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을 샀어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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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롯이 글을 쓰는 작가, 당연 모든 작품이 같을 수는 없다. 같아서도 안 될 것이다. 조경란을 떠올리면, 아무말 없이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만나는 듯한 느낌, 가만 마주 앉아 켜켜히 쌓아둔 슬픔을 가져갈 것 같은 사람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글 때문이리라.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소설, ‘나의 자줏빛 소파’, ‘불란서 안경원’을 참 좋아한다. 장편도 만났지만, 단편에서 느껴지는 조경란의 글이 더 좋다. 

 풍선을 꼭 사야할 것만 같았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유독 떠나는 이, 남겨진 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나를 지켜주는 이들은 언젠가 모두 나를 떠나고 만다. 죽음으로 인한 영원한 부재이거나, 사랑의 이별, 그래도 남겨진 이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어김없이 하루를 맞이하고 살아내야 한다. 

 매번 그녀의 소설에는 요리가 등장하고, 나이가 등장한다. ‘풍선을 샀어’ 에서 독일에서 돌아온 주인공은 어린 조카와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한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여성 화자가 많았던 기존의 소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두 소설, ‘달팽이에게’ 와 ‘달걀’ 이 갖는 변화는 크다. 예상할 수 없는 아니, 치유할 길이 없는 알츠아이머, 파킨슨, 치매라는 질병을 안고 사는 소설 속, 고모, 엄마, 이모.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가족의 죽음, 부모를 대신해 나를 키워주고 지켜주던 고모, 이모의 죽음을 말하지만, 결국 남성 화자를 통해 여자를 이야기한다. 고모라는 여자, 이모라는 여자, 그들이 사랑한 여자들에 대한 초상이다.  

 남편을 찾아 낯선 도시에 지도 한 장을 의지하며 길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형란의 첫번째 책’. 형란에게 지도는 남편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할머니가 손녀인 나를 떠나보내는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손녀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항상 결핍은 있었다. 다만, 그 전작들에서는 결핍, 그대로로 남았다. 이 소설집에서는 부재를 채울 수 있는 긍정, 희망을 보여준다.  부드러워지고, 느슨한 느낌을 받는다. 어쩜 작가 역시 삶에 대해 떠남에 대해 좀 자유로운게 아닐까 싶다. 

 
쓴다는 건 종이 위에 나를, 나의 표상 하나를 거기에 내려놓는다는 게 아닐까요. 이것은 보잘것없는 지도 한 장에 불과하지만 이 얇고, 가벼운 한 장 종이 위에 나는 나의 첫번째 표상을 내려놓았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첫번째 책입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단 한 권의 책과 조우할 수 있듯이 이 지도 또한 누군가와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1월의 편서풍과 7월의 무역풍 속에서 우리는 간은 바람과 같은 기후로 살고 있듯. 우리의 은밀한 의식은 이 한 페이지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119~120 쪽

 인간의 고독, 우울함, 내면의 출렁임을 하나 하나 풀어나가는 ‘밤이 깊었네’, ‘마흔에 대한 추측’은 가끔씩 소리 내어 웃거나 울고 싶은 우리네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소설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일에서 니체를 공부하고 돌아온 이도 독일로 사랑을 찾아 떠나는 이도 홀로 남겨졌지만 우울을 이겨내려는 몸짓들도 다르지만 하나의 모습이다. 고립되지 않고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려 애쓰는 흔적들이 조경란의 변화인지 모른다.  서른을 노래했던 작가, 이제 그녀는 마흔을 노래한다. 치열한 삶, 둔탁하면서도 날카롭던 그녀의 글을 떠올리기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떻게 할까.

 그녀의 책을 만나면서 나 역시 내게 올 마흔이라는 초상을 그려본다. 모나지 않기를, 혹여 두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나만의 풍선을 기억하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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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인간 -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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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꿈/ 악몽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남들의 삶의 체험을 꿈/악몽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란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그들의 희망이 너무도 높아서 꿈이라는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책을 열면 만나지는 문장들이다.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1973년의 기록들. 그러나 그 기록은 35년 전의 기록뿐이라고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만큼 이민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게  중심, 경계의 안이 아닌 밖에 존재함을 알기 때문이다. 
 
 한 남자의 이민 이야기(그는 모든 이주노동자이다)를 시작하여 유럽 각국의 실정, 그들이 타국에서 견뎌내는 환경, 그들의 생활을 통해 알 수 있는 사회현상을 기록한다. 그 시절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시절의 경제, 유럽의 시장 경제를 알지 못한다. 다만, 한국에서도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일자리를 찾아, 꿈을 찾아, 외국으로 향한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조국이 아닌 고향이 아닌 타국 타향에서의 삶이 어떠할 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 주변에서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는 그들, 35년 전 그들을 만난다.
 
