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은 2층 양옥집이었다. 시골에서 온 나의 시선에 그 단독주택은 양옥집이 분명했다. 1층에는 상가를 두었고 2층에는 주인집과 셋방이 있었다. 그리고 주인집 거실을 지나 계단으로 오르면 옥탑방이 나온다. 천장이 낮아서 키가 큰 사람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그 방에서 3년 하고도 3개월 정도를 살았다. 옥탑의 특성상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웠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시절을 견뎠을까 싶기도 하다. 혼자가 아니라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하나의 방. 그러나 나에겐 돌아갈 유일한 곳, 집이었다.


루시아 벌린의 『웰컴 홈』을 읽으면서 나는 그 방의 형태를 그려보았다. 친구의 책상 위에는 친구가 좋아한 연예인 사진이 있었고 언제라도 바닥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던 작은 옷장이 있었고 문 옆에는 전기밥통이 있었다. 나의 흔적이 남은 곳, 나의 눈물과 기쁨을 지켜본 공간이 여전히 존재할까. 오래전 연락이 끊긴 그 친구는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대학시절에는 다른 친구의 집에 잠깐 머물렀다가 대학 동기와 3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루시아 벌린의 에세이 덕분에 접혔던 날들이 펼쳐지는 기분이다.


루시아 벌린의 에세이는 이상하게 애틋하고 아프다. 비통한 슬픔으로 가득 찼다거나 고통의 순간을 극대화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들려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 내게는 그녀가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것만 같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록하는 일은 쉽고도 어렵다. 혼재된 기억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시대의 역할도 있기 때문이다. 루시아 벌린의 어린 시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순수하고 천진함을 잃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이런 아빠의 편지가 아니었을까.


나중에 커서 아름답고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단다. 하나는 예수님의 생애와 네가 자라면서 읽게 될 많고 훌륭한 책들이야. 네 엄마도 스승이고 아빠도 스승이지. 모두 네 옆에 있으니(아빠도 조만간 네 옆에 있게 될 거야)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생기면 네가 도움을 청할 수 있어.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큰 스승은 네 마음일 거야. 마음이 가볍고 가뿐해서 노래를 부루고 싶어지면 착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란다. 마음이 어둡고 창피한 느낌이 들면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이지. (121쪽)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가 쓴 편지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최고로 아름다운 당부가 있다. 내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 가벼운 마음과 어두운 마음 그 사이에 있다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인생은 열린 책』이란 단편집을 통해 그녀가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고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며 살았다는 걸 알았지만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읽으니 더욱 그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생각한다. 소설의 장면과 겹쳐지는 부분을 만나는 일은 마치 내가 그녀를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기분으로 신이 나기도 했다. 두 권의 책을 나란하게 두고 한 번 더 읽는다면 가만히 그녀와 포옹하는 느낌일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전부예요. 역설적이지만 만사가 평안해요. 그다지 긴장되지 않은 생활이죠. 사실은 행복해요. 모든 일이 잘 돌아가서 행복한 건 아니고 인생의 굴곡진 곳, 공포의 안과 밖, 그곳이 어디든 갈 데까지 다 가봤기 때문에 그래요. 명백히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집은 이래저래 도움이 될 테고 그건 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겠죠. (147쪽)


하지만 고달픈 인생을 사는 일이 그렇듯 그런 인생을 읽는 일은 따갑고 아리다. 수많은 이사를 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삶이라고 간단하게 쓸 수는 없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그녀는 어떤 순가에도 평점 심을 잃지 않는 것 같다. 순간의 감정에 최선을 다했다고 해야 맞을까. 사랑과 결혼생활, 그리고 글쓰기까지 말이다.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듯 나는 그녀의 인생을 모른다. 남겨진 글, 미완의 글을 읽으면서 그녀가 지나온 집들에서 그녀가 생각하고 매만지고 완성되었을 글을 생각한다. 글에 대한 그녀의 열정, 고민을 가장 가까운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고, 거의 모든 페이지에 내용을 보태고 있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까지 슨 글의 대부분을 나도 좋아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슬픈 일은 예전에 내 이 빌어먹을 마음이 큰 기쁨으로 가득해서 내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에 대한 마음도 말랑말랑했고, 그 때문에 다음 단락에서 그들을 어떻게 그릴지, 어떤 웃기거나 아름다운 일을 앞에 두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게 할지에 대해 세심히 배려하며 집필했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내 마음 상태가 그렇질 않은데 처음부터 다시 이 소설을 이끌어가자니 그럴 수가 없어서 슬픈 거라고요. (186쪽)


