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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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거리낌 없어지고 어떤 면에서는 의뭉스러워진다. 뭔가를 소유하고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 이뤄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득하다. 대화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깊이는 얕아진다. 진심을 표현하는 게 어렵고 가벼운 수긍이나 농담으로 눙 치는 경우가 늘었다. 사느라 그런 거라고, 고단해서 그런 거라고 여기면서도 돌아서면 내심 서럽고 웅크러진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 속 단편을 읽으면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작가와 함께 나이를 들고 작가가 그려낸 소설 속 인물이 전혀 남 같지 않음이 반가우면서도 쓸쓸한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공간을 방문할 기회, 부러움의 대상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무의미한 대화 속에서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마는 「홈 파티」나 타국의 휴양지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겪는 묘하게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이 소통의 부재보다는 돈의 문제로 부각되는 「숲속 작은 집」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경제적 어려움을 직면한 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홈 파티’나 ‘숲속 작은 집’이라는 제목만 보면 우리네 현실과는 다른 삶이 아닐까 싶은 기대와 다른 각도를 보여주는 것. 나의 자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삶의 장면이 어떻게 펼쳐질지 성찰하게 만드는 단편이다.


이처럼 이번 단편집에서 김애란이 들려준 이야기가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냥 있을 법한 장면이나 삶의 조각이 아니라 누군가 살아내고 경험하는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독자에게 가장 친숙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왔을 「좋은 이웃」이 그렇다. 층간 소음이 심각한 요즘 좋은 이웃을 만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마찬가지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아니, 내 집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전세를 살며 독서지도사로 공부방을 운영하는 ‘나’는 윗집의 공사로 인해 소음과 일에 차질이 생기고 피해를 입는다. 이사를 오기 전 인테리어 공사 안내를 하고 서명을 받으며 좋은 이웃이 되겠다는 말은 이행되지 않는다. 선의로 이해를 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전세이기에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과 가르치는 학생의 이사로 복잡하다. 장애가 있는 시우가 곧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학부모는 그곳까지 와서 수업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만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다. 좋은 이웃이자 좋은 선생님은 의지가 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좋은 이웃」, 142쪽)






남들처럼 사는 건 왜 이리 어려운가. 때가 되면 전세가 아닌 자가의 공간에서 살 수 있다는 행운은 나만 비껴가는 것일까. 이런 마음은 「빗방울처럼」에서도 만날 수 있다. 「좋은 이웃」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문제를 다루지만 한층 심각한 전세 사기에 대한 이야기다. 새 아파트로 이사를 앞둔 ‘지수’에게 닥친 일은 뉴스에서나 들은 것이었다. 집 주인이 집을 담보도 대출을 받고 연락 두절이 된 것. 천장에선 물까지 새는 상황에 할 수 있는 선택은 새 아파트 입주가 아닌 살던 집을 경매로 낙찰받는 일이다. 그럴 수 있다 쳐도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은 감당할 수 없다. 아무리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라지만. 누가 지수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이 머물다 떠난 자리가 단정하길 바랐던 지수는 물 새는 천장 도배를 위해 도배사를 부른다. 안방 천장 상태를 살피던 그녀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건네는 그 평범한 말을 통해 아무에게도 받지 못한 위로를 그녀에게서 받는다. 생의 마지막을 결심한 그 순간에 말이다.


삶의 끝이 무엇일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언제쯤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희망을 끈을 놓지 않으면서. 그러니 어떤 일들은 그냥 이유 없이 다가오고 일어난다. 표제작 「안녕이라 그랬어」의 ‘은미’에게도 그랬다. 달콤한 미래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의 간병이 길지 않을 거라고 여겼지만 현실은 계획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 연인 헌수와의 이별이야말로 예정된 수순이었고 엄마를 떠나보낸 은미는 사십 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는 나이, 그러나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나이, 은미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다. 화상 영어 사이트를 통해 원어민에서 영어를 배운다. 그 과정에서 ‘안녕’이란 말이 은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연인과의 만남과 헤어짐, 엄마와의 작별, 그리고 원어민 교사와의 이별. 왜 나만 이렇게 버겁고 힘든가 싶었던 모든 것들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라는 위안.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안녕이라 그랬어」, 250쪽)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준비하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니다. 삶은 알려주지 않는다. 언제쯤 원하는 삶과 마주할지 알 수 없다. 좋은 삶을 살게 될지도 알 수 없다.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과 비교하고 절망한다. 행복의 수치를 돈으로 헤아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그들의 사정도 있고 아픔도 있을 것이다. 김애란은 그것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돈과 이웃의 이야기로 엮은 『안녕이라 그랬어』를 통해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 높은 곳, 다른 계층으로의 이동을 욕망하는 자연스러움을 포착한다. 그리고 나 혼자만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라고 가만히 위로를 건넨다.