 자본주의 윤리에 따르면, 가난이란 개인이든 사회든 기업에 의해서 구제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기업은 생산성이라는 척도에 의해서 판단되며, 이 생산성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가치가 된다. 28쪽 정말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게 자본주의일까. 그렇다면 왜 이토록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까.  이민노동자들은 귀중한 경제적 자원이었다. 꿈을 찾아, 국경을 넘고 일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 검사에 검사를 받고 드디어 합격자가 되어 기차에 몸을 싣는 많은 사람들. 그들은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당당한 귀향을 소망한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악조건이었다. 좁은 잠자리, 반복되는 단순 노동, 본국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 채, 변두리의 삶이 된다. 

 ‘정상적인’것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경우는 그 반대가 되는 행동, 즉 ‘비정상적’이며극단적’이거나 혁명적인 행동들을 통해서이다. 그 정상적인 것이 이렇게 해서 그 정상성이 박탈되어 버리고 나면,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라는 인간 고유의 느낌은 그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그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역사적인 순간 전채로 확장되어 나간다. 106쪽 부당한 대우를 받음을 알았을 때, 상사나 사회에 요구 조건을 말해도 무시당한다. 그러나 결코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은 그들을 기다리는 고국의 부모 형제, 사랑하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글과 함께 한 사진은 한 편의 다큐다. 내일을 희망하고 돌아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진 속, 메마른 표정에 담겨있다. 그 눈빛을 그 표정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강자라는 이름으로 고용주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저임금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불법체류자들을 우리는 고용한다. 그들에게 어떤 복지도 어떤 약속도 해주지 않는게 우리 사회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부끄러운 모습을 마주한다. 이 책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아니, 실제 기록을 통해 무엇을 호소하는가. 도시로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 결국 사라지는 농민들, 1970년대 유럽의 모습은 21세기의 현재 많은 개발 도상국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기에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동시에 실제 그들의 삶의 한 컷은 끔찍하기도 하다. 

 그 시절 새로운 희망의 땅에 첫 발을 내디딘 누군가가 말한다. “여기서는 땅바닥 위에서 금덩이를 주울 수가 있대. 나는 이제부터 그걸 찾기 시작할 걸세. ”그 도시에 온 지 2년이 되는 친구가 그 말에 대답했다. “그건 정말이야. 그러나 그 금덩이는 굉장히 높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왔기 때문에, 땅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아주 땅속 깊이깊이 박혀 버렸다네” 72쪽 땅속 깊이깊이 박혀 버린 금덩이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인간적인 대우,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함께 이 사회에서 먹고 자고 배우고 생활할 터전을 마련해줘야 한다. 악몽이 아닌 진짜 꿈을 꿀 수 있더도록, 경계의 밖으로 몰아세우지 말 것이며, 경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이제 동료이며 이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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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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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백일몽이 아니라, 연결입니다. 현실과 연결되거나 혹은 다른 책과 연결됩니다
 
 과연 그랬다.한 권 한 권 그의 책을 만나보니 저 글귀가 맞춤이었다. 김연수의 책은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김연수라는 원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김연수라는 원은 결코 완전한 원이 될 수 없다. 또한 독자는 김연수라는 원이 그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계속 원을 향하여 나가기만을 희망한다. 혼란스러운 7번 국도를 여행하고 스무 살을 만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7번 국도에서 만난 그들을 이 단편집에서 만날 수 있을꺼라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도 책에서 만나면 실제의 그것보다 조금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현실에서 찾지 못한 이상을 우리는 소설에도 찾기도 한다. 아마도 작가 김연수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9편의 소설내내 작가인 화자가 등장한다. 김연수이거나 그의 그림자이거나. 다시 말하면 그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좀 더 과감하게 좀 더 직설적으로 세상에 말을 건다.

 유머로 위장하여, 궤변에 궤변을 이어가며 자신이 겪은 스무 살을 회상한다.  <마지막 롤러코스터>, <뒈져버린 도플갱어>를 통해 현실에 살면서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젊음을, <죽지 않는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연작에서 그는 7번 국도의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그들을 부활시킨다.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렇기에 그는 소설속에서라도 죽은 자들을 살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이미 많은 이들에게서 죽은 자로 기억된 그들을 잊지말라고 당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하게 온전한 그들이 아닌 결핍투성이인 그들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불안전한 스무 살에 대한 아련함도.

