우미의 시간 속엔 배정이 없었다. 나의 시간 속엔 우나가 있고 우나의 시간 속엔 준이 있듯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지금 같은 대학생이 직장인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것이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되는 것 없이 변하는 것 없이 완성되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고 나아가는 것도 없다. 그것만은 꼭 그렇게 될 것이다.’ (46쪽)

 

 소설은 같은 하나의 음악으로 채워진 음반처럼 반복하고 반복한다. 준의 음악을 들으며 그녀를 좋아하던 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나, 일본으로 돌아가 학교에 다니고 단 한 사람의 연인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꿈꾸는 우미, 우미를 향한 마음이 커지는 배정, 집과 학원과 거리가 전부 인듯 살아가는 나. 계절이 흐르고 해가 바뀌어도 그들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우나의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멈춰진 것만 같은 네 명의 시간과 달리 빠르게 변화하는 대구의 시간을 통해 박솔뫼는 어떤 시간을 붙잡고 싶었던 것일까. 살다 보면 잊혀진 사람들과 어떤 날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후 우미를 통해 우나의 죽음에 들었을 때 떠오르는 준의 앨범이 발매된 1976년과 우나와 함께 준의 음악을 듣던 침대가 있던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모호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불편하거나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어, 그렇게 수긍하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박솔뫼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연약하고 연약한 10대의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약하지만 연약한다는 걸 믿지 않던 시절들 말이다. 이제는 하나의 점으로 남아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성장이라는 말이 아닌 통과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두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언제나 누군가가 있다. 어떤 날에 내가 모두를 알게 되듯이 누군가 모두를 알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나도 알아 버려도 좋고 알아줬으면 좋고 알고 마음대로 그 누군가의 마음대로 나를 완전히 이해해도 좋다 좋아요 좋습니다. 그래 줬으면 좋겠다. 아주 짧은 순간 내가 모두를 이해하듯이 누군가가 길을 혼자 걷는 나를 보면 모두를 이해한 누군가는 나를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172쪽)​

 

 묘하게 정지향의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가 겹쳐지는 소설이다.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걷는 기분이랄까. 그럼에도 어떤 시절에는 단 하나의 단어로 말해버리게 되는 시간들. 이런 문장은 그 시절에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감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과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누군가가 존재했던 연약하게 흐르던 시간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나는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전체가 좋지는 않고 아까 아침에 걷다가 다리를 지날 때쯤에 그때 바람이 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천천히 다가와서 나를 그 안에 집어넣었어. 내가 바람 안으로 들어간 건데 강제적이지는 않고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어.”

 “네가 들어간 거야?”

 “내가 들어간 건데 바람이 집어넣은 것이기도 해. 그러니까 바람이 커다란 장막이 되어 나를 넣은 채로 갈 길을 간 거야.”

 “저절로 그렇게 된 거야?”

 “어,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지.”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저절로. 내일 또 그렇게 되고 다음 날 또 그렇게 되면 잊고 지내다가 한 달쯤 후에도 그렇게 되면 바람은 자주 나를 넣는 거잖아.”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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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 삶에 질식당하지 않았던 10명의 사상가들
프레데리크 시프테 지음, 이세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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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장소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혼자 찾은 영화관이나 목욕탕이 되기도 한다. 마음껏 나를 드러내도 좋은 공간 말이다. 남에게 보이기 싫은 눈물과 표정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곳은 책이 된다. 책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고마운가. 고해성사를 하듯 책 속의 누군가에게 속상함을 털어놓아도 좋다. 그러니 프레데리크 시프테의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속 이런 문장에 반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펼치지 않더라도 책을 가지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정신이 부재하는 삶의 구역과 자유 구역의 경계선을 언제라도 넘나들게 해주는 친구가 내 손닿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57쪽)

 

 제목에 대한 기대는 ‘불행한 이가 일단 통찰력을 가지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기만하거나 물러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란 에밀 시오랑의 문장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의 말대로 개인적인 에세이일 뿐이다. 다만 에세이의 소재가 열 명(니체, 페소아, 프루스트, 쇼펜하우어, 『전도서』의 저자, 몽테뉴, 샹포르, 프로이트, 로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작가와 사상가라는 거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삶을 통찰하는 철학을 배우는 시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프랑스 철학교사이자 작가인 저자가 선택한 10명 가운데 절반 정도만 익숙하다. 오히려 낯설어서 더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다. 저자는 그들을 상징할 수 있는 문장을 소개하며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삶과 사상에 동의하고 때로 반격한다. 시종일관 까칠하고 시니컬하다. 철학을 논하고 사유하는 삶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려하거나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배우는 본질적인 것은 전부 불행의 경험에서 온다. 몸소 불행을 겪을 수도 있고, 남의 불행을 지켜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앎은 어떤 식으로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116쪽)

 

 절대로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불행은 없다. 절대로 나의 불행이 타인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 그의 말에 격하게 수긍하면서도 피하고 싶은 게 불행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견디지 못하는 감정들, 버리고 싶은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것 같다. 순조롭게 읽기고 쉽지는 않지만 아주 묘한 책이다. 철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이지 않은 책이다. 

 

 철학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상실, 고독, 고통, 죽음을 초월한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을까. 소개된 10명의 사상가와 작가가 아니라  ‘생은 전염병이다. 세월에 의해 허무에 감염되는 것이 생이다.’ (128쪽)란 저자의 문장에 빠져든다. 프레데리크 시프테의 불친절한 매력에 빠지고 만다. 그의 방식대로 슬픔 한 조각을 마시고 조금은 권태로운 생을 살아도 좋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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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1-1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 끝을 봐야겠어요! 맨날 읽다 말다하는 나쁜버릇을 고쳐야^^

자목련 2015-01-15 10:18   좋아요 0 | URL
지금쯤은 다 읽으셨을까요?
저도 요즘 이 책을 읽다, 저 책을 읽다 그래요. ㅎ

2015-01-13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15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