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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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도축장에서 병든 소들을 학대하며 강제검역시키는 동영상이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끔찍한 동영상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먹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심 어린 시선을 걷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매일 먹는 먹을 거리에 관한 관심사는 이제 건강과 한 테마가 되어 텔레비젼에서는 주말마다  맛 집을 소개하고 요리를 소개하는 시대가 되었다. 채널을 돌리면 홈쇼핑에서는 채소에서 시작해서 해산물과 곰국까지 팔고 있다. 쉽게 접하는 음식, 정말 우리 몸에 들어와 제대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는지 한번쯤 고민을 해 볼만 하다.

저널리스트 마이클 폴란은 음식여행을 떠나기 시작한다. 자연그대로의 것, 태양이 주는 광합성을 받고 땅에서 자란 풀을 먹고 사는 자유롭게 살아온 소를 찾아 나선다. 그 여행의 시작엔 어떤 의문이 있었을까? 우리는 저렴한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양상추가 있으니 괜찮아, 통조림을 먹으면서도 저지방 이니까 괜찮아 . 내심 그렇게 괜찮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음식을 먹게 된다.

사료를 먹고 자라는 소나 돼지, 날갯짓 하면 할수 없는 닭장에서 사는 닭이 낳는 달걀을 먹고 사는 우리는 그렇지 않을꺼라 믿고 싶어한다. 유기농이라는 것에 맹신하고 신선한 고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음식을 사고 음식을 먹게 된다. 과자봉지에 쓰여있는 깨알같은 글씨의 구성물을 알지 못한 채 유명회사의 과자를 음료수를 선택한다. 저자는 직접 소를 사고 그 소가 자라는 농장을 견학하고 경학을 금치 못한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먹는 음식 그 자체라는 말은 논박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육장을 방문하고 알았듯이 그것은 반쪽이 진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그 음식이 먹는 음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기일 뿐 아니라 넘버2 필드 옥수수이며 석유이기도 했다. 114쪽]

풀을 먹는 소가 아닌 옥수수로 만들어진 사료를 먹고 자연이 아닌 인위적 공간에서 자라다 죽게 되는 자신의 소 534번의 삶과 죽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에 옥수수가 가득하다는 그의 글을 보고 나는 집안의 과자봉지, 햄을 꺼내보게 된다. 물론 구성물을 나는 알지 못한다. 과당, 이상한 화합물들. 그래서 엄마들은 직접 빵과 과자를 구워주려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이제 또 닭은 만나러 간다. 진정한 유기농은 있을까?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멋진 농장을 만나게 된다.  사료가 아닌 풀을 먹는 닭의 배설물 속에서 먹을 거리를 찾는 돼지, 그렇게 만들어진 퇴비는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새로운 땅, 비옥한 땅을 만들어 내고 그 땅에서는 또 풀이 난다. 모든 것은 순환된다.  하루종일 땅과 함께 하는 농장사람들의 닭과 소를 아끼고 사랑한다. 그리고 정성껏 가꾼 것을 나누어 먹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직접입력 모든 것이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토양의 비옥함 같은 신비 앞에서 솔직하게 무지를 인정하는 대신에 자연을 기계로 다룰 수 있다는 교만에 빠져들게 된다. 일단 이런 비약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우행이 뒤따라는 법이다. 192쪽] 과거 우리의 농촌을 떠올린다. 엄마는 돼지 우리나 소 우리에 짚을 깔아주고 그것을 섞어주고 다시 펴주고 퇴비를 냈다.  인공 비료가 아닌 그 퇴비를 먹은 상추와 마늘은 맛이 좋다는 것을 떠올린다.
지금의 농촌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비단 미국의 농부만이 아니라 우리의 농부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책이나 지원은 너무 부족하다. 유전자 변형인 식물이 나오고 발암 물질을 가진 화합물을 먹지 말라고 말하면서 정작 순수한 자연의 토산물 생산을 위한 지원은 왜 잊고 있는가?