 그는 말한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정말 내게도 그랬다. 설렘과 기대로 시작된 20대의 첫 해, 열정도 없이 미흡하고 모자란 실수 투성이로  어떤 즐거움도 안겨주지 않았던 나의 스무 살, 그 이후는 그저 20대의 나머지로 기억된다. 작가 김연수가 겪었던 그 스무 살과 같은 시대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스무 살이란 형태는 달라도 본질적인 형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싱그러운 나이, 청춘으로 대표되는 나이, 그러나 결코 눈부신 아름다움이 아닌 스무 살에 대한 자화상이다. 다른 듯, 같은 스무 살을 지나온 모든 이들의 자화상. 스무 살을 기대하는 어떤 이에게는 스무 살을 연결해주는 터널이 될까.  지나간 스무 살, 이제는 내게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곱절의 나이. 작가 김연수는 내년에 그 곱접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그는 세상에 내놓을 마흔을 이미 준비해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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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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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날개에 풋풋한 모습의 김연수처럼 소설 7번 국도는 낯설었다.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작가의 초기작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금의 김연수가 아닌 10여전의 김연수를 만나는 일, 약간의 흥분과 설렘이 있다. 7번 국도라는 매개체로 작가 김연수는 독자에게 지도를 펼치게 한다. 그러나 7번 국도의 여행을 따라가는 것은 적지 않은 인내를 요한다.
 
 누구에게나 그만의 트라우마가 있기 마련이다. 삶을 노래하고 한 여자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재현, 우연한 만남으로 운명처럼 다가와 그들의 인생에 한 분기점이 되어버린 화자, 재현이 사랑한 여자 서연, 자신만을 위한 포근한 공간을 원했던 세희, 그들이 꿈꾸던 7번국도, 지금보다 젊었던 그 어느 날, 나 역시 7번국도를 지났던 추억이 있다. 그 시절, 참 열정적이었던 모습이 스쳐지난다.

 비틀즈, 기형도, 팝송, 낯선 시, 그리고 조각 조각 나뉘 놓은 퍼즐로 이어지는 이야기. 과거로 현재로 이어지는 재현과 나의 만남, 언제나 등장하는 7번 국도. 재현에게 서연은 그 자체가 트라우마다. 사랑했던 여자, 이제 존재하지 않는 여자. 그 자리를 세희는 결코 대신할 수 없다. 그들에게 7번 국도는 어떤 의미였을까. 죽음이 함께 했던 그곳은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노래하게 했는가.

 소설은 사실 모호했고 난해했다. 이유도 모르게 은희경의 <그것은 꿈이었을까>가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안개속을 걷는 듯한 느낌. 재현의 슬픔을 토해내는 소리가, 세희가 스스로를 못견뎌하면 그리워하는 일본 아버지, 외계인과 수신하는 카페 7번 국도 주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끝내 자살하고 마는 7번국도씨라는 인물. 90년대를 살고 있는 화자를 비롯한 주변 인물은 80년대를 이어온 상처를 이제 버리고 싶다. 7번 국도에 그들의 슬픔과 상실를 토해내고 자유롭고 싶어한다.  망각을 위한 여행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문학적 폭이 좀 더 넓었더라면, 김연수가 살짝 비틀어 수록한 작품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더라면 아마도 이 책에 더 빠져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듯 김연수는 자신의 시대를 껴안고 사랑한다.

사람은 모두 은어와 같은 것이다. 세희야, 넌 아느냐? 동풍이 불고 나면 다시 서풍이 불어온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지. 네가 나를 떠났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 것처럼 어차피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은 한 번은 그렇게 죽게 된다. 하지만 벗어난 자리도 바로 너의 자리이고 돌아온 자리도 바로 너의 자리이다. 난 이제 곧 죽게 된다. 하지만 이 끝없는 윤회 앞에 도대체 죽음이란 없다. 불생불멸, 그 무엇도 없다. 숨결 없이, 그 본성으로 숨쉬는 단 한 가지, 그것말고는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 본문 202쪽. 세희의 아버지가 세희에게 들려주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삶에 대한 답이 아닐까.