많은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읽다 보면 그녀가 무척 외로웠구나 싶다. 글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때로 불안하고 때로 우울하고. 몇 번의 이사가 아닌 열여덟 군데의 다른 집에서 살아온 그녀가 안착하고 싶었던 공간은 어디였을까. 세세하게 기억하고 기록한 집에 대한 글은 묘한 기분을 불러오는데, 그 기록이 그녀의 굴곡진 삶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1년 전 있었던 바로 그곳에 돌아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울증이 사라졌어요. 그 모든 상황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우습기도 해요. 버디의 아버님은 3년 전 우리가 눈이 맞아 달아났을 때 세월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래도 인생은 흘러간다고요. 무슨 뜻에서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예언적인 말씀이었어요. 인생이란 그런 거라고,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라고. (242쪽)


슬픔, 기쁨, 즐거움, 상처, 아픔, 상실... 이 모든 것들이 순환하는 게 인생이구나.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끝까지 나쁜 건 아니라고. 삶이란 그런 거라고.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지나온 방과 집을 그려본다.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 내가 써 내려간 삶의 편린들.


“집에 가려고, 나는 집에 가려고 글을 썼다. 내가 안전할 수 있는 곳. 나는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글을 썼다."라는 루시아 벌린. 그녀가 들려줄 더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게 아쉽다. 어딘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그녀의 글을 찾았다는 그런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진솔하고 우아한 그녀의 인생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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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병원 진료로 주말 아침을 시작했다. 한글날이었던 어제도 다녀왔다. 어제 의사는 고막이 많이 얇아졌다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막에 대해 설명을 한참 했다. 이렇게 긴 시간 병원에 다니고 항생제를 먹어야 될 줄 정말 몰랐다. 오늘도 의사는 그만 와도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여전히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있다. 아주 열심히 말이다.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어서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한다. 이 살을 어쩌란 말이냐.


지난주부터 바뀐 약이 너무 써서 약사에게 문의를 했더니 “소태처럼 쓰죠?”란 답이 돌아와다. 아,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정작 ‘소태’가 무언지 몰랐다. 검색을 해보니 소태나무의 껍질이란다. 약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초콜릿, 사탕을 먹어도 그 맛이 사라지지 않는다. 잠들기 전까지 나는 소태맛을 느끼고 있는 지경이다. 


오늘 병원에서는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를 보고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독감 예방접종을 하러 온 것으로 보였다. 할머니는 사투리가 심하셨다. 손녀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느껴졌다. 그랬더니 손녀가 자신의 이름을 정정해 주었다. 혹여 추울까 봐 손녀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 후로도 할머니의 말을 손녀는 계속 정정했다. 할머니와 손녀는 호미를 하나 산 것 같았다. 손녀가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접종 후 주의사항을 듣고 손녀에게 오늘은 호미질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손녀는 그 호미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궁금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니 그 모습이 정말 친근하고 정겨웠다. 나도 할머니가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읍의 작은 병원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만나 안부를 전하고 전혀 모르는 이들이 서로의 농사에 대해 조언을 한다. 시골에서나 가능한 풍경이다. 아마도 첫차를 타고 온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병원을 들러 저마다 자신의 일터로 돌아갈 분들이었다. 주말이나 휴일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은 일상이었다. 가을은 마늘을 심고 생강을 캐고 벼를 추수하는 계절이다. 그리고 이런 국화의 꽃망울을 기대하는 날들이다. 







아파트 화단에 수국과 작은 국화 화분 옆에 제법 큼직한 화분이 하나 더 놓였다. 노란 꽃망울을 곧 터트릴 것 같다. 은은하게 국화향이 나는 것 같았다. 가을이 익어가는 장면이라고 할까. 우리의 가을도 익어가고 있는 걸까. 귀는 통증은 거의 사라졌지만 나는 조금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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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딘가 아프면 그걸 치료하는 과정이 정말 지치게 만들죠. 가을 국화에서 작은 위로를 발견하셨기를 바래봅니다