[자연에서는 적대 관계라고 하더라도 서로 의지한다.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장소는 경계 지역이다. 중간 지역, 이것과 저것이 함께 있는 곳이다. 들판에 거기에 인접한 숲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이 복작한 농장에 함께 있는 모든 생물종의 경우도 똑같다.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며, 농장의 건강은 야생의 건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286~287쪽]  도시에서 멧돼지가 나타나고 모기떼와 파리떼의 출현은 이런 자연 관계의 파괴의 한 단면이리라. 지금 기름유출인 바다는 다시 생명력있는 바다가 되려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는 생물들을 우리가 거부함으로 어떤 종의 개체수는 늘어날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그 속에서도 먹이 사슬은 파괴될지도 모른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개념은 동물들의 음식 선택 행동을 직접입력 아니라 휠씬 복잡한 영장류(인간을 포함하여)의 '생물 문화적' 적응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불하해한 여러 문화적 관행들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야생 버섯을 먹을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마다 되풀이된다. 하지만 보다 현대적인 음식의 경우에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할 때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찾아온다. 367쪽]

내가 먹는 배추가 내가 먹은 생선이 자연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며 그 음식을 먹은 나 역시 그러할 수 있다. 매일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사람들, 이 책을 읽고 어쩜 몇 일은 식사를 할 때마다 무가 어디서 왔을까? 이 달걀은 색소를 넣어서 붉은 빛 노른자를 가졌나? 이 우유는 즐겁게 자란 소에게서 얻어진 것일까? 고민할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햄버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잡식동물이기에 갖는 딜레마이다.

저자는 직접 사냥을 하기도 하고 야생 버섯을 채취하면서 자연의 신비와 그들의 공생관계를 만난다. 그리고 자연에서 얻는 그것들을 요리하여 지인들과 함께 한다. 음식을 하는 즐거움은 그 음식을 나눌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참고문헌의 수록까지 있어 560쪽에 다르는 책은 처음엔 내게 약간의 두려움과 거부감을 주었다. 그러나 저자의 글은 지식을 주는 것과 동시에 재미을 준다. 그리고 읽어볼만한 책이라 권하고 싶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 음식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몸은 우리가 먹는 음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 비싼 쌀이라고 해서 주저하지 말라, 그 쌀은 한 농부가 자연과 친화하여 자연에서 얻어낸 투명한 결과물,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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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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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만난 한강의 네 번째 책이다. 따뜻하지 않은 그녀의 책, 상처가 있는 그녀의 책,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은 책들. 반대로 상처를 싸매주는 책, 맘 껏 울게 하는 책들.  담담함이 깊어 소리가 들리는 않는 듯한 그녀의 글들. 책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크게 웃으면 안될 것만 같은 책들. 차가움이 제목에서 그리고 보여지는 것을 통해 처음부터 전해진다.

작가인 내게 전해진 조각가(운형)의 이야기로 구성되는 액자소설이다. 운형을 기억하는 나도 나를 기억하는 운형도 보여지는 그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그렇다. 본질이 아닌 껍데기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나의 깊은 곳까지 내가 드러내지 않은 것들을 알아보는 이를 만나기도 한다.  운형의 작품을 한 눈에 알아보는 작가는 처음에 그랬듯이 마지막까지 운형을 알아본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 과연 서로에게 무엇을 보았기 때문일까?
  
