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번은 절망한다. 하루에도 몇 번은 희망한다. 그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97쪽)

춥고 쓸쓸한 겨울밤이다. 까만 밤이 내리는 듯하다. 그런 밤은 때로 외로워서 눈에 힘을 준다. 시를 읽는 밤이 늘어난다. 마음이 울적해서 시를 읽기도 하고 아무 기대 없이 펼친 시집에서 다정한 마음을 선물 받는다. 시가 있어 좋은 계절, 겨울이다. 시가 태어나는 과정을 알지 못한다. 불현듯 쏟아지는 별똥별처럼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시인만이 아는 통로에서 시를 발견하는 것처럼. 아니었다. 하나의 단어가 확장되고 하나의 문장을 고치고 다듬어졌을 때 시가 되는 것이었다.

시인은 떠났고 나는 시인이 남긴 시를 읽는다. 위암이 발병해 투병했다는 소식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아렸다. 암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일상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조금은 알기에. 그 시간을 지켜보았기에.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시인의 부재가 아프고 아프다. 어쩌면 고국이 아닌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한다. 곁에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사랑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었을 게 분명한데도 나는 자꾸만 그런 생각을 들춰낸다.

시인에게 시는 전부였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정말 그랬다. 2011년부터 2018년 떠날 때까지 쓴 시작 메모는 온통 시였다. 시인의 삶에 시는 그냥 시로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시와 시인은 하나였고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였다. 메모라고 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사유는 시를 향한 갈망이었다. 하루를 시작하고 날씨를 기록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를 다녀오고 그런 보통의 일상도 하나같이 시의 시작이었다. 시를 목적으로 하는 삶, 시를 향한 마음, 새로운 시를 쓰는 일상은 시처럼 고요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시처럼 어려웠다. 어스름의 순간, 나는 하나의 장면을 상상한다.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의자에 담긴 어떤 기운을 느낀다. 나는 시인이 아닌데도 그 마음을 짐작하고 싶다.


간절히 기다릴 때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저녁이 찾아오는데 등이 시려서 옷을 하나 더 껴입으려다 슬그머니 당신의 손이 내 등에 닿아 있다 생각하고 옷을 의자에 내려둔다. (26쪽)

겨울을 즐겨야 할 시간이다. 하얗게 쌓인 눈으로 둘러싸인 세상. 눈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지만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일은 어렵다.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도 그러하다. 막막한 밤이 지나고 나면 아침이 온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한 번씩 새벽에 깰 때면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도 잠들지 못한다. 스마트폰을 만지다가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도 오른쪽 왼쪽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한다. 그 시각이 길어서 힘이 든다. 내가 원하는 건 깊은 잠일뿐인데. 시인이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한국의 서울에서 지인을 만나고 돌아가는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끼는 이의 시를 읽고 그들이 건네준 애정을 받고 다시 삶을 위해 돌아가는 그 길을 상상할 수 없다.

오늘 나의 일은 초록이 얼마나 무성한지, 그 무성함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참혹한 시간을 살게 하는지 생각하는 것. 가을이 오면 그 시간들 앞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언어의 욕망에 시달릴 것인가. (175쪽)

시인의 계절은 어떤 모습, 어떤 표정이었을까. 새해의 시작 시인의 글을 따라 읽으면서 내가 지나온 계절들을 떠올린다. 무더웠던 여름, 사랑에 빠졌던 봄, 병실에서 보냈던 여름, 그 계절들과 시인의 그것이 같을 수 없겠지만 문득 신성하게 다가온다. 타인의 부재와 슬픔을 통해 삶을 배우고 살아가는 우리의 계절들.

언젠가 쓸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301쪽)

언제나 내가 원하면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을 쓸 수 있다고 믿으면 살아온 나였다. 그러나 시인의 말처럼 나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인의 글이 가슴에 박힌다. 쓸 수 없는 삶, 보통의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건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만을 생각하며 겁에 질려 살 수는 없는 일. 병원에 가기 전에 베란다 창 틀에 올려 둔 귤을 퇴원 후 돌아와 마주하며 쓴 시인의 글이 오래 마음을 붙잡는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307~308쪽)

그때를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떠날 존재다.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은 서글프지만 그러므로 우리의 생은 아름답게 빛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담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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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04 1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에서 코로나로 사망하신
분들에 대한 장례 기사를 읽었는데,
팬데믹 시절의 비정함에 대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네요.