앞으로도 저는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삶을, 죽음이 무언지 모른 채 죽음을 그릴 테지만,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을 새로 배워나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다가오니까요. (작가의 말 중에서, 316~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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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거림이 지나쳐서 이제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기온이 영하 저 아래로 떨어지는 날들이다. 몸만 추운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바람이 들이치는 것만 같다. 새해에 맞게 뭔가 새롭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은 어디서 오는 걸까. 주변에 뭐라 말하는 이도 없고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새해 증후군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이즈음의 글에는 계획을 세우는 게 세우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는 큰 언니와의 대화가 있었다.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계획 없이 사는 나에게, 조금은 계획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지난 계획을 기록한 글을 찾아보니 대단한 게 없었다. 책을 조금 더 읽고 쓰고 친구를 만나는 일, 그게 전부였다. 운동을 하거나 외국어 공부를 하거나 투자를 하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런 계획을 다시 세워보기로 한다. 읽는 즐거움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책을 고른다. 올해의 첫 시와 첫 책은 이렇다. 조용미 시인의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서 만난 시, 디디에 에리봉의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책이다.




기이하다 오래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모든 걸 나누었던 것 같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다했던 것 같다

왜 지금은 이토록 남인가 다른 생을 받으면 이렇게 다시 시작되는가

이전의 모든 생은 분명하고 또 어렴풋하다 모든 생에서 나는 나의 기억과 함께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가 있을까 당신은 지독한 타인이고 다음 생까지는 너무 멀다

언제나 다음 생을 믿을 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여기서 그쳐야 한다 끝이라는 말을 늘 생각한다 끝은 여러 생을 거쳐 행할 줄 모르는 습관이 생겨났다

끝은 끝끝내 오지 않아서 우리는 끝에 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끝이 없는 마음이 지옥인데도 죽어도 마음은 끝을 모른다 끝이 저 스스로 죽고 싶도록 아름답게, 처절하게 우리는

(「구제적인 삶」, 전문)


모든 게 불확실하고 모호하지만 구체적인 것들을 생각한다. 하루의 일상, 하루의 시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분명하고 명확한 것들을 떠올린다. 하루하루 늙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다. 나이를 헤아리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혼자만의 새해 증후군은 조금 더 길어질지 모르지만 제주도에서 온 동백 사진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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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1-1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은 끝끝내 오지 않아서‘ 결국 오는 순간은 죽음일까요. 동백 사진이 정말 너무 예쁘네요.

자목련 2026-01-14 15:54   좋아요 0 | URL
문득, 죽음을 대면하는 일도 모두에게 주어진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동백은 직접 보면 얼마나 예쁠까요! 아쉽지만 사진으로 담아준 이가 고맙지요^^

거리의화가 2026-01-14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글인데 사진이 예뻐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화사한 색감이 회색 겨울을 날려보내는 것 같은... 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자목련 2026-01-14 15:5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예뻐서 자꾸 보고 있어요. 덕분에 마음도 환해지는 것 같고요!
화가 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게 보내세요^^
 
이성과 감성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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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에서 독자가 바라는 건 무엇일까. 첫눈에 반해 아무런 장애 없이 완벽한 사랑과 행복한 결말일까. 아니면, 숱한 오해와 헤어짐을 반복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일까. 뭐가 됐든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동일시되어 연애 감정을 전달받기를 원한다. 연애를 꿈꾸면서도 연애를 멀리하는 요즘 20~30대가 연애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이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의 첫 장편소설인 『이성과 감성』은 연애의 첫 시작과 전반적인 모든 과정을 만날 수 있는 연애소설이다. 『이성과 감성』은 앞서 읽은 『오만과 편견』과 인물 설정이나 스토리가 상당히 비슷하다. 『이성과 감성』엔 유머러스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까. 주인공 자매는 물론이고 상대 남성의 성격이나 집안 배경도 흡사하다. 소설 속 자매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유산이 이복 오빠에게 돌아가며 어쩔 수 없이 정든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사랑이 시작될 것 같지만 사실 첫째 엘리너는 이사 전 사돈총각인 에드워드와 연애 감정을 키우는 중이었다. 물론 사돈 집안에서는 엘리너를 환대하는 건 아니었다. 거리가 멀어져도 둘 사이의 확신이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좀처럼 에드워드의 연락은 없었다. 반면 메리앤은 이사 온 곳에서 두 명의 남자를 만난다. 메리앤을 좋아하는 브랜던 대령과 메리앤이 첫눈에 반한 월러비. 메리앤의 마음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브렌던 대령보다는 또래인 청년 월러비에 향했고 언니 엘리너의 눈에는 둘 사이가 약혼한 것처럼 보였다. 브랜던 대령은 메리앤의 감정을 알면서도 메리앤을 향한 마음을 접지 않는다.