계부에게 폭행당한 상처를 먹는 것으로 감싸고 살았던 L, 육손으로 태어났기에 놀림을 받았던 어린 시절 전부를 수술과 동시에 싹뚝 잘라버리고 싶었던 E. 그녀들의 겉 모습을 틀로 만들어 작품으로 탄생시키고 싶었던 운형은 알고 있었다. L이 가진 아름다운 손을 통해, 손을 제외한 아름답고 완변한 몸을 가진 E의 얼굴을 통해 L과 E의 상처를 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손을 통해 자신을 찾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숨막히는 석고를 온 몸에 바르고 틀로 만들어 다시 새로운 삶을 주고 싶었고 그를 통해 스스로도 새로운 삶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까많고 커다란 사각 뿔테 안경을 끼자 거울 속의 나는 전혀 나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변장이라도 한 양. 나는 아무에게도 나를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몰래 불안하던 마음이 어루만져진 기분이었다. 그저 잠시의 기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안경의 힘은 나에게 주술적인 것이 돼갔다.  숨을 고를 수 있었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고, 여유를 갖고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51~52쪽 ] 어린 시절 이렇게 시작된 운형의 삶은 안경이라는 껍데기에 의존하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정작 운형은 자신을 깨지 못한 채, 그녀들이 벗어놓은 그 틀 속 자신을 숨기고 살고 있었다. 운형에게 삶은 온통 상처였던 걸까? E를 사랑하게 되면서 운형과 E은 서로의 상처로 이루어진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로써 새로이 태어나게 된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짓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313쪽]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나의 작은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있는 어린 시절 동창들의 만남을 꺼리는 작은 일상부터 숨기고 싶은 치부들,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은 어느 한 순간들. 그러나 그것들을 깨부수지 못해 그것과 함께 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내내 부정하고 싶어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내 부분을 석고를 개어 내어 그 모습을 드러내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의 껍데기를 부여잡고 있는 걸까? [껍데기는 조개나 게, 거북이처럼 단단한 걸 말해요. 하지만 껍질은 내용물에 완전히 엉겨 있죠. 사과나 배, 고양이과 개, 그리고 사람처럼.286쪽] 그것이 껍데기가 아닌 껍질이라 하여 내 살과 피를 함께 떼어 낸다 해도 그 틀을 만들고 싶다. 그 껍질을 떼어내면 새로운 껍질이 재생될지 모른다. 새로운 피와 살을 만들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변화되어 새로이 되는 내 것.

지금까지 만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내 맘에 소리없이 다가오지만 아주 큰 메아리를 남긴다. 내게 즐거움과 동시에 기다림을 안겨준다. 이제 또 그녀의 글을 기다린다. 한강, 그녀는 아마도 지금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또 다른 껍데기를 연신 글로써 만들어 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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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 도종환의 산에서 보내는 편지
도종환 지음 / 좋은생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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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으로 세상을 물들였던 시인, 도종환. 그가 깊은 숲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음은 작은 월간지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가 들려주는 짤막한 산골 이야기를  만난 적이 있다. 그렇게 써내려간 맣은 글들이 이제 우리를 시인이 살고 있는 숲으로 향하게 한다. 그가 들려주는 자연의 소리 자연의 향기, 그리고 그숲에서 만나는 일상, 산짐승들과 새들의 노래들과 텃밭에 심은 쑥갓, 상추와 대화를 하고 자신을 정좌하는 그곳으로 초대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이 가지고 있는 그만의 색을 시인의 눈으로 보고 시인의 감성으로 써내려간 글들은 마음을 맑게 한다. 그의 말처럼 청안하게 한다. 맑다는 느낌, 그리고 샘물같은 느낌. 그리고 둘러본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내 곁에 있는 자연. 그리고 내 모습,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중요한 목표요 이유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원인도 거기 있습니다.내가 벗어나야 할 것도 바로 그 안에 있습니다. 영원히 내 것은 없습니다. 52쪽, 다른 사람을 만나는 날 그를 위해 신경썼던 것처럼 나를 만나는 날은 나를 위해 시간을 보냅니다.139쪽] 바쁜 세상, 어지러운 세상을 그 밖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말하고 있다. 조금 천천히 조금 더디게 그리고 조금 자세히 살면 어떨가 하고 제안한다. 세상 모든이에게 주는 편지이건만 마치 오롯이 내게만 보내는 편지인양 읽는 내내 즐거움이 함께 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잠시 멈춤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또 세상속으로 돌아올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봄을 안겨주는 책이라 소개하고 싶다. 물론 책속에는 사계가 담겨있다. 그러나 연두빛이 고은 표지에서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숲에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사는 삶은 타인의 눈에는 욕심을 버린 것 처럼 보이고 세상을 버린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세상에 시를 뿌리던 그가 그 숲에서 새로운 씨를 뿌리게 되었을때 갖었던 수많은 상념들이 글속에서 흐르고 있다. [옳은 것은 옳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조급한 게 탈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서서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183쪽, 많이 읽고 아는 것만큼 마음이 그렇게 깊고 맑게 바뀌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실천하며 사는 일은 휠씬 더 중요합니다. 200쪽] 시인이 조근조근 들려주는 말은 인생의 선배로써 인생의 교수(敎授)로서 곧 강의, 그 자체이다. 