지구별에 머무는 동안 빛나도록 노력
해야겠습니다.

자목련 2021-01-05 09:55   좋아요 1 | URL
준비하지 못한 영원한 이별, 얼마나 아플까 싶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일상의 변화가 참 서글픕니다.
그러니 살아 있음에 감사가 절로 나오기도 하고요.

scott 2021-01-0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허수경시인에 유고집
자목련님에 첫문장
[하루에도 몇 번은 절망한다. 하루에도 몇 번은 희망한다. 그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여러번을 읽었네요.
허수경시인이 번역하신 파울 첼란 1920년 11월,이제는 지도에서 사라진사라진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태어나 1970년 4월 파리의 센강에 투신했던 시인에 운명과 도 겹치네요..

우리모두 사라질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순간 열심히 살아야겠죠

자목련 2021-01-05 09:56   좋아요 1 | URL
가슴 먹먹한 문장들이 많지만 어떤 날은 그런 문장이 큰 힘으로 다가옵니다.
소한인 오늘, 춥고 차갑지만 따뜻함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니데이 2021-01-04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유고집이네요. 저는 그 직전에 나온 책을 선물받은 적이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부고를 알게 되었던 생각이 납니다.
자목련님 새해 첫 주말 잘 보내셨나요.
올해도 좋은 일 가득한 한 해 되세요.
새해복많이받으세요.^^

자목련 2021-01-05 09:57   좋아요 2 | URL
네, 유고집이에요. 그래서 더 쓸쓸하게 다가오고요.
서니데이 님, 즐겁고 건강한 화요일로 채우세요^^

scott 2021-02-10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2관왕~*
추카~추카~
설연휴 가족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래요.^.^

자목련 2021-02-10 16: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스콧 님을 비롯한 이웃님들 덕분이에요.
스콧 님도 건강하고 평온한 명절 보내세요^^
 


한 해의 끝이 아쉬운지 밤새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바람은 제 할 일을 했다. 기온도 내려가서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 잠깐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이다. 힘을 주어 열려고 한다면 탈이 날 것이다. 어제는 안부를 전하려고 휴대폰 전화 목록을 살피다가 가장 많이 받은 문자가 재난문자라는 걸 실감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스템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모든 정보에 쉽게 접근하고 더 깊게 알 수 있다. 빠른 정보도 좋겠지만 정확한 정보 전달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전기압력밭솥을 버리면서도 그랬다. 폐가전 무료 수거를 신청했지만 소형의 경우에는 5개를 모아서 신청을 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5개를 모을 수도 없고 집안에 둘 공간도 마땅치 않아서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했더니 경비 아저씨께 여쭤보라는 답을 했다. 스티커 가격을 듣고 조금 놀랐다. 여름에는 무료(오디오와 비디오)로 버렸으니까. 재활용을 위한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버리스타가 되어야 한다는 공익광고를 볼 때마다 언젠가 이 세상은 쓰레기 천국이 될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무조건 다 재활용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소한 것들이 중요하고 소중하다. 분리수거를 하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진다. 잘 알아야 하니 잘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나도 잘 지켜야 하는데. 때때로 부끄러운 순간이 많다.


12월 31일이 흐른다. 내일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의 첫날이다. 오늘과 내일, 똑같은 하루지만 의미를 부여하니 다른 세상으로 구분된다. 송구영신예배는 올해도 드리지 못할 것 같다. 작년에도, 그전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예배인데 올해는 참석하지 못한다는 쪽으로 기우니 조금 아쉽다.


2021년을 위한 달력이 많아졌다. 동네 치킨집에서 배달을 시켰더니 맛있는 메뉴가 가득한 탁상 달력이 함께 왔다. 서점에서 보내준 달력까지 생각지 않았던 달력 풍년이다. 코로나로 인해 은행이나 거래처에 방문을 하지 않아서 달력을 구매했다는 친구가 생각났다. 생일이나 주요 행사를 달력에 표기한다는 친구다. 집안에 있는 게 익숙해서 필요한 곳이 아니면 외출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이 쓸쓸하게 다가오는 날들이다.