이성과 감성이란 제목처럼 소설 속 두 주인공은 서로 반대 성향을 지녔다. 철저하게 이성적 판단이 강한 언니 엘리너와 생각이나 판단보다는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는 동생 메리앤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요즘 유행하는 성향으로 보자면 엘리너는 T, 메리앤은 F라 할 수 있다. 엘리너는 한편으로는 신중하다 못해 고지식하게 보인다. 에드워드에게 숨겨둔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도 차분함을 잃지 않으니 말이다. 메리앤의 명랑은 사랑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제발 한 번 더 생각하면 어떨까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니 미래를 확신하는 월러비가 연락이 닿지 않고 마침내 들려온 소식이 그의 결혼 소식이니 메리앤의 상심은 병이 될 수밖에 없다.





엘리너와 메리앤의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에드워드의 숨겨진 약혼자와 월러비의 결혼은 충격이었기에 브랜던이 사랑하는 이도 메리앤이 아닌 언니 엘리너가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놀라운 건 이 소설이 제인 오스틴의 첫 소설이라는 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그와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소설에 녹아냈다고 할까. 어디 그뿐인가. 제인 오스틴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장자상속의 문제점을 꼬집고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부모(에드워드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결혼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결혼에서 행복은 운이라 말했던 『오만과 편견』속 샬럿처럼 『이성과 감성』에서도 약혼을 했지만 파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때 이익을 생각하는 따지며 유리한 선택을 한 루시의 모습은 그 시대의 영국의 사회가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엘리너와 메리앤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주변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을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발생하는 감정은 어떻게 표현되는 게 좋을까. 얼핏 생각하기에 엘리너와 메리앤의 감정이 반박씩 드러나면 가장 완벽할 것 같지만 사랑하는 일도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 뭐나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스스로를 다잡는 엘리너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엘리너에게서 K- 장녀 모습이 겹쳐진 건 나뿐일까.


겉으로는 아무런 기쁨도 드러내지 않았고, 어떤 말이나 미소로도 표현되지 않았답니다. 오직 엘리너의 가슴속에서만, 그 고요하고 강인한 만족감이 머물러 있었어요. (477~478쪽)


“나는 침착하게 행동할 거야. 내 마음의 주인이 될 거야.” (542쪽)


사랑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떠냐고 묻는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지난 사랑의 모습을 가만히 돌아보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어쨌든 돌고 돌아서 사랑의 결실이 이뤄지는 모습은 독자로서 흐뭇하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연애소설이라는 걸 확인한다.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는 독자에게 제인 오스틴 탄생 2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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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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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은 경험하기 전까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안다고 여기고 확신을 가져도 실제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자는 충고하고 조언한다. 자신의 경험이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것처럼. 한편으로는 경험하지 않았기에 분별력이 정확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감정에 대해서는 섣불리 경험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사랑, 행복 같은 것들은 추구하는 가치와 기준이 다르니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시대적 배경과 문화를 별개로 결혼이란 무엇이며, 행복한 결혼이란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첫 만남의 좋지 않았던 인상 때문에 서로를 오해하고 돌고 돌아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는 완벽한 로맨스이자 연애 소설이지만 그게 전부일까.


딸에게는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 불합리한 상속 제도로 인해 원하지 않든 결혼을 목표로 삼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래서 딸 다섯을 둔 베넷 부인은 어떻게든 딸들의 남편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근처로 재산이 많은 청년 빙리가 이사를 오면서 더욱 목표는 분명해졌다. 첫째 제인과 빙리는 제법 잘 어울리고 베넷 부인이 보기에 둘의 결혼은 시간문제로 보였으니까. 문제는 제인이 아니라 둘째 엘리자베스였다. 제인에 비해 미모가 약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자베스에게도 신경이 쓰이는 청년이 있다. 빙리의 친구인 다아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상속자지만 오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연애 소설의 특성상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이뤄질 가능성은 크지만 소설 초반의 둘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다이시가 어떤 인물인지, 독자도 혼란스럽다. 물론 엘리자베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말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를 오만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그가 제인과 빙리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어려운 사람을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게 사실이라면 엘리자베스가 그를 미워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이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엘리자베스에게 고백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모두가 예상하듯 답은 거절이다. 엘리자베스가 다이시의 진심을 알아갈 시간이 없다. 동생 리디아가 남자와 도망을 치는 일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 상대는 한때 엘리자베스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이시의 과거에 대해 알려준 남자 위컴이다. 소설이나 밖이나 남녀의 사랑은 예측할 수 없고 돌발적이다. 이 부분이 나는 제일 놀라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이시의 관계 회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복선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제인과 빙리, 엘리자베스와 다이시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면서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지만 과연 행복한 결혼이라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아들이 없는 베넷 부부의 먼 친척이자 상속자인 콜린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자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베넷 부인과 엘리자베스의 거절로 콜린스와 결혼하는 샬럿의 생각은 그 시대의 표본일지도 모른다.