싱그러운 봄날, 아침을 여는 청아한 이슬같은 시인의 모든 글이 이제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다. 그리고 또 숙연해진다, 이것이 시인의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말들일 것이다. 그러니 도종환, 그는 그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이 가 있으면 하나를 제대로 볼 줄 모르게 됩니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보지 못합니다. 많은 것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적은 것을 깊이 있게 만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적게 많날때는 가까이서 자세히 보게 됩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산국화 한 송이도 가까이서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향기롭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적은 사람을 가까이서 만나는 일도 필요합니다. 깊이 있게 알아가노라면 분명히 그 사람의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316쪽] 시인이 숲에서 전해주는 향기가 세상으로 점점 더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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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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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내가 전경린의 책을 선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오래 전에 만난 책의 제목도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 이라는 책이었다. 그 향이 너무 짙어서 전경린의 책은 알게 모르게 거리를 두었었다. '엄마의 집' 이라는 책도 '엄마' 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집' 이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도 엄마인데 내 집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집이 아닌 엄마의 집이라는 것은 엄마의 공간이라는 뜻일까. 그런데 참 이상하다. 문학에도 유행이나 흐름이 있는 것일까? 전경린황진이를 쓸 당시도 또 다른 황진이가 시선을 받고 있었고 이 책 역시 얼마 전에 만난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을 내맘 대로 꼬집어 볼 수 있어 내심 쾌재를 부른다.

우리의 시대는 이만큼 변화하고 있다는 것일까. 이혼녀, 재혼, 별거, 한 부모 가정, 이제는 쉽게 만나지는 단어들이지만 여전하게 그 단어를 만날때 마음이 편치 않음은 나의 보수적 성향 때문일까. 이혼을 한 엄마가 자신의 집을 갖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이제 그 집에서 자신의 전부인 딸과 뜨거운 해후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빠의 딸이 등장한다. 과연 핏줄이 섞이지 않은 승지와 호은과 엄마는 한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책에서 만난 유쾌한 호은과 냉소적인 승지는 보색의 관계처럼 그렇게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그 조화가 아름답다. 세상을 모두 껴안고 싶은 아빠와 나만의 세상이 곧 세상의 전부라 믿고 있는 엄마의 모습도 호은과 승지와 비슷하다. 여기서 나는 작가 전경린머리 속을 궁금해했다. 도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아니 그녀는 왜 이리 따뜻해지고 평범해졌을까? 내용은 물론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의 미흔도 엄마였건만 미흔과 미스 엔 사이에는 몇 번의 변화가 있음을 느낀다.

엄마라는 것은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의 집이라는 것은 가족이 아닌 타인도 미움이 가득했던 상대도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아주 큰 공간이다. 그리고 그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는 것이다. 아, 전경린. 나는 그녀에 대한 색안경을 벗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녀 역시 세상에 대한 문을 열어둔게 아닐까. 가족이라는 것은 이제 점점 그 의미를 정의하기 어려워진다. [일상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존재적 고뇌를 가족과 나누는 것은 무리이다. 일상과 존재의 경계에서 가족간의 절망이 생겨나는 것이다.95쪽] [가족 공동체의 내부는 다정과 간섭이 넘치지만 사실, 한 치만 건너서 들으면 또 얼마나 이기적이고 흉한 공모인가. 96쪽] 가족이니까라는 이유로 쉽게 행한 말들과 행동으로 우리는 더 큰 상처를 만나기도 한다. 가족이라는 것, 보듬어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존중해주어야 하는 기본적인 사회인 것이다.