새벽에 내린 눈이 녹고 있다. 눈사람으로 변하는 한강의 단편 <작별>이 생각난다.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사람은 아니더라도 마른 감정의 삶, 뜨거운 눈물이 사라지는 그런 삶일지도 모른다. 어제 우연히 방송에서 배우 이순재 씨가 60년 만에 친구를 만나는 장면을 보았다.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은 친구라는 부제가 뭉클했다.


모든 걸 다음으로 미루는 시간을 사는 해는 올해로 끝났으면 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봄을 기다리는 기대와 설렘을 품어본다. 조심스럽지만 기대를 키울 수 있는 날들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시를 읽으면서 씁쓸한 마음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 내년에는 산뜻하고 신나는 일상을 꿈꿔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다.



너무 이상한 관계들

너무 이상한 싸움들

너무 이상한 진실들

너무 이상한 당신들

너무 이상한 공기들


싸구려가 된 죽음 싸구려가 된 골짜기


모르고 싶어요

나는 몰라요


(……)


당신은 사하라

나는 툰드라


우리

만나지 말아요


그래야, 남을 수, 있어요 (「놀라운 일, 바이러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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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21년 새해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로 가득차시길 바랍니다.

☆★*☆★*☆★
* Happy *
* New Year~ *
★☆*★☆*★☆

자목련 2021-01-01 17:01   좋아요 1 | URL
친절하고 다정한 스콧 님,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환한 웃음이 가득한 날들이면 좋겠어요!

Falstaff 2020-12-31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규리의 시집, 찜했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자목련 2021-01-01 17:02   좋아요 1 | URL
기대에 부응하는 시집이기를 바라요.
언제나 좋은 리뷰 잘 보고 있어요.
올해 어떤 책들을 읽으실까 벌써 궁금하네요^^

수이 2020-12-3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자목련 2021-01-01 17:03   좋아요 0 | URL
향기로운 이웃 수연 님, 감사합니다.
즐겁고 신나는 일상을 이어가는 새해이기를 바라요.
수연 님이 읽으실 울프의 소설도 기대하고요^^

mini74 2020-12-31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산뜻하고는 신나는 일상이 내년엔 마구마구 쏟아지길 바랍니다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

자목련 2021-01-01 17:04   좋아요 1 | URL
넵, 정말 올해는 그런 일들이 별처럼 쏟아지면 좋겠어요.
모두에게요!
미니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초딩 2020-12-3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자목련 2021-01-01 17:04   좋아요 0 | URL
초딩 님, 감사합니다. 2021년 복된 새해, 즐겁게 시작하시길 바라요!

희선 2021-01-01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라디오 방송에서 들으니 가전제품은 그냥 내놔도 가져간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거 몰랐습니다 그런데 작은 건 다섯 개를 내놔야 한다니... 잘 버리셨기를 바랍니다

날짜가 바뀌었어요 자목련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웃을 일 자주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냥 웃어도 된다고 하지만...


희선

자목련 2021-01-01 17:06   좋아요 2 | URL
여름까지는 소형 갯수 제한이 없었는데 바뀐 것 같아요.
희선 님, 이곳은 펄펄 눈이 오고 있어요.
희선 님,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건강 잘 챙시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고마워요!^
 
부디, 얼지 않게끔 새소설 8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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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모르는 사소한 변화를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면 행운아다. 타인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시대가 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직장 동료와의 관계는 그저 사회적 활동을 위한 관계로 인식하는 이가 많으니까. 입사 동기의 경우는 서로 경쟁을 하면서도 위로를 하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동료 이상의 감정을 키우고 좋은 친구로 발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강민영의 장편소설 『부디, 얼지 않게끔』속 인경에게 희진은 정말 고맙고 필요한 존재다.

인경과 희진의 직장은 여행사다. 인경은 고객을 인솔하여 계획을 짜고 가이드를 하고 희진은 경리 업무를 담당한다. 처음엔 서로 잘 몰랐다. 베트남 출장을 함께 가면서 인경과 희진은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희진이 인경의 몸의 변화를 알아보고 언급하면서 둘은 급격히 친해졌다. 인경의 변화는 더위를 타지 않는 것이었다. 인경도 몰랐다. 자신이 무덥고 습한 여름에 땀 한 방울을 흘리지 않고 휴대용 선풍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희진의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몸이 달라졌다. 에어컨 바람이 싫어서 카디건을 챙기고 선크림도 사용하지 않았다. 베트남 출장에서 인경과 희진은 변온동물처럼 변온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희진이 그런 종류의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기사, 논문, 자료를 공유해 주었다.