결혼에서 행복은 순전히 운에 달린 거니까. 당사자들이 각자 상대의 성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든가 처음부터 둘이 꼭 닮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남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단 말이지. 살다 보면 어차피 충분히 달라질 테고, 그래서 또 남들만큼 속앓이를 할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오히려 앞으로 평생을 함께 보낼 사람의 결점은 잘 모르면 모를수록 좋은 거야. (46쪽)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거든요. 재산은 적고 교육은 잘 받은 젊은 여자에게는 결혼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어요, 그러니 행복을 얻을 가능성이 아무리 불투명해도, 결혼은 궁핍으로부터 지켜주는 가장 쾌적한 보호 수단이 되어주었지요. (213쪽)


샬럿의 입장에서 목표하는 바를 이뤄주는 상대가 등장했으니까. 아니, 현재의 누군가도 샬럿의 생각에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결혼은 어렵고 알 수 없다. 평생 독신이었던 제인 오스틴이었기에 섬세한 감정 표현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들려줄 수 있었던 것 같다.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아름다운 자연 광경과 대저택의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제인과 피아노를 치는 엘리자베스를 지켜보는 다이시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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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1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4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지연의 소설 『새해 연습』을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 홍미가 올해를 살아가며 하는 다짐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올해는 늘 새해를 위해 연습하는 해였다.’ 새해를 위한 연습이라는 말이 괜히 안쓰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좋았다. 새해를 기대하거나 소망을 품지 않으면서도 연습할 수 있다는 말이 좋았던 것 같다. 연습하고 연습하면 잘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해가 바뀌면 나이의 뒷자리 숫자가 바뀐다는 것, 큰 의미는 없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과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내일을 생각할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하루에 대한 감사, 그 무사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는 삶이 되었다. 재미나는 게 없다는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재미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내가 조금 쓸쓸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아서 며칠 전에는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연금에 대해 문의를 했다. 해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납입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우선은 그냥 두기로 했다. 금액이 적은 이유가 가장 컸다. 적어도 너무 적었다. 납입액이 적으니 당연한데 그걸 간과했다.


그건 그렇고, 새해를 위해 나는 클레어 키건의 단편집 『남극』을 샀다. 땡스투는 원서로 읽고 있는데 번역본이 나왔다는 건조한 분께. 커피도 샀다. 주문한 커피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는 건 좋지도 않다는 것. 그래도 좋은 쪽으로 약간은 기울고 있다는 것. 이제는 알라딘 커피가 제일 맛있는 커피가 되었으니까. 싱가포르에 다녀오면서 작은 언니가 사 온 드립 커피를 마시지 않았지만 기대가 크지 않다.





다시 추워진다고 한다. 올해 12월은 작년과 비교하면 평온한 달이다. 어떤 일이든 최악의 것과 비교하면 괜찮아보인다. 그러나 최악은 다른 최악을 불러오기도 하고 살아가는 일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사는 일이니까. 현재를 기준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쿠팡의 개인정보는 유출되었지만 비밀번호만 바꾸고 탈퇴는 못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했다.


내년 12월에 기억할 올해 12월은 어떨까. 이것은 내년을 기대한다는 뜻인가. 기대하지 않는 것보다 기대하는 일이 좋은 것일까. 새해를 연습하는 올해는 이틀 남았고 나는 이런 시를 읽는다.

남은 이야기들은

지워지거나 모르거나

겨울이었지

무슨 말을 덧댈 수 있을까

우리 늘 모호했는데 유독

당신의 정맥,

유난히 추웠던 겨울 집에서

우리 무언가를 보았는데

어떤 이야기들은 선반 위에 둔 흐린 바깥이고

휘파람 같은 거라고

안경 알을 닦을 때도

파르스름한 정맥이,

그런 슬픈 그물에 걸려 다시 넘어지더라도

조금 근사하고 싶어

붉은 이상한 저녁에

우린 서로 미래를 돌려주었는데

사랑은 뒤를 봉합하지도 않고 사라지곤 했지

참 추운 날이야

새들의 부리가 작아졌어

이 딱한 부재를 이월하는 상자 밖으로 버리며

이것은

혼자라는

없음에 대한 일

(「그런 12월」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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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2-30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작년 12월에는 우리 국민 모두가 너무 큰 일을 겪었었죠.
말씀하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들의 무사함에 대해 저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자목련 2025-12-31 11:28   좋아요 0 | URL
새해에는 밝고 신나는 뉴스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감은빛 님, 건강하고 따뜻한 새해 맞으시길 바라요^^

서곡 2026-01-01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자목련님 해피 뉴이어~~

자목련 2026-01-04 10:37   좋아요 0 | URL
서곡 님, 건강하고 행복한 2026년 시작하셨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