자목련 2020-10-11 15:24   좋아요 0 | URL
하루 일과이 시작이 병원이에요. ㅎ
말씀처럼 국화를 보니 반갑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바람돌이 님, 편안한 오후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0-10-1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다니는 것부터가 힘들지만 다 낫고나면 지나갈 수 있을거예요. 빨리 좋아지셨으면 좋겠어요.
자목련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0-10-11 15:23   좋아요 1 | URL
네, 처음 통증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서니데이 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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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고 기묘한 것들이 매혹적으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그것과 사랑에 빠졌을 때일 것이다. 하지만 삶 전체가 그렇다면 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까. 처음 만나는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그런 삶에 대해 들려준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그러나 전혀 모르는 세계라고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제목처럼 사랑, 광기, 죽음이란 단어에 인간의 삶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과 지배받기를 거부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게 우리의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나같이 인상적인 이야기로 몇 편의 소개만으로 묘한 떨림과 공포와 충격을 전할 수 없어 안타깝다. 부록을 포함해 모두 18편의 단편은 매우 강렬하다. 아무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지만 손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그만큼 독특하다고 할까. 오라시오 키로가가 그려낸 환상과 공포의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처럼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었던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운명처럼 만난 두 남녀가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는 다소 뻔한 설정으로 다가오는 「사랑의 계절」은 결국 사랑의 허무함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세워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마음은 보석세공사와 그의 아내의 욕망으로 보여주는 「엘 솔리타리오」 에서도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가면 뒤에 숨긴 광기라고 할까. 행복할 것만 같은 신혼이 불안과 공포의 날들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깃털 베개」에서 아내는 점점 허약하지고 끝내는 의식을 잃고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에게 남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광기로 몰고 가는 건 사랑뿐일까. 연이은 불운과 불행으로 이어진 날들과 대면한다면 어느 누가 온전히 살 수 있을까. 아이 넷이 모두 백치인 「목 잘린 닭」속 부부에게 자식은 더 이상 소중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육체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네 번의 실패를 경험했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 얻은 막내딸은 건강했고 부부의 기쁨이 된다. 그러나 ‘목 잘린 닭’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딸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섬뜩한 공포와 함께 부부가 불확실한 욕망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백치 아이들을 잘 돌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오라시오 키로가는 알고 있었던 걸까.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부질없는 욕망에 매달리는 인간이라니. 얼마나 딱하고 안쓰러운 존재인가. 오라시오 키로가는 이런 욕망의 비극, 인간의 헛된 호기심과 허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처참한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천연 꿀」을 통해 확인시키며 교훈을 전한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벌집을 입 위에 대도 흔들어보기도 하고, 다 먹어치운 벌집 안을 샅샅이 뒤져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라도 욕심을 버렸어야 했다.”(209쪽)


언제나 막심한 후회를 통해 배운다.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만 어리석은 인간은 사랑에 목을 매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에서 대부분 사랑은 끝내 광기가 되어 삶을 망친다. 그러나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는 다르다. 친구의 여동생으로 겨우 이름만 알고 있는 여성이 갑자기 한 그를 찾는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애타게 그를 찾고 그가 곁을 지키자 조금씩 진정된다. 혼미한 정신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여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병세 때문이라고 믿지만 그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기를 바란다. 병이 나은 여인은 그와 줄다리기를 하듯 밀었다 당긴다. 그가 떠날 의사를 밝히자 자신의 사랑을 전한다. 그의 감정이 광기로 변하기 전 사랑을 확인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쩌면 어린 시절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아내의 죽음까지 맞이하고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 오라시오 키로가의 비극적인 생이었기에 죽음에 대한 불안, 공포, 두려움, 환상으로 채워진 거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가 보여준 소설을 통해 우리는 삶을 느끼고 돌아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심연의 광기를 생각한다.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죽음과 아득하게 펼쳐지는 우리의 생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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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엄마 오늘의 젊은 작가 25
강진아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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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형태는 다양한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삶과 죽음으로 본다면 우리의 삶은 모두 같은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별은 언제나 예정된 일이다. 어떤 형태로, 어떤 방법으로 이별하는냐에 따라 상실과 애도의 크기가 다르다. 고백하자면 강진아의 『오늘의 엄마』는 피하고 싶었던 소설이다. ‘엄마’란 단어 때문이다. 오늘의 엄마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어제의 엄마’만 있을 뿐이다. 엄마의 인생, 엄마의 사랑, 이런 진부한 이야기를 꺼낼 거라는 편견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읽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이야기였다. 아니, 어쩌면 그저 평범한 보통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의 일상을 지켜보는 일, 간절히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도 조금씩 사라지는 그 시간을 붙잡고 싶은 애타는 마음.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엄마를 지키는 일, 그것은 안쓰러우면서도 고단하고 피곤한 일이다. 소설은 그런 과정을 아무렇지 않게 차분하고 평온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울지 다 전해진다.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정아는 생각했다. 3년 전 남자친구를 사고로 잃고 겨우 일상을 유지하는 정아에게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언니와 함께 병원을 알아보고 부산에 계신 엄마를 서울로 모셔와 치료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폐암은 수술이 어려웠다. 엄마는 항암을 거부했다.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고 대체 요법을 찾았다. 부산, 서울, 경주, 어디든 엄마가 좋아질 수 있다면 갈 수 있었다. 아픈 사람의 곁을 지키는 일은 고요한 호수의 풍경을 유지하는 것만큼 힘들다. 간병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부족하고 환자의 상태는 수시로 변화기 때문이다. 어제와 똑같이 포개진 일상일 것 같지만 삶 전체를 감싸는 불안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시간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된다. 정아 역시 그랬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엄마가 지나온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자매를 키운 엄마의 시간을 알아간다.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와 엄마의 동생인 이모와의 관계. 처음에는 이모와 외할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던 엄마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별이 다가오기 전에 만나야 할 이들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간병과 투병에 대한 모든 것들이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점점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은 나의 큰언니를 불러왔다. 공교롭게도 큰언니도 폐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간병 아닌 간병을 했던 나였기에 이런 내용이라면 더욱더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큰언니와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후회가 되면서도 그리웠다. 이상한 건 소설을 읽으면서도 전혀 아프거나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자꾸만 눈물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더 살뜰하게 간병하지 못했던 나에게 화가 나고 큰언니를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미안한다. 소설은 그저 1여 년의 시간을 묵묵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너무 당연해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엄마의 꿈을 듣고서야 엄마가 자신에게 해 준 모든 것이 희생이었음을 깨닫는다. 정아는 언제나 엄마에게 요구하기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키워 주고 먹여 주고 들어주고 챙겨 주는 사람이니까. 이토록 일방적이기만 한 관계였다는 사실이 정아를 찌른다. (253쪽)