내 몸이 나도 모르는 사이 변온동물처럼 변하고 있다면 어떨까? 인경은 자신을 알아봐 주고 이해해 주는 희진이 있기에 직장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인경은 희진을 알지 못했더라면 자신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희진에 대해 편견이 가졌을 거라 생각한다. 타인의 배려와 이해 대신 소문을 믿고 그대로 판단하는 실수. 인경과 희진을 통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실체를 마주한다. 더위에 강한 인경은 점점 두려워진다. 겨울이 오면 어떻게 될까.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자신에게도 그런 시기가 오는 건 아닐까. 인경은 운동을 시작하고 희진과 모든 걸 공유한다.

막바지 더위로 모두가 피하는 제주도 출장을 인경이 선택한 이유도 날씨 때문이었다. 인경에게는 최적의 날씨였다. 제주도로 희진이 휴가를 오면서 둘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날이 시작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걱정까지도. 인경에게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는 건 최악이었다. 몸은 빠르게 반응했고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제품을 사들였다. 희진이 여름을 견디기 위해 많은 선풍기를 사용했던 것처럼. 하지만 처음 맞는 몸의 변화는 인경의 외부로 나타났다. 직장 동료와 상사는 얼굴색이 좋지 않다며 걱정했고 다양한 건강식품을 추천했다. 외출을 하지 않고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일은 견딜 수 있었지만 출퇴근은 점점 힘들어졌다.


“누구나 변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인경 씨처럼.”

나를 배웅하며 희진이 건넨 말을 떠올렸다. 정말 누구나 이렇게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는 거라면, 그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버텨내고 있는 걸까. (중략) 누구에게나 힘든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을 버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차분하게 찾아보자던 희진의 말. 원인을 찾아 헤매기보다 앞으로를 대비하자는 희진의 다독거림은 확실히 효력이 있었다. 희진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믿기로 했다. (80~81쪽)

인경은 휴직을 하고 동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경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 몸의 변화와 일상의 균열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어디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까. 가족과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도움을 받으려면 자신의 상태를 공개해야 하는데 그 파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희진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깨어날 수 있을까. 불안을 간직한 채 잠에 빠져드는 인경. 모든 걸 희진에게만 의지할 수 없는 인경과 그런 인경을 격력하고 응원하는 희진이 나누는 말에 울컥해진다. 단 한 사람의 응원만으로도 힘을 낼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나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온 시간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통으로 힘겹게 살아온 이들의 시간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겨울은 추운 게 좋겠어요. 겨울에만 살아 있는 동물들도 있을 텐데. 나는…… 겨울에 이렇게 자도 되니까요.”

“봄이 빨리 오면 좋겠네요.”

희진의 말을 들으며 눈을 깜박였다. 다시 눈을 뜨면 정말로 봄이 와 있을까.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저기에 잇다. 조금만 내가 더 늦게 가 변해버렸다는 걸 알았다면, 함께 베트남에 가지 않았더라면 영영 어긋나버렸을 것이 분명한, 겨울을 이겨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저기에 있다. (199쪽)

누구나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배척하고 선을 긋고 경계한다. 소설 속 인경처럼 변온 인간이 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익, 시선, 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들면서 함께 할 수 없다고. 그러니 단순하게 이 소설은 변온이라는 소재만을 대입해 읽을 수 없다.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함께 시간을 나누고 계절을 보내는 다종다양한 삶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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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2-31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도 몸 온도가 바뀔 수 있을지... 이건 상상이지만... 어떤 만화에서 본 게 생각나기도 하네요 벌레(요괴에 가까운)한테 기운 같은 걸 빼앗기고 겨울 동안에는 잠들었다가 봄에 깨어나는... 그것하고 이건 조금 다르지만, 그게 생각나는군요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한사람만 있어도 괜찮아요 그 한사람을 만나기가 아주 어렵지요

자목련 님 올해 마지막 날이네요 벌써 그렇게 되다니... 올해 마지막 날 잘 보내시고 새해 첫날 잘 맞이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새해에도 좋아하는 거 하시기 바랍니다