 책을 덮고 다시 한 번 7번 국도를 검색해보고 주절 주절 중얼거린다. ‘동풍이 불고 나면 다시 서풍이 불어온다.’ 주문을 외듯 자꾸만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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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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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하나, 실상 부모가 되어서는 부모보다는 자식만을 챙기게 된다. 어리석은 줄 알지만 자식이 부모보다 항상 한 발은 더 가까이 있는 듯 하다. 품안에 자식이라고 하지만 부모는 늙은 자식도 언제나 안타깝고 안쓰러운 존재인 것을 왜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걸까. 신경숙의 신작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년)를 마주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녀의 글은 <깊은 슬픔>, <깊은 숨을 쉴 때마다>, <그는 언제 오는가> 이처럼 제목부터 메마른 떨림을 이야기 한다. <엄마를 부탁해> 내겐 이제 누군가에게 부탁할 엄마가 없다. 다만 신에게 엄마의 영혼을 부탁할 뿐이다. 

 언제나 손 내밀면 잡아주고 듣기 싫은 파열음으로 화를 내도 묵묵히 다 들어주는 엄마,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다 내어주고 빈껍데기로 살면서도 언제 그 껍데기라도 자식이 필요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엄마, 눈물이 난다. 자꾸만 눈물이 난다. 그런 엄마를 잃어버렸다. 잘난 자식 중 어느 하나 상경하는 부모를 마중할 시간이 없어 그만 아버지 손을 놓진 엄마는 어디에도 없다.

 정갈하고 맑은 분, 흐린 판단을 하지 않을 분으로만 알았다. 늙어짐에 쇠약하고 정신을 서서히 놓고 계심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남편도 딸도 내심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다. 큰 아들 처음 방을 얻어 살던 집, 며느리를 들이고 그 아들이 내 집 마련했던 동네 시장 어귀에서 엄마를 보았다는 연이은 제보에 자식들은 그 시절을 떠올린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셨던 모습, 빠른 손놀림으로 집 안을 빛내주셨던 엄마. 

 간절하게 엄마를 찾기를 바랐다. 제발 소설 속에서 엄마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주기를 바랐다. 아니, 소식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작가 신경숙은 끝내 가슴속에 고인 길고 긴 울음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고요하고 담담하게 엄마와의 추억을 엄마의 지난 날을 이야기하게만 했다. 아들의 소리를 통해, 남편의 소리를 통해, 딸의 소리를 통해. 자식에게 든든한 지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모습, 딸이 쓴 소설을 읽고 싶어했던 엄마의 간절함, 바람처럼 세상을 향해 떠돌던 아버지의 몫까지 살림을 도맡았던 모습을 회상한다.

 아내의 손은 무엇이든 다 살려내는 기술을 가진 손이었다. 이 집은 짐승이 잘 되지 않는 집이었다. 아내가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개를 얻어다 기르면 새끼 한 번 못 받고 죽어나갔다.  (....) 이 집은 개는 안된다고 당신의 누님이 일렀으나 아내는 다른 집에서 막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를 눈을 가린 채 데리고 왔다. (...)그리 데려온 강아지는 마루 밑에서 아내가 주는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를 다섯 배 여섯 배 낳았다. (...) 아내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풍성하게 자라났다. (...)아내의 손길이 스치는 곳은 곧 비옥해지고 무엇이든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었다. 160~161쪽

 남편이 기억하는 아내의 손, 자식들이 기억하는 엄마의 손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생명을 만드는 손이었다. 어디서든 모든 자식들을 감싸고, 요술 방망이처럼 엄마의 손을 거치면 완전하게 돌아오는 살림살이들, 지친 마음 달래는 약 손.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드린 적이 있는가. 고단한 삶을 투정이나 부리고 짜증 섞인 말투로 쏟아내기나 하는 우리네 자식들.

 내가 엄마로 살면서도 이렇게 내 꿈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을, 나의 소녀 시절을, 나의 처녀 시절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데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던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까. 엄마는 엄마의 꿈을 펼쳐볼 기회도 없이 시대가 엄마 손에 쥐여준 가난하고 슬프고 혼자서 모든 것과 맞서고 그리고 꼭 이겨나갈밖에 다른 길이 없는 아주 나쁜 패를 들고서도 어쩌든지 최선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일생이었는데. 난 어떻게 엄마의 꿈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을까. 261~262쪽

 정말 그랬다. 엄마는 언제나 엄마여야만 했다고. 소녀도 여자도 아닌 그저 엄마로만. 참으로 잔인한 마음이다. 우리들 모두의 페부를 찌르는 글을 작가 신경숙은 어쩜 이리도 차분하게 써내려 갔을까. 엄마를 잃은 상실도 분노도 흥분도 그녀의 글에서는 깊은 숨을 내쉬게 한다. 언제나 그리운 엄마, 책을 덮고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다.  이제 들을 수 없는 엄마의 목소리, 이제 잡아볼 수 없는 엄마의 손이 그리운 날들이 연일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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