혈연만을 중시하던 우리네 사회에서 다양한 가족의 구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식구라는 말을 가족대신 쓰고 싶다. 공지영이 그려낸 집이라는 것이 화해의 공간이었다면 전경린이 그려낸 집은 공유의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공지여의 글이 지극히 감정적이었다면 전경린은 이성적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엄마의 집'이라는 것은 아빠의 부재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우리 사회를 꼬집는 것도 같았다. 곁에 있어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아빠의 부재, 그 부재가 가족을 위한것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그 부재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집을 갖는다는 것은 또 다른 자신을 갖는다는 생각이 든다. 

미스 엔은 책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다. 그녀가 딸 호은에게 하는 말은 모든 엄마가 그들의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사랑이든 삶이든, 난 그게 내 몫의 강물을 헤엄쳐 건너는 일 같아. 그 물은 내 존재로부터 솟아나와 큰 강을 이루어. 누구에게나 혼자 건너야 하는 강이 있는 거야. 263쪽]  [사람이란 관계 속에서 가장 사람답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누구나 일 년에 한 달쯤은 완전히 혼자 지내보는 것도 좋을 거야. 여행을 가라는 게 아니야. 자신의 일상을 그대로 하면서 가능한 지인을 만나지 않고 묵묵히 홀로 생활을 해보는 거야. 자신의 원형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이곳과 자신을 만끽하면서. 270쪽]
함께 하면서 자신의 공간을 나누며 살고 있는 우리의 집, 나도 집을 꿈꾼다. 진정한 화해와 소통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꾼다. 엄마라서 참 좋다. 세상의 모든 엄마가 꿈꾸는 집, 그곳에 행복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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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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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에서의 조제, 그 흥분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 영화 속 조제가 아닌 소설 속 조제를 만났다. 또 다른 조제가 등장하는 영화를 그려본다. 등장인물은 조제,베르나르,니콜,파니,알랭, 에두와르,베아트리스,자크,졸리오 모두 아홉 명이다. 배경은 프랑스 파리이다. 문학과 사랑의 삶이 함께하는 곳에서 사랑에 대한 그들의 고뇌를 엿본다. 조제는 과거의 베르나르를 기억하지만 현재는 의대생 자크를 사랑한다. 니콜은 잘 때도 베르나르가 들어올 문을 향하여 잠을 자며 그를 기다린다. 베르나르는 여전하게 조제를 사랑하고 있다. 현명한 파니와 살고 있지만 알랭은 베아트리스를 사랑한다. 연극배우인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졸리오에게 향하고 그런 베아트리스를 사랑하는 에두와르는 절망하게 된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랑들이 이 곳에 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우선은 설명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한국소설도 등장인물이 많으면 정리가 안 되는데 익숙치 않은 인물들을 파악하고 나니 한결 수월하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 사랑을 원하고 소유하려 한다. 과거의 사랑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기도 한다. 사강이 그려낸 아홉명의 사람들의 관계는 아주 평화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파니와 알랭 부부가 주최하는 모임에서 글을 쓰는 베르나르와 조제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본다. 사랑은 이렇게 예고없이 그리고 소리없이 온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뜨거움이 영원하게 지속되지 않는다. 베르나르와 니콜은 서로가 바라보는 방향이 너무 다르다. 니콜은 무조건 베르나르를 이해하고 기다린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주어지는 무언의 고통을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모두에게 그것은 잔인한 현실이다. 

사강은 소설 속에서 한 여름의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감정이 흐르는 대로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정말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시간이 있는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눈(目)을 찾는다. 그것으로 자신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77쪽 ] 우리는 서로를 향해있기 때문에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난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려 했죠? 그래요, 그건 근친상간이죠.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니까요. 89쪽 베르나르가 조제에게 보낸 편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함으로 서로를 닮아가다가 한 순간 그것이 너무 끔찍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런 것일까? 소설 속 인물들은 적절치 못한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냥 그럴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끔 사강이 독자를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 소설은 1957년에 발표된 소설이라고 한다. 그 시대의 파리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사강이 꿈꾸는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맹목적 사랑, [한 달 후, 일 년 후] 에도 그 열정이 남아있는 사랑, 아니 그 시간에 소멸될까 두려워 흐르는 대로 그렇게 맡겨버리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내게 사강의 글은 그렇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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