희선

자목련 2020-12-31 10:06   좋아요 2 | URL
소설을 읽으면서 언제나 인간도 그렇게 변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환경에 적응하려고요.
한 해의 끝이네요. 다정한 이웃으로 계셔주셔서 감사해요. 건강한 연말 보내시고 즐거운 새해 맞으세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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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야기할 때 마음이 따뜻해진다면 좋은 사랑을 했다는 증거다. 아픈 장면, 속상한 장면이 떠오른다 해도 사랑은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겼을 테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에는 오직 그에게만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을지도. 설령 시간이 지나 그 순간을 후회하고 삭제하고 싶더라도 말이다. 사랑은 그런 거니까. 다나베 세이코의 연애 소설을 생각하면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맛이 생각난다.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는 그런 사랑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부적절한 관계,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관계, 이별을 예감하는 사랑.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아마도 그건 다나베 세이코라서 그런 것 같다.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달콤한 말들을 이어가는 대신 솔직한 말과 행동, 후회 없이 사랑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처음에 만났던 그런 느낌은 아니다. 사랑에 대해 회의적인 나의 시선과 시대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 20대 후반의 여성에게 결혼은 그저 선택이고 이른 결정이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에 등장하는 자매의 마음은 그래서 살짝 이해하기 어렵다. 동생의 결혼에 대한 언니의 마음. 디자인을 배우고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 동생의 결혼 선언에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당연하다. 동생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연애에 대한 동경을 하는 언니의 마음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역시 다나베 세이코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을 나는 좋아한다. 사소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의 변화를 잡아내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랑에 빠져 행복하지만 언제나 이별을 준비하는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눈이 내릴 때까지」는 그런 이야기다. 제목에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눈이 그치면 떠나야 한다는 걸 아는 것처럼. 소설 속 여자가 만나는 남자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들의 관계는 영원할 수 없다. 사랑의 끝이 이별이라는 걸 알기에 매 순간 더욱 소중할지도 모른다. 지금 바로 죽는다 해도 더 바랄 게 없다는 주인공의 마음처럼. 그런 남자가 있는 줄 모르고 여자의 언니는 결혼을 위한 남자를 소개한다. 어쩌면 눈이 그치고 여자는 그 남자를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까. 다나베 세이코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편집에는 다양한 사랑이 등장하지만 단연 표제작인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만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영화로도 잘 알려진 소설, 최근에 한지민과 남주혁이 주연한 한국판 리메이크도 상영 중이다. 소설을 읽지 않았어도,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제목은 한 번쯤 들어왔을 정도로 유명하다. 장애인 조제와 대학생 츠네오의 사랑 이야기. 뻔하지 않은 사랑이라서 더 아름답고 더 고결하게 남은 사랑이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조제에게 다가온 츠네오. 처음 츠네오에게 조제는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츠네오는 점점 조제에게 빠져들었고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조제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 하나의 바람이며 꿈이라는 것을. 그것은 현실과는 다른 차원으로 엄연히 조제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51쪽)


조제가 가고 싶었던 동물원에 가고 그곳에서 호랑이를 본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를 보고 싶었다는 조제의 말은 가장 완벽하고 황홀한 고백이다.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은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다고 시작하는 것조차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때로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이며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장면과 겹쳐진다. 한지민과 남주혁이 표현한 조제의 사랑은 어떨까. 사랑의 끝에 조제가 홀로 남더라도 행복한 조제였으면 한다. 조제는 충분히 그럴 거라 여겨진다.


물고기와 같은 츠네오와 조제의 모습에, 조제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츠네오가 언제 조제 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한 행복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는 물고기야. 죽어버린 거야.’ 그런 생각을 할 때, 조제는 행복하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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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2-29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좋아도 그 시간이 지나고 그 사이가 끝나면, 많이 다를 듯하네요 그래도 그런 시간을 좋게 여기면 좋겠습니다 잊고 싶을지 몰라도... 시간이 가면 그런 마음도 희미해지지 않을까 싶네요


희선

자목련 2020-12-29 15:29   좋아요 1 | URL
좋았던 기억만 간직하는 게 좋겠지 싶어요. 상대는 어떨지 모르지만요. ㅎ
날씨가 많이 추워지네요. 건강 챙기시고 연말 잘 보내세요^^