엄마가 떠나고 삶은 계속 이어진다. 당연한 일이다. 그리움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이다.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소설이다. 누군가는 경험했고 누군가는 경험할 이별에 대한 이야기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과정, 모두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것이다.

‘오늘의 엄마’란 제목이 참 좋다. 아주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오늘의 엄마는 오늘만 존재한다. 우리는 모른다. 오늘처럼 언제나의 엄마로 존재할 거라 여기고 어리석게 살아간다. 자식의 삶이란 본디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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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0-0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든 뭐든 만나면 다 헤어지는군요 죽음으로 헤어지는 것만큼 마음 아픈 건 없을 듯합니다 언젠가 자신도 떠나겠지요 오늘을 살아야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살다보면 그걸 잊는군요 이런 이야기는 정말 마음 아플 듯합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은 몰랐던 엄마를 알게 되기도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기도 하죠 비슷하면서도 다르겠지요


희선

자목련 2020-10-08 13:41   좋아요 1 | URL
네, 모든 것들과 이별하는 게 삶의 이치인 것 같아요. 엄마에 대해 더 많은 걸 알았더라면 좋았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일교차가 심하넹. 희선 님, 건강 잘 챙기세요.

sklee8811 2020-10-1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보석이 각자 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듯이 인생도 각자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더군요.
사실, 당신이 보석입니다.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0-10-11 15:17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것 같아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 그게 인생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좋은 오후 보내세요^^
 
소설 보다 : 봄 2019 소설 보다
김수온.백수린.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겐 저마다의 고유한 언어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다. 문장 안에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고저에 따라 다른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고유한 분위기라고 해도 좋을까. 소설가에게 그것은 문체가 될 것이다. 번역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만나는 한국문학을 더 많이 읽는 내게 문체와 분위기는 아주 중요하게 다가온다. 거대한 서사, 정확하고 놀라운 자료 수집에도 놀라지만 매력적으로 이끄는 건 그런 것이다. 『소설 보다 : 봄 2019』를 읽으면서 더욱 그랬다.


 ‘도시의 서쪽에는 숲이 있다. 나무가 우거져 있으므로 그늘이다. 숲에 작은 면적의 호수가 있다. 거기 유일한 빛이 비추고 있어.’ 란 문장만으로도 김수온의 「한 폭의 빛」은 작가의 등단작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상실과 애도, 그리고 물이라는 이미지. 몽환적인 분위기는 절망과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상황만으로도 소설 속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녀의 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손수건, 물, 연기, 그러한 단어가 간직한 신비한 슬픔이 달려든다.

백수린은 단편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서 기존의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과감함을 선보인다. 그러니까 이 과감함이라는 건 욕망을 표출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도발적인 분위기를 엿보이는 제목처럼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희주가 겪는 내면의 변화를 설명하는 게 아닐까 싶다. 희주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붉은 벽돌집’이 상징하는 행복 혹은 안온한 삶이 가능할까. 과격한 표현이나 대화 없이도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백수린의 방식이 탁월하다.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는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해한다는 말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기대는 항상 차고 넘친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건 옳은 것일까? 3년 만에 아들을 만나러 호주에 온 부모의 기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일상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차마 집이라 할 수 없는 공간과 흑인 노인과 문신을 한 여자애와 살고 있는 아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너무도 힘겹다.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긍정할 수 있지만 내 아이는 그럴 수 없다는 마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가족은 이미 해체되었다. 삶의 방식도 빠르게 변화한다. 가장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느낀다.


김수온, 백수린, 장희원 세 명 모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상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을지도 모르는 모습이다. 그것이 소설의 순기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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