- 2020-12-31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래 전 본 이 영화 인생영화라고 좋아했는 데ㅡ 책은 찾아볼 생각도 못했어요. 한지민 남주혁이라니 ㅠ 한국판 조제도 보고 싶다.. 오늘이 하루 남았어요~~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

자목련 2020-12-31 10:08   좋아요 1 | URL
많은 분들의 인생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단편도 만나보시면 좋을 듯해요.
저도 한지민의 조제가 궁금해요!
공쟝쟝 님, 건강하고 환한 새해 맞으세요!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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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글쓴이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말을 기억한다.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종종 나는 그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직접 경험한 일을 시점을 달리해서 쓰기도 하고 주변의 일을 변주해서 소설을 쓰기도 하니까. 허구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쓰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감정이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작가는 절대 그렇게 쓰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하루키의 단편집 『일인칭 단수』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최근에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은 영향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기억이라는 게 항상 정확한 건 아니니까.


내게 하루키는 뭐랄까. 한때 대단한 존재였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구분하는 능력, 그러니까 어떤 소설은 이게 진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에서는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낯선 여자와의 관계, 음악, 재즈, 술, 이러한 이야기는 살짝 식상하다. 일흔의 나이에 끊임없이 소설을 발표하는 그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같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돌베개에」도 여지없이 비슷하게 전개된다. 이십 대 중반의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그녀가 쓴 단카집을 받아보고 그것을 담아두는 마음에 대해.


그래도 만약 행운이 따라준다면 말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말語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들은 밤이 이슥할 때 언덕 위로 올라가서, 몸에 꼭 들어맞게 판 작은 구덩이에 숨어들어, 기척을 죽이고, 세차게 휘몰아치는 시간의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동이 트고 거센 바람이 잦아들면, 살아남은 말들은 땅 위로 남몰래 얼굴을 내민다.(「돌베개에」, 24쪽)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번의 만남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만남을 거부할 수 없다. 아니, 한 번이라서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은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한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을 다룬 「크림」으로 이어진다. 피아노를 잘 쳤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여자아이에게 연주회 초대장을 받은 ‘나’는 그곳을 찾아간다. 많은 이들을 초대했을 거라 여겼지만 도착한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여자아이의 장난에 놀아난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쉬려고 들른 공원에서 노인을 만났고 그가 들려주는 말들이 특별하게 남는다.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아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크림」, 48~49쪽)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인생이라는 걸 안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는. 그래도 받아들이고 살아야만 하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이다.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영화를 본 것과 야구 경기를 본 것에 대해 읽었기에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친근하게 다가온다. 야구장에서 보낸 시간, 요구르트 스왈로스를 응원했던 날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 대해서. 기발하고 기이한 상상의 서사보다는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하루키가 대단하다. 아마도 이런 게 작가의 힘일 것이다. 많은 것들을 함축한 ‘어떻게 잘 지내는가’라는 질문.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하는 데서 나온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131쪽)


8개의 단편 속 일정 부분은 하루키의 경험과 기억이 아닐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엇갈렸던 인연을 떠올리며 그들과의 시간을 복기하듯 소설을 썼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표제작 「일인칭 단수」는 대단한 성공은 아니더도 괜찮은 삶을 유지하는 나의 일상을 들려준다. 한 번씩 좋은 슈트를 입고 술집에 들어가 술을 주문하고 소설을 읽는 즐거움. 그리고 느닷없이 직면하는 상황에 당황하는 ‘나’.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상황와 만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잠시 마음이 주춤한다. 잃어버린 기억과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간 일들이 모두 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선택해 온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일인칭 단수」, 223~224쪽)


누구나 자신의 선택을 만족하거나 후회한다. 하지만 그 모든 선택의 결과로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떠올리기조차 싫은 과거를 딛고 살아가는 게 인생은 아닐까. 하루키는 그걸 아는 작가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집이 만족스럽다는 건 아니다. 나의 시점에서는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보편적 기대감을 생각하면 아쉽고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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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미세먼지 최악이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자목련님 거실에 트리 한그루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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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행복한 메리 크리스마스 ^.~


자목련 2020-12-27 17:16   좋아요 1 | URL
이런 다정하고 귀한 인사,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따뜻한 오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